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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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CV
2008
조씨연대기-조동환 & 조해준, 아트 스페이스 풀, 서울
2005 개척자의 방문, 쌈지스페이스, 서울
2003
생각하며 일합시다, 신세계갤러리, 광주
2002
믿음, 사랑, 소망, 대안공간 풀, 서울
<주요 단체전>
2013
자유, 쿤스트 팔라이스, 에얼랑엔
2012
인터뷰, 하이델베르크 쿤스트페어라인, 하이델베르크
2011
코리안 랩소디-역사와 기억의 몽타주, 리움 삼성미술관, 서울
Drawing in Relation, DNA Galerie, 베를린
2010
비엔날레 퀴베, OK 현대미술관, 린츠
2009
Antrepo-3, 이스탄불 비엔날레, 이스탄불
메이드 인 코리아, 하노버 국제박람회, 진레퍼스, 하노버
공공의 걸작 – 신소장품, 경기도 미술관, 안산
악동 지금 – 여기, 경기도 미술관, 안산
2008
광주 비엔날레, 비엔날레 전시관, 광주
2007
해외국제 교환 귀국보고, 창동 스튜디오 갤러리, 서울
2006
젊은 모색,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과천
Fast Break, 북경 PKM, 북경
2005
노미네이트 – 번역에 저항한다, 아르코 미술관, 서울
The Battle of Visions, 담슈타트 쿤스트할레, 담슈타트
FALLAYAVADA, 어바인 미술관, 어바인
번역에 저항한다, 토탈 미술관, 서울
브라보,히구레 17-15 컨템포러리 아트 스튜디오, 동경
<소장처>
광주비엔날레 기념 전시관, 광주, 한국
경기도 미술관, 안산, 한국
멀탄 프라이어 인슈트튜트, 뒤셀도르프, 독일
쌈지 콜렉션, 서울, 한국
전북도립미술관, 전주, 한국
쿤스트 팔라이스, 에얼랑엔, 독일
하이델베르크 쿤스트 페어라인, 하이델베르크, 독일
Artist Pension Trust, 뉴욕, 미국
HIGURE17-15cas, 동경, 일본
Critic 1
조해준 : ‘놀라운 저자, 뜻밖의 전시’
김성원(전시기획,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조해준의 작업은 일견 내용전달이나 작업형식에 있어서 직접적이고 재현적이며 전통적으로 보인다. 글과 그림이 섞인 드로잉, 어딘가 미숙해 보이는 오브제들, 이 드로잉과 오브제들이 다루고 있는 개인사와 가족사가 조해준 작업의 전부라면 아마도 지금과 같은 미술계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는 못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해준의 작업에서 무엇이 흥미로운 요소들이고 주목할 만한 이슈들인가. 조해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아버지와의 공동작업과 구술 드로잉이다. 아버지와의 공동작업은 미술계에서 희귀한 사례이기는 하지만 희귀성이 작업의 가치를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구술 드로잉 또한 독특한 드로잉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만화의 형식을 빌은 전래 동화와 흡사하다. 아버지와의 공동작업과 구술 드로잉은 분명 조해준 작업을 미술계에 알리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특징들로 가동되는 조해준의 작업이 현대미술의 전개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으며, 어떠한 연장선에 있는지,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과 어떠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이 글은 작가 조해준의 작업에 내재된 일련의 문제들을 다루며 그 문제들이 오늘날 현대미술의 전개에서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형성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조해준 작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작가 조해준의 예술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조해준 작업에서 은밀하게 존재하는 일련의 문제들, 즉 협업관계, 작가의 사인(signiture)과 크레디트, 작가의 역할, 스토리텔링 방식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조해준 작업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이것이 오늘날 현대미술 안에서 어떠한 가치를 형성하며 어떠한 이슈를 제안하는지도 파악해 볼 수 있겠다. 조해준의 작업은 현대미술의 전개에서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조용한 반란과도 같다. 조해준은 자신의 아버지 조동환과 공동작업을 표방해왔다. 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출판물과 전시활동은 언제나 조해준과 조동환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져 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의 2013년도 올해의 작가상 후보로 선정된 조해준은 자신의 전시를 그의 아버지 조동환의 작품들로 구성했다. 관객은 조해준의 전시를 보러 가지만, 조동환의 작품을 보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조해준 전시에게 모종의 불편함과 당혹감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 조해준 작업의 함정은 바로 작가의 정체성에 있다. 그의 작업에서 작가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인가 아니면 작품을 기획하는 사람인가? 조해준 작업의 저자는 누구인가? 작품을 손으로 직접 만든 그의 아버지 조동환인가 아니면 그것을 선별해서 전시한 조해준인가? 오늘날 현대미술에서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만들거나 그린 작품들로 전시를 하는 사례를 종종 접하게 된다. 일례로 마틴 키펜버거(Martin Kippenberger)의 <dear painter, paint for me 1981> 시리즈는 키펜버거가 영화광고 간판을 그리는 베르너(Mr. Werner)라는 사람을 고용하고 그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한 작품이다. 키펜버거는 왜 간판 그리는 사람에게 그림을 의뢰하고 그것을 미술관에서 전시를 했는가. 키펜버거의 <디어 페인터> 시리즈는 70년대 말 80년대 초 신표현주의 화가들이 표방하는 표현적인 스타일, 즉 예술작품이 하나의 ‘작가 스타일’로 환원되고 거래되는 현상을 비판한 작품이다. 베르너라는 영화간판 그리는 사람에게 작품을 의뢰하면서 키펜버거는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지 않고 자신의 작업에 서명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키펜버거의 의도를 표현하는 완벽한 방법인 것이다. 조해준 역시 작가로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는 작가의 손을 통해 표현되는 교유 스타일 자체는 관심 없는 듯하다. 그의 작업은 전부 그의 아버지 조동환의 손으로 만든 작품들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그것은 조해준의 작업이 되고 조해준의 서명에 의해서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다. 작가의 서명은 현대미술의 흐름에서 몇 번의 중요한 획을 그으며 작품형태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예술작품의 가치 평가와 감상방식에서 뒤샹이전과 이후는 완연히 다르지 않는가. 조해준의 작업 읽기는 이러한 연장선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베르너가 그린 키펜버거의 작품이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미술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조동환이 그린 구술 드로잉은 조해준의 작업이 된다. 구술 드로잉은 조해준의 작업으로서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조해준의 작업은 ‘미술제도(institutions)’를 적극 활용한다. 제도의 위력을 교묘하게 활용하면서 유쾌한 일격을 가하고 있다. 현대미술의 흐름에서 제도의 위력은 언제나 막강했고, 작가들은 제도를 거부하거나 뛰어 넘으면서 그 위력에 저항해 왔다. 뒤샹(Marcel Duchamp)의 레디메이드는 제도보다는 작가의 서명이 미술에서 우선한다는 것을 입증했으나, 뷰렌(Daniel Buren)과 함께 제도가 곧 서명이며 그래서 작가의 사인은 불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째든 오늘날 서명이 있든 없든 제도가 미술임을 승인하고 예술작품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제도는 작가의 서명만큼 위력을 가진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티노 세갈(Tino Sehgal)의 제도 활용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티노 세갈은 자신의 작업이 반드시 인스티튜션에서 전시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건다. 모든 지침이 구술로 전달되고 실행되는 티노 세갈의 퍼포먼스는 미술관, 비엔날레 등 미술제도 안에서 (움직이는)‘조각작품’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 어떤 물질적 오브제를 생산하지 않는 티노 세갈의 퍼포먼스가 미술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 제도의 위력 때문이다. 이렇듯 ‘제도’는 현대미술 작가들에게 작업의 존재 가능성, 작품가치를 인정받게 하는 절대적 장소가 된다. 조해준의 작업도 이러한 제도의 힘을 현명하게 사용하고 있다. 조해준은 국내외 유수 전시공간, 미술관, 비엔날레, 대형 국제기획전 등 미술제도를 적극 활용하며 비미술가 조동환의 작품들이 조해준의 전시(제도)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작품’으로 전환되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조해준이 이러한 제도를 활용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조동환의 오브제들과 구술 드로잉에 관심을 가졌을까? 미술학교 교사였던 무명작가 조동환이 만든 드로잉과 오브제들은 이제 작가 조해준에 의해 미술의 제도권으로 당당히 들어왔다. 조해준 작업에서 작가의 정체성 게임과 제도 활용 전략은 현대미술의 사회적 관계를 탐구하는 다양한 실천들과 조우한다. 예술가들은 현실에서 이미 존재하는 유형들에서 형태를 이끌어 내기 위해 개입한다. 90년대 현대미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적 혹은 전문직업적 모델을 재창조하고 작품생산의 방법들을 적용하는 것이다. 조해준도 90년대 현대미술의 이러한 흐름을 연장하며 자신의 예술 프로젝트를 위해 큐레이터가 되고 프로듀서가 되며 에디터로 변신하기도 한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조해준은 그의 아버지 조동환에게 구술 드로잉을 그리게 하고, 그것을 전시하고 책으로 출판하는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서 조해준은 조동환의 회고전을 기획한 큐레이터가 된다. 여기서 큐레이터로서 조해준의 역할은 무엇인가? 조해준이 작업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 진다. 조해준이 소통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의 기억을 표현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조해준은 그래서 아버지가 그린 그림을 다시 작품화하면서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가 살았던 시대와 자신이 사는 시대 사이의 관계 맺기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의 작품을 발굴하고 관객과 연결시키는 활동을 하는 큐레이터는 조해준 작업에서 설득력 있는 역할이 된다. 90년대 현대미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러한 전문직 역할게임은 작품을 생산하는 방식이며 작품의 형태 생산에 관여한다. 작품에서 작가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따라 작품의 최종적 결과물, 즉 작품생산 방식이 달라진다. 어쩌면 조해준의 작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의 전시와 큐레이팅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더 합당할지도 모른다. 아버지 조동환의 드로잉들, 오브제들이 품고 있는 사적 기억들도 결국 조해준이 그것을 어떻게 큐레이팅했는가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아버지와의 협업의 출발점이 되었던 <생각하며 일합시다> 조각상, 아버지의 국전 출품 <낙선작>, 아버지가 삶의 계기마다 새기고 만들었던 다양한 추억의 오브제들을 모은 <기념수>, 아버지의 기억, 가족의 기억 그리고 타자의 기억을 구술하듯 그리고 써내려간 구술드로잉 시리즈들, 조동환이 직접 제작한 이 모든 작품들은 아버지 조동환과 아들 조해준의 사적 관계, 우리 아버지 세대와 자식 세대와의 관계, 제도권 미술과 아마추어 미술의 관계 그리고 작가와 큐레이터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열어 놓는다. 이 모든 관계 맺기는 아버지의 60년대 국전 <낙선작>이 아들의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전시를 장식하고 있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절묘하게 보여주고 있다. 조해준의 작업에서 특히 부각되는 전략은 사적 기억과 역사적 기억을 이야기하는 방법에 있다. 아들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의 일상적 기억들은 육성을 대신해서 구어체로 그리고 그 장면을 묘사한 간략한 이미지로 전환된다. 조해준은 그림책 형식을 통해서 자신의 아버지의 사적 기억, 가족사 나아가서는 역사와의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있다.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구술 드로잉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는 다양한 장치를 통해서 전달된다. 관람객은 수 십장의 액자들이 연결된 장치 앞에서 만화책을 한 장씩 넘기 듯 드로잉들을 읽을 수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 조해준은 신문 가판대 혹은 게시판과 같은 장치를 고안해서 그 안에 드로잉들을 설치하기도 한다. 공공장소에 적합할 법한 만화책 장치, 신문 가판대, 게시판 등은 사적 기억이 공공 기억과 만나게 되는 일종의 미팅 플레이스다. 여기서 조동환의 개인사 혹은 조해준 일가의 가족사는 단지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공공의 장소에서 공공의 기억들과 조우하며 역사 안으로 편입된다. 미술의 마이너 장르, 하지만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만화책과 구술전통을 빌려 온 조해준의 스토리텔링 방식은 정사에 편입되지 못한 한 개인의 사소한 일상적 기억들, 지금 여기서 이렇게 기억하지 않는다면 사라질 운명에 처한 기억들이 공공 영역에서 퍼블릭과 소통할 수 있는 적절한 선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림과 이야기는 각기 다른 전문 영역에서 진화해 왔으며, 특히 현대미술에서 ‘읽는 미술’은 개념과 추상미술에 자리를 내주었다. 조해준은 오랫동안 소외되어 왔던 ‘읽는 그림’과 ‘스토리텔링’을 과감하게 복귀시키는데, 이는 전통과 현대의 관계 맺기, 과거와 현재의 연결, 이야기와 개념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기도 하다. 조해준의 작업세계를 읽는 방법은 물론 매우 다양할 것이다. 작가가 아버지의 기억을 통해서 전달하려 하는 한국의 근대사, 상처, 고통 그리고 궁핍했던 시간들, 서구 문화와 일그러진 이상 그리고 이 모든 기억들과 지금 현재를 연결하며 세대 간의 존재하는 ‘사이 풍경’에 관해서 깊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아버지와의 협업이라는 독특한 경험을 통해 부자관계 혹은 각기 다른 인격체들 간의 긴장, 대립, 갈등, 화해를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조해준 작업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지점은 아버지를 작가로 등장시키고 구술드로잉이라는 독특한 그림책을 만들게 하며 이를 바탕으로 전시를 기획하는 조해준의 프로젝트가 어떻게 현대미술의 흐름과 연결되며, 현대미술의 전개에서 어떠한 가치를 확립 하게 되는 가에 있다. 즉, 나는 조해준 작업의 ‘형태’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작가는 어떤 방법으로든 ‘형태’를 생산한다. 그 형태가 우리 눈으로 인지 할 수 있는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예술작품은 형태 없이 존재 할 수 없다. 협업, 작가의 정체성 게임, 크레디트와 서명의 가치, 미술제도의 사용 등은 오늘날 현대미술의 새로운 형태 생산에 핵심적 역할을 해 왔으며, 조해준은 이러한 요소들을 적재적소에서 절묘하게 가동시키며, 일상적 삶과 기억들을 재구성하고 재생산하며 작품화하는데 성공했다. 올해의 작가상 전시는 조동환과 조해준 부자의 전례 없는 협업 활동 십년을 결산하는 듯하다. 이제 조동환의 일상적 삶과 조해준 일가의 사적 기억들은 보다 공식적으로 제도 안에서 작품으로 존재하며 영원히 수 많은 사람들과 사적 기억의 관계 맺기를 시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