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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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현(1970-)은 역사적 사건과 기록에 관한 자료를 구축하면서 다큐멘터리의 리얼리티를 확장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작가는 본인만의 다큐-아트 프로젝트를 구축하면서 역사적 사건 너머의 빈 여백을 예술적 상상력으로 채우며 역사학, 문화인류학, 민족지학적 실존자료를 바탕으로 아카이브의 수집과 분석, 구조적 재배치를 통해 새로운 미학적 탐색을 시도한다.
작가는 전방위적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치밀한 자료 리서치, 공문서 작성, 인터뷰, 작품 제작 및 설치, 사진 및 영상 기록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객관적 사료가 제시하는 객관적 진실이 상당히 모호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Interview

CV

<주요개인전>
2014
‘PRO-JECT’, LIG 아트스페이스, 서울, 한국
‘나현 개인전’, E&C Gallery, 후쿠이, 일본
‘The Babel Tower’, Kunstlerhaus Bethanien, 베를린, 독일
2012
‘A Song of Lorelei’, 갤러리정미소, 서울, 한국
2011
‘나현 보고서-민족에 관하여’, 성곡미술관, 서울, 한국
2010
PILE, Atelier am Ack, 뒤셀도르프, 독일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이다, 쿤스트독갤러리, 서울, 한국
2009
‘실종’, 갤러리상상마당, 서울, 한국
2008
‘물위에 그림 그리기’, Cite Internationale des Arts, 파리, 프랑스
2007
‘풍경 그리기’, 파링돈로드, 런던, 영국/ 청계천, 서울, 한국
2005
‘White Cloud Minnow 프로젝트’, Central Library, 드레스덴, 독일/St Edmund Hall Library, 옥스퍼드, 영국/ 국립중앙도서관, 서울, 한국
2004
‘이상한 사건’, Dolphin Gallery, 옥스퍼드, 영국

<주요 단체전>
2014
‘끝나지 않은 이야기-국립현대미술관 레지던시 작가전’, 주인도한국문화원, 뉴델리, 인도
‘꿈(夢)-후쿠이 아트페스티벌’, 후쿠이, 일본
‘Mediation Biennale 2014’, 포즈난, 폴란드/ 베를린, 독일
2013
‘Transfer Korea-NRW’, 아르코 미술관, 서울/ Osthaus Museum Hagen, 하겐, 독일
‘이상 뒤샹전’, 현대문학관, 서울, 한국
‘에르메스 미술상전’, 아틀리에 에르메스, 서울, 한국
‘르포르타쥬’, LIG아트스페이스, 서울, 한국
2012
‘세라믹스코뮌’, 선재아트센터, 서울, 한국
’부산비엔날레 특별전-아르누보 숲에서’, 부산문화회관, 부산, 한국
‘Poly-Politic’, 쿤스트독갤러리, 서울, 한국
2011
‘Innerspacing the City’, Chelsea Art Museum, 뉴욕, 미국
‘인터뷰’, 아르코미술관, 서울, 한국
‘Resonance and Preservation of the ecosystem’, Kunstraum T27, 베를린, 독일
2010
‘이미지의 틈’,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Dual interview’, 아트스페이스휴, 서울/ I Myu Gallery, 런던, 영국
‘빈집’, 송원아트센터, 서울, 한국
2009
‘악동들 지금-여기’, 경기도미술관, 안산, 한국
‘신진기예전’, 토탈미술관, 서울, 한국
‘ASIA PANIC’,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광주, 한국
2008
‘젊은모색 2008’,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
‘4482전’, OXO Tower Gallery, 런던, 영국
‘Make UP’, MAGA Glass Gallery, 북경, 중국
2007
‘유클리드의 산책’,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ENSEMBLE(S)ll’, Cite Internationale des Arts, 파리, 프랑스
2006
‘Another event in London’, the Plum tree, 런던, 영국
2004
‘Atomic Artbomb’, ModernArt Oxford, 옥스퍼드, 영국
‘In fact~’, Ruskin school of drawing & fine art, 옥스퍼드. 영국

Critic 1

역사학의 광장에 세운 상상미학의 오벨리스크
– 나현의 다큐아트프로젝트와 미학적 진실

김종길 (미술평론가)

“내 관심은 피사체의 이미지보다는 그 피사체를 바라보고 보여주는 시점에 머문다. 꽤 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미술 안에서 이렇게 다른 언어도 존재한다는 걸 감상자들이 인정해줬으면 한다. 익숙한 문법이 아니라고 해서 난잡한 무언가로 쉽게 배척해버린다면 서운한 일이다. 아카이브 구축 위주로 이루어지는 작업의 특성상 명확하게 마침표를 찍는 게 늘 어렵다. ‘프로젝트(pro-ject)’라는 단어가 내 작업에는 무척 잘 맞는다. 뭔가 앞으로 던지고 보는 거다. 기존 질서를 동어 반복하는 대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데 집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완결된 무언가보다 그 과정 자체가 내 작업의 본질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나현

1) 추천사유

나현 작가는 지난 십 수 년간 역사적 사건과 기록에 관한 자료아카이빙을 구축하면서 다큐멘터리의 리얼리티를 확장하는 미학적 공진화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수행해 왔다. 물론 아카이빙아트프로젝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오직 그만이 수행할 수 있는 ‘나현식’ 다큐아트프로젝트를 보여줌으로써 역사적 사건 너머의 빈 여백을 예술적 상상력으로 채우는 놀라운 미학적 ‘아카이브박물지학’을 성취했다고 생각한다. 역사학과 문화인류학, 민족지학, 박물관학은 물론이요, 집요한 수집과 분석, 구조적 재배치를 통한 미학적 탐색은 그동안 한국 현대미술이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진영의 예술 공론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 스스로 “나는 객관적 사료를 제시하며, 동시에 객관적 진실이라 불리는 게 이토록 모호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회화와 조각, 사진과 같은 근대적 장르 분야의 미학적 궁구와는 다른 그의 다큐아트프로젝트의 예술 공론장은 전시공간연출의 측면에서는 사료(史料) 아카이브 중심의 박물관학과 맞닿아 있으나 실제로는 ‘역사적 실증주의’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려는 ‘상상적 상대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전시장 내부를 마치 유물사관의 관점에서 배치해 놓은 듯이 수많은 사료들을 수집해 보여주지만, 사실 그는 역사주의에 우호적인 입장이라기보다는 역사주의를 극복하는 한 방법으로서 상대주의적 예술 상상력을 구조화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전략은 사료들이 증거 하는 ‘역사적 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사료들은 언제나 ‘부분적 사료들’에 불과하다는 측면에서 진실에 가까운 참조물일 뿐 결코 ‘절대적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료와 사료 사이를 유동적으로 횡단하는 살아있는 질문들에 있다. 바로 그 지점이 실증 역사론과 상상 미학론이 창조적으로 충돌하는 교차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교차로에서 21세기 새로운 미학적 실험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추천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아트프로젝트가 보여주는 높은 완결성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전방위적이고 국제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치밀한 자료 리서치, 공문서 작성, 인터뷰, 작품 제작 및 설치, 사진촬영, 영상기록을 비롯한 매우 세밀한 부분들을 직접 기획하고 실천한다. 추진 체계와 방법, 계획에 따라서는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리는 이런 작업들은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뿐만 아니라 프로젝트의 특성상 아카이브 결과 자료집을 발간하지 않고서는 전시를 완성할 수 없으므로 출판기획이 최종적 작업일 터인데, 이 부분에서도 그는 그가 기획하고 수행했던 프로젝트의 목적을 잘 보여주는 자료집을 완성도 높게 출판하고 있다.
나현 작가는 그가 수행하는 다큐아트프로젝트에 대한 기획, 그리고 그 작가적 기획의 과정적 실천과 기록에서 탁월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하기에 올해의 작가상 추천작가로 추천하고자 한다.

2) 작품세계 소개

2014년 12월 31일까지 LIG아트스페이스에서 개최하고 있는 <프로-젝트(PRO-JECT)>는 나현 작가가 그동안 기획하고 수행해 온 프로젝트의 오마주 콜라주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전시는 그의 독자적인 아트프로젝트는 아니지만 그가 구축해 가는 예술세계의 근경을 보여주었다. 스스로 일별하듯 정리해 놓은 전시공간은 ‘아카이브박물지학’의 성취를 보여주듯 마치 ‘나현 미술관’의 공간들을 보는 듯했다. 이 전시에 정리해 놓은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짧게 소개하고자 한다.

바벨탑 프로젝트(Babel tower project_2013~현재) : 가장 최근에 수행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폐기물들로 이뤄진 베를린의 ‘악마의 산(Teufelsberg)’과 서울 근대 도시화의 쓰레기 집적지인 ‘난지도’를 대상지로 하고 있다. 그는 두 도시의 역사적 흔적을 현대적 바벨탑으로 재해석하면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악마의 산’의 역사는 이렇다. 베를린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갑작스럽게 60여 곳의 언덕들이 생겨났다. 그중 18곳이 전쟁 폐기물로 만들어진 인공 언덕들이다. 악마의 산은 이 18곳 중에서도 가장 높은 120.1미터 높이의 거대한 언덕이다. 이 지역의 여성들이 매일 트럭 80여 대 분량의 전쟁 폐기물을 수거해 만들었다고 한다. 이 언덕에 냉전 시대에는 미국의 도․감청 시설이 있었다.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이 전 세계를 극비리에 감시하던 에셸론(Echelon)이라는 스파이 네트워크의 일부 시설이다. 독일 통일 이후 투자회사에 팔렸으나 회사는 파산했고 개발계획은 백지화됐다. 난지도의 역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주지하는 바다. 작가는 두 도시의 이런 괴물 같은 흔적을 바벨탑에 비유함으로써 인간의 욕망과 불통의 문제에 접근한다. 물론 그는 역사적 사실의 오래된 사료들을 수집해서 펼쳐놓지만 그것들이 탄생한 어떤 진실에 다가서려고 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그는 ‘어떤 진실’의 진실이 아니라 ‘어떤’에 집중함으로써 다언어의 불통혼란과 혼돈을 예지적으로 보여준다.

*바벨탑 프로젝트는 <나현 보고서-민족에 관하여> 프로젝트와 연결되어 있다. 창세기-바벨탑에서 다뤄지는 다양한 언어는 곧 다양한 민족의 출현을 예고하듯이 작가에게 난지도나 베를린의 로이펠스베르그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귀화식물은 한국이나 독일에 살고 있는 다른 민족 출신의 이민자들을 은유하고 있다. 급속하게 다민족, 다문화 되어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처럼, 단일혈통과 민족을 국가의 정체성으로 삼았던 국가에게 오늘의 민족과 국가의 관계에 대하여 질문을 던져 보고자 한 것이다 (작가).

로렐라이의 노래 프로젝트(A Song of Lorelei project_2010~2013) : 로렐라이의 노래 프로젝트는 독일 뒤셀도르프박물관에서 발견된 14세기의 나무 말뚝이 중요한 모티프였다. 말뚝은 성 주변의 해자에 쓰는 말뚝이었다. 그는 높이 2.9미터의 말뚝을 오크나무로 제작했다. 그리고 그 말뚝을 인간의 개발욕망(도시화/근대화)이 자연과의 경계를 갖는 라인강 주변에 박았다. 그런 다음 2년 동안 그 말뚝이 어떤 변화에 처하는지를 관찰하고 기록했다. 말뚝은 라인강의 수위가 변화하는 과정을 몸에 새겼고 강물의 흐름에 따라 또한 조금씩 기울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프로젝트는 동일한 형식으로 한국에서도 진행되었다. 남한강대교(한강), 구담교(낙동강), 담양호(영산강), 그리고 금강 등지에 2.9미터의 말뚝을 박아놓고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했다. 그가 수행했던 기간은 아이러니하게도 ‘4대강 살리기’라는 국책 사업이 저돌적으로 추진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수행적 태도를 뒤로하고 그가 미학적 담론을 제시한 작업은 그 뒤의 이야기에 있다. 그는 거대한 그 말뚝을 판으로 켜서 테이블을 제작했다. ‘말뚝 박기’가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대해 시니컬하게 문제제기하는 과정이었다면, 전시장으로 호명된 테이블은 ‘공존의 담론을 위한 자리’로서의 미학적 물음을 함의했다. 이해 당사자들끼리의 테이블은 격한 논쟁이 발생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이니까. 독일 민요 ‘로레라이의 노래’는 라인강의 물결을 따라 흐른다. 그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네가 처음으로 고해성사 할 때까지는/ 나는 너에게 벌을 줄 수가 없다./ 왜 이 불꽃 속에 내 마음이/ 벌써 불타고 있는지 모르겠다.”, “주교님, 저와 같은 불쌍한 사람들을/ 그렇게 조소하지 마세요./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에게/ 저를 위해 자비를 빌어 주세요!”

실종 프로젝트(Missing project_2006~2009) : 이 프로젝트는 6.25 한국전쟁 중 실종된 프랑스 병사들을 찾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는 실종병사들과 함께 참전했던 생존 용사들의 기억과 당시의 기록들을 토대로 ‘실종’의 의미를 탐색해 들어간다. 아트프로젝트에서 그는 ‘실종병사들’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러니까 그 과정 자체를 전시의 오브제로 설정함으로써 실종이 갖는 사회적 맥락의 허구와 실체로서의 기억, 기록의 신뢰에 대해 의문한다. 3년간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방대한 역사학 아카이브와 사회학으로서의 관계들을 추적하고 있다. 그러나 전시를 통해 우리가 파악하게 되는 것은 실종된 병사들이 아니라 ‘실종된 진실’과 ‘공개되지 않는 실종’의 어렴풋한 희미함이다. 뚜렷하게 밝혀질 수 없는 실종의 그림자들 사이에서 그가 보여주는 실체는 추상적인 기억들이다. 낡고 색 바랜 한 장의 사진들이다.

Critic 2

이것이 아무것이다!
– 나현의 잉여세계 역사학과 대칭성 미학 -

김종길(미술평론가)

아무것도 아닐 거야
이게 어떤 목적으로 사용 된 것 같지는 않아.
그래서 이걸 좋아하지.
이건 그들이 잊고 바꿔 놓지 못한 역사의
한 조각이지. 과거의 메시지야.
누가 그걸 읽을 수만 있다면 말야.
_ 조지오웰 『1984』1

1.
각주 1)로부터의 사유; 나는 각주 1)에서 나현이 조지오웰의 ‘아무것도 아닐 거야’를 인용한 것에 대한 생각을 풀면서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치부해 온 것들, 그러니까 그 ‘치부의 것들’로 개입해 들어가는 방식을 통해 나현은 우리에게는 결코 익숙하지 않은 역사학의 광야에서 미학적 생성지를 구축해 왔다.”고 논평했다. ‘치부의 것들’의 나현식 표현은 ‘잉여세계’다. 나는 그의 작품론을 구상하기 위해 그가 수행해 온 거의 모든 프로젝트를 여러 개의 사건적 단서들로 재배치한 뒤, ‘잉여’가 탄생시킨 뜻의 사유 지도를 그려 보았다. 작품 하나하나의 출발은 작가 자신과 ‘사건들의 역사’가 어떤 필연적 상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자신이 잉여세계의 한 존재로서 인식될 때, 거의 모든 사건들의 길들은 그 자신에게로 소급되었다. 한 마디로 그는 그의 예술의 제로 포인트였다. 그는 “나의 프로젝트 작업의 기본은 구조 밖의 잉여세계에 대한 적극적 소개이다. 시, 공간이 함포하고 있는 구조적 불안성은 잉여세계를 찾아가는데 이정표가 될 것이며, 그 이정표는 내 작업에 있어서는 속도를 가해주는 가속페달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2

2.
최소한 그의 고백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단서 하나는 그가 수행해 온 프로젝트들의 지향점이 이 세계의 구조 밖에 존재하는 ‘잉여세계’를 찾아 그것을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소개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는 ‘잉여세계’가 ‘구조 밖’에 존재하고, 그 구조 밖의 잉여세계로 통하는 길은 ‘구조적 불안성’이며, 바로 그것이 잉여세계로 통하는 이정표라고 귀띔하고 있잖은가! 그런데 그가 말하는 ‘잉여세계’는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쓰고 남은 나머지’로서의 ‘잉여(剩餘)’를 단순하게 차용해서 제시한 개념이 아닌 듯하다. 그는 <WHITE CLOUD MINNOW>(이하 ‘화이트 클라우드 미노우’로 지칭함) 자료집 크레디트에 “내 작업 속에서 나는 ‘사건’이라는 개념에 집착해왔다. 정체성은 하나의 사건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사건은 시간과 공간 사이의 복잡하게 긴장되어진 관계성과 밀접히 관계되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 작업은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에 의해 생산되어진 긴장을 연구하고 그 경직성을 흔들어댄다.”고 메모해 놓았고, 앞쪽 서문에는 “나는 그 사건이 구성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장에 대하여 규명해 봄으로써 ⓒ사건이라는 사회 구조체계에서의 다른 장과의 교환과 만남에 대해서 얘기해 보고자 한다.”고 적어 놓았다. 잉여세계와 사건의 규명과 복잡한 관계성을 따져서 생각해보면 그는 잉여법(剩餘法)에 관심을 가졌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영국의 공리학자 밀은 귀납적 인과관계인 잉여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현상으로부터 선행하는 귀납추리에 의해서 일정한 전건(前件)3의 결과로 알려진 부분을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현상은 남아 있는 전건의 원인(또는 결과)이다.”라고. 그러나 잉여법은 최종으로 남은 현상(a)과 그 원인(A)이 명확하고 단순하다면 정당한 귀납추리가 되지만, 일치법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과관계를 제외하고 나머지가 복잡한 관계에 묶여 있을 경우 ㉰정확한 원인(또는 결과)을 찾을 수 없는 난점을 안고 있다.4 그의 메모에서 발견되는 ⓐⓑⓒ를 잉여법의 ㉮㉯㉰와 비교해서 읽어보면 그가 말하는 잉여세계란 ‘나머지 현상’으로서 ‘복잡한 관계’에 묶인 ‘사건’이다.

3.
그런 복잡한 관계의 사건은 잉여법에서 이미 난점이라고 밝혔듯이 그것의 정확한 원인(또는 결과)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인데, 역설적으로 나현의 미학적 사건은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롭게 기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획의 얼개 구조는 서로 균형이 맞지 않는 상대적 대칭성을 이루고 있다. [잘 알려진 부분(과) / 나머지 현상], [모든 인과관계(를 제외한) / 나머지의 복잡계], [사회적 구조체계 / 난점]의 상대개념들을 살펴보라. 여기서 ‘나머지 현상’과 ‘나머지의 복잡계’, ‘난점’이 결코 ‘잘 알려진 부분’이나 ‘모든 인과관계’, ‘사회적 구조체계’와 균형을 이룰 수 없는 ‘상대적 잉여’에 해당한다. 그가 오랫동안 주목해온 것이 바로 이 상대적 잉여의 ‘잉여’다. 즉 그에게 잉여란 사전적 의미의 잉여가 아니라 세계의 역사 및 사회적 구조체계의 상대편에 존재하는(그가 구조 밖에 존재한다고 말했던) ‘나머지’로서의 잉여인 것이다. 그의 사유에서 첫 잉여의 목록은 개인전 <욕심(慾心)>(1999)에서 보여주었던 1999년의 시공간에 놓인 고향 나주의 풍경 <변화는 없다(羅州-누문)>과 <변화는 없다(羅州-향교)>, 편견과 선입견의 안경 <벗자>, 난지도의 이름 없는 식물들 <잡초>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간의 지층에서 과거와 현재가 오버랩 되는 ‘풍경의 차연(差延:차이들의 산출운동으로서)’을 제시하고 거대한 쓰레기더미에서 자란 ‘이름 없는 식물들’에 주목하고 있는데, 고향 나주의 누문과 향교의 풍경을 과거 사진과 현재 사진을 서로 맞붙여 병치시켜서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차연의 개념을 드러낸다. 그리고 사진 위에 물감 흘리기 드로잉과 함께 ‘流’(<누문>), ‘변화’(<향교>)를 붓글씨로 써 놓았다. 과거 사진의 풍경과 동일한 장소에서 촬영한 1999년의 사진 효과는 그가 사진위에 써 놓은 문자들과 동시에 ‘언어의 의미작용’이 발생하면서 연쇄적 해석 작용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흐르고[流], 변화한다는 의미의 사진 속 문자들과 작품 제목으로 제시한 ‘변화는 없다’가 충돌하면서 의미해석의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지연되어 버린다. 이런 개념적 문제의식의 철학적 지반은 데리다(JacquesDerrida, 1930~2004)로부터 비롯된 듯하다. 또 하나는 난지도의 잡초다. 페인팅 위에 작게 타이핑 문자를 오려 붙인 ‘난지도의 잡초’, ‘잡초도 자신이 잡초라고 생각할까’와 붓글씨로 크게 쓴 ‘根’이 있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난지도의 이름 없는 식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관점으로 볼 때는 잡초이지만 그들 자신은 자신들이 잡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관점이 정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작가노트에 밝히고 있다. 나주 풍경의 잉여적 문제의식이 과거와 현재의 중층적 시간성에 대한 의미해석의 가능성을 필연적으로 지연시키는 데에 있었다면, <잡초>에서는 ‘이름 없는 식물들’로서의 잉여와 그런 잉여적 존재들을 사유하는 탈인간적 관점에 있다. 또한, 그가 시커먼 선글라스 이미지로 그린 회화작품 <벗자>에 함축시킨 편견과 선입견도 그런 인중심적 시선에 대한 반성적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4.
플라톤(Platon)은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욕망의 과잉이라고 우려했다. 그에게 과잉은 결코 민주적일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청년은 청년답게, 노예는 노예답게 ‘주어진 정체성’을 넘지 않는 질서와 조화가 필요했다. 그런 플라톤의 사유를 뒤집은 이는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 )다. 그는 질서와 조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격 없는 자들의 지배, 각자에게 주어진 권리와 자격의 몫을 넘어서 자신들이 공동체의 전체라고 주장하는 인민들의 욕망을 민주주의의 본질로 파악했다.5 몫 없는 자들이 자신들의 몫을 주장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라는 것. 몫 없는 자, 혹은 이름 없는 존재들로서의 ‘잉여’는 이미 현대 한국사회 내에서도 다양한 사건들에 의해 드러난 바 있다. 나현이 <잡초>에서 인식한 ‘이름 없는 식물들’의 사유는 그런 몫 없는 자들의 사유와 통렬하게 이어진다. 흥미롭게도 1999년에 뒤이은 개인전 <해부도>(2001)에서 (비대칭적 상대성으로서의) 차연 개념과 몫 없는 자들에 대한 사유는 <마녀사냥>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좀 더 심화되어 등장하기도 했다. [미인 / 추녀 / 보통]의 개념들이 갖는 우리 사회 인식의 차이들과 변별성에 대한 탐색이 그것이다. 그는 설문조사 내용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작품 ‘마녀사냥’은 약 일천 명의 설문조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설문의 내용은 주로 설문자 개인이 인식하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하였다. 그리고 그 설문의 내용에서 대다수 여론은 또 다른 폭력을 잉태하여,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때로는 진실을 뒤엎기도 하다. 어쩌면 진실은 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

5.
자, 이쯤에서 나현의 프로젝트는 이미 그가 유학을 떠나기 전에 개념적 제로 포인트를 형성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이 일반적인 회화의 형식과 다소 허술하게 보이기도 하는 개념적 설치 작업의 경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는 하나, 그가 무엇을 보고자 했으며 어떤 이유로 그런 ‘봄’의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는지를. 2001년 이후 2003년부터 진행된 화이트 클라우드 미노우는 그런 맥락에서 그의 프로젝트를 앞과 뒤로 구분하면서 잇는 일종의 미학적 뇌들보(corpus callosum)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화이트 클라우드 미노우에 와서 그는 그가 주목한 것이 풍경이나 잡초나 안경 따위의 현상학적 주제나 오브제가 아니라 풍경과 잡초와 안경이 파생시키는 ‘사건’이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건들이 누군가의 ‘소외 정체성’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도.6 물론 그 정체성은 플라톤의 ‘주어진 정체성’7과 달리 잘 알려지지 않은 나머지 현상에 존재하고, 모든 인과관계를 제외한 곳에서의 복잡한 관계들이며, 또한 사회적 구조체계 밖에 존재한다는 난점도 도사리고 있지만 말이다. 내가 화이트 클라우드 미노우를 그의 미학적 뇌들보라고 한 이유는 화이트 클라우드 미노우의 문제의식이 현실이라는 세계구조의 의식으로부터 억압된 무의식이 활발하게 작동하면서 구조 밖의 ‘잉여세계’로 나아가는, 일종의 ‘지성의 대칭성’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8 나는 그가 화이트 클라우드 미노우를 구상하면서 ‘사건-역사적 사건들로서’, ‘시공간-공시적 구조로서’, ‘정체성-두 개의 장소들로부터’라는 세 개의 시선으로 제로 포인트를 설정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이때의 제로 포인트가 그의 모든 프로젝트를 단 한 곳의 점으로 줄 세우기 하는 단일적 구조는 아니다. 그렇다고 또한 그 구조의 제로 포인트가 완전히 다른 것들로 전화되어서 등장하는 개별적 점들로 구성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마치 사슴의 뿔이 좌뇌와 우뇌를 두 개의 뿌리로 두고 자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6.
두 개의 사슴뿔을 가진 사내, 나현. 만약 독자의 생각 속에서 사슴뿔을 가진 한 사내의 이미지가 그려졌다면 그것은 의식의 시지각(視知覺)이 형성시킨 창조적 현상학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슴뿔을 가진 사내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에 그 이미지는 또한 신화적 이미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인간이 이 현실에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그의 존재는 존재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 될 것이다. 자, 그가 우리에게 넌지시 이야기하려는 것도 이와 같다. 그의 이야기는 이 현실에 존재했던 실제의 사건들에서 시작된다. 화이트 클라우드 미노우는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영국의 옥스퍼드와 독일의 드레스덴을 어떻게 다른 도시로 남겨 놓았는가에 대해 의문하면서 시작한다. 운명처럼 남겨진 옥스퍼드와 철저하게 파괴된 드레스덴의 완전히 상반된 역사는 이 현실에 존재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러니까 너무나 잘 알려져서 더 이상 역사적 사실의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 없는 곳에 위치한다. 그런데 왜 두 도시는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했던 것일까? 이때 두 도시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개의 사슴뿔과 같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자란 신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때로 그 신화는 앞서 언급했던 창조적 현상학으로 치달아 가기도 한다. 역사적 사건이 미학적 사건으로 둔갑하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다! 사실 두 뿔의 뿌리는 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일 수 있다. 좌뇌와 우뇌에 뿌리내렸어도 뿌리들은 머리통 내부에서 서로 엮이면서 뿌리 군집을 만드니까 말이다. 역사적 사건이 신화적 서사로 환류되면서 그 서사의 힘이 강해질수록 뇌들보는 환하게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렇게 환한 빛에 의해 신화는 ‘상징의 몸’을 얻게 되는데, 그 몸의 상징이 나현의 작품들이다. 다시 말하면 사슴뿔의 신화적 서사의 ‘현실성’이 나현의 미학적 사건들인 것이다.

7.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신화적 현실성이 미학적 사건들로 드러나는 구조를 전부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카자와 신이치(なかざわしんいち, 1950~ )조차도 대칭성 인류학이라는 개념을 완성하기 위해 레비 스트로스의 신화론, 클라스트르의 국가론, 마르크스의 경제학비판, 바타유의 보편경제학, 라캉에 의한 무의식의 토폴로지론, 들뢰즈의 다양체론까지 헤집었던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9 하나의 일관된 사고를 위해 신이치가 추적하는 방식은 사유 개념의 나선형 줄기들이 사유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제로 포인트의 옹벽을 타고 월경하면서 맞은편의 다른 나선형 줄기들과 이어가는 데 있다. 그 과정에서 사유의 줄기와 줄기들이 서로 교차하고 부딪히고 심지어 연리지로 맞붙으면서 이종교배의 사건들과 차이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단지 왼쪽과 오른쪽에 위치한 단 두 개의 나선형 줄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서로 엮이는 과정에서 사건의 복잡성은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나현의 사건의 그물코도 그런 신이치의 대칭성 인류학과 많이 닮았다. 특히 그의 작품들은 화이트 클라우드 미노우 이후 방사형의 구조로 더 넓게 확장되면서 씨줄과 날줄의 그물코가 아주 많아졌다는 점이 특이하다. 한 점 뿌리에서 시작된 사건의 잉여 화살표가 다른 뿌리와 만나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것들의 관계 확장성은 다분히 카오스적인 셈이다. 신이치는 그의 책에서 대칭성의 무의식은 마음의 작용을 낳는 자연이며, 형이상학적 세계를 다시 ‘자연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현의 신화적 서사의 현실성과 신이치의 형이상학적 세계의 자연화, 무엇이 다른가! 바람을 타고 이어가는 카오스적 나비효과의 불연속적 연속성 같은 바로 그 부분이 역사적 실체 규명으로서의 ‘잉여세계’를 찾아가는 나현의 통로이고 그 통로에서 마주치는 빛이다.

8.
2006년에 시작된 실종프로젝트는 그가 미학적 개념의 제로 포인트를 사유한 뒤에 수행한 첫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10 세계 구조 밖에 대한 잉여세계의 사유에서 ‘실종’이라는 코드는 전쟁과 역사학, 글로벌 시스템의 대응전략에 따른 세계 인류학으로서의 민족학, 그리고 전쟁의 영웅 신화 속에서 살아 돌아 온자와 사라진 자의 전설을 ‘미학’이라는 구조체계와 연결시킬 수 있는 강력한 ‘현실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나현의 촉수는 1950년에서 53년까지 계속된 6․25한국전쟁 당시의 프랑스군 실종사건에 가 닿았다. 그가 조사한 바처럼 한국이 파악하고 있는 프랑스군 실종자가 18명이고, 프랑스 정부는 7명으로 알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프랑스 육군 사료 기관이 밝힌 것은 12명이라는 실종자 수와 그들의 명단과 그 과정에서 획득된 문서들과 사진 자료, 그리고 영상을 비롯한 다양한 아카이브는 그의 미학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미학적 개념들과 이어져서 나현 미학의 문장이 되는 잉여세계 역사학일 뿐이다. 잉여세계 역사학. 그렇다! 그것은 정사(正史)도 비사(非史)도 아닌, 몫 없는, 이름 없는 자들로서의 소외 정체성을 발굴해서 오직 잉여세계의 역사학에 정위치 시키는 미학적 전략이다. 그러니까 역사학이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서 ‘사실로서의 역사(사건 자체)’와 ‘기록으로서의 역사(사건의 기술)’을 포괄하되 인류학적 방법론으로 나아가는 학문이라면, 나현식 잉여세계 역사학은 사실이나 기록의 오류 사이를 떠도는 ‘잉여주체’들의 흔적을 희미하게 재배치함으로써 역사학의 상대편에서 역사학의 그림자 되기를 자청하는 예술학이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실종자들의 명단을 구체화해나갔는지를 밝히는 것은 비평의 문장이 될 수 없다. 지금 이 문장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그의 잉여세계 역사학이 어떻게 미학으로 둔갑하고 또 그렇게 둔갑한 미학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실종프로젝트에서 내가 가장 유의 깊게 주목했던 작업은 살아서 돌아간 병사들의 인터뷰였다. 인터뷰이들은 하나같이 진지하게 한국전을 기억해 냈고 그때 당시의 상황을 명료하게 묘사했다. 그런데 반복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살피다 보면 무언가 이야기의 핀트가 어긋나면서 각자 자신이 만들어 놓은 기억의 우물에 빠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전쟁이라는 참혹하고 공포스러운 강력한 사건이 만들어 놓은 우물에서 그들의 ‘현존’은 부재했다. 질문지를 작성한 작가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에서 ‘실종’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굳이 말을 바꿔서 표현하자면 살아남은 그들 또한 잉여주체임이 틀림없단 이야기다. 그는 2008년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의 <젊은 모색전>에 12명의 실종자 명단을 흐릿하게(텍스트를 읽어 볼 수 없을 만큼의 흐리기) 슬쩍 뒤흔들어서 전시장에 걸었다. 100호 사이즈보다 큰 디지털 프린트였어도 그들의 실체는 알 수 없었다. 사실 그 상태는 심한 난시를 겪는 시각장애자의 시선과 다르지 않았다. 주지하듯 난시는 하나가 여럿으로 분산되거나 아예 초점을 맞출 수 없어서 흐릿하게 지워지는 현상을 보여준다.

9.
화이트 클라우드 미노우에서 사건의 확장선을 타는 개념들로 ‘폭력’, ‘정체성’, ‘희생’, ‘방생-물(강)’, ‘개입’, ‘역사책’을 더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폭력에 대해 의심하는 첫 대목은 왜 사회는 가시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정체성을 규명하려 하는 가에 대한 부분이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아마도 근대국가의 형성 이후 강력한 국민국가 이데올로기를 겪어야 했던 우리 사회의 교육제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화이트 클라우드 미노우에서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나 <나현 보고서-민족에 관하여>(2008-2011)는 그 문제만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간 한편의 예술인류학이다. 그는 우리 민족의 시원이라 불리는 바이칼에서 전남 신안의 증도까지 종단 선을 그리며 ‘민족이란 무엇인가’의 화두를 팽팽하게 당긴다. 그런 다음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퉁쳐서 공시적 혼돈의 화살 하나를 지금 여기의 대한민국을 향해 날린다. 그 화살이 날아온 시간들의 흔적들에서 그가 채집한 온갖 오브제와 이미지들은 민족의 동일성이 아닌 동아시아의 한 인종에게 습합된 여러 인종의 피와 문화와 종교와 신화였다. 때때로 그런 습합의 원인들은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이산과 이주와 유목의 결과였다. 역사학은 그 모든 결과의 한 원인이었을 ‘공시적 혼돈의 화살’ 하나를 규명할 힘이 없을 터이다. 나현의 보고서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 자료들은 논리적 정합성이나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어떤 일관성의 알고리즘을 촘촘하게 형성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이미지를 잇는 방식은 상상력이고, 오브제와 오브제를 잇는 언어는 샤먼의 말이며, 여기와 저기의 상징은 지극히 추상적이니 그 알고리즘의 체계를 증명하는 것은 미학으로 밖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나현 보고서-민족에 관하여>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Arbol, Cuba>인데, 그곳에서 그가 만난 한인 1세대, 2세대, 3세대는 사실 증명 가능한 알고리즘의 초상 이미지다. 그러나 2를 제외한 채 1과 3을 배치할 경우 그들의 알고리즘은 여지없이 붕괴되어 버린다. 쿠바의 경우 그들 모두는 ‘소외 정체성’을 겪고 있는 잉여세계의 주체들이다. 나현은 쿠바 한인 이민사의 역사학에 구멍을 뚫고 설탕을 채운 뒤 쿠바의 거리를 돌며 뿌리는 퍼포먼스를 통해 잉여주체들의 희생을 위무한다.

10.
‘아무것도 아닐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것’의 ‘아무’를 강조함으로써 아무의 대상이 되는 그 무엇을 강력하게 긍정하는 형태의 언어다. 나현은 그동안 역사적 사건들의 어떤 실체를 쫓아가면서 역사학이 상실했거나 사건 내부에서 스스로 증발된 ‘그 무엇’을 강력하게 긍정하는 미학적 프로젝트를 수행해 왔다. 그에게는 ‘그 무엇’의 긍정이 늘 ‘아무것’으로 존재했던 것들이어서 그 자신이 잉여세계의 역사학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위의 글에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던 <風景그리기 프로젝트>(2005-2007)나 <로렐라이의 노래>(2010-2013), 그리고 <바벨탑>(2012-)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물 드로잉’의 작품들이 ‘그 무엇’의 이미지를 긍정의 선으로 그려서 ‘아무것’의 흔적으로 남는 것이라면, ‘로렐라이의 노래’는 ‘그 무엇’과 ‘아무것’의 실체적 진실을 소환하기 위한 협상 테이블이었다. 그가 단순히 기둥 박기의 퍼포먼스로 프로젝트의 결과를 남겼다면 지성의 대칭적 사유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위의 두 프로젝트에서 먼 역사가 아니라 21세기 한국 현대사의 사건들을 연결함으로써 잉여세계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도 발생하는 동시대적 ‘사건’이고 ‘소외’임을 밝히고 있다. 자, 그런데 그의 미학적 사유는 다시 어떤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는 듯하다. 그 작업은 현재 진행 중인 <바벨탑>이다. 그는 이 프로젝트에서 거대한 우물 하나를 등장시킨다. 전시장 내에서 우물의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쉽지 않다. 천장에 매달린 거울을 통해 우물 내부의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바벨탑 프로젝트는 독일 베를린 악마의 산과 서울의 난지도를 바벨탑의 유적이라고 생각하는 작가의 가상 시나리오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이 거짓말의 진실을 위해 그가 추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자료들을 아카이빙하고 분석하고 늘어놓는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잔해와 쓰레기를 쌓아 올린 120미터 가량의 악마의 산과 1970년대 이후 서울의 쓰레기가 산더미로 남은 난지도의 서사를 이렇게 저렇게 이어 붙인다고 해서 바벨탑의 신화와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근거는 참으로 조악하기 짝이 없다. 20세기 독일과 한국의 쓰레기더미와 고대 신화의 바벨탑이 형성하는 시공간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그의 미학적 상상을 가장 크게 증폭시켜야만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우물이라니 왜? 우물은 아무것들의 신화가 발생하는 신화지이자, 아무것이 그 무엇으로 혹은 그 무엇이 아무것으로 변신하는 변신의 통로이며, 빛의 무리들이 들고나는 은하수가 아닌가! 그런 맥락에서 우물이야말로 세계 구조 내의 현실계와 구조 밖의 잉여세계를 잇는 이정표이자 대칭성 미학의 뇌들보일 수 있다. 지금 그는 그 이정표의 통로를 열어서 우리 모두에게 ‘바벨탑’의 잉여세계를 제시하려 하는 것이다. 바벨탑이 열린다는 것은 각각의 제로 포인트가 다시 거대한 제로 포인트와 접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가장 근원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에 ‘아무것’의 ‘아무’가 ‘이것’이 되는 형이상학적 세계의 자연화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아무것이다!’의 말, 문장, 그 미학적 선언, 그리고 그것의 수 만 가지 복수 언어들의 색채들.

 


 

 1. 『나현 보고서-민족에 관하여 2008-2012』 176쪽에서 재인용. 이 책은 작가 나현이 2012년에 자신의 프로젝트를 정리해 만든 자료집이다. 그리고 이 글의 제목 ‘이것이 아무것이다’는 ‘아무것도 아닐 거야’를 변용해서 해석한 것인데, ‘아무것도 아닐 거야’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 Eric Arthur Blair. 1903~1950)의 소설 『1984』(1949)에서 발췌 인용한 것이다. 나현은 자신의 책 176쪽에서 조지 오웰의 글을 인용하면서 ‘아무것도 아닐 거야’라는 첫 어구를 강조하고 있다. 나는 나현의 작품론을 구상하면서 이 어구가 ‘나현론’의 문제의식을 잘 드러내는 어구가 아닐까 생각했다. 왜?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치부해 온 것들, 그러니까 그 ‘치부의 것들’로 개입해 들어가는 방식을 통해 나현은 우리에게는 결코 익숙하지 않은 역사학의 광야에서 미학적 생성지를 구축해 왔으니까.
2. 나현, <WHITE CLOUD MINNOW-Another hostory Project 2003-2005>, 프로젝트 자료집, 4쪽.
3. 전건(前件)의 뜻은 ‘앞에서 언급된 조항이나 사건’이다. 논리적 개념으로는 ‘가언적 판에서 그 조건, 이유 따위를 표시하는 부분’을 말한다.
4. 강영계, 『논리정석』 (답게. 2003), 299쪽.
5. 인터뷰어 전성현, 인터뷰이 정정훈,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읽기” 강사 인터뷰 1탄,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xe/Nzine/2083717
6. 소외 정체성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떠올린 개념은 익히 잘 알려졌듯이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소외효과’(疏外效果, alienation effect)다. 연극 무대에서와 같이 사회로부터 ‘낯설게 하기’, ‘감정적 교류의 방지’를 잉여세계의 주체들에서 읽었기 때문이었다. 나현의 작품에 등장하는 잉여주체들이 자발적이든 타발적이든 실종적 소외자로서의 정체성은 명확한 것이니까.
7. 플라톤의 ‘주어진 정체성’은 혈통적이고 세습적인 사회적 계급 성향을 다분히 내포한 개념이다. 플라톤은 주어진 정체성으로서의 사회적 계급이 ‘저항 없이’ 조화를 이뤄야 민주주의가 안정화 된다고 보았다.
8. ‘지성의 대칭성’이라는 말은 나카자와 신이치의 ‘대칭성’ 개념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생각해 낸 개념이다. 의식에 관한 것이든 무의식에 관한 것이든 우리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체계 내에서 사건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신이치의 대칭성은 오히려 그런 지식의 체계를 부정하거나 뒤집어서 사유함으로서 애초의 한 지식이 가지고 있었던 부정적, 한계적 상황을 그 상대편에 위치시킨다. 나는 그런 신이치의 사유를 ‘지성의 대칭성’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현의 작업과정도 그런 일종의 뒤집기 방식을 통해 지성의 대칭성을 보여주는 사유를 종종 보여준다.
9. 나카자와 신이치, 『대칭성 인류학-무의식에서 발견하는 대안적 지성』(동아시아, 2005)를 참조할 것.
10. 나현은 프로젝트의 종료시점을 2009년으로 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2009년 2월에 프로젝트 자료집을 제작했다. 자료집 표지에는 ‘Missing 2006-2009’이라 했고 속표지에는 ‘失踪 MISSING Project 2006-2009’라 했으며, 크레디트에는 ‘실종 프로젝트 Missing Project 2006-2009’로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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