2024
<올해의 작가상 2024> 기획의 글
이주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올해의 작가상》은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이 공동으로 운영해 온 수상 제도이자 후원 프로그램이다. 2012년부터 해마다 작가 4인을 선정하여 신작 제작 및 전시는 물론 국제 활동을 위한 지속적인 후원을 제공함으로써 한국 현대 미술의 가능성을 제시해 왔다. 10주년을 계기로 이루어졌던 제도 개선은, 작가의 작품론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이를 다양한 채널로 전개함으로써 깊이를 더하고 파급력의 제고를 꾀했다.
《올해의 작가상》에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른다. 한 작가에게 ‘올해의’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무엇이 그 수식어를 얻을 자격을 부여하는가? 여타 분야에서 연례적으로 개최되는 수상 제도들의 경우 대개 당해 연도의 주요 성과를 갈무리하며 대상자를 선정하는 반면, 《올해의 작가상》은 조금 다르다. 1년이라는 시간적 단위를 명백히 드러내면서도 그 판단이 오로지 그 해에 관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기에서 ‘올해의’라는 단어는 단순히 산술적인 시간이 아닌, 그의 작품이 오늘날 갖는 의미, 곧 ‘동시대성’ 내지 ‘당대성’의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올해의’라는 수식어는 한 작가의 관점, 태도, 방법이 오늘날 얼마나 유효한 메시지를 던지는가를 논의에 올린다. 이 전시에 유달리 많은 논평과 해석이 뒤따르는 이유다. 어찌 보면 《올해의 작가상》은 주의를 끌기 위해 논쟁을 자처한다.
그러나 논쟁을 협의로 바꾸어 읽을 수 있다면 어떨까. 예술은 본디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날 가능성을 품은 장소이기도 하다. 《올해의 작가상》이 ‘수상’ 제도이면서도 ‘후원’ 제도라는 이율배반적인 흐름 사이에 있음을 인지하고 면밀히 살펴본다면, 방편과 목적 그리고 실상을 가려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경쟁은 방편이고 지지는 목적이다. 그때에 《올해의 작가상》은 ‘올해 가장 주목해야 할 작가’에 대한 권위적인 기관의 선언이 아닌, 지금 이 작가에게 주목함으로써 일어날 만남과 대화를 기대하는 전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견 선언적으로 보이는 작가 선정과 전시 준비의 뒤편에는 미술관은 물론 운영위원, 추천위원, 심사위원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치열한 고민과 협의가 실재한다. 전시는 다양한 사람들을 맞이하고, 관객들의 질문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전달한다. 경합 끝에 나홀로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닌,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를 밀어내려는 것이 아닌,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차이를 간과해 버리는 것이 아닌, 오늘을 위한 협의의 장으로서 기능할 때, 《올해의 작가상》은 비로소 그 본연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다만 전시를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 협의의 결과가 좀 더 포용적이기를, 좀 더 많은 이들을 위한 것이기를 기대할 수 있다. 2024년도 전시 작가로 선정된 권하윤, 양정욱, 윤지영, 제인 진 카이젠은 세계를 얼마나 다층적이고 풍요롭게 이해할 수 있는지 우리의 능력을 시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증상으로서의 조각
윤지영의 조각은 감추어진 원인의 결과다. 일차적으로 이 진술은 윤지영의 작품이 조각의 문법을 십분 활용한 수많은 사전 선택의 결과임을 나타낸다. 한편 이 진술은 그의 조각이 어떤 사연을 품고 있음을, 혹은 내밀한 마음의 작용임을 드러낸다. 형식적으로든 내용적으로든 감춰진 부분은 작품의 이해에 무척 중요하지만, 결코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조각 전체가 흔적 기관처럼 작동하며 보는 이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작가는 “개인이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 그리고 더 ‘나은’ 상태를 위한 ‘노력’”을 작품으로 만들어 왔다. 작품을 촉발시키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무언가에 대한 ‘불편감’이다. 이 불편은 개인의 의지에 반하여 행사되는 힘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잘 보이지는 않더라도 존재하는 기만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에 따른 개인의 반응은 몸 안팎으로 전개된다.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숨을 몰아쉬게 하고, 잘못된 믿음일지언정 간곡한 바람이 무릎을 꿇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윤지영의 작품은 필연적으로 바깥에서 주어진 것과 안에서부터 발현되는 것의 상호 작용을 다룬다. 조각이, 저 안쪽까지 속속들이 찔려 있는 덩어리, 견디다 못해 찢어지고 부서진 물질, 모든 기력을 소진한 잔여물의 모습으로 관객 앞에 출현할 때, 잊고 있던 통각이 상기된다.
만일 우리가 이 외부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면, 개인이 ‘더 나은’ 상태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신작 〈내장 마음〉에서 작가는 소원을 빌며 혹은 소원 성취에 감사하며 바치는 사물, 곧 봉헌물에 주목한다. 서로를 위하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담긴 물질로 떠 낸 작가의 두상, 행복에 대한 바람을 담아 빚은 신체 조각은 일종의 봉헌물이다. 앞선 작품들에서 끝내 사라지던 물질은 이제 가소성, 곧 외부의 작용을 수용하고 스스로 변화하는 능동적인 힘을 가진 것으로 탈바꿈한다. 형태와 물질에 무관하게 친구들의 마음이 전해지고 간절한 기원을 담은 사물이 마음을 위안하듯 말이다. 작품은 나를 강제하는 힘에 대한 진술로부터 나를 지탱하는 힘에 대한 증언으로 이행한다. 고립의 시간을 지나온 조각에 다정한 진심이 녹아든다.
증언하는 가상 현실
권하윤에게 가상 현실은 어떤 사건의 존재를 증거하는 수단이다. 이것은 이율배반적인 사용 방식일지도 모른다. ‘현실과 같은 가상’이라는 말에 담긴 모순은 물론, 사진과는 달리 이미지가 실재를 담보하는 것이 불가능한 매체를 통해 ‘있었음’을 입증하려는 일 또한 부조리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집요한 조사와 연구를 디딤돌 삼아 실제와 가상의 경계를 횡단함으로써 새로운 기억 경험을 산출해 내고자 한다.
가상의 시공간을 빌리면 그동안 경험할 수 없었던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 예컨대 그것은 접근할 수 없는 장소, 타인의 마음 속에만 살아 있는 기억, 또는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사건일 수 있다. 그리하여 〈증거부족〉이 어떤 증거도 제시할 수 없는 이민자의 절박한 사정을 3D 애니메이션으로 입증하고자 분투한다면, 〈489년〉은 가상 현실을 매개로 DMZ라는 접근 제한 구역에 접속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의 신작 〈옥산의 수호자들〉 또한 문자가 존재하지 않기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대만 원주민 부눈족의 기억을 담고 있다. 여기서 가상 현실은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어 지금껏 경험되지 못한 것을 구현함으로써 그 경험을 공동의 기억으로 확장시킨다.
작품을 통해 우리는 국가나 적처럼 거대한 관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구체적인 관계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489년〉이 보여 주는 DMZ의 아름다운 자연이나, 국가 간의 갈등을 넘어선 〈옥산의 수호자들〉 속 우정처럼 말이다. 이렇듯 구체적인 현실의 모양을 드러내는 일은 체제 선전을 위해 세워진 가짜 마을 〈모델 빌리지〉의 전략을 역전시킨 것으로서, 가상 현실에 또 다른 사용 가치를 부여한다. 기록되지 않아 끝내 기억도 사라지고 말 어떤 세계를 위하여 작가는 부족한 증거 속에서 가상의 마을을 세운다. 그리하여 완전히 건너려면 489년은 걸릴 해자를 넘어가고자 한다. 작가의 인도를 따라 또 다른 현실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 우리의 기억은 한층 풍요로워진다.
움직이는 사람들
양정욱은 움직이는 조각을 만든다. 저마다의 리듬으로 움직이는 조각들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곤 한다. 하지만 핵심은 그 움직임이 비롯된 이야기에 있다. 양정욱의 이야기는 대개 일상의 한 장면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렇다고 순전한 목격담은 아니다. 이야기 속에는 작가의 상상과 바람이 깃들어 있다. 작가가 삶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무언가가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가 다시 반복하는 움직임이 된다.
어떤 삶의 모습을 발견하고자 하는 바람 외에 또 다른 바람이 작품에 담겨 있다면, 그것은 전하려는 마음이다. 작가는 자신의 방법론을 ‘아상블라주’라고 말한다. 사물을 연결하여 본래의 용도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공사장 인부들이 콘크리트 벽에 새겨 넣은 전화번호처럼, 무언가 설명해 보겠다며 주위에 널린 사물을 집어 되는대로 만들어 낸 지도처럼, 작가에게 조각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용도가 변한 사물과 다름없다.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조각일지라도, 이 전환의 기술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과 정성이다. 아끼는 마음이 있어 정성을 들인다면 무엇으로든,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발견하고 싶은 삶의 모습과 그것을 전하려는 바람에서 만들어 낸 이야기, 그리고 조각은 평범한 일상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들 ‘동화’가 된다.

양정욱의 동화는 균형 잡기의 미학을 전한다. 작가에게 균형이란 정지된 상태이기보다는 기울었다가도 복구되는 끊임없는 과정 자체다. 전시는 이 변화의 과정을 인물에 대한 작품과 풍경에 대한 작품으로 나누어 보여 준다. 인물에 주목한 작품이 누군가의 몸짓에 누적된 시간을 그가 되어야만 했던 무엇으로서 ‘직업’을 단서 삼아 그려 낸다면, 풍경에 대한 작품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긋나면서도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담는다. 직업에 따라 몸짓이 달라지듯, 상대에 따라 자신이 변해 가듯, 바람이 사물의 용도를 바뀌게 하고 정성에 의해 기술이 발전하듯. 고난과 희망 사이에서 부단히 애쓰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수없이 반복되며 삶을 이루어 나간다. 이것이 바로 그의 조각이 계속해서 움직여야 하는 이유다.
수행하는 섬 Performing Island
제인 진 카이젠의 연작 《이어도(바다 너머 섬)》은 약동하는 섬을 그린다.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연작 전체를 선보이는 《이어도(바다 너머 섬)》은 총 일곱 개의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등을 맞댄 중앙의 두 영상을 축으로 다섯 개의 영상이 나선형을 그린다. 주변을 연결하며 확장하는, 혹은 끊임없이 중심으로 회귀하는 듯한 스크린의 역동적 배치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 힘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게 한다.
《이어도(바다 너머 섬)》의 역동성은, 다양한 주체들의 몸짓이 충만한 화면으로 이어진다. 바다가 품은 역사적 상흔을 달래는 잠수부의 춤과 심방(무당)의 노래(<제물>, <잔해>), 섬을 파괴하는 개발의 논리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의 몸짓(<이 질서의 장례>), 바다와 하나가 되어 살아온 해녀들의 손길(<할망>),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뛰노는 아이들(<수호자들>), 이 모든 행위의 중심에서 고동치는 바닷속 생물들과(<어귀>) 땅속 깊이 남겨진 용암의 흐름까지(<심>). 섬과 바다는 그 자체로 퍼포먼스의 현장이다. 영상들은 작가의 다학제적 연구와 지역 공동체와의 오랜 협력을 바탕으로 제주 고유의 자연과 해양 문화, 무속 의례, 역사와 기억 그리고 오늘날의 쟁점을 포괄적으로 담아낸다.
이윽고 영상들은 서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그들을 잇는 것은 갓 태어난 아기의 기저귀부터 망자의 관을 묶는 끈에 이르기까지 생애 전반에 걸쳐 사용되던 전통 직물 소창이다. 바위에 앉거나 폐허를 행진하거나 바닷속을 헤엄치면서, 흰 천을 매만지거나 풀거나 또는 흰 천으로 몸을 엮는 이들 사이로 소창은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 새로운 세대의 저항과 옛사람들의 앎에 다리를 놓는다. 서로 다른 주체들을 잇닿아 놓음으로써 대안적 계보의 발견과 새로운 관계 맺음의 가능성을 정초한다. 이렇듯 《이어도(바다 너머 섬)》은 의례와 퍼포먼스 사이에 놓이는 몸짓 언어를 바탕으로 여러 주체를 연결함으로써 인식의 확장과 전환을 추동한다는 점에서 수행적이다.
이 연결의 끝에서 《이어도(바다 너머 섬)》은 ‘제주’라는 특정한 장소를 수많은 다른 장소들과 겹쳐 놓는다. 작품 제목인 ‘이어도’는 제주의 집단적 상상 속에 존재하는 섬으로, 바다 너머 어딘가에 잠재된 현실이자 도래할 장소다. 그 섬인 동시에 모든 곳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이어도가 전하는 이야기가 마치 세계를 끌어안으려는 듯 가없이 이어진다.
작가들은 고유한 관점에 따라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매체를 변화시킨다. 전시를 통해 우리는 이들이 가진 방법론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예컨대 진실을 전하기 위해 가상의 공간으로 증거를 제시하는 권하윤과, 바라는 삶의 모습을 전하기 위해 꾸며 내기를 서슴지 않는 양정욱의 방향성이 얼마나 다른가? 혹은 제인 진 카이젠이 세계를 아우르기까지 확장하는 나선을 그려 나가는 가운데, 가장 내밀한 깊이에 다다름으로써 연대하고자 하는 윤지영의 방향성은 또 어떻게 다른가? 윤지영과 양정욱이 조각이라는 언어를 다루는 방식은? 제인 진 카이젠의 작품과 권하윤의 작품이 구축하는 몰입의 환경은? 그리하여, 이들의 시선을 빌려 마음을, 기억을, 이웃을, 세계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까? 이런 기대 속에서 전시는 대화를 시작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