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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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CV
2014
‘White-시선’, 소마드로잉센터, 한국
2013
‘대화법-협업프로젝트’, 홍은예술창작센터 갤러리H, 한국
‘WINDOW’, 스페이스 15번지, 한국
2012
‘White-2012’, 아트스페이스 갤러리 정미소, 한국
2011
‘The Veil’, 플레이스막, 한국
2010
‘Umgebung-주변’, 샘터갤러리, 한국
‘White-SeMA신진작가전시지원프로그램’, 덕원갤러리, 한국
2009
‘Nimmst Du richtig wahr?’, 달렘 예술문화협회, 독일
2008
‘Ich sehe was, was du nicht siehst’, 주독한국문화원, 독일
<주요 단체전>
2014
‘조각에 대한 작은 생각’, 아트스페이스 정미소, 서울
‘사진과 미디어: 새벽4시’,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3공사-1’ 홍은예술창작센터, 서울
2013
‘WHITE’ 신세계갤러리, 광주
‘간객(間客)-물레아트페스티벌’ 문래예술공장, 서울
‘르포르타주’, LIG아트스페이스, 서울
2012
‘제12회 송은미술대상전’ 송은아트스페이스, 서울
‘이미지의 역습’, 국립현대미술관 고양창작스튜디오, 서울
‘SeMA 청년 2012-12개의 방을 위한 12개의 이벤트’,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1
‘사건의 재구성’, 아트 스페이스 갤러리 정미소, 서울
‘TV 코뮨’, 백남준 아트센터, 경기도 용인
‘2011서울,도시탐색전’,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0
‘SeMA2010-이미지의 틈’, 서울 시립미술관, 서울
‘눈먼자들의 도시’, 보안여관, 서울
‘Maden Picture’, 아라리오갤러리, 천안
2009
‘O.T’, 루드빅스부르크 시립 미술협회, 루드빅스부르그, 독일
2008
‘Frischekunstmarkt-Artfair’, Eberhardpassage, 슈투트가르트, 독일
2007
‘Evolution’, 미술협회, 루드빅스부르그, 독일
2006
‘INBETWEEN-아시아-유럽 현대미술제’, 포츠난 시립미술관, 폴란드
2005
‘Fruehbluete-Gesamtausstellung2006’, Bunker, 슈투트가르트,독일
Critic 1
‘다시’ 메타적으로 인식하기,
그리고 조작적 재현을 백지화하는 재현
심상용(동덕여자대학교 교수)
2008년부터 시작된 하태범의 《White》 연작은 두 종류의 재앙 사이에서 야기되는 진실과 진실의 억압을 문제 삼는다. 자연이나 문명적 요인으로 촉발되는 1차 재앙은 그것의 매개과정에서 2차 재앙으로 확장된다. 태풍이나 쓰나미, 화산폭발 같은 자연적 요인이나 전쟁, 테러, 방사능 누출 같은 문명적 요인이 1차 재앙을 구성한다. 2차 재앙은 1차 재앙을 보도하는 억압적이고 기만적 태도에서 야기된다. 오늘날은 전자(前者)보다 그것을 매개하는 매체가 더 재앙적인데, 그것이 《White》 연작이 주목하는 바다. 이 시대의 진정으로 폭력적인 사건은 재앙이 아니라, 재앙을 취급하고 정의하는 미디어 체계라는 것이다.
오늘날 고도의 미디어 기술은 정교하고 입체적인 방식들을 동원해 사건의 현장을 재현하지만, 과도한 현장감과 그것을 구성하는 과잉의 데이터들은 오히려 사건에 대한 주체의 개입을 사전에 봉쇄한다. 그러므로 인식과 해석이라는 사유의 역동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덜어내고, 최소화하고, 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태범은 형태를 단순화하고 컬러를 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사건을 그것의 스펙터클화되고 소비품목화된 변형과 변성으로부터 구제해낸다.
하태범의 세계는 재앙적인 사건, 자연재해, 전쟁, 사고의 현장을 재구성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미디어에 노출된 테러, 범죄 현장 등의 보도 사진을 수집하고, 종이, 플라스틱 등을 사용해 흰색의 오브제로 재현한 뒤, 이를 처음의 보도 이미지와 같은 구도로 촬영한다. 보도사진의 원 이미지를 흰색의 오브제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컬러와 디테일은 거의 생략되는데, 이 급진적인 누락과 재구성에 의해 사건은 사건 자체로서가 아니라 해석된 사건, 라캉적 표현방식을 따르면 ‘사건 a’화된 사건이 된다. ‘사건 a’화된 사건은 즉각 보도사진의 원 이미지에 내재하는 은폐된 전략기제와 그 기만적인 조작을 작동중지시킨다. 자연과 문명의 비참성을 버라이어티 쇼로 번역해내는 구역질 나는 스펙터클리즘의 문법을 백지화하는 것이다.
재앙조차 욕망의 제의로 사유화하는 매스미디어의 은폐의 정치학과 소비주의에 대한 대응인 하태범의 ‘백지화’로서의 사건에서는 심지어 부서진 건축 잔해들에조차 ‘고요’가 깃든다. 최소한의 미동(微動)도 부재하는 이 고요로부터 과도한 현실이 의도적으로 누락하는 어떤 “비현실성”,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는 느낌, 곧 라캉적 의미의 ‘응시’의 경험을 갖게 된다. 이로 인해 자연과 문명의 ‘눈에 보이는 명백한’ 비참성의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실체에 대한 인식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확실한 주체로 믿는 ‘고정된 코기토의 주체’의 일관된 인식을 일순간 흐트러뜨림으로써, 실체로부터의 응시에 노출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이 응시에 의해 미디어가 덧칠한 왜곡된 해석이 사건으로부터 분리되어 떨어져 나간다. 이런 맥락에서 사건의 미디어적 재현을 다시 재현하는 하태범의 방식은 미디어의 기만을 폭로하고 사건 자체를 직시하기 위한 재현의 극복과정이자 주체적 해석의 복원이며, 사건 너머 실체의 인식으로 나아가는 행보인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인 보도나 취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도나 취재 자체가 이미 고도의 정치적인 해석행위인 것이다. 미디어화되는 순간 사건은 과대하거나 과소하게 평가된다. 모든 언술은 이미 해석의 산물이다. 객관성은 자주 조작을 은폐하는 언술에 지나지 않는다.
미디어화된, 곧 덫에 걸리고 억압된 진실에 대한 하태범의 문제의식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일관되게 지속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피에타》, 《소년》, 《소녀》 등으로 명명된 최근의 인물상들에는 그는 연출된 “슬픔과 연민”, 참담한 진실의 각색에 주목한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느 흑인 아이”를 볼모로 내세우는, 인도주의를 가장하는 반인도주의가 비단 구호단체들만의 진실인 것은 아니다. 그것들-구호단체들-은 동전 몇 잎을 내는 것으로 이 행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비참한 범죄들로부터 면책과 면죄의 특권을 누리도록 기만하는, ‘거대한 무감각의 체계’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전쟁과 테러, 각종 사건과 재해, 빈곤과 소외는 지금도 진행 중인 현실이지만, 너무나도 많은 폭력들이 미디어를 통해 익숙해져서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폭력에도 무감각해져 버린 것은 아닌지…” (하태범)
하태범의 세계는 두 가지 점에서 기대감을 갖게 한다. 첫째, 그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역사적, 문명적, 사회적 문제를 바라보는 메타적 인식의 기반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보도기사나 사진을 통해서긴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시선을 지구촌의 도처에서 야기되는 사건 사고들과 그 비참성에서 띠지 않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쓰나미에서 아프리카의 기아에 이르기까지 그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지구촌의 아픔에 등을 돌리지 않는다. 역사의 오류와 문명의 비참성에 대한 인식 안에서 인간의 보편적 실존을 직시하는 것, 사랑과 심오한 연대의 마음으로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한국과 한국의 예술이, 더 나아가 세계와 세계의 예술이 필요로 하는 사유의 토대요 화급한 부름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가? 물론이다. 하지만 그 반대 또한 사실이다. 가장 세계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세계가 지금 길을 잃었다는 것이다. 사랑의 인식과 심오한 연대의 지향이야말로 잃어버린 세계로 하여금 길을 찾도록 인도하는 ‘메타-지도’인 동시에 추동력이다.
둘째는 하태범이 현 세계가 어떻게 사랑의 인식과 심오한 연대를 상실했는가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시대는 보아야 하는 대상을 상실했는데, 왜냐하면 보는 방식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가깝게는 근대기의 격랑을 거치는 동안 세계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방식이 침습 당했고, 그 결과 세계 자체도 침습 당했다. 범위를 좁혀 우리 미술을 보자면, 서구미술의 유입에 의존해야 했던 근대사적 맥락 안에서, 비록 그것이 불가피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세계의 인식과 해석, 언어와 표현의 차원이 제한되거나 왜곡되었다. 문제는 차용한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한, 정확히 하자면 타자화된 눈으로 세계를-우리 자신을 포함해- 인식하는 한, 모방욕망의 몸부림, 질투와 원망, 좌절의 레토릭만 난무할 뿐 결코 실체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보는 방식의 오류는 보는 대상과 해석의 오류로까지 전이되어, 결국 보아야 할 것들과 실체로부터 항구적으로 소외되는 인식의 재앙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하태범은 매스 미디어가 사람들의 보는 방식을 어떻게 조작하고, 타자화하고, 길들이고, 노예화하는가에 대해 첨예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Critic 2
하태범의 사진에 담긴 사실성에 대해
박순영(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우리는 일상에서 세상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몸소 체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공되는 정보를 수용하는 것이다. 전자는 직접적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고, 후자는 간접적이기 때문에 실제와 별개로 수용할 수 있다. 현대의 사회처럼 복잡하게 체계화되어 있고 눈치채기 힘들게 구조화되어 있는 경우,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정보에 의존하는 방식을 선호하게 된다. 그 이유는 단순하게도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물론 체험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이는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라서 실제로는 어쩔 수 없는 경우이거나, 또는 그 반대로 여가시간에나 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노동과 취미를 예로 들 수 있다. 이와 달리 실제감이 떨어지고 쾌의 강도가 다소 약할 수 있지만, 정보를 통한 방식으로 뉴스나 책을 들 수 있다.1
오늘도 어김없이 뉴스에는 큰 사건이 한두 가지 다뤄진다. 뉴스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굵고 명료한 헤드라인과 함께 ‘사진(이미지)’을 주로 사용한다. 시각정보는 다른 방식보다 신속하게 전달되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뉴스의 헤드라인도 문자이기 이전에 사실 시각정보로서 전달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사건이 전달되는 이러한 방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에 의하면 정보 전달의 기능을 맡았던 이야기 예술은 신문의 등장과 함께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신문은 산업사회와 시민사회의 대표적인 매체로서 신문이 전하는 것은 ‘경험’, ‘조언’, ‘지혜’가 아닌, 새로운 의사소통 형식을 발생시켰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의사소통 형식은 정보”라고 규정한다. 이어서 정보의 원칙은 “새로움, 짧음, 이해하기 쉬움, 그리고 무엇보다 각각의 뉴스들 간의 상호연관성이 없을 것”이라고 분석한다.2 따라서 뉴스를 통해 전파되는 정보는 사건 그 자체를 단순하게 전달하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세상을 대하면서 이해한다. 이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구조화된 현대사회의 특징으로서 이를 거스르는 것은 개인으로서는 어려운 일이며,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하태범 작가의 주제는 매체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대표적인 매체로서 주로 뉴스를 다루는데, 부정적인 의미에서 비판하려는 목적은 없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에 대해 예술보다는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는 정보 전달자로서의 사회와 수용자로서의 개인 또는 공동체가 매체를 활용하는 방식과 태도를 시각예술의 형식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뉴스를 접하는 방식으로 수용할 경우, 그가 표현한 것은 한눈에 알아챌 정도로 명료하면서 직접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그 명료함과 직접성 덕분에 오히려 생각이 복잡해지고 다른 무엇인가를 감지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는 하나의 장면을 재현하면서 우리가 알아보기 쉬울 정도로 선명하게 하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선명성을 갖고 선명성을 파괴하는 것에 있다. 하태범 작가의 초기 작업에서 현재까지의 작업을 보면, 빛, 공기, 전기 등 비가시적인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쓰레기통, 벤치, 계단, 하수구 등 가시적이면서도 비가시적인 사물들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지며, 이후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매체에 대한 비판으로 옮겨진다. 지금부터 그 과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하태범은 1974년생으로 중앙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으로 대학원까지 수학하였다. 그는 졸업 논문으로 「비시각적인 현상을 바탕으로 한 작품제작 연구」를 썼고, 2001년, 그 당시 꽤 권위 있는 중앙미술대전에서 우수상을 받을 정도로 신인 작가로서 주목을 받았지만, 2002년 돌연 독일로 유학의 길을 떠난다. 그리고 8년 뒤,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국립 조형예술대학에서 조소 전공으로 대학원을 마치고 2010년 귀국하였다. 그를 처음 만난 건 그해 9월이었으니 귀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신진작가 전시 지원 프로그램’ 작가로 선정되어 개인전을 준비 중이었고, 필자는 미술관 큐레이터로서 그의 전시를 담당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하였고, 필자 또한 그곳의 프로그램 운영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이서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귀국 후 그는 사진을 매체로 한 작업인 <WHITE>연작으로 한국미술계에서 주목을 받는다. 조각 전공자이지만 화이트 연작은 사진으로 분류된다. 그가 사진을 주로 다루게 된 시기는 독일 유학 시절의 중반기라 할 수 있는 2007년 정도이다. 우선, 화이트 연작 이전의 작품인 <Ich Sehe was, was du night siehst> 연작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작성한 대학원 논문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는 방식에 관심이 많았다. 산소, 전기 등이 소재가 되었다. 독일에서도 이러한 관심을 이어갔고, 이를 작품의 형식적인 측면이나 내용에서도 개진(改進)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타지생활자가 그렇듯 그가 독일에서 받은 차별과 무시, 그리고 자괴감 등은 그에게 자신의 관심을 좀 더 본질적인 곳으로 전회(轉回, revolution)하도록 한 계기가 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반문한다. “왜 보이지 않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가.” 이러한 전회는 그가 지금까지 전개해온 여러 작업 중에서 중요한 하나의 지점을 형성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협소해진 본인을 반추하면서 존재함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심화시켰다. 시선은 본인과 같은 처지의 존재감을 갖고 있는 사물들에게로 향했다. 그것은 벤치, 쓰레기통 등 보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종의 배경이 되어버린 사물들이다. 이들은 간혹 용도에 따라 찾아지는 것들에 불과하다. 그는 이러한 사물들을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한 방식을 고안해냈다. 우선 그들을 작고 세밀하게 만든 다음, 그만큼 상대적으로 커진 도시 자연의 모퉁이에 설치해 놓고 밀착해서 취재했다. 녹까지 재현된 미니어처는 사진상에서 본래 자신의 크기로 보이게 되고 존재감을 회복하면서 배경이 아닌 주역이 된다. 시점을 달리하면 보이는 것들, 즉 배경과 사물과 장소가 존재감을 갖게 되었다. 이는 우리가 현실에서 지나치는 부분을 포착하도록 하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방식이며, 더불어 매체로서 그가 사진을 선택한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작가는 막연한 존재감에 대한 고민을 본인과 연관 짓고 새로운 표현방식과 사진 매체를 활용하여 계속해서 이어갔다. 그리고 2008년, 주독한국문화원에서 <Ich Sehe was, was du night siehst> 제목으로 개인전을 가졌다. 제목의 의미는 독일어로 “나는 당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인데, 작가의 의도로 각색해보면, “당신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것들을 나는 관심 있게 본다.”라고 할 수 있다. 말이 그렇고, 우리말로 ‘스무고개’와 유사한 놀이명이라고 한다. 하나의 개념을 찾아내기 위해 꼬리를 물면서 질문을 던지는 놀이 방식은 작가가 자신을 닮은 대상들에게 존재감을 부여하는 작업방식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의 관심을 전환시킨 또 한 번의 계기가 있었고, 이러한 두 번째 전회를 통해 화이트 연작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 접하게 된 뉴스 중 테러에 의한 사건들은 사실 작가가 공감하기 쉽지 않은 뉴스들이었다. 그는 그것이 정당한 싸움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이는 누구든 본인과 상관없다고 생각할 경우 당연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테러의 원인은 큰 정치적 이슈일 수도 있고 가족을 잃은 개인의 상실감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테러라는 것이 그 속성상 가한 자가 아니라 오히려 당한 자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3 원인과 결과는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고 때론, 결과가 원인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폭력에는 행하는 자와 당하는 자가 반드시 있기 마련인데, 이 둘의 역할과 성격은 자주 바뀐다. 그 이유는 그것이 테러든 폭격이든 똑같이 희생이 뒤따르는 폭력의 한 유형인데도 당한 자, 예를 들면, 국가와 민족과 같은 공동체가 지닌 권력의 강도나 폭력을 대하는 입장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4 여기에 하태범 작가가 주목하는 지점이 있다. 사건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양면성(Ambivalence)’이다. 이는 화이트 연작의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는 환경의 변화로 인해 위축된 자신의 이야기에서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을 보이는 자신의 태도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그 관심이 3인칭적인 관심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말하자면 남 얘기라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뉴스를 보면서 나 자신이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민해보니, 매체가 전달하려는 목적과 달리 하나의 시점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작품으로 표현하려다 나 또한 방관자적으로 사건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이러한 태도는 현대 사회인의 보편적인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까지 확장된다. 그가 볼 때, 모든 현대인과 현대사회가 그들과 동등한 한 개인으로서의 타인을 멸시하고, 하나의 공동체로서 그들과 동등한 다른 공동체를 부정할 수 있는 이유는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무관심함5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감각적인 층위의 가장 대표적인 매개체인 색을 배제6하였다. 화이트 연작은 표현방식에서 대상이나 장면이 평면화되면서 일어나는 착시현상을 사용한 점, 실제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사진을 사용하는 점은 이전 작업과 동일한데, 색에 있어서 시각적인 차이가 명확하고 내용 면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화이트 연작은 독일에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그가 말하는 무관심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작업은 용산참사를 다룬 <Tragedy in yongsan>(2010)이다. 왜냐하면 무관심함의 의미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태도를 보이는 자가 사건이 발생한 공동체에 속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숭례문이 화재로 소실된 지 거의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은 2009년 1월, 용산 참사가 일어났다. 철거세입자들이 상가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한 지 불과 25시간 만에 발생한 끔찍한 참사였다. 국가는 살기 위해 절규하는 서민을 상대로 대테러 진압작전을 수행하는 경찰특공대를 대거 투입하였다. 그러나 경찰에 대한 형사책임은 없었다. 오히려 살아남은 농성자, 그리고 그들과 별반 다른 처지가 아닌 용역업체 직원만이 기소되었다. 여론 조작을 위한 공권력의 노력과 관심을 돌리기 위한 정부의 요구가 속속 들춰졌지만, 결과(판결)에는 그리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또한, 과잉진압이니 과격시위니 하면서 사건의 본질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용산참사의 본질은 재개발 사업의 구조적 문제인 ‘뉴타운 건설’에 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국가권력은 용산4구역에 ‘도시재정비 촉진을 위한 특별법’을 적용했다. 결국 참사의 원인은 전국철거민연합의 불법 과격 시위로 돌려졌다. 대중은 뉴타운 개발이 멈출 수 있다는 우려로 용산을 애도하는 데 주저했다. 이에 대해 사회학자 주창윤은 “권력은 용산 참사를 배제했고, 대중은 회피했다”고 말한다.7 그는 조르조 아감벤이 정치와 권력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호모사케르’를 용산참사에 적용한다. 호모사케르는 권력집단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를 말한다. 그를 죽이더라도 처벌받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평민을 통해 신성한 자로 공표된 사람을 죽여도 이는 살인이 되지 않는다”8 아감벤에게 나치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이 호모사케르였듯이, 우리에게 용산참사의 희생자, 질곡한 삶의 벼랑 끝에서 최소한의 생존권 보장을 외쳤던 세입자들이 호모사케르였다. 민주주의의 역설인가. 주권자가 뽑아 통치를 일임한 대리인이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서, 권력은 자신의 통치에 반하는 주권자를 호모사케르로 지명하고 그들의 주권을 제거하는 데 정당성을 얻는다. 용산참사의 호모사케르는 불에 타 죽었지만 죗값은 저렴했고, 대중은 방관했다. 이제, 참사가 있고 6년이 지났다. 관심의 형태를 띤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험했던 일이 무색하게 그 장소에는 주차장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앞서 언급하고 하태범 작가가 말하듯이, 매체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매체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화이트연작을 보면, 작가가 다루는 많은 사건을 보면서 우선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사건에 대한 재현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사건이 무엇인지 아는 관객일 때에만 이를 눈치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매체에 실린 사진에 대한 재현이라는 것, 그와 함께 정적으로 무뎌진 느낌으로 재현했다는 느낌을 갖는다. 파키스탄이나 바그다드, 예멘, 노르웨이 등에서 벌어진 테러, 일본 쓰나미나 인도네시아 대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연평도 사건이나 도시 재개발 등 그가 다루는 모든 사진 작업들의 궁극적인 의도는 매체를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사진에 포착된 끔찍한 사건들 자체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만약 그가 추구한 바가 사건의 재현이라면, 개인적인 목적으로 타인의 비극을 사용한다거나 사실을 왜곡한다는 점, 그리고 재난 자체를 신비화한다는 점에서 도덕적인 문제가 발생하거나 비난받을 수 있으며, 사건의 효과가 재현된 표현을 압도하기 때문에 작가에게 있어서도 전략적으로 득이 될 것이 없다. 게다가 미학적 소비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9 그는 “내가 다루는 것은 언론매체이지 구체적인 사건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그가 사진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 그리고 남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신, 실제로 남들도 그렇게 본다는 사실, 게다가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건이 끔찍하면 할수록, 죽음을 드러내는 데 적나라하면 할수록 그 사건에 결부되지 않은 다른 공동체의 구성원은 더욱더 남의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매체는 이러한 습성을 잘 알기 때문에 참혹한 현장을 묘사하기 위해 더욱더 노력한다. 이러한 사실을 담기 위해 작가는 ‘화이트’를 선택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화이트’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이자 그렇게 보도록 만드는 사회구조에 대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굳이 뉴스 사진에 포착된 장면을 입체로 만드는 과정을 거치면서까지 사진이라는 매체를 결과적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진은 현실을 바탕으로 기록하고, 사진기는 빛을 이용하여 사물을 이미지로 고정시키는 장비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객관적인 재생의 수단으로서 사진은 대상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사진의 기록성은 사진의 실재성에서 기인하는데, 사실 실재성이라는 것은 우리가 갖는 사진에 대한 견고한 믿음 때문에 생겨난다. 사진의 특성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우선, 기록을 한다는 차원에서 ‘사실성’이다. 사진의 속성으로 포착한다는 것은 매우 짧은 순간에 이루어지며, 정확한 선명함을 갖고 있고, 톤의 자연스러움이 있어 철저하게 기계적인 사실성을 가진다. 두 번째로 ‘현장성’을 들 수 있다. 사진은 다른 표현이나 구상방식과 달리 사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장소로서 현장에서만 작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진은 현장을 포착하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우연성’을 가진다. 미국의 미술사학자인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는 “나는 사진을 찍고 난 후 사진에 찍힌 것과 닮은 것을 찾아낸다” 는 위노그랜드(Winogrand)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진가는 사진이 현상되기 전까지는 정확히 자신이 무엇을 찍었는지 모른다.”10고 주장한다. 사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도출해 낸 이러한 세 가지 특성 중 전부를 아우르는 것은 무엇보다 ‘사실성’이다. 그러나 사실성으로 인해 실제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진다. 베트콩 즉결처형 장면을 남긴 사진기자의 고백처럼 사진은 절반의 진실이고, 미국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 루이스하인의 말처럼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거짓말쟁이가 사진을 찍을 수는 있다.” 하지만 사진을 그리 부정적으로만 다룰 필요는 없다. 이러한 역설로 인해 예술의 영역으로 편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사실성을 통해 사실성을 파괴하면서 표현성을 획득한다.
사실적이고 정확하고, 그래서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 있다는 사진의 특성은 특정한 관점에 따라서 부정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실성의 가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진의 프로세스를 보면, 사물이 나타나면서 형태가 환기되고, 이를 통해 사물의 형식을 갖춘 상(像)을 알아볼 수 있게 되며, 그 단계를 거친 후에 사진의 형식적 상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는 작가의 개입에 의존한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사진의 과정을 이해하고 작가가 개입하는 단계에서 오히려 자신의 창조적인 상상력을 표현하기 위해 사진을 사용하였다. 과거의 사진은 단지 원하는 바를 포착하는 것으로서 당시의 어느 문호처럼 “사진을 보는 고유한 방식은 없다”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사진이 지닌 근본적인 역설, 즉 사실성을 파괴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 주관적인 표현의 매체로서 용인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디지털 사진의 발달로 인해 오히려 작가의 개입이 사진의 과정에서 우선이 되는 반전이 일어났다. 따라서 사진에 대한 접근과 해석, 그리고 사용이 다양하게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사진의 프로세스가 대상에서가 아니라 작가의 개입에서 시작한다는 점과 사진의 속성인 선명함을 통해 선명함11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이유에서 사진이 세계의 불분명함(양면성)을 드러내는 데 적합한 매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하태범 작가가 사진을 선택한 이유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하태범 작가와 유사한 형식을 보이는 사진가로 토마스 데만트(1964~ )가 있다. 형식적 유사성 때문에 간혹 화이트 연작을 그의 작품과 연관 짓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두 작가의 형식이 유사하게 보이는 이유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둘의 차이점을 분석함으로써 화이트 연작의 특성과 의미를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 우선, 제작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이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이미지를 신문이나 미디어, 혹은 인터넷에서 선택하고 이를 입체로 재현해서 사진으로 찍는다는 점이다. 둘째, 명확한 지시대상이 있고 시각적으로 매체 사진의 특성을 보인다. 셋째, 결과물이 사진이라는 점도 유사하다. 관람자의 반응을 보면, 1차적으로 평범하게 보고, 2차적으로 단서를 포착하게 되면서 재구성한 장면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데만트가 사건 자체를 다루고 있는 반면, 하태범은 사건을 다루는 매체를 다룬다는 점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마이클 프리드는 데만트의 사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람자에게 호소하지 않고, 감정이입과 같은 기회를 주지도 않는다. 해당 장면에 관해 상상의 여지를 모두 좌절시킨다. 오로지 일종의 ‘거리 두고 보기(alienated looking)’일 뿐이다.”12 이는 비평가들이 일반적으로 그의 사진에 대해 분석한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그는 나아가 데만트의 사진이 의도됨 자체를 재현하지만, 그의 사진은 “작가가 카드보드지로 만든 장소와 사물의 모형을 물리적으로 재구성한다기보다는 실제로 모든 흔적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해낸 철저하게 비어있는 장소와 사물이다”13라고 정의한다. 이제 데만트에 대한 설명과 비교해서 하태범의 사진을 논의해 보겠다. 먼저, 시선을 담는 방식을 비교해 보면, 하태범의 사진은 보는 자의 시선이 포함된 장면이기 때문에 이미 관람자가 포함되어 있어서 관객에게 별도로 호소할 필요가 없다. 또한, 감정이입 이후의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는 무대 연극의 카타르시스적인 감정 상태와 유사하다― 오히려 감정이입의 극단적 현상을 유발한다. 데만트가 사진에 ‘거리 두고 보기’의 시선을 담고 있다면, 하태범은 시선으로 하나의 장면을 덮는 방식이기 때문에 ‘닿으면서 보기(haptic looking)’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음으로, 사진에 내재된 의도됨 자체를 재현하는 점과 흔적들을 제거하는 과정은 데만트와 유사하지만, 하태범이 재현하는 의도 됨은 사회와 대중의 시선이 의도하고 있는 바이며, 그가 제거하는 것은 보는 자의 시선에 포착되기 힘든 사소한 것이거나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는 부분들이다. 다시 말해, 화이트로 덮이면서 잡히지 않는 대상이나 사물의 윤곽이라고 할 수 있다. 제거를 통해 획득하는 것에서도 다르다. 데만트는 비어있는 장소와 사물을 표현하기 위해 인간적인 사용의 증거와 흔적, 그리고 표시를 제거하지만, 하태범에게 ‘제거’는 사실 ‘덮기(Veiling)’의 다른 표현이다. 매체가 사건을 전달하는 방식이자 수용자가 매체사진을 접하는 태도로서 그들의 시선을 의미하는 화이트가 덮이면서 잡히지 않는 부분을 제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태범 작가의 화이트 연작의 특징을 ‘닿으면서 보기’와 ‘덮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는 데만트와 비교하면서 필자가 작위적으로 도출한 특징이기도 하지만 하태범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에 대해 좀 더 서술할 필요가 있겠다.
작가가 다루는 매체 사진은 일종의 이미지로서, 이를 기준으로 사물이 존재하는 이미지 안의 세계와 이미지를 바라보는 이미지 밖의 세계로 나눠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는 보이는 자가 있는 장소로서 뉴스거리가 된 사건이 발생한 곳이며, 다른 하나는 보는 자가 있는 세계로서 뉴스를 보는 우리가 속한 현실이다. 따라서 시간적인 측면에서 전자는 과거이며, 후자는 현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두 세계를 성격상 이질적으로 구분 짓는 근거가 이미 서로 동질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이미지가 의미를 획득하려면 안팎의 세계가 동질적이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안의 세계가 밖의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밖이 안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이미지에 제목을 붙이거나 의도적으로 다른 문맥에 배치할 경우가 그렇다. 이러한 방식으로 현재가 과거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도 발생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분석해 보자. 여기서 영향은 일종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감각계통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는 끔찍하다, 처참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등으로 우리를 몸서리치게 한다. 이와 동시에 지성계통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는 철저하게 육하원칙에 따른다.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무엇을, 왜 등 여섯 가지 질문은 동시에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질문에 대한 답은 사진을 설명하는 기사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두 가지 반응은 표면적으로 발생하는 일차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반응은 다른 데에 있다. 그것은 보도사진의 전제조건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미지를 보는 자신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와 시간의 밖에 있다는 사실을 지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감각계통에서 일어난 반응보다 더, 지성에 의한 파악보다 훨씬 먼저 일어나는 반응이다. 이는 모든 반응을 아우르는 근원적인 반응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건을 대하는 태도와 반대의 성격을 띤다. 그것은 일종의 ‘안도감’이다.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안도감 덕분에 오히려 몸서리치는 반응을 취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와 동질적인 세계에서 벌어진 일로서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지만 그 사건에 내가 속해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사실 때문에 공감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독일 출신의 사회학자인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은 우리가 대도시에서 발생하는 외부자극으로부터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방어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자극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갖게 되는 이유가 된다고 지적한다. 또한, 벤야민은 신문의 본질과 인간이 뉴스에 공감하는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인간의 내면적 관심사들이 그러한 사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은 주위의 외적인 사실들을 자신의 경험 속에 동화시킬 가능성이 점점 줄어든 연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신문은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감소시키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신문의 의도가, 신문이 제공하는 정보들이 독자들의 경험 일부가 되도록 하는 데 있었다면, 신문은 이러한 의도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문의 의도는 이와는 정반대이며, 그리고 이러한 의도는 달성되고 있다. 신문의 본질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경험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영역으로부터 제반 사건을 차단시키는 데 있다.”14 비록 현대사회의 체제가 잘 운영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신문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역할이 순순히 용인되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하태범 작가는 비록 사회를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에서 화이트 연작을 시작했지만 도덕적인 선함과 공감이 갖는 위선을 포착하였다. 그것은 이미지 밖에서 거리 두기가 아니라 시선으로 덮는 방식인 ‘닿으면서 보기’인 것이다. 작가가 선택한 화이트는 이렇게 방관자적인 시선이 닿으면서 보는 현상을 구체화하는 형식으로서 시선이 닿는 만큼 흰색이 덮이는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 연작에 대한 여러 글을 보면, “색을 모두 제거하고, 새하얗게 정제”(김지혜), “형태의 단순화, 색의 삭제, 사건의 가감”(정나영), “탈색된 현실에서의 소외”(안소연) 등, 화이트에 대해 색을 ‘제거’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색을 없애는 것이 작가의 의도이기 때문에 착색이든 탈색이든 상관없을 수 있다. 그러나 말 그대로 탈색은 색을 배제하는 것이고, 착색은 있는 색을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탈색은 사건을 객관화시켜서 보도록 하려는 방식이고, 착색은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수의를 덮듯이 흰색으로 사건을 덮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가 사건 자체에 대한 재현이라면 탈색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나, 그의 의도가 매체의 이중성과 대중의 무관심한 시선이라면 화이트를 착색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다시 말해, 매체 사진이 사건을 다룰 때 점점 더 자극적이 되고 폭력적이 되는 이유는 그만큼 사건에 무관심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러한 사건을 보면서 몸서리치는 이유 또한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역설을 표현하기 위해 그들이 취한 태도로서 흰색을 사건에 덮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전부가 아니다. 작가가 표현하는 것은 사건을 덮고 있는 시선이지만 이렇게 덮인 장면을 보면서 찾아내야 하는 것은 우리도 살아가야 한다는 근원적인 윤리의식이다. 이는 남의 일처럼 선과 악을 구분 짓는 도덕심과는 다르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으로서 낙천적 신경체계가 작동하는 것이다. 우리의 시선이 그 끔찍한 광경을 무심하게 보는 것은 그것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익숙해지기 위해서이고, 무뎌져서가 아니라 무심하게 보고 싶기 때문이다. 화이트의 의미는 영상과 조각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그는 2011년부터 2년 동안 <Playing war games>, <Dance on the City>, <Bombing>을 순차적으로 제작하고 발표한다. 하나는 종이로 만든 건물에 비비탄을 쏘는 장면을, 하나는 종이집이 군집한 마을 위에서 음악에 맞춰 댄서가 춤을 추는 장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폭탄이 쏟아져 내리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사진 작업이 정밀하게 재현된 장면을 재촬영했다면, 영상은 형태를 단순화함으로써 그 안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에 집중하게 한다. 특정한 사건을 묘사한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어디선가 봄 직한 실제의 장면을 연상하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보이는 폭력들을 때론 통쾌하게, 때론 미학적이거나 서정적인 분위기를 갖도록 묘사하였는데, 이는 폭력의 실제 의미도 그렇거니와 실제와는 반대의 양상을 띤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사실성이 더한 느낌을 갖게 한다. 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가 주연한 <굿모닝 베트남>(1987)을 보면, 네이팜탄이 터지는 장면에서 루이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흐른다. 반어적인 표현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지금 현대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들을 보면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이후, 2014년에 열린 개인전 <시선>에서는 조각 매체로 표현된 화이트연작이 전시되었다. 시선의 소재는 구호단체의 홍보물이다. 그들이 생산해낸 이미지를 재현하는데, 매체로서 이미지를 다루는 것은 동일하지만 부조나 소조 형식으로 표현한 점은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관심이 생기는 지점은 이전과 달리, 여기서는 인물이 중심이 된다는 점이다. 이는 구호단체의 홍보물이 인물을 전면에 드러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지만, 주목할 일은 왜 표현 매체로서 조각을 선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구호단체는 연민을 일으키고 아픔에 호소하기 위해 인물을 이미지의 중심에 놓는다. 작가는 이미지를 보면서 당사자가 자신이 이렇게 노출된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는 점에 관심을 갖는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느 흑인 아이는 굶주림의 상징이고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각인된다. 하지만 그 아이가 누구고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관심은 없고 우리의 슬픔과 연민을 자극하는 매개체로서의 상징물로만 남아있다.”(작가노트) 기념비는 사후 당사자를 기리기 위해 제작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기념비는 본래 그래야 한다. 작가는 당사자가 모른 채 구호단체가 생산해 낸 이미지를 기념비의 속성과 동일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조각의 형식으로 재현한 것이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매체 비판이 매체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듯이, 구호단체의 이미지도 부정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단지, 그는 매체가 노출되는 방식과, 이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 위한 적합한 방법에만 관심이 있다. 우리는 이미지를 부조로 재현한 작품이나 헤드라인을 월텍스트 형식으로 설치한 작품이나, 원래 이미지가 제시하는 방식 그대로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는 것보다, 일반적인 관심을 자극하면서 지극히 감성적”으로 작가의 작품에서 재현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태범 작가는 정보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매체에 대한 비판을 통해 사회와 개인 간의 관계에 있어 사이를 메우고 있는 위선적인 사실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동질감을 전제로 한 무관심 성이며, 이러한 태도가 바로 작가가 사진의 사실성(믿음)을 이용하여 사실성(주입되고, 구성된)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드러낸 ‘사실’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밖에 없는 사실성은 무관심 성이지만, 이러한 태도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취하는 본능이자 의지로서 윤리적인 태도라 할 수 있고, 감성적인 관점에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학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