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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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CV
교육
2013
골드스미스 대학 순수미술학과 석사, 런던, 영국
2010
서울대학교 조소과 학사, 서울
주요 개인전
2021
《In the Penal Colony 유형지에서》, 우민아트센터, 청주
2019
《Crosscheck》, 오시선, 서울
2016
《control beyond control》, 아웃사이트, 서울
2014
《팬텀 기호》, 대안공간 루프, 서울
2013
《원본없는 사본들 Landscape: Chicken or Egg》, 금호미술관, 서울
2011
《Ingredients》, 갤러리민, 서울
주요 그룹전
2021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 부산현대미술관, 부산
2020
《슈가 컴 프로: White and Viscous Gold》, OS, 서울
《Plicnik Space Initiative》, D02.2, 온라인 전시, 영국
2019
《금호영아티스트: 16번의 태양과 69개의 눈》, 금호미술관, 서울
2018
《A-Mode》, 예지동, 서울
《APMAP 2018 jeju – volcanic island》, 오설록 티뮤지엄, 제주
2017
《Ⅰ, Ⅱ, Ⅲ》, 아웃사이트, 서울
《Korean Eye: Perceptual Trace》, 사치 갤러리, 런던, 영국
《미술관 동물원》, 서울대학교미술관, 서울
《풍경》, 마이크로뮤지엄, 서울
2016
《불확실성, 연결과 공존》,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수원
《직지, 금빛 씨앗》, 청주예술의전당, 청주
《제4회 아마도 애뉴얼날레, 목하진행중》, 아마도예술공간, 서울
2015
《더 브릴리언트 아트 프로젝트 3: Originability》, 서울미술관, 서울
《Rain Doesn’t Fall for Nothing》, 크리에이티브 인더스트리 센터, 런던
《옅은 공기 속으로》, 금호미술관, 서울
《로봇 에세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주목할만한 시선》, 금호미술관, 서울
2014
《시간의 향기》, 금호미술관, 서울
《Dreaming Machines》, 국립현대미술센터, 모스크바, 러시아
2013
《London Art Fair 2013: Location of Reality》, 한미갤러리, 런던
2012
《Phobia》, 한미갤러리, 런던, 영국
《Situated Senses 02: 30cm of Obscurity》, 올드폴리스스테이션, 런던, 영국
2010
《Instant, Unknown, Uncontrolled, Unacclaimed》, 코사스페이스, 서울
2009
《설화문화전》, 크링, 서울
2007
《Hello, Chelsea! 2007》, PS 35 갤러리, 뉴욕, 미국
주요 수상
2020
우민아트센터 제19회 우민미술상, 청주
2016
서울시립미술관 신진미술인 전시지원 프로그램, 서울
2013
대안공간 루프 신진작가, 서울
2013
금호미술관 금호영아티스트, 서울
2007
PS 35 갤러리 70 이머징 아티스트(Emerging Artists), 뉴욕, 미국
주요 레지던시
2013
금호창작스튜디오 9기 입주작가, 금호미술관, 서울
주요 소장처
금호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아라리오뮤지엄
Critic 1
믿음과 회의의 경계
김윤옥(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김상진의 작업은 모두가 절대적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일반적인 인간의 인식체계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한다. 작가의 작품에는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언어와 기호, 시간과 공간, 제도와 법률 등의 가치 기준이 실상은 사회 구성원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불완전한 것이라는 명제가 공통으로 깔려 있다. 이러한 거대한 체계(언어, 제도, 법률 등)와 그 불완전성(혹은 이면)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결국 인간의 인지 과정에서 일어나는 전체와 부분에 대한 인지의 간극에 기인한다.
작가는 이와 같은 개념을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사운드 설치, 조각으로 구현한다. 수면 위에 잉크로 프린트하는 <In Visibility>(2013) 연작이나 목탁 앞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하여 목탁음을 대신 들려주는 <Meditation>(2013), 화물용 나무상자와 동물의 사운드만으로 구성된 <The Three Little Pigs!>(2014), 새의 울음소리가 재생되는 스피커를 내장한 새장이 헬륨 풍선에 매달린 채 공중을 부유하는 <Icarus stuffed birds>(2013) 등 특유의 사운드와 움직임이 동반되는 기계적 장치들로 구성되는 설치 작업을 선보여 왔다. 이 작업들은 인지의 불완전함과 함께 한편으로 원본의 기호(언어) 분해와 재현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이러한 ‘시뮬레이션(simulation)’, 즉 ‘가장하기’식의 재현은 현대의 현실 구축방식의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라고 본다. 커피의 맛을 그대로 간직한 디카페인 커피나 박하가 들어가지 않은 박하맛 사탕, 소음을 소음으로 차단하는 액티브 노이즈 컨트롤러(active noise control) 등의 예처럼 원본을 기호적으로 재현하거나 대체하는 방식이 만연한 현대적 삶을 끄집어낸다.
언어적 가치와 우리의 인지 사이의 간극은 작가의 초기작인 <Air purifier>(2011)에서 가장 집약적으로 보인다. 꽃을 담은 밀폐된 유리관 속 꽃향기를 냄새로 감지한 공기청정기가 꽃이 말라 죽을 때까지 공기정화를 하는 모습의 작업으로, 향기와 악취라는 언어적 가치와 후각을 모방한 기계센서가 일으키는 모순을 조명한다. 작가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한 비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연출된 상황으로 인하여 관람객이 느끼는 여러 감정(호기심, 죄책감 등)에 대한 비이성적이고 모호한 지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최근 김상진은 인간의 인지와 거대한 체계 그리고 그 불완전성(혹은 이면)에 대한 관심에서 더 나아가 본래의 의도에서 이탈과 전복을 반복하는 오늘날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작업들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의 근작 <Fuck you, and I will see you tomorrow>(2020)는 폭풍 구름이 낀 하늘을 보여주는 여러 개의 디스플레이를 천정에 설치하고, 보랏빛으로 물들인 방 안에 커다란 디너 테이블을 놓은 모습이다. 테이블 위에는 5개의 스마트폰이 놓여있고 기기는 각각 열심히 웃고 떠들고 있다. 작가는 인터넷과 디지털에 기반하고 있는 기술 유토피아가 새로운 가능성과 기대 그리고 그로 인한 공허함과 불안함이 함께 공존하는 우리의 현실과 미래임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가능해졌기에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기대와 모든 것이 가능해졌기에 모든 것이 불행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사실 모든 것이 채워졌기에 모든 ]것이 공허해지는 미래의 두 얼굴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작가는 팬데믹 이후 가속화되는 가상과 네트워크의 세계와 마주한 우리에게 부조리한 현실과 양날의 검을 가진 미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처럼 김상진은 지난 15년간 사운드, 기계적 설치, 뉴미디어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가 결합되는 작가 특유의 형식으로 구현되는 작업들을 통해 우리에게 스스로 맹신하고 있는 인지와 가치에 대해 문답하도록 유도한다.
Critic 2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문혜진 (미술비평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침묵은 오직 그 후에 왔다.
종말 그 자체가 사라졌다・・・・・・.1
1. 김상진의 작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고민했던 것은 일반적으로 서로 대극에 위치한다고 간주되는 상반된 태도가 작업 전체에서 충돌하며 부정합적인 공존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 것 같으면서도 계속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어긋남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데 한참을 보냈다. 김상진의 작업이 어려워서인가? 아니다. 결과물로서의 그의 작업은 비교적 개념의 소재들(언어나 기호, 통념, 척도 등)을 직접적으로 등장시키며 의도를 감추거나 빙빙 돌려 맥락을 모호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제기한 질문에 대해 피하기보다 정면으로 맞서는 태도에 가깝다. 그렇다면 문제는 작업 자체가 아닌 작업과 의도와의 관계에 있을 것이다. 외견상 단순하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부연 설명 없이 그저 사물로 제시되는 작업의 외양과 대단히 복잡하고 긴 사고 과정을 거친 작업 취지가 부딪치며 작업을 액면 그대로 보아야 할 것인지 그 뒤에 내재된 사유와 담론에 비중을 둘 것인지 사이에서 고민하게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김상진의 모든 작업이 일면 개념미술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상진의 작업은 당위적 세계와 체계가 지니는 부조리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하며, 초지일관 인식의 불완전성과 인위적 규범 및 체계의 오류를 기호와 감각의 차원에서 접근해왔다. 소리의 음원을 추출하거나, 인공 음성 보컬 프로그램을 활용하고, 물 위에 인쇄할 수 있는 특수 프린터를 고안하는 등, 매체 기술을 적극 활용하고 기술 장치의 비중이 높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종종 미디어 작업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나의 작업을 어떻게 읽느냐는 원론적으로 열려있기에 이러한 분류를 부정할 필요도 없고, 인식의 매개체라는 점에서 장치는 김상진의 작업에서 실제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작업이 바라보는 지점이 매체가 자아내는 효과나 장치 자체에 대한 기계적 흥미보다 인간 현존의 조건과 기술 환경 속 실재와 환영의 문제, 해체되는 동시대 시공간과 변화하는 인식에 방점이 있기에 결국 이 모든 문제는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을 보는 나 자신은 무엇이며, 보기와 인지에 개입하는 체계와 구조가 무엇인지로 귀결된다. 이 경우 나의 고민은 개념미술 일반에서 발생하는 문제로 치환될 수 있다. 물질적 실체나 시각적 외양보다 개념이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개념을 전달하는 비언어적 매개체와 감각적 속성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딜레마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김상진의 불명료함 혹은 복합성이 작가 특유의 차별성이자 김상진이 끊임없이 묻는 인식과 실재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물리적 실체와 개념 사이의 긴장은 결국 사물과 텍스트 사이의 간극이기도 하며, 이는 눈앞의 세계와 이를 대상으로 한 기호 사이의 갈등이기도 하다. 더욱이 2019년 이후 동시대 디지털 환경으로 관심사가 확장되면서 그가 다루는 부조리의 양상은 더 복잡해지고 있다. 전근대와 근대, 현대가 착종된 동시대성의 문제는 근대적 사유와 탈근대적 생각 없음(mindlessness) 사이를 왕복하는 작가의 모순적 양가성에 반영된다. 이 글은 이와 같은 부조리의 다변적 양상이 《올해의 작가상 2021》 출품작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무겁지 않게 스케치하고자 하는 시도다.
2. 1980년대 신스팝을 연상시키는 반복적인 리듬이 시청각을 자극하는 <Lo-fi Manifesto_Cloud Flex>(2021)는 시각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이번 전시의 중심작이다. 느리면서도 최면적인 음악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관객은 20개의 스크린으로 구성된 거대한 화면에 반복되며 움직이는 색색의 패턴을 쳐다보게 된다. 현란한 패턴은 생각을 멈추고 감각에 휩쓸리게 만든다. 시지각적 현혹(delusion)은 무한히 반복되는 화면 속으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몸은 여기에 있되 정신은 스크린 속으로 함몰되는 것이다. 책상 위로 치솟아 화면 속으로 진입하는 학생들의 하반신은 블랙 스크린 속 이미지 범람에 익사하고 있는 동시대인의 직유적 초상이다. 우리의 육체는 미트스페이스에 존재하지만 정신은 스크린 속 가상공간에 머문다. 하지만 아무리 생활의 대부분이 유튜브와 게임, SNS에 있다 한들 생체로서의 몸의 물리적 한계는 우리를 끊임없이 ‘살’로서의 육체로 되잡아 끈다. 가상과 실재를 왕복하는 이러한 분열의 양상이 <Lo-fi Manifesto_Cloud Flex>가 시각화하는 동시대의 모순이다. 작가는 근대인들이 커다란 기대를 갖고 추구하던 하이파이로서의 가상이 아닌, 일상적 현실이 된 로우파이로서의 가상이 이 작업의 주제라고 말한다. 현재의 변화는 분명 실물성에 기반한 전통적 휴머니즘의 종말을 가리키고 있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가상성이라는 새로운 경험에 기반한 새로운 인간 및 세계의 도래를 의미한다.2 가상과 실재가 명료히 구분되거나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하게 공존하는 상황이 김상진이 말하는 로우파이로서의 가상일 것이다.
미래가 도래했으나 어디로 갈지 모르는 불확실함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 이것이 동시대의 근원적 불안이자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본질적 난점이다. 굳이 철학적 문제로 확장시키지 않더라도 기시감은 <Lo-fi Manifesto_Cloud Flex>의 저변에 깔려 있는 핵심 동력이다. 앞서 신스팝을 언급했지만 <Lo-fi Manifesto_Cloud Flex>는 개념적으로나 형식적으로 복고의 감각을 자극한다. 일차적으로 이 작업이 가리키는 분열의 징후는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나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말하는 포스트모던적 착란의 감각과 직결된다. 모든 지시 대상이 사라지고 시뮬라크르들이 자전하는 세계, 오직 현재의 강렬함만이 존재하는 깊이도 거리감도 사라진 기묘한 정신 분열적 행복감. “묘사하기 어려울 정도의 생생함, 압도하는 지각의 물성을 가지고 주체를 갑자기 빨아들여”3 버린다는 제임슨의 서술은 <Lo-fi Manifesto_Cloud Flex>에 적용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생산(production)이 아니라 후반 작업(post-production)이, 창조가 아니라 재조합이 동시대 디지털 환경을 규정하는 기술적 형식임을 떠올리면, <Lo-fi Manifesto_Cloud Flex>가 불러일으키는 복고의 인상은 그 자체로 동시대적이다. 하지만 반복은 언제나 차이를 양산한다. 제임슨이 묘사했던 히스테리성 숭고가 의미 사슬이 와해되며 기표가 해방되는 흥분과 환각의 강렬함이라면, 김상진이 시각화한 현란한 착시는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Franco “Bifo” Berardi)가 말하는 소진에 가까울 수 있다. “기호자본주의적 가속화와 신경 에너지의 과도한 착취”가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 역치를 야기한다.4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용적 구분보다도 반복의 사태다. 선형적 시간의 흐름을 무화시키고 계속 순환하는 반복의 시간성, 그것이 실체와 분리된 동시대 기호자본주의의 시간이다.
한편 <Lo-fi Manifesto_Cloud Flex>는 형식적으로 옵아트(Op art)를 연상시킨다. 김상진의 전작들이 의도적인가 싶을 정도로 시각적 스펙터클과 거리가 먼 것을 떠올리면, 이 같은 표면적 유사성은 우연의 결과다. 그럼에도 결과적 효과라는 점에서 이 유비는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 있다.5 <Lo-fi Manifesto_Cloud Flex>는 눈과 몸의 조응에서 옵아트와 공명한다. 순수하게 시각적임에도 착시적 패턴은 어지러움, 두통, 현기증 같은 신체적 효과를 야기한다. 이처럼 시각 내부에 촉각성을 내포한 이중성(duplicity)은 반예술적 측면에서 순수 시각성을 공격하는 수단[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회전부조 6번:달팽이>(Rotorelief No. 6: Escargot, 1935)]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E. Krauss) 같은 비평가가 전자 미디어의 시대에 반응한 “새로운 지각적 추상”의 일례로 옵아트를 분석하게 만든 계기가 되기도 한다. <Lo-fi Manifesto_Cloud Flex>에서 눈과 몸의 얽힘은 매개된 감각이라는 동시대 공감각의 속성을 가리키는 한편 정신과 육체의 분리 불가능이 야기하는 실재와 가상의 불가피한 공존을 드러낸다. 가장 실감나는 촉각적 현현을 약속하는 가상현실(VR)의 약속은 헤드셋이라는 장치와 시각을 매개한 허구의 감각이다. 시각을 경유한 촉각의 현현은 <Lo-fi Manifesto_Cloud Flex>의 현혹적 패턴이 자아내는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육체의 소멸과 맞닿는다. 하지만 완전히 흡수되지 않고 반쯤 남아 있는 인간의 형상은 실재와 가상 사이를 왕복하는 동시대 현존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듯도 하다. 가상 세계의 비중이 증가하며 실체의 비중은 갈수록 줄어들지만, 동시에 온라인 강의 피로도로 상징되는 육체의 존재감은 역설적으로 강화된다.
3. 인공이 새로운 자연이 된 동시대 디지털 환경과 실재하는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 동시대 인간 조건은 <Chroma Key Green>(2021)과 <This is fine>(2021)에서도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Chroma Key Green>은 도구가 “더 이상 도구가 아닌 자연”(작가)이 된 오늘날의 데이터 매트릭스를 가장 직설적으로 표명한다. 색채로서의 초록은 전통적으로 근원으로서의 자연과 이에 기반한 실물성을 상징한다. 하지만 후반 작업이 필수적인 동시대 영상 제작환경에서 초록은 실물성을 지우기 위해 활용된다. 그런 점에서 초록색 크로마키 슈트를 입은 인물은 실재와 비실재를 동시에 체현하는 오늘날 인간의 현존을 은유한다.6 개념과 형식의 연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역설은 물성이 사라지는 이미지 세계를 표현하는데 통상보다 훨씬 물성의 제한을 크게 받았다는 점이다. 투명 우레탄 비닐백 안에 웅크리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실감 나게 구현하기 위해 작가는 외부에서 재료를 다듬고 깎는 전통적인 조각 기법과 내부에서 형태를 구축하는 3D 프린팅 기법을 모두 동원했다. 더욱이 상당한 부피를 지닌 조형물이 천장에 매달려 있어야 하므로 물성의 문제는 제작 과정 전반에 핵심일 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아무리 세계가 숫자로 대체된들 결코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가상과 실재의 관계를 함축하는 듯하다. 실제로 <Chroma Key Green>은 형식적으로 상반되는 두 가지 형태의 전작들을 결합한 것이기도 하다. 하나는 비교적 고전적인 조소의 방식을 택한 작업들로, 작가 자신의 복제본 조상이 또 다른 복제본을 가방에 담고 가는 <Human copyright Information>(2007)이나 작가를 본뜬 조상을 거리에 설치해 실체를 인식하는 최소 조건을 실험한 <The street where I’m living>(2010) 등이 대표적이다. 다른 하나는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대체한 동시대 매체 환경을 전자매체를 통해 제시한 작업들로, 위계 구조가 무너진 채 부유하는 기표의 세계에서 공회전하는 인간을 묘사한 <I know this steak is not real>(2020), 실제 동굴 소리 대신 수면용 배경 사운드 파일(ASMR)로 대체된 오늘날의 전자 자연을 구현한 <Electric Cave>(2018)를 사례로 꼽을 수 있다. 한 글에서 김상진은 도구적 세계의 강박적 매트릭스 사이로 스며 나오는 미끄덩거리고 끈적이는 점액질의 전복적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7 아마도 그가 의도한 것은 예측과 정합성의 데이터 사회를 오염시킬 수 있는 위반의 가능성 일반일 테지만, 지워도 지워도 비집고 나오는 오래된 육체의 유기성 또한 “죽은 의미의 송장(기표)”(작가)들을 마비시키는 방해물일 것이다.
<Chroma Key Green>이 유기적 실재의 세계와 추상적 기표의 세계의 삐그덕대는 공생을 다뤘다면, <This is fine>은 상대적으로 시뮬라크르가 압도적으로 주객을 전도시킨 오늘날의 풍경을 강조한다. 스마트 시계 속에 재현된 눈끼리 눈싸움을 하는 상황은 SNS 계정이 미트스페이스의 실물을 대리하는 가상 페르소나의 우위를 연상케 한다. 다만 <This is fine>은 태도에 있어 <Chroma Key Green>과 다소 다르다. 약간의 자조나 짓궂은 농담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비교적 진지하게 실존적 숙고를 보여주는 <Chroma Key Green>과 달리, <This is fine>의 톤은 훨씬 건조하고 냉소적이며 무심하다. 이는 제목의 출처인 동명의 밈(meme)의 정서기도 하다. 불타고 있는 집안에서 “뭐 괜찮네(This is fine)”라고 중얼거리며 커피를 마시는 캐릭터는 가상 세계에 함몰된 나머지 현실감을 잃어버린 세태를 가리키기도 하고, 외부 세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풍토를 암시하기도 한다. 끝없이 미끄러지는 기표들의 연쇄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그 어떤 확실한 기준도 안정된 질서도 보장되지 않으니, 스테이크가 진짜든 아니든 알 바 아니고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육체가 사라진 채 스마트폰 속의 입들만 존재하는 저녁 만찬에서도 활발한 담소와 교류가 일어나고 있듯 말이다[<Fuck you and I will see you tomorrow>(2020)].
이와 관련해 김상진이 밈을 대하는 태도는 주목해 볼 만 하다. 그는 불특정 다수가 이미지를 통해 자유롭게 유희하며 풍자하는 인터넷 밈의 존재 양상이 자신이 부조리를 대하는 자세와 유사함을 발견하고 밈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음을 밝힌 바 있다.8 맥락을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숨겨진 놀이로서, 위계에 도전하는 불경함, 어찌 흘러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성, 경박함과 진지함의 혼재 등이 작가의 흥미를 끌었으리라 추정한다. 실로 김상진의 모든 작업은 나와 세계를 둘러싼 인식론적이고 진지한 고찰과 무용함을 알면서도 던져보는 반 농담조의 트집 잡기가 번갈아 교차한다. 작업뿐 아니라 태도에서도 근대적 사유와 탈근대적 위반의 공존이라는 부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역시 밈에서 출발한 <Oasis>(2021)는 절반쯤은 낄낄대며 웃는 인터넷 농담이고 나머지 절반은 기호의 작동에 대한 개념적 고찰이다. ‘미끄럼 주의’를 알리는 경고 표지판이 물속에 들어 있는 상황은 보는 이에게 실소를 유발한다. 사물의 원래 용도가 무화되는 양상은 기표(형식)의 훼손 없이 맥락을 전치시킴으로써 기의(내용)를 휘발시키는 전략이다. 미술사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전략의 뿌리는 뒤샹에 있다. 악명 높은 <Fountain>(1917) 역시 오브제는 손대지 않고 화장실에서 전시장으로 장소만 전환함으로써 사물의 의미를 전도시켰다. <Fountain>이 물리적 장소를 전치시켰다면 <Oasis>는 역설적 상황을 창출함으로써 기의를 무력화시킨다.9 기호의 의미작용에 대한 뒤샹식 유희는 김상진의 다른 작업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소리의 시차를 부각시켜 동시성을 전제하는 시간의 척도가 자의적임을 드러내는 <Time_watch sound>(2010)은 같은 길이의 실이 형성하는 다른 형태의 곡선을 통해 척도의 임의성을 드러낸 뒤샹의 <3 Standard Stoppages>(1913-1914)의 시간적 대구다. 기능의 전치를 통해 선형적 시간성을 해체하는 <Time_watch sound_2>(2018), 측정 대상과 측정 장치를 통합시켜 기호의 대상에서 의미 부여 체계로 방점을 이동시키는 <Jack>(2017) 또한 당연하게 간주되는 의미작용을 교란시키는 뒤샹적 개입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적 함의를 무시하고 그저 하나의 재미난 밈으로 <Oasis>를 간주해도 무방하다. 미끄러짐으로 가득 차서 미끄러짐이 마비되는 어이없음을 공유하는 것이 이 작업의 의도 아니겠는가?
4. <Lo-fi Manifesto_Cloud Flex>와 함께 공간적으로 전시의 중축을 이루는 <I will disappear>(2021)는 김상진의 기존작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를 압축한 작업이다. 제목에 등장하는 ‘나’와 이를 표명하는 ‘언어’, 그리고 이들의 ‘상실’이 그것이다. 이 작업 역시 출발은 밈이다. 라켓 표면에 색깔로 표시된 윌슨사의 W 로고가 그림자에 비치지 않는 것을 두고 “W는 어디로 간거지?!?!”를 외치는 바보 같음은 실상 보이는 것이 보이는 대로가 아님을 알면서도 매번 망각하는 우리의 보편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재현과 실제는 동일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지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구성하며 변형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미지는 현실의 파생물이라기보다 세계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의 의식과 사고가 형성되는데 관여한다. 관객은 “나는 사라질 것이다”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 어구는 그저 격자에 칠해진 색깔 차이로 발생한 것이며 실체가 없기에 그림자에 반영되지 않는다. 기호 중에서도 언어는 철저히 자의적인 기호고, 언어는 그 자체가 세계에 대한 단순화이자 추상화로 세상의 일부만을 담아낼 뿐이다. 그럼에도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도 언어를 통해 구조화될 정도로 언어는 당연시된다. 인지 과정을 지배하나 너무나 자연화 되어서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언어의 투명성은 <We are not>(2017)에서 폭로된다. 미국 과학위성 로켓의 폭발 사고를 담고 있는 화면은 폭발의 충격에 온통 뒤흔들리지만 그 위에 얹힌 자막은 일절 동요하지 않는다. 이미지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독해를 좌우하는 텍스트는 결코 세계와 합치될 수 없지만 우리의 이해를 지배하는 언어의 독단적 지위를 상징한다. 세계에 대한 표상으로서 언어의 불완전함은 기호의 누락을 시험한 작업들에서도 드러난다. 언어의 거름망은 세계를 담기에는 너무 성글어서 언어화 과정에서 지시할 수 없는 무수한 감각 및 경험들이 소멸된다. 원 음원(wave file)을 mp3 포맷으로 변환할 때 버려지는 95%의 데이터를 수거해 5%의 mp3 음향과 분리해 재생한 <Moonlight sonata>(2010)는 표상 과정에서 망실되는 원형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언급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불완전함을 알고 있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소통할 수 없는 인식론적 딜레마는 자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의 통합성을 의심하면 생존할 수 없기에 우리는 자아라는 허상을 상정하고 살아가지만, 나라는 존재는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으로 시시각각 변하며 상대적 차이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정신과 육체, 나와 세계, 자아와 타자,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라지며 분열되는 나의 취약함 역시 여러 번 다뤄졌다. 표상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나는 이미지로, 조상으로, 이름이나 주민등록번호 같은 기호로 끝없이 복제된다. 하지만 그중 어떤 것도 완전한 내가 아니며 나는 계속해서 새어 나간다. 복제본이 복제본을 담고 가는 <Human copyright Information>이 지시하는 것은 이 같은 자폐적 누실의 루프다. 열심히 작동하지만 허망한 몸짓일 뿐인 거울 속 선풍기의 운동[<I’m not frantic yet>(2016)]은 세계를 담아내려 애쓰지만 한계가 있는 표상의 존재론적 본성을 함축한다. 물론 이는 대리(proxy)를 통해 나를 전달할 수밖에 없는 자아의 고충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격자에 인쇄된 “나는 사라질 것이다”라는 말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나는 주체로서의 우리 자신으로도, 언어라는 기호체계 자체로도 볼 수 있다. 과거형도 현재형도 아닌 미래형의 표명은 사라질 것이라는 의지를 나타낸다. 내가 물리적 실체로서의 나일 때, “나는 사라질 것이다”는 실물성이 약화되며 갈수록 코드의 세계로 이전되는 정체성의 양상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 나를 언어 체계로 볼 경우, “나는 사라질 것이다”는 발화에 기반한 말이라는 아날로그 표상 체계가 숫자에 근거한 디지털 기호체계로 교체되는 패러다임 이행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소멸은 완전하지도 진실하지도 않다. 아무리 인간을 기계가 대체한들, 수용체가 인간인 한 유기체의 물리적 속성은 끊임없이 데이터의 범위를 제한한다. 인간의 가시 범위와 가청 범위 내의 신호만 추출되어 유의미성을 부여받는 현상은 육체적 현존이 데이터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음을 뜻한다. 인간은 매트릭스에 정보를 제공하는 데이터 세트 가분체로 파편화되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속 회귀한다. 또한 유기적 언어가 수학적 숫자 뒤로 밀려났다 한들 관료적이고 가부장적인 기호의 권력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갈수록 빠르게 순환하는 거대한 데이터의 바다에서 정적이고 느린 텍스트보다 강렬하고 즉각적인 이미지 및 정동(affect) 경제가 부상하고 있지만, 그 뒤에는 자명하고 투명한 외양과 달리 편견과 차별을 영속화하는 알고리즘의 통치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나는 사라질 것이다”는 사실이기도 사실이 아니기도 한 역설적인 문구가 된다. 사라지고 있지만 되돌아보면 어느새 다시 출현하는 유령 같은 환각이다.
5. “나는 사라질 것이다”라는 미래형 문장은 실상 동시대보다 기호 자본주의가 훨씬 심화된 미래를 향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거대한 사라짐”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것은 노동과 시간, 개인의 파편화가 가속화되어 “주체의 무한한 분할, 현실의 모든 틈새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의 연쇄적 분쇄에 의한 사라짐”이다.10 이러한 사라짐에서 개인은 가치화 과정의 잔여물일 뿐이고, 존재하는 것은 “무한한 뇌 덩굴, 프랙탈 모양의 이용 가능한 신경 에너지 세포들로 이뤄진 끊임없이 변하는 모자이크”다.11 김상진은 카나리아처럼 가치 체계가 뒤집히는 징조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하는 자다. 신의 말씀으로 시작된 인간의 서사는 이성과 합리라는 도구가 극대화되며 의도치 않게 폐기되고 도구의 언어가 그 자리를 메운다.12 시공간과 의식, 주체가 사라지면서 종말 또한 사라진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사라짐이 편재한 영원한 현재다.
그렇다면 이 황망한 공허의 풍경에 대해 작가는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김상진은 매끄러운 시뮬라크르 평면의 당위성을 의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중요한 것은 당연함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 예측의 체계를 교란시키는 것이다.13 <Messiah is coming>(2021)은 내가 사라진 자폐적 환원의 세계에 대한 탈출구의 모색이자 작은 기대다. 납작한 격자 평면이 끝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저 멀리 점처럼 메시아가 보인다. 그는 걷고 있지만 가까워지는 기미는 없다. 그래도 그는 걷고 있다. 여기서 메시아는 고전적 의미의 구원자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꽉 짜인 매끈한 매트릭스에 틈을 낼 수 있는 모종의 가능성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그것이 김상진에게는 부조리다. “중간에 길 비틀기, 어쨌든 태연한 척하기, 그냥 끝내기, 긁어 부스럼”(작가) 등으로 표명되는 부조리의 방법론은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지속하는 문제 제기이자 농담이요 딴지 걸기다. 해봐야 소용없음을 알면서도 되풀이하는 작가의 트집 잡기는 베라르디식 저항의 다른 버전일 수 있다. 베라르디는 속도와 효율, 생산성을 강조하는 총체적 자본주의에서 무용과 무위, 느림, 물러나기 같은 수동성이 급진적 저항의 다른 방식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소진이 역으로 쉼 없는 생산성의 풍토에 제동을 걸 것이라 보는 것이다.14 당위성에 대한 의심을 통해 부조리를 드러내는 김상진의 전략은 베라르디보다는 조금 고전적이고 일면 더 적극적이다. 의심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는 데카르트적 주체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15, 사유적 실천을 먼저 능동적으로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소제목인 “비디오 게임 속 램프는 진짜 전기를 소비한다” 역시 농담 같은 진실이다. 비디오 게임 속 램프의 불빛은 가상이지만 실제 전기로 그래픽을 구현하고 있으니 실재기도 하다. 가상과 실재가 공존하는 부조리한 상황이 동시대의 실체임을 슬쩍 흘리는 태도는 밈적인 정서지만 발언 자체는 자못 진지하다. 부조리는 작업의 내용이기도 하지만 이에 접근하는 작가 자신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는 생각하는 자로서만 나의 존재를 확신하는 데카르트의 후예인가 아니면 무념무상으로 클릭을 해대는 유사 봇으로서의 동시대인인가. 물론 우리는 대답을 알고 있다. 둘 다다. 그런 점에서 김상진은 모순을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강화하려 한다는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16 사물은 보이는 것보다 멀리 있지만, 보이는 대로일 수도 있다. 이 양가성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다. 본디 사람은 자신의 모델에 종속되거나 역-종속되어 살지만, 동시에 그 모델에 대한 영구적인 도전 속에서 산다고 보드리야르가 이미 보증해주었다. 심지어 그는 이중성을 지니는 게 정상이고 한 방향으로만 사는 것은 비정상이라고까지 말했다.17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건 지나칠지도 모르겠으나 어떻든 인간 자체가 모순적이며 부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은 굳이 작가나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1 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하태환 옮김(서울: 민음사, 2012), 93.
2 김상진, 《올해의 작가상 2021》 작가 인터뷰 스크립트, 2021년.
3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 『포스트모더니즘론』, 정정호, 강내희 옮김(문화과학사, 1989), 170.
4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미래 이후』, 강서진 옮김(서울: 난장, 2013), 205.
5 Rosalind Krauss, “Afterthoughts on Op,” Art International 9, no 5 (June 1965). 옵아트와 관련된 담론적 정리는 다음을 참고하라. Pamela M. Lee, “Bridget Riley’s Eye/Body Problem,” October vol. 98, Autumn 2001, 26-46.
6 김상진, 《올해의 작가상 2021》 작가 인터뷰 스크립트, 2021년.
7 김상진, 《슈가 컴 프로 white and viscous gold》 서문(서울: 아웃사이트, 2020).
8 김상진, 「부조리를 대하는 자세에 대하여 2」 작가노트, 2021.
9 우연의 산물로 보이나 물이 존재하는 곳을 가리키는 ‘오아시스’라는 제목 또한 ‘샘’이라는 뜻의 <Fountain>과 연결된다.
10 장 보드리야르, 같은 책, 37.
11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같은 책, 200.
12 신화의 언어와 도구의 언어의 대립/공존은 <Crosscheck>(2019)에서 다뤄진다.
13 김상진의 텍스트 작업 <Crosscheck>(2019).
14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같은 책, 212.
15 작가의 이메일 아이디에 예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고야 부활을 믿은 회의론자 도마(Thomas)를 가리키는 음차 표기(doma)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16 히토 슈타이얼, 「왜 게임인가? 혹은 미술 노동자는 생각할 수 있는가?」, 『면세 미술』, 문혜진, 김홍기 옮김(서울: 워크룸프레스, 2021), 196.
17 장 보드리야르, 같은 책, 87~89.
Critic 3
We will disappear
임진호(아웃사이트 디렉터)
공중에 걸려있는 격자 위에 쓰인 붉은 텍스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I will disappear”
그리고 ‘나는 사라질 것’이라는 이 붉은 문자는 철망의 그림자에서 사라져 버림으로써 예언으로서의 또는 지시대상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완성시킨다(<I will disappear>(2021).1 그런데 생각해 보면 언어는 제 스스로 발화하지는 않는다. 언어가 직접 말을 하는 이 광경은 발화 주체(인간)의 공백을 드러내고 동시에 표상의 서사를 제거한다. 그리고 이 작품이 드러내는 선명한 자기지시적 순환 구조는 분명 어떤 사태를 예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유리창 밖 중정에는 ‘미끄럼 주의(wet floor)’라고 쓰인 노란 표지판이 있다 <Oasis >(2021). 그것은 물이 가득 찬 유리 수조 안에 있다. 비가 오든 구름이 개든, 표지판은 봉인된 수조 속에서 젖어 있다. 우리는 비가 닿지 않는 실내의 마른 바닥에 서서 저 표지판을 읽는다. 그러므로 젖은 바닥을 주의하라는 저 문구는 경고하는 자신, 표지판에게만 유효한 것으로, 기호의 일반적 서사 구조를 무력화한다. 내적 순환에 갇혀 있는 저 기호는 언어의 주체인 우리를 차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언어 공간에서도 사라지는 것은 인간인 것으로 보인다.
다시 전시장을 천천히 둘러보면 공간 속에 사라짐의 기호들이 가득 배열되어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반쯤 사라진 사람들, 보호색 속으로 스며드는 사람, 몸 없이 남은 눈알 등이 그것이다. 빛과 입체감과 색으로 가득 채워진 공간이 입을 모아 사라짐을 외친다. 전시장에서 발견되는 사라짐의 표현들 다수가 밈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어2 비교적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심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김상진의 지난 작업들이 어떤 전제를 가지고 어떤 대상을 바라보며 오늘의 사라짐에 도달하였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라짐’은 김상진의 작업 세계 전반을 가장 강렬하게 관통하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김상진의 초기작 중 언어에 대한 그의 질문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작품에는 <Dog sounds>(2010)가 있다. 40개 언어에서 발견한 48개의 개 짖는 소리를 드럼통에 부착한 48개의 스피커를 통해 재생하는 작업이었다. ‘멍멍’, ‘바우 와우(bow wow)’, ‘콩콩(kong kong)’, ‘블라프 블라프(blaf blaf)’와 같이 이질적 의성어들이 동시에 충돌하며 괴이한 개 짖는 소리를 만들어내는데 이 소리는 모여진 기표들의 기능을 해체하고 동시에 사라진 개소리의 원형에 대한 또 다른 기표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질문의 타당성은 의성어가 기의와 기표의 독단적 관계3에서 벗어난 실제에 대한 직접적 묘사에 가깝다는 점에서 성립되는데, 작가는 2013년의 한 인터뷰에서 이 작업을 사라진 범인(개소리)을 잡기 위해 만든 사운드 몽타주라고 표현하였다.4
물론 그 소리들의 충돌이 만들어낸 새로운 소리가 사라진 개소리의 원형이 아님은 분명하다. 여전히 거기에는 원형(기표들의 지시 대상)의 공백이 존재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상진은 이 작업의 목적은 처음부터 이 개소리들을 충돌시키는 것이었다고 밝히며, 언어 자체가 누실5의 근원이기 때문에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대상의 원본을 잃어버리고 시작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그 사라진 것들은 되찾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오성 너머의 물자체에 대한 인식의 불가능성을 선언하듯 김상진은 그 누실분을 복구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되찾으려는 기억상실증 환자인 양 이 언어의 뒤로 사라지는 것들의 흔적을 집요하게 추적해왔다는 것이다.
언어6는 늘 언어를 (언어가) 매개로 하는 것들로 하여금 말하게 할 뿐, 자기 스스로 말하지 않음으로써 궁극적 매개체로서 작동해 왔다. 폭압적인 권력이 언어를 교묘하게 유용할 순 있어도, 언어 그 자체는 공정한 매개자일 뿐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특히 그것이 숫자의 형태를 가질 때는 더욱 그렇다.7 따라서 언어는 지극히 인간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충동적이거나 애매하거나 불확실한 인간과는 다른 층위의 어떤 것으로서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외부 세계를 합리적으로 매개하는 듯 보인다. 게다가 우리는 그것이 마치 우리 자신인 양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말하고 또 언어로 이해하며 언어의 존재를 망각해 버린다. 그리고 동시에 거침없이 흐르는 언어 속에서 우리 자신 또한 종종 희미해져 감을 경험하곤 한다.
우리는 언어 이상의 것을 감각하고 언어와 동떨어진 충동을 느낄 때에도 막상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한계와 맞닿아있는 언어의 절대성을 체감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그것이 충분한 진실이 아니더라도 언어로 대상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결국 우리의 손에 쥘 수 있는 세계가 언어뿐임을 삶의 무수한 경험을 통해 인지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자기의 안과 밖으로 이어진 중층의 언어 망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언어의 감옥 속에서 사라진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사물을 명명하고 개념화함으로써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동시에 사라짐 속으로 떠밀어 그것의 생경한 현실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던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말처럼8 언어가 대상을 지시할 때 대상은 언어의 뒤로 사라져 버린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이러한 구조를 자아의 형성 그리고 무의식에 이르기까지 자신과 외부 세계를 모두 언어적 상징으로 구조화하는 선험적 언어의 세계(우리의 일반적 현실로서의 상징계) 그리고 언어 뒤로 사라진 원형의 실체(실재계)로 설명하면서 인간 내부에 괴리된 채 존재하는 이 두 개의 어긋난 세계가 서로 끝없이 대립하는 공간, 즉 인간의 자아가 성립된다고 보았다. 이는 김상진이 사적 기억을 회상하며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한 언어적 환원과 상실의 과정을 묘사한 텍스트 작업 <걸어간다>(2017)에서 아래와 같이 포착된다.
“사랑은 상상 속의 오래된(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거대한 동물이다. 또한 그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궤변의 괴물이며 근본 없는 색인 속에서나 찾을 수 있는 그런 생물이다. (중략) 아니. 기억해보니 어린 날의 나는 생각보다 제법 저항했던 것이다. 그것은 생각보다 흐느적거리며 쉽게 열기에 휩싸이다 곧 분노에 가득 차 발기해버릴 수도 있는, 본디 이름을 가질 수 없는 그러한 벌거벗은 것들이었다. 곧 누군가가 (아마도 사랑 노래들을 통해)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을 때 나는 일단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창고에 황급히 넣어 놓고는 곧 지도를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오직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창고 문을 잠그며 느꼈던 짧은 비극적 안타까움, 그런 찰나의 기억 정도 뿐인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모든 것을 선명하게 만드는 분절의 도구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구체적 이미지로 환원해 대상을 총체성의 덩어리로부터 분절시키고 종내에는 이미지(시뮬라크라)의 제국(현실) 속에 진열시킨다. 근대 이후 가속화된 서구적 전통, 즉 언어(기호)에 대한 맹신은 언어의 불완전성의 보상을 언어 외부의 세계에서 얻으려는 시도를 체념하고 그 결핍에 끝없는 언어를 뒤집어씌우는 것으로 현실을 증강해 왔다. 원형에 대한 체념은 다시 언어에 대한 믿음으로, 믿음은 언어 외부에 대한 망각으로 발전한다. 마지막으로 망각은 언어적 세계의 완성에 대한 의존과 의지로 확장하며 순환된다. 덩어리진 것(총체적인 것)들을 분절해 균질한 입자들로 배열하는 것, 그리하여 단절된 것들을 연결 가능한 모듈로 재구성하는 것, 연결된 것들을 기호의 연쇄적 흐름 속에 배치하는 것: 이것이 언어가 공생체(언어-인간)의 현실을 끊임없이 갱신하며 원형의 세계를 사라지게 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역설이 발생한다. 인간이 언어의 질서를 인간 외부에 투사함으로써 사라진 것이 근원적 세계라면 인간에 대한 언어적 정의와 그에 대한 이미지가 어느 때보다도 확고해진 오늘날 인간 역시 사라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라짐은 언표와 함께 불현듯 사라지는 단순한 층위에 있는 사건이 아니다. 이 사라짐은 인간을 구성하는 몸(실재), 자아(상상), 그리고 언어(상징)의 층위에서 복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며 작가는 지난 작업들9에서 이러한 공백의 양상을 다양한 맥락과 소재를 통해 끊임없이 추적해 왔다. 그래서 이번 전시 속에서도 그가 선보인 사라지고 있는 인간들은 ‘가상이 실물을 선행하는 동시대적 상황 속에서의 인간의 사라짐’이라는 대전제를 공유하면서도 각기 다른 층위에서 그 사라짐을 이행한다.10 (다만 기억해두어야 할 것은 이들이 모두 자기지시적 구조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첫 번째 사라짐은 인간의 몸이다. 녹색 배경에 걸려있는 투명 샌드백 속에 태연히 앉아 우리를 응시하는 녹색 인간(<Chroma Key Green>(2021)이 있다. 여기서 첫 번째 역설의 구조를 만들어 내는 부분은 바로 저 녹색이다. 김상진이 텍스트 작업 <Crosscheck>(2019)11에서 묘사했듯이 현대의 인간은 총체적 자연으로부터 탈출하며 동시에 언어의 구조물(콘크리트, 계측, 측량, 생물연구, 기후학, 자본 등)로 자연의 신비를 소멸시켰지만, 인간은 여전히 자연의 일부인 몸에 기거하고 있기에 그들은 스스로 제거한 자연에 대한 필연적 향수를 불러왔다. 그래서 현대 시각기호에서 녹색이라는 상징은 자연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대표적 이미지로 각인되어 왔다 (녹색성장, 그린벨트, 녹색당 등의 이름이 공유하는 이미지를 떠올려 보자). 하지만 여기 있는 ‘크로마키 그린’은 미디어 제작 과정에서 현실을 제거하기 위해 존재하는 가장 인공적인 녹색이다. 자연으로서의 녹색이 과거 지향적 그리움이었다면, 새로운 시대의 서사(미디어)를 위한 녹색은 미래 지향적 기대감이다. 그래서인지 과거와 미래, 자연과 인공의 양 끝 단을 붙들고 있는 이 녹색의 역설에서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는 이 크로마키 슈트 속 인간의 몸—이 전시의 사라짐들 속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몸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몸이기에 더욱—은 의미심장하다.
‘몸은 운명이다(Anatomy is destiny)’라는 말처럼 인간은 언어의 격자 속에 신체를 가두고, 다시 신체라는 감옥에 정신을 가둘 수밖에 없는 이중의 속박 구조 위에서 갈등하며 존재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자아 또는 망아, 그리고 의미 또는 해방으로 나아가는 영적 존재의 근거로서 육체를 감각하고 탐색하고 존중하는 전통들이 있었다(애니미즘, 도교적 전통, 요기의 육체 수행 등과 같이 주로 서구 이성중심주의적 틀의 바깥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몸은 과거의 신체관과는 달리 근대 이후의 과학주의에 근거해 진단하고 치료하고 개조하는 대상이 되었다. 근대의 심리학자들은 언어 너머 몸의 존재로서 무의식을 발견하였지만, 곧 무의식도 언어적 의식의 개선을 위한 분석과 치료의 대상으로 사라져버렸다.12 그렇게 몸은 과잉된 언어의 철저한 분석이 만들어낸 청사진의 그늘 아래로 사라져 가는, 잘 길들여진 자아 유지 장치로 변모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몸일 뿐이다. 곧 사라져 버릴 것이다! (It doesn’t matter. It is only the body, and it will soon be over!)13’ 분석적 신체관 속에서 몸은 더욱 철저하게 기호화 되어간다. 약물들은 절대적 실재로서의 육체에 침투하여 의학과 의약산업 기호들의 네트워크 속에 몸을 재배치한다. 그리하여 망각되는 듯한 몸의 감각은 더욱 선명한 기호로서 언어의 현실 위에 나타난다. 이제 전자현미경에 의해 가상 미시적인 부분(DNA)까지 정보화된 몸은 도나 해러웨이(Donna Jeanne Haraway)가 사이보그를 위한 선언문에서 예견하였듯 숫자로 대체 가능한 몸이 되어 숫자 속으로 점차 사라져 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러한 몸의 동시대적 맥락은 크로마키 슈트의 몸과 묘하게 겹쳐진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선택의 확장을 발견한다. 과거에는 언어적 현실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죽음)만이 우리의 근원인 실재계의 육체—에덴의 자연—속으로 회귀할 수 있는 유일한 충동(타나토스)이자 방법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몸의 완전한 기술적 정복을 통해 언어적 현실(파생 실재)—새로운 자연—속으로 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꾸게 된 것이다.14
그러나 저 녹색 슈트 속의 몸은 비닐 샌드백 안에 갇혀 결국 소멸의 낙원 속으로 진입하지 못한다. 투명하게 비워내기 위한 재현의 메커니즘 속에서 배경과 함께 지워질 조건을 입고 있는 저 몸은, 그러나 투명한 제약의 구조물 속에 들어앉아 있음으로 인해, 지워지지도 가려지지도 않는 모순적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발견되는 중층의 투명성은 몸을 표상하는 동시에 누락시키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자기지시적 순환의 구조로 진입한다. 그래서 사라지지도 존재하지도 못하는 무력한 몸이 거기에 있다.
물론 애초에 현실에서의 우리는 인간의 사라짐 따위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반대편 구석에서 스마트 워치 속을 언캐니하게 굴러다니는 눈알들이 ‘이건 (의외로) 괜찮아’라고 말하는 저 풍경이 그리 역설적으로 보이지만은 않는 듯하다(<This is fine>(2021). 불붙은 방 안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괜찮다고 말하면서 타들어 가는 개의 밈15에서 제목을 차용한 이 작품은 코로나19 이후 재난처럼 덮쳐 온 현실 상실의 사태를 맞이한 우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투명한 테이블과 거치대 위에서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몸 없는 시선들이 드러내는 공백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의 저 유명한 퍼포먼스16와 극적 대조를 이룬다. 크로마키 그린의 몸이 사라지지도 존재하지도 못하는 인간의 몸이었다면 이 작품 속에서 사라진 몸과 현실은 더는 미래에 대한 벅찬 희망도, 그러나 재난의 비극적 감정도 가질 수 없는 우리의 무감각한 공허의 일상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전시장 중앙에는 반쯤 사라지다 만 몸들이 보인다(<Lo-fi Manifesto_Cloud Flex>(2021). 천장에서 화려하게 점멸하는 최면적 그래픽 패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학생들 밑에는 빈 책걸상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역설의 구조로 비관 혹은 공허한 관조의 분위기를 띠는 전시장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단순한 구조의 이 거대한 작품은 유일하게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게 만든다. 작품은 얼핏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The Wall」(1979)을 연상시키지만, 교단의 교사마저 사라진 무대에 억압과 저항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전시장에는 작품의 분위기와 흡사하게 어떤 기대감을 고조시키는 몽환적 전자음악이 울려 퍼진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희망찬 미래가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Franco ‘Bifo’ Berardi)는 미래가 사라졌다고 말했다.17 예측 가능한 내일은 더이상 가능성과 불확실성이 공존하는 미래가 아니라 오늘의 참담한 현실의 연장일 뿐이기 때문이며, 현실의 과잉 구조화는 미래와 인간으로부터 흔들림과 불확실함이라는 인간적인 것들을 삭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는 다가오는 현실이며 우리는 항상 현재와 미래의 틈 사이에 존재한다. 신적 질서를 중심으로 하던 근대의 현실이 사라졌듯 오늘의 현실이 다시 사라져 가고 있다. (많은 근대인이 신이 사라져가는 변화의 중심에서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고 외쳤던 것을 기억해 보자.) 그리고 이 사라짐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과학기술의 혁명이 완고한 봉건질서의 인식체계를 무너트렸던 작동방식에 대해 기술했듯 메타라는 새로운 아르키메데스의 점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18 메타는 전혀 새로운 구조가 아니다. 주체가 존재하는 상황으로서 절대적인 현실의 층위 바깥으로 시점을 옮겨 주체가 놓인 상황을 선택의 일부로 대상화하는 자기지시적 구조(self-referential structure)인 것이다.19 인간은 이미 신적 질서의 사물에 과학의 눈금을 들이대어 그것들을 살육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장 보드리야르가 「시뮬라시옹」에서 언급하였듯이 신의 시대에 모든 기호를 보증하는 것은 존엄한 신이었다. 그러나 신의 죽음 이후 재현의 현실은 숫자(과학, 기술, 경제, 자본)의 힘을 빌려 거대한 실제적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현실의 기호들 뒤로 가려진 ‘공허함’에 존엄한 인간과 그의 믿음직한 친구인 숫자라는 보증자를 동시에 내세워 거침없이 현실의 아우라를 대체 해왔다. 그러나 작가가 텍스트 작업 <Crosscheck>(2019)에서 서술한 것처럼 신을 제거한 이 도구(숫자)가 존엄한 인간이 꿈꾸는 유토피아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확신했던 근대의 역동성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숫자의 시뮬레이션 속으로 잠식당해가는 오늘의 현실을 자초하게 된 것이다.20
우리는 앞서 몸의 소멸이 만들어낸 메타 구조에서 새로운 선택의 열림을 보았다. 이제 실제적 세계로서의 재현계는 더 이상 우리의 손에 쥐어진 유일한 무엇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현실에 대한 메타가 실현될 때 현실의 아우라는 사라진다. (초월의 위상을 의미하는 메타는 공교롭게도 히브리어로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선택이 있을 뿐이며 이 선택은 ‘실제 전구의 램프에 전기를 공급할 것인가’ 아니면 ‘게임 속 램프에 전기를 공급할 것인가’의 문제로 수렴되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이 선택의 상황이 바로 우리의 절대적 현실이다.
저 무한의 격자 위를 종종걸음으로 끊임없이 다가오지만 결코 우리에게 도착하지 않는 메시아를 보라[<Messiah is coming>(2021)]. 무한 반복의 밈 안에 갇혀 영원히 걸어야 하는 저 불능의 구원자는 결국 우리에게 유토피아는 도래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천국이 없다면 지옥 또한 존재하지 않듯이 유토피아가 없다면 디스토피아 또한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김상진이 <Lo-fi Manifesto_Cloud Flex>에서 제시하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은 신의 자리를 대신한 존엄한 인간이 보상으로 꿈꾸어온 전통적 유토피아를 향한 낡은 희망이 아니다. 기대감은 전혀 새로운 층위의 시대가 탄생시킬 새로운 인간의 시대에 대한 본능적 호기심인 것이다.21
이제, ‘나는 사라질 것’이라는 말하는 붉은 텍스트로 돌아가자. 자신의 예언을 지킴으로서 진실을 말하고 있는 이 언어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스스로 말하며 언어의 현실을 직조하고 그 거대한 울타리에 우리를 양 떼처럼 몰아넣어 자신의 내부에서만 존재하게(발화하게) 만든 위대한 침묵의 신이다. 인간에게서 그 생명을 얻은 이래 자신을 드러낸 적 없는 이 투명한 목소리는 우리를 끝없이 떠들게 독려하여 스스로 장성하였으며 우리에게 롱기누스(숫자)의 창을 건네 아버지(신)의 죽음을 사주하고 이제는 전능한 세계의 왕이 되어 자신의 어머니(육체)를 탐한다. 그리고 이 그림자 없는 유령의 후손들이 태어나려 하고 있다. 아마도 미래는 그 곳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