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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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CV
교육
2009
동서대학교 디자인전문대학원 영상디자인 석사, 부산
1991
홍익대학교 회화과 학사, 서울
주요 개인전
2020
《뒷모습 연작, 12개의 돔》, 예술지구p, 부산
2019
《방정아, 믿을 수 없이 무겁고 엄청나게 미세한》,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2018
《출렁거리는 곳》, 복합문화공간 에무, 서울
2017
《꽉 펑 헥》, 자하미술관, 서울
2015
《기울어진 세계》, 부산공간화랑, 부산
2015
《서늘한 시간들》, 트렁크갤러리, 서울
2012
《헐》, 아리랑갤러리, 부산
2008
《세계》, 대안공간 풀, 서울
주요 그룹전
2020
《회화와 서사》, 뮤지엄 산, 원주
《제주 4·3 미술제》, 제주4.3평화기념관, 제주
《핵몽 核夢 IV, 야만의 꿈》, 예술지구p, 부산
2019
《핵몽 核夢 3: 위장된 초록》, 복합문화공간 에무, 서울
《화가의 책》, 로봇프로이트, 부산
2018
제12회 광주비엔날레 《상상된 경계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그림, 신여성을 읽다》, 교보아트스페이스, 서울
《부산 리턴즈》, F1963 석천홀, 부산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 핵몽2》, 민주공원 기획전시실, 부산; 은암미술관, 광주
2017
《Platform of the peace》, 뉴 트레져 아트 갤러리, 양곤, 미얀마
《두 엄마》, 신세계갤러리 센텀시티점, 부산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미황사》, 학고재갤러리, 서울
2016
《핵몽》, 지앤갤러리, 울산
《김혜순 브릿지》, 트렁크갤러리, 서울
2015
《Korean Art 1965-2015》,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후쿠오카, 일본
《아시안 하이웨이》, 석당미술관, 부산
2014
《옥상의 정치―벼랑의 삶, 벼랑의 사유》, 공간 힘, 부산
《어머니의 눈으로(Through The Eyes Of The Mother)》, 미국 시카고 한인문화회관, 시카고, 미국
2013
《파사드 부산 2013》,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부산發》, 성곡미술관, 서울
2012
《여기 사람이 있다》, 대전시립미술관, 대전
《발굴의 금지》, 아트스페이스 풀, 서울
2010
《기념비적인 여행》, 코리아나미술관, 서울
《빛 2010 하정웅청년작가초대전 10주년기념》, 광주시립미술관, 광주
《긍지의 날》, 대안공간 풀, 서울
2009
《BlueDot Asia2009》,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신소장품 2008》,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08
《거울아, 거울아- 그림 속 사람들 이야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아트 앳 홈, 원더풀 라이프》, 두산갤러리, 서울
《부산미술 80년, 부산의 작가들》,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2006
《2006 asia art now》, 대안공간 루프, 쌈지스페이스, 갤러리 숲
2004
《리얼링15년》, 사비나미술관, 서울
1995
《Painting&Collection》, 금호갤러리, 서울
1994
《민중미술 15년: 1980 – 1994》,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주요 수상
2002
제13회 부산청년미술상, 부산공간화랑, 부산
2002
제2회 하정웅청년작가상, 광주시립미술관, 광주
주요 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Critic 1
방정아 작가 추천의 변
김재환 (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방정아는 30년 넘게 회화 기반의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민중미술 2세대, 리얼리즘 회화, 여성주의, 부산 형상미술이라는 개념 속에서 평가받아왔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을 이러한 키워드에 국한하는 것을 거부한다. 실제로 방정아의 작품을 어떤 하나의 틀로 해석하기란 어렵다. 방정아의 작업이 고집스레 회화의 영역에 있으면서도 동시대 미술의 어떤 자리에서 유의미하게 논의되는 건 이렇듯 특정 규범이나 문법에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작가의 태도와 연관이 있다.
방정아는 자신의 작업을 가리켜 ‘내 나름의 리얼리즘’이라 말하곤 한다. 전형성을 거부하고 일상적 삶의 풍경을 담되 ‘내 나름’의 시선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그림을 그려온 까닭이다. 다시 말해 방정아는 현실에 대한 발언이라는 차원에서 ‘리얼리즘’의 큰 테두리에 들어가지만 ‘일상’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에 더 무게를 두는 방식으로 ‘작가 나름’의 작업 세계를 구축한다. 매체의 전형성을 부정하면서 자신이 그릴 수 있는 형식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형식을 통해 사회의 거시적·미시적 문제에 대해 발언하기에 작가의 회화 작업은 동시대 미술의 맥락에서 유의미하게 논의할 수 있는 지점이 된다.
1990년에서 2000년대 후반까지의 작업은 자신 주변에 존재하는 사건 또는 인물(대상)을 주요 주제로 다룬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투영한 ‘여성 문제’가 가벼우면서도 진중하게 다뤄진다. 물론 방정아의 시선은 일상의 영역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작가는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부조리한 사건에 꾸준히 응답해왔다. 사회구조적 모순에 대한 관심부터 자연과 사회를 파괴하는 4대강 정비 사업, 핵발전소 등을 둘러싼 구체적인 사회 문제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을 괴롭히는 직간접적인 사건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성실하게 전개했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 세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역사적 사건, 사회적 요소들이 파편적으로 재구성되는 초현실적 공간으로 확장되어간다. 이 세계는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 문명에 대한 고발을 담고 있는데, 자연의 생명력을 물의 이미지로 상징화하는 경향 또한 엿보인다.
사실 엄밀한 의미의 리얼리즘은 실현 불가능한 지향점이다. 특히 회화에서 리얼리즘은 3차원의 실제 세계를 2차원의 캔버스로 옮기는 물리적 변화과정을 전제로 하기에 더욱 허구적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작가가 구현해낸 세계가 얼마나 세상의 숨겨진 진실을 수면 위로 드러낼 수 있는가이다. 방정아의 회화 작업이 흥미로운 이유는 지난 30년간 구축한 작업 세계에서 우리 사회의 숨겨진 진실이 열리는 순간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는 일상을 비일상화하거나 서사적 언어를 감각화하는 작가만의 독특한 기법이 있기에 가능하다. 바로 이 지점이 회화 작업을 오래 해온 방정아가 여전히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어떤 틈이다. 개념의 천착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것이 동시대 미술의 주요 흐름이라지만, 방정아는 오히려 시각성에 관한 끊임없는 탐구로 세계를 지각하고 인지하는 감각을 다듬어 그 속에서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
<그녀가 손을 든 순간>(2019)은 회화 작업으로 어르신들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부산의 한 지하상가 분수대를 화면 중심에 놓고 여러 개의 기둥을 사이사이에 배치한 구성이다. 개별 형상들은 영화 「아바타」(Avatar)에서 숲을 연결하는 신경망처럼 생긴 푸른 선으로 감싸여 있다. 이 그림은 재현의 세계와 에너지의 세계가 얼기설기 관계를 맺는 시간의 연속성을 담고 있다. 애초에 비현실적으로 구현된 공간은 결코 같이 모일 수 없는 사람들의 조합으로 더욱 이질적인 세계로 전환된다. 이렇게 방정아는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초현실적인 변환을 시각화하면서 작가 나름의 리얼리즘을 캔버스 위에 구현하고 있다.
Critic 2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양정애 (독립큐레이터)
바닥없는
굉장히 무섭고 결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풍차 모험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가 싸우고자 하는 것들이 절대 거인이 아니라 풍차라는 말을 듣지 않고, 제대로 보기 위해 더 가까이 돌진해야만 했던 무모한 돈키호테의 모험 말이다.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의 기둥들이 버티고 있던 1980년대 후반, 억압적 한국현대사 속에서 청년기를 보낸 방정아에게 기둥은 어떤 의미였을까. 소위 ‘민중미술’의 끝자락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술을 경유한 현실 발언의 길을 모색하고자 고향으로 회귀한 작가에게 있어, 부산은 자신의 몸에서 떼어 내어 생각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작가의 예술 활동의 기반이 되는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은 국제영화제와 비엔날레가 열리는 문화와 관광의 도시로 유명하지만, 작가에게는 있어 부산은 복잡한 한국근현대사의 축소판이자, 군수물자와 세균실험물들이 유입되는 항구도시, 핵발전소가 버티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견고한 수직적 체제가 무너지면 수평의 세계가 도래할 거라고 믿었는데, 여전히 일상이 흔들리는 순간들을 경험하면서 작가는 자신을 둘러싼 지극히 자연스럽고 익숙해 보이는 동시대 풍경들을 예민하게 감각하기 시작했다.
단단하리라 여긴 바닥이 실상 자신의 두 발만 겨우 지탱할 수 있는 부표였음을 직감한 작가의 눈에,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였던 일상이 부자연스럽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절대로 무너져서는 안 될 것들은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고, 너무나 단단해서 붕괴시켜야 했던 것들에는 도리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방정아는 외부의 압력이 가해지면 녹아내리는 플라스틱 같이 엔트로피의 증가에 따라 고체에서 액체로 진화한 우리 사회를 관통해 온 예술가로서, 자신의 감각으로 인지된 일상의 ‘걸리적거리는’ 장면들─‘한국의 정치풍경’과 ‘플라스틱 생태계’─을 회화로 포착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는 인공의 자연으로 덮여 위험하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여 공포를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일상 속 불안의 징후들을 작품을 매개로 보여주고, 작품을 마주한 관객들이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직접 파헤치고 개입하게 만든다. 궁극적으로, 부산이라는 특정 장소에 대한 이야기로 출발했지만 이 모든 것이 로컬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삶의 환경임을 전달한다.
걸리적거리는
최근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지켜보며, 몇 년 전 부산에서 문제시되었던 주한미군의 탄저균 실험이 겹쳐졌다. 작가는 부산 좌천동에 위치한 자신의 작업실 옥상에서 부산항 8부두 미군기지 안 항구에 정박한 군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직으로 치솟아 터진 탄저균이 자신이 있는 곳까지 닿는 광경을 떠올리곤 한다. 지금, 여기에서는 상상이지만 언제든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 실제로 지난 2015년, 살아있는 탄저균을 국내로 무단 배송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주피터(JUPITR)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사회에 알려졌고, 도시 한복판인 부산항 8부두에서 세균 실험이 진행된 정황이 확인되었다. 쉬쉬하던 일들이 알려졌지만, 충격적이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리어 ‘주피터’가 ‘센토’로, 그리고 ‘IEW’로 이름만 바뀌면서, 한층 더 진화한 실험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 그의 한결같은 태도>(2021)는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분노하지 못하는 상황과 액체화된 국제질서 속에서 정당성이 희미해져 가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미국이 아직도 자국중심주의에 이용하는 상황을 직시하며, 치외법권의 미군 생화학실험실이 된 부산의 일면을 들여다보고 재해석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노인은 군용배낭을 메고 속옷만 겨우 입은 채로 분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걸터앉아 있다. 그 주변을 둘러싼 세 명의 젊은 여성들은 노인을 불편한 눈빛으로 바라보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 관객의 시선이 노인을 신화 속 ‘주피터’로 인식하는 순간, 주변의 세 여성은 ‘삼미신’이 되고, 회화 속 공간은 견고한 수직 기둥이 버티고 있는 신전이 된다. 반면, 노인이 앉아 있는 공간을 아파트 단지 내 설치된 ‘석가산(石假山, 돌을 쌓아 만든 인공 산)’으로 인식하는 순간 그 장면의 신화적 권위는 즉시 박탈되고, ‘주피터’는 우리의 일상을 침범한 낯선 존재가 된다. 삼미신은 작가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부산의 여성들로 재인식되고, 그 공간 안에서는 이 ‘여성들’만이 주피터의 모습이 동화 속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존재가 된다. ‘벌거벗은 주피터’의 모습은 실체적 미국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신제국주의 그리고 냉전으로 이어지는 고체 시대 강대국의 태도이기도 하다. 어느 상황에서도 무해할 것 같은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를 내세우지만, 실상 남의 나라 인권에는 소홀한 이중적 태도 말이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이기도 하다. 원경에 보이는, 모자(sun hat)을 쓰고 석가산 앞에 무심하게 걸터앉아 쉬고 있는 인물이나 족욕을 하며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인물들은 이 상황이 당연한 듯 무관심할 뿐이다. 그것은 미국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던 상태에서 벗어났음에도 계속 보호받고자 하는 태도, 또는 명확한 판단 근거가 사라진 액체 환경 속에서 무관심함을 유지하려는 태도로 읽힌다.
작가는 서양식 인공분수에 동양식 진경산수를 모델로 하는 ‘석가산’이라는 일상 속 오브제를 중심에 두고, 동일한 시공간에서 양립할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병치시켜 화면 속 긴장감을 조성한다. 더불어 지난 백여 년 동안 변화해 온 세계질서 속의 권력관계와 우리의 현재 사회를 늙음과 젊음, 남성과 여성, 기둥과 물, 인공과 자연이라는 대비되는 이미지들을 통해 감각하게 만든다. 작가는 이런 방식의 미학적 장치를 통해, 소위 강대국이 만들어낸 국제질서 속의 ‘표면적’ 평온함과 ‘이면’의 냉정한 착취 관계를 드러낸다. ‘주피터’가 당연한 듯 들어 앉아 있음으로써 만들어지는 생경한 신화화된 순간이 일상화되는 감응(sympathies)을 지적하며, 이를 통해 내재적인 반감(antipathie)을 생성한다.
<팠어, 나왔어.>(2021)는 부산에 주둔했던 미군 부대(하야리아 부대)가 작가의 집 근처에 있는 ‘부산시민공원’에 남기고 간 막대한 폐유와 오염토 문제를 다룬다. 발암물질을 함유한 오염토를 정화했다고 하는데도 계속해서 발견되는 양상에 작가는 불안함을 느낀다. 제대로 치유되지 않고 덮여버린 땅, 그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두려움이 붉은 천을 둘러쓴 예측 불허의 불길한 존재로 그려진다. 팬데믹 환경에서 마스크를 쓰고 공원의 벤치에 앉아있는 여성을 통해 우리는 이 광경이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마주한 대상을 과히 놀라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무관심하지도 않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마스크를 쓴 일상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된 것처럼, 너무도 비현실적인 존재는 오히려 무감각하게 다가온다. 벤치의 여성은 나름의 예민한 시선으로 이상한 존재를 포착한 ‘목격자’이지만,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때로는 위험을 지각하지 못하는 예비 피해자로,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사건의 방관자 혹은 은폐의 공모자가 될 수도, 때로는 저항의 주체가 될 수도 있는 선택의 순간에 놓여 있다. 한가로운 공간적 문맥과 여성과 정체불명의 형상 사이의 ‘어긋난 시선’─바라보는 시선을 외면하는 상태─이 만났을 때 관객은 작가가 느꼈을 “무관심에서 비롯된 공공연한 공모” 또는 공존의 공간에 만연한 과묵한 ‘타자성’이 공포로 다가오는 순간임을 경험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간-비인간 행위자는 저마다 동등한 역할을 하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과거 수십 년간 미군에 의해 자행되었을 오염토, 보도블록과 벤치로 그 사실을 덮었을 공권력, 정체불명의 덩어리, 그 불안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들이 다층의 시공간에 압축적으로 드러나면서 복합적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땅을 파서 나온 오염토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잘 덮여있는 상태를 보여줄 뿐이다. 전반적으로 톤 다운된 색채로 그려낸 풍경은 이것이 현실 속의 장면인지 아닌지 모호하게 만든다. 작가는 효율적일 수 있는 스펙터클을 과감히 배제함으로써, 호기심을 가진 관객들을 오히려 그림 가까이 끌어들이며 능동적 참여자로 만든다.
<축 발전>(2021)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화해의 분위기가 있었음에도 그대로 정전협정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감지되는 분위기를 담고 있으며, 미국(이 허락하는 상태에서 유엔과 북한)이 종전선언을 해야지만 남북관계가 진전될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축 발전’이라는 반어적인 제목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작가는 지난 2018년, ‘평화, 새로운 시작’이라는 아젠다를 두고 판문점 도보다리 위에서 남북의 두 정상의 회담하는 모습을 뉴스를 통해 지켜보며 <스프레드 보이스(Spread voice)>(2018)[그림 1] 작품을 남겼다. 그때는 흐물흐물해진 남북관계에서 설렘을 느꼈던 순간을 기록했는데, 지금의 작가는 인물과 목소리가 사라지고 빈 의자들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적막함을 마주하고 있다.
<축 발전>은 작가가 어떻게 장소를 맥락화하고, 동시에 어떻게 그 장소의 맥락을 지워나가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 속 무대가 된 DMZ는 작가의 관점에서는 한반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딱딱하지 않은 생태계이다. 그러나 자칫 잘못 건드리면 언제든 굳어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러한 DMZ의 지정학적 의제를 회화 속 오브제들에 이중적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미국’이라는 존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딜레마를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조금 전까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을 법한 두 정치인이 떠나버린 순간을 흔들리는 선들로 포착한 붉은색과 푸른색의 플라스틱 의자는 손닿을 듯이 가까웠던 한 때의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곧 다시 돌아와 앉을 가능성을 내포하기도 한다. 화환을 보낸 주체를 누구로 상정하느냐에 따라 ‘축 발전’의 의미 또한 다르게 읽힌다. 관계가 발전하는 양상을 축하할 것처럼 보내놓고 막상 그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은 미국의 무책임한 행위에 대한 암시이자,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질 가능성을 기대하는 작가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조화로 가득 찬 화환과 야생의 거친 소나무가 철조망을 가리고 있고, 그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동네 뒷산으로 느껴지게끔 조성한 DMZ의 풍경은 마치 그 미래가 일상에서 멀지 않은 듯하면서도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한, 현재 우리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래서 이 공간은 원했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게 된 이상적인 것이 현실에서 재현된 곳이거나, 스스로의 의지로 다다를 수 없는 정세에 대한 전복의 의도를 드러내는 곳으로 전환된다.
[도판 1]
방정아, <스프레드 보이스(Spread voice)>, 2018, 천에 유성 파스텔, 91×116.8cm.
<축 발전>과 마찬가지로, 정전협정에 머물러 있으면서 우리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데에서 느끼는 무력감은 <전시중입니다만>(2021)으로 이어진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갤러리에는 팔, 다리가 없거나 부분만 남아 있는 토르소들이 전시되어 있고, 전경의 두 여성은 휴대전화를 붙들고 각자의 용무를 보느라 바쁘다. 작품 제목을 통해 관객들은 “아직 전시중인가요?”라고 묻는 문의 전화에 “전시중입니다만”이라고 응답하는 듯한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짐작했겠지만 갤러리에서 ‘전시 중(on display)’인 동시에 말 그대로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아 ‘전시 중(still at war)’인 상태를, 중의법을 통해 만들어낸 작가 특유의 언어유희이다. 텍스트와 이미지를 절묘하게 결합함으로써 사태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이 방식은 그의 전작에서 즐겨 보여주었다시피, 작품 속 시공간에서 파열을 일으키는 일종의 언어-장소적, 혹은 언어-시간적 표현 방식의 리바이벌이라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작품의 주제의식을 고려했을 때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두 여성의 표정과 제스처, 손에 쥔 휴대폰의 디테일에 관객들의 시선이 모인다. 반면, 작품의 실질적 주제를 말해야 하는 토르소들은 후경으로 밀려나 그것들이 남북한 군복을 걸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보기 힘들다. 기둥 좌우로 세워진 토르소들에서 한국을 둘러싼 여러 주변 국가들이 서로 간의 이해관계에 얽혀 뒤로 물러나 방관하고 있는 모양새, 그 가운데에서 자기 의지대로 어찌할 수 없는 남북한의 불안정한 상태를 발견한다. 하지만 실상 우리는 언제든 교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에 놓여 있으면서도 그 상황을 인지하지 않고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전시중입니다만>은 사실 작가가 ≪올해의 작가상 2021≫전을 준비할 때 도와주러 온 동료작가들이 작업은 뒷전에 두고 다른 볼일로 바쁜 모습에 두 손을 주먹 쥐고 ‘부르르’ 떨었던 순간을 포착한 장면이다. 실컷 사회정치적 의제에 집중하던 작가가 돌연 자기의 작업 무대로 장면을 전환한 의도가 무엇일까? 그가 느낀 진짜 위기감은 우리 안에 내면화된 전쟁의 무감각함, 즉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었을까. 작가는 자기가 하고 있던 작업 자체를 낯설게 만들어, 지금 보고 있는 이 작품 역시 그에 의해 만들어진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보는 이들이 새삼 깨닫게 만든다. 즉, 대형 화면에 자신을 의도적으로 노출하고, 스스로 속한 실제의 상황을 전경화(foregrounding)함으로써, 이 상황에 무관심할 수 있는 관객을 작가가 처한 지금, 여기로 자연스럽게 편입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시 중’이라는 사안을 모두가 마주하고 있지만 동상이몽 하는 상황에 대해 각자의 경험과 시선을 공유하도록 말을 건다.
녹아내리는
이번 전시의 두 번째 섹션에서 선보이는 <플라스틱 생태계>(2021)에서는 열을 가하면 흐물흐물하게 녹는 플라스틱처럼 멈출 수 없는 무한의 열을 발생시키는 핵발전소와 그 열로 녹아내리고 있는 생태계를 구현하였다. 작가의 부산 작업실에서 30km 반경에 위치한 핵발전소의 존재는 잊기에는 너무도 선명한 후쿠시마 핵발전소 멜트다운 사건의 기억과 혼재되어 작가의 일상을 위협한다. 지난 2016년부터 작가는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알리는 활동을 해 왔고, <플라스틱 생태계>는 좁게는 그 활동의 연장선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전작 <지도에 없는>(2019)과 <돔의 비밀>(2019)[그림 2]에서─핵발전소가 아닌 ‘홍보관’을 입력해야만 위치를 알 수 있는─분명 존재하지만 지도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 바 있다. 가상현실(VR) 안에서 사람들은 유토피아에 당도했다고 느끼는 찰나 역(逆)-유토피아 속에 있음을 깨닫는다. 흔히 이상적 이미지로 포장되는 핵발전소는 영구적으로 존재할 운명으로 인해 오히려 ‘일시적으로 현실 속에 실현된 유토피아’로서의 헤테로토피아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작가는 역설적으로 작품 속에 혼종의 장소를 만들어 유토피아적 신화를 전복하려 한다.
<플라스틱 생태계>는 비균질적이고 모순적인 오브제들을 한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핵발전소와 얽힌 권력의 이면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돔의 비밀>에서의 가상공간을 미술관 전시실이라는 3차원의 실제 공간으로 일부 옮겨왔다. 작가는 이 작품이 놓인 전시장 전체를 핵발전소의 냉각 수조로 설정한 뒤 디스플레이의 역동성에 따라 정해진 시나리오를 수행하게끔 이번 전시의 두 번째 섹션인 ‘플라스틱 생태계’로 관객들을 이끈다. 이들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푸른빛의 공간─원자로 내부─으로 진입하고, 우라늄 핵분열을 통해 열을 발생시키는 핵연료봉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이 연료봉을 식히는 냉각 수조 안에서 왜곡되어 버려진 플라스틱 같은 생태계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수만 년 동안 방사능을 뿜는 미래의 시한폭탄 같은 존재이면서, 철저하게 비밀스럽고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존재들이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핵연료봉에 앉은 줄도 모르는 상태, 그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도판 2] 방정아, <돔의 비밀>, VR 스틸컷, 2019.
<플라스틱 생태계>에서 무게, 재질, 크기가 각기 다른 천들이 한 데 엮여 만들어진 거대한 장막이 천장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모습은 현대 소비사회의 카니발이 끝난 뒤 대량으로 폐기되는 물질들이 녹아내리는 생태계를 비유한 것이며, 그 불규칙하게 잘려나간 조각들은 화이트큐브에서 어딘가 불안정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어붙인 광목천에 아크릴로 채색한 이 대형 걸개그림은, 접히고 말리고 기워져 넝마가 될 때까지 쓰임에 따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제 역할을 해냈던 1980년대 걸개그림에 대한 헌사로, 광장에서 숭고한(sublime) 일시적 의례 공간을 창출해냈던 그것의 역할을 미술관이라는 제도 안에 재현하고자 한 시도로 보인다. 이 작품은 화이트큐브에서 의례적 효과를 내는 모든 장치─조명, 오브제 등─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관객들을 이리저리 움직이게 만든다. 이들은 걸개그림이 분리하고 점유한 의례 공간의 뒷면으로 자유롭게 이동하여 불균질한 패치워크를 마주한다. 핵연료봉의자는 사실상 쓰임을 다한 처치 곤란의 폐연료봉으로 미술관의 과거 전시들이 남기고 간 폐자재를 거둬서 작가가 현장에서 직접 드로잉하고 채색하여 완성한 것이다. 어떤 관객들에게 이 의자는 함부로 손대지 못할 것 같은 예술적 아우라를 가진 작품의 일부로, 어떤 관객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앉아 쉴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이러한 디스플레이를 통해 작가는 작품 속 공간 곳곳에 관객이 놓이는 자리를 마련해 그들을 적극적으로 작품 안으로 개입하게 만들고, 그것이 각자의 행위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완벽한 리얼리티의 재현은 불가능하기에 역으로, 이를테면 “이게 무슨 핵연료봉이야?”하는 질문으로 출발해 스마트폰을 손에 쥔 관객들이 전시장을 나가며 실제의 무언가를 검색하는 행위 자체가 현실의 리얼리티에 한 걸음 더 접근하게 만드는 방식일 수 있음을 제시한다.
침투하는
나는 비교적 짧지 않은 기간(2016-2020) 탈핵운동을 하는 방정아 작가를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핵발전소 현장을 돌아다니며 리서치를 하고, 함께 연대한 동료 예술가들의 행위가 전시로 휘발되지 않도록 기록했다. 어느 한 날, 작가가 보내온 메일에는 이 과정에 대한 충실한 아카이브가 담겨 있었다. 전시에 온 관객들에게 계속 지켜봐 주기를 요청하며 보낸 메일이었다. 핵발전소 해안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탈핵포켓북’을 제작하는 작가를 보며, 평면 회화 뒤에서 보여준 활동가로서의 스펙트럼을 충분히 알면서도, 예술가들의 사회적 실천이 액체 사회 속에서 이루어질 때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한계들에 대해 반문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이번 전시는 이 질문에 대한 방정아 식의 대답으로도 보인다.
방정아는 늘 현재진행 중인 문제를 작업으로 다루고, 자신의 작업에서도 그 문제를 현재진행형으로 표출한다. 말하자면 작가의 문제의식 안에서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작품이 훼손될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의 손을 타며 전시장에서 그것이 망가져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까지가 <플라스틱 생태계>의 종착지일 수 있다. 이 공간을 통과한 관객들은 ‘걸리적거리는’ 작가의 감정을 일정 부분 공유하게 된다. 이는 자신의 작품을 관객들과 함께 사회에 대해 대화하는 매개체로 위치시키면서도, 동시에 다층의 결이 있는 사회적 문제를 하나의 미학적 오브제로 만들어버리는 행위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성찰을 의미한다. 작가가 말버릇처럼 ‘걸리적거리는’ 다음에 붙이는 말이 ‘어쩌겠나’이다. (이렇게 작업해 봤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알면서도─한편으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나길 기대하며 반복하는─이 목표 달성의 불가능함을 작업을 통해 보여주는 작가의 태도야말로 성찰적인 저항 방식의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방정아의 작품들은 언제나 다양한 이야기들 사이의 틈새를 탐색하며 떠돈다. 텍스트가 가려진 순간, 작품들은 관객의 콘텍스트에 따라 변화한다. 작품의 공간과 순간을 구성하는 인간/비인간 행위자들은 구분할 수 없는 이질적 행위자들은 서로가 다른 방향을 보고 약간씩 어긋난 내러티브를 전하면서 느슨하게 연결된다. 이번 전시 ‘흐물흐물’은 두 개의 주제로 섹션이 나뉘어 있지만, 작가는 그 안에서도 보는 시선에 따라 두 섹션의 주제를 넘나들 수 있도록 작품마다 복합적 해석이 가능한 장치들을 남겨두었다. <미국, 그의 한결같은 태도>에서 분재나 석가산에 초점을 맞추면 실제의 자연은 파괴하면서 인공 자연은 완벽하게 조성하려는 인간의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되고, <축 발전>에서 한시적 이벤트에 쓰이고 버려지는 화환이나 플라스틱 의자에 방점을 찍으면 생태적 입장에서 비판 가능한 작업이 된다. 총체적 관점에서 전체 작품들은 ‘문명과 자연의 대립’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독해될 수 있다. 이처럼 작가는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딱딱한 모든 것들에 균열을 만들고 침투하는 데 동참할 수 있도록 해석의 지평을 열어두고, 자신의 작업이 경계지어 해석되는 것을 거부한다.
시각적 이미지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든, 상징적인 힘을 얻게 되는 순간 실천을 위한 강력한 동력을 제공한다. 영화감독이자 작가 트린T. 민하는 2011년 인류가 겪은 쓰나미의 충격을 언급하며, 쓰나미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거대한 물결 그 자체보다, 영상에서는 스쳐 지나갔지만, 몰려오는 쓰나미 앞에서 목줄에 묶여있는 개의 모습에서 더 큰 충격을 느낄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미지의 상징성은 거대한 스펙터클로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문화나 상황의 맥락을 충족하는 디테일을 통해 획득될 수 있다. 방정아의 작품들은 벤치, 분수, 마네킹, 화환, 플라스틱 의자 같은 우리 주변의 마이너 이미지의 집합이다. 보여주어야 할 것을 충분히 보여주지 않거나 완전히 가려버리고, 보여주지 않아도 될 것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느슨하게 그 이미지들을 연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마다의 입장을 가진 관객들이 침투할 틈을 비워 둔다. 방정아는 이번 작품들을 통해, 각자의 문맥과 작품이 동조하며 만들어내는 수많은 접점은 사소해 보이는 이미지의 이질성으로 가능하며, 그것이 연결되는 순간 보는 이의 성찰과 수행으로 이어지는 더 큰 저항의 동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 Miguel de Cervantes Saavedra, “CHAPTER VIII. OF THE GOOD FORTUNE WHICH THE VALIANT DON QUIXOTE HAD IN THE TERRIBLE AND UNDREAMT-OF ADVENTURE OF THE WINDMILLS, WITH OTHER OCCURRENCES WORTHY TO BE FITLY RECORDED,” in Don Quixote (1605). 국내 번역본은 다음 참조.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돈키호테 1』, 안영옥 옮김(서울: 열린책들, 2014).
2 방정아, 《믿을 수 없이 무겁고 엄청나게 미세한》전 인터뷰 영상, 부산시립미술관, 2019년 3월 8일 ~ 6월 16일. https://www.youtube.com/watch?v=h7qheYXRkWo. “1980년대 중후반이 저의 청년기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청년기 때 제가 느꼈던, (…) 한국의 근현대사라든지, 또 미술계가 얼마나 딱딱해져 있나, 이런 것들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 저항감, 이런 것이 굉장히 나한테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해요. 그것들이 이후 쭉 흘러 왔는데, 내가 본성적으로 가지는 조금 다른 느낌이랄까? 현실 발언적인 미술들이 훌륭한 가치관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관념화로 가는 여러 가지 장면들이 있었어요. 그때 나는 ‘나만의 현실 발언적인 이야기들은 뭘까?’ 하면서 이것저것을 찾아봤는데 이것들 중에 하나가 일상이었거든요.”
3 ‘Joint USFK Portal and Integrated Threat Recognition’의 첫머리를 따 ‘주피터 프로젝트’로 불렸다. 이후에는 CENTAUR(Capabilities to Enable NBC Threat Awareness, Understanding, and Response), IEW(Integrated Early Warning) 단계로 이어지고 있다.
4 2016년부터, 핵의 영향력과 핵발전소의 문제점을 생태학적 맥락에서 인식한 예술가들이 모여 핵의 망상, 핵의 악몽을 의미하는 ‘핵몽(核夢)’이라는 이름의 작가모임을 만들고 활동해 왔다.
5 Carol Duncan, Civilizing Rituals: Inside Public Art Museums (Abingdon: Routledge, 1995), 7-20.
6 Trinh. T. Minh-ha, “The Image and the Void,” Journal of Visual Culture, Volume 15, issue 1 (2016): 131-140.
Critic 3
한국이라는 착각 장치
이병희 (미술비평가)
팠다 하면, 나온다.
땅은 솟구치기도 하고 움푹 파이기도 하며 침식되기도 한다. 오름과 산과 곶과 산맥들 사이로 깊게 팬 주름 협곡이 형성된다. 침식과 침하, 하강과 상승으로 땅은 높낮이를 형성하고 바람은 공기를 섞는다. 높고 낮게 형성된 지형 중 하나는 사람들이 만든 도시다. 유기물로 배합된 다종다양한 자연의 땅과는 다르게 도시의 땅은 시멘트와 아스팔트 콘크리트와 같은 합성물들로 형성되었다. 협곡을 지나 철강 콘크리트 절벽을 휘감는 바람은 고가를 횡단하며 터널을 통과한다. 바람은 까끌거리고 울퉁불퉁한 이질성의 푹신함에 스민다. 그리고 또한 바람은 매끈하고 평평한 균일함의 날카로운 속도에 휘감긴다.
한국 도시 형성에는 땅을 덮는 기획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흙이 보이는 곳은 도시 부산물로 재탄생했다. 가령 개발이익을 누리기 위해 미리 사 두어야 하는 공터이거나 생활 쓰레기와 폐기물을 묻을 매립지가 된 것이다. 근대화를 위한 개발 프로젝트는 군사독재 정권 때 가속화되었다. 고가와 고층 건물들로 형성된 스카이라인 바로 아래에는 고원지대처럼 널찍한 판자촌이 형성되었다. 언덕 위에 버려진 사람들은 하수 시설은커녕 상수 시설도 없어서 우물을 팠다. 더욱더 빠른 발전 에너지를 얻기 위해 석탄과 석유를 파냈다. 그리고 또 묻었다. 이제는 팠다 하면 산업 폐기물과 전쟁 폐기물이 섞여 나온다.
방정아의 <팠어, 나왔어.>(2021)의 배경에 검은 흙더미가 보인다. 제목에 의하면, 파서 나온 더미들이다. 검은 흙이 능선을 형성하며 그림의 배경을 이룬다. 공간을 구성하며 이어가는 지면의 선들은 도시 가속도의 추상이다. SF의 한 장면 같은 배경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오래된 목재 벤치가 화면을 좌우로 가른다. 한쪽엔 마스크를 쓴 한 사람이 움칫 자리를 피하려는 듯 어정쩡하게 앉아있다. 검은 흙더미는 그 사람의 머리와 이어진다. 한 손은 무엇인가를 놓친 듯, 혹은 잡으려다 만 듯하다. 시선의 끝에는 마법사 망토 같은 휘장을 두른 형체가 있다. 약간 웅크린 듯한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휘장 안에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거나 금방이라도 위험한 물건을 꺼내는 상상까지 일으켜 불길함을 만든다. 휘장은 구불구불, 벤치에서 지표까지를 연결한다. 지표에서 상서롭지 못한 것이 스멀스멀 타고 나와 형상을 만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서서히 대기의 기운들을 휘감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검은 흙은 부산시민공원에서 나왔다. 그곳은 과거 미군 부대의 캠프 하야리아 기지였다. 2006년 기지 폐쇄 이후 4년 만인 2010년 부산시에 반환됐고, 2014년 부산시민공원으로 개장했다. 2021년인 최근까지도 공원 흙에선 폐유와 중금속이 발견되고 있다. 방정아의 그림을 다시 보자. 생동하는 검은 색과 붉은 휘장은 너무도 선명하여, 우중충한 현실의 일상 장면을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전환시킨다.
부산이라는 장소(site)는 특수하지만 공통인, 현실의 장소(place)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은 공상적일 정도로 사실적이고 즉물적이어서 공상적인 장소성을 띈다. 이런 느낌을 만드는 것은 시간과 역사다. 식민지 시기, 그로부터 해방과 한반도 내전을 거쳐 전지구화 현상에 이르면서 미군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국제 시민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예외적 거주지인 캠프에서 나온 물질들은 한반도 토양과 어울리지 못한 채로, 여전히 생경하게 유리된 채로 방치되어 있다.
파면 나오는 오염토는 불안한 역사와 토양의 시간 사이에 방치된 물질들이다. 불안은 구체적 정보와 과학적 불확실함으로부터가 아니라, 은폐와 무지로 인해 확산된다. 불안은 그래서 정치적 수단이 된다. 사실 그 누구도 어떤 물질이 어떤 작용을 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으며, 검증할 수도 없다. 그래서 불확실성이 자연의 미학이라면, (불)가능성을 둘러싼 불안은 정치의 핵심이 된다. 물질이 위험 도구 혹은 그에 맞선 수단, 즉 방어와 공격이 모두 가능한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은 불안에 휩싸인 공동체 미래를 좌우지하려는 정치 때문이다.
실제로 반환된 미군 기지의 오염토 문제는 한반도 토양의 문제이자 국제 정치 현안이다. 그런데 미군과 관련된 한국의 정치 해법은 지극히 난항이었다. 동두천, 용산, 평택, 부산에 이르기까지, 반환된 공유지 땅을 파면, 사실상 오염된 토양과 더불어 한국 근대사의 훼손된 정서가 살아나온다. 그 역사는 가깝게는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은 해외방위력 개선의 일환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쇄신했고, 이후로 한반도에서도 미군 기지들을 재배치하고 있다. 여기엔 또 다른 검은 기억이 있다. 방위조약 쇄신 직전 해인 2002년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신효순과 심미선은 경기도 양주 한 지방도로에서 미군 장갑차에 의해 압사 당했다. 월드컵에만 환호하던 국민들은 뒤늦게 이 사건을 알았다. 그 참혹함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파면 팔수록 끝도 없이 한국 근대사의 상처를 헤집게 된다. 이미 매장된 것들과 마구 버려지는 것들의 배합은 전혀 섞이지 않은 균일함을 만든다. 검은 흙에서 출발하여 미군의 한국 주둔의 정치 역사와 사회적 트라우마에 이르기까지, 방정아가 그려낸 이 한 장면은 불안과 불길함 사이에 놓인 현실 정치의 어정쩡한 쩔쩔맴의 미학을 드러낸다.
어떤/모든 현실
(1) 방정아의 현실주의
방정아가 작업을 시작한 1990년대 초, 한국은 미국 중심의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본격 진입했다. 사회적으로는 황금만능주의와 같은 소비자본주의 폐단 양상이 뚜렷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은 1992년부터 한국의 쌀 개방 압력으로 구체화되었고, 1997년 IMF 체제를 계기로 한국의 영세 사업자들은 말 그대로 폭삭 망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사회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체제로 빠르게 전환되었고, 개인 삶 또한 급격하게 바뀌었다. 근대국가 수립을 위해 들였던 해외차관, 즉 국가부채는 결국 기업부채와 가계부채로 전이되었고, 자칫하면 한국인 모두의 삶을 파국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원자폭탄을 온 국민이 떠안게 되었다. 그러나 부채 금융의 미래를 명확하게 내다보지 못했던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사회는 표면적으로는 자유로웠다. 돈과 더불어 검열 기제들이 풀리면서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었던 욕망들이 도시 곳곳에서 흥청거렸다. 강남 신세대뿐 아니라 「오징어게임」(2021)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던, 빚더미에 깔려 죽을 지경에 처했던 평범한 루저 세대가 이 과정에서 탄생했다.
방정아는 이 시기 도시 하층민 여자들을 그렸다. 항상 주변에 있지만 사회가 주목하지 않는 자들과 그 비가시성을 그리기 위해 그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일을 나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여공들, 목욕탕 문 닫을 시간에 와서 멍든 몸을 닦고 있는 아줌마, 손가락 빠는 애를 들쳐 업고 오뎅을 먹고 있는 엄마 등이 등장했다. <아침 버스를 기다리는 구로공단의 여성들>(1991), <바다 끝에 선 여인들>(1993)와 같이 리얼리즘 방식을 연상시키는 유화들과 <급한 목욕>(1994), <집 나온 여자>(1996) 등 순간성이 강조된 아크릴화를 예를 들 수 있다.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 화면 구도적 대조와 변화 등 구성은 고난을 적나라하게 풀어낸다기보다는 풀어낼 수 없음을, 아니, 고난이 그림 곳곳에 묻어 있는 채로 제시된다.
<변심한 동거녀에 앙심품고>(2001), <그녀에게 삶은 왜 고통이었을까>(2002)에서는 <급한 목욕>과 <집 나온 여자>에서 보였던 대각선 구도가 스냅사진의 그것처럼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사연을 알 수 없는 사건을 그렸다. 마치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자른 푸른 색조의 공간은 삶이 빠져있는 미궁이다. ‘순간’의 실수, ‘순간’의 결정, ‘순간’으로만 남는 사건이 스냅 사진의 장면들처럼 포착되었다. 순간성은 미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연의 암담함을 강조한다. 고개를 푹 숙인 한 남자의 심경은 어지러이 연결된 컴퓨터 전선들만큼이나 복잡할 것이다. 방금 파마를 한 듯 구불구불한 여자의 머리카락에서 윤기가 보이지만, 따스한 스웨터에 반짝이는 구두를 신은 채 화장실에 쓰려져 있는 이 여자는 ‘도대체 왜’라는 답답함을 영원히 봉합한다. 방정아는 ‘소통’이라는 것이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소통이 잘 된다는 것 또한 사회적 소통망(네트워크 기제들)과 사회적 이해에 달려있음을 말한다. 당시 한국사회는 자유로운 분위기와 더불어 그 어느 때보다도 네트워크 장치들이 활성화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통되지 않는 미궁의 세계가 깊어지고 있었다.
사실상 도시 빈민의 삶은 짐작될 뿐 가시화되기 쉽지 않다. 그리하여 그러한 삶의 이야기는 은폐 속에 거주한다. 그 고난함만이 연기처럼 희미하고 텁텁한 소문을 타고 번져나가며 일상에 자욱하게 밴다. 그런데 고난한 삶은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도시의 어느 곳에나 있는 흔한 장면들이지만, 그들의 사연은 매번 사건이 터질 때만 반짝 주목되었다. 그마저도 개인사적 가십으로 다뤄질 뿐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다뤄지진 않았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불행은 개인적 억울함과 더불어 일상을 미궁처럼 만들었다. 방정아는 사회적 소통의 답답함과 폐쇄성이 개인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장치적이라는 점을 포착한다. 그 장치들은 눈앞에 뻔히 보이는 사회적 현실을 제대로 주목하지 않는 무지와 무관심, 소통 매체들의 스펙터클 소비 정치, 너도 나도 살기 바쁜 고난한 삶의 악무한적 구조이다.
물론 이 작품의 소재와 문제의식은 1980년대 민중미술의 현실주의의 맥과 닿아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방정아는 현실을 재현하는 새로운 장치들과 방법들에 주목한다. 현실이라는 것은 특정한 자에게도 그리고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기에, 어떤/모든 단독성 자체였다. 현실은 현실성과 더불어 후렴구(Ritornello)로 드러났고, 현실과 재현 사이의 간극에 자리 잡은 무지와 횡포, 권력과 정치, 욕망과 인간성 자체의 문제들은 실재(the real) 혹은 실재적인 것을 구성했다. 한국 사회의 소통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을 둘러싼 온갖 종류의 진실들 사이를 배회했다. 과연 현실은 재현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1980년대식 현실주의에서도 보듯이 현실은 재구성하거나 재현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느껴지는 것이었다. 가령 1980년대 현실주의에 영향을 미친 현실동인의 ‘현실동인 제 1 선언’을 보더라도, 현실주의 생기론 혹은 생기적 리얼리즘이라고 불러야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생기적 현실과 그 대상, 그리고 소통에 있어 통각을 강조함을 볼 수 있다. 방정아의 그림에서 현실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마치 사건의 한 장면처럼 갑작스럽게 등장한다. 대상들은 생기가 없는 현실의 존재들이지만, 현실의 생기는 회화적 장치에 들러 붙어있다. 가령 고난과 수치, 막막함과 출구 없는 느낌과 같은 당시 현실감은 회화적 장치로만 암시된다. 방정아 그림에서 현실감은 구부러진 등, 떨떠름한 표정, 구불구불한 선들과 색들 사이의 꾸부정한 시공간성 어딘가에 붙어있다.
당시 한국사회는 그 무엇이라도 스펙터클로 보여주기에 열중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진부할 정도로 일상화된 고난과 미시 폭력의 현실조차 그러한 소비적 재현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현실은 재현될 수 없고, 현실성만 조작되거나 간접적으로 환기되고 있었던 것이다. 방정아의 그림에 등장한 인물들은 이러한 가시화 기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예속의 결과이다. 어쩌면 이 그림들은 당시 한국사회가 보기 싫어하거나 가리고 싶은 장면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기록한 셈이다. 현실은 이제 진실이 숨는 장소가 된다.
(2) 분리 불가능한 분열
방정아가 붓질과 선묘와 같은 회화적 표현성을 통해 양가적이고 산란하듯 분열하는 미학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생명이 시작되기 전>(2002)이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릿결만큼이나 산책로 주변의 자연 생명체들과 쓰레기들은 이제 막 죽은 듯, 혹은 다시 살아날 수 있을 듯 흐들거리고 흐물거리는 선묘로 그려져 있다. 방정아는 선적 묘사를 통해서 죽은 것과 쓰레기와 살아나는 새순들을 모두 한데 어울리도록 했다. <드러난 미끄러움>(2005)과 <자연사>(2008)에서 보이듯 방정아는 특히 바다, 물, 물풀, 나뭇가지와 숲 등의 자연물을 그릴 때 이러한 구분을 모호하게 하려는 듯 구불구불하고 흐물흐물한 붓질의 표현성을 살려낸다. 이로써 그림들은 에피소드적 장면에서 더욱 복합적인 내러티브를 구축하게 된다. 즉 2000년대 방정아의 그림은 다양한 붓질 등을 통해 회화성을 한층 강화하고 있으며, 전체 분위기에 있어서도 현재 발생적 생동을 살려내고 있다. 그림의 주제 또한 더욱 다층적 관계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다. 인간과 사회, 자연과 인간, 그리고 대기와 물질과 풍경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계가 혼합되어 등장한다. 보다 풍부한 내러티브가 표현적 요소들과 더불어 등장한다.
2011년 이후 방정아의 작품들에선 반어법과 양가적 표현, 그리고 서스펜스가 강화된다. 먼저 <Forest 1, 2>(2011)에서는 인공적 자연, 불구의 인간 등 인공성이 등장한다. 여기에서의 ‘숲’은 인공 숲임에도 초록 창연한 자연미를 뿜는다. 인공적 자연미의 미묘한 불길함은 이후 방정아 그림에서 미심쩍은 요소들과 합쳐진다. <분열>(2010)과 <샴 쌍둥이>(2012)의 차이를 보더라도 사실적 표현보다는 평면성과 선묘가 강조되고 있다. 이는 <폭격(착시)>(2018)에서처럼 분리 불가능한 분열적 표현성 강화에 일조한다. 대상과 주변 사이 경계를 해체시키면서도 동시에 분리불가능한 분열성으로 표현하는 회화성은 내러티브에 있어 양가적 시간성뿐만 아니라 미묘하고 고도로 복합적 정서인 불안의 미학을 등장시킨다. 여기에는 단독적이되 흩어지는, 흩어지는 듯 주변과 섞이는 배반적 혹은 반어적 관계성이 기반이 된다. 이러한 단독성과 흩어짐 사이에서 탈주하는 분열에 기초한 불안의 미학은 <거친 삶 70년>(2018), <과거에 묶인 사람>(2018) 등 군사독재 시기 한국 안보를 위해, 그리고 경제발전을 위해 헌신했던 자들의 현재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온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분열된 생명에 깃든 불안의 초상이다.
2001년 9.11 테러와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와 같은 글로벌 도시에서 발생한 재난들은 포스트 진실의 시대 혹은 대상 없는 정치 시대를 암시하는 사건이었다. 이들은 이후 전 지구적 불안이라는 정치 자본을 형성한 계기로 작동했다. 진실을 둘러싸고 정치가 경쟁하는 동안 멀어지면서 아득한 신화가 된 것은 진실이었고, 피부에 와 닿게 일상을 뒤흔드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짜뉴스, 괴담 등이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가십들이 갖는 정서적 파급력에 쉽게 동조했고, 공식화된 언론조차 선동에 이끌렸다. 가십과 스냅숏 같은 이야기들은 전 지구적 용광로를 만들었고, 전 지구적 진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진실의 차원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전 지구화 시대의 권력은 전쟁이라는 예외상태가 아니라 공백으로써의 진실이라는 예외상태를 통해서 재편되었다. 당시 한국에서도 후쿠시마 괴담과 과학적 증거라 불리는 구체적 사실들이 경합했다. 방정아는 진실게임에 사로잡힌 한국사회의 아이러니함을 또 목격해야 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스냅숏처럼 그릴 수는 없었다. 2016년 전후로 직접 리서치에 나섰다. 한국의 원자력발전소의 현황을 답사하면서 한국 정부의 가시화 정책, 즉 무엇인가를 암묵적으로 묻어두기 위한 스펙터클의 정치의 아이러니를 그렸다. 즉 더욱더 적극적으로 방정아는 ‘보이지 않음’을 그렸다. 비가시성, 그것은 역사적인 것이었고, 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그렇게 방정아는 이번 전시의 주요 소재인 핵과 분단이라는 한국 발전주의 근대화의 핵심에 다가서게 되었다.
2018년 광주비엔날레에 출품한 파스텔화 <12개의 돔>(2018)은 한국의 정치 상황을 다소 풍자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12개의 돔>에서는 12개의 둥그스름한 형태가 등장한다. 원자력발전소 돔들이 둥글둥글한 라인을 형성하고, 야산자락엔 봉분들 또한 둥글둥글한 라인을 형성한다. 생사(生死)를 가르는 이 장면의 중앙에선 수많은 군중이 바다와 함께 출렁인다. 한국 근대사로부터 배태되어 현재화된 정서들은 <그녀가 손을 든 순간>(2019)에서 종합적으로 배치된다. 대통령, 참전용사, 작가, 평범한 사람들, 정치인들 등 여러 한국인들이 화면 곳곳에 등장한다. 빨간 기둥은 화면을 강제적으로 구획하며, 그 속에선 의문스러움과 의심과 불길함과 무관심과 천연덕스러움과 뻔뻔함과 무지와 어정쩡함과 망설임과 무능이 등장한다. 마음을 묵직하게 하는 담담함과 풍자적 아이러니들은 가장 일상적인 장면의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동음이의어를 제목으로 한 작품 <전시중입니다만>(2021)에서는 전쟁(war)과 전시(exhibition)가 한창이다. 머리와 사지가 잘린 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토르소, 즉 사실상 감각할 수 있고 노동할 수 있는 기관을 상실한 몸통만 줄지어 세워둔 채로 담당자들은 핸드폰을 들고 뭔가에 바쁘다. 두 주먹을 쥔 화가의 손은 이 장면의 급박함과 답답함을 암시한다.
(3) “흐물흐물”
시멘트와 아스팔트의 혼합물로 형성된 균질한 도시, 온갖 가십 거리들로 도배되어 온 미디어에서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진실이라는 차원, 이 모두가 경합장이다. 방정아의 그림에서 이들은 모두 날 것 같은 생생함을 지닌다. 방정아의 그림에서, 가상의 진실성과 의심과 불안이 난무하는 일상은, 마치 물과 흙의 성질처럼 스미고 침투하는 활동터로 표현된다. 그래서 방정아의 회화적 표현들은 출렁이고 흔들리며 유동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림 속 모든 내러티브 요소들은 섞이고 이어지면서 착시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은 변화무쌍하고 예측불가능하며 불확실하지만, 영원하고 지속적인 자연과도 닮아있다.
이번 전시 주제인 “흐물흐물”이라는 표현은 액체성의 두 가지 측면을 말한다. 하나는 액체적 근대라는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적인 디스토피아적 리얼리티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의 생동성을 논한 제인 베넷(Jane Bennett)의 생동하는 현실이다. 방정아의 그림에서 현실은 재현 장치들을 통해 환기되며, 현실 자체는 생기적 정동으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방정아가 표현한 정동이 “흐물흐물”인 것이다. 생동하는 현실이라는 혼재와 동요라는 상태는 <플라스틱 생태계>(2021)에서 구현된다. 걸개 형식의 거대한 조각 그림이 걸려있는 공간은 가소성의 공간이다. 시들어가고 있는 것인지 다시 좀비처럼 스멀스멀 고개를 치켜드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국화들은 가소성(plasticity)의 미학적 표현이다. 바닥에는 원자력발전소 내 저장소의 핵연료봉을 상징하는 오브제-의자들이 놓여있다. 이 장소는 다소 SF적이지만, 현실을 반영한다. 방정아의 작업에서 현실은 어떤 공백이다. 공백을 창조하는, 혹은 공백 자체인 것은 대상들 혹은 진실이다. 그 자리는 악무한 혹은 순환의 원인이자 구심점이다. 이 공간에서 표현된 썩지 않는 근대성의 디스토피아성과 순환하는 자연의 생기(생동성)라는 것은 한국 근대성의 특징이기도 하다.
방정아는 역사라는 시간의 한 장면을 흐물흐물하게 포착한다. <미국, 그의 한결같은 태도>(2021)에서 방정아는 네 종류의 신을 그렸다. 노인과 젊은 여자 셋이 그들이다. 인공 분수대에 팬티만 입은 채로 쭈글쭈글한 몸을 거의 다 노출한 한 노인이 걸터앉아있다. 분수에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흐물거리면서도 여전히 세 여자의 관심을 받고 있다. 왼쪽 옆에는 원피스 입은 여자가 핸드폰을 들고는 꼿꼿하게 서서 노인을 흘겨보고 있다. 마치 잠복경찰처럼 노인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서 있는 그녀는 기록하는 자이며, 평범함을 위장한 오늘날 진실의 위치이다. 그녀의 핸드폰은 기록한다. 그것도 부족하여 그녀는 감각 기관인 눈의 신경을 곤두세워 정보가 비의식에 기억 저장되도록 한다. 그녀는 핸드폰 기록보다 더 확실할지도 모를, 뇌에 각인된 이미지를 통해 결국 진실을 증언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녀는 결국 망각할 것이지만, 사실은 비의식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여자는 노인을 향해 나아가려고 엉덩이를 들썩인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떤 동요를 나타낸다. 그녀가 모종의 공격을 할 것인지, 아니면 노인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은 이미 그녀가 어떤 일을 저지른 후일 것이다. 행위가 앞선 후 우리가 듣게 될 그녀의 이야기는 아무리 결정적인 것일지언정 증언력은 없을 것이다. 관객 쪽으로 몸을 내밀면서 뒤를 흘기는 여자는 상황으로부터 멀어지면서도 여전히 의심에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인간의 가장 이성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는 의심을 표현하지만, 이성적이기에 그녀는 결국 도망갈 것이다.
이 그림은 시간과 진실(혹은 대상)과 그것을 둘러싼 악무한 혹은 순환에 대한 그림이다. 기록과 (비의식적) 기억, 동요와 어긋남, 그리고 의심은 진실의 구성요소들이다. 근대 정치라는 첨단의 인공장치는 텅 빈 공백에서 진실이라는 샘을 만드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리고 진실을 쟁탈하려는 경합은 권력을 생산하며, 그 과정에서 자행된 폭력은 정당화된다. 진실은 권력과 더불어 탄생하는, 혹은 권력과 더불어 탈주하는 후렴구가 된다. 깨어있고 명징한 의식은 사태의 한 면이다. 그것은 아무리 정의롭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정의라는 것은 정동들이 복잡하게 분열되고 소집되는 진행과정에서 종종 드러나는 인간주의적 현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불안이라는 기후대에서의 작업
방정아는 한국 사회의 일상 풍경을 그려왔다. 그 풍경은 분단 이후 한국 정치에서 비롯된 현대사의 풍경이기도 하다. 그것은 관조로써의 풍경이 아니라, 파고들수록 뭔가 아이러니하고 양가적이며 복잡하지만 말 못 할 사연들이 가득한 내러티브 공간이다. 방정아는 현실 자체와 사회 정치적으로 구축되는 내러티브 사이에서 자신만의 회화적 내러티브를 구성해낸다. 작가가 즐겨 쓰는 방식 중 하나는 맥거핀의 사용이다. 일상적이면서도 뭔가 범상치 않은 사람 혹은 그런 자세나 표정, 사물들이 항상 등장하며, 관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방정아의 그림을 자세히 볼수록 어느 하나 의미 없이 배치된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우연한 치밀함 속에서 영화적 서스펜스와 유머, 그리고 감각적 물질성과 자연이 환기된다.
물론 현대미술에서 비판 미학적 깊이를 재고한 것은 개념적 현실주의나 비판적 현실주의 등 각종 포스트-현실주의 세대 혹은 포스트-진실의 시대 작가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방정아의 긴장감에는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현실은 현실성이라는 후렴구로써가 아니라 현실 자체로 항상 긴장 상태이듯이, 진실은 원래 뭔가 있었다고 여기게 하는 환영적 도구이거나, 구축되어야 할 강박이 아니다. 현실과 진실의 문제를 긴장과 역량으로 표현하기라도 하듯, 방정아는 복잡한 내러티브를 유-무기물적 속성으로 휘감아내는 회화성을 구축한다.
작업 초기에는 소통의 꽉 막힘을 비판했다면, 2010년대 이후 방정아는 소통의 다른 가능성, 즉 시간성을 표현한다. 그 계기는 한국이라는 현실, 그리고 그곳의 현재성이다. 특히 2000년대 이후 방정아는 한국사회와 정치에서 느껴지는 악무한적 반복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를 모색했다. 그것은 인간중심주의의 한계와 인간성 자체에 대한 새로운 탐구와 성찰이기도 했다. 이때 방정아가 발견한 것이 시간이다. 그리고 역사라는 시간과 자연의 시간 사이에서, 기다림이라는 시간도 발견했다. 이 발견은 <복귀>(2002)라는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두려울 정도로 경이로운(외경심) 배경은 바다다. 그 한가운데, 저 멀리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 윤곽이 시야에 들어온다. 모녀(母女)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오뎅 마차가 아니라, 아득하게 수평선이 펼쳐지는 바다를 향하고 있다. 모녀 뒤로는 어지러이 파헤쳐지고 드러난 철근과 시멘트들이 흉물스럽게 뒹굴고 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뚜렷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바다 한가운데 위태롭게 서 있는 두 모녀는, 아름답지만 두려운 망망대해를 향하고 있다.
방정아는 이번 전시 주제인 ‘흐물흐물’에서 최근 수년간 고민해온 한국적 현실의 실체와 지구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풀어냈다. <플라스틱 생태계>에서는 가소성의 미학을 통해 역사의 시간과 현재성을 통합했고, <미국, 그 한결같은 태도>, <팠어, 나왔어>, <전시중입니다만>, <축 발전> 등의 회화 작품에서는 액체성의 미학으로 한국 지역과 사람들, 한국의 정치, 그리고 그들이 경합을 벌이고 있는 한반도의 땅을 드러냈다.
방정아가 관조적인 차원에서 자연을 다루지 않는 것은 자연조차 현실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땅과 물과 생명이 유린되고 훼손됨에 분노한다. 그와 동시에 생명의 양가성에 희망을 걸기에 방정아가 그린 그림은 분리 불가능한 분열의 장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의심과 불안이라는 정서(emotion) 또한 양가적 정동(affect)이며, 살아 생동하는 정서들이다. 가소성과 액체성은 활성화된 땅과 물의 역량이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사회 속성도 반영한다. 드높고 깊고 횡단하며 교차하는 정동(affect) 장으로써의 방정아의 그림은 현실이라는 불안한 기후대 풍경이다. 미학 장에서 논하는 정동은 시간의 다른 차원을 드러낸다. 그것은 정지한 듯 느리지만 지속되는 공통세계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