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

권하윤은 기억과 기록의 방식을 다룬다. 작가에게 가상 현실(VR)은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구현함으로써 공동의 기억 경험을 생산하는 매체다. 작품은 접근할 수 없는 장소나, 마음속에만 살아 있는 기억, 또는 기록되지 못한 사건처럼 역사에서 사라진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그리고 가상 공간을 빌려 구체적인 경험을 전달하려 한다. 기억을 확장하고 기록의 방식을 재고하기 위해서다.
Interview
CV
파리에서 거주하고 활동
학력
2011
프랑스 국립 현대미술 스튜디오 르 프레누아 석사, 투르쿠앵, 프랑스
2008
낭트 생나제르 에꼴 데 보자르, 시각예술 국가학위 석사, 낭트, 프랑스
2006
낭트 생나제르 에꼴 데 보자르, 조형예술 국가학위 학사, 낭트, 프랑스
주요 개인전
2023
《영원한 움직임, 이상한 행렬》,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
2019
《Then, Fly Away》, 두산갤러리, 뉴욕, 미국
《咫尺天涯 – Si proche et pourtant si loin》, 아라리오갤러리, 상해, 중국
2018
《I Suddenly Hear the Flap of Wings》, 사토르 갤러리, 파리, 프랑스
《Levitation》, 두산갤러리, 서울
2017
《The Bird Lady》, 팔레 드 도쿄, 파리, 프랑스
2016
《489년》, 렉투르 포토그래피 아트센터, 렉투르, 프랑스
2015
《The Accidental Paradise》, 이도향 갤러리, 파리, 프랑스
《The Forbidden Journey》, 샤토르 시립 미술학교, 샤토르, 프랑스
주요 단체전 및 스크리닝
2024
《올해의 작가상 2024》,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3
《시간의 형태: 1989 이후 한국 미술》, 필라델피아미술관, 필라델피아, 미국
《기억하기/감각하기 – 경험의 공동체》,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서스펜스의 도시, 워치 앤 칠 3.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회화 아닌》, 대구미술관, 대구
제네바 국제 영화제, 제네바, 스위스
《오픈 시스템 1: 오픈 월드》, 싱가포르 아트 뮤지엄, 싱가포르
2022
트라이베카 영화제, 뉴욕, 미국
《리플레이 더 퓨처 8》, MAXXI, 로마 ,이탈리아
《Video At Large – Intimacy》, 레드브릭 아트 뮤지엄, 베이징, 중국 /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 파리, 프랑스
2021
《다원예술: 잠재적인 마법의 순간을 위한 XX번째 시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디어아마존: 인류세 2019-2021》, 주브라질 대한민국 대사관 / 비디오브라질(온라인)
2020
《황금狂시대》, 일민미술관, 서울
《Global(e) Resistance》, 퐁피두 센터, 파리, 프랑스
2019
《불멸사랑》, 일민미술관, 서울
《Rumeurs et légendes》,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 파리, 프랑스
《The Way a Hare transforms into a Turtle》, 니콜라이 쿤스트홀, 코펜하겐, 덴마크
2018
《No Man’s Land》, 룩셈부르크 현대미술관, 룩셈부르크
《부산비엔날레: 비록 떨어져 있어도》, 부산현대미술관, 부산
《디지털 프롬나드》,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Respire》, 헤르츨리야 현대미술관, 헤르츨리야, 이스라엘
2017
《불확정성의 원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Elsewhere》, 아르고 팩토리, 테헤란, 이란
2015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아트선재센터, 서울
2014
《세상 속에 거주하기》, 7회 부산비엔날레,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We, the Enemy – Living Under Suspicion》, 유럽 미디어아트 페스티벌, 오스나브뤼크, 독일
《Inventing the Possible》, 주 드 폼 국립미술관, 파리, 프랑스
2013
《MELTING POTES》, 몽파르나스 박물관, 파리, 프랑스
《LOOP 2013》, 툴루즈 근현대 미술관, 툴루즈, 프랑스
2012
《젊은 창작 2012》, 104, 파리, 프랑스
2010
《White Noise》, 갤러리 리르본, 낭시, 프랑스
2006
《BAM!》, 자크브렐 문화공간, 티옹빌, 프랑스
《A Silent Night》, 라 뉘 블랑쉬, 메스, 프랑스
《Eldorado》, 에이디갤러리, 낭트, 프랑스
주요 수상
2023
제네바 국제 영화제 리플레 도르 몰입형 작품 금상, 스위스
2022
트라이베카 영화제 스토리스케이프 어워드 몰입형 작품 금상, 미국
뉴 이미지 페스티벌 몰입형 작품 특별상, 프랑스
2018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컴퓨터애니메이션 특별상, 오스트리아
2017
제8회 두산연강예술상, 한국
주요 레지던시
2019
두산레지던시, 뉴욕, 미국
2012-2013
104 레지던시, 파리, 프랑스
주요 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서울시립미술관, 한국
프랑스 국립 조형 예술 센터, 프랑스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 프랑스
버클리 미술관과 퍼시픽 필름 아카이브, 미국
Critic 1
우리가 새로운 시를 쓸 수 있다면
김지연 (미술비평)
당신이 어떤 진실을 알고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높은 확률로 거짓에 가깝다. 사건을 겪은 사람은 자신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전부 목격했고, 심지어 그 이면의 진실까지 알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서 있는 쪽에서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수많은 영화와 소설에서도 주인공이 미처 몰랐던 사실을 직면하고 그제야 진실을 찾으러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를 반복해왔다. 이 익숙한 플롯이 역설하듯이 진실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우리가 어떤 대상이나 사건을 바라볼 때는 그동안 쌓아 온 경험과 지식이 순식간에 총동원된다. 시선이 닿은 곳에 한 사람의 인생이 관여한다. 같은 자리에서 바라본다 해도 같은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완전히 반대편에 선다면 판이한 기억이 남을 테다. 여기에 시간까지 흐른다면 자기에게 유리한 편집과 각색을 거듭하며 진실은 먼 곳으로 내던져진다. 같은 사건의 목격자들이 전혀 다른 진술을 하는 이유다. 한 끗만 다른 각도에 서 있었다면, 긴 시간이 흐른 뒤의 기억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확실히 우리의 기억은 불완전하므로 왜곡이라는 함정을 피할 수 없다. 본 것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은 착각이며, 심지어 보이는 세계 뒤의 진실을 안다는 것은 오만이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기는 쪽이 조금 더 진실에 가깝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옳다고 믿고 싶어 하며, 대중은 불명확한 진실보다는 또렷한 거짓을 원한다. 개인 또는 집단 간의 오해와 단절은 이러한 어긋남에서부터 시작한다.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관계와 역사의 구조다.
1. 우리 사이의 ’빈 공간‘
권하윤은 이렇게 이야기의 화자와 청자 사이에 생겨나는 ’빈 공간‘을 주목하고 탐구해 왔다. 국경을 넘어 망명을 신청하려는 자의 탈출 경로에 관한 진술(<증거부족>(2011)), 판문점 근처의 대남 선전 마을로서 조작된 공간인 기정동(<모델 빌리지>(2014)), 남북한 사이의 비무장 지대(<489년>(2016)), 새를 수집하는 여인의 환상적인 집(<새 여인>(2017)) 등 그가 작품 속에서 다루는 공간은 모두 진실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그는 판단이나 결론을 제시하는 대신 우리의 기억과 경험은 서로 다르며 하나의 진실은 없다는 것을 그저 보여 준다.
특히 2011년의 애니메이션 작품 <증거부족>에서 이 ’빈 공간‘이 잘 드러난다. 이야기의 주인공 오스카는 프랑스에 망명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진술하지만, 결정권을 가진 프랑스 정부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이야기를 쉽게 믿지 않는다. 그들 사이의 ’빈 공간‘이다. 오스카는 자신이 탈출한 경로를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 주었지만 이 또한 또렷한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타인의 기억은 증거가 없다. 때때로 우리는 그것을 들여다보고 싶지만 불가능한 환상일뿐이다. 권하윤은 실사 촬영의 한계를 지니는 영화 대신, 눈에 보이지 않고 찍을 수도 없는 타인의 기억을 재현하는 마법을 부리기 위해 3D 애니메이션을 선택했다. 그는 오스카의 진술을 듣고 탈출 경로를 상상하여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고 오스카의 그림과 겹쳐서 보여 주었다. 물론 아무리 사실적이라도 현실은 될 수 없기에, 오스카와 프랑스 정부, 오스카의 이야기를 듣는 작가, 작가가 만든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 사이에 무수한 ’빈 공간‘이 또 솟아난다. 명백한 진실은 영원히 알 수 없다.
작가는 <증거부족>에서 ‘빈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애니메이션을 도입한 뒤, 점차 실사가 아닌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조작된 대남 선전 마을 기정동을 멀리서 바라보는 시선을 표현한 <모델 빌리지> 역시 모형을 촬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DMZ라는 중간 지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전직 군인을 인터뷰하다가 <489년>의 주인공 김씨를 만났다. 처음 보는 식물들이 달빛 아래 실루엣을 드러내며 만드는 환상적인 이미지, 그리고 언제 나타날 지 모르는 북한군과 지뢰의 존재로 인해 생사를 넘나드는 감각이 섞여 든 그의 경험담은 너무도 생생해서 마치 DMZ에 들어갔다 나오는 간접적 경험을 한 듯했다.1 이 생생한 느낌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스크리닝(screening, 상영)이 아닌 다른 매체가 필요했다. 보다 현실적인 공간을 사적으로 가까이 경험하면서 비밀스런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가상 현실(VR)이다.
이어서 권하윤은 <새 여인>에서 시간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관객에게 부여한다. 전작들이 화자의 이야기에 따라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선형적 구조였다면, <새 여인>은 관객에게도 참여할 기회를 준다. 작가의 드로잉 선생님 다니엘은 건물 계량과 실측을 위해 오래된 주택에 방문한다. 새를 수집한다고 알려진 ’새 여인‘의 집이었다. 관객은 작품 속에서 다니엘이 되어 묵직한 문을 열고 대리석 계단을 오른다. 한 여인이 문을 열며 반갑게 맞아 주는데, 그 뒤로 새와 새장으로 가득한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여기서 전작과 확연히 다른 점이 발견된다. <489년>에서 관객은 VR 헤드셋을 착용하고 앉아서 수동적으로 감상하는 데 반해 <새 여인>에서는 관객이 헤드셋을 쓴 채 직접 움직인다. 계단을 오르거나 걷다가 멈추어 주변을 둘러보는 등 관객이 움직이는 속도가 작품의 진행에 그대로 반영된다. 관객은 일부나마 직접 ‘시간’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가상 공간 속에서 현존하는 감각을 보다 강하게 느끼며 타인의 기억 속으로 더 깊이 진입한다.
직접 발을 움직이고 손을 뻗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관객마다 다른 경험을 생성한다. 물론 헤드셋을 벗는 순간 가상 공간은 신기루처럼 사라지지만 그럼에도 다른 사람이 되어 본 강렬한 경험은 하나의 사건이 되어 관객의 기억에 새겨진다. 또한 동시에 헤드셋을 착용하고 가상을 헤매는 관객들의 느린 움직임이 중첩되어 마치 퍼포먼스처럼 보이는 외부 장면이 연출된다. 관객의 움직임이 작품의 요소로 포함되면서 기존 영상이나 가상 현실의 형식을 넘어 퍼포먼스로 향하는 중간 지대에 이른 것이다.
2. 타인의 세계에 도달하기
권하윤은 기억과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진실의 겹을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가상현실을 이용한다. 작품을 통과한 관객이 현실을 더 풍성하게 감각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적으로 구현한다고 할지라도 미디어 작품은 빛이 꺼지는 동시에 사라진다. 게다가 ’가상(假想)‘의 사전적 의미는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 여부가 불분명한 것을 사실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고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가상을 통해 관객이 어떻게 현실을 더욱 잘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일까.
사실 미디어라는 매체가 등장한 이래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과의 관계에 우려를 표했다. 특히 귄터 안더스(Günther Anders, 1902–)는 미디어가 실제 경험을 대체해 버리고 인간의 비평적 사고를 앗아 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에 따르면 누군가 이미 편집한 미디어 매체는 ‘수단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편집된 ’팬텀-버전(Phantom-Version)’의 세계를 체험하고 있으며 실제 세계를 점점 더 알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있다.2 폴 비릴리오(Paul Virilio, 1932–) 또한, 빛이 꺼지면 사라지는 광학 매체의 허망함을 지적했다. 먼 곳의 장면을 실감 나게 눈앞에 펼쳐 놓는 듯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미디어는 오히려 우리의 물리적 경험과 대면 소통을 무너뜨리는 존재다.3
미디어에 비판적인 이론가들의 공통적 견해는 미디어가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눈앞에 새로운 세상을 펼쳐 놓았다가 기기를 벗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지는 첨단 광학 매체인 가상 현실은 이들이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매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TV나 영화와 달리 관객의 몸이 있다. 관객의 신체 반응을 하나의 요소로 포함하며 온전히 1인분의 경험을 제공하는 가상 현실은 인간을 소외시키기보다 사건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인다.
현실에서 우리의 물리적인 행동은 외부 세계와 맞닿으며 변화를 만든다. 가상 현실이 마치 현실처럼 제대로 작동한다면 이용자는 실제로 다른 곳에 존재한다고 느끼는 ‘심리적인 현존감(psychological presence)’을 갖게 된다. 연구자들은 이 경우 이용자들의 운동 신경과 인지 체계가 현실과 비슷하게 작동한다고 말한다. 경험한 몸은 기억을 새긴다. 가상 현실을 재난 대비나 운전 등 다양한 훈련에 활용할 수 있는 이유다.4 권하윤은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역설적으로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다른 현실을 깨닫도록 만든다. 관객은 수동적 관찰이 아니라 운동 신경과 인지 체계를 작동시키며 적극적으로 작품에 개입하며 타인의 내밀한 기억에 진입한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진실을 깨닫는다. 사건을 바라본 방향에 따라 다른 진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상 현실을 통해 평소 경험하기 어려운 상황을 겪어 보는 것이 타인의 관점과 사고, 감정을 이해하는 ‘사회적 조망수용능력’을 키운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5 작품 감상은 개인적인 기억이 되어 몸에 새겨지는 동시에, 우리의 좁고 왜곡된 시야 너머에 존재하는 타인의 세계에 도달하도록 만든다. 빛이 머무는 곳에 공감과 연대의 작은 토대가 생겨난다.
3. 가상이라는 장소
<489년>과 <새 여인>, <피치 가든>(2019)을 차례로 발표하며 개인의 내밀한 기억에 집중하던 권하윤은 2020년대부터 다시 영역을 확장하여 공적인 장소나 역사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구보, 경성 방랑>(2021)은 20세기 초 서울의 풍경과 신문 아카이브를 다루며 자유와 검열의 경계를 보여 주었고, 2023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인터랙티브아트 랩에서 발표한 <잊어버린 전쟁>에서는 한국(6.25) 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으나 잊혀지고 만 지평리 전투의 기억을 소환한다.
지평리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나, 생존한 참전 용사들의 구술기록과 프랑스 등 각지에 남겨진 자료를 탐구하던 작가는 또 다른 진실을 깨닫는다. 전략적 요지였던 지평리를 중공군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싸웠던 이들은 미군과 프랑스군 그리고 프랑스군에 편입된 소수의 한국군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작품 속에 종군 기자, 한국군, 프랑스군, 중공군 등 다양한 입장의 이야기를 담으며, 관객이 하나의 사건에 대한 여러 개의 시선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이끈다.
신작 <옥산의 수호자들>(2024) 역시 대만 중심의 옥산(玉山, 위산)에 얽힌 역사적 설화를 기반으로 한다. 일본이 대만을 침략했을 당시, 옥산에 살고 있던 부눈(Bunun)족은 가장 강하게 저항하던 소수 민족이었다. 물론 역사에는 국가 간의 대립만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대만의 다양한 소수 민족들은 현재 언어조차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문화가 희미해졌다. 작가가 처음 자료를 조사할 당시에는 일본에서 온 인류학자 모리 우시노스케(森丑之助, 1877–1926)와 부눈족 족장이 개인적인 우정을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실화인지 꾸며진 이야기인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기록을 끈질기게 탐구함으로써 이야기의 근거를 찾아내고 이를 시적인 풍경으로 재현해 낸다.
빛으로 만든 가상의 공간에서 관객은 모리가 대만으로 건너 오게 된 이야기를 들으며 서서히 옥산으로 진입한다. 대나무로 만든 등을 손에 들고 모리의 발자취를 따라 옥산의 자락을 헤맨다. 등불의 빛에 의지해 처음 보는 동물과 식물들을 발견한다. 식물의 학명은 첫 발견자의 이름을 붙이는데, 실제로 대만에는 모리가 처음 발견하여 그의 이름을 딴 식물이 많다고 한다. 권하윤 작가는 현실을 고증하기 위해 고도에 따라 다르게 서식하는 옥산의 식물들을 가상 현실 속으로 옮겨 왔고, 그곳에 사는 동물들의 움직임을 자연스레 구현했다.
가장 재미있는 장치는 손에 든 대나무등이다. 현실에서 관객이 손에 든 대나무등과 가상 공간 속 대나무등이 연동되기 때문에, 관객은 어두운 숲 속을 등불로 밝히며 걷는 느낌을 보다 현실감 있게 경험할 수 있다. 등불에 놀라 부엉이가 푸드득 날아가고, 나뭇잎의 색이 빛에 따라 변한다. 아마도 모리가 옥산을 탐험하면서 보았던 장면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관객의 감각과 가상 현실 속 반응이 일치하게 만듦으로써 관객은 이전보다 더 높은 현존감과 선명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전원이 차단되고 빛이 사라지면 가상 현실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현실에서 물리적 공간(space)은 사회적 기억이나 역사가 쌓이면 맥락을 가지는 장소(place)가 되고, 실제 공간이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물리적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 현실도 장소가 될 수 있을까?
미디어 이론가 괴츠 그로스클라우스(Götz Großklaus, 1933–)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의 공간이 물질적 공간에서 비물질적 공간으로 바뀌더라도 장소는 소멸하지 않는다고 했다. 장소가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 기억과 흔적이 중요하다.6 실제로 국내의 한 연구에서는 가상 환경으로 구현한 제3자의 사적인 기억을 높은 현존감으로 경험했을 때, 이는 체험자에게 또 다른 사적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주체적 경험이 된다는 것을 밝혔다. 우리는 디지털 매체로 만든 가상 공간을 아무런 기억도 흔적도 없는 일종의 ‘비장소(non-place)’로 여기지만, 현존감과 전이, 공감을 통해 현실과 같은 장소성을 만들 수 있다.7
권하윤은 현실의 ‘빈 공간’을 발견하고, 기록과 구술 자료를 조사하고 연구하여 타인의 기억을 되살리며 가상의 공간을 만든다. 관객의 경험과 기억은 이 공간을 새롭게 재편한다. 여러 사람의 기억이 중첩되는 사이에 지평리와 옥산은 현실에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장소가 된다. 작가는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만들고 현실에는 없지만 꼭 필요한 대안적인 세계를 설계한다. 오해와 단절로 메워지지 못하는 현실의 ‘빈 공간’들이 점점 커져갈 때, 작품은 그 공허한 어둠을 밝히는 빛8이 된다. 가상의 장소를 통해 현실의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
4. 몸과 겹
그리고 이 장소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진다. <잠재적인 마법의 순간을 위한 XX번째 시도>(2021)에는 관객을 따라 움직이는 퍼포머라는 외부 장치가 하나 더 있었다. VR 헤드셋을 착용한 관객은 반딧불을 따라 가상의 정원을 산책한다. 걷기도 하고 무언가를 만지기도 하며 천천히 움직인다. 그러자 1대 1로 따라붙은 퍼포머가 관객의 동작을 그대로 본떠 움직이고, 대구를 이루는 두 사람의 움직임은 마치 함께 춤추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헤드셋을 착용한 관객에게 퍼포머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나머지 관객을 위한 장치다. 이 작품은 3명이 동시 입장하여 차례로 작품을 감상하는 구조인데, 먼저 감상 중인 관객은 자연스레 기다리는 관객 앞에서 공연하는 퍼포머가 된다. 감상을 마친 뒤 자리에 돌아오면 다시 또 다른 관객의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관객의 위치가 바뀌는 사이에 현실과 가상 현실도 교차한다. 작품의 내용을 이미 잘 알고 있는 훈련된 퍼포머는 안과 밖의 세계를 매개하는 존재이자, 작품에 추가된 신체성과 공연성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는 촉매가 된다.
이러한 ‘시도’는 <피치 가든>(2020)에서 얻은 아이디어다. 관객의 신체적 자유를 위해 더 넓은 공간을 마련했던 이 작품에서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관객들의 모습에 주목한다. 가상 공간이 의미 없는 허무로 남는 것을 막으려면 현실 공간과의 괴리를 메울 필요가 있었는데, 이에 적합한 것이 현존하는 몸의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기기를 착용하고 <피치 가든> 속 가상의 정원을 감상하는 관객의 느린 걸음과 꽃과 나뭇잎을 건드리는 손짓은 매우 시적이었다.
몸의 움직임은 <잊어버린 전쟁>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삽입된다. 관객이 VR 헤드셋을 착용하고 어둠 속에서 눈을 뜨면 몇몇 인물들이 제각각 다른 행위를 하고 있다. 그중 한 인물의 등 뒤로 다가가 몸의 위치를 맞춘 뒤 인물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 동작을 따라하면 장면이 전환되며 그의 기억이 재생된다. 가상 현실 내에서 사용되는 핸드 트래킹(hand tracking)9 기술이다. 동시에 관람 중인 관객은 제각각 다른 손 동작을 하게 되며, 차례를 기다리는 외부의 관객은 또 다른 퍼포먼스를 관람할 수 있다.
가상 현실은 어찌 보면 가장 신체성이 없는 매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권하윤은 이러한 방식으로 작품에 신체성을 포함시켜 관객의 현존감을 높이고, 작품 외부에 공연성이라는 겹을 더한다. 작품의 안팎에서 다양한 방향의 진실을 경험한 관객은 지평리 전투라는 사건을 더욱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하여 작품의 내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기억과 경험의 층위가 외부까지 확장된다. 각자의 경험 사이에 겹겹의 구조가 탄생한다.
5. ‘빈 공간’의 재탄생
권하윤의 작업은 전작과 신작이 밀접한 인과 관계를 이루며, 기존의 구조에 새로운 요소를 더해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그는 그동안 시선의 방향과 사건의 다양한 층위를 탐구하고, ‘빈 공간’을 찾아냈다. 또한 개인의 내밀한 기억을 드러내기 위해 가상 현실로 매체를 바꾸고 신체성과 공연성을 더하여 작품의 범위를 확장했다. 신작 <옥산의 수호자들>에서는 기존의 특징을 모두 반영한 동시에 새로운 시도를 더하였다.
대만의 일본 침략과 소수 민족의 저항 사이에서 ‘빈 공간’을 찾고, 모리라는 실존 인물의 개인적인 일화를 통해 빈 곳의 여지를 드러냈다. 남겨진 모리의 기록과 부눈족의 문화, 실제 지형의 특성과 동식물 자료를 수집해 구체적인 공간을 만들고, 관객이 보다 현존감 높은 감상을 통해 타인의 기억을 공감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또한 이번에도 감상 중인 관객의 움직임을 퍼포먼스로 확장했는데, 더 흥미로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하여 장치를 더했다. 감상 공간 외부에 나무와 풀숲의 그림자가 프린트된 반투명 장막을 설치한 것이다.
이는 대만의 전통 그림자 연극에서 차용한 장치다. 작가는 이 모티브를 작품의 내부에도 적용했다. 모리의 뒤를 따라 옥산의 깊은 숲속을 탐험하던 관객은 나비떼를 따라 넓은 바위 앞에 다다르고, 이를 손에 든 대나무등으로 비추어 보게 된다. 등불 아래에서 그림자 연극이 시작된다. 리드미컬한 북소리와 함께 일본인들과 부눈족이 대치하는 장면이 은유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그림자 연극을 관람하며 숲속을 거니는 관객의 모습은, 장막의 바깥에서 바라보면 마치 옥산의 깊은 숲속을 탐험하는 모리의 모습처럼 보인다.
<잠재적인 마법의 순간을 위한 XX번째 시도>에서 퍼포머의 존재를 통해 관객의 신체성을 작품의 요소로 포섭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 작가는, 이번에는 그림자 연극을 통해서 공연성을 또한 작품의 겹으로 포섭하겠다고 또렷하게 선언한다. 작품의 안과 밖, 관객의 위치가 바뀌면서 바라보고 다시 보여진다. 이렇게 잊힌 역사의 한 조각은 작품의 안팎을 넘나들며 관객 개개인에게 또 다른 기억으로 새겨진다. 하나의 공간에 겹겹의 층위를 가진 집단의 기억과 경험이 스며든다. 가상의 공간에 장소성이 생겨나는 순간이다. ‘빈 공간’은 이렇게 다시 태어난다.
6.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계
권하윤은 방대한 리서치와 치밀한 기술적 계획에 따라 가상 현실 작품을 구성하지만, 관객은 그 속에서 은유적이고 단순한 장면을 경험한다. 그는 일부러 주석을 달거나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또 하나의 진실이라는 태도다. 현실의 세계 또한 많은 은유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을 포착하고 연결하는 일로부터 새로운 진실이 탄생한다. 우리는 그저 작품 속을 거닐며 전에 없던 세계를 발견할 뿐이다.
기술과 매체 앞에서 인간은 자꾸만 소외되는 것이 현실이다. 매체가 우리의 실제 경험을 대체해 버리고 비평적 사고를 말살시킬 우려가 있다는 안더스의 의견에는 일리가 있다. 특히나 작가가 비평적 사고를 마친 뒤 이를 매체에 담아 전달할 때, 우리에게 도착하는 것은 하나의 의견 뿐이다. 그러나 권하윤은 예술가가 직접 말하는 대신 극 속의 등장 인물들이 직접 말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시인의 미메시스다. 정해진 관점이나 교훈이 제시된 이야기가 아니라 은유적인 상황 속에서 관객은 자연스레 타인의 경험 속으로 빠져들고, 각자의 손에 판단의 키를 쥔다. 매체 앞에서 소외되지 않는 관객의 모습은 우리가 기술의 부품에 불과하다는 안더스의 비관적 견해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있을 테다.
또한 권하윤의 작품은 가상 현실과 퍼포먼스의 경계를 해체하고, 최신 기술을 사용한 작품에 가장 아날로그적인 몸을 끌어들인다. 기존과 다른 어법을 구사하는 그의 작품을 보며, ‘신체시(新體詩)’10라는 단어를 떠올려본다. 우리는 어쩌면 같은 매체를 사용하더라도 전혀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실존하는 공간과 단일한 시선을 그대로 가져온 가상은 현실의 모방에 불과하지만, 기억과 경험이 중첩되는 곳은 가상이더라도 또 다른 대안적 현실이 될 수 있다. 이곳에서는 현실에서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들이 빛을 낸다. 하나의 주체가 그 밖의 객체를 비추는 ‘계몽의 빛’11은 무의미해졌다. 개별 존재들이 각자의 가능성을 가지고 빛을 내는 이곳은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계다.
빈 곳마다 진실이 피어나고 관객의 움직임이 겹치면 그 자체로 운율이 된다. 공고하다고 여겼던 기억과 경험의 맥락이 해체되며 겹과 겹 사이가 더욱 풍성하게 부푼다. 역시 우리가 안다고 여기는 것은 거짓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눈앞에 있는 진실을 아직 모른다는 것뿐이다.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가 말했듯이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어느 시인은, 시는 눈으로 읽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 육체로 호흡하며 읽는 것, 같이 읽는 것이라고 했다.12 우리가 권하윤의 작품을 통과하며 새로운 시를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온몸으로 읽는 시, 같이 읽는 시가 될 것이다.
1. 국립현대미술관 “작가와의 대담”(권하윤 작가, 맹지영 전시 기획자, 손옥주 공연학자, 2021. 2. 25.)
2. 심혜련, 『20세기의 매체철학』, 그린비, 2021, pp. 109–111.
3. 폴 비릴리오, 『시각 저 끝 너머의 예술』, 이정하 옮김, 열화당, 2008, p. 27.
4. 제러미 베일렌슨, 『두렵지만 매력적인』, 백우진 옮김, 동아시아, 2019, pp. 34–57.
5. 제러미 베일렌슨, pp. 122–139.
6. 심혜련, pp. 312–321.
7. 이화영, 김상용, 「VR 환경에서 재현된 개인적 공간 연출의 장소성이 사용자에게 주관적 시점으로 몰입되는 주체화 과정에 대한 연구」,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논문지』, Vol. 25, No. 1, 2024, pp. 39–48.
8. 빌렘 플루서, 『피상성 예찬: 매체 현상학을 위하여』, 김성재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p. 304.
9. 사용자의 손동작을 인식하여 컴퓨터를 작동하는 기술이다. <잊어버린 전쟁>에서는 관객이 VR 헤드셋을 착용한 뒤 가상 공간 안에서 만나는 인물의 손동작을 따라하면 이것이 인식되면서 장면과 사운드가 전환된다.
10.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新) 몸(體)과 같은 형식으로 쓴 시를 뜻한다.
11. 빌렘 플루서, p. 363.
12. 황인찬, 『잠시 작게 고백하는 사람』, 난다, 2024, pp. 32–40.
Critic 2
역사 구성의 잠재태로서 내밀하고 사적인, 에피소드적 ‘증언’
조주현 (독립 큐레이터,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겸임교수)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또 무엇인가?
이를 알 수가 없기에(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렇게 단순하고 바보 같은 질문을 제기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 이를테면 우리로 하여금 설문지를 채우게 하는 고용주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출생 연월일, 부모의 직업, 교육 정도, 경력, 주거 상황, (나의 조국에서는 공산당 가입 여부가 덧붙는다), 결혼, 이혼, 자녀들의 출생 연월일, 성공, 실패… 끔찍한 일이지만 바로 이렇게 우리는 행정적 설문지나 경찰 조서의 시각으로 우리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배웠다.
– 밀란 쿤데라, 『불멸』1
I. 들어가며
권하윤은 주로 경계와 정체성을 주제로 개인의 역사와 기억을 재구성하며, 현실과 가상 사이의 양가적인 관계를 탐구해 왔다. 이러한 주제를 표현하는 매체로 작가는 ‘이야기’라는 원초적 소통 수단에 주목하는 동시에, 3D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VR(가상 현실) 등을 사용해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사람들이 타인과 어떻게 대화하고 관계 맺고 있는지 보여 준다. 그는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의 혼성 장르를 통해 DMZ와 같은 군사적 접경 공간이나 국경선 등의 지리적, 정치적 경계가 지닌 상상적이고 허구적인 본성을 드러내는데, 이때 작가가 만난 사람들의 개인적 경험을 통한 ‘에피소드’가 진실의 재구성을 위한 중요한 매개체로 작동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처음, 중간, 끝으로 구성된 ‘전체’의 규칙을 따른 플롯과는 반대로 개연적이고 필연적이지 않은 여러 에피소드들의 연속인 에피소드식 구성을 가장 나쁜 것”이라 평가한 바 있다.2 그에게 에피소드는, 이야기의 인과적 연쇄 고리 바깥에 놓여 전체 구성에서 빠진다 해도 전혀 무관한 ‘실없는 우연’일 뿐, 등장인물들의 삶에 흔적을 남기지도 못하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들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은 수없이 많은 에피소드들의 연속이다.
《올해의 작가상 2024》 전시에 출품하는 권하윤의 4개 작업 <증거부족>(2011), <모델 빌리지>(2014), <489년>(2016), <옥산의 수호자들>(2024)은 제국주의, 정체성, 이데올로기, 국가, 민족, 인간 너머의 존재, 원주민과 식민지 역사 등을 가르는 무수히 많은 경계 위에서 개인들의 기억이나 경험에 잠재된 인과적 결과들이 어느 날 문득 되살아나 갖가지 결과들을 유발할 수 있는 에피소드의 상대성에 주목한다. 에피소드는 ‘지뢰’와 같이 어떤 역사적 사건을 구성해 낼 수 있는 잠재태로, 대부분은 영원히 폭발하지 않으나 가장 하찮은 지뢰 하나가 부메랑이 되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날이 올 수 있다. 아무리 하찮을지라도 모든 사건은 나중에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되고, 그리하여 어떤 이야기로, 어떤 역사로 탈바꿈할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권하윤은 프랑스 낭트 생나제르 에꼴 데 보자르에서 수학하던 당시 일본인 룸메이트와의 대화 중 미묘한 역사적 감정을 경험한 적이 있다. 학창 시절 일제 강점기 식민지 역사를 강조해 온 한국의 교육 과정을 경험한 자신과 달리, 일본 제국주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일본인 친구의 역사 인식에 대해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곧장 그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역사 해석에 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하며 일본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일제 식민주의 역사에 대해 깨달은 한 일본인 친구로부터 자신의 조국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사과를 받은 작가는, 개인적 경험이나 기억을 갖지 않은 이들(후손들)에게 있어 역사적 진실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인지 반문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으로 그는 2010년 서울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계획했다. 그 공간이 기억하는 진실을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담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곳은 말초적인 자극을 유도하는 역사 체험들과 관광지의 스펙터클로 채워져 있었고, 역사의 이면에 감춰진 사실이나 정당성, 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누군가의 고통마저 몰래카메라로 훔쳐보는 은밀한 구경거리로 대상화되고, 역사적 사건들을 단순한 이미지로 추상화시키는 현장이었다.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독립운동가의 사진이나 당시 현장을 재현한 설치물들은 즉각적으로 사람들의 동정심이나 연민의 감정을 유발하지만, 그 순간 그 고통이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는 안도감 이외에도, 고통의 원인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무책임함, 동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는 무능력함에 대한 감정도 유발한다.
결국 그의 다큐멘터리 영상 <벽>(2010)은 미완성의 상태로 남겨졌다. 의도적으로 지워지거나 삭제된, 또는 기록되지 않은 과거의 사건이나 기억은 어떻게 증언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증인 이론에서 부정되거나 제한되었던 사물이나 공간들에 주체성을 부여한다면 은폐된 역사의 잔해 더미 속에서 감추어진 역사적 인간들의 고통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무엇이 증인을 증인으로 인정받게 하는 것일까? 법정에서, 실험실에서, 미디어에서 인정되는 증언의 조건은 무엇인가?
II. 관계적 과정으로서의 ‘증언’
그 시기 권하윤은 프랑스에서 학업을 마치고 스스로 체류 허가증을 받기 위해 출입국 사무소를 드나들며 이민자로서의 정체성과 ‘국가’라는 경계 개념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타국으로 망명을 신청한 이들에게 ‘국경선’은 우리와 타자,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작가는 국경선을 “인간이 만들어 낸 완벽한 픽션의 산물”이자, 얼마든지 재구성할 수 있는 상상의 공간으로 여긴다. 2011년 작품 <증거부족>은 경계에 대한 이러한 작가의 개념이 반영된 초기 작업으로, 프랑스로 망명을 신청했으나 ‘객관적’ 증거 부족으로 거부당한 나이지리아 태생의 오스카(가명)라 불리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의 형식으로 제작한 영상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서구 백인 중산층 지식인 남성의 ‘상황적 지식’이 만들어 낸 허구적인 거대 서사 속에서 증거로서 인정되지 않는 한 아프리카인의 내밀하고 사적인, 에피소드적 기억을 ‘구원’할 수 있는 서사 구조의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한다.
동화나 설화 속 한 장면처럼 보이는 3D 애니메이션 영상은 짙은 어둠이 깔린 고요한 나이지리아의 한 시골 마을 전경을 비추며, 불어를 사용하는 한 중년 여성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이 여성은 오스카의 프랑스 망명 신청을 도왔던 통역사로, 오스카 형제가 마을을 탈출하기 위해 도망쳤던 날 벌어진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가상 카메라가 오스카의 집 안으로 들어와 내부 구석구석을 훑으며 움직일 때, 영상은 그 이미지들이 만들어진 3D 그래픽의 골조를 드러내고, 화자는 여성의 시점에서 오스카의 시점으로 전환된다. 오스카 형제는 새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곧이어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낯선 이들을 피해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뒷마당에서 이어지는 마을의 숲으로 달아났다. 이들이 집 밖으로 도망치는 장면부터 영상은 사실주의적 3D 애니메이션 그래픽이 아닌 흑백의 라인 드로잉 스케치로 변화하며,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픽션인지 알 수 없는 구술 기억임을 드러낸다.
자신의 뒤에서 도망치던 쌍둥이 형제가 아버지의 사람이 쏜 총에 맞아 죽고 난 뒤 혼자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오스카는 다시 자신의 조국 나이지리아로 돌아갈 수 없어 프랑스로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마을의 의례를 관장하는 사제이자 주술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쌍둥이를 부정한 존재로 인식했던 나이지리아 부족 공동체의 오랜 문화적, 종교적 신념과 전통을 따라야 했기 때문에, 오스카 형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망명을 위해 프랑스 정부에 제출한 증거 자료는 오스카의 구술 기억을 불어로 번역한 진술서와 탈출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연필로 그린 마을 지도 그림 한 장이 전부였다. 영상은 이 물리적 증거인 A4 용지들을 비출 때만 디지털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사 촬영한 화면으로 편집된다.
<증거부족>은 역사적으로 또는 행정적으로 국가 권력이 어떠한 사건을 중요하다고 평가하고, 그것을 선별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행정적 설문지나 경찰 조서의 시각”은 권력의 완벽한 도구가 되어 서구 근대 제도를 구성해 왔다. 그에 반해, 내밀하고 사적인, 주관적 기억은 승자들의 세계에서 증거로 인정되지 않는다. 아프리카 부족 공동체의 신념과 종교적, 정치적 영향으로 목숨의 위험에 처한 어느 나이지리아인의 구술 기억은 유럽 국가에서 아무런 실효성이 없는 증언이며, 타자로서 이들의 고통과 공포는 끊임없이 근대사에서 은폐되어 왔다. 작가는 스스로 인위적인 이미지임을 드러내는 애니메이션과 주어진 환경을 캡처하는 실사 촬영 기법을 혼합하고, 불어 통역사의 목소리로 한 아프리카인의 에피소드적 사건과 애매모호한 사실 관계를 오가는 서사 구조를 만들어 관습적 다큐멘터리의 인식론적 전제를 넘어선다. 이러한 새로운 다큐멘터리 방법론을 통해 작가는 “사건들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경합하는 진실들을 구축하는 이데올로기와 의식, 즉 우리가 사건들을 이해하는 데 의존하는 허구적인 거대 서사를 드러낼 뿐이다.”3
그렇다면, 그 ‘허구적인 거대 서사’는 지금까지 어떻게 구축되었고 뒷받침되어 온 것인가? 진보의 시간 속에서 의미가 승인되는 근대적 역사 기술은 인과적 서사 구조에 따라 기획된 것이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계몽주의로부터 계승된 근대적 제도의 토대로서 과학적, 법적 증인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가장된 중립성’이었다. 제도적으로 승인되는 증언은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 감정 등이 반영되지 않은 철저한 객관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재를 거울처럼 보여 줄 수 있도록 사실적인 설명을 할 수 있는 목격자는 “눈에 보여서는 안 되며, 자기 비가시성(self-invisibility)이라는 기이한 관습에 의해 구축된 강력한 ‘표시가 없는 범주(unmarked category)’의 거주자”4이어야 했다. 모든 이해관계를 초월한 듯 인종, 계급, 젠더적 표지를 감추는 이 ‘겸손한 목격자’의 가장된 비가시성이 역설적으로 ‘근대, 유럽, 남성적’ 과학 지식의 객관성과 단일한 주체 개념을 보증하게 되었고, 과학은 세계를 파악하는 권위적인 방식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이렇게 세계는 오로지 서구 백인 중산층 지식인 남성의 ‘상황적 지식’을 초월적, 총체적, 객관적 지식으로 간주하게 되었다.5
프랑스 정부 관료들에게 흑인 오스카가 증언하는 나이지리아 일부 부족의 전통적 신념, 관습, 종교 의식과 같은 ‘상황적 지식’은 넘쳐나는 가시적 표지들로 인해 객관적 사실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의 증언은 인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구 백인 중산층 지식인 남성의 관점에서 누군가에 의해 ‘통역’되어야 하는 비인간화된 사건으로 여겨질 뿐이다. 국경을 넘어 망명을 신청한 이의 정당성을 심판하는 곳에서, 그것은 ‘증언’이나 ‘목격’의 지위를 얻어 정의의 사건으로 진위를 가리고 무엇이 중요한지 밝히며 사건을 정의의 무대로 끌어올릴 이유가 없다고 보이는 이야기꾼의 모험담이다. 권하윤은 <증거부족>에서 3D 애니메이션의 활용으로 증언을 증언자의 모습이나 증언의 행위 또는 대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배제되고 소외된 인간 집단과 그들의 관습을 대화에 끌어들이는 관계적 과정을 구축했다.
III.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사라진 모순적인 공간, 에피소드를 매개로 한 공동의 공간
사회 정치적, 문화적, 심리적 경계로서 ‘국경선’에 대한 권하윤의 관심은 줄곧 한국의 남북한 군사적 접경지대인 DMZ를 향해 있었다. DMZ는 군사 순찰 외에는 외부인의 접근이 철저하게 통제되는 장소로, 사실상 인간의 진입이 금지된 곳이다. 북한이 체제 선전을 위해 DMZ 내에 인위적으로 조성한 민간인 거주 마을 기정동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기 위해 몇 해 동안 시도했던 촬영 허가 요청이 무산되자, 작가는 그 선전 마을을 직접 건축 모형으로 제작하고 그 모형을 촬영해 디지털 영상을 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모델 빌리지>(2014)는,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건물들을 흰색으로 칠한 지형에 조립한 모형 안에서 가상 카메라가 움직이고, 다양한 사운드, 강한 조명으로 조절되는 빛과 그림자의 연출을 통해 그곳의 연극성을 드라마틱하게 시각화한다.
아무도 방문할 수 없고, 아무도 살 수 없는 이 마을 모형을 비추는 가상 카메라가 실제 외국인 투어 가이드의 목소리를 따라 마을 내부로 들어가면, 북한의 생활상을 재연하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김일성 체제를 찬양하는 방송이 송출된다. 화면은 이 모든 재연의 인공성을 노출시키는 장치들을 드러내며 그 장소의 허구성을 극대화한다. 마을 전체에 인공적 조명이 드리우고 그래픽으로 축조된 산 위에 마을의 그림자를 투영할 때, DMZ라는 지정학적 장소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시각적 증거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심리적 경계로부터 기인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모델 빌리지>(2014)가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바라보는 시점으로 텅 빈 대상과의 물리적 관계를 다루었다면, DMZ의 풍경을 3D 애니메이션을 통해 환상적으로 그려 낸 〈489년〉(2015)은 그곳에서 수색대원으로 근무했던 구술자의 실제 경험을 작가가 상상적으로 구현해 낸 작업이다. 〈489년〉은 DMZ에서 수색대원으로 근무했던 한 군인이 당시의 기억을 증언하는 실제 육성을 듣고 작가가 자신의 상상을 통해 재현한 DMZ의 풍경 안으로 관객을 진입시킨다.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현실 속 가상 공간인 DMZ를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현실에서 픽션으로 넘어가는 경계를 VR로 생생하게 경험하게 한다. VR이라는 매체는 이미지들 사이로 신체적 경험을 가능케 하여 인간 존재의 일시성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도구이다.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사라진 모순적인 공간 안에 들어선 관객은 자기만의 성찰을 통해 이야기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된다. 이렇게 작가는 누군가의 개인적 기억, 에피소드를 매개로 화자와 청자 간의 공동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에피소드는 누군가의 이야기, 몸짓, 어떤 냄새나 맛으로부터 불현듯 활성화된 뇌의 작용이 기억의 흐름을 촉발하여 상상과 모순의 서사를 창조하게 한다. <489년>에서 김씨 아저씨가 구술하고 있는 DMZ의 기억들은 “노루가 밟아서 터트리는 지뢰 소리가 들리면 동료 취사병이 냄비를 들고 부상당한 동물을 찾아다녔다”는 이야기, “새벽에 초소에서 DMZ를 바라보며 소변을 눌 때 얼마나 풍경이 아름다운지”, “적들이 지나갔는지 알기 위해 돌멩이를 철조망에 끼워 놓고 다음번 수색할 때 다시 확인했다는 이야기”와 같은 에피소드들이다. 한 개인의 에피소드는 이야기하는 사람뿐 아니라 듣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게 하여, 함께 그 사건들의 목격자로서 공동의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이야기하는 그 순간에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계속 재구성되는 에피소드의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속성은 인쇄 매체의 발달 이후 사라진 구술 문화의 공동체적 경험의 교환 능력을 회복시킨다.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경험”6에 원천을 두고 있다. 이야기꾼은 ‘먼 과거’, ‘먼 장소’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자신의 이야기 속에 녹여 놓고, 다시 청자들의 경험을 만들어 낸다. 구술 문화의 전통에서 신화나 설화, 영웅의 이야기들이 암송을 통해 사람들에게 들려지고 전달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재창작이나 개작이 이루어져 동일한 설화나 이야기의 수많은 변본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인쇄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소설이나 정보와 같은 근대적 소통 형식에서 사라졌다. 이는 근대라는 시기에 그만큼 “경험의 전달 가능성이 감소”7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권하윤은 3D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 환경에서 이야기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주어진 환경을 그대로 캡처하는 실사 영화와 달리, 3D 애니메이션은 작가 또는 관객 그 누구든 타자의 서사 위에 자신의 주관적인 시점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되쓰기’할 수 있는 틈이 창출된다. 제목 ‘489년’은 그곳에 100만 개 이상의 지뢰를 제거하는 데 걸릴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을 나타낸다. 영상의 마지막에 DMZ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남자의 희망이 선언될 때 전선은 불바다로 변한다. 현실상 완전히 불가능하지만, 경계선이 천천히 노스탤직(nostalgic)하게 사라지는 극적인 장면은 DMZ가 ‘꽃(아름다움)’과 ‘지뢰(위험)’가 공존하는 상상적이고 모순적인 공간임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이처럼 권하윤의 3차원적 가상 공간은 “현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를 동일한 지평에 위치시키고 상호 교환의 회로를 구축”함으로써 “경계에서의 기억을 말하는 증언자의 목소리를 다양한 각도에서 질문할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이 된다.8
IV. 마법 같은 우정을 증언하는 ‘그림자극’
권하윤은 프랑스 유학 시절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를 주제로 미완성한 다큐멘터리 작업 <벽>에 대한 아쉬움을 남겨둔 채, 2021년 우리와 같은 일제 식민지를 경험했던 대만에서 동아시아 근대사 리서치를 재개했다. 당시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만에서의 리서치는 반복되는 격리와 중단으로 인해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그의 작업 대부분은 사람들과의 만남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는 “결국 이 세상에는 주관적인 시점만이 존재”하며, 아무리 우리가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려고 해도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역사책의 한 줄이 아니라 옆에서 들려준 한 마디”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9
고립된 상황이 지속되며 우여곡절 끝에 작가는 20세기 초 일본이 대만을 점령한 시기를 기록한 산발적인 사료들 속에서, 대만의 소수 민족 원주민 문화를 연구한 일본인 문화인류학자 모리 우시노스케(森丑之助, 1877–1926)와 대만 고산 지대 원주민 부눈(Bunun)족의 족장 아지만 씨킹 사이에 성립된 특별한 우정이 기록된 한 에피소드에 주목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고증을 통해 남겨진 기록이 아닌 구전되어 전해지는 설화이지만, 권하윤은 당시 대만에서 활동한 일본인 인류학자 모리 우시노스케가 남긴 사진과 지도, 메모 등의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다큐멘터리와 3D 애니메이션을 결합해 열린 서사 구조를 만들고, VR 인터페이스로 관객이 1900년 초 대만의 고산 지역 원주민들이 사는 마을과 역사 속 개인의 에피소드에 몰입해 들어갈 수 있도록 <옥산의 수호자들>(2024)을 구성했다.
영상은 1895년 18세의 나이에 육군 통역관으로 대만에 와서 원주민에 관한 현장 연구를 수행했던 모리 우시노스케가 대만에서의 활동을 접고 18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가며 동료들에게 남겼던 작별 연설을 따라간다. 모험적인 현장 측량사였던 모리 우시노스케는 대만 원주민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진심 어린 교류를 하며 여러 부족의 언어를 익혀 원주민 언어에 관한 다섯 권의 책을 출판했을 정도로 “대만 원주민의 선도적 연구자”라는 찬사를 받았던 인물이다. 인류학, 역사, 민속학, 고고학, 식물학, 지리학 분야의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해 박물관의 소장품을 구성하고 『대만 원주민 연대기』 1–2권을 완성한 그는, 일제의 원주민 탄압 정책에 맞서며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이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다. 그는 철저한 현지 조사를 기반으로 일본 점령 초기 대만의 자연주의자로 불리며,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높고, 가장 넓은 야생 지역으로 원시림과 다양한 동식물이 보존된 대만의 옥산(玉山, 위산)을 최초로 등정해 식물 표본을 수집해 연구했다. 그 결과 20개 이상의 대만 고산 식물이 식물학계에 ‘Mori Ushinosuke’의 이름을 딴 표본으로 등록되어 있다.
VR 헤드셋을 쓰고 가상 현실 안으로 들어선 관객은 가상 카메라(virtual camera)의 움직임을 따라 3D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진 대만 섬 지도의 원주민 마을 전역을 상공에서 바라보게 된다. 섬 한가운데 타워처럼 거대하게 솟아오른 삼각대에는 20세기 초 인류학자들의 도구였던 대형 카메라가 놓여 각각의 촌락을 이동하면서, 모리 우시노스케의 시선으로 원주민들의 구체적 생활상을 흑백 사진에 포착한다. 관객이 실제 공간을 거닐다 대만 원주민들의 기록을 마주하는 순간 그들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가상 현실 속 내러티브는, 모리의 카메라가 고산 지대 원주민 부눈족의 마을로 향하면서 일본의 새로운 5개년 통치 정책에 맞서 저항했던 원주민 항일 운동의 역사를 소개한다. 이어 무대는 반딧불이들이 발산하는 환상적인 불빛을 따라 옥산의 아름다운 야생 풍경 안으로 이동하고, 대나무등을 손에 든 관객들은 숲속 천산갑(pangolin), 다람쥐, 부엉이, 나비들이 안내하는 산길을 따라 걸으며 모리의 서사 속으로 이끌린다. 모리는 일주일간 대규모 지리 조사 팀을 구성해 옥산 탐사를 하던 중, 일본인들에 의해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가족과 친척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인에게 복수할 기회를 찾던 부눈족 족장 아지만 씨킹에게 닷새 동안 쫓기며 목숨을 위협받던 상황을 이야기한다.
<옥산의 수호자들>은 가상 현실 체험 인터페이스로 관객이 대나무등을 들고 이동하다 산속 바위 절벽 위에 팔을 뻗어 불빛을 비추면, 모리 우시노스케가 이야기하는 경험담과 역사적 사실, 아지만 씨킹과의 에피소드들이 그림자극으로 펼쳐진다. 관절이 움직이는 종이 컷아웃으로 묘사된 인물들의 그림자는, 일본 군대가 욱일기를 앞세우고 원주민 지역으로 총성을 울리며 밀고 들어오는 장면, 이에 원주민들이 활을 들고 저항하다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 끊임없이 모리를 향해 활을 쏘는 아지만과 날아오는 활을 피해 수풀 뒤로 몸을 숨기며 옥산의 식물들을 조사하는 탐험가 모리의 움직임을 긴장감 있게 보여 준다. 실제인지 꾸며진 이야기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방문하는 그의 작업은 동남아시아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고대의 스토리텔링 형식인 그림자극을 매개로 원주민 문화와 자연이 지닌 영적인 세계에 접속한다.
권하윤이 가상 현실에 적용한 그림자극은 주로, 이야기꾼들이 대부분 반은 사실이고 반은 허구에 기반한 역사적인 이야기를 극적으로 표현할 때나, 서사시나 힌두교 신화 또는 전설을 이야기하는 마을의 성스러운 공연에 활용되던 수단이었다. <옥산의 수호자들>에서 그림자극은 마치 이들의 일화를 지켜봤던 옥산의 바위가 관객이 손에 든 등의 빛을 비추는 순간 마법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증언하는 무대가 된다. 등을 들고 가상 현실 속 옥산으로 들어선 관객을 낯선 오솔길로 안내하던 천산갑, 다람쥐, 부엉이, 나비, 반딧불이, 그리고 모리 이름을 학명으로 갖는 각종 식물도 인간 세계에서 글로 남겨지지 않은 것들을 알려 주기 위해 공모하듯 서사를 이끌어간다. 모리는 작별사에서,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단 한 번도 무장하지 않고 모든 열정을 바쳐 밤낮으로 걸어 탐험을 마친 자신의 용기로 아지만에게 인정을 받아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림자극은 총과 칼, 활을 들었던 이들이 모두 무기를 내려놓은 손을 이어 잡고 둥근 대형으로 서로를 감싸는 모습을 비추며 이들의 마법 같은 우정을 증거한다.
권하윤은 이 작업에서 동아시아의 일본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역사를 매개로 ‘적’의 개념을 탐구한다. 그가 이전에 DMZ와 같은 국경선을 비롯한 경계의 개념을 허구적이고 상상적인 것으로 여기며 진실을 재구성하는 에피소드의 상대성에 주목해 온 것처럼, 역사적 내러티브 안에서 ‘적’의 개념은 국가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서 새롭게 구성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종과 달리 협력적 의사소통인 친화력을 통해 번성했다. 그 친화력의 다른 면으로 우리가 아끼는 무리가 다른 무리에게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타인 혹은 타 집단을 ‘비인간화’하는 경향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우리 집단 소속이 아닌 사람들의 기본 인권에는 눈감는 것도 이러한 속성 때문이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행하는 극단적인 비인간화는 또 다른 극단적 대응을 야기한다. 극단이 극단을 부르는 이 역학 관계는 특정 정치 운동이나 특정 문화권, 혹은 특정 시대에만 해당되는 현상이 아니다. 중국의 문화 혁명,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스탈린주의, 무정부주의 테러, 프랑스 혁명, 일본 제국주의까지 권력자는 어떤 형태의 정부로도 비인간화와 그에 수반하는 폭력을 행사해 왔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인간이 집단적 행동으로 타 집단을 ‘비인간화’하는 본성이 치유될 방법이 증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무렵 유대인 대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인 수천 명이 목숨을 걸고 유대인들을 박해와 죽음으로부터 구출했다. 발각되면 고문을 받거나 국외로 추방되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었으며 온 가족이 몰살되는 일도 있었지만, 그들은 기꺼이 위험에 처한 유대인을 헛간이나 다락방 등에 숨겨 주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치 편을 들거나 혹은 방관할 때 이들이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돕게 만든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사회학자 올리너 부부(Samuel P. Oliner, Pearl M. Oliner)는 이 시기 유대인을 구출한 유럽인들의 증언을 분석한 결과, 찾아낸 공통된 특징은 단 하나였다. 그들은 모두가 전쟁 전에 유대인 이웃이나 친구, 직장 동료와 친하게 지낸 경험이 있었다. 성별, 교육 수준, 정치적 성형, 부의 정도나 직업에 있어서 전혀 공통점이 없었지만,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한때 혹은 여전히 깊은 마음을 나눈 유대인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10 유학 시절부터 권하윤이 탐구한 ‘적’의 개념 또한 국가나 이데올로기, 전통이나 종교적 신념보다 사적인 관계에서 맺었던 우정과 접촉의 경험으로 그 경계가 사라질 수 있는 유동적이며 불확실한 ‘상상의 산물’인 것이다.
V. 나가며
주지하다시피, 인류의 역사는 각 시대를 대표하는 매체가 만들어 낸 서로 다른 코드에 의해 인간의 의식과 지각을 변화시키며 진보해 왔다. 최초의 매체 기술인 ‘문자-인쇄술’은 근대적 자아의 핵심적 미디어로, “억압을 통한 질서화”라는 근대성의 표본을 이루었다. 인류세라 불리는 이 시대 우리는 행성적 규모로 역사의 ‘되쓰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 글에서 다룬 <증거부족>(2011), <모델 빌리지>(2014), <489년>(2016), <옥산의 수호자들>(2024)로 이어진 권하윤의 3D 애니메이션 작업에 나타난 서사 구조의 에피소드적 특성은, 모더니티와 대립되는 개념의 동시대성 안에서 역사가 어떻게 새로운 양식화를 이루는지, 특히 서로 다른 문화들, 종교들, 언어들 사이의 조우가 심해진 오늘날 어떻게 역사적,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이 ‘되쓰기’되고 있는지 보여 준다. ‘되쓰기’의 방법은 결코 그 어떤 “헤게모니를 창조하지 않으며, 지역과 지방을 재평가하고, 은폐된 지도와 망각된 역사를 재등장시킨다.”11
권하윤은 역사 구성의 잠재태로서 ‘에피소드’적 서사를 매개로 화자와 청자 간의 공동의 공간을 만들고, VR 기술을 통해 이미지들 사이로 관객이 타인의 신체를 온전히 겪고 이에 감응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증거부족>, <옥산의 수호자들> 등의 작업에서 드러난 에피소드의 상대성은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사건들을 선별하는 기준이 타인들의 시각, 즉 “행정적 질문지나 경찰 조서의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굉장히 내밀하고 사적인, 자신만의 주관적 시각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일깨운다. 그것은 오늘날 새로운 역사 기술의 방법론으로 제기될 수 있으며, 선형적 시간관에 따라 언제나 승자의 이야기, 권력자의 이미지만 남게 된 근대적 역사 쓰기로부터 탈피해 누구나 삶의 주체로서 그동안의 역사를 ‘되쓰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궁극적으로, 권하윤의 3D 애니메이션 작업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경험을 전달하는 과정 속에 발생하는 불투명하고 흐릿한 기억을 매개한다. 기억은 한 사람에게 고유한, 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권하윤에 따르면 자신도 모르게 왔다가 사라지는 동화 속 ‘파랑새’ 같은 것이다. 누구나 파랑새를 잡고 싶은 꿈을 꾸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잡지 못한다. 예기치 못한 순간 내 손등 위로 살짝 앉았다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것이 기억이다. 누군가의 체험된 삶, 지나간 사건들은 집단의 기억으로부터 쉽게 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조련사의 ‘손짓’에 의해 날아드는 새처럼, 타인이 내뱉은 날숨을 기꺼이 들이마시려는 몸짓에 의해 지나간 삶의 순간들은 치장하지 않은 날 것의 상태로 우리 앞에 존재할 수 있다. 권하윤이 제시하는 상상과 모순의 내러티브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몸짓이 불러들이는 불투명한 삶의 기억들을 끊임없이 탈바꿈시켜 지속적으로 역사가 ‘되쓰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