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병준

Interview
CV
교육
2012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 음악원 아트/사이언스 전공 석사, 헤이그, 네덜란드
2009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 음악원 소리학(Sonology)코스 수료, 헤이그, 네덜란드
2007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불어불문학과 학사, 서울, 한국
주요 개인전 및 공연
2022
‹유령극단, “심각한 밤을 보내리”›, 홍동저수지, 홍성, 한국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 2 (로보트 야상곡)›, 쿼드, 서울, 한국
2021
‹유령극단, “심각한 밤을 보내리”› , 남산한옥마을, 서울, 한국
《네버랜드 사운드랜드: 권병준-소리산책》,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한국
2020
《클럽 골든 플라워》, 코스모40, 인천, 한국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 2(로보트 야상곡)》, 플랫폼 엘, 서울, 한국
2018
《클럽 골든 플라워》, 대안공간 루프, 서울, 한국
2014
‹또다른 달 또다른 생›, LIG 아트홀, 서울, 한국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 LIG 아트홀, 서울, 한국
2010
‹모든 것을 가진 작은 하나›, LIG 아트홀, 서울, 한국
주요 그룹전
2022
《심플 액트 오브 리스닝》, 웨스트 덴 하그, 네덜란드
《도시공명》,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청주, 한국
《튜링 테스트: AI의 사랑 고백》, 서울대학교미술관, 서울, 한국
2021
《간결한 생각들: 생태-젠더-공산》, 대안공간 루프, 서울, 한국
《Unfold X》, DDP 디자인 박물관, 서울, 한국
《없는 극장》, 아르코 예술극장, 서울, 한국
2020
《The Signs of Doubt》, VT Artsalon, 타이페이, 대만
Open Media Art festival, 문화축기지, 서울, 한국
국립현대무용단 10주년 온라인 페스티벌 《친하게 지내자》, (문화비축기지), 서울, 한국
《Unfold X》, 블루스퀘어 네모, 서울, 한국
《우리와 당신들》, 경기도미술관, 안산, 한국
2019
《파라다이스 아트랩》, 파라다이스 씨티, 인천, 한국
《가장 멀리서 오는 우리: 도래하는 공동체》, 부산현대미술관, 부산, 한국
예테보리 도서전, 예테보리, 스웨덴
《DMZ》, 문화역서울 284, 서울, 한국
《Present Passing: South by Southeast》, Ossage, 홍콩
2018
《Facing North Korea》, Meinblau Projektraum, 베를린, 독일
《디어시네마 3: 권병준 1999~2016》, 국립현대미술관 필름앤비디오, 서울, 한국
《좋은 삶》,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2017
《혁명은 TV에 방송되지 않는다: 사운드 이펙트 서울 2017》, 아르코미술관, 서울, 한국
2016
《순간의 밤 2016》, 랑슈극장, 마르세이유, 프랑스
《불협화음의 하모니》, 대만 관두 미술관, 타이페이, 대만
주요 퍼포먼스
2022
‹춤추는 사다리들›, 윈드밀, 서울, 한국
2021
‹조율› , 광주비엔날레 ‹원소적 작업실› 축하공연, 빛고을 문화회관, 광주, 한국
2019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 2 (연기, 바람 그리고 낚시)›, 독산 아트센터, 서울, 한국
2018
‹층간› , 《포인트 카운터 포인트》 연계 퍼포먼스, 아트선재센터, 서울, 한국
2015
‹또다른 달 또다른 생 (변주극 #1)›, 《미래는 지금이다》연계 퍼포먼스, 국립21세기 현대미술관(MAXXI), 로마, 이탈리아
2014
DMZ 피스 프로젝트, DMZ 트레인 및 철원 DMZ 접경지역, 한국
‹이것이 나다› , 백남준아트센터, 용인, 한국
2013
Extended Electronics New Sonic Adventure Vol. 1, 홍콩대학교, 홍콩
‹이것이 나다› ,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 에든버러대학교 탤봇 라이스 갤러리,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2011
어쿠스틱스 페스티벌: FFAA Festival für angewandte Akustik, 쾰른, 독일
‹행복 찾는 나그네의 눈동자는 불타오르고› ,
서울 스퀘어, 서울, 한국
‹여섯개의 마네킹› , LIG 아트홀, 서울, 한국
2009
Jauna Musika 페스티벌, 빌니우스, 리투아니아
2008
‹하이퍼메트로피아› , Sign.Expositie, 흐로닝엔, 네덜란드
‹하이퍼메트로피아› , Cubbit 갤러리, 런던, 영국
Small Places Sounding Out, IIAS, 레이든, 네덜란드
2006
《이십세기후반 한국 사진전》, Dom culturi, 브라티슬라바, 슬로바키아
2005
윤이상 트리뷰트 콘서트, 호암 아트홀, 서울, 한국
클럽 트랜스메디알레, 마리아, 베를린, 독일
2004
Jauna Musika 페스티벌, 빌니우스, 리투아니아
Critic 1
차갑고 견고한 낭만―권병준의 기계극에 부쳐
윤율리 (일민미술관 책임큐레이터)
견고하고 단정한
그의 작품은 낭만적이다. 그가 세상에 둘도 없이 낭만적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가 오랜 시간 작가의 마음을 잃지 않고 미술, 음악, 대중문화와 언더그라운드를 망라한 신에 새긴 대체 불가능한 흔적을 목격해 왔다. 내가 그를 통해 본 작가의 마음이란 냉소로 흐트러지지 않는 견고함과 단정함, 무엇보다 필연적인 실패를 직감하면서도 이제 막 세계를 알기 시작한 것처럼 세계를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는 인내의 마음가짐이다. 이런 그의 작업은 낭만적이고 다정하다. 그를 설명하기 위한 서투른 말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일 것이다. 나는 그의 작업이 지닌 진지함, 미세함, 잘 억제된 슬픔을 낭만이라는 좁은 단어에 눌러 담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며, 그럼에도 낭만이 아닌 말로 그것을 달리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엇을 ‘낭만적’이라 부르는 수사는 부드럽게 고양된 감정의 표현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엔 오히려 서늘하고 거친 면이 있다. 그의 전시는 전형적인 형식 뒤에 안전하게 숨어 하고 싶은 말을 에두르지 않는다. 그가 공연하는 사물과 장면은 단번에 아름다운 기시감을 자아내기보다 어딘가 위태로운 몸짓과 작용을 결집하고 그들의 취약함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 위태로움과 취약함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로봇을 ‘싸구려 인조인간’이라 부른 근원의 정서다. 이러한 면모는 우리가 흔히 기술이나 기계에 기대하는 바가 아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미래주의자와 복고주의자 모두를 실망시키면서, 무결한 도달점이 사라진 기술이 균질한 힘으로 작용하는 방식을 살피는 엔지니어다.
인간들
그의 ‘싸구려’ 로봇이 가진 영감의 토대는 어디일까? 나는 내 어린 시절을 지배한 몇 편의 영상 작품을 떠올린다. 「천공의 성 라퓨타」(Laputa: Castle in the Sky, 1996)에서 주인공 시타는 제국의 요원에게 이끌려 하늘에서 떨어진 기계 병사를 목격한다. 둘은 같은 곳에서 지상으로 추락했다. 인간을 대신하려 창조된 기계 병사는 그에 걸맞은 긴 팔을 가졌고 얼굴에 난 구멍으로 파괴적인 광선을 쏜다. 그러나 인간의 명령이 실전된 후에 그들은 자연의 일부처럼 풍화되어 무의미에 가까운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기계 병사들이 발견한 새로운 사명은 불상의 무덤을 돌보며 헌화하거나 들짐승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시타가 기계 병사를 대면하며 느낀 첫 감정은 이질성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추락으로 반파된 사물에 대한 연민이다. 기계 병사는 시타를 보호하기 위해 인간 군대와 일전을 벌이는데 기계의 압도적인 폭력에도 불구하고 로봇은 인간보다 인간성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다음 장면은 「은하철도 999」(Galaxy Express 999, 1977~1979)의 기계 인간들이다. 마츠모토 레이지(松本零士, Matsumoto Leiji, 1938~2023)의 세계관에서 기계 인간이 되려는 욕망은 작품의 서사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동기다. 이 욕망은 인간과 기계 인간의 갈등 속에 증폭되거나 좌절되고 공교롭게도 다른 기계 인간의 조력 속에 실행되거나 극복된다. 기계 인간은 인간의 신체에 기계를 이식하거나 반대로 인간의 정신을 기계에 이식한 하이브리드 로봇이다. 이들은 반영구적인 수명을 얻어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그려지는데, 일면의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신의 인간성을 진전시키는 거의 유일한 방법으로 간주된다. 기계와의 혼종을 택한 주인공 쿠사나기를 이전과 다른 ‘망’의 세계로 추락시키는 오시이 마모루(押井守, Oshii Mamoru, 1951~ )의 연출―「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 1995)―이나 그에 앞서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 Tezuka Osamu, 1928~1989)가 기계와 인간의 교차점에서 그린 세계관―「우주소년 아톰」(Mighty Atom, 1952~1968)―은 비슷한 발상의 범위에 있는 대중문화적 토대다. 요컨대 인간의 타고난 순혈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일종의 혼합물 또는 부산물에 가까워짐으로써 역설적으로 더 근본의 속성을 취득한다고 보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심령이나 정령보다 로봇을 관용적으로 의인화한다는 점은 20세기 동아시아의 대중문화가 내포한 흥미로운 태도다. 태생적으로 서브컬처의 맥락을 가진 현대 동아시아 대중문화에서 로봇은 이세계(異世界)에 속한 미지의 존재, 과학적 재앙 혹은 재앙일 수 있는 가능성, 흉흉한 파국의 전조라기보다 인간성 근교의 것, 구체적으로는 인간에게 무엇을 더하거나 그로부터 덜어냄으로써 주류의 ‘순정’ 인간에게 부재한 것을 가시화하는 주체다. 데즈카 오사무의 기념비적 작품 「불새」(Phoenix, 1954~1988)의 한 에피소드는 인간의 가장 정확한 재현물인 클론과 대비해 기계 인간의 인간적 당위를 묻기도 한다. 로봇을 통해 굴절된 인간성의 발견은 동아시아 우주론의 전통이 후대에 공유하는 특징일 수 있다. 기술철학자 육후이(Yuk Hui)의 코스모테크닉스(Cosmotechnics) 개념은 최근 이러한 논의에 자주 인용된다. 우리는 새로운 기술을 말 그대로 새로운 것 또는 미지의 혁신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만, 만약 인간이 존재의 차원에서 기술적 조화나 구성으로 제시될 수 있는 특정 상태의 ‘것’이라면, 기술의 수용은 결국 인간이 내재한 질서와 도덕의 회복과 관련된다. 이것은 권병준의 로봇이 가진 의미와 일치한다. 그의 로봇이 문화적 맥락에서 그렇듯 육후이의 이론은 철학적 서브컬처처럼 읽힌다. 이것이 기술에 대한 과학적 일반론으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근대의 기술 체계에 관한 전유로서 문화·예술을 통해 먼저 실현될 수 있거나 이미 실현되었을 가능성을 지울 수 없다. 권병준이 자신의 첫 개인 공연으로 후술하는 작품에는 그러한 가능성과 태도를 상징적으로 압축한 제목―〈모든 것을 가진 작은 하나〉(2010)―이 붙었다.
그는 언젠가 로봇에 대해 쓴다. 로봇은 1990년대 클럽 신에서 서로의 곁을 지킨 동료다. 로봇은 그에게 ‘없는 존재’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이방인, 이방의 노동자다. 로봇은 좌표를 잃은 난민이다. 로봇은 주정뱅이다. 자질구레한 철물을 조립해 결과적으로 용도 불명에 이른 로봇은 저마다의 결함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동료들은 흩어졌고 자본에 영합하지 않은 예술은 잊혔다. 이방인들은 거듭 추방당한다. 고향은 누구에게든 사어가 되었다. 취객은 꿈속에서 헤매며 숙취로 고통받는다. 로봇은 왜인지 어느 편에도 선뜻 마음을 주지 못한 채 유령처럼 배회하는 그 자신 같다. 그의 로봇은 인간과 동종의 윤리에 기반해 작동한다. 그리고 그것이 보편타당하게 약속된 질서(권병준에게는 ‘진리’) 혹은 에피스테메(육후이에게는 철학적 상위문화로서의)와 대립하는 순간 서로의 오작동을 끌어안아 각성한다.
얼굴들
그는 〈이것이 나다〉(2013)에서 스스로를 미디어로 삼았다. 〈이것이 나다〉는 텅 빈 프로젝션 스크린이나 캔버스처럼 얼굴을 희게 칠한 뒤, 빔 프로젝터를 이용해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 영상’를 투사한다. 그리고 얼굴에 덧입혀진 얼굴의 모습을 다시 비디오 장치로 그가 자리한 너머의 벽에 출력한다. 기계 장치의 눈 부신 빛을 얼굴 정면으로 마주한 그는 때로 기계처럼 무감해 보이기도 때로 고통스럽게 고양되어 보이기도 했다. 그는 미디어나 영매가 된 것 같았다. 〈이것이 나다〉가 다룬 정체성의 문제는 동시대 미술에서 늘 회귀하며 반복되는 것이지만, 얼굴 인식과 매핑, 이미지 생성 기술을 통해 기계적 인지 절차, 그리고 녹화와 상영을 경유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단순히 예술가 개인이 느끼는 자아의 혼란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장치 또는 장치로 간주되는 혼종의 상태에 인간성의 표상―인간의 얼굴―을 내어주는 퍼포먼스가 되었다. 이것은 가벼운 발상을 구조화한 것임에도 그가 미술이라는 터전에서 자신의 입장을 가다듬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2014)의 권병준은 더 중립적인 기술자처럼 작품을 조율한다.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은 〈이것이 나다〉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표되었는데,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것처럼 ‘나’를 극 형식의 경계에 위치시키고 복합적인 무대 장치를 쌓는다. 그는 연출가이자 퍼포머로서 무대 위의 여러 요소를 이용하고 전통에 가까운 극의 요소와 미디어 기술을 융합한다. 그는 마치 극에 이식된 이물질처럼 보인다. 이때 기계에 의해 분사된 수증기가 얼굴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결과적으로 ‘나’는 무대 위에 누적된 이물질과의 관계 속에 새로운 기계적 얼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것은 권병준에게 로봇이라는 메타 주체가 출현한 계기를 함축하는 듯하다.
한편 그는 네덜란드에서 귀국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섯 개의 마네킹〉(2011)을 공연했다. 이 공연은 그의 오랜 동료인 음악가 달파란과 협업한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미술가로서 그의 현재와 과거를 더 유심히 살피게 한다. 마네킹과 로봇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여섯 개의 마네킹〉에 쓰인 마네킹은 수공품에 가까운 로봇과 달리 기성 제품이 제한적으로 변형된 것이다. 그런데 공장에서 찍어낸 대량생산품이란 점이 곧장 마네킹의 특수한 감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량생산은 오늘날 작품의 미학적 특성을 결정하기에 과히 일반적인 물질의 조건이며 그것의 복수(plural)성 역시 미술품을 반드시 좋거나 나쁜 일방향의 국면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로봇과 비교하면 마네킹은 상품과 조금의 틈 없이 밀착한 소비의 껍데기로서 젊고 아름다운 신체를 모방한다. 신체의 에로티시즘에 충실한 마네킹이 죽은 신체처럼 보이거나 기괴함을 자아낸다는 점은 아이러니하지만, 요컨대 이것은 음악가로서의 권병준이 미술가로서 소리를 외부의 물질에 의사 하는 가운데 도달한 어느 기착지였던 것 같다. 달파란과 그는 쉽게 체현될 수 없는 몸짓을 마네킹에 덧입히는가 하면 형언하기 어려운 불협화음과 소음을 비명처럼 덧씌움으로써 마네킹이 직관적으로 유발하는 타자성을 증폭하고 그것을 가속하듯 내파했다. 상품의 임계를 넘어 파열한 마네킹은 그들에 의해 익숙한 소리의 잔해로 수거되었다. 이때 권병준의 실험은 〈모든 것을 가진 작은 하나〉의 일인칭 ‘작가’를 그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극적으로 의사 하는 동시에 ‘극적’이라는 말이 가진 직서성을 교란하는 것이었다. 반면 《클럽 골든 플라워》(대안공간 루프, 2018)에서 그의 의사체(擬似體)로 정돈된 로봇은 비애의 마음을 품게 한다. 시타가 본 지상으로 추락한 기계 병사의 잔해 같이 로봇은 일종의 텅 빈 얼굴, 산업이나 상품의 궤도에서 이탈한 잔존물이 떨어진 곳에 만들어진 동공이다. 그것은 인간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 한때 인간의 것이던 통속과 노스탤지어를 환기한다. 우리가 부서지기 전에 추락한 곳은 어디인가? 이 단계에서 그의 로봇은 로컬 대중문화의 데이터베이스를 경유하며, 인간-상품의 껍질로 제시된 마네킹보다 한층 버내큘러한 면모를 보인다. 〈길의 인형〉(2006), 〈마네킹의 유체이탈〉(2011)이 그 경로에서 참조될 수 있을 것 같다.
빛과 소리
《클럽 골든 플라워》가 미술 전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음에도 로봇에 관한 그의 연작은 대체로 로봇이 무대 위에 오른 연극에 가까웠다.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 2〉는 2022년 실험적인 극을 소개하는 대학로 극장 쿼드에서 개관 기념 페스티벌 초청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소리를 다루는 기술자이자 엔지니어로서 또 급진적인 자취를 남긴 록 밴드의 일원으로서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극과 맞닿은 공연성에 기반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작품에는 ‘퍼포먼스’, 그것을 구체화한 ‘로봇 종합 퍼포먼스’, 다시 그것을 매체적 특성으로 구분한 ‘로보틱 매카니컬 시어터’라는 표현이 혼용되지만, 어쨌든 이론적인 접근과 무관하게 그는 각본가와 연출가의 역할을 수행하며, 그의 작품은 극적 체험을 유발함으로써 무대 위의 한 장면에 오른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공교롭게도 극적이란 말은 동시대 미술에서 그다지 훌륭한 상찬처럼 들리지 않는다. 큐레이터와 비평가, 소위 제도의 전문가 그룹에는 연극성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있는 것 같다. 때로 이 공포는 동시대 미술의 어느 부위가 자신이 갈라져 나온 동종의 형질로부터 유전적 고유성을 보호하기 위해 대물림한 방어술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가 연극성을 다루는 ‘무심함’은 동시대 미술이나 그 성전으로서의 미술관을 기어코 불편하게 만들고 만다.
권병준의 극적 요소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그림자의 활용이다. 로봇에 관한 그의 연작은 대부분 인공적인 빛으로 그림자를 생성한다. 여기서 큐레이터와 비평가들은 이미 난감한 입장에 처하는데, 그림자는 대상에 종속되어 수동적으로 열화한 것이란 점에서 고전 철학이 고전 미술을 열등한 재현으로 평가 절하한 기억을 상기시키며, 지지체가 불분명한 환영으로서 근본 없는 ‘기분’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현대 미술이 기피하는 시각성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으로 선택된 로봇은 사물의 의인화로 오인되며 재차 곤란함을 유발한다―신유물론의 광풍 속에서 사물의 의인화는 지난 미술의 낡은 기호로 읽힐 것이다―. 하지만 그림자가 단순히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극의 요소인 건 아니다. 예를 들어 《클럽 골든 플라워》의 로봇이 랜턴을 얼굴 부위에 이식한 발광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 로봇의 그림자는 ‘자신을 포함해 자신을 포함한 구성체’를 조직하고 있는 연결 상태를 가시화한다. 또 인공적으로 강화된 조명이야말로 공연 산업이 무언가를 대상화하는 방식이란 점에서 그것은 힘과 자의식, 고통에 관한 자전적인 표상이다. 그러므로 그의 극에서 인공적인 빛은 기계 장치의 군집을 구성하는, 또 다른 물질처럼 연장된 로봇의 의체다. 《올해의 작가상 2023》에서 로봇은 오체투지, 삼보일배와 같이 인간 세계의 연결망을 과열시키는 정치적 몸짓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로봇은 빛과 화이트큐브에 의해 사물 혹은 기계의 움직임으로 부서진다. 여기서 극대화되는 것은 그림자를 동원한 이중 재현이나 환영의 공간감이 아니라 신체와 의체가 뒤섞여 벽면 위에 균등한 파장으로 흩어지는 기묘한 물화의 경험이다.
그의 극에서 소리는 특수한 지표다. 보는 경험 또는 읽기의 경험과 달리 듣는 경험은 순간의 영원함에 따른 신비롭고 독자적인 체험으로 여겨져 왔다. 현대인에게 음성적인 것은 넘어서야 할 로고스이고 고대인에게 음률과 음계는 불가지한 존재론을 인간 세상과 이어 붙이는 형식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좋은’ 소리의 분별이 그 시대의 질서를 증명하는 일과 연관된다고 믿지는 않는다. 어떤 측면에서 기술 그리고 장치야말로 소리를 해체했다. 오늘날 모든 듣기는 잘게 부서진 부호가 되어 필연적으로 기계적 절차를 통과한다. 반대로 그것은 기계적 절차가 소리를 다시 조립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권병준에게 동시대의 듣기란 이러한 장치의 힘을 포괄하는 탐색이다. 장소를 횡단하는 극 속에서 소리를 생성하는 일―〈경원선 행진곡〉(2014)―, 종의 맥놀이 주파수를 기록하고 해독하는 일―〈흐느끼는 종들〉(2015)―, 더 이상 피아노라 부를 수 없는 피아노를 영매로 도시 정경에 개입하는 일―〈타이베이를 위한 노래〉(2016)―에는 지표로서 소리가 가진 특질, 기술의 작용, 공연성을 결합하기 위한 고민이 녹아 있다.
역사의 숲
소리를 채집하고 편집하는 일은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했다. 1990년대 초의 캠퍼스에서 이념의 ‘서드임팩트’를 목격하며 그는 방향 감각을 잃고 소리에 의지했다. 엄혹한 구체제가 녹아내리듯 무너지는 것이 무색하게 곳곳에 새로운 죽음이 가득했다. 사람들을 끓어오르게 한 해방의 열망은 모든 규범을 지배하는 자유의 전조였다. 혁명의 기수들이 누구보다 빠르게 변화에 부응하자 구호는 흩어지고 소리가 남았다. 어쩌면 이미 너덜너덜해진 시대의 끝에서 헤드폰이 채널링하는 소리의 감각은 그에게 유일하게 잔존한 역사의 감각이었을 것이다. 그가 처음 발표한 〈오묘한 진리의 숲 1〉(2017)에는 이러한 작은 불씨 같은 소리가 웅얼거림처럼 남았다. 완전히 단절된 개인의 방백 같은, 한편으로는 역사의 치찰음과 같은 이 소음은 이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어진 이념의 소리―〈오묘한 진리의 숲 3: 교동도 소리풍경〉(2017)―, 난민과 이주자의 소리―각각 〈오묘한 진리의 숲 2와 4〉(2018과 2019)―로 변모했다. 오늘 그의 로봇은 불빛에 모여들어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인다. 어느 시구가 그린 한 장면처럼 그들은 저마다의 존재 방식을 무용하게 단련함으로써 가장 흔한 민중의 이미지를 환기한다. 그러나 ‘오묘한 진리의 숲’은 단지 인간을 은유하는 인간형 로봇의 고향, 그들을 위해 복원된 무덤 같은 안식처는 아니다. 그가 소리로 적층한 숲에서 로봇과 인간은 각자의 채널을 표류하며 투쟁하는 그림자다. 그것을 어떻게 다시 역사라 부를 것인가? 이제 모든 사람이 쉽게 우리의 서사가 끝장나버렸다고 말한다. 우리 중의 누군가가 변절했다고 말한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더 이상 기념할 것이 없다면 이곳에 남은 흔적은 무엇인가?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얼룩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는 변함없이 견고하고 단정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은 다정하고 낭만적이다.
Critic 2
확장된 음악과 어둠을 돌보는 빛: 권병준 론
곽영빈
‘진정한 아카펠라’의 곤궁
이탈리아어로 ‘교회 형식으로’라는 뜻의 ‘아카펠라’(a cappella)란, 악기 반주 없이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이뤄지는 연주나 공연 형식을 지칭한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또는 교회를 매개로 중창과 합창 경험을 했던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거나 샤워실에서 별다른 자의식 없이 누구나 경험했을 이 음악형식은, 1990년대 보이즈 투 맨이라는 미국의 흑인 보컬 그룹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소수 음악 애호가들의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몇몇 우연한 계기를 통해 나 역시 아카펠라 그룹 활동을 하게 됐는데, 운 좋게도 1집 음반이 40만 장 가까이 팔리고 유학 가기 전까지 몇 장의 앨범을 더 내게 되면서 영미권에 ‘아카펠라 신(scene)’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다. 이때 접한 것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아카펠라 음악에 인공적인 효과를 얼마나 허용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아카펠라 자체가 악기 반주를 배제하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기계적인 음향효과를 덧붙인 그룹의 곡이나 앨범은 아카펠라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 논쟁은 곧 잊혔는데, 그것은 기계들을 배제하고서는 녹음 자체가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비인간적인 것을 철저히 삭제하고, 순수하게 사람의 목소리로만 이뤄진 노래만이 ‘진정한 아카펠라’라면 녹음은 이뤄져선 안되며, 결과적으로 다른 지역과 나라, 대륙에 거주하는 이들의 노래는 현장에서가 아니면 들을 수 없다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엄밀히 말해 소리라는 현상 자체가 공기와 공간이라는 매체 혹은 매질 없이는 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문제의 논쟁은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이는 「스타워즈」와 같은 영화에서 듣게 되는 박진감 넘치는 효과음들, 특히 공기가 전혀 없는 진공상태의 우주 공간에서 벌어지는 전투 장면의 소리가 원칙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소리란 매체와 본질적으로 분리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리를 만들고 궁극적으로 들리게 한다는 의미에서, 매체란 소리의 가능성의 조건 그 자체다. 이러한 인식의 잔향은 유학 시절 미국의 작은 교회에서 7년 넘게 이어간 성가대 지휘를 지나, 매체가 예술 일반과 갖는 관계에 대한 탐구로 꾸준히 이어졌다.
《올해의 작가상 2023》 수상자로 최종 결정된 권병준의 전시는,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이 오랜 기억의 타래를 고스란히 재소환해 줬다. 그것은 이번 전시와 그간의 그의 작업 전체가 크게 소리와 기계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작년부터 가속화된 AI의 광풍 속에서 익숙해진 목소리들을 떠올려보자. 브루노 마스가 부른 것처럼 들렸던 뉴진스의 「하입보이」나 BTS의 정국 목소리가 분명한 위켄드의 「스타보이」를 넘어, 아이유와 박명수가 부르지 않았음에도 누구나 그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든 가수 비비의 히트곡인 「밤양갱」의 다양한 버전들 말이다. 이들은 인간이나 특정 개인에게만 고유한 것이라 간주되던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인공적인 것과 구분 불가능하게 뒤섞인 상황을 첨예하게 드러낸다. 매끄럽기보다는 투박하고, 자동화 보다는 수작업에 가까운 권병준의 작업은 이러한 최첨단의 ‘포스트 휴먼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1 하지만 동시에 그의 작업은 ‘자연스러운 (목)소리’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예멘 난민이나 한국의 다문화 가정을 비롯한 이른바 ‘소수자’들에 지속적으로 보여온 관심이 강조되면서 역설적으로 간과되어온 지점이란 의미에서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가 로봇을 이러한 이질적 존재들의 소실점, 즉 “가장 낯선 이방인”으로 떠올렸고, 이번 전시에서 그것을 “인간 사회의 소수자이자 동반자”로 제시했다는 건 난민과 이주민들이 이질적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환기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난민과 이주민들이 말 그대로 ‘기계적’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기계적인 것은 이질적이지만, 이질적인 모든 것이 기계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때 우리는 권병준이 20년 넘게 섬세하게 세공하고 확장해온 구축물 전체를 ‘타자에 대한 포용’을 촉구하는 투박한 성명서만으로 성급하게 환원하게 된다.
이는 소리란 대개 ‘음악’과 혼동되지만 그보다 큰 범주며, 기계, 또는 자동기계 역시 대개 ‘휴머노이드,’즉 인간의 형상과 기능에 기반한 로봇을 떠올려 주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 단순한 규정은 다분히 로봇의 형상 재현에만 집중된 전시에 대한 편향적 반응을 교정하고,2 권병준의 작업이 만들어온 폭넓은 공명을 포착하는 데 있어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로봇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소리 개념을 통해 되먹임 된 확장된 의미의 음악이 그의 작업 안에서 기계적인 것과 맺어온 내재적 관계를 적확하게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존 케이지의 「4분 33초」가 환기한 침묵, 혹은 ‘완벽한 침묵의 불가능성’이 좁은 의미의 음악을 넘어서는 사운드를 시사한 가장 유명한 사례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권병준의 작업에 관한 논의에서 보다 유의미한 것은 오히려 대표적인 미니멀리스트 작곡가이자—실험적 민족지 영화인 「코야니스카치」(1982)에서 「트루먼쇼」(1998)와 「디 아워스」(2000)와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거쳐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2013)에 이르는, 다채로운 영화의 음악을 맡은—영화음악가로도 잘 알려진 필립 글래스(1937–)의 회고일 것이다.
밥 딜런과 필립 글래스, 또는 권병준
줄리아드 음악원을 졸업하고 떠난 3년간의 파리 외유 직후인 1967 년, 글래스는 뉴욕으로 돌아온다. 이때 자신이 들었던 “가장 큰 것/사건”으로 그는 “필모어 이스트에서의 증폭된 소리”를 적시한다.3 당시 로큰롤 공연장으로 유명했던 필모어 이스트에서는 당대의 인기그룹인 제퍼슨 에어플레인이나 프랭크 자파의 음악들이 흘러나왔는데, “진동하며 스피커들의 벽에서 찢을 듯 터져 나오는, 높은 볼륨의 리듬에 이끌린 음악의 광경과 소리”가 그를 흠뻑 매료시켰던 것이다. 물론 로큰롤의 증폭된 사운드가 가져온 결정적인 분수령과 충격은, 이보다 2년 전인 1965년 7월, 뉴포트 페스티벌에 나타난 밥 딜런이 1964년산 전기기타인 선버스트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를 연주했을 때 이미 정점에 달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때 많은 팬들은 딜런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느꼈다. 앞서 두 번의 연이은 페스티벌 출연을 통해 다진 ‘포크 음악’의 선도자 이미지를 그가 내던졌다고 여긴 청중은 거친 야유와 욕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이러한 청중의 부정적 반응이, 포크 음악의 중핵이라 할 노래의 가사를 전기기타의 증폭된 사운드 때문에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4 포크 블루스 기타리스트이자 음악사학자인 엘라이자 월드는 이 사건을 미국의 1960년대를 둘로 쪼갠 분수령의 역할로까지 격상시킨다. 린든 존슨이 미국을 베트남전으로 밀어 넣고 “블랙파워”의 부상이 민권운동 내부의 백인 중심주의를 도드라지게 만들면서 1960년대 전반의 “공동체적 감정”이 내파된 상황에서, 그러한 감정적 공동체의 수장으로 동일시되던 딜런이 이를 압축적으로 거부하며 폭발시킨 셈이 됐다는 것이다.5 이는 기계적 사운드의 증폭이 클래식 애호가와 포크 음악팬들 각각에게 가져온 효과가, 음악의 핵심적 구성요소라 할 멜로디와 화성, 그리고 가사라는 요소의 파열을 넘어섰다는 것을 뜻한다.
가령 글래스의 초기작인 「5도 음악」이나 「유사한 움직임의 음악」은 그가 필모어 이스트를 바삐 드나들던 다음 해인 1968년 6월부터 12월 사이에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그의 다른 작업이 그렇듯, 이들은 대개 음정들 사이의 수학적 구조와 패턴, 특히 가산(addition)과 감산 (subtraction)이라는 차원에서 요약되곤 한다. 이러한 측면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글래스는 당시 이들이 선사한 “충격의 큰 부분은 소리의 증폭 그 자체”에서 왔다고 강조한다. 청아한 그랜드 피아노를 사용한 후대의 녹음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의아하겠지만, 글래스는 1960년대 말 당시 자신이 사용했던 “일렉트릭 피아노와 필요 이상으로 둔중한 붐박스 스피커 같은 당시의 기술 수준”이 이 곡들을 “그런지”(grunge)하게 만들었다고 인상적으로 회고한다.6 그런지? “더러운”(dirty) ‘시애틀 사운드’라 회자되던, 펑크록과 헤비메탈을 결합한 의 1990년대의 얼터너티브 록 말인가? 사운드가든, 펄 잼, 앨리스 인 체인스, 무엇보다 요절한 커트 코베인의 너바나 같은 전설적인 밴드들로 대표되는? 필립 글래스의 곡이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리트」처럼 연주됐다고 상상할 이들이 몇이나 될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커의 증폭장치를 통해 나온 기계적 사운드는 다시 글래스의 표현을 빌면 좁은 의미에서 규정되던 클래식 음악의 “문지방”, 혹은 “역치”(threshold)를 넘는 것이었다.7
“증폭 장치는 음악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했다”8고 반복적으로 강조하면서, 그는 이렇게 기계장치를 통해 증폭된 사운드를 사용하는 ‘록’이 클래식 음악계에서 ‘음악’으로 간주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여기에 록 음악의 단순한 베이스라인을 또 다른 ‘마이너스’ 요소로 덧붙이는데, 글래스는 이 단순함을 인도 음악과 병치시킴으로써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 형성 과정을 적극적으로 재규정한다. ‘음악가의 음악가’라 불리던 나디아 불랑제와 함께, 자신이 프랑스에 머물며 사사한 또 다른 거장인 라비 샹카르9를 통해 접한 인도 음악의 “격렬한 리듬”은 로큰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기이한 우회로를 통해 자신의 모국에서 뒤늦게 접한 “로큰롤은 내 음악의 형식적 모델이 되었고, 기계 장치라는 기술적 측면은 감정적 모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10라고 그는 요약한다. 이는 대개 ‘미니멀리즘’이라는 건조한 구조 놀음의 차원에서 요약, 또는 기각되곤 하는 그의 작업11뿐 아니라, 권병준의 작업을 보다 섬세하게 듣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발언이다.
사실 “록 음악은 그들을 지탱해 주는 매체의 힘 그 자체를 노래한다”라는 키틀러의 지적처럼12 로큰롤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기계적이고 전자적인 보철물(prosthesis)이다. 평소에 쓰던 안경을 깨거나 잃어버린 사람이 시각장애인과 다름없어지듯, 스피커를 찢을 듯 증폭된 기타의 디스토션과 볼륨을 잃고 멜로디와 코드로만 환원된 록 음악은 누군가에게 더 이상 록 음악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1971년, 이후 필립 글래스 앙상블과 글래스 영화음악의 사운드 엔지니어를 도맡게 될 커트 문카치를 영입한 글래스가 “가능한 한 크게, 하지만 디스토션 없이, 매우 깨끗하게” 소리를 재생하길 원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13 록에서 착안해 사운드의 볼륨을 클래식 음악의 임계점까지 밀어붙이면서도 디스토션을 제거했다는 건, 클래식 음악도 록도 아니라는 그럴듯한 비난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편으로 가령 잉베이 말름스틴의 ‘바로크 메탈’처럼 클래식 음악을 전기 기타로 연주하는 방식이, 이후 바네사 메이의 전자 바이올린을 거쳐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파헬벨의 캐논에 의해 손쉽게 대체되었듯, 단순한 형식주의나 악기를 물신화하는 함정에 빠질 것을 염두에 둔 행보라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기계적인 악기와 전자적인 사운드를 매개로 포크 음악과 클래식 음악의 위상과 형질 변형을 꾀한 딜런과 글래스의 궤적은 권병준의 작업에 관한 논의에도 적절한 접점을 제공한다. 그것은 이 시기가 콘서트홀이 아니라 미술관 갤러리에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사운드 아트’의 역사적 태동과 맞물린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14 다만 이 접점은 역사적 시차와 아이러니로 충만하다. 딜런에게 포크음악을 넘어 1960년대를 홍해처럼 가르게 한 전기기타와, 글래스에게 일종의 해방구로 다가왔던 록이 그사이 함부로 취급하거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유산을 가진 산업의 상징이자 장르가 되었다는 사실이, 권병준에게는 무거운 제약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자신은 “록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자기 색깔을 끝없이 유지하고자 하는 뮤지션”15이 아니었다는 자각은, 권병준의 음악 활동과 미술 신에서의 작업을 무비판적으로 연결하는 적지 않은 논의에서 대부분 간과된다.
그가 펑크 록과 모던 록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1990년대는 글래스가 인상적으로 환기한 ‘그런지 록’의 여파가 한국에까지 미친 시기였다. 하지만 이후의 음악적 실험은 그가 부딪힌 록 음악의 역사적 위상과 한계에 대한 첨예한 인식 속에서, 가령 디스토션이 걸린 기타 중심의 록에서 달파란과 함께 한 ‘미니멀 하우스 음악’으로 이행한다. 그렇게 「모조소년」(2004) 앨범으로 구체화된 시도조차, 궁극적으로 산업 안에서의 ‘음악’이라는 범주로 포섭될 수밖에 없다고 그는 간주했던 게 아닐까? 한국에서의 모든 활동을 접고 떠난 헤이그 왕립음악원에서 음향학(sonology)을 전공한 후, 그가 아티스트들을 위한 실험적 악기를 만드는 독특한 기관인 스타임(STEIM)에서 일했다는 사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구체적으로 곱씹을 필요가 있다. 그의 작업은 록이건 악기이건 그것이 하나의 전통이자 유산으로 화석화되고, 좁은 의미의 ‘음악’에 복무하는 요소로 공고해지는 지점에 지속적으로 개입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우회와 표류
예를 들어 <하이브리드 피아노›(2013)는 2011년 귀국한 후 2년 만에 만든 작업으로, 피아노처럼 보이지만 현악기 소리를 낸다. 이는 버려지고 풍화된 피아노를 스프링의 미세한 떨림을 통해 현을 발진시키는 방식으로 개조한 결과다. 이번 전시장 천장에 매달린 <풍경 그리고 풍경›(2012)의 연장선에 놓인 작업으로, 진천의 종 박물관에서 가진 <흐느끼는 종들›(2015) 퍼포먼스 역시 종을 때려 소리를 내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진동 소자를 이용해 종을 공진하게 만들어 소리를 만들어내는 시도였다. 이렇게 권병준의 악기들은 나름의 소리를 낸다. 하지만 이들은 더 이상 기타나 건반처럼 누구나 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자는 오랜 연습을 통해 체득한 피아니스트의 기술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고, 후자 역시 인간이 습득한 타종의 노하우를 일순간 증발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조금 더 나아가 보자. <타이베이를 위한 노래›(2016)는 실지로 ‘하이브리드 피아노’를 활용한 퍼포먼스 작업으로 타이베이 외곽산 중턱에 자리 잡은 전시공간에서 진행됐다. 자신이 개조한 피아노의 음색을 활용해 현장에서 작곡한 여덟 편의 곡을 권병준은 타이베이의 전경을 향해 한 시간 단위로 송출했다. 전시장 옥상에 위치한 두 개의 혼 스피커를 통해 재생된 이 음악들은 타악기와 현악기는 물론,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축 양자를 뒤섞으며 타이베이에 정향 되었다. 그런데 타이베이의 청중들은 정말 이 음악을 들었을까? 그는 연주할 수도 없는 악기로, 누가 듣는지도 모르는 소리를 송출하는 게 아닐까?
이렇게 보면 권병준의 작업은 지극히 관념적인 이상주의자의 백일몽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주어진 악기의 외면을 유지하는듯하면서도 타악기와 현악기 사이에서 진동하게 만들고, 각각에게 부여된 자리와 위상을 전치(displace)시키는 권병준의 개입은, 2차대전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상황주의자들’(Situationists)의 실천을 떠올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런던 지도를 펼쳐 놓고 지도 속의 길 안내를 따라 독일의 하르츠 지역을 돌아다녔다는 기 드보르의 한 친구처럼,16 그들은 오래된 영화에 엉뚱한 자막을 입히거나 교향곡을 그대로 둔 채 제목만 바꾸는 방식의 개입을 통해 현실을 재구성하려고 애썼다.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였던 맬컴 매클러렌은 펑크록이라는 장르의 시원에 자리 잡은 영국의 이 대표적 그룹이, 상황주의자들에 대한 자신의 연구 속에서 성장했다고 반복해 밝힌 바 있다.17 공교롭게도 펑크록에서 시작한 권병준의 작업들 또한 상황주의자들이 ‘표류’(dérive)와 ‘우회’(détournement)라 이름 붙인 개입의 방식과 절묘한 공명을 만든다.
이번 전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 <오묘한 진리의 숲›(2017–19) 시리즈를 떠올려보자. 2017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혁명은 TV로 방송되지 않는다》에서 처음 선보인 이 시리즈는, 서울시립미술관(<예멘 난민의 노래›)과 교동도(<교동도 소리풍경›)를 지나 <다문화 가정의 자장가›에 이르기까지 네 번에 걸쳐 변주됐다. <예멘 난민의 노래›의 경우 평온한 미술관 주변의 풍경은 난민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향의 노래들과 엇갈렸고, <교동도 소리풍경›에서 들리는 대남/대북 방송 소리는 교동도의 아름다운 풍광의 주파수와 부딪히며 역사적인 맥노리 현상18을 남겼다. 눈에 보이는 풍경과 귀에 들리는 소리 중 어떤 것이 더 ‘현실적’인 것일까? 권병준의 소리 작업들은 둘 중 어느 하나를 특권화하지 않으면서 이 질문을 꾸준히 던진다. 이 시리즈는 2021년 부산시립미술관의 어린이 갤러리에서 열린 《네버랜드 사운드랜드: 권병준—소리산책》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이번 전시에서처럼 헤드폰을 쓴 관객과 청중들은 베트남과 중국,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필리핀의 언어로 불리는 자장가를 들을 수 있었다. 해당 국가 출신의 사람들이었다면 누구나 편안함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여기서도 관건은 자신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불리는 자장가가 자신에게 낯선 이국적 풍광 속에서도 ‘작동’하는가에 가깝다.
이렇게 이미지와 사운드가 헤드폰을 비롯한 일련의 기계를 매개로 서로를 ‘우회’하고 각자에게서 ‘표류’하는 작업 특성이, 과연 이번 전시장에서 오롯이 드러났느냐 질문하면 아쉽게도 긍정적으로 답하긴 어렵다. 헤드폰을 통해 듣는 청각적 감각은 그대로였을지 모르나 전작에서 현실, 혹은 자연적인 공간과의 엇갈림—또는 뒤에서 상술할 ‘이의 제기’—속에 놓였던 것들이 만드는 이질감이 미술관 갤러리의 어두운 아이보리색 공간에 감금되자 오히려 일반적인 의미의 ‘예술’로 작동한 듯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다분히 로봇에 집중된 전시공간과, 이에 치우친 관객들의 반응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닐까?
어둠을 돌보는 빛
그러므로 곧 다시 마주할 이 질문을 잠시 유예하고, 권병준의 로봇들에 주목해 보자.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이들은 곱씹을만한 몇 가지 흥미로운 특징들을 갖는다. 가장 인상적인 건 이들의 머리다. 그것은 한국에서 ‘랜턴’ 또는 ‘플래시 라이트’라 불리는 조명용 장치로 익숙한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로봇의 머리에 부가적으로 부착된 것이 아니라 머리 그 자체를 형성한다는 사실이다. 즉 이 로봇에서 조명은 얼굴이나 뇌를 대체하며, 말 그대로 ‘조명’ 이외에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은 없어 보인다.
이는 이 로봇의 움직임, 아니 ‘작동’ 자체가 ‘자동적’이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자신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결정하는 뇌, 또는 컴퓨터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의 작동이 자동적(autonomous)이지 않다는 것은 자율성(autonomy)이 없다는 것이며, ‘독립적’(independent)이기보다는 ‘의존적’(dependent)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에 의존하는 것일까? 일차적으로 사람에 의존한다. 빠르고 절묘하기는커녕 느리고 삐걱대지만, 이들의 투박한 움직임조차 전시장에 상주하는 인간 기사들의 돌봄의 산물인 것이다. 이렇게 사람에 의존하는 기계로서, 권병준의 로봇들은 자동적이기보다는 의존적이다. 이렇게 인간에 의존하는 기계들은 대개 ‘도구’나 ‘수단’의 역할을 수행한다. 자동차는 우리를 원하는 목적지로 데려다주고, 프린터는 필요한 서류를 인쇄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 의존하는 권병준의 기계들은 대체 어떤 목적을 갖고 작동하는 것일까? 이는 이 기계들이 어떤 의미의 ‘도구’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한데, 이에 답하는 건 쉽지 않다. 가령 ‘춤추는 사다리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데 쓰이는 사다리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채 작동한다. 그들은 앞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해진 트랙을 왕복하거나 원형 트랙을 돌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의 정상적인 작동은 이미 오작동이며, ‘쓸모’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들이 ‘도구’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움직이는가? 이들이 ‘자율적’이지 않고 ‘의존적’이며, 뇌와 같은 컴퓨터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환기해 보자. 그때 이 질문은 이들이 아니라 인간, 즉 작가인 권병준에게 제기될 것이다. 이 쓸모없는 기계들을 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작동시키는 것일까? 그는 이들을 대체 왜 만들었을까? 자율적이지도 않고 도구도 아닌, 이들의 ‘존재 이유’(raison d’être)는 과연 무엇일까?
바로 이 지점에서 그들의 머리가 ‘조명장치’라는 사실을 재소환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들의 머리는 조명장치일 뿐이다. 그것은 무엇을 비추는 것일까? 권병준에 의하면 이들은 다른 로봇들을 비춘다. 자신과 같은, 다른 로봇들. 그는 이 로봇들을 “반쪽짜리 존재”라 부르는데 그것은 이들이 ‘외팔이’이기 때문이고, 궁극적으로 이들이 조명을 통해 양팔을 가진 존재로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독해들은 대개 이 지점에서 ‘소수자’에 대한 관심으로 비약한다. 하지만 여기서 진정으로 흥미로운 건 문제의 완전함이 오로지 ‘그림자’로만 성취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제 말 그대로 “완전해 보인다.” 이는 그들의 완전함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실체’인 로봇의 궁극적 목적이 ‘완벽한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라는 아이러니 자체다. 그들은 가령 ‘트랜스포머’처럼 실지로 ‘합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리 완벽하다 해도, 그것은 결국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 반문은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랜턴이 대개 어떤 비상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물품으로 간주된다는 자명한 사실을 곱씹지 않을 때만 제기되는 것이기도 하다. 주지하듯 문제가 되는 비상상황이란 대개 낮이 아닌 밤, 특히 인간의 일상생활을 가능케 하는 조명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을 가리키며, 비상용품으로서 랜턴이란 바로 이 상황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데 쓰인다. 그러나 권병준의 랜턴은 어둠을 몰아내는 게 아니라 그림자를 만드는 데 쓰인다. 자신의 일반적인 ‘존재 이유’를 거꾸로 물구나무 세우는 것이다. 이를 ‘어둠을 돌보는 빛’이라 부르면 어떨까?
상황주의자의 미래
이는 연관된 또 다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로봇에게 빛과 어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오늘따라 얼굴이 어두워 보인다’는 표현이 찬사가 아니듯, ‘빛과 어둠’은 긍정과 부정의 대립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는 개념 쌍이다. 실지로 권병준은 자신의 작업에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는 지적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차원의 답을 제공하기도 했다. 작업에 등장하는 로봇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지치고, 어떤 형태로건 공동체를 만들어보려던 자신의 시도들이 실패한 산물이라는 것이다.19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그의 로봇들을 ‘소수자’라 이름 붙이려는 욕망을 납득할 수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권병준의 작업은 그러한 조급함보다는 신중함을 활성화한다.
최근작인 <청주에서 키이우까지›(2022)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곱씹어 봐야 한다. 제목이 시사하듯 이 작업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벌어진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을 배경으로 삼는다. 외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한 관심이 거의 사그라든 시점에서, 작가는 그러한 무관심이 한국 사회 자체에 팽배한 무관심과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고백한 바 있다. 전쟁을 떠올릴 수 있는 직접적인 소리 대신, 목재가 분쇄되거나 굉음이 일상화된 건설 현장의 소리를 채집하기로 그가 결심한 건 이런 맥락이다. 헤드폰을 쓴 관객이 창문과 유리가 빼곡한 건물에 가까이 가면 유리들이 깨져 쏟아져 내리거나, 바닥에 놓인 유리가 걸음에 맞춰 깨지는 듯한 소리가 매핑됐다. 물탱크 아래를 걸으면 물벼락을 맞는 듯한 이러한 소리들은 물론 가상적(virtual)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상성을 전쟁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 대한 단순한 상상이나 ‘공감 능력’의 문제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이보다 미묘하고 결정적인 사실은, 문제의 소리들이 청주와 키이우라는 실제 장소 양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청주의 국립현대미술관 미술품수장센터 건물 유리는 깨지지 않았고 물탱크 또한 누수와는 거리가 멀며, 해당 소리들은 키이우의 실제 상황을 모사하고 있지도 않다. 청주에서 벌어질 가상의 재난을 통해서만 키이우의 재난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일까? 하지만 이러한 추정은 청주에서 벌어질 가상의 재난에, 서울이나 부산, 혹은 제주처럼 한국의 다른 지역에 있는 이들이 곧바로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불러들인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서로 다른 도시와 지역의 재난에 공감할까? 혹 상황주의자들의 ‘우회’와 ‘표류’는 그사이 지극히 역설적인 의미에서 이미 완수된 것은 아닐까? 런던 지도를 펼쳐 놓고 지도 속의 길 안내를 따라 독일의 하르츠 지역을 돌아다니던 드보르의 친구는, 서울에서 뉴욕이나 베를린의 부동산 지도를 펼쳐보는 테슬라 주주에 의해 대체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진정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속속들이 산산 조각나 있던 것은 아닐까?
헤테로토피아와 심리지리
프랑스의 영화감독이었던 로베르 브레송은 관습적인 영화, 즉 ‘시네마’와 그가 ‘시네마토그라프’라 부른 것을 구분하면서, 후자에서는 “어떤 소리가 어떤 영상을 구제하러 와서는 결코 안 되고, 어떤 영상이 어떤 소리를 구제하러 와서는 결코 안 된다”라고 적은 적이 있다.20 권병준의 이번 전시 전체가 이미지와 사운드 간의 이러한 분리 속에서 (오)작동한다는 건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강조되어야 한다.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수많은 로봇들은 사운드의 축을 담당하는 <오묘한 진리의 숲› 시리즈와 철저히 분리된 채 작동했다. 천장에 매달린 <풍경 그리고 풍경›은 이러한 유리를 더욱 강조할 뿐이다.
그의 이전 작업인 <자명리 공명마을›(2019)은 이러한 분리가 시사하는 모종의 불안을 잠재우는데 가장 효과적일 듯한 작업이다. 작가가 특수 제작한 헤드폰은 물리적 거리에 따라 자신의 소리와 상대의 소리를 섞어주는데, 이때 관객은 서로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춤으로써 서로의 소리를 교환할 수 있다. 헤드폰이 개인을 타인과 융해시키기보다는 분리시킨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지극히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 작업은 동시에 이 아름다운 공명이 오로지 헤드폰을 매개로 해서 이뤄진다는 아이러니를 자명하게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 지점을 놓치면 안 된다.
돌이켜보면, 그가 작업의 주요 요소로 헤드폰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은 2017년부터다. 당시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이 전시는 사운드를 중심으로 구성됐는데, 열 팀 이상이 함께하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연기처럼 퍼지고 스미는 소리의 특성상, 각각의 소리가 공간의 경계를 넘어 누수하고 다른 작업을 방해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이런 곤란함을 우회하려는 목적에서 착안한 것이긴 했지만, 권병준의 작업에서 헤드폰이 수행하는 기능과 함의는 이후 점차 두터워지게 된다. 실지로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는 권병준의 작업에 대한 인상적인 글에서 “권병준에게서 ‘장소 특정성’은 ‘비장소 특정성’ 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그의 공간은 규정되지 않는다”라고 지적한 뒤, “장소를 지우는 헤드셋의 사운드는 권병준 작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21라고 단언한 바 있다. 이러한 평가는 흥미롭지만 동시에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헤드폰은 장소를 지우고 다시 쓰지 않던가?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착용한 채 큰소리로 웃고 떠드는 이들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권병준 헤드폰의 독특한 위치 인식 기능은 이점에서 흥미롭다.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GPS가 아니라 RTK(Real Time Kinematics) 기술을 이용하며, 이를 통해 ‘헤테로토피아적인 사운드 아트’라 부를 수 있을 작동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들에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 부른 특성은 “다른 모든 공간에 대한 이의 제기”라는 점이었다.22 이런 의미에서 권병준의 헤드폰은 특정 장소에 관객이 가까이 가면 그 자리에 걸맞게 설치된 사운드가 작동하는 방식과, 헤드폰을 통해 장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식 모두와 구분된다. 장소를 이동하는 관객 개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면서도, 그 자율성 위에서 특정 장소 본래의 것이 아니라 그것과 차이화되고 “이의 제기”하는 사운드를 활성화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의 제기는 방대한 실제 공간으로 침투하며 확장되기도 했다. 대개 몇십 미터에 불과한 갤러리 공간이 아니라, 반경이 2–3킬로미터에 달하는 남산한옥마을과 홍성의 홍동저수지에서 진행된 <유령극단, ‘심각한 밤을 보내리’›(2021/2022)는 상황주의자들이 ‘심리지리’(psychogeography)라 이름 붙인 방식을 본격적으로 떠올려주는 퍼포먼스 작업이다. 이번 전시의 주 전시장 공간을 느슨하게 채웠던 온갖 종류의 엉성한 로봇들을 작가는 이때 지역 여기저기에 풀어 놓았다. 함성호가 지적했듯 이들은 하나같이 “외팔이, 외눈이에다 술주정뱅이들”같은“싸구려 인조인간들”처럼 보였다. 혹자는 그의 초기 작업인 <행복 찾는 나그네의 눈동자는 불타오르고›(2011)까지도 거슬러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주제가의 가사를 절취한 제목이 시사하듯, 이때 그가 작업의 주된 참조점으로 삼은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 자체가 영생을 누리는 행복을 찾아 나선 인조인간의 얘기였기 때문이다.
태초에 매개/기계가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권병준이 언제나 기계, 혹은 기계적인 것과 함께 해왔다는 사실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떠올릴 건 <모든 것을 가진 작은 하나›(2010)다. 권병준이 자신의 본격적인 “첫 번째 단독 공연”이라 적시한 이 공연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을 준비한 바 있다.
새로운 악기가 주는 새로운 몸짓과 연주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누군가와 함께 무대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으로 소통하는 것에서 더없는 기쁨을 느끼는 자가 왜 기계와 함께 무대에 설 수밖에 없는지를 얘기하려고 한다.
권병준에게 기계는 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을까? 그는 “왜 기계와 함께 무대에 설 수밖에 없는지를 얘기하려고” 했을까? 일단 위에서 논의했듯, 그가 실험적인 펑크록에서 미니멀 하우스 음악에 이르는 폭넓은 장르의 음악에 몸담았던 뮤지션이었다는 사실을 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 신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 그는 공중파 음악방송에도 출연하며 한국 대중음악 신에서 활약했고, 연주와 작업 양자에서 기계는 본질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언플러그드 음악’이 있지 않았냐고 반문할 이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서두에서 환기한 ‘진정한 아카펠라’의 연장선에서, 이러한 반문은 ‘녹음된 언플러그드 연주를 과연 아날로그라 할 수 있느냐’라는 아이러니를 벗어날 수 없다.23 전 지구적 음악산업 자체가 스트리밍 중심으로 재편된 상황에서, 설혹 LP로 재생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수반하는 청취 경험에 부여되는 당대의 위상과 함의는 ‘디지털 인프라’와의 관계 속에서 상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을 깔끔하게 구분하려는 이러한 순진한 입장은, 권병준의 작업이 세밀하게 (오)작동시켜온 함의들과도 직결되기에 더욱 찬찬히 뜯어볼 필요가 있다.
이번 전시장에 입장한 관객들의 정면 허공에 배치되었던 <풍경 그리고 풍경›을 떠올려보자. 이 작업은 16음계로 이뤄진 전통 악기인 ‘편경’(編磬)을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원격 조정될 뿐 아니라, 소리 자체가 전기적으로 변조된다. 원천은 아날로그임에 분명하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그렇지 않다. 이를 단순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합성 정도로 간주하는 게으름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글래스가 기계적으로 증폭, 또는 변조된 록 사운드와 단순한 베이스라인을 통해 클래식 음악을 내재적이고 구조적으로 변형하려 했다면, 권병준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기계적이고 전자적인 매개를 통해 이미지와 사운드, 디지털과 아날로그,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를 ‘우회’하고 서로에게서 ‘표류’하게 만든다.
가령 ‘랜턴’ 머리를 한 채 주 전시장을 활보하던 기계들 대부분과 전시장 오른쪽 구석에 놓인 <6개의 마네킹›의 가장 큰 차이는 머리와 얼굴을 둘러싸고 진동한다. 축소된 크기의 전신 마네킹 인형들과 정상인 크기의 마네킹 두부(頭部)가 설치된 후자는 ‘휴머노이드’로, 인간의 형상을 도상적으로 모방한다. 물론 전자에서 머리 부분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령 곤충을 ‘머리-가슴-배’로 파악하거나, 실지로는 복부에 해당하는 문어 신체의 둥글게 부풀어 오른 부분을 인간의 입장에서 머리로 오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24 대개 머리, 더 정확하게는 얼굴이 인간이 참여하는 ‘인터페이스’의 가장 중요한 평면으로 인지된다는 점에서 이는 중요한 표지가 된다. 소위 ‘언캐니 밸리’ 현상이나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하는 SF 영화 「컨택트」(Arrival)를 환기해 보라. 실지로 권병준의 초기작 중 하나인 <인터페이스›(2010)부터가 얼굴의 정체성, 더 정확하게는 얼굴과 (목)소리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의문시하는 작업이었다. 눈썹과 뺨에 자력 센서와 자석을 붙인 일곱 명의 남녀(‘dirty sound orchestra’)가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청중이 듣게 되는 소리는 개구리나 두꺼비, 또는 새소리에 가깝고, 그마저 전자적으로 변조된 것이다. 이 작업이 “우스꽝”스러웠던 것은 기계를 매개로 변조된 얼굴과 목소리 사이의 간극과 무관하지 않다.25
여기서 시사적인 건 <이것이 나다›(2013)라는 그의 초기 퍼포먼스 작업이다. (목)소리 뿐 아니라 (비)인간의 얼굴이라는 요소에 동시에 천착했다는 의미에서, 이 작업은 이번 전시로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 그의 작업 전반의 문제의식이 구현된 대표적인 사례다. 의자에 앉은 작가의 휘파람으로 공연을 시작한 작가는 종이에 그려진 얼굴 드로잉을 카메라로 읽게 만들고, 안면인식 프로그램은 이 그림을 얼굴의 매핑을 위한 기초자료로 인식한다. 이후 하얀 분칠로 캔버스가 된 그의 얼굴에는 백남준과 조지 부시, 마릴린 먼로와 김구와 같은 유명인들의 얼굴이 투사되고, 이는 다시 그의 뒤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상영된다. 한편으로 이 퍼포먼스는 작가를 만나 “우리는 모두 낯선 자들입니다”(We are all strangers)라는 말을 전했던 크지슈토프 보디츠코의 프로젝션 작업을 떠올려준다. 다른 한편 그것은 내가 다른 곳에서 이미지와 사운드, 얼굴과 목소리 사이의 “기원적 간극”(originary gap)이라 규정했던 ‘페르/소나’의 개념을 따로 또 같이 체화한다.26 어떤 의미에서? 타자 이전에 우리 각자가 이러한 간극과 이질성으로 규정된다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는 혼자서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앉았다 일어서거나 명상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로봇들의 행위에도 고스란히 적용 가능하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율적인 존재가 아닌 한, 그들의 이 모든 행위가 말 그대로 우리, 즉 인간에게(만) 그렇게 보일 것이라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나가며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전시장 오른쪽 구석에 배치된 작업이다. 공간 배치상 대부분의 관객은 이를 주 전시장에 포진된 작업들을 보고 난 뒤에 보게 되는데, 이는 시적인 에세이의 초록(abstract)처럼 이번 전시를 요약함과 동시에, 그의 이전 작업들을 압축적으로 소환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공간에 들어갈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일련의 마네킹들이다. 그 위에 그들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거대한 손이 보인다. 인형 안에 인형이, 그 인형 안에 또 다른 인형이 들어가 있는 러시아 인형을 떠올려주는 형식이다. 이 광경을 또 다른 마네킹의 얼굴이 우리를 등진 채 지켜보며 이를 인간인 우리가 다시 바라보게 된다. 즉 네 겹의 레이어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전시장 안에서 작업을 보호해야 하는 안내요원 외에도, 우리는 천장에 설치된 CCTV 카메라의 응시 속에 항상적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작가의 작업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추론 자체가 그의 작업이 촉발한 메타적 시선의 산물이다. 물론 이러한 추론은 무한히 이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추론의 끝, 다시 말해 목적과 쓸모가 상정되기 때문이다.
전시장 카메라의 목적은 자명해 보인다. 작가의 작업을 보호한다는 것. 그렇다면 남는 건 마네킹들을 조종하는 손을 바라보는 마네킹과 우리일 것이다. 엄격한 사이버네틱스주의자라면 하인츠 폰 푀르스터가 “사이버네틱스의 사이버네틱스”라 불렀던 것, 즉 “우리는 우리의 관찰을 관찰해야만 하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설명을 설명해야만 한다”라는 공리를 환기할지 모른다.27 거기서 마네킹과 인간의 차이란 없다. 권병준도 이러한 입장을 따를까? 최소한 우리는 앞에서 이와 유사한 질문을 따라가 본 적이 있다. 거기서 랜턴 머리를 한 권병준의 불완전한 로봇들은 완전히 자율적이지도, 완전히 도구적이지도 않으면서 서로를 비추고, 이를 통해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그림자를 만든다는 것. 그것을 목적이라 부를 수 있다면 “어둠을 돌보는 빛”이야말로 이들의 ‘존재 이유’라는 것. 이것은 우리에게 빛일까 어둠일까? 이것을 따라가도 되는 것일까? 문제는 문자 그대로 어둠을 몰아내고, 어리석음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을 우리가 ‘계몽’(Aufklarung/Enlightenment)과 ‘각성’(Enleuchtung/Illumina tion)이라 규정한다는 데 있다. 이는 사다리의 역할 수행에 ‘실패’하는 권병준의 로봇들이 성장을 증진하고 개선에 기여하는 계몽주의적 프로그램과 어긋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이들의 실패가 우연적이지 않고 ‘반복’되도록 프로그래밍 됐다는 사실에 의해 다시 한번 강조된다.
가령 “더 낫게 실패하라”(Fail Better)라는 베케트의 유명한 말을 떠올려보자. 이를 여전히 ‘작년, 지난달, 어제보다 기록/성적이 좋아졌으니, 이제 목표가 코앞이다’라는 고루하고 건강한 상식의 ‘문학적 수사’로 여기는 만성적 습관은 이번 전시나 권병준의 작업을 근원적으로 포착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베케트가 환기하는 실패란 오히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 자체를 의문에 붙이고, 그 자명성 자체를 근원적으로 재규정할 수 있는 역량을 포착할 수 있게 하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계기를 지칭한다. 주어진 가치판단의 잣대 자체를 재규정하게 강요한다는 급진적인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따라서 최선이 아니라 최악이며, 후자를 더욱 섬세하게 쪼개고 밀고 나아가는 것이 된다. 베케트 자신이 어쩌면 번역 불가능할 것이라 간주했던 아래의 문단, 즉 단 한 가닥의 머리카락을 잘게 채 썬듯한 아래의 미세한(hair-splitting) 문장 다발들이 “보다 나은 말이 없어서”(For lack of a better word)라는 관용구를 거꾸로 물구나무 세워 “[이]보다 나쁜 최악[의 옵션]이 없어서”(For want of worser worst)라고 적확하게 쓰인 것처럼.
Less best. No. Naught best. Best worse. No. Not best worse. Naught not best worse. Less best worse. No. Least. Least best worst. Least never to be naught. Never to naught be brought. Never by naught be nulled. Unnullable least. Say that best worst. With leastening words say least best worst. For want of worser worst. Unlessenable least best worse.28
웃음이란 유연하게 ‘살아있는 생명’(elan vital)이 기계적 경직성에 사로잡힐 때, 거기서 벗어나라는 일종의 ‘경고’로 주어진다는 베르그송의 주장은 잘 알려져 있다.29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권병준의 로봇들이 반복하는 ‘기계적 실패’는 이런 역설적인 의미에서 ‘모범적인 실패’(exemplary failure)에 가깝다. 권병준의 ‘어둠을 돌보는 빛’이 우리에게 길잡이가 된다면, 그것은 이 시대에 빛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의 눈을 멀게 할 정도로 경합하는 수많은 빛들 때문에 이전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워 보이는 이 시대에, 그것이 실패와 어둠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로봇은 저만의 악기이고 음악을 확장하고 움직임을 탐구하는 과정을 하나의 연주로 생각해 주면 좋을 것 같다”30라는 “확장된 음악”(expanded music)에 대한 그의 당부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더욱 섬세하게 귀 기울여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