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스라이스 (조지은, 양철모)

믹스라이스
믹스라이스는 양철모(1977~)와 조지은(1975~) 두 명으로 구성된 미술그룹이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인 이주 노동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사진, 영상, 만화, 벽화, 페스티벌 기획 등 전방위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늘에 가려져있는 (불법)이주 노동자의 열악한 처우나 인권 문제에 대한 피상적인 조명을 거부해왔으며,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주’의 상황들, 즉 ‘이주’의 흔적과 과정, 그 경로와 결과, 기억에 대한 탐구 등 다층적인 접근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믹스라이스는 2006년 이후 마석가구단지의 이주민공동체와의 협업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자생적인 발언과 문화 활동을 지원하고 있으며, 예술가와 이주노동자가 협업하는 공장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했다. 이들의 관심은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식되어는 식물들의 ‘이주’ 과정을 추적하고,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강제 ‘이주’된 아시아 근대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추적하는 작업으로 끊임없이 확장되며 진행 중이다.

Interview

CV

<주요 개인전>

2010
풀 프로덕션 횡단’ 시리즈 웰컴 마이 프랜드!’, 아트 스페이스 풀, 서울
2009
‘접시안테나전’, 대안공간 풀, 서울
2002
‘럭키서울 – 대안공간 네트워크전’, 인사미술공간 주관, 대안공간 풀

<주요 단체전>

2016
‘메이드인 서울’, Centre d’art de meymac, 프랑스
‘제주 4.3미술제-새드림’, 제주도립미술관, 제주
2015
‘Memento’, East Asian Video Frames: Seoul, Pori Art Museum, Pori, Finland
‘The Past, the Present, the Possible’, 12 Sharjah Biennale, Sharjah, UAE
‘공장의 불빛 오프닝’, 마석가구단지, 경기도
‘제주 4.3미술제-얼음의 투명한 눈물’, 제주도립미술관, 제주
2014
‘Read (residency east asia dialogue)’, Research and Innovation Centre of Visual Art, TNNUA
‘3회 MDF 마석동네페스티벌’, 녹촌분교운동장, 경기도
‘제주 4.3미술제-오끼나와, 타이완, 제주 사이 ; 제주의 바다는 갑오년이다!’, 제주도립미술관, 제주
‘nnncl & mixrice’ 출간, 국영문판 에르메스 코리아, 서울
2013
‘SAISAT’, Jakarta Biennale 2013, Basement of Theater Jakarta, Taman Ismail Marzuki, Jakarta
‘nnncl & mixrice’, 아뜰리에 에르메스, 서울
‘2회 MDF 마석동네페스티벌’, 마석가구단지 불탄공장, 경기도
‘끈질긴 후렴’, 백남준아트센터, 용인
‘다카로 가는 메세지’ 출간, 국영문판 새만화책, 서울
2012
‘7회 아시아 퍼시픽 트리에날레’, 퀸즈 아트 갤러리, 호주
‘1회 MDF 마석동네페스티벌, 마석가구단지 488-32번지 옥상, 경기도
‘계속되는 예술, 불가능한 공동체’ 금천예술공장 3기 입주작가 오픈스튜디오, 금천예술공장, 서울
풀 《지역 연구와 미술 시리즈》: <군산 리포트 : 생존과 환타지를 운영하는 사람들>, 아트 스페이스 풀, 서울
2011
‘일맥아트 프라이즈’ 선정, 일맥문화재단, 서울
‘우여곡절 – 군산의 사람과 움직임’, 군산 내항 수협공판장, 군산
‘아주평평한 공터’ 출간, 서울
2010
‘Against Easy listening’, 1a space, Hong Kong
‘우리시대 다문화’, 경기창작센터, 경기도미술관, 르 파비용, 팔레 드 도쿄 국제교류 프로젝트, 원곡동
‘경기미술프로젝트 – 경기도의 힘, 경기도 미술관, 안산, 경기도
‘바다에 갔다온 계곡개구리’ 출간, 경기문화재단 지원, 서울
‘RM Flag project’, Auckland, New Zealand
2009
‘Bad boy here and now – 1990년대 이후의 새로운 정치미술’, 경기도 미술관, 안산, 경기도
‘The Antagonistic Link – Electric Palm Tree’, 카스코, 뉴트레이트, 네델란드
2008
세계인권선언 60주년 기념 2008 제주인권회의 ‘시장과 인권 – 생존과 존엄 사이’, 해비치호텔 세미나실 앞, 제주
‘이주깃발’, 마이그란트 아리랑 다문화축제, 올림픽공원, 서울
2007
‘액티베이팅코리아: Tides of Collective Action’, 고벳-브루스터 아트 갤러리, New Plymouth, New Zealand
‘민중의 고동 – 한국미술의 리얼리즘1945-2005’, 반다이지마 현대미술관, 일본
‘미누와 소모뚜의 음악카페’, 올림픽 제 1 체육관, 서울
‘서울 – 공간, 사람들’, IFA 갤러리, 베를린, 슈트트가르트
‘BOL 저널 볼 2007 봄 – 헐벗은 삶’, 지면작업, 서울
2006
‘제 6회 광주비엔날레 열풍변주곡, 비엔날레관 광주
‘이주리어카’, 안양 네팔 구릉 축제, 안양중앙성당, 안양

Critic 1

결코 섞일 수 없는, 그러나…

김장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기획2팀장

믹스라이스mixrice의 오랜 친구로서 나는 그들의 출발이 평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 근교의 생성과 성장 그리고 파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배경이기도 했던 도시 중하층민의 삶과 공간에 대한 본격적 탐구를 시작했다. 그들의 창조적 연구는 언뜻 상황주의자들의 그것과 닮아 있기도 했으며, 인류학적 방법론을 응용하는 사회 참여적 미술의 어떤 경향을 드러냈던 것도 사실이다. 분명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들에 흥분해 있었지만, 다음 기착지에 대해서 불안해했다. 그리고 그들은 ‘외국인’을 만났다.

믹스라이스라는 이름을 갖기 전 그들은 복합적인 이유로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미디어 교육 프로그램의 강사로서 또 다시 서울의 근교 공장지대를 방문하게 되었다. 비디오 카메라 다루는 법과 동영상 편집프로그램을 활용하는 법, 그리고 한편의 동영상을 제작하는 것으로 구성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상편집기술이라도 배워서 고국에 돌아가면 써 먹을 요량으로 모여든 외국인 노동자들 앞에서 그들은 전지구화가 야기한 동시대적 삶의 모든 문제적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들은 백인을 만나지 않았다. 그들은 흑인을 만나지 않았다. 그들은 아시아인을 만나지 않았다. 그들은 X를 만났다. X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며, 이름이 있지만 없으며, 살아 있지만 죽어있는 자들이었다.

믹스라이스는 비단 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를 다루는 작가 집단으로 편협하게 이해될 수 없다. 섞인 쌀의 이상한 한국식 영어인 믹스라이스는 우리가 대면하고 있었던 전지구화의 어떤 단면을 보여준다. 외국인은 본래적인 주체라가 보다는 지시되는 대상이다. 외국인이라는 이름은 고유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이름이며, 오염된 호칭이며 불순한 명칭이고, 그 외국인을 규정하는 우리의 결핍을 드러내는 대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외국인은 우리의 또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신자유주의로 운영되는 세계는 우리를 외국인으로 만든다. 다만 우리만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전지구화가 야기하는 임의적 경계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서 새로운 외국인을 만든다. 그 외국인이 자신임을 잊은 채로 말이다.

믹스라이스는 외국인을 통해서 혼자 말하는 법과 같이 말하는 법을 배웠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카메라를 쥐어 주고, 자신들의 일기를 쓰게 했던 ‘믹스라이스 영상교실’의 ‘비디오 다이어리’는 외국인 노동자를 재현의 대상에서 발화의 주체로 변화시키는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믹스라이스는 외국인 노동자가 경험하고 있는 주체화의 과정 속에서 자신과 타자, 그리고 국가의 경계, 경계를 부유하는 사람들과 세계 그리고 다시금 공동체에 대해서 성찰하게 되었다.

‘비디오 다이어리’ 이후 그들이 진행했던 <믹스라이스 채널과 천막극장(Mixrice Channel and Marquee theatre)>, <리턴>, <이주리어카(Magrantcart)>, <핫케익(Hotcake)> 등과 같은 프로젝트들은 외국인 노동자와 더불어 새로운 말하기, 세상보기를 경험한 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누구나’와 같이 하기 위한 집단 창작과 협업 그리고 나눔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단일 민족 사회에서 다민족 다문화 사회로 넘어가는 한국 사회에서 노동을 매개로 야기된 사회적 이슈들과 같이 했다.

‘왜 오랜 친구를 내쫓으려하는가?(Why willing to kick out old friends?)’는 믹스라이스 첫 번째 채널의 주제였다. 전시장에서, 다문화 축제의 현장에서, 세계화에 저항하는 시위의 현장에서 그들은 천막을 치고 토크쇼를 만들었다. 이 문구는 언뜻, 68혁명의 구호인, ‘우리는 모두 독일의 유대인들이다’를 떠올린다. 그리고 슈퍼플랙스(SUPERFLEX)의 2002년 작업, <외국인 여러분, 제발 덴마크인들과 더불어 우리를 내버려 두지 마세요(Foreigners, please don’t leave us alone with the Danes)>를 환기시킨다. 우리는 이 문구의 화자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혁명 지도부의 혈통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서 혁명의 순수성은 흔들리는 듯했지만, 혁명의 주체 모두가 오염된 혈통임을 선언하는 순간, 혁명은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인류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추방당한 외국인에게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우리는 덴마크인이기도 하지만 덴마크인이 아니기도 하다. 오래된 친구는 외국인 노동자이기도 하며 우리의 친구들이기도 하다. 그 친구들은 내쫓김을 당하고 있고, 나는 혹은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다. 이것은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며, 그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정체성(identification)의 문제로 주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화(subjectivation)를 통해서 나와 타자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한다. 이로서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다.

마석은 서울 근교의 지역 이름이다. 누군가에는 한센인들의 공동주거지역이며, 누군가에는 가구공장단지이다. 믹스라이스에게 마석은 자신들의 동료와 더불어 살아갈 공간이다. 외국인노동자와 더불어 진행된 사회활동가적 프로젝트 이후, 믹스라이스는 자신들과 뜻이 맞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모색하게 된다. 그들의 매우 가까운 친구들은 이미 마석에 모여살고 있었다. 한국 역사에서 한번도 주목된 적이 없는 도시, 마석은 서울과 가깝지만 고립되고 후미진 지역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전국에서 떠돌던 한센병 환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든 마을이 마석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마석은 서울에 가구를 공급하는 공장단지로 변화되었고, 이곳에서 일하던 한국인 노동자들이 떠나자,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곳으로 들어왔다. 믹스라이스의 친구들은 이미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접시 안테나(Dish Antenna)>는 이러한 탐구의 시작이었다. 마석이라는 도시의 공간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연구는 연동되어 진행된다. 믹스라이스는 마석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삶과 마석이라는 공간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문화지리학적 의미를 대비한다.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 속에서 마석이라는 공간이 갖는 이중구속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도 그대로 보인다. 영세한 가구공장단지에 일하기 위해서 모여든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에 의해서 고립되고, 자신들의 인종적 종교적 국가적 분류에 따라 다시금 고립된다. 믹스라이스는 그들과 함께 <불법인생(The Illegal Life)>이라는 연극을 만든다. 그 연극을 만들기 위해서 그들의 개별적 공동체를 만나고, 서로 삶의 이야기를 듣는다. 믹스라이스는 마석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을 연극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백명 그들의 삶이 각각 발화될 수 있는 수행적 공간을 만든다. 불법 인생은 다시 <마석동네페스티벌MDf(Maseok Dongne festival)>이라는 축제의 장으로 변화된다.

믹스라이스는 어떤 정치 투쟁의 현장에서만 이제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누군가의 기억에 다가선다. 그리고 그 기억이 딛고 서있는 현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누군가의 기억, 삶은 비단 외국인 노동자의 그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믹스라이스의 그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외부에 헐벗은 채로 버려져 있다. 믹스라이스는 이 지점에서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나는 믹스라이스가 동시대 한국 미술에서 갖는 두 가지 의미 때문에 2016 올해의 작가로 추천한다. 앞서 언급한 이야기들은 이 두 가지를 설명하기 위한 매우 거친 프롤로그에 불과하다. 믹스라이스가 동시대 한국 미술에서 갖는 첫 번째 의미는 믹스라이스는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국민국가 체제 내에서 성립된 국민국가가 성립하고자 하는 자국 현대미술의 고유성 혹은 특수성을 무기력하게 한다. 두 번째로 그들은 삶과 예술의 결합을 위한 생태적 공동체의 성립을 초국적으로 구축하고자 한다. 믹스라이스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더불어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놀라운 성취를 보여주었으며, 지속적으로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펼쳐 보이고 있다.

Critic 2

바깥으로: 공명하는 물체를 쫓아서

문영민

건물이 들어설 수 있을만큼 평평한 공터는 자본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한 평평한 공터를 연상시키는 흙더미 위에 실제 크기보다 축소된 아파트 도면의 일부가 흰 칠로 그려져 있다.
아파트의 거실, 온돌방, 화장실 등이 쓰여진 작은 팻말들이 흰 테두리 안에 하나씩 놓여 있는데, 놓여질 공간이 없는 주방, 드레스룸, 창고 등의 여러 팻말들은 어정쩡하게 옆에 서있다. 지금 40대 이상의 어른들이 소싯적 돌맹이를 던지고 한쪽 다리로만 뛰던 땅따먹기 놀이를 연상시키는 이 흙더미와 도면은 1970년대 초반 강남의 아파트단지 개발 당시 모델하우스 대신 평평한 공터에 새로 지을 아파트의 내부도면을 흰 칠로 투박하게 보여주는 기록사진을 근거로 재현한 것이다.

한편 전시장 벽에 흑색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려진 식물의 실루엣은 과다하게 빛에 노출된 듯,때로는 번뜩이는 섬광이 지나가고 남은 듯, 혹은 고열에 그을린 식물의 잔상들과 같다. 무거운 흙더미에 비해 물질성이 제거된 식물의 그림자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묵언의 목격자처럼 느끼진다. 마치 화석같기도 하며 기괴한 괴물들이 뒤얽혀 몸부림치는 듯한 이 벽화에 쓰여진 식물은 4대강 사업에 의해 침식될 장소와 서울, 경기도 재개발예정 지역 등지에서 습득한 것들로, 장기간 종이 사이에 눌려서 말린 뒤 사용되었다. 그림자임에도 불구하고 번식력이 강한 식물이 끝없이 확산되는 이미지에 반해, 바닥에 놓인 정방형의 흙더미와 도면의 크기는 납작하고 자그만하여 식물은 인간의 계획을 우습게 보는듯 하다. 적어도 여기서 유령과 같은 자연의 존재에 비해 인간이 취하는 개발이라는 행위는 어설프고 측은해 보인다.

일련의 흑백사진들은 여러 정황에 놓인 나무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지가 쳐내여져 정자 옆에 어정쩡하게 놓인 고목, 재개발을 앞두고 허물어질 아파트와 그를 둘러싼 나무들, 4대강 사업이 벌어진 내성천에 나무가 파헤쳐진 자리에 남은 뿌리 덩굴의 파편들, 불법으로 옮겨진 나무들, 이식된 조경수들이 그것이다. 2채널 비디오 <덩굴연대기>는 제주도의 할망당과 덩굴 안에 감춰진 신목들, 영주댐 지역의 주민들이 침수될 마을을 등지고 기념사진처럼 서있는 모습, 상이한 개발의 모습을 보여준 성남과 강남의 아파트단지, 재개발지역의 모습 등이 식물의 이식으로 인한 부재와 존재를 통해 나타난다.

지난 수년간 믹스라이스에게 식물은 중요한 화두로 자리잡았으며, 지난 2013년 아틀리에 에르메스에서 식물의 이주에 대한 전시를 전후로 작업의 폭을 더 넓혀왔다. 그들은 제국주의와 식민시대, 그리고 식물의 이주와의 교차점을 통해 이주의 역사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의 아파트단지 개발과 중산층의 형성과 연루된 이식된 식물을 추적하며 이주라는 현상을 탐구하고 있다. 믹스라이스는 이주자와 정주자의 구분을 와해하고, 식물의 이식과 죽음을 통해 정착이라는 개념을 의문시한다. 생태적 가치관과 반자본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믹스라이스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식물의 뿌리 덩굴들을 들여다보며, 어떤 식으로든 뿌리를 내리는 나무를 통하여 개발의 난폭함과 강제적 이식에도 맞서는 식물의 지속성을 탐구하고 있다.

믹스라이스의 작업은 늘 변화하는 특정한 상황들에 위치한 실천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과정이 중요하며, 그 실천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큐레이터 김희진이 지적했듯이, 믹스라이스는 “개념이 구축되고 형식이 그 계획에 따라 성립되는 방식으로 작업하기보다, 과정 속에서 개념이 움터 나오는 유기적인 작업 방식을 지니고 있는 작가임을 먼저 유념해야 한다.”1 타자와의 교류활동을 통해 생산되는 부산물들이 작업의 흔적으로서 전시장에서 보여지는데, 그들은 그것을 만들기 위해 작업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딱히 사진가도, 조각가도 아니며, 설치미술가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다. 만화가도, 벽화가도 아니며, 또 도큐멘타리 작가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매체와 방법들을 자유롭게 혼용하는데, 그러한 자유로움은 특정한 장소와 공간에서 사람들과, 사물과, 기운과 대면하고, 듣고, 성찰함에서 비롯된다.

이 글은 믹스라이스의 전방위적 활동을 돌이켜본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이라는 전시에서 그들은 식물에 관한 작업만을 절제있게 보여주고 있으나 아카이브 섹션을 통한 그들의 행보가 함께 소개되는 만큼, 믹스라이스의 지난 15년간의 작업을 돌이켜 볼 적절한 때이다. 이 글은 그들의 결성 당시의 사회적 배경, 작업의 의도와 활동과정들을 간략히 검토하고, 지난 수년간 작업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요컨데 믹스라이스는 이주적 현상을 어떠한 시각에서 바라보는지를, 왜 식물을 통해 이주를 들여다보는지, 그리고 최근 작업에서 아파트는 왜 등장하는가에 대해 풀어보고자 한다. 나아가서 그들의 다방면의 활동이 품는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주노동자의 인권에서 이주의 현상으로

88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시작되어 점차적으로 해외의 이주노동자들이 유입되어 한국인들이 원하지 않는 고되며 위험한 직종들의 노동력을 제공해 왔는데, 지난 세기 말 외환위기 이후 더욱 유연해진 신자유주의의 시장구조 속에 그들의 존재가 부각된 것은 대중매체가 노동착취, 인권유린, 임금체불, 강제추방의 두려움 등의 고난과 위기의 상황에 빠진 그들의 연약한 모습을 중점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한 이후다. 그것은 한국 시민들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고 그들의 관심을 호소하는 센세이셔널리즘에 입각한 재현이었다. 대중매체의 이러한 방식의 재현에 대한 불만을 느낀 믹스라이스는 2002년 결성 후 새로운 방식의 재현과 소통을 시도했다. 작가들은 노동자들과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느슨한 관계 맺기를 유지하며 미디어의 편견적인 박애주의적 시선을 넘어서는 작업들을 해냈다. <비디오 다이어리> (2002-03)는 노동자들이 직접 인터뷰와 편집을 하여 본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도왔고, 노동자 인권투쟁에 참여시 인권줄넘기라는 퍼포먼스를 실행하거나, 관련 집회에서 먹을 “강제추방 반대”라고 새겨진 핫케익을 굽고, 그것을 상자채로 출입국관리소에 보내기도 했다. 명동성당 구역 안에서 장기간 농성 당시 그곳에 세운 텐트안에서 이주노동자들과의 토크쇼를 제작 및 상영하고, 그들이 공장에서 늘 듣는, 자존감에 상처를 주는 명령형의 주문들과 욕지거리를 노래하는 믹스랭귀지를 함께 만들고, 이후 그들의 이야기를 뮤직카페라는 이름으로 선보였다. 이렇게 믹스라이스의 사회적 타자와 관계맺기의 실천으로써 워크숍, 영상 텐트 등 대화를 근간으로 하는 작업과, 달력만들기, 사진, 만화, 벽드로잉, 영상 등의 시각미술의 형식으로 풀어내는 등 여러 유형의 작업을 병행해왔다. 후자의 시각작업들은 이주민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전제로만 이루어진다.

한편, 지난 수년간 보여진 믹스라이스 작업의 진화는 그들이 초기에 박애주의적 시선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더라도 한편으로는 이주민과의 소통과 협업은 어쩌면 “폐쇠적인 호혜, 관용의 제스처”였는지도 모른다는 그들의 성찰에서 비롯되었다. 관용의 의미는 ‘우리’와 무언가 다른 타자를 수용한다는 너그러운 자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타자의 위치는
‘우리’가 타자에게 부여하는 관용의 수혜자로서 설정된다는 것과 다름 아니며, 원천적으로 비동등한 관계에서 시작된다. 관용의 정치학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은, 사회적 타자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한다giving voice거나 힘을 실어준다empowering는 것은 그들이 원래 목소리도 힘도 없어서 스스로 소리를 내거나 보여지지 못하는 미천한 존재라고 전제할 때만 가능한, 모순적이며 위계적인 발상이라는 점이다.2

믹스라이스의 여정을 회고해 보면, 확실히 2010년을 전후로 작업이 변해왔다. 우선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여전히 결과물보다는 과정에 집중한다는 것, 애초에 매체결정적이 아니라 타자와 대면하고 그에 따라 반응하며 매체나 방법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변한 것은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상황 자체에 변화가 있었으며,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은 예전처럼 인권문제로 시위를 하거나 모이지 않는다. 그 이유로 믹스라이스는 “노동비자 쟁취”라는 구호를 외치는 시위에 동참하는 대신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의 현장에서 움직이기 위해 마석으로 향한 것이다.3 믹스라이스는 투쟁적인 개입으로부터 노선을 수정하여 노동자들과 함께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천착하고 있다. 믹스라이스의 작업의 변화는 이렇게 변화된 현실에 민감히 반응하는 접근 방식의 변화이다. 물론 그들은 애초부터 맹목적으로 ‘완성’된 작품의 생산을 지양해왔고, 오히려 작업의 형태는 늘 가변적으로 유지하되 예술과 정치적인 것이 만나는 지점들을 항상 면밀히 고려해왔다. 요는 믹스라이스의 작업은 이주노동자라는 주제 또는 주체에 한정되어 있지 않으며, 그들의 관심은 이주민의 노동인권 문제로부터 이주와 ‘이주적 현상’이라는 점차 넓은 폭으로 확장되고 있다. 믹스라이스는 근래에 이주노동자와의 움직임도 지속하면서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의 인터뷰, 그리고 한국에서 외국으로 떠난 이민자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한 작업도 했고, 동아시아 근대사를 통한 이주의 역사를 조사했다. 그러는 동시에 이주노동자 커뮤니티를 위한 록페스티벌인 마석동네페스티벌도 3년 연속 열었다.

 

MDf, 마석동네페스티벌

서울에서 북동쪽으로 한시간 가량 위치한 마석은 과거에는 한센인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지금은 거대한 가구공단과 그 주변으로 이주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주택가가 있다. 산자락과 골프연습장을 너머 드러나는 이곳은 1970년대의 낙후된 공장시설들과 독성의 화학물질의 냄새가 짙은 곳이다. 거리와 건물들의 옥상에는 공업쓰레기들이 쌓여 있는 폐허 같은 곳이다. 마석을 방문하는 것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다녀오는 것 같은 기이한 경험이다. 다만 그곳에선 50년전엔 없었던 이주노동자들을 마주치게 된다. 수년간 이명박정부가 단행한 이주노동자 단속과 추방으로 많은 노동자들은 공권력을 피해 다니다 사고를 당하거나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 이후 마석은 재개발의 움직임으로 술렁이는 가운데 이주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지,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 불안한 삶을 영유할지 고민해왔다. 그러나 마석의 열악한 조건과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이주노동자들은 그곳을 그들의 제2의 고향으로 여긴다.

믹스라이스는 이러한 마석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견지해오며, 그곳의 임시적 공동체의 생성과 진화를 목격하고 참여해왔다. 2012년 믹스라이스가 벌린 마석동네페스티벌이라는 록 공연은 마석을 드나들면서 이주노동자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캐주얼하게 만나던 어느날 우연히 접한 한 마디의 말에서 시작됐다. 이주 노동자들이 록음악을 좋아하지만 고된 노동의 일정으로 기존의 록페스티벌에 갈 수 없으므로, 마석에 록페스티벌이 열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실행에 옮기기로 한 것이다. 마석동네페스티벌의 약자인 MDf는 실은 가구를 만드는 기본재료로 많이 쓰이는 중밀도섬유판 (MDF, medium density fiberboard)의 약자를 재치있게 번안한 것이다. 마석동네페스티벌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부터 행사 후 정리까지 작가들과 자원봉사한 작가친구들과 관객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홍보용 포스터의 사진은 전혀 섹시하거나 선정적이지 않은 것으로, 폐기처분된 가구재질인 MDF가 땅바닥에 뭉개져 있는 모습이다.

나는 그해 10월의 어느 날 믹스라이스와 동행하여 행사가 열리기 한참 전에 마석에 도착했다. 행사장은 한 공장건물의 옥상인데 쓰레기장 같이 잡다한 폐기된 공산물들이 쌓여 있던 것을 말끔이 치워놓았다. 공장건물 옥상에 건물을 짓기 위한 공터가 아니라, 여러 인종과 사회계층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놀기 위한 공터를 마련한 것이다.드문 드문 나무 땔감과 형광등 조명이 놓여지고, 음식을 만들기 위한 장비가 설치되었다. 속속들이 도착한 밴드들은 차례를 기다려 사운드체크와 워밍업을 마쳤다. 저녁이 되서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대형 냄비에 커리와 기츄리 (방글라데시의 볶음밥)가 향을 풍기고, 관객들이 찾아와 자리를 잡아 앉았다. 관객들은 이주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가장 많았으나, 많은 내국인도 있었고, 천주교 신부와 개신교 목사들, 불법체류자와 형사와 그의 가족들 등 보통 한 자리에서 어울리지 않는 상반된 입장의 사람들이 모여 어우러졌다. 필리핀에서 온 한 여성노동자의 노래를 시작으로 여러 인디밴드들의 록음악을 선보이자 노동자들이 흥겨워 밴드 앞으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등장한 술탄오브더디스코의 멤버들이 터번을 쓰고 나와 디스코곡을 춤추며 연주하자 터번을 쓴 한 중년남자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춤을 추다 쓰러질 때 여러 사람들이 연쇄작용으로 같이 쓰러졌고,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추스리던 그의 머리엔 터번이 벗겨지고 말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마석동네페스티벌은 순전히 대중적으로 즐길 수도 있으면서도 여러 층위에서 작동한다. 우선, 그것은 제도 문화의 바깥의 공간에 존재하는, 소외된 이들의 소망을 현실화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대부분이 불법건축물인 까닭에 마석의 지도에는 공장들이 표시되어 있지도 않으며, 이주노동자들 또한 불법체류자로 서류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기록되지 않은 공간”에서 열린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파티였으며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음악적 하룻밤”을 보내고자 한 시도였다. 믹스라이스는 이러한 “냉혹한 현실”에 낭만의 기회를 가져보자는 제의에 부합한 것이다.4 나아가서, 이 축제는 이방인이 “다른 주체”가 되어 내국인을 초대해 즐거움을 공유하는 특별한 자리였으며, 축제를 통해 “서울 외곽지역의 어둠을 다른 식으로 만나”는 결코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5

그리고 이 페스티벌은 2010년 이주노동자들이 결성한 마석이주극장이 만든 <불법인생>이라는 연극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연극을 주도한 이주노동자들에게 있어서 믹스라이스는 그것의 보조역할을 했듯이 페스티벌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믹스라이스와 그들이 초대한 밴드들과 무대와 사운드엔지니어들이 많은 역할을 했지만 그들은 이주노동자들이 부른 요청에 응한 것이다. 대규모의 자본으로 운영되는 록페스티벌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스스로 만든 겸허한 규묘의 동네 록페스티벌이었다. 다만 여기에 참여한 음악인들의 수준이 ‘동네’ 수준은 아니었다. 기꺼이 출연한 음악인 중에는 강산에도 있었듯이. 또 한편으로는, 불법체류자들과 형사가 공존했듯이 이 공연에는 사회적 모순과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순간이 공존했다. 이 공연은“음악적 제도, 미술적 제도, 국가출입의 제도, 종교의 제도, 산업의 제도, 주거의 제도”들의 간극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미학적인 고려도 돋보였으며, 비록 처음은 아니지만 식물이 등장했다. 믹스라이스가 습득해서 키워온 버려진 식물들이 화분에 심어 곳곳에 놓였으며, 커다란 잎파리 모양을 한 장식물들이 무대와 관객의 공간을 넘나들었다.

믹스라이스는 이 페스티발을 그후 두번 더 열었지만, 그것이 성공적이었다는 이유로 무작정 계속해서 매년 열지는 않는데, 그것은 변하는 상황에 대한 숙고에 의한 결정이다. 페스티벌은 반복하여 형식화되고 제도화 되기 쉬운 상황이기에 그들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 하며, 애초에 그랬듯이 서로 자극이 되는 무언가를 같이 하고 즐기고 만드는데 촛점을 두고자 한다. 변하는 상황에 따라 그들의 활동이 무엇이 되었든 형식이 정해지는 것이다. 믹스라이스는 소위 ‘커뮤니티 아트’를 하기 위해 이주노동자들을 만나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커뮤니티’에 들어가 무언가를 하고 떠나지 않는다. 그들의 삶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함께 사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를 탐구하기 위한 의지의 표현으로써 여러한 형태의 활동과 작업을 장기간에 걸쳐 추진한다. 그 와중에 그들은 이주노동자들과의 물리적 그리고 심리적 거리감을 인정하고 유지한다. 믹스라이스가 타자와 만난다는 것은 어떠한 불편함의 존재에 대해 무언가 실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다양한 공동체가 살아가고, 다양한 문화를 가진 이들이 모이고 부딪히고 만나는 장”을 상상하고 실천한다. 믹스라이스는 커뮤니티의 일원들과 만들고자 하는 어떠한 “상황에 대한 서로의 기대감”이 있었음을 강조하고, 그것을 다시 소생시키고자 한다. 상황을 흥미롭게 만들 수 있는 기대감이 협업의 동력이 되기에 그들은 커뮤니티의 일원들에게 함께 지속적인 활동을 하기위한 새로운 의지를 기대하는 것이다.6

소위 관계적 미학으로 취급되는 예술의 많은 사례들은 마치 “좋은게 좋은 것”이란 말처럼, 현실의 구체적인 난점들을 덮어놓고 그저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는 경향이 있기에 그것으로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다. 핼 포스터는 그러한 예술은 현실을 변화시키지도 않고 예술로서의 혁신적인 면도 모자라며, 그러한 양면의 미흡함을 서로의 알리바이로 삼는다고 비판했다.7 또 한편 클레어 비숍은 사회적 참여와 개입을 실천하는 예술의 공통된 경향으로, 많은 작가들이 미학과 정치성을 등한시하는 반면 착한 사마리탄처럼 특정한 상황을 개선하려고 시도한다고 지적했다.8

믹스라이스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들의 초기 작업, 예를 들어 비디오 다이어리나 인권핫케잌 등은 분명히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보이는 한편, 근래의 활동인 마석동네페스티벌은 상황의 개선이라는 목적지향적 실천과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흥미롭게도 믹스라이스 조지은과 양철모는 이에 대해 상이한 대답을 했다. “마석동네페스티벌은 현실을 더 강렬하게 경험하는 계기가 아니었나?” 라는 나의 질문에 조지은은 수긍하면서 초기 작업은 현실에 개입해 상황을 호전시키려 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보았다. 한편 양철모는 마석동네페스티벌 역시 그것이 현실에 대한 개선책이기도 하다고 보았다. 마석의 이주민들도 “즐거움이 없어서,” 그리고 “우리도 함께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았다.9 그런 시각에서 보면 마석동네페스티벌은 연대의 부재에 대한, 지루한 일상에 대한 해결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전의 특정한 이슈나 노동정책과 관련한 개입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지로서의 임시방안이라는 뜻으로 여겨진다. 다른 방식의 삶의 다양성을 찾고 싶은 시도로서 하나의 실천이라는 뜻이다. 두 사람이 약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또한 모순이지만 그런 모순된, 상반된 입장은 건강한 것이다.

 

믹스라이스의 미학과 정치성, 모순적 진실

믹스라이스는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스스로 만든 출판물등을 통해서 공적 영역에서 공유하고 성장한다. 작가 고승욱이 지적했듯이, 믹스라이스의 활동은 제도 밖에서 실천되지만 그것은 제도 안에서 인정된다.10 물론 오랜 기간 그들이 활동한, 1970년대를 연상시키는 낙후된 공장밀집지역과 이주노동자들의 커뮤니티로 구성된 마석같은 장소와 아틀리에 에르메스나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영향력있는 제도권 안의 장소를 비교한다면 이러한 지적은 물론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믹스라이스의 행보를 돌이켜보면 그들의 작업은 제도 안과 밖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두 사이를 자연스럽게 연계한다. 그들은 가공된 상황을 만들거나 촉진시키기도 하며, 여러 유형의 만남과 연대의 장을 창출하거나 그것의 조력자로 머물기도 하며,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가로서 무언가를 만들어서 전시를 한다. 때로는 활동의 기록물, 예를 들어 마석에서 열린 연극이 미술관에서 보여지고, 때로는 활동을 마친 후 그것의 해석을 전시로 풀어내기도 한다. 물론 그들의 활동과 작업은 매우 상이한 특정한 관객과 소통을 이루어내야 한다. 이를테면, 활동이 이루어지는 영역에서 그것과 직접적인 연관을 지닌 이들에게 효과를 보이고 연대를 이루어야 하며, 제도 안에서 정교하고 치밀하며 지적이며 복잡한 프로젝트를 기대하는 관객들에게 설득력과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11 그것은 관객이 수동적인 것이 나쁜 것이 아니며, 흔히 수동적인 관람 형태가 사실은 수동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참여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떠한 성격의 참여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믹스라이스의 태도를 표출한다.

믹스라이스의 궤적에는 몇 번의 중요한 전환점 내지 순간들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작업이 단순히 어떤 이상향만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작업은 여러 층위의 복잡한 사회적 모순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회적 실천을 수행하는 참여예술에는 늘 작가와 협업하는 이들과의 정치적 관계, 작품의 질적 수준과 대비하여 관련된 이들의 참여도와 그 성격, 그리고 관객의 경험은 어떠한지 등 여러 질문들이 논의된다. 그런데 참여예술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중에 하나는 적대적 관계이다. 클레어 비숍은 에르네스토 라클로Ernesto Laclau와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의 급진민주주의radical democracy의 이론을 빌어, 진정한 민주주의적 사회란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적대적 관계가 건강하게 유지되는 사회임을 강조하며, 사회참여적 예술에 있어서도 참여예술이나 커뮤니티아트에서 흔히 부재하는 사회적 모순성 또는 적대적 요소는 필요한 것이라 역설한다.12 나는 믹스라이스의 진화에는 그들이 경험한 몇 가지의 사회모순과 그에 대한 성찰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본다.

우선, 한국에서 만나 오랜 기간 연대하고 협업했던 이주노동자들이 고향 네팔으로 돌아가고 난 뒤 믹스라이스는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기 위해 네팔을 방문했다. 노동자들은 비싼 브로커비를 지불했기에 그 이상을 벌기 위해 노동허가의 기한을 넘기고 십년 넘게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며 위태로운 삶을 영유한다. 가족이 보고 싶어도 귀국하지 못하며 검거를 피해다닌다. 그런데 네팔로 돌아간 이들을 본 믹스라이스는 실망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한국에서 노동자의 인권운동에 앞장섰던 소수자들이었던 이들이 본국에서 한국을 다녀옴으로써 부여되는 사회적 위상을 이용해 권력을 지니는 인간의 욕망을 대면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노동비자와 인권확장을 위해 외쳤던 때였으나 네팔에 있는 노동자의 부인과 자녀들이 한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다면 노동비자란 불충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알게 된다.13

둘째, 마석가구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마석이주극장에서 주도한 <불법인생>이라는 연극이 있다. 이 연극이 시도되기 전까지 믹스라이스와 이주노동자들과의 협업은 거의 모두 전자가 주도했는데, 이 연극에서는 비로소 믹스라이스가 조력자의 위치에서 협업하였다. 이 사실은 그들의 협업의 성격을 재정의한 것으로, 새로운 움직임의 가능성을 암시했다. 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 드러난 모순적인 진실은, 극중에서 먼저 온 이주노동자가 출입국관리소의 스파이가 되어 나중에 온 ‘불법’체류자들의 임금을 착취한다는 내용을 스스로 포함시킴으로써, 한국사회 속의 그들의 삶의 부조리를 극의 내용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셋째, 언급한 바와 같이 마석의 이주노동자들과 주민들을 위해 마련한 두번째의 마석동네페스티벌에 참석한 이주노동자들 사이에 모종의 갈등이 있었다. 그 갈등은 먼저 온 이주노동자들과 나중에 온 자들 사이의 싸움으로, 그들은 공연 이후 서로 밀고해서 그 당시 싸움에 연루된 이들은 고국으로 추방되었다는 후문이다. 실제로는 지역의 천주교 사제와의 상담을 거치기도 하지만, 합법적으로 노동허가가 있는 이들이 누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법체류하는 노동자들을 밀고해서 그들의 추방되도록 추진한다는 것이다. 두 부류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불안정한 삶의 조건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불법체류자들은 언행을 더욱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다.

넷째, 믹스라이스는 아트스페이스 풀과 뉴욕 뉴뮤지움의 뮤지움 애즈 허브Museum as Hub의 일환으로 기획된 ‘횡단’의 일부로 카이로의 타운하우스 갤러리에서 10주간의 레지던시를 마쳤다. 만화 <인사> (2010)에서 길을 걷는 조지은에게‘니하오’와 ‘곰방와’를 외치며 말을 걸어보려는 시도들이 드러내듯이, 그들은 카이로에 도착하자마자 스스로가 타자됨을 경험했다고 한다.14 카이로는 서구의 욕망이 내재된, 북미와 유럽을 지향하는 사회였으며, 빈부격차가 극심하여 가난한 이들은 남의 무덤위에 산다. 관광객이 아니고서는 그 사회에 존재하기 어려운, 식민지의 타자끼리의 불편한 만남이었다고 회상한다.

이렇듯 믹스라이스는 타자와 연대하고, 타자가 ‘갑’으로 변함을 목격하였으며, 타자끼리의 만남, 타자끼리의 갈등, 내 안의 타자와 만나기, 스스로 타자되기를 경험한다. 이러한 실존적 경험들 후의 믹스라이스는 점차 대화적 미학이나 현실적으로 첨예한 이슈에 개입하는 작업에서 물러나 이주라는 현상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 아닐까. 아시아 근대사에서 한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동남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된 이들의 역사를 리서치한 것도 그러한 과정에서 실천된 것으로 보인다.

 

작업과 삶의 평행선, 또는 융합

때로는 삶에 대한 깊은 실망과 좌절감을 목도하며 어떻게 작업을 지속할 것인가를 늘 고민하는 믹스라이스는 제도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동시에, 제도의 인정과 관심으로부터 초연한, 또 다른 성격의 공간과 장소를 만들고 운영하거나 운영되도록 조력하며, 스스로 제도가 되는 것에 저항하고 있다.

그들은 이주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실로 다방면에서 다른 작가들, 이웃들, 어린이들, 그리고 전혀 만나본 적도 없는 모르는 이들과 연대하고, 만남의 장을 만들고, 미술의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고 있다. 언급한 마석동네 록페스티벌의 조력자 역할 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들이 물건을 생산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공간—비록 그다지 이윤을 창출하고 있지는 않지만—그리고 실제로는 이주노동자들이 편히 만나 일도 하고 모임도 여는 공간인 “공장의 불빛”을 마석에 설립했으며, 그곳에서 작가들이 기술을 공유하는 워크숍도 운영한다. “공공미술 삼거리”는 주변의 작가들과의 함께 만든 노동조합 형태의 모임이며, “버드나무가게”는 지역의 오래된 구멍가게를 인수해 작가레지던시로 활용하다 지금은 청년들의 삶의 터전으로 활용중이다. 한편 충북 괴산에 구입한 오래된 시골집 마당에 신더블록으로 지은 괴산 탑골만화방은 지역주민들이 언제든 와서 쉬고 놀 수 있는 문화공간인데, 지인들뿐 아니라 온라인으로, 또는 입소문으로 듣고 알게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방문하여 만화를 보고 소사일을 하며 ‘저절로’ 운영되는, 24시간 문이 열려 있는 곳이다. 또 마을사람들과 함께 믹스라이스의 아이와 친구들의 교육을 함께 하는 공동육아를 실천하는 마포구립 성미어린이집과 방과후터전 알꽁 (“알밤과 꽁지”)에서 재미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여러가지의 창의적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분주히 활동해왔다. 이 일련의 다양한 확산적인 활동들은 많은 시간과 노력, 재원을 필요로 하는데, 믹스라이스라는 작가들의 작업과는 명백하게도 분리된, 제도 바깥의 활동이다. 그러나 그것은 타자와의 연대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내의 생산과 소비의 구조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며, 목적지향주의적 삶이 수반하는 집중적 사고를 지양하고, 그에 반한 휴식과 놀이를 통한 지속가능한 방식의 삶의 실천이라는 면에서 믹스라이스의 작업과 궤를 같이 한다.

 

정착의 신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개인

역사 속의 이주자와 먼 거리에 위치한 이주자들을 만나고 돌아 멀리 경유해 온 믹스라이스는 이제 한국 내에 다수의 국민들 또한 이주자의 또 다른 유형이 아닌가 생각한다. 큐레이터 김희진은 “이주”라는 현상은 외국인노동자와 같은 특정 사회적 소수자들만의 것이라 여기는 국내의 사회적 인식에서, “이주적 상황”은 인종, 정치, 사회, 경제 계층적으로 타자화되고 소재화된 이슈가 되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15 실제 가까운 과거 그리고 현재, 이주는 한국인의 정체성의 일부임을 간과할 수 없으며, 미래에도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스탈린이 북한 주변의 극동 러시아에 거주하던 무려 18만명의 한국인들을 멀리 카자흐스탄까지 강제이주시킨 것은 불과 80여년 전의 일이다. 한국이 지난 40여년간 이룩한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경제원조를 받는 댓가로 독일로 파견된 수만명의 광부와 간호사들, 아랍지역의 건설에 기여한 노동자들, 지방에서 서울의 열악한 공장으로 이주한 수많은 여공들의 노동력 착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믹스라이스의 관점에서는 한국사회의 거대한 부분이 이주민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식되거나 삭제되는 식물들을 통해 개발지상주의가 야기하는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사회학자 발레리 줄레조Valérie Gelézeau의 저서 <아파트공화국> (2007)은 유럽의 모던한 주거정책의 일환으로 실패한 아파트라는 형식이 이상하게도 왜 한국에서만 유독 ‘성공’했는지를 파헤친다. 노동자 계층의 주거문제를 정부차원에서 해결한 프랑스와 정반대로, 한국정부의 주거정책은 사회 하부계층을 외면하고 저소득층을 위한 장기임대 아파트의 건설은 등한시했다. 오히려 정부는 재벌과 결탁하여 새로운 주거형태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이들만을 위한 건설에 치중했다.16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이후 1971년에 다시 시도된 동부이촌동의 성공적 아파트단지 개발은 곧 거국적 경제개발과 더불어 도래할 중산층을 위한 것이었고, 반면 지금의 성남인 광주대단지는 사회하부계층을 집단으로 수용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후자의 경우, 대단지 이주민들을 ‘정상적인 환경’에 수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비가시화 하며 동시에 착취하는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강제로 이주시킨 대단지의 주민들에게 정부가 터무니 없는 무리한 일정과 금액을 요구하여 폭동을 촉발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개발과 이윤지상주의의 게임에서 배제된 이들중에는 1970년대에는 소설가 윤흥길이 그린 바와 같이 <아홉컬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가 있었다. 대학교 학위를 여러번 언급하는 불안한 노동자인 소설의 주인공은 실존했던 많은 익명의 몫없는 이들의 제유법 (提喩法)적 표현이다. 그 사나이는 중산층이 되어보려는 시도에 실패하거나 아예 시도할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이들 모두를 의미한다. 오늘날에도 상황은 그다지 바뀌지 않아서 몇 개의 대포폰을 남기고 떠나는 사나이들이 있다.

한국의 아파트단지들은 부의 재분배보다는 양적 성장에 집착한 가시적 결과물인데, 그것은 “개인의 행복이 아닌 ‘사회의 행복’”이라는 국가주도형 이데올로기를 기초로 한 것이다.17 한국의 아파트단지 개발의 열의는 ‘양과 속도’가 핵심이며, 급속한 “성장의 이데올로기에 완벽하게 통합”되었다.18 무엇보다도,“한국도시경관의 불안정성은 … 우선 도시의 변화 속도에 있어서 과격함을 의미한다. 국토의 빠른 개발과 변모를 경험한 사회가 갖고 있는 공통적 특징은 새 것에 대한 맹목적 숭배로 나타났으며, ‘신’이나 ‘뉴’라는 접두사를 무한대로 사용” 하여 “신도시, 뉴타운의 홍수”를 초래했다.19 모두가 알다시피 이러한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아파트라는 ‘집’의 가장 큰 의미는 투기대상이며, 주기적으로 옮겨다니며 시세차익을 내서 중산층으로 안착하는 중요한 기제로 작동했다.

믹스라이스는 그 과정에서 허물어지고 다시 ‘키워지는’ 건물들은 시간과 기억의 흔적을 갈아치운다고 본다. 한국의 대규모 아파트단지들의 내부구조는 대동소이해서, 그 공간을 사용하는 이들의 생활패턴 역시 유사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정착할만하면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 재테크의 이유로, 또는 좀 더 나은 학군으로 옮기기 위하여 이사한다. 그러한 빈번한 이사 때문에 고층 아파트의 발코니 창문을 뜯어내고 리프트로 이사짐을 올려 넣는 시스템도 발달했다. 작가 고승욱이 언젠가 말했듯이, 한국의 매우 유사한 아파트 생활 속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혹은 타인의 망각에 자신의 욕망을 전이시키는 것”을 끊임없는 반복하는 모순의 생활에 익숙하다.20 이러한 반복 속에서 장소와 그곳에서 보낸 시간과 그 기억의 특정성은 소실되게 마련이다.

믹스라이스가 한국사회에서 느끼는 불안함은 근래의 가시적인 경제성장과는 달리, 그들이 보기에 근본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한 대다수의 삶의 형태를 인식함에서 기인한다. 그 삶의 형태란 자유의지로 선택하여 정착하는 삶이 아닌, 개발의 논리에 종속적이며 부의 욕망과 얽혀있는 삶의 방식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압축성장의 과정 속에 많은 한국인들은 지방의 집을 버리고 상경했으며, 근대화와 선진성을 상징하는 아파트에 입주하고, 아파트라는
‘집’을 장만하는 것이 모든 이의 꿈과 목표가 되었다. 그래서 삶이란 경제력이 허락하는데로 점차적으로 작은 아파트에서 좀 더 큰 아파트로 평수를 늘리고, 자동차 역시 유사하게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 삶의 지표가 되버렸다. 신기루와 같은 아파트라는 주거공간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자산을 축적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과연 정착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정착이란 땅과 긴밀한 육체적 정신적 뿌리내림을 내포한다. 한국인의 삶이란 과연 땅과 연결되어 있는가? 많은 한국인들은 도시로의 이주자이며, 열망하는 모더니티로의 이주자일 뿐이다. 현대의 한국인은 망명자도 이민자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무 곳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기에, 그들은 정주자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이주자일 수도 있다. 믹스라이스의 이러한 견해는 자신이 이주노동자를 바라본 시선, 즉 “정주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주자, 또는 수혜자의 입장에서 이주자와 연대한다는 조건의 한계”를 인식함에서 비롯된 것이다.21

 

내부와 외부

오래전부터 믹스라이스가 써 온 용어로 내부와 외부라는 구분이 있다. 그것이 암시하는 바가 진화하고 있다. 예전 작업에서 한국에서 내부란 단일민족의 한국사회, 기득권층의 뜻을 내포했다면, 외부란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 커뮤니티와 그들이 거주하는 개발되지 않은 낙후된 1970년대의 모습의 마석이다. 마석동네페스티벌을 마친 뒤 그 경험을 성찰한 믹스라이스는 마석이라는 외부를 방문한 내부의 사람들이 오히려 외부를 통해 무언가 한국에 대해 배우는 기회를 가졌으리라고 말한다. 이때 내부와 외부는 정주자와 이주자, 또는 한국인과 외국인, 특히 그들 사이의 사회계층의 거리를 인식한 구분이다. 그러나 언급했듯이 내부자로서 외부자를 바라보는 시선의 한계 때문에도 그들의 작업태도는 변하고 식물이라는 보편적인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타자와의 관계설정이란 어떻게 하든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모순적이다. 왜냐하면“타자 없이는‘자신’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타자와 완벽하게 동일화될 수도 없다. 타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근본적으로 불가피하지만, 궁극적으로 불가능한 윤리적 이상이기 때문이다.”22

이제 믹스라이스에게 내부란 자연에 대해 인간이 가진 헤제모니이다. 내부란 인간이 가공한 것이며 외부란 인간이 척박하다고 여기는 개발과 착취의 대상인 자연과 자원이다. 내부란, 늘 그래왔듯이, 자연을 임의로 채집하고, 운반하고, 분류하고, 전시하고, 가공하고, 매각하고, 이식하는 등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므로 당연히 가졌다고 믿는 권리이다. 믹스라이스가 말하듯, 내부란 “개발과 부가 주체인 세계”이다. 그들은 묻는다: “우리는 왜 외부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가? 그리고 왜 우리는 모두 내부여야만 하는가?”즉, 왜 우리는 모두 자연에 대한 헤제모니를 고집해야만 하는가? 왜 우리는 내부와 외부라는 구분을 초월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은 이분법적 사고라기보다는 이미 나와 타자와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문명과 자연의 관계가 이분법적이며, 후자가 전자의 종속적인 관계임을 부인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문제삼는 것이다. 믹스라이스는 단순히 자연친화적 관계 또는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만 피력하는 것이 아니다.

 

식물과 열매, 시간과 기억 

이주노동자라는 사회적 타자와 협업을 해오던 믹스라이스는 언제부턴가 식물과 열매라는 모티브를 차용한다. 믹스라이스는 왜 그리고 어떻게 식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 식물과 아파트라는, 자연과 문명 또는 자연과 문화라는 이분법적 사고라는 위험을 무릅쓰고도 식물에 천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10년 믹스라이스는 이집트 카이로의 타운하우스 갤러리에 10주간의 레지던시를 위해 머물 당시 카이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온 또 다른 이주자들과 만난다. 믹스라이스는 그들과의 워크숍을 통해 그들이 남기고 떠날 수 없었던 어떤 것, 하지만 남기고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에 대해 물었으며, 한국에서도 이주노동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물었다. 그들이 답변으로 내놓은 구체적인 설명을 토대로 믹스라이스는 한국에서 맛볼 수 없는 과일에 대한 우뭇가사리로 비과일을 만들어 손바닥에 얹어놓거나, 생뚱맞게 망고를 나무에 매달아 촬영했다. 일련의 사진으로 보여주는 워크숍의 결과는 사람들은 체화된 감각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주자의 경험을 촉감과 기억을 통해 호출하고 재현하는 작업으로서, 그것은 그들의 타자성을 이용하는 것을 너머서 그들의 기억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2013년 두번째 마석동네페스티벌이 열린 불탄 공장의 창문이 있던 구멍에 주렁 주렁 매달린 열매들은 마치 어떤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아 보인다. 도깨비 방망이 같기도 하고, 또는 거대한 파괴 후 잔존한 생물체가 변이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믹스라이스가 15년전 처음 가졌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호기심을 연상시킨다. 열대과일은 미지의 것으로, 호기심을 유발하며 매력적인 맛 보기를 원하게 한다. 인공적인 색의 점토로 열대과일의 형상으로 만들어지고 그 표면에 토속적인 콩과 씨들이 박혀있는 조형물들은 이주노동자들과 한국인들이 어우러져 노는 모습을 내려다 보고 있다. 애초에 이 괴상한 열매들은 아시아의 이주의 역사를 리서치하며 열대를 상상하는 과정에서 열대밀림에서 과일을 만났을 때의 생경하고 낯선 상상의 과일을 만들려던 시도였다. 그래서 토속의 나무신들 앞에 열매들을 놓아 그것들이 마치 나무신의 영매인듯 또는 제물인듯 모호한 상황을 재현하기도 했다. 마석의 불탄 공장 앞으로 옮겨진 이 열매들은 기이한 괴물이기도 하고, 그곳에 모인 이방인들의 기억의 촉매이기도 하다.

최근 네덜란드의 아른헴에서 한달간의 레지던시를 마치며 선보인 믹스후르츠도 역시 열매를 쿠르드나 타지역에서 온 이주민들의 기억을 호출하는 매개체로 사용한다. 정치적 분쟁을 피해 이주해 와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아랍 여성들이 그리워하는 고향의 과일 이야기, 그리고 어린이들이 상상한 과일을 점토로 만들고 그것에 이름, 향, 맛, 먹는 방법 등을 기술해 전시하고 책자를 만드는 협업을 마쳤다. 믹스라이스는 호스테스로서 과일을 섞어 만들어 씨가 범벅인 찐득한 과일주스를 주민들에게 제공하며, 무엇보다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 환대한다.

이렇게 이주민들이 기억하고 서술한 열매, 또는 어린이들이 상상한 열매와의 대면은 수백년전 식민지에 도착한 식물채집자가 처음 느끼는 ‘매혹’의 경험을 호출한다. 하지만 믹스라이스가 불러내는 식물과 열매는 열강의 식물채집자들이 보여준 폭력적인 약탈의 성격과 거리가 멀다. 믹스라이스에게 열매는 이방인이며, 그것은 단지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의 작업에서 호기심을 자아내는 열매란 이주를 통해 우리 앞에 나타난 이방인의 기억을 이끌어내는 초대자를 은유하며, 그것은 결국 기억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들이 주목하는 마석, 성남, 제주도의 특정지역은 외면받는 존재들이 사는 곳이다. 마석동네페스티벌은 이주민들이 마석을 언젠가 떠날 것이며, 앞으로 개발로 인해 변모되기 전에 마석의 기억을 만들고 싶은 염원에서 비롯되었다. 믹스라이스가 말했듯이, “제도화되지 않은 그 동네만의 하나하나가 어떤 기념이 되고 기억이 되었으면 했다.”23 고급아파트 단지에 이식된 고목들이 있다면, 과거 무책임한 정부의 주거정책으로 말미암아 봉기가 있었던 성남에는 산을 깍고 나무를 밀어서 만든 도시이기에 나무가 없다. 이제 성남은 한국인 노동자들과 결혼하기 위해 이주한 아시아 여성들과 중국인 일용직노동자들의 밀집지역으로 소외된 기억이 모인 곳이다.

이렇듯 믹스라이스가 식물과 나무처럼 진부하게 여겨지기 쉬운 소재에 천착하는 중요한 이유는 개발을 둘러싼 기억의 소실이라는 불안감에서 연유한다. 오래된 나무는 예로부터 마을공동체의 중심이었으며, 토속신앙의 대상으로서 기도와 염원의 중심자리에 있던 나무들은 보이지 않는 차원과 이 세상을 연결하는 존재였다. 시간의 기록자로서 나무는 실제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오랜 시간의 무늬의 현현이다. 예전에는 나무를 신의 몸체라고 여겨 나무가 죽어도 제를 지내는 전통이 있었으나, 이제 제주도에서는 신목들이 덩굴과 잡초 속에 방치되어 찾아보기도 어렵다. 심지어는 오랜 시간에 걸쳐 나무와 함께 진화하는 마을마저도 4대강 사업으로 침수되었다.

새로운 ‘공동체’ 인 아파트촌은 계급사회의 배타적 커뮤니티이며, 아파트라는 주거형식은 물론 욕망의 대상이자 투자의 방법임은 말할 나위가 없는데, 여기에 나무는 그 가치를 높여주는데 봉사하는 꼴이다. 한 천년수는 지금 경북 군위댐 물 속에 자리했었는데 현재는 반포와 동천 아파트단지의 조경수로 전락했다. “천년 시간의 무게와 거리”는 실제 역사와 이야기들의 관계로부터 끊기어, 정량화된 토지위에 규격화된 디자인을 적용하여 쌓아 올린 아파트의 장식품에 불과하다. 자크 아탈리 Jacques Attali는 음악의 변천사를 논하기를, 오래전에는 음악은 공동체의 공간에서 함께 제의식의 차원에서 음악을 공유했으며, 18세기 이후로는 한정된 공간에 돈을 지불하고 입장하여 남들과 함께 음악을 소비하게 되며, 20세기 후반에는 귀에 꼽고 홀로 음악을 소비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지적한다.24 이와 흡사하게, 공동체에서 신성성을 지녔던 신목은 아파트단지 내부라는 배타적인 공간에 이식되어, 아파트 소유주들은 자신의 브랜드화된 아파트의 계급적 차별성과 명성을 보완하는 상징적 존재로서의 고목을 소비한다. 즉 조경수는 이제 역사와 시간과 문명을 소비하는 한 방식이다. 물론 고목은 그 단지에 ‘입성’하고 싶은 자들이 볼 수 있도록 선망의 대상으로서 광고효과를 수행한다. 탈맥락화된 전통은 이렇게 때로는 매혹적이다.

 

시간의 무늬를 그리며, 다시 바깥으로

믹스라이스는 이주의 흔적이 어떻게 기억되는가, 어떻게 표상되는가에 대해 탐구해왔다.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찾아서 사람들은 이주한다는 것은 늘 있어온 일이지만, 그것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얼마나 그것의 구체성을 대면하는가? 이주적 현상은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는 욕망을 누구도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이주를 통해 대면하게 되는 자본, 국경, 제도, 가족, 기억, 그리고 시간과의 교차점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피할 수 없다. 믹스라이스는 그 교차점에서 이주자들과 함께 해왔다. 그들의 작업은 개발과 폭리의 추구라는 거대담론에서 잃어버린 공동체의 기억들, 개인의 삶과 이야기들, 시간의 파괴와 잠식에 대한 애도이다.

이 전시에서는 이주를 상징하는 식물이 어떻게 한국 현대사에서 중산층의 욕망에 부응하는 기제로서 사용되었나를 보여주고 있다. 나무를 마을에서 옮겨서 아파트 단지내로 옮길 때 그 나무의 생태가 바뀔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생태계 역시 바뀐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무를 베거나 이식해서 고사되는 것은 단순히 그 나무 한 그루의 죽음이 아니다. 비록 인간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나무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끊임없이 대기 속의 화학작용이, 나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온갖 곤충들과 새들과 동물들의 삶의 역사가, 나무 속에 공존하거나 기생하는 곰팡이, 박테리아, 미생물들의 삶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나무의 죽음은 “시간의 폐허화”이며, 시간 속에 녹아 있으나 인간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작은 우주를 폐허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란, 식물이란, 에너지를 발산하며, 원기왕성하게 진동하며 울려퍼지는, 공명하는 물체25인 것이다.

그에 반해서,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이야말로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이방인이다. 오히려 자연을 착취하고 해만 끼치는 연가시같은 존재라고 한다면 과언일까. “연가시가 숙주와 맺는 관계는 전적으로 약탈적이다. 희생자는 고통을 겪을 뿐 숨겨진 유익이나 보상을 전혀 받지 못한다.”26 물론 자연은 인간의 숙주인 셈이다. 믹스라이스의 말처럼 우리의 외부인 자연은 우리가 영원히 식민화 해야하고 끝없이 착취해야하는 영원한 타자이다. 그래서 그들이 덩굴의 끈질긴 힘에 주목하는 것은 자연이라는 타자와 함께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숲에서 우주를 보다』의 저자인 생물학자 데이비드 해스컬은 미국 테네시주의 한 산기슭에서 1년동안 지정한 1평방미터 가량의 땅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본다. 그것은 단지 그 자그마한 규묘의 땅에 대한 관찰 뿐만 아니라 숲을 오가며 마주치는 모든 동물, 식물, 유기체에 대한 것이다. 해스컬은 1년간의 관찰을 마친 뒤의 성찰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내가 이곳에서 불필요한 존재임을, 인류 전체가 그러함을 깨달았다. 깨달으니 외롭다. 내가 숲과 무관한 존재라는 사실이 아프다… 세상은 나를, 인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자연계의 인과적 중심이 만들어지는데 인간은 전혀 기여하지 않았다. 생명은 우리를 초월한다. 인류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므로 우리는 바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27 비록 인간은 지구에서 “이방인이자 구성원”이지만, 여기에서 저자는 인간을 바깥에 상정함을, 그리고 인간은 “바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피력함을 주목해야 한다.28 그가 말하는 바깥이란 믹스라이스가 늘 언급해 온 ‘외부’와 다르지 않다.

믹스라이스는 이주민들과의 협업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이주적 현상에 대해 천착해왔다. 그러한 시각에서 또 한 걸음 물러나서 그들의 활동을 전지구적 현실에서 고려해보자. 그들의 나무와 식물과 열매에 대한 관심, 아파트와 중산층 문화에 대한 비평적 시선, 그와 더불어 실천해 온 괴산 탑골만화방, 공장의 불빛, 버드나무가게, 방과후 터전 알꽁 등의 여러 비영리 공간들과 관련된 창의적 활동들은 “지역적이며 전지구적 차원에서 생존의 비자본주의적 방식과 자본주의 너머의 혁명적인 사회를 구축하는 전략들”29의 접합점을 향하는 작은 움직임들이다. 인간은 이제 “욕망의 물질성”30을 너머서서 이 지구에서 “이방인이자 구성원”으로서 “협력의 본보기”인31 식물에 대해 겸허하게 관찰을 재개하고 식물로부터 바깥의 삶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신 믹스라이스 조지은씨, 양철모씨, 그리고 쉽지 않은 믹스라이스의 작업의 이해에 도움을 주신 큐레이터 김희진씨에게 감사드립니다.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연구를 추천해주신 김수기 선생님, 제인 베넷의 연구를 알려주신 박혜연씨도 역시 감사드립니다.
1. 김희진, “믹스라이스가 만난다,” 『아주 평평한 공터』, 포럼 a, 2011, p. 48.
2. 몇 해 전 믹스라이스가 아틀리에 에르메스라는 고급 패션브랜드가 운영하는 강남의 공간에서 전시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이주노동자와의 작업을 어떻게 에르메스 같은 곳에서 할 수 있을까 라고 궁금했다. 아무리 모든 저항적 행위가 자본의 포섭을 벗어날 수 없다 할지언정, 그러한 공간에서 믹스라이스가 이주노동자를 재현하는 작업을 보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그곳에서 그들 작업은 어려움에 처한 특정 개인들을 재현하는 것을 벗어나 식물과 그것의 이식에 대한 탐구여서 나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작가상이라는 경쟁을 하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들은 작가로서의 영달을 위해 타자의 고통을 재현하는 따위의 우를 물론 범하지 않는다.
3. 작가의 전자메일, 2016년 8월 8일.
4. 믹스라이스, “그날 밤 우리가 들여 마신 공기,” 칼방귀 3호, 2013, p.67.
5. 작가의 전자메일, 2016년 8월 8일.
6. 작가와의 인터뷰, 2016년 7월18일.
7. Hal Foster, Bad new days: Art, Criticism, Emergency (London: Verso, 2015), p. 139.
8. Claire Bishop, “Antagonism and Relational Aesthetics,” October, No. 110, Fall 2004, p. 79. “The Social Turn,” in Artificial Hells: Participatory Art and the Politics of Spectatorship (London: Verso, 2012).
9. 작가와의 인터뷰, 2016년 7월18일.
10. 고승욱, “일곱번째의 만남: 고승욱 & 믹스라이스,” 『바다에 갔다 온 계곡개구리』, 2010, p. 92.
11. Tania Bruguera, interviewed by Tom Finkelpearl, What We Made: Conversations on Art and Social Collaboration (Durham: Duke Univ. Press, 2013), p.195.
12. Claire Bishop, “Antagonism and Relational Aesthetics,” October, No. 110, Fall 2004, p. 66.
Ernesto Laclau and Chantal Mouffe, 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Towards a Radical Democratic Politics (London: Verso, 2001). 이승원 역,『헤게모니와 사회주의전략』, 후마니타스, 2012.
13. 작가의 전자메일, 2016년 8월 8일. 이는 마치 19세기 미국에서 중국인 남성 노동자들만 허락하고 그들의 부인과 가족들의 입국을 불허함으로써 독신남성의 군락을 낳은 중국인 배제법안과 유사한 면이 있다.
14. 믹스라이스, “우리가 마주한 것,” 『아주 평평한 공터』, 포럼 a, 2011, p. 16.
15. 김희진, 아트스페이스 풀, 『아주 평평한 공터』, 포럼 a, 2011, p. 87.
16. 발레리 줄레조, 『아파트 공화국』, 길혜연 옮김, 후마니타스, 2007, pp. 86, 99.
17. 같은 책, 102.
18. 같은 책, 101.
19. 같은 책, 58.
20. 고승욱, 작가노트 <서울>, 2003.
21. 작가와의 인터뷰, 2016년 7월11일.
22. Gregg Bordowitz, Aids Crisis is Ridiculous and Other Writings, 1986-2003 (Cambridge: MIT Press, 2004), p. 278.
23. 믹스라이스, “우리는 자극을 받았을까요_<다시 한 번 MDf(마석동네페스티벌)>를 하고서,” 말과 활, 2013년 10-11월, p.282.
24. Jacques Attali, Noise: The Political Economy of Music (Minneapolis: Univ. of Minnesota Press, 1985).
25. Jane Bennett, 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Durham: Duke Univ. Press, 2010).
26. 데이비드 해스컬,  『숲에서 우주를 보다』, 에이도스, 2014, p. 23.
27. 해스컬, pp. 341-342.
28. 같은 쪽.
29. Rocco Gangle, Foreword, in Antonio Negri, Spinoza for Our Time: Politics and Postmodernity (New York: Columbia Univ. Press, 2013), p.17.
30. Antonio Negri, Spinoza for Our Time, p.17.
31. 해스컬, p.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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