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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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는 시스템 안에서 집단화되고 소외되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 강하게 질문한다.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과 근대화의 구호 아래 종속되어야 했던 개인적 경험을 다시 호명하며, 오늘에 이른 한국 남성의 원형이 자라난 ‘터’를 흥미롭고도 심층적으로 탐사한다. 무대로 조성되는 14m 높이의 전시 공간에는 로봇 군상의 일률적인 제식 동작이 연출되고, 생동하는 조각들에 반응하며 빛과 색채가 조절된다.
Interview
CV
<개인전>
2015 시공간 기계, 을지로 동진빌딩, 서울, 한국
2013 철의 꿈, Opsis Art, 서울, 한국
<주요단체전>
2017 올해의 작가상 2017,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한국
2017 우리의 밝은 미래- 사이버네틱 환상, 백남준 아트센터, 용인
2017 직관의 풍경,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2016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 갤러리 현대, 서울
2016 아트스펙트럼, 리움 삼성미술관, 서울
2015 광복70주년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4 Korea, FiveMyles, 뉴욕, 미국
2012 타이페이 비엔날레, Taiwan
2009 Lil Joe’s, 9/11, Porn, Yanks and Murder, IMT Gallery, 런던, 영국
2007 Düsseldorf Contemporary, 뒤셀도르프, 독일
2003 How Latitudes Becomes Forms: Art in a Global Age, Walker Art Center, 미니애폴리스, 미국
<주요상영>
2015 Sharjah Biennial, 아랍에미리트연방
2014 Berli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Forum Selection, 독일
2014 Museum of Modern Art(MoMA) Documentary Fortnight, 미국
2011 Los Angeles Film Festival, 미국
<소장처>
아라리오뮤지엄, 한국
삼성미술관 리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수상>
2016 삼성미술관 리움, 아트스펙트럼 작가상, 한국
2015 SINAP 신도리코 작가 지원 프로그램, 한국
2015 들꽃영화제, 촬영상, 한국
2014 베를린 국제영화제, 넷팩상 (최고 아시아영화상), 독일
2014 로마 아시아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 상, 이탈리아
2014 대만다큐영화제, 작가시선상, 대만
<레지던시>
2012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6기입주작가, 한국
<필모그래피>
2013 철의 꿈, 98 min. HD
2010 청계천 메들리, 79 min. DV
Critic 1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눈: 박경근의 작품세계
기혜경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운영부장)
영상 미디어를 주요 매체로 활용하는 박경근은 <청계천 메들리>(2010)를 통해 전근대와 근대가 착종된 채 진행된 한국의 산업화 과정을 청계천 일대의 공장과 그곳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함축적으로 풀어내었다. 또한, <철의 꿈>(2014)에서는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가 배를 연상시킨다는 점에 착안하여 반구대 암각화 인근에 위치한 한국 산업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포항제철과 현대조선소를 철의 관점에서 다루며 작가의 개인적인 감정, 예술의 기원, 신화, 그리고 그것과 연동되어 진행되어 나간 한국의 근현대사를 탐색하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작가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스케일의 자동차 공장의 빛과 공기, 로봇들의 소리가 불러일으키는 웅장함과 역동성을 <1.6초>(2016)에서 담아내거나, 한국 남성이라면 대부분 경험한 군대문화를 통해 한국사회의 단면을 드러낸 <군대: 60만의 초상>(2016) 등을 제작하였다. 이들 작업에서 작가는 한국사회가 드러내는 남성 중심적 사회시스템을 철, 자동차, 군대 등을 통해 표상함으로써 한국의 남성중심 문화와 그것이 표상된 스펙터클한 영상 이면의 사회를 반추하게 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한편, 최근 박경근이 새롭게 선보인 작품은 이전 시기의 작업들과 사회를 바라보는 문제의식이라는 면에서는 공통점을 갖지만 그것에 다가가는 방식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를 드러낸다. <천국의 계단>(2016)이라 명명된 이 작품은 전시 개막 당일 공간 전체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퍼포먼스에 대한 실시간 영상과 기존에 촬영한 영상을 함께 상영하는 방식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연전 공전의 히트를 쳤던 TV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한 ‘천국의 계단’을 차용한 이 작업은 드라마의 주요 등장인물인 4명의 인물들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관계 맺기 방식에 주목하며, 그러한 관계의 방식을 유형화시켜 퍼포먼스로 보여준다. 수동성과 적극성, 한 발 먼저 손을 내미는 몸짓과 머뭇거림, 기쁨과 후회 등… 관계맺기 과정에서 노정되는 감정이 4명의 무용수들의 만남과 헤어짐, 엇갈리듯 스쳐지나가는 일상적인 몸동작과 표정을 통해 표현된다. 더 나아가, 작가는 이러한 퍼포먼스 영상을 드러냄에 있어 기존에 촬영된 영상과 지금·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서의 장면을 스크린에 교차하여 투사시킴으로써, 관객에게 장소적·시간적 혼란을 초래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작가는 현장 촬영된 실시간 영상을 프로젝션함에 있어서도 투사된 영상이 다시금 카메라 렌즈에 잡혀 또 다시 스크린에 투사되게 만드는 촬영과 프로젝션 사이에 우리의 눈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는 시간의 차이를 이용한 미러링 효과를 만들어 냄으로써 동시성과 비동시성을 한 공간 속에 버무려 놓는다. 지금 막 지나가버린 순간과 바로 지금, 그리고 또 금방 다가올 미래가 한 화면의 프레임 속에 녹아들어감으로써, 우리의 눈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는 동시적이면서도 비동시적인 분절된 시간을 시각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의 화면 속에서 분절되며 되풀이되고 섞여버리는 시간의 순서는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장소에 걸린 디지털시계처럼 연속적이지만 분절되어 있으며, 분절되어 있지만 또 연속된 흐름으로 다가온다. 이는 아인슈타인의 동시성과 비동시성을 한 화면과 공간 속에 공존하도록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가시화 한 것이며, 이러한 분절은 어쩌면 화면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퍼포먼스하고 있는 인물들 간의 어긋난 관계를 시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디지털화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분절된 관계 역시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이곳과 저곳, 그때와 지금의 구분을 무화시켜 나간다. <천국의 계단>에서 보여준 이와 같은 문제인식은 그의 전작인 <시공간 기계>(2015)에서의 문제의식을 이은 것으로 이들 작품은 다큐멘터리 영상작업에서 출발한 박경근이 점차 영화의 문맥과 미술의 문맥을 성공적으로 넘나들며 작업을 병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Critic 2
프레임의 안과 밖: 박경근 작가 인터뷰
일시: 2017년 8월 14일
문혜진 (미술비평가)
문혜진(이하 문): 이번 인터뷰는 ‘올해의 작가상 2017’에 출품되는 신작과 이와 관련된 구작들을 중심으로 진행하고 싶다. 우선 신작부터 이야기 하도록 하자. 설치하면서 최종 결정될 사항들이 많겠지만 큰 골격은 정해진 것으로 안다.
박경근(이하 박): 이번 신작은 반(半)자율적으로 작동하는 폐쇄회로 피드백 루프의 구현이다. 전시장 전체는 양면 스크린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거대한 영화관이자 무대다. 스크린 사이에는 모형 총들이 도열해 있다. K2 소총을 모본으로 한 총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의장대 사열을 하듯 움직인다. (움직이는 주기와 방식은 아직 미정이다.) 스크린과 모형 총 사이에는 두 대의 카메라가 서로를 마주보며 설치된다. 이 카메라는 렌즈 앞의 광경(맞은편 스크린과 도열한 총의 움직임)을 찍어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전송한다. 관객은 양 쪽 스크린 사이에서 걸어 다닐 수 있고 중간에 서서 스크린의 응시를 마주할 수도 있다.
문: 개인적으로 완벽히 프로그래밍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무작위도 아닌 반(半)자동의 속성이 흥미롭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상의 변환 구조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박: 영상은 만들어져 투사되는 일반 영상(generated image, G)과 설치 장면이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거울 반사 영상(mirrored image, M)의 두 가지로 구성된다. 스크린이 두 개이므로 가능한 조합은 (G, G), (G, M), (M, G), (M, M)의 네 가지가 될 것이다. G의 경우는 특별한 이미지 없이 색조와 명암의 변화만으로 구성되는데, 저밀도 이미지(low intensity, G1)와 고밀도 이미지(high intensity, G2)로 나뉜다. 구체적 이미지를 생략한 것은 빛 자체를 구현하기 위해서다. M의 경우도 네 가지 옵션이 있다. 흑백, RGB 컬러, 색 정보를 단순화한 YCbCr 컬러, 특수효과가 그것이다. 하나의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의 전환은 불규칙적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일정 비율을 유지하게끔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이때 G1, G2, M이 전환되는 계기는 일정 데시벨 이상의 소리다. 주로 총이 움직이는 소리가 유발점(trigger)이 되는데, 관객이 큰 소리를 낼 경우 관객의 개입으로도 바뀔 수 있다.
G1 (low) | G2 (high) | M(CAM) | 조합1 | 조합2 | 조합3 | 조합4 | |
CH 1 | 3/7 | 2/7 | 2/7 | G | G | M | M |
CH 2 | 3/7 | 2/7 | 2/7 | G | M | G | M |
B&W | RGB | YCbCr | Effect 1 | |
M (CAM) | 1/4 | 1/4 | 1/4 | 1/4 |
문: 신작의 핵심 요소는 영상(영화)의 기본 구조에 대한 탐색으로 보인다. 빛, 카메라, 영사기, 스크린, 관객이라는 영상의 핵심 요소 말이다. 여기서 영사기(프로젝터)는 만들어진 영상을 수동적으로 투사하는 장치기도 하지만 동시에 맞은편 카메라에 빛을 제공하는 광원으로서도 작동한다. 스크린 역시 투사된 영상을 수동적으로 재생하는 막이자 그 앞에서 벌어지는 쇼의 무대기도 하다. 영화는 영사기에서 나온 빛이 스크린으로 향하고 관객 역시 해당 방향으로 정렬하는 일방향성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 구조를 겹쳐놓음으로써 쌍방향의 닫힌 계를 만들었다. 이 부분이 개념적, 구조적 긴장감을 부여한다. 만들어진 영상(G)에서 구체적 이미지를 생략한 것도 적절한 선택이라고 본다. 영상이 동시에 빛으로 작용하려면 내용(이미지)이 있으면 방해가 된다. 빛 자체의 질감을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런 점에서 픽셀이 깨지는 노이즈와 깜박거리는 플릭커(flicker)의 효과가 디지털 시대의 빛의 속성을 잘 구현하는 것 같다.
무한히 반사하는 실시간 비디오 폐쇄 회로 시스템은 댄 그래엄(Dan Graham)의 <Present Continuous Past(s)>(1974) 등 여러 선례가 있다. 그런데 이런 선례들이 거울을 활용해 무한 반사의 닫힌 계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았다면, 당신의 신작의 경우 두 개의 마주보는 카메라를 활용해 재귀적 폐쇄 회로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경우 초점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거울을 활용하는 경우는 시간성에 방점이 있을 확률이 높다. 거울을 현재를 대변하는 반면 녹화된 영상은 아무리 실시간이라 하더라도 시차가 있기 마련이라 과거를 대변한다. 그렇기에 무한히 반사되는 영상은 몇 초 앞의 과거들이 현재와 맞물려 무한히 도열된 시간의 단층과도 같다. 반면 당신의 신작에서 방점은 시간이 아니라 응시에 있는 듯하다. 마주보는 카메라 두 대는 서로간의 응시에 해당하고, 관객이 자신의 모습이 비춰지는 스크린을 마주보는 경험 또한 상호 응시의 속성이 강하다.
박: 그렇다. 신작이 의도한 효과 중 핵심적인 부분이 응시와 관련이 있다. 모니터도 두 대고 카메라도 두 대인데 그 사이에 관객이 들어간다. 여기서 관객은 쌍방향으로 진행되는 응시에 관통된다. 촘촘하게 짜인 쌍방향 레이저 그물의 한가운데에 들어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구조를 착안하고 시험해보았을 때 느낀 감정은 공포였다. 감시 회로 내부에 삽입되어 몸이 절단되는 느낌이 들었다. 쌍방향 응시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그 사이에서 몸이 관통되는 공포가 작업의 근간이다. 한편, 공포감은 조금 다른 방향에서도 발생하는데 실시간 비디오 영상이 지속되지 않는 것도 한 요인이다. 실시간 비디오가 관객을 비추고 있다가 갑자기 화면이 바뀌면, 마치 내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존재가 지워지는 느낌이랄까. 하나의 안정된 구조 안에 있다가 내 의지와 관계없이 갑자기 공간이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이때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는 방향상실의 느낌이 발생한다.
문: 마지막 부분은 직접 체험해보지 않아서 정확히 판단을 하지 못하겠다. 화면 전환이 급작스러운 단절의 느낌을 준다는 것은 납득이 되는데, 공포라는 부분은 사람마다 다를 것 같다. 카메라가 나를 보고 있음을 인지하게 해주는 거울 이미지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안정된 세계의 상일 수도 있지만, 나처럼 응시의 대상이 되는 걸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비친다는 점이 불편할 수도 있다. 그 경우 화면이 전환되면서 내 이미지가 사라지는 것은 공포가 아니라 안도일 수도 있다.
박: 그럴 수도 있다. 어떻든 내게는 방향 상실(disorientation)의 감각이 중요했다. 응시라는 측면에서 또 하나 의도한 것은 스크린 속에 다른 스크린이 비춰졌을 때, 스크린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함(uncanny)을 주는 것이었다. 내 뒤에 있는 카메라가 내 뒷모습을 잡아서 뒷면의 스크린에 투사시키면,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나의 뒷모습이 내 뒤에 나타난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상당한 공포다. 내가 모르는 새 누가 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섬뜩함 말이다.
문: 그 부분은 쉽게 납득이 된다. 라캉이 이야기하는 고등어통조림의 비유 아닌가. 사물/타자가 나를 응시하는 데서 오는 공포는 일반적이다. 여기서 나의 흥미를 끄는 부분은 결과적 효과인 공포보다 그것을 유발하는 구조다. 이 경우에는 전통적 일방향 스크리닝 구조에 쌍방향성을 도입하고, 영상이 완결된 채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하게 불규칙적으로 계속 바뀌며, 관객이 피드백 루프에 개입되고, 키네틱 로봇이 영상 전환의 기폭제 역할을 한다는 점이 고전적 영화의 구조와는 다른 점일 것이다. 내게는 당신의 작업이 한편으로는 대단히 영화적이면서 다른 한편 탈영화적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서의 영화적이라는 개념은 내러티브 같은 내용적 측면이 아니라 구조적인 측면이다. 지극히 전통적인 영화의 장치(카메라, 스크린, 프로젝터, 빛)나 개념(이를 테면 응시)에 기반해 있으면서도 이를 비트는 지점이 흥미로운 것이다. 이런 점은 비단 이번 작업뿐 아니라 작업 전반에서 나타난다. 영화적 기반이 단단하고 전작에서 형식적 측면이 항상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박: 동의한다. 어떤 측면으로는 형식주의자(formalist)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웃음) 영화적 훈련을 철저히 받은 것이 사실이고 사물을 바라볼 때 카메라 프레임을 통해 바라보는데 익숙하기도 하다. 형식적인 측면은 언제나 중요하지만, 다만 작업을 구상할 때 개념적으로 접근하는 편은 아니다. 감각이 개념보다 먼저 작동한다. 일례로 <철의 꿈>(2014)의 경우에도 편집할 때의 준거는 개념보다 감각이었다. 잔잔함이 오다가 뜨거운 무언가가 오는 식으로 질감의 차이에 따른 리듬을 중시한다. <철의 꿈> 멀티 채널 버전의 경우 편집에서 큰 축은 수직적인 것에서 수평적인 것으로의 전환이다. 먼저 이미지가 따라가고 개념이 나중에 뒤따른다. 매달려 있거나 수직으로 선 이미지들이 나중에는 눕는다. 곧추 선 고래나 거꾸로 매달려 건조중인 배, 불기둥 같은 수직적 이미지로 시작해서 마지막은 수평으로 얌전하게 쌓인 철판으로 마무리된다. 이를 수직이 형상화하는 상징들(산업화, 남성, 철, 독재정치 등)의 종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대 서사를 설명하기 위해 이미지를 동원하는 것은 아니다. 의도한 감정이나 감각에 이미지나 사운드가 조응하고 여기에 개념이나 상징이 수반된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문: 감각이나 감정이 이미지나 사운드의 구성으로 직결된다는 점에서 형식이 내용을 이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신작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았으니 다시 신작으로 돌아가자. 얼핏 보면 작업들이 공통점이 별로 없이 툭툭 떨어져있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이전 작업의 요소들이 다음 작업에서 변주되는 경우가 많다. 신작의 경우도 전작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예를 들면 <시공간 기계>(2015)에서 처음 등장한 움직이는 오브제(kinetic object)는 신작에 와서 본격화된다. 실시간 비디오(live video)의 착상도 <시공간 기계>에서 처음 시도한 것으로 안다. 개념적으로 신작과 직결되는 부분은 키네틱 요소보다 실시간 비디오의 측면이다. <시공간 기계>에서 얻은 것은 무엇이고 그 점이 이후 작업과 어떻게 이어지나.
박: <시공간 기계>은 영상과 실제 오브제 사이의 차이를 실험한 작업이다. 이 작업은 시공간을 만드는 두 가지 기계를 보여준다. 하나는 실제로 움직이면서 시공간을 수반하는 오브제고, 다른 하나는 가상의 시공간을 창출하는 영상이다. 이때 오브제의 움직임은 카메라로 실시간으로 촬영되어 투사되는데, 오브제가 일종의 반사판의 역할을 해 영상에 간섭한다. (그 결과 투사되는 이미지와 오브제의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조응하여 끊임없이 변화한다.) 여기서 내가 확인한 것은 영상이 실제보다 훨씬 실감난다는 점이다. 실제 오브제의 움직임은 아주 느려서 움직이는지 아닌지 감지하기 어려운데, 영상을 통해 보면 움직임이 훨씬 명확하게 보인다. 이점을 허상과 실상의 존재론적 차이,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나에게 흥미로웠던 것은 실제와 이미지를 동시에 볼 때 감지되는 차이 자체였다.
문: 그 지점이 구체적으로 확장된 작업이 작년의 라이브 퍼포먼스 영상인 <천국의 계단>(2016)일 것이다. 거울 반사 개념을 적용한 것도 이 작업이 처음인데, 이번 신작은 <천국의 계단>의 연기자를 로봇(총)으로 교체한 변형 라이브 퍼포먼스 같기도 하다. <천국의 계단>의 형식적 핵심은 실제(퍼포먼스)와 영상(퍼포먼스의 실시간 비디오)의 간극이다. 이 구조에 대해 설명해달라.
박: <천국의 계단>은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과 육안으로 보이는 것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려고 한 작업이다. 육안으로 볼 때는 보통 배경이 함께 들어오고 연기자의 몸 전체를 보게 된다. 반면 접사와 선택적 프레이밍에 특화된 카메라는 얼굴 표정이나 특정 부분을 강조하기가 쉽다. 실제의 움직임은 스크린에 옮겨지면서 과장되거나 축소되고, 이 어긋남에서 모종의 긴장감이 형성된다. 이를테면 눈으로만 볼 경우 배우의 미세한 표정을 보기 힘들지만 카메라가 들어가면 입이나 눈썹의 움직임에 따른 섬세한 감정선을 포착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의도한 것은 영상을 육안의 보완재로 쓰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서로 다른 두 상태가 공존하면서 발생하는 긴장을 재현하고 싶었다. 이 작업에서 관객은 프레임 속 영상을 쳐다보다가 프레임 밖 배우의 움직임으로 주의를 돌렸다가를 반복하게 된다. 눈 앞의 배우들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실시간으로 투사되는 스크린 속 이미지도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몰입과 이탈을 반복하며 어느 한 곳에도 완벽히 이입하지 못하는 상태 혹은 두 상태를 동시에 느끼는 감정을 만들고 싶었다. 좀 엉뚱하지만 예전에 서해안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노을 지는 수평선을 보며 캘리포니아에서 태평양을 끼고 운전할 때 느꼈던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다. 그것은 기억의 회상이 아니라 그때 거기에서 느꼈던 상태가 지금 여기에서 동시에 느껴지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그런 어긋남과 연결됨에서 오는 감정을 담고 싶었다.
문: 퍼포먼스는 오프닝에만 있었고 이후에는 영상만 틀었기 때문에, 개막식에 못 간 나로서는 의도한 그 간극이 실제로 잘 구현되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추정컨대 의도한 이중 구조가 잘 전달되었을 것 같지 않다. 주된 이유는 두 가지일 텐데, 하나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관객이 장면과 장면을 연결해 이야기를 파악하는데 골몰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나 해당 이야기가 유명한 드라마를 모본으로 한 것이고, 감정선이 강하고 자극적이기 때문에 인물들의 관계 파악과 감정 변화를 따라가는데 주의가 집중되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음악이다. 배우들의 감정 연기를 돕기 위해 스페인 기타 연주를 삽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음악이 워낙 감상적이어서 배우들의 감정 연기에 몰입하게 되지 프레임 안과 밖이라는 구조에 눈이 가질 않는다.
박: 큰 맥락에서 수긍한다. 음악의 경우는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재편집할 때 상당 부분을 덜어냈다. 이야기의 문제는 작업 의도상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주변 상황에 좌우되는 드라마 주인공들의 행보가 한국인 일반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주체성이 배제된 한국인의 욕망 기제가 한국사회의 특성을 반영한다고 생각했고,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를 통해 이를 반영하고자 했다.
문: 방금 이야기한 내용적 의도가 몰입과 이탈을 반복하게 만드는 형식적 구성과 어떻게 맞물리나?
박: 한국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스스로의 감정에 따라 행동을 하지 않고 외적 상황에 따라 반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 관계나 경제적, 사회적 배경처럼 외부에서 주입된 상황에 따라 행동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감정 또한 외부 요소에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것 같다. 감정이 순수하게 내적으로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입되어 형성되는 것이다. 만약 자신만의 순수한 감정이라면 상대에게 완전히 몰입이 될 텐데, 주변 눈치를 너무 보다 보니 몰입이 안 된다. 그렇다고 내부 감정이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므로 남의 일 보듯 완전히 거리를 두지도 못한 채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걸쳐져 있다. 이렇게 몰입과 몰입되지 않음 사이를 왕복하는 기묘한 이중적 감정 상태를 표현하고 싶었고, 이것을 프레임 내부와 외부에서 분열되는 복수적 시점으로 구현했다.
문: 프레임 내부와 외부 사이를 왕복하는 중간적 성격은 비단 <천국의 계단>뿐 아니라 작업 전반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보인다. 사실 박 작가 본인이 한국과 미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 아닌가. <철의 꿈>이나 <청계천 메들리>(2010)처럼 형식적으로는 <천국의 계단>과 거의 무관해 보이는 작업도 피사체에 접근하는 카메라의 태도라는 점에서는 유사한 지점이 있다. 여기서 카메라는 대상에 완전히 이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철저히 외부자의 시선을 취하지도 않는다. 한 발은 들여 놓되 다른 한 발은 밖에 둔 이중적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군대>(2016) 역시 마찬가지다. 수업 시간에 이 작업에 대한 반응을 학생들에게 물은 적이 있는데, 외국인이 한국을 관찰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다는 반응부터 작가가 뒤늦게 군대에 가서 소재에 너무 이입한 것 아니냐는 반응까지 성별과 배경, 군필 여부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이렇게 흩어지는 반응은 군대라는 소재의 특수성도 있겠지만 이 작업에서의 카메라의 시점 역시 반쯤은 붙어있고 반쯤은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박: 중간이라는 표현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다. 삶에서 중간적 태도는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함몰되고, 또 완전히 방관하는 것이 나의 기본 태도다. 나에게 작업은 나에 대한 탐구의 일환인데, 내가 누군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내가 속한 프레임(사회적·문화적 계급이나 젠더) 밖으로 빠져 나와야 한다. 프레임 밖에 있어야만 내가 속한 프레임이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를 긍정하고 철저히 내 욕망에 입각해 현실 속에 있어야 나의 시선을 확보하고 내 목소리에 설득력과 힘이 생긴다. 한마디로 원하는 것만 보고 다른 건 하나도 안 보여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 두 발은 프레임 안에, 머리는 프레임 밖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삶을 진지하게 살면서도 내 자신을 비웃을 수 있는 방식인 것 같다. 물론 진지하게 책임지는 자세가 중요하지만 내가 정말 진지하고 잘나서 또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너무 중요해서 나를 비웃을 수 없게 되면 정말 부담스럽고 짜증나는 인간이 될 것 같다.
문: 이야기를 돌려서 <1.6초>(2016)로 가보자. 카메라, 관객, 공간, 스크린이라는 영상의 본질적 구조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신작과 직결되는 작업은 <1.6초>일 것이다. 이 작업을 압도하는 인상/키워드는 기계의 시각(machine vision)이다. 채널 1은 자동차를 조립하는 기계의 움직임을, 채널 2는 그 기계를 촬영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조립라인의 기계의 움직임을 정확히 모방하고, 카메라 역시 기계이므로 두 채널은 모두 기계의 시각을 대변한다. 여기서 인간의 시각이 아닌 기계의 시각이라는 이질성을 주는 핵심 요소는 카메라 워크다. 거꾸로 그림을 바라보다가 회전하는 채널2의 장면처럼 뒤집어서 보거나 소용돌이치며 회전하는 카메라 움직임이 생경함을 주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카메라 워크를 설정했는지 묻고 싶다.
박: 카메라 움직임은 정확히 조립 라인의 기계 움직임을 본뜬 것이다. 본래는 조립 라인의 로봇 팔에 카메라를 달고 싶었으나, 안전상 이유로 불가능해서 따로 찍어야 했다. 모션컨트롤 장비를 빌려 카메라를 설치하고 원격 조종으로 카메라를 움직였다. 하나는 로봇 팔을 찍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찍는 카메라를 촬영해야 했기에 모션컨트롤 장비에 카메라를 두 대 달았다. 채널 1은 기계의 시선, 채널 2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설정해서 채널 1은 점점 멀어지게, 채널 2는 점점 가까워지게 편집했다. 회전하는 카메라 워크는 화면 기준으로 Z축을 회전시켜 중력이 없어지는 효과를 주는 더치롤(dutch roll) 기법을 활용했다. 그밖에 Y축으로 상승하는 지미짚 샷이나 X축으로 수평 이동하는 트레킹 샷 등도 사용했다. 카메라 자체를 움직이는 테크닉을 많이 써서 중력에 상관없이 움직이는 로봇의 시선을 형상화하려 했다.
문: 이 작업에서 카메라 움직임은 겉으로 볼 때 현란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단순하다. 거의 회전 운동에 집중되어 있다. 기계의 시각이라는 이물감을 주기 위해서는, 속도나 줌, 편집의 끊기는 정도 등으로 더 불연속성을 강조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카메라 기법을 단순화한 이유가 있는가?
박: 현란한 카메라 기법으로 관객의 지각을 혼란스럽게 하는 방식은 이미 상업영화에서 많이 써서 식상하다고 생각했다. 영상은 강약 변화 없이 평이하게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트릭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만들어서 속도를 평준화시킨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초입부에 서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로봇 팔의 움직임은 초당 120 프레임의 고속으로 찍어서 보통 속도로 영사해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사람이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듯 기계가 서서히 가동되는 느낌을 주고 싶어서 느리게 움직이게 보이도록 조작을 했다. 이렇게 느려 보이게 만든 부분은 이 외에도 몇 가지가 있는데, 시계가 나오는 부분과 사람이 등장하는 부분도 그렇다. 시계의 경우 느리게 가게 만든 것 외에도 채널 2의 경우는 거꾸로 가게 조작하기도 했다. 사람을 찍은 부분도 기계의 시각에서 보면 사람의 움직임이 굼뜨고 느리게 보일 것 같아서 일부러 느려 보이게 손을 댔다.
문: 시계를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주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강조하기 위해서로 보인다. 이 작업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중요해 보이는데, 방금 설명한 표면적 속도와 실제 속도의 차이에 대해 좀더 얘기해보자.
박: 외관상으로는 등속도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나, 내부에는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선형적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선형적이지 않고 소용돌이치며 가속되거나 감속되는 각기 다른 리듬의 시간 말이다.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려면 공통으로 합의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계적 시간(mechanical time)에 맞춰 산다. 하지만 사람은 생물이라 자체의 생체 리듬(biological time)이 있다. 이 두 가지 시간이 일치하지 않을 때 충돌이 생기고 거기서 감정이 발생한다. 몇 시까지 마감을 해야 하는데 몸 상태가 도저히 안 따라온다든지 할 때 초조감이나 짜증이 발생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 비선형적이고 불균질한 시간성은 중요한 이야기다. 방금 설명한 시간의 구조는 파동의 종파(縱波) 개념으로 이미지화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용수철을 앞뒤로 밀면 민 힘이 스프링의 밀도를 달리하며 전달되는 모습 말이다. 빽빽한 부분과 성긴 부분이 번갈아 나타나며 에너지가 전달되지만, 파동의 진행 방향과 매질의 진동 방향이 수평 방향으로 나란하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움직임이 없다. 이런 이미지가 외견상 등속도이나 실제로는 리듬이 각기 다른 시간들이 공존하는 구조를 적절히 도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기계적 시간과 생물학적 시간 이야기는 추가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작업의 기획 의도 및 시간과 감정의 상관 관계에 대해 조금 더 논의하자.
박: 이 작업은 현대자동차 ‘brilliant memories’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된 것이다. 현대자동차 조립 공장은 이미 자동화되어 인간보다 기계 중심으로 운영된다. 공장의 실질적 주체라고 할 수 있는 기계를 보면서 인간의 시간과 로봇의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감각은 시간을 통해 느껴지고 로봇과 인간의 시간은 차이가 나므로, 로봇의 감각은 인간의 감각과 전혀 다를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감각적 감지에서 시작되고, 감지에는 시간이 필요하므로 감정은 시간과 무관하지 않다. 바꿔 말하면 감정을 만들어주는 형식이 시간인 것이다.
문: 각기 다른 생체 리듬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표면적으로 기계적 시간에 몸을 맞춰야 하나, 그 안에서 각자의 다른 리듬들이 공존하고 있다. 또한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 또한 원론적으로 시간 의존적이고, 기계적 시간과 생물학적 시간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이렇게 정리하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 그런데, 인간의 시간과 로봇의 시간이라는 구분이 원론적으로 가능한지 의문이다. 내 생각에는 인간의 시간이라는 감각에 이미 기계의 시간이라는 감각이 녹아 들어 있고, 상대적 차이일 수는 있어도 그 둘을 원론적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싶다. 당신이 말했듯 우리의 사회적 시간이 기계적 시간에 근거하고 있고, 그 시간이 지닌 규격화되고 분절된 속성에 우리 몸이 이미 상당히 길들여져 있다. 더욱이 기술 문명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기계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고 그에 따라 우리의 감각 자체도 갈수록 기계화되고 있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사용 전과 후를 생각하면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소설가들이 필사를 하면서 생각을 발전시켰다면 오늘날의 소설가들은 노트북을 켜야 착상이 시작된다. 작가인 당신의 감각과 시선 또한 카메라에 길들여져 있기에 이 작업에서 당신의 시선에도 기계의 시각과 인간의 시각이 혼재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나는 인간의 시간 자체에 기계의 시간이 내재되어 있고 이미 분리하기 어려울 만큼 혼성적이라고 생각한다.
박: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1.6초>에서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 역시 인간과 기계 사이의 이분법적 구분에 대한 의문이었다. 감정 없이 움직이는 로봇의 동작을 보며 묘한 동질감을 느꼈고, 그것이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생각해본 것이 작업의 출발점이었다.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대표적인 요소는 감정인데, 사실 감정이란 나 자신보다 타자와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데 더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감정은 개체의 고유한 속성이라기보다 사회적인 구성물이다. 한편, 인간보다 기계에 더 친숙함을 느낀 또 다른 계기도 있다. 자동차 공장에서 로봇의 생산 속도를 1.6초 단축하면 문제가 되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한다. 이미 기존의 리듬에 조율된 인간이 변화에 적응을 못하고 기계는 유기적 생산환경 변화에 즉각적으로 맞출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자동차 공장에서 더 살아있는 것 같다고 생각된 것은 인간이 아니라 기계였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봤더니 나의 시선 자체가 카메라, 즉 기계의 시선이었다.
문: 로봇과 인간의 문제는 신작에서 모형 총의 형태로 반복된다. 이 문제는 다시 다루기로 하고 영상의 구조 문제로 돌아가자. 개인적으로 이 작업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을 보면서 마이클 스노우의 <La Region Centrale>(1971)이 떠올랐다. <La Region Centrale>의 경우 카메라의 움직임이 분절적이지 않고 연속적이라 관객이 해당 움직임을 따라가며 카메라와 합체가 된다. 즉 영상에서 보여주지 않는 ‘비어 있는 중심’(카메라의 자리)에 정확히 관객의 눈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반면 <1.6초>의 경우 편집에 의해 움직임이 계속 끊겨서 관객이 하나의 연속되고 통일된 시점을 가질 수가 없다. 더욱이 한 눈에 파악할 수 없는 2채널이라 이런 불연속성, 방향 상실의 어지러움은 더욱 강화된다. <1.6초>에서 관객과 카메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박: 기계의 감각(시선)을 구현하려 했고, 이를 기계적 시간(그러나 실제는 다른 층위의 시간들이 얽혀 있는 복합적인 시간)이라는 외피로 표현하려 했기에 컷은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편집을 강화해 컷을 가시화하려고 했다. 기계 자체가 분절적이기 때문에 영상에서도 분절의 느낌을 살리고자 했다.
문: 앞서 말했듯 <1.6초>에서 카메라는 조립라인의 기계와 동치다. 작가의 시선이 카메라의 시선과 동치이므로 카메라=기계는 감독(인간)=카메라=기계로 이어진다. 스노우의 <La Region Centrale>의 경우 카메라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카메라가 곧 관객이 되지만, <1.6초>는 카메라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외부자가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외부자가 된 관객이 2채널 설치로 인해 다시 내부자가 된다는 점이다. 화면 가득 움직이는 기계장치에 둘러싸인 관객은 조립라인의 기계 속에 갇혀서 하나의 부속이 된다. 설치 전체(사운드 이미지 모두)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기계가 되는 것이다.
박: 채널1을 카메라가 찍는 풍경(기계의 움직임)으로 채널2를 그것을 찍는 카메라로 구성했고, 채널1과 채널2가 서로 마주보도록 설치했기 때문에 관객이 그 사이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설치 공간은 카메라의 내부가 된다. 카메라 렌즈와 풍경 사이에 카메라의 몸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관객은 카메라 내부에 들어가 있는 셈이 된다.
문: 엉뚱한 소리지만 이 작업을 4DX 상영관에서 보면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했다. 방향상실의 감각이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했달까. 물론 실제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걸 안다.
박: 미니어처 카메라로 찍은 것이 아니라 상영관에서는 실감나는 느낌이 덜할 것이다. 스케일이 아주 크지도 작지도 않아서 애매하기도 하다. (웃음)
문: 농담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았다. (웃음) 마지막으로 구조상 <1.6초>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비동기화(non-sync)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1.6초>의 두 채널은 각기 길이가 다르다. 채널1은 16분 25초, 채널2는 12분 20초다. 더욱이 사운드도 별도로 제작되어 튼 것으로 알고 있다. 두 개의 영상과 사운드가 모두 독립적이고 각기 길이가 다르기 때문에, 이미지1-이미지2-사운드의 조합은 매번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어떤 관객도 같은 영상을 볼 수 없다!) 일종의 무작위 조합인 이러한 구성은 영상의 길이와 구성이 고정된 고전적 영화 구조에 대한 탈피인가?
박: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전형을 의식했다기보다 새로운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아주 단순하게는 어차피 마주보는 2채널이라 한눈에 안 들어오니까 싱크가 맞을 필요가 없다고 보았고, 조합이 계속 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어긋나면서 새로운 조합이 생기는 것이 시각적으로 효과적이라고 보았다. 의도하지 않은 이미지와 이미지, 이미지와 사운드의 충돌에서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발생하게 만들고 싶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패턴이면서 패턴이 아닌 새로운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문: 패턴이면서 패턴이 아닌 형식은 내용적으로 앞서 이야기한 복합적 시간 개념과 상통한다. 기계적 시간과 유기적(생물학적) 시간이 맞물린 복합 구조 말이다. 형식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비고정적인 구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이번 신작의 경우 우연성과 예측불가능성이 더 커지지 않았나. 화면이 전환되는 방식이 일정 데시벨 이상의 소리이기 때문에, 계획된 소리 외에도 관객이 발을 구르거나 하는 돌발 동작도 화면 전환의 유발점이 될 수 있다. 전환되는 화면에 어떤 이미지가 나타날지도 확률의 문제라 반자동적이기도 하고 말이다.
박: 각 채널의 이미지가 대칭을 이뤄야 하는 <철의 꿈>을 제외하고, 멀티채널 작품들의 채널들은 싱크를 맞추지 않았다. <청계천 메들리>에서도 5개의 채널의 길이가 모두 다르다. 태양계의 행성이 각각 다른 궤도를 돌며 마주치는 것처럼, 각 채널에 시간차를 주고 반복재생을 하여 한 채널의 이미지가 옆 채널의 이미지와 매번 다르게 붙는다. 이와 같은 조합은 의도된 것이 아니지만 관객에게는 계획된 것처럼 보인다. 내게 중요한 것은 서로 어긋나는 화면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비대칭적 구성과 리듬이다. 신작의 경우 기술적으로는 <1.6초>보다 더 우연성을 강화했다. <1.6초>의 경우 한 이미지 다음에 어떤 이미지가 올지 편집 순서는 정해져 있었던 반면, 신작의 경우는 그것도 로봇(의 움직임에 따른 소리)에 좌우된다. 하지만 로봇의 움직임도 그 움직임이 야기하는 화면 전환도 프로그램에 따라 결정된다. (로봇의 움직임은 아날로그 회로로 짜여져 있고, 화면 전환은 프로그램 코드가 지정된 확률 안에서 할당한다.) 이러한 비의도적 편집은 외견상 무작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내 의도를 더 강화한 것이기도 하다. 화면 전환의 비율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의도치 않은 발견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무질서는 싫어하는 사람이다.
문: 미뤄두었던 로봇과 인간의 문제로 돌아가도록 하자. 신작은 <천국의 계단>에서 실험한 연극과 영상의 결합을 확장, 응용했다. 이 작업은 한편으로는 거대한 시네마틱 피드백 루프 공간이지만 다른 한편 영상을 조명으로 삼은 거대한 연극 무대로도 볼 수 있다. <천국의 계단>의 배우를 로봇으로 대체한 것이다. 로봇이라는 키워드는 <1.6초>를 비롯해 소재나 개념적으로 그간 종종 사용되어 왔지만, 물리적으로 이렇게 대규모로 로봇을 구현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움직이는 오브제를 본격적으로 구현하는 것도 처음인 것 같은데, 실현에 어려움은 없었나.
박: 일단 전시 기간 내내 배우를 고용할 예산이 없었다. (웃음) 사람보다 로봇 쪽이 통제가 용이해서 선택했다. 말한 대로 움직이는 오브제를 만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고생을 좀 했다. 일단 로봇의 움직임을 직접 프로그래밍해야 하는 것부터 문제였다. 난데없이 엔지니어의 두뇌를 장착해야 했는데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로봇의 움직임에 절도를 주는 것이었다. 의장대의 사열처럼 움직임의 시작과 끝이 단정하고 우아해야 하는데 이것을 기계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움직이는 방향으로 관성이 생기기 때문에 멈출 때 반동이 발생한다. 이러한 에러는 예산과 장비, 속도 등 여러 가지 변수의 조합으로 발생한다. 제한된 예산에서 가능한 장비로 원하는 움직임을 만들어야 했다. 반동 문제는 로봇의 속도에 변화를 주고 플라스틱 부품의 마찰을 이용해 잡았다. 별개로, 움직이는 오브제여서 긴 전시 기간 동안 고장 문제도 고려해야 했다. 그런 까닭에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시스템을 선택했다. 고장이 날 경우 디지털은 전체가 멈추지만 아날로그의 경우는 해당 로봇 하나만 멈추기 때문이다.
문: 신작에서 영상 사이에 놓인 로봇(모형 총)은 실상 <군대>에 나오는 청년(인간)들을 환기시킨다. 여기서 로봇은 즉물적으로 기계(카메라)의 응시를 가시화 시켜주기도 하고(조준된 총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카메라의 응시를 상징하기에, 양쪽에서 조준된 총 사이에 끼어있는 관객은 쌍방향 응시의 존재를 몸으로 실감하게 된다), 다른 한편 비유적으로 집단 속 일부로 살아가는 개인의 양태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신작은 개념적으로 <군대>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 군대가 개인에게 하는 역할이 정확히 그것이다. 로봇을 만드는 것,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개체를 집단의 일원으로 복속시키는 것. 종종 한국 사회의 남성이 오작동하는 로봇 같다는 생각을 한다. 주입된 방식으로만 작동하지 스스로 사고하지를 못하지 않나. 정작 필요할 때 작동하지 않고 불필요할 때 작동하는 고장 난 로봇 같기도 하다. 로봇의 움직임은 가깝게는 의장대의 사열, 멀게는 군대에서의 모든 훈련을 본뜬 것이다. 모든 구성원이 정확히 합이 맞을 때까지 훈련은 반복된다. 4-5시간 동안 경례 연습만 반복하면서 개인은 집단의 일원으로 거듭난다.
문: 한국남자의 남성성이 생물학적이라기보다 남성 집단 내부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고 그 기제의 근저에 집단주의가 있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일원이라는 뜻은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판단의 기준이 외부에 있다는 말과 다름 아닐 것이다. (<천국의 계단>의 문제 의식과 동일) 여기서 남성성의 구조나 작동 원리로 나가면 논점을 너무 벗어날 것 같다. 신작은 <군대>와 달리 내용적으로 남성성을 깊게 다루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해야 할 것 같다. 한국 남성의 일원으로서 개인을 집단으로 환원시키는 한국의 남성성에 대한 당신의 입장은 무엇인가? 공포인가 매혹인가 아니면 그 모두인가?
박: 공포와 매혹이 모두 있다. 집단에 복속되어 내가 사라지는 것,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게 되는 것,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똑같이 반복하게 되는 것, 이런 것들이 공포다. 신병일 때 누군가 군화 발에 밟히는 것을 목격하며 다짐했다, 난 절대 저런 선임병이 안 되야지 하고… 하지만 막상 분대장을 달고 내 밑의 병사가 훈련 중 말을 안 듣자 그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누르고 군화발로 밟으며 윽박지른 적이 있다. 고함을 치는 순간 무한한 공포가 느껴졌다. 이년 사이에 나도 모르게 내가 싫어했던 이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되돌아 보면 그 공포의 이유 또한 그들 보다 나은 “고귀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일 것이다. 한편 매혹은 일종의 소속감일 텐데 실상 대단히 효율적이다. 또한 미적인 쾌도 존재한다.
문: 효율적이라는 말은 수긍이 가는데 미적인 쾌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매스게임에서 합이 딱 떨어질 때의 쾌감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외부에서 바라볼 때 오는 쾌락이지 하는 자가 느끼는 쾌락이 아닐 텐데?
박: 물론이다. 내가 말하는 매혹은 동화되고 싶은 매혹이 아니라 프레임을 만들고 관찰하고 싶은 욕망이다. 어쩌면 작가(감독)로서의 정체성일지도 모르겠다. 빠져 나오고 싶다고 마음대로 빠져나올 수 없기에 프레임을 만들어 밖에서 바라보며 빠져 나오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문: 앞서 이야기했던 완전히 함몰되지도, 완전히 방관하지도 않는(다르게 말하면 한편으로는 완전히 함몰되고 다른 한편 완전히 방관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 같다. 어쩌면 그 양가적 상태의 창출이 당신 작업 전반을 꿰뚫는 중심 모티프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물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마무리하고 싶다. 영화에서 출발했지만 갈수록 설치의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다. 영상의 비물질성에 한계를 느낀 것인가? 당신에게 물성은 왜 중요한가?
박: 한마디로 말하면 몸으로 느끼는 감각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사실 영상에도 질감이 있고 잘 만들어진 이미지일 수록 질감이 중요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시각적으로 매개되어 간접화된 감각이고 직접적인 물성은 결여되어 있다. 영상은 무한정 되돌리기가 가능하지만, 중력과 물성에 구속되는 실제의 사물은 되돌릴 수 없는 일회성과 유한성을 지닌다. 이런 지점이 내게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삶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