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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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CV
정윤석 (1981. 한국)
교육
2013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다큐멘터리 석사, 한국
2009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 학사, 한국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 부전공, 한국
개인전
2018
《눈썹》, 일민미술관, 서울
2009
《88》, 금호미술관, 서울
주요 단체전
2017
《경계 155》,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4
《토탈리콜》, 일민미술관, 서울
2013
《크리스 마커와 꼬레안들》, 아뜰리에 에르메스, 서울
2012
《The Film 2012》, 대구시립미술관, 대구
《라운드테이블》, 광주비엔날레, 광주
2011
《친절한 현대미술》, 경기도미술관, 안산
《제10회 송은미술대상전》, 송은아트스페이스, 서울
2009
《시티넷 아시아 2009》,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플랫폼 인 기무사 2009》, 옛 국군기무사령부, 아트선재센터, 서울
2008
《SeMA2008: 미술을 바라보는 네 가지 방식》,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수상
2018
들꽃영화상 대상, 한국
2017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특별언급상, 일본
무주산골영화제 대상, 한국
2014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 논픽션부문 최우수작품상, 스페인
베를린국제영화제 넷팩상, 독일
2013
부산국제영화제 비프메세나상, 한국
2011
제10회 송은미술대상전 장려상, 한국
2008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신인감독상, 한국
주요 소장처
금호미술관
한국영상자료원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미술관
Critic 1
김경운(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정윤석은 1981년 7월 28일 서울시에서 태어나 2004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 과에 입학한 뒤 2009년에 졸업했으며, 같은 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입학하여 다큐멘터 리 전공으로 2013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영상매체전반과 영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 동하고 있는데, 특유의 예리함으로 미술과 영화를 수단 삼아 개인의 삶을 통해 사회정치적 문 제를 들여다본다. 국가와 사회의 ‘공공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업해온 그는 영화와 미 술이라는 매체를 통해 어떻게 같고 다른 감각의 지평을 제시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실험을 꾸준 히 진행해 왔다. 즉 눈앞의 문제적 상황 앞에서 특유의 예리함과 세밀함으로 촉발된 사적 정 서를 미술과 영화의 언어로 공론화하는 한편, 다큐멘터리 영화, 영상작업, 설치, 사진 등 다양 한 작업 형식을 취하면서 이 각기 다른 매체들이 어떻게 다른 감각의 지평을 제시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실험도 꾸준히 진행해온 것이다.
그가 2006년도에 제작한 초기 작품인 상영시간 24분의 다큐멘터리 <우리나라에도 백악관>은 우리나라에 수많은 백악관들이 있다는 전제로 시작한다. 실제로 백악관이란 간판을 쓰고 있는 업종의 대부분이 모텔 및 유흥업소이지만, 그 속의 구성원들이 품은 판타지가 실제 백악관의 모습을 쫓아가려 한다는데 착안하여, ‘백악관’이란 간판 뒤에 숨겨진 한국 사회의 비틀어진 판 타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작가는 2009년 9월에 옛 기무사(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렸던 《플랫폼 인 기무사》전시 에 영상설치작업을 선보였다. 이 작업을 토대로 2010년에는 상영시간 12분8초의 영상작품 <별들의 고향>을 만들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기존 작업의 실제 배경이 되었던 기무사의 역사적 의미를 성찰하는 동시에, 설치 형식에서 드러나는 시각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 작업을 구상하기 위해서 197~80년대의 선전 영화를 찾아본 그는 놀랍게도 오늘날 우리 사회 의 풍경이 마치 20여 년도 더 지난 영화의 데자뷰와 같음을 인식한다. 또한 노조 탄압이나 반 공 이데올로기와 같이 오랜 시간이 지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곳곳에서 반복되는 과거를 발 견하며, 우리가 소비했던 옛 유령들의 곡소리가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2013년에 발표한 첫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논픽션다이어리>는 1990년대 희대의 살인집단이 었던 지존파 사건을 다루었는데, 1994년에 20대 초반의 젊은이들로 구성된 범죄조직 지존파 의 등장이 한국사회에 던진 파장으로 시작한다. “인육을 먹었다”, “부자들을 못 죽여서 한이 된다” 등 그들의 거침없는 언행 및 엽기적인 범행에 당황한 김영삼 정부는 당시 기득권 세력 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본보기로 빠른 사형집행을 약속하지만 곧이어 터진 성수대교 및 삼풍백화점 붕괴로 인해 사건이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정윤석 이 연출한 첫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로서,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 BIFF 메세나상을 비롯해 2014년 베를린국제영화제 넷팩상,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 오피셜 놉스비전 논픽션 부문 최 우수작품상, 제2회 무주산골영화제 전북영화비평포럼상을 수상했다.
2017년에는 상영시간 120분의 장편 다큐멘터리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를 개봉했는데, 200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세대에 대한 관찰이자 한국사회의 레드콤플렉스를 건드리는 영화이다. 2인조 펑크록밴드 밤섬해적단은 박종철 물고문 사건이나 북한문제 등, 사회의 부조 리한 여러 사안들에 대담하고 냉소적인 비판을 가하는 음악을 해 왔으며, 두리반 강제철거를 반대하는 뉴타운컬쳐파티51+ 등의 사회적 활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한편으로 주류의 관 점에서 쓸모가 없는 멍청이, 실패자를 자처하거나, 적극적인 자기-희화화를 통해 오히려 약자를 악으로 소비하는 사회의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한다. 지난 날 한국에서 빨갱이라는 낙인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이기보다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었으나, 정감독은 우리에게 북한은 극 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감각’의 문제였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한국의 권위주의 를 비판하는 ‘밤섬해적단’의 가사들이 전면에 북한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같은 맥락 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뮤지션으로서의 밤섬해적단과 저항의 상징인 펑크에 주목하는데, 이들은 유명 클럽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를 풍미한 굵직한 사회운동의 현장에서 공연을 하며 우리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과정 속에서 음악가 로서의 정체성과 하고 싶은 음악, 돈 안 되는 음악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함께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나간다. 모두가 세상에 대해 무기력함을 이야기할 때, 무기력함을 무기로 세상을 향해 일갈하는 밤섬해적단의 음악은 이 시대 청춘들이 처한 보편적인 딜레마와 함께 소외된 약자를 향해 노래하려는 뮤지션의 현재를 그린다.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 려는 이들의 여정을 통해 이 시대 청춘들을 위로하고, 오늘날의 청년문화가 정치와 어떻게 조 우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모색해본다. 변혁의 가능성이 낮은 현실 정치에 대해 냉소를 즐 기고, 나쁜 것만큼 좋은 것도 억압적이라는 것을 알기에 상징화된 성공을 바라지 않는 특성을 가진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공유하는 정서를 토대로, 사회적이고 상징적인 가치를 선망하는 대신 스스로 거대한 변혁이 아닌 일상의 재구성을 통한 감각적 탈주의 실천을 꾀하는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다. 본 작품으로 정윤석은 2017년도 제15회 야마카타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서 뉴 아시안 흐름 상-특별언급을 수상하고, 제5회 무주산골영화제에서는 뉴비전상을 수상한 다. 이어서 2018년도에는 제5회 들꽃영화상 대상을 수상한다.
2018년에 정윤석은 그간 파편적으로 선보였던 작품들을 모아 《눈썹》이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일민미술관에서 개최했다. 전시의 제목 ‘눈썹’은 인간 형상을 띤 사물들을 보다 인간답게 보이 도록 붙이는 장식물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 섬세한 노력을 기울 인 부분은 결국 이들을 가장 인위적으로 보이게 하는 요소가 된다. 이 전시는 낯설고 그로테 스크하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 제조되고 폐기되는 풍경 에서 수집한 이미지와 인터뷰, 거기에서 파생된 사진과 설치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와 동명의 작업 <눈썹>에서 작가가 택한 구체적인 장소와 대상은 마네킹 공장과 섹스돌 공장, 그 리고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곳을 배경으로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비율과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수동성을 가진 마네킹과 섹스돌을 제작하는, 즉 ‘사람 이 사람을 만드는 풍경’에서 이루어지는 강도 높고 부단한 노동의 과정과 섬세한 작업에 초점 을 맞춘다. 그리하여 인간이 욕망을 위해 인간같은 소비재를 제작하는 모습을 기괴하게 포착 함으로써 인간과 인간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정윤석은 영화와 미술이라는 두 영역의 교집합에서 활동하고 작업하는 소수의 작가군 중에서 도 꾸준함과 지속적인 성과로 두드러져 보이는 작가이다. 지속적인 작품 활동을 펼쳐온 작가 중 한국미술계에 신선한 감각과 비전을 제시한 작가로서, 향후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동 시대미술을 대표할 작가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작가로 생각된다. 한국 현대미술의 비전을 제시할 역량이 있으며, 그 경향과 담론을 주도하는 예술가들을 지원 및 후원하고, 이 들의 예술세계를 알려나가는 올해의 작가상 취지에 부합하는 작가/감독으로 판단되어, 정윤석 을 수상후보로 추천한다.
Critic 2
비인간의 수면 아래…
김은희 (독립 큐레이터)
정윤석 작가의 2채널 비디오 설치 작품 ‹눈썹›이 2018년 일민미술관에서 전시될 때, 중국 선전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섹스돌(마네킹)1 의 몸을 보면서 진짜 사람의 나체를 바라볼 때처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 «올해의 작가상 2020»에 출품된 정윤석의 작품 ‹내일›에서 동명의 신작 다큐멘터리와 제조 중인 마네킹의 부위를 클로즈업한 사진들을 본 관람객 중에서도 이 전시가 여성의 몸을 성적 대상화하는 간접적 행위와 유사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우리는 인간의 살갗을 연상시키는 실리콘 마네킹의 몸체 부위들이 제조공들에 의해 만들어질 때 마치 그 몸체들이 살아있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작가가 관찰하는 외부세계의 문제적 양상들이 은유적 방식으로 구현될 때, 대상이 되는 특정한 현상 또는 사물에 성차별적 대상화의 프레임을 적용해 젠더의 문제로 유추하는 것은 과도한 해석일 수 있다. 오히려 이 작업에 대한 비평은 중앙집권적이거나 민족주의적인 이념, 불평등한 자본주의 체제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억압에 기인한 병리적 현상들이 포스트식민주의의 정치·경제적 불균형과 어떻게 결합되는지, 또는 혼성된 문화 경험을 겪은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이런 문제들이 어떻게 특정한 증후들로 나타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본다. 정윤석의 ‹내일›은 마네킹 또는 인공지능 로봇과 같은 대체물의 생산과 소비가 인간의 정신을 잠식해가고 있는 과정을 들여다볼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섹스돌로 불리는 마네킹을 생산하는 공장은 중국, 일본, 미국, 독일 등 여러 곳에 있다고 한다. 유튜브를 검색해보면 독일에 있는 마네킹 생산업자와 소비자를 인터뷰한 영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영상 안에서 공장 사무실에 걸린 마네킹의 사진과 생산 완료된 마네킹의 성기 부분은 블러 처리가 되어 있다.블러 처리의 주체가 누구이든 간에 마네킹의 몸은 사람의 몸과 동일한 취급을 받은 셈이다.남자 마네킹을 주로 제작하는 한 업체를 소개하는 영상의 첫 장면에선 침대에 누운 여성이 옆에 눕힌 남자 마네킹의 몸을 애무한다. 여자의 다리에 밀착된 마네킹의 다리에 카메라가 근접하면 털이 자란 실제 남성의 다리처럼 보인다. 얼굴을 보기 전까진 이 몸의 부분들이 인간의 것인지 마네킹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최근에는 완벽한 단계는 아니지만 인간과 대화가 가능한 인공지능 로봇도 제작, 판매되고 있다. 스필버그 감독의 「A.I.」(2001)에 등장하는 (주드 로가 연기한)섹스 로봇을 떠올려보면, 미래에는 섹스 로봇이 인간들의 합법적인 성적 파트너로서 대량생산 될지도 모르겠다. 「블레이드 러너 2049」(2017)에선 문제를 일으키는 레플리칸트(극중 21세기 초에 만들어진 복제인간)들을 색출하는 블레이드 러너인 주인공 ‘K’가 진정 사랑하는 것으로 보이는 홀로그램 A.I. 조이가 등장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인간의 형상을 본뜬 대체물과의 놀이에 빠지거나 이 형상물을 고유한 인격체로 여기고 동반관계를 맺을 경우, 인간과의 관계가 불가능해지는 지경에 이른다. 사이언스 픽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인간의 형상과 외피를 모사한 복제품들은 사실 구매—소비—폐기의 단계를 거치게 되는 상품이다. 자본주의는 대체물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욕망을 자양분으로 삼아 수많은 대체품들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필요에 의해 생산되는 이것들의 존재 이유가 명확하다고 해서 인간의 욕망을 반영해 주물화한 이 형상의 사물성과 기계성이 명확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과 중국 선전의 공장에서 마네킹이 생산되는 과정을 기록한 ‹눈썹›은 마네킹을 완성해가는 공장노동자들의세밀한작업일지에가깝다.이작품은더나은보수를얻기위해선전의공장에취업한 남녀 노동자들, 업주와의 인터뷰 장면과 인형이 제작되는 노동 현장을 교차해 보여주지만, 작가의 관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상황이 내포하고 있는 특정한 세계의 양상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유도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이러한 방식은 ‹눈썹›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작 ‹내일›에서도 유지된다. ‹눈썹›에선 카메라의 위치와 움직임, 선택된 프레임의 구속력이 사물과 행동의 현전성2을 노동 현장 속에 잠재된 보이지 않는 힘과 마네킹의 물질성을 드러내는 데에 작용한다. 교차편집되는 노동자들의 인터뷰 쇼트는 공장이라는 특정한장소가내포하고있는중국사회전체와의관계성을이해할수있게한다.오전근무시작전 공장의 노동자들이 강제적으로 읽는 행동강령의 목소리가 공장 내부 공간에 은닉해 있는 전체주의의 흔적을 인지하게 하는 것과 같다. “현존하는 것을 그것 자체로서 은닉성으로부터 이끌어 내서 고유하게 그것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비은폐성 가운데로 데려오는 행위”3는 지나간 시간의 현재성을 포획하려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본질에 가깝다. “열려 있음이 열린 장 안으로 스스로를 설립”4함으로써 작품 속에 정립되는 존재를 구하는 작업 정신은 이미지가 침묵을 형성해가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많은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존재자의 시간양태를 포착하기 위해 긴 시간의 지속성을 필연적으로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일›은 시간의 지속성과 분절이 이미지 내부로부터 표출되는 존재의 양상을 공간의 특이점으로 환원하는 과정을 재현한다. 이 영화 안에서 진행되는 실존의 위상들은 작가가 객체화하고자 하는 전체 세계의 지도 위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따라서 영화 ‹내일›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실제 장소에서 일어나는 인물들의 행동과 주변환경의 잉여부분이 발산하는 기호들의 잠재태와 더불어 두 명의 일본인이 던지는 실존의 풍경을 구현한다. 현실에서 포착된 것들을 편집으로 재구성해 부분들의 은폐된 연결(비실재 하는)성과 동시성을 재현한다. 거실에서 TV를 보는 나카지마 센지의 일상과 TV 뉴스로 보도되는 14년 전에 일어난 여고생 살해사건이 실제론 관련이 없음에도 연결되는 시퀀스의 구성이 그렇다. ‹내일›의 전반부에 중국 선전 마네킹 공장의 노동 현장과 인터뷰 장면이 취재 대상인 두 일본인의 일상과 교차되는데,이는 상품(인형)을 매개로 한 생산자와 소비자와의 관계 지도 또는 기계(로봇)로 진화하는 상품과 그것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상이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설명하지 않고 동시화하는 영화의 편집은 존재의 상태에 우리의 시선을 ‘정지’시키기 위한 수사학적 선택이다.
“모든 이유의 줄을 끊으면서 우리는 장면,태도,얼굴 등을 침묵의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다. 이때 침묵은 그것들에 이중의 힘—이유의 부재와 연결된 이 실존의 명증성 위에 시선을 정지할 수 있는 힘과 이 명증성을 다른 감각적 세계의 잠재성으로서 풀어낼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5
‹눈썹›, ‹내일› 두 작품에서 작가는 다성적 보이스오버나 이미지에 대한 의미의 중첩을 의도적으로 꾀하는 식의 텍스트 사용 등을 배제한다. 따라서 인간과 사물이 주관적인 관찰의 대상이 될 때 일어나는 개념적인 덧씌우기를 피할 수 있게 된다. 설명하지 않고 현상의 일부를 기록할 때 해석의 범위는 넓어지지만 동시에 이미지 그 자체,즉 현전하는 이미지의 배경이 되는 실제 세계의 현상 비평으로 비약할 수도 있다.그런 점에서 ‹내일›에서 길고 느리게 전개되는 상황의 연속성은 영화 속에 나타나는 존재의 양상을 보이지 않는 전체 세계로 유추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카사노바」(1976) 후반부에 수많은 여인들을 탐했던 카사노바가 여자 인형과 춤을 추고 성적 관계를 맺는 장면이 나온다. 카사노바가 결국 귀착한 것은 여성의 형상을 본뜬 인형이었다. 카사노바 인생의 마지막을 함께 하게 된 인형이 인형을 초월한 존재가 되면서 동시에 그가 사랑했던 모든 여성은 인형이 되어버리는 (카사노바에게 이 여성들은 인형에 불과한 셈이 된다)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카사노바」에 사용된 이 강렬한 은유적 사용처럼, 성인용 인형의 몸 또한 사물 자체의 물리적 성질이 성적 도구로서의 상상적 기능에 의해 새로운 생명체로 거듭난다. 이러한 변신은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여긴 키프로스의 여인들을 혐오하면서 스스로 제작한 이상적인 여성상인 조각상과 사랑에 빠지는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공장 노동자들이 피그말리온의 열정을 갖고 마네킹을 제조할 리는 없다. 피그말리온은 이 마네킹들을 구입하고 소비하는 소비자들에 해당한다. 마네킹들은 자신을 구입한 주인이 실제 세계의 살아있는 여성, 혹은 남성들에게서 얻을 수 없다고 믿는 것들을 채워준다.
‹눈썹›에서 노동자들의 공정을 거쳐 완성되는 마네킹은 마치 인간의 갈비뼈 하나를 본으로 삼아 탄생한 또 다른 인간의 유형에 가까운 존재로 보인다. 그리고 ‹내일›은 인간에 대한 실망과 불신으로 인간이 아닌 로봇 또는 마네킹과의 교류를 선택한 두 명의 일본인을 보여준다. 인류 최초의 인공지능 시장을 꿈꾸며 선거운동을 하는 44세의 마츠다 미치히토와 성인용 인형과 함께 사는 63세 유부남 나카지마 센지의 일상을 기록한다. 마츠다 미치히토는 인간 정치에 대한 환멸로 인해 인공지능 로봇에게 정치를 일임하자고 주장하고, 나카지마 센지는 떨어져 사는 아내의 동의 하에 여러 개의 마네킹과 동거한다. 그런데 두 사람을 기록하는 카메라에 포착되는 이미지의 양상은 두 존재가 지닌 성격의 다름과 유사하게 전이된다. 마츠다를 기록하는 카메라는 선거 기간 동안 선거운동에 매진하는 마츠다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면서 마츠다가 참여하는 상황에 대한 관찰이 된다. 그러나 새로 이사 온 집에 전주인이 두고 간 물건들을 버리지 못한 채 마네킹들과 동거하고 있는 센지의 일상은 공허하고 정체되어 보인다.6 마츠다의 이동 경로는 선거운동이라는 목적성을 두고 움직이기 때문에 그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일본의 정치와 현대사회에 대한 담론과 연결된다.반면 센지의 삶은 그가 머물고 있는 공간과 사물들 속에 갇혀 있다.센지는 박스들이 쌓여 있는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거나 마네킹을 목욕시키고 품에 안은 채 잠든다. 마츠다 미치히토와 나카지마 센지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비관적 세계관이 현재를 잠식해가는 일본 사회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가 된다.
‹내일›의 중반부에 2018년 당시 박영선 국회의원이 주최한 ‘4차산업혁명, 소피아에게 묻다’란 주제의 행사인 인공지능 로봇 ‘소피아’ 초청 콘퍼런스 장면이 삽입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로봇 최초로 시민권을 발급받은 소피아에게 박영선 의원이 2017년에 자신이 발의한 ‘로봇기본법’ 제정과 관련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어려운 질문에 대해 논리적으로 대답하는 소피아의 얼굴에서 우리는 희미한 인간의 표정을 읽을 수도 있다. 한국에서 개최된 이 행사 장면은 로봇과 공생하는 미래의 삶이 현재 이미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눈썹›과 ‹내일›은 그의 예전 다큐멘터리 ‹논픽션 다이어리›(2014)나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2017)와 마찬가지로 통념적 기준에서 볼 때 예외적 상태에 놓인 존재의 행동 양식과 사회와의 관계를 다룬다. 통념적 기준이 작용한다는 것은 한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이 집단무의식을 형성한다는 가정을 허용한다. 또한 그것은 주체가 부재하는 타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행동 양식에 대한 평가이다. ‹논픽션 다이어리›와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는 형사법에 기반한 범죄의 해석(‹논픽션 다이어리›)과 국가보안법 위반(‹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여부처럼 개인이 판단의 주체가 되지 못할 때 관습적 윤리 규범에서 벗어나는 행동이 제기하는 담론들을 제시한다.
‹논픽션 다이어리›가 초점을 맞춘 문민정부 첫해인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일어난 세 사건 (지존파의 검거,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들은 권력집단이 미디어를 통해 혹세무민하는 과정에 은폐되어있는 온갖 부작용의 표상들로 영화 속에 나타난다. 이때의 역사는 “행운과 불운의 사례, 미덕과 악덕의 사례”의 표상처럼 “세계를 차지하는 한 방식을 의미하는 순간들”이며 이것들이 자신의 기호들을 통해 제시하는 것은 어떤 세계의 의미에 대한 독해가 아니라 모방되어야 할 사례다.7 역사에서 분리해 작품을 통해 모방되는 사례들은 랑시에르가 지적한 것처럼 “역사/기억의 시간들은 역사/진리의 시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었을 때 시대의 이상한 전향이 일어난다.
‹논픽션 다이어리›는 뉴스 푸티지 화면으로 등장하는 연쇄살인범 지존파의 멤버들과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의 원인 제공자들이 그들이 입힌 피해의 범위와 상관없이 범죄의 의도성과 잔혹성만으로 법의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사법부는 성수대교 담당 관리자들에게 벌금형 및 집행유예를, 삼풍백화점 이준 회장에게는 업무상 과실치사로 징역 7년을 선고했고, 지존파 6인에게는 사형이 언도됐다.
리더 김기환을 비롯한 지존파 멤버 6명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학대받으며 성장해 무고한 시민들을 끔찍하게 살해한 자신들의 범죄를 계급모순에 의거한 행동으로 정당화하고자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신념이 되기엔 무모하고 충동적이었다. ‹논픽션 다이어리›는 지존파가 구속된 이후 사형되기 전까지 그들과 접촉했던 주변인(경찰서장, 목사, 수녀 등)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지존파 6인의 나약함 그리고 구치소 수감 이후의 내적 변화,또한 이들의 교화를 내세우는 종교 집단의 이해관계 등을 말한다.특히 작가는 사형을 집행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질문하며 문민정부 5년 동안 총 3회에 걸쳐 57명의 사형수에게 사형이 집행된 사실을 강조한다. 영화 속에서 대비되는 지존파 6인의 법정 장면과 전두환|노태우의 법정 장면은 법적 판단의 기준이 지닌 모순을 드러내는 증거자료와 같다. TV 뉴스 자료 화면과 사건을 맡았던 영광경찰서 강력반 반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1993년부터 1995년 사이의 대비되는 사건들은 근대 이후 발생한 이념 분쟁(실체가 없는 명분으로서의 이념)의 역사성과 관계한다. 지존파의 아지트가 있던 전라남도 영광은 한국전쟁 때 민간인 3만 명이 편이 나뉘어 죽창으로 서로를 살해한 곳이었다. 더 먼 과거인 개화기에 천주교도 100여 명이 수장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영광마을의 관광공원이 된 지존파의 아지트가 있던 자리와 주변의 장소를 달리는 차창 풍경으로 보여주면서 사건이 은닉되어 있는 장소를 지나가는 장면들은 역사에서 소외된 주체성, 인권과 관련한 첨예한 쟁점들과 연결된다, 이 쟁점들은 푸티지와 인터뷰 장면들로 구성된 서사의 내부에 작용하며 후기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재사유의 필요성을 환기시킨다.
정윤석 작가의 모든 작품은 동북아시아의 후기자본주의 시스템에 내재한 정치적 ‘예외상태’8와 관련한 윤리적 질문을 담고 있다. 2010년 옛 기무사 공간에 설치되었던 ‹별들의 고향›부터 2020년 ‹내일›에 이르기까지, 예외상태가 야기하는 폭력성과 정치·경제·문화적 종속 상태로부터 발생하는 주체의 소외를 비판적 시각으로 관찰한다. ‹논픽션 다이어리›가 사건에 대한 구체적 자료조사와 분석에 기반해 정치적 예외상태에서 비롯된 담론들을 내포하는 이미지의 객체화를 목적으로 진행된다면,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는 2인조 그라인드코어 인디 록밴드인 밤섬해적단의 퍼포먼스와 북한의 선전용 트위터 계정을 리트윗한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진작가 박정근의 재판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의 형식은 다이렉트 시네마의 즉각성과 뮤직비디오의 리듬감, 장식성이 결합되어 밤섬해적단의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음악성, 무정부주의적인 가사의 매력을 전달한다. 권용만과 장성건으로 구성된 이 2인조 밴드가 구사하는 그라인드코어 장르는 80년대 중반 록 음악의 하위 장르로 드럼의 속주와 괴성과 같은 보컬을 특징으로 한다. 이 음악 장르의 특징은 생존권 투쟁(명동 두리반 철거 반대,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시위 등)에 연대한 시위 현장의 위험하고도 돌발적인 상황과 맞물려 퍼포먼스와 직접적인 현장 기록성의 날것 그대로를 구현한다. 펑크레이블 ‘비싼 트로피 레코드’를 운영하며 밤섬해적단의 앨범을 프로듀싱했던 사진작가 박정근이 이적표현물 반포 혐의로 재판받는 과정에서 밤섬해적단의 권용만이 증인으로 재판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체제 유지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되는 개인의 무력함, 즉 주체의 소외현상과 관련된 담론을 간접적으로 지시한다. 최종적으론 대법원 무죄판결을 받은 사건이지만, 이 사건은 국가와 개인의 관계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문제들을 성찰하게 한다.
«올해의 작가상 2020»에서 소개된 정윤석의 신작 다큐멘터리 ‹내일›은 갑작스럽게 출현한 코로나19 바이러스처럼, 세계의 변화는 수면 아래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지만 우리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 채 하룻밤 자고 일어난 아침에야 갑자기 바뀌어버린 세계를 만나게 되는 것 같은 ‘내일’의 세계를 암시한다. 그 세계의 가장 암울한 그림은 성인용 인형, 인공지능 로봇과 같은 물질적 매개자의 변화 속도와 상호작용하는 기술적 변화의 영역에 인간의 자리가 비워지는 경우일 것이다. 인간이 만든 인공물과 기계가 인간을 배제한 채 비인간계의 독자적 세계를 만들어나갈 때 인간은 소외된다. 정윤석의 ‘내일’은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위험한 변화의 움직임을 직감하게 한다.
1 이 글에선 성인용 마네킹의 다양한 용도에 따라 마네킹으로 지칭한다.
2 존재자가 현재라는 특정한 시간양태를 고려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는 의미에서 여기에서 ‘현전성’은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가 ‘자신을 밝히면서-지속하는 현전성’으로 정립되는 과정을 뜻한다.
3 마르틴 하이데거, 『숲길』, 신상희 옮김(서울: 나남, 2008), 84.
4 같은 책, 86.
5 자크 랑시에르, 『역사의 형상들』, 박영옥 옮김(서울: 글항아리, 2016), 30.
6 [편집자] 나카지마 센지(中島千滋)와 마츠다 미치히토(松田道人) 모두 성을 먼저 쓰고 이름을 나중에 쓰는 방식으로 표기하고, 나카지마 센지만 이름인 센지로 줄여 쓴다. 일본 문화에서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지만, ‘섹스돌 오지상’으로 불리는 나카지마 센지의 경우 정윤석 작가 및 일본 언론 등에서도 이름으로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7 같은책,72.
8 조르조 아감벤에 의하면 ‘예외상태’는 상이한 권력 형태들(입법, 행정 등)이 아직 구분되지 않은 원초적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전제로 하며 계엄령, 파시스트 정부의 법령 남용, 긴급사태 등으로 나타난다. 조르조 아감벤, 『예외상태』, 김항 옮김(서울: 새물결, 2009) 참조.
Critic 3
‘내일’의 바깥에 설 수 있는가
안은별 (미디어 연구자)
들어가며
«올해의 작가상 2020»에 선보인 정윤석의 신작 ‹내일›은 ‹논픽션 다이어리›(2013)와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2017)를 잇는 그의 세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로, 그 구상은 2018년 2월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눈썹», 그보다 앞선 2016년 보그 코리아 20주년 기념 전시에 제출한 영상 작업 ‹눈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눈썹›에서 그는 한국의 마네킹 공장을 무대로, 마네킹이 운반되거나 세척되거나 파열되거나 처분되는 수동적인 이미지를 그것을 다루는 인간 신체의 동적 이미지와의 대비 속에서 탐구했는데, 그 과정에서 일련의 이미지와 마주하고 “인간의 형상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인간의 죽음까지 다다르는 이야기”로 발전시킨다.1 당시 작성된 그의 계획서에는 인간의 형상을 닮은 사물들이 만들어지고 폐기되는 과정이나 인간의 물질적인 형상이 소거되는 것과 관련한 다양한 이미지의 후보군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2017년 말경 촬영된 것이 중국 선전의 섹스돌 제조 공장의 모습으로, 두 장소에서의 촬영분을 편집해 2채널 영상으로 완성한 것이 일민미술관 전시의 신작이었다.
그는 이후 한동안 ‘눈썹’이라 불린 이 프로젝트의 계획서에 적었던 대상을 차례로 탐구했고, 그 가운데 일본 촬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쿄에 거주하는 나는 2018년 봄, 통역으로 ‘눈썹’의 일본 촬영을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았고, 이에 응해 짧은 기간 고용되어 두 번의 예비 촬영을 도왔다. 이 경험을 굳이 고백하는 이유는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제한적인 입회가 ‹내일›에서 받은 첫인상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두 번의 촬영에서 나는 작품 속 등장인물, 나카지마 센지와 마츠다 미치히토를 마주했는데, 둘 다 내게는 몹시 의심스러운 인물로 보였다. 섹스돌은 물론 섹스를 구매했음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밝히는 센지를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고, 마츠다는 종종 A.I. 정치라는 요란한 슬로건 밑에 (특히 외국인과 관련한) 다양성 정치에 대한 우려스러운 생각을 드러냈다. 다만 나의 의심스럽다는 언급은 그들에게 윤리적 결함이 있기에 그들을 다뤄서는 안 된다는 판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걸려들 수 있는, 그래서 실제로도 많은 취재를 받게 되는 그들이 내세우는 표지가 이 두 인물이 가진 전부라는 것, 그 밑에 깊게 관찰할 만한 어떤 이야기도 없어 보인다는 사실을 걱정스러워했다. 어쩌면 내게는 ‘이면에 숨은’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더 우월한 관점이며 그 방법론으로 인물을 사회적 맥락과 연관 지어 드러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와 동시에 이 걱정은 그들의 이 가벼운 화제성이 일본의 매스컴을 벗어나는 순간 많은 설명이 필요해지는 상당히 무거운 것이 되어버릴 거라는 예감 때문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작가는 깊이가 없고 문제적이기만 한, 후에 일이 번잡스러워질 게 뻔한 텅 빈 인물들에 낚인 것이 아닐까?2
그러나 작가는 아마 그들의 이 의심스럽고 요란하기만 한 가면이야말로 이 영화가 도달해야 할 이야기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예컨대, 작가는 «올해의 작가상» 후보 개별 인터뷰에서 센지의 집에 식기가 모두 한 벌밖에 없었다는 점을 발견하고 그것이 이 사람을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한 계기였다고 말하고 있다. 센지는 인형들을 직접 붙여준 이름으로 부른다든지 기분을 살피며 말을 가려 하는 등 그것들을 사람으로 대하는데, 이것은 실제로 그렇게 믿는가 행세에 불과한가를 차치하고 이미 수많은 TV 카메라 앞에서 실연되고 방영되어 온, 하나의 사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식기가 한 벌뿐이었다는 것은 이 이야기의 불완전성, 방송에서 그가 불리는 이름인 (그 자신도 적극 받아들인 표지인) ‘섹스돌 오지상’과의 불일치를 말해준다. 물론 여기서 앞무대와 뒷무대, 연출과 리얼, 센지를 흥밋거리로 비추는 TV 카메라와 예술가의 진정한 카메라라는 소박한 이분법이 전제되고 정윤석에 의해 비로소 진짜 탐구가 시작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작가의 관심사는 가면 아래의 진정한 모습 따위가 아니라, 그 가면이 오/작동하는 모습이었던 게 아니었을까.“내 생각에 아무리 다시 볼 수 없는 얼굴일지라도 가면 밑에 진짜 얼굴이 있다는 자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행복할 터이다. … 그러나 [전자와 같은] 다자이(太宰治)의 세대와 비교하면 미시마 (三島由紀夫)의 세대는 한층 더 비극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진짜 얼굴이 어떤 것인지 모르며, 가끔 얼굴 그 자체가 진짜로 있는지조차 의심하면서, 그저 가면만을 믿고 한 걸음 한 걸음 얼굴 쪽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3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假面の告白, 1949)에 대한 당대의 비평가가 남긴, 다자이 오사무와의 비교적인 논평은 이 두 가지를 식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 물론 여기서는 다자이를 찍을 것인가 미시마를 찍을 것인가가 아니라, 다자이의 태도로 찍을 것인가 미시마의 태도로 찍을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의심하지 않는 세계: 공장
의심스럽다는 표현을 다시 가져오자면, 작품의 또 다른 축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의 섹스돌 공장은 의심스러워하는 것이 금지된 장소다. 이 공장은 우리 대부분의 일터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출신지와 배경, 일에 대한 서로 다른 정의를 가진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 모여 동일한 목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반복적인 일과를 수행하는 곳이다. 이러한 믿을 수 없는 상연이 매일 유지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그 상연의 전제 조건을 의심해서는 안 되며,모두 하나의 확고한 시나리오를 믿어야 한다.물론 이 믿음은 전혀 진정하거나 신실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충실하게 연기되어야 한다. 이 시나리오란 얼굴도 모르는 ‘소비자’들의 행복과 만족이라는 이념에 복무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하여 구성원 각자의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공간의 매일의 상연을 지배적으로 정의함으로, 가령 “처음에는 부끄러웠다”던 개인의 일에 대한 정의는 이에 따라 수정되어가게 된다.
작품은 공장에서의 한 직원의 일탈 문제에 관한 관리자의 말로 시작된다.그 직원은 다들 알다시피 “좀 그렇”지만 여러분과 똑같으며, 내일 돌아올 것이며 언제나처럼 대하면 된다고 관리자는 다른 직원들을 안심시킨다. 어떤 일터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사소한 사건이지만 하나의 결사체를 유지시키는 시나리오에 대한 믿음에 미세한 균열이 엿보이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어 직원들은 구호 문서를 함께 복창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외재화된 형태로 확인한다. “즐거움은 식량처럼 저장할 수 없고 와인처럼 오래 보관할수록 달아지지 않는다. 나는 미래를 위해 살지 않는다.” 언제나 나중에 실현될 것으로서의 (부가 가져다줄) 행복을 믿음의 원리로 하지만 지금을 살라는 역설적인 구호다. 내일은 틀림없이 올 테니, 우리는 의심 없이 지금을 살아야 한다.
누군가는 베버의 근대 자본주의 정신에 관한 유명한 설명을 떠올릴 수도 있다.4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확실한 믿음의 체계다. 그 핵심만 유지된다면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 핵심이란 ‘동일한 목표에 따라 질서 지어진 세계, 내일이 확실하게 오는 세계, 그리고 이에 대해 의심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유지하는 세계’다. 각각의 공연자들이 그 믿음을 진정으로 내면화했는가와 상관없이 그것을 믿기로 하자고 합의한 데서 이곳의 현실이 상연된다. 예컨대 중세의 교회는 그것이 ‘진정한’ 종교였는지와 별개로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고 그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강력한 현실이 되었다.5 이러한 신념 체계는 충분히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고 그들이 구현하는 행동들이 눈에 띄지 않게 반복될 때 어마어마한 개연성을 획득하고, 때로는 억압적이기까지 한 효력을 발휘한다. 또한 이 수적 우세함이라는 척도는‘모두가 그것을 믿는 것’과‘공유하는 사람이 거의 없거나 한 명뿐인 세계관’이라는 양극단 안에서 작동할 수 있는데, 전자는 더 이상 신념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이며, 후자는 광기로 간주된다.6
이 공장을 하나의 예시로 하여 나타난 세계관이 사실 공장 바깥 우리의 시야가 펼쳐지는 모든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세상의 이치에 가깝다면, 센지와 마츠다의 세계관은 공유하는 사람이 드문 광기 가까이에 있을 것이다.그러나 적어도 작품 속에서 공장과 이 두 사람의 이야기의 관계는 이러한 연속체 안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대해, 공장이라는 세계—동일한 목표를 향해 정돈된 질서를 갖춘 세계, 내일이 있는 세계—를 의심하는, 그래서 그 바깥에서 대상화하는, 즉 일종의 차원의 메타적인 이동이라는 해석을 제시하고 싶다.
공장 바깥으로 나간 자와 의심의 정경
그러한 해석을 전개할 때, 마츠다는 공장의 세계와 센지 사이의 자리에 놓인다. A.I.는 공장이 함의하는 자동화나 합리화의 극단적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은 A.I.를 공장과 같은 목표를 향해 썼을 때, 즉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썼을 때의 이야기다.마츠다의 이야기는 그가 이 공장의 세계관을 수정할 수 있는 자리에 A.I.를 가지고 오려 한다는 데서 이 작품이 진행할 방향의 고리로서 제시된다. ‘대정봉환’이니 ‘새로운 사회주의’ 같은 단어는 거기에 담긴 어떤 내용으로서가 아니라 ‘뭐가 되었든 현대 일본이 따르는 정치경제 체제는 아닌 것’으로 불려오는 것이다. 어쨌든 그를 공장 바깥으로 나간 자라고 해 보자.
이 인물은 28세 때 음악 파일 공유 소프트 회사를 설립하는데 이것이 일본 저작권협회와의 송사에서 거액의 손해배상 판정을 받아 2000년대 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마도 이 사건은 그에게 ‘새로운 테크- 놀로지가 가져다줄 평등’이 ‘소수가 권리를 독점하는 권력의 카르텔’에 패배한 사건으로 각인되었던 것 같다. 그의 A.I. 정치 도전기는 이 서사 구도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 구도는 지금 일본에서 어느 정도 ‘먹히는’것으로 단순히 공유하는 사람의 숫자로 봐서는 광기라고는 할 수 없다. 마츠다의 계획에도 몇 명의 동조자가 있으며, “동료를 늘리고 싶다”는 분명한 지향도 제기된다.
다만 이는 아직 공적으로는 승인받지 못한 것으로 그가 작품에서 한 번의 실패 뒤 다시 도전하는 선거는 이러한 세계관을 전파하는 동시에 공적인 승인을 얻기 위한 절호의 찬스다. 트위터의 리트윗과는 질적으로 다른, ‘객관적인’ 보도진 앞에서 떠들 수 있고 그 결과가 적어도 ‘진지한’ 숫자로 나타날, 세계관의 신빙성을 검증할 무대인 것이다. 그러나 이 도전이 처음부터 풀지 못할 모순을 품고 있음은 명백하다. 정치라는 영위가 전제하는 인간상이 바로 이들이 정치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인간적인 의지와 감정에 갇힌 정치가의 그것이며, 이것을 조정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의제와 선거 제도가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이 게임에 공식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명목상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 인간상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지만 ‘A.I.당’은 이에 대한 거부를 그 정체성으로 하여 탄생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똑같다”는 결과를 받아 들 때까지 이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들이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은 너무 쉽게 논박되거나 행인들에게 외면을 당하거나 공약을 말해야 할 유니보가 경로 안내를 시작한다거나 편의점 맥주에 아무 말이 섞이는 초라한 그림의 연속으로, 그들에게 당명에 어울리는 비주얼을 연출할 기술도, 부실한 세계관을 보완하면서 밀고 나갈 논리도, 혹은 신심에 준하는 충성을 거느릴 수 있는 카리스마 중 어느 것도 없으며 때때로는 팀 내부의 시나리오 조차 제대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작품이 이야기하는 이 초라한 그림의 원인은 장비의 허술함이나 논리, 매력의 부족이 아니라 마츠다의 자기 자신, 스스로 내세운 세계관에 대한 불확실함이다.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내자 눈을 내리깔고 옆머리를 긁적이며 급기야 “(실제 정무에는) 인간이 사라져도 좋을 것 같다”와 “선거에는 상징이 필요해서 로봇을 내세웠다”라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을 해 모두를 아리송하게 만드는 마츠다는 도저히 자기 이야기에 취해 있는 수준 높은 사기꾼이라고 볼 수 없다.그는 아주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바로 이 생각이 그를 혼란에 빠트린다. 자기 시나리오에 다른 사람들이 휘말려 들고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점점 더 자기 이야기가‘말이 되지 않음’을 깨달아 가고, 이것이 그의 표정에 의심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버벅거림을 만들어낸다.
마츠다가 정말로 A.I. 정치에 진심인지, 지금도 열심히 다음 선거를 준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결국 목표는 관심 자체고 A.I. 정치 같은 건 장식품에 불과할 수도 있다.하지만작품이주목하는것은 행위자의 진짜 의도라기보다 그의 얼굴에 퍼져 나가는 자기모순에 대한 의심의 정경이다. 그는 ‘인간은 믿을 수 없다’며 A.I. 정치를 내걸지만, 작품은 그 스스로가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되는 과정을 좇는다. 그리고 이 의심은 그의 시나리오에 가로놓인 최대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 한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데, 그 해결 방법이란 그가 공장을 빠져나온 자로서 공장에 가졌던 의심의 철저한 관철, 즉 ‘정치에서 인간을 완전히 내몰아야 한다’는 논리의 철저한 관철, 다시 말해 기존 시스템에 공식적으로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뿐이다. 이것이 아닌 이상 그는 A.I. 정치라는 세계관을 포기하거나 영원히 의심의 구천 속을 떠돌 뿐이다.그리고 작품은 바로 이 논리를 극단화시켰을 때 도출될 수 있는 상으로서 나카지마 센지를 제시한다.
무분별한 흐름으로서의 센지
‘섹스돌 오지상’센지를 비추는 장면은 대부분 그의 집 안에서 촬영된 것이다.작품 속에서 그의 집은 몇 번 (혹은 단 한 번)이사를 겪어 바뀌는데,마치 항상 이사 직전이나 직후인 것처럼 방 안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어질러져 있으며 언제나 켜져 있는TV를 통해 아주 먼 것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다.이 방이 끊임없는 이사 중으로 보이는 데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을 텐데, 내가 스태프로서 한 번 방문한 적 있는 그의 집은 등장하지 않았거나 실제의 이사 순서와 다르게 뒤섞여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착각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작품 속에서 그의 집이라는 장소가 끊임없이 이동 중이고 고정된 위치를 측정하기 힘든, 마치 바다 위 배와 같은 공간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한편 우리는 그가 생계유지를 위해 일을 하지만 정확히 어떤 직업을 갖거나 가져왔는지 알 수 없고 지금은 그냥 이런저런 일을 단속적으로 하는 게 아닐까 정도만 추측할 수 있으며,7 일터로 보이는 가라오케에서의 장면은 그를 일하는 사람인 동시에 놀러 온 사람인 것처럼,그의 현실인 동시에 누군가의 꿈 안인 것처럼 비춘다.요컨대 일과 유흥,낮과 밤,꿈과 현실은 그의 현실과 망상처럼 뒤섞여 있다.
이렇듯 그가 ‘있는’ 상태는 질서 체계 속에 일관된 좌표를 갖기보다 무작위한 흐름으로 나타나며, 이 인물에게 일관된 자아를 상연하게끔 하는 지속적이고 단단한 앞무대가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는 자아를“그 사람의 몸,특히 상체의 생리심리학적 인성에 뿌리 박고 있는 요소”가 아니라“개인의 활동 무대 전반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목격자들의 해석에서 비롯”되는 것, 즉 타인들과의 협력적인 ‘공연’의 산출 효과로 간주하는 고프먼의 분석적 관점에 의거한 것이다.8 또한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자기 반성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이렇듯 현재의 시점에서 자신의 과거 경험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봄으로써 그것을 현재의 의미 충전기로 작동시키지 않는다는 점 또한 영상에 기술되고 있다.
위의 대사가 등장하는 신을 포함해 촬영감독의 목소리가 섞여 있는 인터뷰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촬영감독은 자리에 없는 감독의 질문을 그것도 외국어로 옮겨야 한다는 점 때문에 매우 불확실해 하지만, 대답하는 센지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어느 대목에서는 이치에 맞고 심지어는 총명해 보이는 대답을 내놓기도, 어떤 순간에는 방금 지어낸 듯한 말을 흐리멍텅하게 둘러대기도 한다. 물론 그는 귀 기울여 듣고 성의 있게 대답하지만 반응하는 것은 질문뿐으로, 자신을 하나의 성격이 보관된 개체로서 전달하려는 욕망이 없어 보인다. 말하자면 이 대화는 상담자와 내담자 모두 역할을 충실히 연기하는 데 실패한 심리 상담처럼 보인다. 여기서 센지는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형성되어 나와 타인을 구별하게 해 주는,또한 다른 인간이 분석자의 위치에 서서 그러한 성격에서의 질서나 문제를 추출할 수 있게 하는, 자아를 보관하는 개체로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인터뷰 장면에서 그는 자신의 고유한 기억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가장 외로움을 느꼈을 때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이며 14세 때의 첫사랑을 잊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는 사전 인터뷰에서도, 그를 다룬 방송에서도 반복되었던 것이다. 이 경험이 ‘진정으로’ 그렇게 남아 있는 것인지 취재에 응하는 과정에서 되풀이하다 보니 그렇게 여겨지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설령 그게 꾸며낸 이야기라 해도 이 이야기는 무척 진실해 보이며, 따라서 우리가 보는 이 인물의 모습을 그러한 과거와 인과적으로 정렬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인지 작가는 여기서 ‘섹스돌 오지상’은 그동안의 인간관계에서의 비정함이나 외로움 때문에 대리물로서 섹스돌을 선택한 것이며, ‘실제’ 센지는 여전히 ‘인간적인 것’을 갈구한다는 이야기의 마무리법으로서 아주 유혹적인 선택지를 건넨다. 그런데 이는 첫 번째 인터뷰에서, 번역어의 불확실함을 둘러싸고 긴 지체가 일어난 질문, 즉 당신이 인형과 함께 사는 것은 인간관계에서의 결핍(결여)을 메우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서 당사자에게 분명하게 기각을 당한 해석이기도 하다. 센지는 답한다. “그걸 채우기 위한 것은 아니고 그저 제 눈앞에 메구미가 나타난 것뿐이죠.”
이는 신의 순서상, 주인공이 부인한 해석을 작가가 반박한 것으로 보아야 할까? 물론 이 글은 그러한 가설을 따르지는 않는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비로소 ‘섹스돌’에 도달한다. 다시 한번 그의 방, 정윤석이 “나에게는 하나의 세계”였다고 표현한9 센지의 방으로 눈을 돌려 본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의 방에는 수많은 물건이 어질러져 있는데, 우리는 섹스돌이 그중 하나이며 이것이 가발이나 팬티나 교복과 같은 또 다른 물건들을 이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센지가 직접 언급한 것처럼 그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며,전에 그 집에 살던 사람의 물건의 일부까지 남겨 두고 있다.물건에 기억이나 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쉽게 태우거나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이것이 섹스돌과 함께 사는 이유에 대해 센지가 제시하는 이야기다.과거에 대한 후회나 외로움 혹은 외로움에 대한 기억 같은 인간 주체의 관념에 대한 대리물로서가 아니라 분명한 물리적인 실체, 질량을 가진 것, 적극적으로 처분되지 않음으로써 계속해서 거기 ‘있는’ 것이 먼저 있고, 그것이 기억이나 혼을 띤다고, 나아가 행위성이 있다고 믿겨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애초에’ 인간이 직접 들여온 물건이라 하더라도, 이미 물건들의 존재 의의를 지탱하는 회로는 어느샌가 물건 그 자체로 옮겨져 있는 것이다.어느 시점부터 그들이 그들 각자의 생을 사는 것이다.10
그리고 이와 같은 인간과 사물의 일종의 전도에 관하여 정윤석이 중요하게 덧붙이는 이야기는, 그의 방 안에 있는, 아마도 작품에 있어선 섹스돌보다 더 중요한 사물인 TV에 관한 것이다. 센지를 다룬 장면에서 TV로부터 무언가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으며 그가 그 화면을 보고 있거나 졸고 있다는 것은 관객들이 가장 빨리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이다.TV는 때로 가발 공장 등 섹스돌 제조에 관한 정보를 더하는 창구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그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거의 늘 거기서 뭔가가 흘러나온다는 것 자체이며, 이 흐름이 작품에서 가장 각별하게 다루어지는 인공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TV에서 무엇이 흘러나오는지와 센지의 몰입도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장면을 꼽을 수 있다.그것은 그가 촬영된 그 자신을 바라보는 장면들로,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 등장 신에서 이삿짐을 싸다 말고 모니터 위를 흘러가는 그의 젊은 시절 모습과 자신의 발을 찍은 최근 사진을 보는 장면, 그리고 쇼 프로그램에서 소개되는 자기 자신의 영상을 보는 장면이다. 우리는 그가 텔레비전 화면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한다.
‘그 사물이 거기에 있었음’이 ‘나’에게 와닿는, 지시체의 발현으로서의 사진에 관한 『밝은 방』(1980)의 유명한 구절에 대해 주해하면서, 데리다는 텔레비전 영상을 포함한 원격 기술의 현대적 가능성에 대해 ‘동일한 체계 안에서 지시체와 죽음을 결합하는 것’에 있다고 썼다.“우리가 알고 있듯이 한번 촬영되고 나면…이미지는 우리 없이도 재생될 수 있을 것입니다.우리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듯이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품고 있는 이 장래에 이미 사로잡혀[귀신 들려] 있습니다.우리의 사라짐[죽음]이 이미 거기에 있습니다.”11 그는 여기에서 ‘유령의 논리’라 부르는 것을 도출한다. 유령은 우리가 눈 맞출 수 없는 대상,우리를 일체의 상호성 없이 바라보는 맹목적인 것,볼 권리 그 자체이다.그러한 유령 앞에서 발생하는 것은 “한없이 보편적으로 나를 초과”하는 전적인 타자와의 비대칭적 관계, 법과 법 앞에 선 유한자 간의 관계이다. 이러한 유령의 논리에 따르면 나카지마 센지가 촬영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장면은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바라보아지는 것에 다름없다.그러나 센지의 뒤에 앉아있는 섹스돌은 이러한 눈 마주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와의 비대칭적인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다. 인간은 언젠가 죽고, 죽으면 없어지며, 우리가 아무리 그 죽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그런다고 유키코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12 그러나 섹스돌도 (영화의 어디선가 삽입된 폐기되는 마네킹의 모습처럼) 언젠가는 없어진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그러나 둘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인간은 언젠가 미래에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아는 채로 현재에 있다는 것이다.방점은 없어짐이 아니라 없어짐을 품은 미래에 찍혀 있으며,여기서 작품의 제목인 ‘내일’의 문제가 부상한다.
내일의 바깥에서
두 번째 인터뷰에서 센지는 잊는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자막은 ‘잊다’로 번역되었지만, 실제 그가 쓴 단어인 ‘ボケる’[보케루]는 청유형으로도 쓰이는 ‘잊다’에 비해 불가항력적인, 노화로 인해 기억이 흐릿해지는, ‘노망이 들다’로도 번역되곤 하는 단어다. 일상어로서는 때로, 자신이 잊어간다는 사실은 물론 자신의 있음을 보증할 좌표 자체를 잃어가는 상태인 ‘치매’와 거의 구분되지 않은 채로 쓰인다. 과거의 추억 같은 것을 갑자기 기억하지 못하게 되면 쓸쓸하다거나 슬프지 않겠느냐는 촬영감독의 말에, 센지는 수긍하면서도 이내 ‘보케루’라는 단어를 꺼내 들며 죽음에 가까워지면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며, 죽음에 대한 공포조차 없애주기에 무척 소중한 일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보케루’는 누군가를 슬프게 만드는, 붙잡고 싶었던 과거 상실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격자를 빠져나감으로써 죽음을 모르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제다. 보르헤스의 「죽지 않는 사람들」 (1947)에서처럼, 죽을 운명의 모든 존재들은 각각의 행동이 마지막이 될 것이며 모든 얼굴은 희미해져 갈 것이라는 데 동요하지만, ‘죽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행동도 생각도 “과거에 그 행동이나 생각보다 먼저 일어났던 다른 행동이나 생각의 메아리”이며 “미래에 어지러울 정도로 되풀이될 또 다른 행동이나 사고의 정확한 예언”이다.13 만일‘보케루’함으로써 단 한 번씩 이루어지고 곧바로 소멸되어가는 오늘과 바로 그러한 운명에 처하게 될 틀림없이 오는 내일의 무한한 연속체의 바깥에 있을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자 “세계”이자 “존재하지 않는” 존재, 즉 ‘죽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보케루’에 기댈 수밖에 없는 관념, 즉 동물에게도 있는 ‘임박한 죽음에의 공포’와 구별되는, ‘언젠가’ 자기의 소멸이 불가피하다는 관념이 야기하는 죽음의 공포(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삶의 허무)는 자연 내에서 인간만이 그리고 어쩌면 문명화된 인간만이 걸린 병의 일종이라고 『시간의 비교사회학』(時間の比較社会学)에서 마키 유스케(真木 悠介)는 말한다.14 그러나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이런 관념을 야기하는 시간에 대한 태도를 일련의 ‘이성적’ 영위 속에서 유지하고 그것을 객관적 사실로 만들어 스스로 그 바깥을 볼 수 없게 만들어 왔던 근대적 주체들이‘인간’으로 구획 지어지고 그런 이름으로 불려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역사적인 것이라 해도, 우리가 이러한 ‘인간의 조건’에 매개되어 있을 때, 그 바깥의 어떤 초월적 공간을 상정하고 이런 조건을 대상화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선형적이고 불가역적인 시간 감각 외에도 우리가 매개되어 있다는 의식조차 갖지 못할 정도로 완전하게 매개되어 있는 많은 것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이리라. 가령 자본주의 바깥의 공간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초월적 비판자라는 위치가 가능한가, 혹은 바람직한가의 문제다.
그러나 그 역시 결국엔 온갖 ‘역사적’이고 ‘근대적’인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조건들에 매개되어 있는 일개 생활인임은 물론 그 생활인으로서의 그것보다 반성의 기회가 드문, 훨씬 더 교묘하고 촘촘하게 매개되어 있는 예술가라는 마스크까지 끼고 있다 할지라도, 한 예술가가 예술로서 세상에 서명할 때 ‘만일 그 바깥에 설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적 시도가 없다면, 한 사회가 그를 굳이 예술가로 불러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내일›은 의심하지 않음으로써 틀림없는 내일을 맞이하는 세계에서 출발하여, 그 바깥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그 바깥 역시 사실은 같은 원리가 작동하는 내부임을 알게 되는 자의 의심스런 얼굴을 거쳐, 그 의심을 밀어붙였을 때 도출되는 극단적인 가정을 한 인물을 통해 제시함으로써 가장 자명한 인간됨 바깥에 설 수 있는가를 묻는 시도다.인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죽음과 겨루어 왔고 그 수많은 시도들 가운데 특별히 아름답다고 여겨진 것들이 지금도 박물관과 도서관과 미술관과 영화관에서 숨 쉬고 (혹은 죽어) 있다. 그러한 시도의 하나일 ‹내일›에서 정윤석은 죽음에 대한 시간 차원의 가정을 한 세계의 바깥, 그 세계의 바깥이라는 공간적 관념으로 구축하면서, 영화라는 ‘시간을 다루는 학문’15의 주석 하나를 작성한다. 작가는 어쩌면 이제 막 이 학문의 출발점에 섰을 뿐이지만, 다음 작품은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내일이 부정된 세계에서 무엇이 보일 것인가.
나가며: 작품이 마주한 시간의 문제
그런데 이러한 출발점에서 작가가 만난 문제는 공교롭게도 그가 천착한 시간에 관한 것이다.작품은 세상에 공개되자마자 한 가지 곤경에 처해 있다. 이제까지 논한 ‹내일›은 미술관에서 전시 작품의 일부로 상영되고 있다. 러닝타임은 2시간 34분으로, 관람객의 부동성과 수동성을 전제로 하는 영화관에서는 받아들여지는 것이지만 미술관이라는 장소는 전혀 다른 관람 태도를 유도한다. 이번 전시에는 이 작품과 함께 2017년 말 섹스돌 공장에서 촬영한 대형 사진이 포함되는데, 이 사진들이 매우 문제적이고 폭력적인 물건을 심미적으로 다루었다는 비판과 이 이미지의 폭력성 때문에 그의 후보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는 여론이 존재한다. 전시라는 맥락 속에서 이 사진들의 의미는 영상 작품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지만, 그것은 역방향으로도 마찬가지다. 전시 작품들은 별개가 아니며, 무엇보다 관람객들이 전시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것은 2시간 34분의 영상이 아니라 이 문제가 되고 있는 사진들이다. 그리고 이 사진들만이 즉각적으로 찍혀지고 확산되고 원격에서도 인지되는 것으로, 전시를 직접 보지 않은/못한 사람들에게는 엄연히 이것이 전시 전체로 받아들여진다. 전시된 작업들의 중요도를 매겨 이 영상 작업을 주된 평가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문제는 깨끗해지지만, 그럴 경우 이 작품에서 애써 탐구한 ‘시간’이 그것이 상영되는 조건에서 야기하는 구체적인 문제는 방기하는 셈이 된다. 게다가 이러한 문제 제기의 출발점은 우리에게 너무 당연시되어 있는 시각성에 대한 반성과 맞닿아 있으므로 ‹내일›의 문제의식과도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나는 이후의 작가의 작업은 물론,이 문제에 관한 숙고와 응답 또한 기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