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주

Interview
CV
1982년 부산 출생
서울에서 거주 및 활동
학력
2009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회화과 석사 수료, 서울, 한국
2005
홍익대학교 회화과 학사, 서울, 한국
주요 개인전
2024
《미련 未練 Mi-ryeon》, 페리지갤러리, 서울, 한국
2023
《라이다 라이다 내 무덤 좀 찾아주소》, 금천예술공장 PS333, 서울, 한국
2021
《M》, 아웃사이트, 서울, 한국
《인간과나 人間科我》, Hall 1, 서울, 한국
2020
《차르르 차르르 Ghost White (#F8F8FF Opacity 75%) 幽靈白》, 갤러리 조선, 서울, 한국
2019
《애동》, 두산갤러리, 뉴욕, 미국
2018
《물렁뼈와 미끈액》, 두산갤러리, 서울, 한국
2017
《오메가가 시작되고 있네》, 산수문화, 서울, 한국
2016
《오늘은편서풍이불고개이겠다》, 스페이스 오뉴월, 서울, 한국
《돌과 요정》, 더 북 소사이어티, 서울, 한국
주요 단체전 및 스크리닝
2025
《올해의 작가상 2025》,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한국
《아득한 오늘》, 국제갤러리 한옥, 서울, 한국
《말하는 머리들》,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2024
민화와 K팝아트 특별전 《알고 보면 반할 세계》, 경기도미술관, 안산, 한국
2023
《마니에라》, 두산갤러리, 서울, 한국
《Natural Born Odds》, 살리하라 아트센터, 자카르타, 인도네시아
《수피춤을 추자!》, 문화비축기지 T4, 서울, 한국
《Vom Spielen》, 루드비히 미술관, 코블렌츠, 독일
2022
《닷과 대쉬의 모험》, 엘리펀트스페이스, 서울, 한국
《HOW CURRENT IS A CASTHE?》, 쿤스틀러하우스 슐로스 발모랄, 바트엠스, 독일
《산의 소리: 성적 트릭스터로서 구미호》, 분홍공장 별관, 홍천, 한국
2021
《선셋 밸리 빌리지》, 아트선재센터, 서울, 한국
《경이로운 전환》, 부산현대미술관, 부산, 한국
《Perform Collection System》, 엘리펀트스페이스, 서울, 한국
《Fortune Telling: 운명상담소》, 일민미술관, 서울, 한국 (특별 스크리닝)
2020
아트 플랜트 아시아 2020 《토끼 방향 오브젝트》, 덕수궁, 서울, 한국
《더블 비전 Diplopia》, 아르코미술관, 서울, 한국
2019
제6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공생도시》, 안양파빌리온, 안양, 한국
《hOle》, 타이베이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타이베이, 대만
2018
2018부산비엔날레 《비록 떨어져 있어도》, 구 한국은행 부산본부, 부산, 한국
《정글의 소금》, 베트남여성박물관, 하노이, 베트남
《날씨의 맛》,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서울, 한국
CROSSROADS 2018,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샌프란시스코, 미국
2017
《두산아트랩 2017》, 두산갤러리, 서울, 한국
주요 퍼포먼스
2025
〈미래 흔적 연습: 체험판〉, 아망트, 뉴욕, 미국
2024
〈죽척〉, 페리지갤러리, 서울, 한국
2023
〈라이다 라이다 내 무덤 좀 찾아주소〉, 금천예술공장 PS333, 서울, 한국
〈안방극장〉, 금천예술공장, 서울, 한국
2021
〈인간과나 人間科我〉, Hall 1, 서울, 한국
2019
〈땅을 접는 법〉, 타이베이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타이베이, 대만
2017
〈두산아트랩: 릴레이 강연 퍼포먼스 유리거울 – 임0님의 나라〉, 두산아트센터, 서울, 한국
주요 기획
2023
《드라마 연구회》, 금천예술공장, 서울, 한국
2015
《공동수련: 辱 욕보다》, 북노마드 a. space, 서울, 한국
주요 출판물
2025
임영주. 『고 故 The Late』. 서울: 나선프레스
임영주. 「영상매체의 양방향성과 외연탈피 가능성 연구: 임성한 드라마를 중심으로」. 『드라마는 세계』. 서울: 뉘앙스
2023
임영주. 「접힌 글」, 『계간 시청각』 6호. 서울: 시청각
2021
임영주. 『인간과나 人間科我』. 서울: 나선프레스
2018
임영주·김시습·문혜진·안소현. 『돌과 요정 3: 오메가가 시작되고 있네』. 서울: 미디어버스
2016
김시덕·박찬경·임영주. 『돌과 요정 1: 괴석력 怪石力』. 서울: 도서출판 오뉴월
임영주. 『돌과 요정 2: 오늘은편서풍이불고개이겠다』. 서울: 서울시립미술관
2015
안소연·윤동희·임영주. 『공동수련: 辱 욕보다 – 수련 일지 보고서』. 서울: 북노마드
2014
임영주. 『삼신뎐 三信傳』. 서울: 미디어버스
주요 수상
2025
프리즈 서울 아티스트 어워드, 한국
2024
프리즈 × 샤넬 나우 & 넥스트, 한국
페리지갤러리 페리지아티스트, 한국
2017
제14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코리안 엑시즈 어워즈, 한국
주요 주요 레지던시
2025
아망트 스튜디오 & 리서치 레지던시, 뉴욕, 미국
2023
금천예술공장, 서울, 한국
2022
쿤스틀러하우스 슐로스 발모랄, 바트엠스, 독일
2021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고양, 한국
2019
두산갤러리 레지던시, 뉴욕, 미국
주요 소장처
경기도미술관, 한국
두산갤러리, 한국
부산현대미술관, 한국
서울시립미술관, 한국
Critic 1
기술의 무덤, 감각의 유적지, 다가올 신호
김해주 (싱가포르 아트 뮤지엄 선임 큐레이터)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믿음을 1.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 2. 종교적인 교리나 신, 초월적인 존재 등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정의한다. 어떤 사실이나 현상, 제도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신뢰의 태도나 정신 상태는 그 자체로 ‘감정’에 기반하므로 비가시적이며 유동적이다. 이러한 믿음이 집단적으로 형성될 때 이는 문화가 되고, 제도가 되며 그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사회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임영주는 ‘믿음’을 특정 종교나 신념 체계에 귀속시키지 않으면서 그것이 어떻게 문화로 드러나고 일상에서 소비되는지 섬세하게 포착한다. 그의 작업은 ‘믿음’에 이르는 기술적, 시지각적 장치들을 탐구하여 작업의 요소로 사용해 왔다. 이를테면 그는 신앙에서의 믿음과 보편적인 사실로 여겨지는 과학의 언어에서 발견되는 모호함을 엮어 믿음의 시각적 표본들을 제시했다. 작가는 “과학이라는 테두리가 덧씌워지면 손쉽게 그 정보를 믿게 되는데, 그 과정이 비과학적인 것을 대할 때보다 훨씬 신앙에 가깝다”라고 쓴다.1 〈테스트_물질〉(2016)에서는 실험용 버너로 달구어지고 있는 돌에 손을 대고 있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촬영하고 여기에 지글거리는 사운드를 넣어 반복함으로써 과학 실험과 초자연적 체험의 경계가 뭉쳐진 장면을 만들었고, 〈대체로 맑음〉(2017)에서는 날씨 예보에 사용되는 언어의 모호한 표현에 명상적인 시각 이미지와 사운드를 접합하여 정보의 사실적 성격을 변환한다.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보다 ‘무엇을 보게 하고 어떻게 믿게 하는가’에 집중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발견되는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엉뚱한 혼재, 논리와 미신적 신앙의 결합을 관찰하며 이러한 장면이 형성되는 구조를 독창적 이미지 조합으로 제시한다. 작업에서 이것이 잘 드러나는 측면은 영상의 편집 효과이다. 동해의 촛대 바위를 시간대별로 포착하고 클로즈업하는 〈애동〉(2018)의 거의 포르노그래피적인 이미지의 반복이나, 〈무드〉(2018)에서의 “당신도 그렇습니까?”와 같은 대사 반복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믿음은 확신이 아니라, 불확실함 속에서 반복적으로 되묻는 상태”라고 썼듯이 작가는 이미지와 소리의 반복이 믿음의 감각을 이끄는 기본적 구조로 작동한다는 것을 인지한다. 피드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상품의 정보나 특정인들의 피드에 반복해서 올라오는 가짜 뉴스들이 구매 행동이나 집단의 광신을 이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느닷없는 화면 중첩과 분할, 선명한 그래픽 이미지의 결합, 재난 경보음, 에코가 들어간 목소리, 명상적인 사운드 등의 사용도 믿음을 이끄는 시지각적 장치이다.
작가는 한국의 특징적 대중문화 코드를 적극 차용한다. 핸드폰을 사용하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신경질적인 사운드의 재난 경보음,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날씨 예보임을 알게 하는 기상청의 음악, 서로를 별칭으로 부르는 동호회 문화, SNS에 떠도는 밈 등 특정 상황을 환기하거나 특정 상태로 이끌기 위한 동기로 사용되는 익숙한 코드들이 등장한다. 한편으로는 한자 타이포그래피가 사용될 때 오래된 무언가를 지칭하고, 과거의 전설을 연상시키거나 진지함의 표상이 된다는 것도 알고, 에코가 섞인 목소리가 내담자의 화법이나 명상의 내레이션 영상에서 사용된다는 것을 안다. 〈인증샷_푸른 하늘 너와 함께〉(2018)에서 사용된 ‘여친짤’ 밈의 검은 머리와 하얀 옷이 귀신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도, 그래서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익숙한 미신적 관습과 연관된 시각 코드에 결합해 있다는 것 역시 알아차리게 된다.
이처럼 한 사회의 집단적 경험을 형성하는 동시에 집단적 문화의 결과물인 시지각 기호를 풍부히 사용하고 있지만, 정작 영상 작업은 이를 비판하거나 단순 희화화하거나 이를 통해 특정 이야기 구조를 만들거나 끝맺음을 하지 않는다. 반복되며 회전하여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영상의 구조는 해변에 널린 빈 조개껍질처럼 공허한 장소를 그리고, 사운드는 여기저기 날카롭게 튀어 오른다. 충돌하는 기호와 이음매 없는 장면들이 느닷없이 엉뚱하고 어쩐지 허술해 보이지만 의도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정교하기도 하다. 이토록 믿음을 위해 사용되는 장치들을 아무리 엮어 놓았어도 믿음의 강렬한 감정이 생기지 않게 만드는 작가의 기술은 헛헛하여 허상을 가른다.
그렇다고 사회적 상황이나 이슈가 작업 속에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 이들은 그때그때 새롭게 떠오르는 ‘믿음의 대상’으로 작업의 구체적인 동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건들은 임영주의 작업 속에서 사실적인 인용으로 등장하기보다 사건을 대변하거나 사건 자체를 거의 대체해 버린 미디어 속 이미지로 등장하여 이로부터 뛰어오르는 다른 생각들의 디딤판이 된다. 이를테면 남북 정상의 비공식 회담 장면을 멀리서 포착한 언론의 이미지에서 출발하여 미지의 대상을 탐구하려는 욕망을 연결로 삼아 초신성의 폭발로 이어지는 〈객성〉(2018), 주식시장, 흥분 상태에서의 뇌파, 반복되는 걷기, 딥페이크 등 기술과 자본을 향한 욕망과 환상을 연결로 삼아 묵시론적으로 그린 〈세타〉(2019–2020) 등이 그러하다. 자유로운 연상으로 전개되는 이미지, 비정형적 사운드와 편집 방식, 다채널로 확장되는 설치를 통해 사건은 그 맥락에서 벗어나 작가의 소용돌이 같은 사고의 흐름을 시각화하는 이미지이자 ‘무드’로 전환된다.
무언가를 믿게 만드는 효과와 장치를 탐구하는 실험은 〈인간과나 人間科我〉(2021)를 거치며 전시, 퍼포먼스, 책, 웹사이트 등을 활용한 복합적인 매체와 형식으로 심화된다. 작가는 “암호화폐나 가상현실과 같은 최신의 기술에 반영된 유체이탈적 또는 헛것에 대한 욕망을 포착”하는 것이 〈인간과나 人間科我〉의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특히 VR과 같은 장치가 인간을 스스로의 신체에서 분리하여 외부로 이동하려는 욕망을 반영하며, 따라서 현실 도피의 욕구를 반영한다고 본다. 그러나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탈피 또는 도피의 상태에서도 여전히 ‘헛것’을 보고 있다는 자각을 놓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여전히 껍데기로 남겨진 자신의 신체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제가 예전에 명상을 배운 적이 있는데, 그때 가장 중요하게 배웠던 것이 ‘각성과 몰입의 반복’이었습니다. 각성 없는 몰입은 위험하고, 몰입만으로는 깊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기술도 마찬가지로, 현재 이곳에 존재하는 내 신체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감각을 분리하고, 몰입된 세계를 바라보다가 다시 이곳의 나를 느끼는 것이 가능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교차 지점에 흥미를 느끼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2
특히 신체를 재료로 삼고 ‘현재’의 시간 감각을 불러일으키며, 관객을 포함한 공동의 몸을 주요한 맥락으로 개입시킨다는 점에서 퍼포먼스 매체는 ‘기술의 유체이탈적 욕망’을 실험하는 효과적인 재료로 작동한다. 퍼포먼스는 이 글의 뒤에 설명할 신작의 ‘유사 VR’ 경험처럼 특정 시간과 공간을 몰입과 각성의 기술적 장치의 유사 실험으로 이식하는 형식이 된다. 이 작업에서 퍼포먼스는 마치 교회나 법당에서 그러하듯 한 장소에 모여 한 방향으로 앉아 삼면의 영상 상영을 체험하는 구성이다. 장면은 다시 웹사이트의 소스가 되어 웹상의 라이브 퍼포먼스로 재생된다. 이처럼 다층적 경험의 구성은 VR이나 인공지능과 같은 디지털 기술이 새로운 믿음의 대상으로 나타나게 될 때 그 믿음의 틀 안에서 기술이 작동하는 역동과 피드백을 추적하는 데 사용된다.
〈웨이팅 M〉(2021), 〈카밍 시그널〉(2023), 〈라이다 라이다 내 무덤 좀 찾아주소〉(2023), 〈미련 未練 Mi-ryeon〉(2024) 등의 작업은 이 시기를 거치며 만든 작업이다. 이 시기에 또한 작가는 할머니의 죽음을 경험하며 탈신체의 세계와 사후에 대한 개념을 장소로서 어떻게 구현하고 이 안에서 기술의 작동을 어떻게 제시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할머니의 영정사진에 잠깐 인사를 하고 장례식장을 나온 후 곧장 할머니 방으로 갔다. 방은 아무런 정리가 되어있지 않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듯이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흙 매트에는 여전히 열이 올라 있었고 이불 한쪽도 젖혀 있었다. 방을 정리하기 위해 매트의 전원을 끄고 옷가지를 치우다가 젖혀져 있는 이불을 손으로 잡고 침대 위 빈자리에 누웠다. 등은 따뜻했고 냄새도 그대로였다.”3
온기와 냄새가 남아 있는 빈자리. 이 노트는 작가가 어떠한 감각을 쥐고 다음을 준비해 왔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아래는 작가가 이에 훨씬 앞서 남긴 글이다.
“어떤 현상을 겪거나 무언가를 만났을 때 그것이 한 차례로 그치지 않고, 떨어지지 않고, 나에게 붙어 있는 것들이 있다. 강하게 믿는다는 것이 의지를 동반한 믿음, 즉 신념이라고 한다면 의지 없이 믿게 되는 것과 믿어진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확신 없는 믿음을 나는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확고한 신념에 비해 신앙은 자주 흔들리고 의심이 나고, 묻고, 또 되묻게 된다. 그것이 몸체에 붙어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되뇌다 보면 그것의 군더더기가 한가득 남게 된다.”4
떨어지지 않고 나에게 붙어 있는 것.
《올해의 작가상 2025》에서 소개할 작품 제목은 〈고 故 The Late〉(2023–2025)이다. 이는 어떤 이의 죽음 후 동양권에서는 ‘고’를 붙이는 데 반해 영어로는 ‘the late’로 표시하는 차이에서 가져왔다. 한자 고故는 시제적으로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지금에 영향을 남기며 여운을 유지한다. 작가의 다른 작업 제목을 표현으로 빌어 연결하자면 이는 ‘미련’으로 이어진 과거를 뜻하며 죽음을 삶의 연장선에 있는 기억과 정서의 층위로 포괄한다. 반면 ‘the late’는 죽음을 사건의 종결로 두고 망자의 죽음 이후의 사회적 지위 변환을 공식화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한자, 영문 제목이 대변하는 죽음에 대한 서양과 동양의 사고관이 드러나는 그 공간, 빈 공간을 짓는 것이 작업의 목표다.
전작인 〈인간과나 人間科我〉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 작업도 〈고 故 The Late〉라는 이름으로 책, 영상, 웹사이트, 설치, 퍼포먼스 등의 여러 매체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가 뒤섞이는 ‘빈 공간’을 그려 나갈 계획이다. 일단 전시장에서 관객은 천장과 바닥, 비석처럼 나란히 놓이거나 벽에 걸린 모니터를 통해 한 시간 길이로 싱크된 12채널의 영상을 볼 수 있다. 파편적으로 구성된 각 장면은 역사와 미신, 미신과 기술, 기술과 생존, 생존과 윤회,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보이는 것과 보는 것,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등 끝말을 읽듯이 반복적으로 충돌하면서 상호 연결된다. 작가는 역사학자, 경제학자, 탐조인, 박제사와의 대화로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때로 상대의 인물에 다른 목소리가 입혀지거나 서로 이탈하거나 시차를 둔 사운드와 영상을 배치한다. 전시장 전면에 설치된 3채널 영상과 후면에 설치된 2채널 영상은 과거와 현재, 또는 관찰자와 관찰 당하는 자의 관점을 교차하고 천장에 투사되는 영상은 때로 하늘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땅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전체 전시 공간은 점차 하나의 360도 VR 환경의 시각 경험처럼 작동하게 되고 관객의 몸은 그 안에 포함된다. 기존 작업에서도 포함되었던 VR 영상에서 스티칭5의 실패, 장비의 노출, 오류 등의 기술의 틈새는 여전히 영상에 포함되고, VR 이미지의 전사轉寫이면서 동시에 실제인 전시 자체도 ‘오류’와 ‘장비의 노출’을 포함한다.
“저에게 VR이 하나의 헛것을 본다는 것에 대한 태도였고, 그 헛것을 보는 사람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면, 그것을 유물 혹은 고물처럼 배치하기로 하였어요.”6
관객은 VR 헤드셋을 쓰지 않고도 VR과 유사한 환경을 경험하는 동시에 관처럼 짜인 구조물 안에 VR 헤드셋을 쓴 조각상이 누워 있는 것을 본다. 가위눌린 꿈속에서 잠자고 있는 나 자신을 내려다보는 유체 이탈적 상황을 연상시킨다. 그 ‘더미-나’가 보았을 VR 속 이미지는 별도의 모니터에 상영되고 있다. 이 같은 이중 구조는 관객과 관 속에 누워 있는 몸과 자신을 접속하는 동시에 이탈시키고(각성과 몰입의 구조), 전체가 VR 속 이미지처럼 구성된 전시 환경이 결국 ‘더미-나’가 누워 있는 공간과 같은 성격임을 암시하게 한다. 이로써 작품을 바라보는 나의 현재와 VR 이미지로서 재생되는 이미 끝나버린 과거, 그리고 ‘미래의 상황’이 중첩되는 비선형적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
전시장은 빈 무덤이자 빈 공간으로 계획되었다. 여기에는 사람과 동물의 신체의 일부가 화산재에 덮여 응고된 순간처럼, 어떤 이미지의 찌꺼기처럼 붙어 있다. ‘빈 무덤’은 원래 누군가가 사후의 집으로 예비하고 점 찍어 놓은 장소를 뜻한다. 전시에서 이 빈 무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공간 중 하나는 전시장 가장 안쪽 작은 공간이다. 여기서 관객은 마치 땅속에 누운 듯한 자세로 영상과 사운드를 감상하며, 천장에 설치된 모니터를 바라보게 된다. 칼을 입에 물고 거울을 보면 미래의 배우자의 모습이 보인다는 한국 괴담에서 착안한 장면에서는,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늙다가 젊어지기를 반복하는 얼굴을 보여준다.
천장 모니터 아래에는 두 개의 돌 모양의 스피커가 각기 다른 높낮이로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관객은 ‘두 돌이 서로 대화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이 대화는 실제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가가 각색하고 새로 녹음한 것으로 사람 간의 대화라기보다는 새들, 기계들, 혹은 돌들의 대화처럼 들린다. 이를 엿듣는 나는 고인이 되고, 부재하는 것은 있는 것의 기억이 되고, 인간과 비인간 신체가 얽히고 자신의 미래는 사후에 포개어진다.
이 작업에서 VR은 죽음과 미래를 연결하고 기억, 상실, 불확실한 미래를 매개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고(故, 그러나 동시에 현재에 붙어 있는) VR을 통해 관객은 지나간 기술의 유적지에 놓인 발굴자가 된다. 기술이 어떻게 세계를 보게 만들고 믿게 만드는지 그 구조를 물어 온 작가에게 이 새로운 챕터의 전시는 ‘믿음 이후의 풍경’을 제시하는 방법이자, 현실 너머를 이해하기 위한 조율의 실험이다. VR과 인공지능의 관습적 사용을 벗어나 기술 너머의 세계로 나아가고 체험과 감각을 발굴할 가능성을 연다.
이 작업에 겹쳐져 있는 또 하나의 트랙은 ‘새’와 관련한 다양한 모티브이다. 작가는 새와 관련한 다양한 에피소드를 영상의 전반에 포함한다. 작가는 최근에 새를 보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 작업을 진행하는 중 뉴욕에서 레지던시 생활을 하게 되면서 탐조 행위를 이주와 이동의 맥락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돌을 찾아다니는 이들을 쫓았던 〈돌과 요정〉(2016) 때처럼 작가는 새를 관찰하는 이들에 합류하고 그들의 보는 방식을 관찰한다. 그는 탐조의 과정이 눈으로 확인하는 것 이상의 다양한 감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지한다. 탐조는 눈으로 보기 전에 먼저 소리를 통해 새의 존재와 위치를 확인한다. 철새가 길을 잃거나 낙오되어 미조迷鳥가 되면 새의 소리도 달라진다. 마치 이민자들의 언어가 새로운 문화와 체험 속에서 미세하게 변화하는 것과 유사하다. 한편, 탐조하는 이들과의 만남과 인터뷰는 ‘빈 무덤’의 신체감각/기술 사이의 결합과 분리라는 지점과도 연결되는 모티브를 제공한다. 어떤 이는 탐조에서 신체의 감각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른 이는 카메라 렌즈의 성능을 우선시한다.
무엇보다 ‘새’는 작가에게 이 작업에서 조금 더 사적이고,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하는 매개인 듯하다. 오리가 북쪽으로 떼를 지어 날아가는 것을 저승으로 가는 것으로 여겼던 설화적 상상이기도 하고, 새의 울음을 따라 부르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 할머니의 이 고유한 언어를 기억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더하여 학춤을 배우고 추기 시작한 어머니의 모습이 엮이며 새의 연상은 자유롭게 날아간다. 작가는 어렴풋이 세대를 거치며 이어지는 감각의 끝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다. 그는 흰 옷을 입고 날아가는 새들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부른다. 은박의 껍질을 두른다. 던져지는 빛을 반사하며 인사를 보낸다.
1. 임영주, 『돌과 요정1: 괴석력』(서울: 도서출판 오뉴월, 2016), 115.
2. 임영주, 김해주와의 이메일, 2025년 5월 25일.
3. 이 글은 『계간 시청각』 6호(2024, 2022년 집필)에 수록된 임영주의 「접힌 글」에서 재인용한 것으로, 원래 작가의 책 『인간과나 人間科我』의 159–160쪽에 수록되었던 내용이다. 작가는 글의 각주를 통해 “『인간과나 人間科我』 159쪽 한가운데에는 글자 ‘구멍’이 박혀 있고 160쪽은 빈 페이지이다. 아이고~ 선생님, 빈 무덤은 어떻게 만드나요? 빈 땅에 구멍을 내어 자리를 만들면 됩니다.”라고 덧붙인다.
4. 임영주, 『돌과 요정1: 괴석력』, 235.
5. 여러 개의 카메라로 촬영한 VR 영상(360도 영상)의 화면들을 하나로 이어 붙이는 작업을 말한다. – 편집자
6. 임영주, 김해주와의 이메일, 2025년 4월 21일.
Critic 2
임영주, 기술의 사후세계와 빈 무덤
마사 조셉 (뉴욕현대미술관 미디어·퍼포먼스 부문 부큐레이터)
기계학습 이론에서 ‘AI 환각’은 대규모 언어 모델이 현실과 무관한 패턴을 인식하여 결과를 생성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때 만들어지는 출력은 오류나 왜곡, 또는 허구에 가깝다. IBM은 이러한 환각을 인간이 구름에서 형상을 보거나 달 표면에서 얼굴을 알아보는 현상에 비유하며, 이를 ‘시적 오독誤讀’이라고 표현했다. 좀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이러한 환각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욕망의 투영으로 읽힌다. 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이런 믿음은 지각의 실패가 아니라 상상의 행위이며, 상상력은 신성한 영역이다.
믿음의 문제와 그것이 사회적·문화적으로 표현되는 양태는 임영주에게 있어 사유의 핵심이다. 영상, 설치, 퍼포먼스, 출판을 넘나드는 임영주의 작업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 비합리와 미신, 종교적 신념이 어떻게 여전히 지속되며 기술의 진보와 나란히 존재하는지 탐구한다. 임영주는 이런 믿음을 논파하려 들기보다 그 모순을 그대로 수용한다. 익숙함과 모순을 함께 품은 시선으로 주제를 다루며, 영성과 환영, 기술 진보를 하나의 형이상학적 탐색 속에서 연결한다. 영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 오래된 것과 미래적인 것의 이분법은 해체된다.
다양한 매체로 이루어진 〈인간과나 人間科我〉(2021)는 임영주의 예술 실천에 개념적 토대를 쌓고 기술과 영성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사유를 구체화한다. 작업의 중심에 있는 출판물은 선언문이자 과학 논고인 동시에 종교 경전이기도 한 혼성적 텍스트로 읽힌다. 임영주는 이 책에서 아시아의 오래된 영적 수행을 통해 현대 과학과 기술을 설명하려 시도한다. 이 두 논리 체계는 대립하는 것으로 비춰지곤 하지만, 두 가지 근본적 목표를 공유한다. 하나는 육체를 초월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환영(헛것)을 추구하는 일이다. 임영주가 보기에 과학적 진보와 형이상학적 믿음은 모두 육신과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욕망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백남준이 〈TV 부처〉(1974)에서 그랬듯, 임영주는 전통적 영성을 다루는 주제와 기술적 과정을 병치한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서 외계外界란 “하늘 너머”가 아니라 “몸 밖”에 있다고 쓴다. “인간은 몸을 극복하고 그 바깥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다양한 수행을 해왔다. 환영을 보는 행위도 그 방법 중 하나이며, 명상이 그 대표적 예다”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어서 그녀는 초월적 수행의 계보를 그려낸다. 이는 환각제를 통한 의식 탐구, 불교의 명상, 무속 의례는 물론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같은 기술적 진보까지 포괄한다. 임영주가 정의한 이 계보는 1960년대 대항문화에서 오늘날의 실리콘밸리에 이르며, 자아를 해체하고 육체를 초월하며 비물질에 접근하려는 욕망이 이끄는 ‘테크노-신비주의(techno-mysticism)’라는 일관된 흐름을 드러낸다. 1960년대 히피 문화에서 서구 예술가들과 보헤미안 공동체 구성원들은 환각제를 실험하는 동시에 ‘공空’을 강조하는 불교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후 1980년대에 이르러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확장되면서 이들 중 다수는 실리콘밸리나 월스트리트로 진출했고, 이들의 유입은 암호화폐, 가상현실, 인공지능과 같은 비물질적 기술의 개발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임영주에게 가상현실의 첨단 디지털 이미지 기술 창조는 초월의 욕망과 불가분하게 얽힌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환영과 연결된 의식의 확장을 추구하는 초월적 탐구의 결과이기도 하다.
『인간과나 人間科我』를 읽으며, 이러한 탐구의 흐름이 19세기 서구의 판타스마고리아와 강력한 역사적 공명을 이룬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타스마고리아는 영화 발명 이전에 등장한 시각적 스펙터클로, 광학적 착시와 극장적 효과를 활용해 영혼, 유령, 이계적 환영을 불러냈다. 판타스코프(Fantascope)나 마술 환등기(Magic Lantern) 같은 장치들은 초기 애니메이션이자 투사 기법으로, 이미지를 살아 움직이게 보이도록 했다. 이와 함께, 페퍼의 유령(Pepper’s Ghost) 기법은 관객이 연기 속에서, 혹은 유리 표면에 반사된 환영을 직접 목격할 수 있도록 했다. 19세기 말, 카바레 무대에서는 페퍼의 유령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사람이 관 속으로 들어가고, 관객의 시선으로 보면 착시 효과로 인해 그 사람이 해골로 변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판타스마고리아는 최첨단 기술의 발전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 너머와 연결될 가능성을 약속하는 듯 보였다. 미디어 이론가 톰 거닝(Tom Gunning)은 여기서 ‘미디엄(medium)’이라는 단어가 지닌 이중적 의미를 지적한다. 19세기 서구에서는 영혼의 메시지를 수신하고 전달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을 ‘미디엄’(영매)이라 불렀다. 이 용어는 1960년대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이 “미디엄이 곧 메시지”라고 선언하면서 새로운 중요성을 띠게 된다. 이때부터 현대 기술은 하나의 미디엄이 된다.
미술사학자 노암 엘콧(Noam Elcott)이 언급하듯, 이러한 19세기의 스펙터클은 살아 있는 신체와 매개된 이미지를 하나의 통합된 경험의 장으로 결합하는 독특한 ‘디스포지티프(dispositif)’를 연출했다. 임영주의 설치 작업, 특히 VR을 활용한 작품들은 이러한 전통을 따른다. 21세기에 디지털 미디어와 맺는 관계에는 이런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믿음과 영성이 기술적 이미지의 생산, 창작, 소비 과정에 얽혀 있다는 점이다. 임영주는 이런 연결을 구조적인 것으로 본다. 이는 내용일 뿐만 아니라 형식이기도 하며, 그녀가 애초에 이러한 이미지를 만들게 된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신체와 매개된 이미지를 퍼포먼스와 연극이라는 전략으로 하나의 영역에서 결합하려는 임영주의 관심은 〈미련 未練 Mi-ryeon〉(2024)의 전신인 〈라이다 라이다 내 무덤 좀 찾아주소〉(2023)에서 잘 드러난다. 360도 영상, 퍼포먼스, VR을 통합한 작업은 관객을 누울 자리 또는 빈 무덤을 찾는 여정으로 이끌며, 그 과정에서 물리적 영역과 디지털 영역을 붕괴시킨다. 이후 빈 무덤은 작가의 최근 작업에서 반복되는 모티프가 된다.
이 무덤은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우리 세계 너머의 영역에서 삶이 계속된다는 믿음의 상징이다. 한국에는 저승사자를 속이기 위해 자신의 묫자리를 미리 사두고 오래도록 비워두는 풍습이 있었다. 이렇게 빈 무덤은 또 다른 영역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점유와 투사, 의미 부여를 기다리는 보이지 않는 건축물, 즉 가상의 공간이 된다. 임영주의 세계관에서 이러한 빈 공간은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보다 더 급진적인 것, 즉 두 영역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인식을 표현한다. 이곳의 세계 ‘다음’에 이어지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 세계와 나란히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 즉 하나의 포털을 통해 연결된 곳이라는 선언이다. 이러한 급진적 동시성은 미신이 아니다. 이것은 기술이며, 신념 체계이자 생존을 위한 전략이다. 그래서 임영주는 이 빈 무덤을 메타버스가 한국적 맥락에서 처음 발현된 사례라고 설명한다. 사용자들이 아바타의 형태로 거주하는, 공유된 가상 세계로서의 메타버스 말이다.
이러한 감수성은 임영주의 사유에 영향을 준 책 『시간 길들이기, 죽음의 때: 사회적 기술과 의례』(2013)의 논의와 공명한다. 저자들은 책의 서문에서 죽음을 둘러싼 현대의 의례가 점점 더 기술적 매개에 의해 형성되며, 죽음을 대면하는 새로운 시간적 틀을 만들어 낸다고 제안한다. 임영주의 작업은 이러한 관점에 맞닿아 있으며, 죽음을 종결적 사건이 아니라 확장된 시공간적 과정으로 다룬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의례 형식을 통해 예비되고, 연습되며, 유예되고, 재조직되는 무언가로 다루는 것이다. 그녀의 설치 작업은 이러한 시간의 방향을 재배치하며, 우리가 개인 혹은 집단 차원의 죽음을 사유할 때 시간 속에서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머물 수 있을지를 묻는다.
임영주는 《올해의 작가상 2025》 출품작인 〈고 故 The Late〉(2023–2025)에서 빈 무덤에 대한 탐구를 이어간다. 영상, 사운드, 퍼포먼스, 출판, 가상 현실을 하나의 몰입형 환경으로 통합한 이 전시는 공空, 시간, 죽음에 대한 작가의 탐구를 확장한다. 12채널로 이뤄진 영상 설치는 정교하게 동기화되고 연결된 역동적 시스템으로 구성되며, 이미 실패한 기술들이 지닌 불확실한 잠재성을 각기 다른 장章으로 풀어낸다. 작품의 서사는 이러한 탐구의 여정 전반에 걸쳐 역사학자, 경제학자, 탐조가, 박제사들과 마주한다. 그 첫 번째 장에서는 빈 무덤을 찾는 주인공 ‘M(미조迷鳥)’의 이야기를 일지 형식으로 풀어내며, 그러한 공간을 미래에 닥칠 위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서사들 속에서, 기술이 묵시록적 시나리오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판단은 끝내 모호하게 남겨진다.
동명의 제목하에 전시 공간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일련의 작업들은 ‘주마등 走馬燈 Life Review’라는 구조물로 시작된다. 터널을 연상시키는 이 구조물의 입구에는 ‘제3의 눈’에 관한 교육 영상이 상영된다. 이 작품은 전시 공간의 성격을 규정하며, 공간을 마치 동시대의 디오라마처럼 구성한다. 박물관의 디스플레이이자, 영적 지침의 장인 것이다. 설치의 중앙에는 석관 같은 구조물이 놓이며, 그 위에는 VR 헤드셋을 쓰고 있는 인간의 형상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VR은 화석이 되어, 이미 퇴화한 기술로서의 유물처럼 보인다. 작업의 일환으로 ‘주마등’의 출구에 해당하는 1인용 시청각실에서는 영상 작업 〈웨이팅 M〉(2021/2025)이 상영된다. 이 작품은 종말론적 시간, 공동의 믿음, 가상적 연결에 대한 사색을 담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봉쇄 기간 중 작가의 작업실 창밖으로 내다보이던 묘지의 풍경은 죽음에 대한 성찰을 이끌었고, 작품의 단초가 되었다. 2021년,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울리며 새해를 맞이하던 전통은 가짜 종소리를 울리는 가상 경험으로 대체되었다. 〈웨이팅 M〉은 보신각 종소리의 이미지와 더불어 묵시록적 서사의 파편들을 엮어낸다. Y2K 시대의 한국 드라마 「M」에서 발췌한 오디오 클립, 『데카메론』에서 발췌한 문학적 단편들, 휴거에 대한 종교적 언급 등이다. 작품의 서사는 임영주가 팬데믹 봉쇄 기간 중 온라인에서 만난 작가, 과학자, 음악가, 역사학자 등 다섯 인물이 나누었던 서신 교환을 통해 전개된다. 필자 간의 서로 다른 언어로 인한 오해와 오독이 뒤섞인 이 편지들은 예견된 종말의 가장자리에 서서 집단적 기다림의 시간과 초현실적 감각을 포착한다.
마찬가지로 작업의 일환인 동명의 출판물은 손에 쥐기에 알맞은 크기로 디자인되었다. 관을 연상케 하는 외형이다. 책은 빈 무덤을 만드는 방법, 환영으로 통하는 관문으로서의 두뇌 송과선松果腺, 이주와 소멸, 영적 전이의 문제 등 2021년 이후 임영주의 작업에서 이어져 온 여러 갈래의 주제를 한데 엮는다. 이 책은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갖추어야 할 도구 상자에 더해질 수 있는 하나의 생존 지침서이자 안내서로 기능한다.
전시의 마지막에서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서의 듣기를 연습하는 공간을 제안한다. 관객은 돌 형상의 두 스피커 사이에 앉아, 그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엿듣는다. 듣기의 경험은 관객을 단숨에 세계들 사이의 장막으로 이끈다. 작가는 작업에 대해 나눈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청각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남는 감각이에요. 그리고 퍼포먼스나 전시가 끝난 뒤에도 가장 오래 남는 건 종종 소리라는 걸 느끼게 되었고요.” 또한 청각은 영적인 차원과도 연결된다. 한국에는 사람이 신에 들리면, 즉 신병神病에 걸리면 귀에서 이명이 들리기 시작한다고 믿는다. 임영주는 이명을 앓았던 어린 시절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친구의 가족은 무당과 병원 모두를 찾았고, 의사는 이를 신경 문제로 진단했다. 한편, ‘신경神經’은 문자 그대로 ‘신의 길’ 혹은 ‘신들이 드나드는 통로’를 의미한다. 이러한 우연은 임영주에게 의미의 층위를 더하며, 그의 작업을 이중적 의미가 교차하는 지점에 놓이게 한다.
소리에 대한 관심, 특히 자연의 소리와 비인간 존재의 소리는 임영주의 탐조探鳥 연구를 통해 한층 깊어졌다. 영상의 한 챕터는 무속인이었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자연을 거닐던 할머니는 종종 새소리를 흉내 냈고, 어린 임영주는 그것이 할머니의 고유한 언어라고 여겼다. 이 작업의 맥락에서 새는 사후 세계와 긴밀히 연결되며, 각기 다른 은유로 작용한다. 예컨대 한국 전통 설화에서 까마귀는 불길한 징조로 여겨지는 반면, 오리와 같은 철새는 하늘과 땅을 오가는 신성한 전령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문화적 의미들은 과학적 관점과 함께 임영주의 작업에 스며든다. 임영주는 새소리의 개별성과 기후 위기로 달라진 새로운 이동 패턴에 따른 소리의 변화를 탐구해 왔다. 새들의 울음은 신호이자 메시지이며, 시간을 넘나들며 울려 퍼지는 지성의 흔적이다. 여기서 새소리는 단순한 생태학적 데이터가 아니라, 예언에 가까운 것, 즉 인간의 합리주의에 저항하며 세계를 듣는 방식이다.
익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이 소리들은 단순한 배경음이나 자연의 일부임을 넘어선다. 임영주의 손에서 새소리는 신호가 된다.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는 소통의 형식으로, 우리가 세계를 감각하고 연결하는 또 다른 방식을 상상하게 이끈다. 이는 마치 다른 장소에서 온 전언처럼 작동한다. 생태학적 연구인 동시에 영적인 탐색과 같은 것이다. 침묵을 가르거나 빽빽한 풍경을 꿰뚫는 새소리에는 시적인 면이 있다. 작가는 이 소리들을 살아 있는 단서로 다룬다. 마치 이들이 우리가 망각했거나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무언가를 향해 우리를 이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전시 공간에서 들리는 새소리는 더 느리고 주의 깊은 청취의 방식을 제안한다. 의미란 언제나 말소리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울림 속에서도 전해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다시 기술에 대한 논의로 돌아오자면, 전시 전반에서 기술은 혁신이 아니라 잔재로 나타난다. 이는 시간의 층위 속에 공존하는 신비롭고도 기계적인 화석화된 형상들, 즉 위태로운 지지체로서의 기술로 등장한다. 유령과 같은 이 도구들은 저항의 아카이브를 형성하며, 지속이 진보보다 더 중요한 가치임을 드러낸다. 우리는 미신과 역사, 생존과 환생,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얽힌 서사들과 마주하게 된다. 임영주의 작업은 명확한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상상적이고 비합리적인 모든 형태로 끊임없이 믿음이 되돌아오는 모습이다. 이는 유토피아적 전망이 아니라, 미래라는 약속이 무너졌을 때 잔존하는 것들과의 대면이다. 폐허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말하는 이론이다.
임영주의 작업은 역사를 횡단하며 의미를 추구하는 가운데 인간 존재의 핵심 가치를 드러낸다. 그녀의 작업은 환영과 믿음을 탐구하는 연구와 서사를 통해 현대 기술이 형이상학에 얼마나 단단히 묶여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 글에서 논한 설치 작업들은 이러한 얽힘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을 실현한다. 임영주는 빈 무덤과 디지털 환각(digital hallucination), 가상의 의례를 통해 의미를 향한 심오한 탐구를 반영하는 환영幻影 의 극장을 연출한다.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이 육체를 탈피한 미래의 도구로 간주되는 지금, 임영주는 영적 갈망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기술에 대한 전망을 빚어낸다. 그 모습은 연약하고, 혼이 서린 듯하며, 지극히 인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