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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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CV
2014
‘Ready-known’, 스페이스 코튼씨드, 싱가포르
2012
‘Object, Seeing’, 서울, 갤러리시몬
2011
김신일전, 김종영미술관, 서울, 한국
2010
‘Into’, 리카르도크레스피갤러리, 밀라노, 이탈리아
2007
리카르도크레스피갤러리, 밀라노, 이탈리아
쿤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 베를린, 독일
2004
인사미술공간-문화예술진흥원, 서울, 한국
<주요 단체전>
2014
‘올해의 작가상 2014′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
2013
‘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소마미술관, 서울 한국
2011
‘미디어 스케이프, 백남준의 걸음으로’, 백남준 아트센터, 경기도, 한국
2009
‘Surveillance’, 어퍼메이션아트, 뉴욕, 미국
2008
‘제3회 세비야비엔날레’, 세비야, 스페인
‘제5회 미디어시티서울-인터네셔널 미디어아트비엔날레’,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에르메스미술상’, 에르메스 아뜰리에, 서울, 한국
‘프라하 현대미술제-tina-b2007’, 프라하, 체코
2006
‘젊은모색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한국
‘싱가폴 비엔날레 2006’, 싱가폴
‘Paulau de la Virreina-La Capella, berlintendenzen’, 바르셀로나, 스페인
‘Analog Animation’, 더 드로잉센터, 뉴욕, 미국
2005
‘The Gift: Building a Collection for the Queens Museum’, 퀸즈뮤지엄, 뉴욕, 미국
‘7th The Altoids Curiously Strong Collection’, 뉴뮤지엄, 뉴욕, 미국
‘포틀랜드 비엔날레 2005’, 포틀랜드뮤지엄, 포틀랜드, 미국
Critic 1
응시의 지문
최태만(미술평론가)
마음의 눈을 뜨라.
“마음이 없으면 보이지도 않는다.” 이것은 김신일이 전시장 한쪽에 세운 ‘말씀의 책’에 기록된 한 구절이다. 물론 이 문구의 전거(典據)는 『대학』의 ‘정심장(正心章)’에 나오는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心不在焉 視而不見)’로 거슬러 올라가며, 수신(修身)을 위해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의 책’에는 이러한 거룩한 가르침만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잘 가지면 죽어도 옳은 귀신이 된다’, ‘마음이 바르고 고와야 옷깃이 바로 선다’, ‘마음처럼 간사한 건 없다’ 등의 문구는 마음과 관련하여 옛날부터 내려오던 온갖 속담이나 격언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실 이 ‘마음을 기록한 책’은 작가가 책을 읽으며 문득 가졌던 생각, 즉 책을 전시장으로 옮겨놓고 싶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구조물은 책에 인쇄된 낱말들을 오려서 세워놓은 것인데 문장들이 세로로 세워져 있고, 한 면은 비어있기 때문에 반대편에서는 문장을 읽을 수 없지만 고개를 약간 돌리면 그 뒤에 감춰진 글자들을 읽을 수 있는 형식으로 제작된 것이다. 재질 또한 종이와 유사한 플라스틱 매트를 사용하였으므로 비록 벽에 매달아놓은 것이긴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뉘어진 책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최근 김신일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사전에서는 마음에 대해 ‘의식·감정·생각 따위의 정신적인 작용의 총체’라고 정의하고 있다. 마음은 인간의 실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들 즉, 생물학적 안전, 개인으로서의 자존감,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아의식 등과도 연관되지만 충동·욕구·욕망 등과 같은 심리적 활동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호기심이나 관심처럼 어떤 대상에 대한 끌림이 일어나는 것도 마음의 영역이고, 감각·지각·감정 등 세계와 소통하기 위한 신체적 반응도 마음이 활동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이 가볍다’, ‘마음이 멀어진다’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눈으로 볼 수 없고, 측량할 수도 없는 마음이 마치 질량을 지닌 것이거나 공간적으로 지각가능한 대상인 것처럼 표현하는가 하면 ‘가슴이 미어진다’처럼 신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정서적 반응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생물진화론적 관점으로 보자면 마음은 진화의 산물일 수 있다. 또 신경과학에서는 마음을 두뇌의 신경체계가 수행하는 화학작용의 결과로 본다. 호르몬의 조절이나 약물복용 등을 통해 감정의 항상성은 물론 신체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은 심혼(心魂)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내부에서 생산된 분비물이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르네상스 시대에 풍미했던 신플라톤주의에 의해 고조된 ‘4체질론’이 점액질이나 담즙질과 같은 체액의 분비를 근거로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도상해석학자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는 작슬(Fritz Saxl)과 공동으로 저술한 『멜랑코리아Ⅰ』에서 뒤러(Albrecht Dürer)가 1514년에 제작한 동판화 <멜랑코리아Ⅰ>을 해석하면서 한 손은 턱을 괴고 다른 손에는 콤파스를 쥐고 앉아있는 천사의 이미지를 토성좌에서 태어났으며 흑담즙질의 과다분비로 우울질을 타고난 ‘멜랑코리한 광기’의 소유자인 예술가 자신의 정신적 자화상이라고 결론지었다. 한편으로 ‘심신동일론’은 마음이 거주하는 장소가 신체이기 때문에 마음과 두뇌는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일컫는 것이라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을 질량을 지닌 물질처럼 표현할 수는 있지만 물질의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 마음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김신일이 마음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기보다 마음이란 문자이고 언어란 사실이다. 우리는 마음이란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마음이란 기록된 문자를 읽으면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막상 기록된 문자로서 ‘마음’에 대해 설명하거나 논증하려면 실제 이상의 많은 단어를 동원해야 하거나 생각을 가다듬어야 한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현상과 언어 사이의 균열이나 불일치가 바로 김신일이 문자의 구조를 만들고 있는 이유이다.
이 전시에서 그는 전시장 가운데 이념·믿음·마음의 기둥을 세울 예정이다. 기둥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플라스틱 재질의 폴리카보네이트를 잘라 조립한 글자가 서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결국 전시장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음과 모음이 결합된 세 개의 한글 단어인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자들은 삼각형이나 사각형, 더러는 오각형의 입체들이 모여 구성된 것이다. 내부는 복잡하지만 그것이 모여 하나의 글자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학적 기본원리를 원용하여 김신일의 문자구조체가 ‘마음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을 일깨우는 일종의 표지석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개의 문자구조물은 독립적으로 서있기도 하지만 다른 쪽 벽으로부터 투사된 영상을 통과시키거나 혹은 흡수하는 스크린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글자 내부의 성긴 구조에 의해 이 세 구조체를 차례로 통과한 영상은 그 그림자를 맞은편 벽에 투사시키는데 그 형상이 숲처럼 조밀하여 모서리에 설치한 거미줄처럼 촘촘한 입체구조물과 상응하며 복잡성을 강화하고 있다. 말하자면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마음의 상태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거미줄 구조물과 글자의 구조가 겹쳐지면서 만들어놓은 복잡한 구조인 것이다. 이 세 글자 중에서 마음은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마음이 있어야 믿음이 형성되고, 사회적 마음인 이념도 작동한다. 역으로 이념이나 믿음도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이 관계는 비선형적일 수 있다. 즉 우리의 기억이 시간축의 흐름에 따라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거나 현재로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직선적인 것이라기보다 중첩되거나 때로는 여러 가지 사건의 인상이 한 지점에 공존하거나 또는 붕괴된 다리처럼 두 지점을 이어준 흔적을 지니고 있지만 단절된 상태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김신일의 작품을 보면 이런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가운데 세워진 세 개의 문자는 이미지이자 그것을 투영하는 스크린이며, 그 반대편에 투사, 곧 재현되었지만 해독할 수 없는 글자의 파편들이 맺혀 있다. 프로젝터의 전원을 차단할 경우 사라져버릴 이 투사된 영상은 글자들을 구성하는 뼈대이지만 우리의 시선만으로는 그것을 지각할 수 없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구조물은 이 투사된 파편들이 글자의 내부임을 지각할 수 없도록 시선을 교란시킨다. 그래서 좁은 복도를 지나 내부로 들어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이 거미줄 구조물을 통해 내부를 흘깃 볼 수는 있지만 그 속에 세 개의 문자가 버티고 서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거미줄보다 조밀한 틈 사이로 들여다본 구조물은 미니멀아트의 단순입방체를 떠올리게 만든다. 바야흐로 내부를 향해 열려있는 복도의 막다른 지점에는 세 개의 작은 입체물이 각각 장대처럼 높은 지지대 위에 놓여있고 조금씩 흔들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진동은 떨리는 마음에 대한 은유일까. 아니면 마음의 떨림은 우리가 살아있음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한 것일까. 또 거울을 동원하여 실내의 풍경을 작품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 단순하면서 개념적인 구조체와 영상으로 구성된 이 작품들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왜 이토록 언어, 즉 문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밝혀봐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의 작품은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존재와 부재, 시선과 응시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지금까지 발표해왔던 작품을 중심으로 그의 의도와 방법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에서
김신일은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그러나 미국으로 유학을 간 후 구체적인 물질을 재료로 사용하고 덩어리와 볼륨을 지닌 전통적인 장르로서의 조각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입체보다 영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이른바 압인(embossing)드로잉이었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인 2004년 3월 인사미술공간에서 가진 첫 번째 개인전에서 발표한 <보이지 않는 명작>은 압인드로잉이란 새로운 방법을 활용해 존재와 부재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도록 유도했을 뿐만 아니라 김신일이란 젊은 작가를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은 미술관에서 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관객을 촬영한 영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벽에 걸려있어야 할 작품을 지워버렸기 때문에 사진 속에서 관객들은 비어있는 벽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진처럼 세 개의 장면을 연결한 스크린에는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관객들의 모습을 압인드로잉으로 윤곽만 표현했기 때문에 익명성이 두드러졌다. 당연히 미술관을 방문한 사람들의 익명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람들의 외형만 딴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으나, 정작 그가 의도한 것은 익명성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관람행위 자체였다. 그는 미술관을 들를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명작 앞에서 어떤 패턴의 행동을 보여주는지 관찰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그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과연 명작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래서 드로잉 속에서 벽에 걸린 작품은 지워버리고 사람들만 그린 것이었다.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은 드로잉 속에 재현된 작품이 아니라 텅 빈 공간에서 무엇인가 유심히 관찰하거나 찾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이었다. 이 작품은 우리가 미술관을 찾는 이유, 작품을 바라보면서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란 우리의 믿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 보이는 것만이 진실일까 등등 여러 가지에 대한 생각을 유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흰색 종이에 끝이 뾰족한 도구로 그린 압인드로잉은 빛의 양이나 방향에 따라 그 형태를 드러내기 때문에 아주 섬세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명작>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일주하우스가 신진작가 릴레이전으로 개최했던 ‘미디어 레이더스(Media Raiders)’의 작가로 선정돼 2005년에 발표한 <생각하는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외형만을 압인드로잉으로 제작한 이 애니메이션은 로댕의 조각이 놓인 좌대와 같은 크기와 높이로 만든 받침대 위에 스크린을 올려놓은 것이었다. 우리는 스크린에 비친 그 드로잉에서 생각하는 사람의 겉모습만 보지만 그것을 통해 조각이란 무엇인가 혹은 명작이란 무엇인가란 작가의 질문과 만나게 된다. 실제로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란 명작 자체가 아니라 감탄과 경외심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명작의 보물창고이자 무덤이기도 한 미술관에서 열심히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드로잉한 <보이지 않는 명작>이 이러한 관심의 출발점이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어떤 사람은 작품 가까이로 다가가 그 세부를 유심히 관찰하는가 하면 작품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팔짱을 끼고 자신들의 감상소감을 소곤소곤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으나 정작 화면에서 작품은 제거되고 없다. 미술관에서 관람하는 사람을 촬영한 영상에서도 벽에 걸린 작품들을 지워버림으로써 텅 빈 벽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람만이 보일 뿐이다. 카노비츠(Howard Kanovitz)는 1967년에 벽에서 작품이 제거된 미술관에 모여 작품 감상보다 사교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콜라주한 <개막식>을 발표한 바 있다. 그의 작품에서 미술관은 고급사교장이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의 고상한 취미를 뽐내고 싶어 하는 속물근성을 지닌 인사들이다. 그러나 김신일은 <보이지 않는 명작>을 통해 전시개막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급스런 사교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과연 명작이란 무엇일까란 질문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벽이 텅 빈 미술관에서 각자 관람에 열중하고 있는 관객들의 사진과 함께 이 관객들의 윤곽을 압인드로잉으로 따낸, 따라서 종이에 남은 철필의 흔적 외에는 텅 비어있는 드로잉에 움직임을 부여한 애니메이션이 상영되는 세 개의 스크린이 걸린 전시장은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존재와 부재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즈음 그가 썼던 작업노트는 그의 의도와 방법을 이해함에 있어서 하나의 길을 제시할 것이므로 이를 인용해 보자.
¡°나에게 비중 있는 작업의 동기는 미술사의 이론적인 발전단계 상에서 한계점을 인식하고 이를 동양사상의 하나인 공으로 극복하고자 함과 동시에 인간의 여러 경향 중 하나인 ¡®삶에서 균형을 찾고자 함¡¯을 작품을 통해 숙고하고자 함에 있다. 나의 이러한 관심사는 색을 사용하지 않고 종이에 손으로 선을 압인하여 드로잉을 제작하는 방식을 통하여 표현된다. 종이에 압인되어진 선은 빛이 그 종이에 비추어지는 방향에 따라 가시성과 비가시성을 동시에 띄게 된다. 나의 비디오작품은 이렇게 종이에 선을 압인하여 제작한 드로잉들을 1초당 30장씩 애니메이트시켜 동영상화한 것이다. 비디오를 구성하는 각각의 프레임들을 압인드로잉으로 제작한 후 이 드로잉들이 다시 비디오의 프레임 역할을 하여 재해석된 비디오로 돌아간다. 이러한 비디오 제작방식을 통하여 이차원, 삼차원, 사차원, 오차원의 특성들-회화, 조각, 비디오, 빛-을 조합하여 다른 형태를 만들어내려 시도한다. 이는 또한 사물을 존재와 부재의 양면성을 동시에 포괄하는 또 다른 어떤 것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이며, 불교사상과 중용에서 관계를 찾을 수 있다. 즉, 내가 생각하는 공과 색의 교차점을 작품으로 시각화하는 과정이다.
나의 작업 개념은 평범한 일상의 행위가 어떤 존재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관계가 형성되고 그 전과 변화된 의미를 갖게 되는 현상을 시각화함으로서 작품으로 시각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사물의 관계, 그리고 나 자신과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응시한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김신일이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하는 작가로 선정돼 일 년간 베를린에 있는 베타니엔(Kunstlerhaus Bethanien)에 레지던스 작가로 다녀온 후 아르코미술관에서 가진 귀국전시를 통해 발표한 작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라파엘로의 <예수의 승천>을 모티브로 제작한 영상설치였다. 베타니엔에 입주해 있는 동안 여러 나라에서 온 8명의 동료 입주작가들에게 <예수의 승천>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같은 포즈를 취하게 한 후 촬영한 영상의 스틸을 압인드로잉으로 재현하여 다시 동영상으로 만들고 그것을 8개의 스크린에 투사한 <예수의 승천>에서도 원작의 색채나 세부는 사라지고 인물의 윤곽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비워내기 혹은 지우기는 그가 지금 읽고 있던 『장자』에서 말하는 ‘무위자연’과도 연관이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불교의 공사상과도 깊은 연관을 지닌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불교의 공(Íö)과 중도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공이란 말 그대로 ¡®절대적 없음¡¯일 수 있지만, ¡º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말하고 있듯 공이 즉 색이고, 색이 곧 공일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내 작품에서 색채와 세부묘사를 지워버린 것도 공사상에 대한 나의 관심과 관계가 있다. 압인드로잉은 선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그 선은 종이에 누른 흔적일 뿐이기 때문에 사실은 선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압인된 자국을 선이라고 말한다면 선일 수 있고 그냥 흔적일 수도 있다. 있으면서 없는 상태의 공존,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압인드로잉을 공사상과 연결시키고 싶었다. 사실 압인드로잉은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지만 결과는 아주 미세한 선들로 나타나기 때문에 무위(ÙíêÓ)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의 이러한 말은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철학으로서 불교에 대한 관심으로 들렸다. 그래서 그가 어떤 특별한 동기로 불교사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궁금했다. 그는 대학에 다닐 때부터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고 했다. 당시 그는 교양과목의 하나로 철학을 수강했는데 강의내용이 서양철학사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것과 다른 철학에 대한 궁금증을 가졌고, 불교사상 책을 읽으면서 공과 중용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교철학과 노장사상은 조각을 전공하면서도 그가 압인드로잉을 할 수 있었던 철학적 배경이기도 했다. 특히 미국의 대학원에서 미디어아트를 전공하면서 비디오가 가지지 못한 물성을 표현하기 위해 드로잉이 적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비디오는 비물질적인 시간예술이지만 현대사회는 미디어로 넘쳐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지가 과잉된 사회이기 때문에 그것에 함몰되지 않는 영상작업을 하는 것이 그의 과제이기도 했다. 현대사회는 과잉된 미디어에 포위당해 있기 때문에 생각의 여유는 그만큼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감각적인 색채와 자극적인 텍스트, 혼란스러울 정도의 많은 정보로 무장한 핫미디어(hot media)를 최소화하면서 생각의 여유를 제공할 수 있는 쿨 미디어(cool media)로 전환하고자 한 것이 압인드로잉으로서 색채가 배제된 흰색 바탕에 최소한의 형태와 움직임만을 표현하여 동영상으로 제작했다. 결과적으로 사진과 압인드로잉에 기반을 둔 동영상의 대비는 관람행위에 대한 작가의 관찰이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과연 진실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한 작가의 입장이 잘 드러나고 있는 작품으로 <In Between>을 들 수 있다. 그는 미술관에서 열심히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한 관객의 모습을 촬영했다. 그러나 그 관객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벽에 걸려있는 작품이 아니라 싱글채널 비디오로 촬영된 또 다른 관객의 진지한 관람행위이다. 작품이 있어야 할 벽에 작가가 촬영한 비디오작품을 설치해 놓음으로써 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사람을 프레임 바깥의 관객이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서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긴장이 발생한다. 이런 점은 푸코(Michel Foucault)가 『말과 사물』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대한 해석을 떠올리게 만든다. 화가의 아틀리에로 찾아온 귀여운 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이 작품에는 여러 개의 시선이 교차하고 있다. 화면 앞에 선 우리는 먼저 공주와 그를 따라온 시종들을 볼 수 있지만 화면의 왼편 가장자리 캔버스 뒤에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화가의 시선과 마주치게 된다. 우리가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면 속의 벨라스케스에 의해 우리는 보이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화면 속에는 우리를 향하고 있는 또 다른 시선이 있다. 바로 거울 속에 비친 왕과 왕비의 눈이다. 그래서 <시녀들>에는 여러 시선이 교차하면서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관계를 교란시키고 있다.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역시 이런 점을 주목하여 방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궁금한 한 사람이 열쇠구멍을 통해 방안을 훔쳐보고 있을 때 복도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자신이 전면적으로 노출되고 있음을, 즉 자신이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에 발생하는 교란은 주체의 분열 혹은 소멸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사태는 또한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거울 속의 나의 눈을 바라볼 수는 있지만 나는 내 몸의 일부인 눈을 볼 수 없다는 말을 떠올리게도 만든다. <In Between>에서 작품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보는 주체가 아니라 보이는 대상이다. <보이지 않는 명작>에서 벽에 마땅히 걸려있어야 할 작품들은 사라지고 텅 빈 벽면만 주시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감각의 주체가 아니라 우리들 앞에 전면적으로 노출된 대상일 뿐이다. 압인드로잉으로 윤곽만 재현된 관객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 또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또한 관람되는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김신일의 작품에서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은 예리하게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중첩되면서 보는 것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겹쳐지고 지워진 문자와 응시의 지문들
필자가 김신일의 작품에 대해 본격적으로 대화한 것은 그가 장충체육관을 철거하면서 나온 트러스 골조 등의 잔해를 이용한 기념조형물 제작을 위해 임시로 금천예술공장에 입주하여 한창 작업에 전념하고 있을 때였다. 건축된 지 오래된 까닭에 안전에 문제가 있는 장충체육관을 복합문화체육공간으로 재건축하기로 결정한 서울시는 이 체육관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기억하기 위해 철거한 돔의 건축부재의 일부를 폐기하지 않고 예술가에게 의뢰하여 상징조형물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공모를 통해 김신일이 제출한 안을 선정했다. 김신일은 철조 트러스를 받침대로 하고 그 위에 ‘역사(HISTORY)’란 영문 철자를 겹쳐놓은 구조물을 제작했다. 그러나 마치 하나의 거푸집에서 찍어낸 것처럼 역사란 단어를 구성하는 철자들이 같은 크기로 겹쳐져 있기 때문에 유심하게 보지 않으면 해독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제일 앞의 철자가 뒤에 붙어있는 철자를 가리고 있으나 그 윤곽을 유심하게 보면 다음 철자를 읽을 수 있는 구조는 ‘지워진 양피지(palimpseste)’처럼 현전하는 것이 과거를 드러내는 전거처럼 비쳐지기도 했다.
압인드로잉을 통해 존재와 부재, 공과 중용을 표현하고자 했던 김신일이 겹쳐진 텍스트로 작업의 방향을 바꾸는 대표적인 예로 2008년 미국 스맥멜론갤러리에서 가진 개인전에서 발표한 작품을 들 수 있다. <해독된 사랑(decoded love)>이란 제목으로 열린 이 전시에서 그는 폴리카보네이트로 제작한 입체물 위에 글자를 겹쳐 새긴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에서 그의 관심이 압인드로잉으로 명작 속의 인물이나 그것을 관람하고 있는 사람들의 윤곽을 재현하는 것으로부터 텍스트를 드로잉하는 것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없이 겹쳐진 문자들은 ‘해독’하기 힘든 흔적으로 남아있지만 그는 이 작품들을 ‘해독된 사랑을 위해 벽에 적은 텍스트드로잉’이라고 명명했다. 이 작품들은 무성영화이면서 최초의 천연색영화이기도 했던 <바다의 통행료(The Toll of the Sea)>란 영화를 보면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이었다. 벽에 새긴 텍스트는 거의 해독불가능한 것이지만 예의주시하면 또 어느 정도 의미를 파악할 수는 있다. 읽을 수 없는 텍스트는 소통의 단절과 부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텍스트드로잉은 텍스트를 해체한 것이 아니라 서로 겹쳐져 있기 때문에 의미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지문처럼 벽면에 흔적을 남겨두고 있기 때문에 해독을 예비하는 상태에 놓여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참고한 영화에서 바다에 통행료를 낸다는 내용은 은유적이다. 주인공이 지불한 통행료는 바로 그의 자식에게 보내는 사랑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직접적으로 지시하거나 설명하지 않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랑은 발화되는 순간 규정된다. 그것을 뛰어넘는 것, 즉 문자가 지시하는 것을 넘어서기 위해 그는 텍스트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김신일은 드로잉도 언어라고 믿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각에 호소하는 드로잉에서도 언어처럼 전달과 소통은 중요하다. 그러나 문자가 완전하게 의미를 전달한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는 문자조각을 통해 문자가 지닌 직접성과 그것이 야기하는 오해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자드로잉에 대해 작가는 ‘분석적 작업을 통한 형상적 환원’라고 스스로 규정한 바 있다. 해석이 가미되지 않은 텍스트를 구조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읽으려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텍스트를 읽으려는 우리로 향해 읽지 말고 보라고 권유하고 있다. 완전한 문장이 아니라 뒤섞이고 잘려나간 문장이거나 의미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읽을 수는 없을지언정 그의 작품은 다양한 해석 앞에 열려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을 보여주는 것이 중국에서 도장 제작을 위해 사용된 전서체를 응용하여 제작한 <Duration to Intuition>이다. 문자를 투각한 구조물을 매달고 그 아래에 거울을 놓아 마치 도장을 찍듯 구조물 속의 텍스트를 거울에 반영하고 있는 이 작품은 보는 것과 보이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거울은 문자조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빨아들이는 심연이다. 또한 문자를 해독하기 위해 그 표면을 훑고 있는 우리의 시선을 유혹하여 가둬버리는 덫이기도 하다. 언어의 피부를 관통하는 영상 역시 벽에 매달거나 벽처럼 세워놓은 구조물에 의해 직선운동하지 못하고 문자조각과 거울이 놓인 바닥에 다 같이 산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빛의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문자와 이미지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대신 그것이 남겨놓은 흔적이 부각된다. 이러한 경계의 해체를 그는 공 혹은 중용으로 인식한다. 말하자면 절대적인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마음으로 돌아가서 전시장 바닥에 세워놓은 세 개의 문자조각, 즉 이념·믿음·마음은 언어 자체가 지닌 가치를 공고하게 구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지닌 언어적 규정성에 얽매일 때 의미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김신일의 이러한 생각을 선불교의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과도한 견강부회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보는 것만을 믿어야 한다는 생각의 편협성을 일깨우고 있음은 분명하다. 마음이란 문자에만 종속될 때 정작 우리는 마음의 실체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는 마음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기록해 놓은 문자의 한정성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해독하기 위해 그의 문자조각을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어야한다. 문자조각의 외형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를 읽는 것에 만족하는 순간 이 전시장에 작가가 걸어놓은 마법과도 같은 의미의 그물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표상적인 언어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럴 경우 눈은 승리했을지언정 시선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응시의 지평도 닫히고 만다. 거미줄과도 같은 구조물을 통해 얼핏 보았던 실내가 겨우 세 개의 단어를 세워놓은 것에 불과한 공간이라니. 그러나 세 개의 텍스트는 김신일이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눈을 뜨게 만드는 장치이지 그 자체가 본질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마음의 눈을 뜨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육안으로서의 시선이 아닌 심안(心眼)이 머무르는 장소, 그곳에 새겨진 응시의 지문을 더듬는 것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