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동희

구동희
구동희(1974-)는 진부한 일상에서 출발하여 퍼즐을 맞추듯 우연적 상황을 개입시키면서 영상, 설치 등의 작업으로 작품을 풀어나간다. 작가는 주변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관심을 가지고 TV, 인터넷 등 각종 매체를 통해 자료를 수집해 간다. 작가는 작품 제작 과정에서 물리적 한계 상황을 수용하고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즐긴다. 뿐만 아니라 설명적일 수 있는 요소를 배제하고 관객에게 또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 놀이를 하듯 시각적 요소를 암시적으로 구현해 가는 작가의 작품에는 다층적인 의미 해석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부조리함이 묻어있다.

Interview

CV

<주요 개인전>
2013
‘Extra Stimuli’, PKM갤러리, 서울, 한국
2012
‘구동희 개인전’, 두산갤러리, 서울, 한국
‘No dog walking on the roof’, 두산갤러리, 뉴욕, 미국
2008
‘합성적 체험’, 아틀리에 에르메스, 서울, 한국
2006
‘Disturbance’,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한국

<주요 단체전>
2014
‘올해의 작가상 2014’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
2014
‘숨을 참는 법’, 두산갤러리, 서울, 한국
2013
‘애니미즘’, 일민미술관, 서울, 한국
‘Expanded Cabinets of Curiosities’, 아르코미술관, 서울, 한국
2012
‘제 7회 미디어시티 비엔날레’,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제 13회 에르메스 미술상’, 아틀리에 에르메스, 서울, 한국
‘The Body as Sculpture III’, 로댕미술관, 파리, 프랑스
2011
‘Vidéo et aprés, Ondes et flux’, 퐁피두 센터, 파리, 프랑스
‘Space Study’, 플라토, 서울, 한국
2010
‘Courage’, Contemporary Art from Fondazione Sandretto Re Rebaudengo, Centro Saint-Bunin, 아오스타, 이탈리아
‘플랫폼서울 2010 Projected Image’, 아트선재센터, 서울, 한국
2009
‘Video: Vide&0’, 아르코미술관, 서울, 한국

Critic 1

구동희의 <재생길>: 유희 그리고 현기증

정연심(전시기획 및 비평)

I. <재생길(Way of Replay)>, 2014년 8월
눈앞에 노란 색 길이 강렬하게 펼쳐진다. 전시장 입구에서 시작하는 비정형의 구축물은 동굴처럼 좁은 출구로 형성되어 있다. 구조물은 바닥에서부터 날아오르듯이 비상하는 것 같다. 몸통을 약간 숙이고 계단식으로 만들어져 있는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커브를 돌아가는 곳에 영상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미술관에서 이렇게 높이 올라 와 본적이 없었다. 이렇게 관람자의 몸이 천장을 향해 가면서도 균형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어느 정도 긴장을 하고 방향 감각을 잡으려고 한 적이 없었다. 위로 향해 가면 갈수록 지금까지 온 길이 앞으로 갈 길을 알려주는 지침이 되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뒤로 가려고 해도 전혀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뒤로 한발자국씩 옮기는 것보다는 앞으로 가는 것이 더욱 쉽다고 여기면서, 중간 목에 다다른다. 중앙에는 영구적으로 세워진 벽이 있다. 그 벽의 너비에 맞게 일종의 눈속임으로 제작된 계단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갈 수 없는 길, 형상만 계단으로 설정되어 있다. 주변을 훑어보면서 어릴 적에 탔던 놀이기구를 상상하며, 물결처럼 돌아가는 동선을 주시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보았던 전시장의 풍경이 아니다. 천장이 내 머리 위에서 대롱대롱 걸려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직립보행의 관람 자세는 구부정한 자세로 바뀐다. 전시장의 풍경은 관람자의 시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일종의 시차(parallax viewpoints)로, 보행자이자 관찰자인 내 시점에 따라 공간과 사물은 재확인된다.
그 누구도 각 관람자가 보았던 것을 그대로 볼 수는 없다. 그 순간 두 번째 스크린을 만나게 된다. 커버를 도는 순간 내 몸이 반사적으로 돌게 되는데, 그러한 커브가 있는 곳에 두 번째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영상은 “비명인지 환희인지 모를 집단의 소리로 뒤섞인 채” 서울랜드에서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조금 더 걷다가 세 번째 스크린을 만나게 되면 고지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정점에 이른다. 그러한 여정이 힘든 경우, 중간에 이를 포기하고 옆으로 연결된 계단으로 잠시 비켜서 포기를 할 수도 있고 아예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아니라면, 계속해서 마지막 지점을 향해 갈 수 있다. 마지막 공간에 도달하는 순간, 그 길이 막다른 골목에 직면한 것처럼 마지막 스크린을 볼 수가 있다. 스크린 속의 길은 각자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 여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각자의 머리에 카메라를 달고 지금까지 달려온 것처럼 관람자는 스프링 점프를 타고 뛰어내리면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구동희의 <재생길>은 전시장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피해갈 수 없이 공간의 사용자로, 직접 공간에 참여하게 된다. 나는 이 작업을 개념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미리 작가를 만났고, 실질적인 작업으로 어떻게 구축하는지를 보기 위해서 전시 오픈 일주일 전에 다시 미술관을 찾았다.1 작가가 건축가 민서홍씨와 직접 협업을 의뢰하면서 두 사람은 실질적인 안전과 설계공법, 삼차원적 도면화 작업 등을 함께 하였지만, Replay라는 고유의 개념들은 구동희의 어법으로 이전 작업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연관성과 구동희가 구사하는 현대미술의 어법들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자).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되어 있는 구동희의 작업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다소 모호한 작업처럼 구축되었다. 댄 그레이엄(Dan Graham) 등과 같은 현대 미술가들이 유리로 제작한 퍼빌리온 작업은 아니지만, 안과 밖에서 동시에 공간을 볼 수 있도록 수많은 노란색의 테이프 벨트처럼 구축되어 있다. 이 유사건축물(pseudo-architecture), 혹은 유사구조물(pseudo-structure)은 경계가 모호한 임시 건물처럼 보이지만, 안전성을 위해서 최대한의 견고함을 구성하며, (작가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어린이들은 어른들과 동행을 하지 않으면 관람을 할 수 없다.
작가의 설명대로 이 작품이 클라인 병과 상반고리관을 구조적 모델로 삼았다면, 구조적으로 끝에 이르는 지점이 없어야 할 것이다. 수학적인 구조물로서의 클라인 병은 안팎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뒷면을 앞으로 생각하고 걸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구동희의 <재생길>은 이러한 구조적 개념들을 안고 스크린을 현실을 이어주는 하나의 매개체로 등장시킨다. 그리하여 마지막 지점에 위치한 스크린은 공간을 이어주는 하나의 재현으로서의 이미지들이자, 우리가 스쳐지나온 기억(혹은 트라우마)의 콜라주로서의 이미지들인 것이다. 스크린 속의 이미지는 내가 걸어온 길을 연상시켜주는 하나의 ‘재현적 코드’로 작동한다.
이러한 <클라인 병>에 대한 기억은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등장하는 이야기로 가슴에 남아있다. 이 소설을 읽었던 세대들에게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 병은 동시대의 현실과 어려움을 반영하는 상황적인 언어이면서도 상징체였고, 또 그 길을 따라 일상을 엮어갔던 사람들에겐 절망과 희망이라는 역설적인 의미들을 담고 있는 은유체였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나는 “이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입니다. 안팎이 없기 때문에 내부를 막았다고 할 수 없고, 여기서는 갇힌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벽만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죠.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그 자체가 착각이예요”2라고 클라인 병을 시대적인 상황과 연결시키고 있다. 클라인 병은 <재생길>의 구조적 모델로 사용되었지만 단순한 구축물로 그치지 않고 이러한 삶의 이야기를 관람자/공간의 참여자를 주축으로 담고 있다.
이 점에서, 구동희의 유사건축물, 유사구조물이 ‘Way of Replay’라고 붙여진 제목은 여러 의미를 던져준다. 재생이라는 것은 play한 것을 다시 틀어주는 개념이자, 우리가 지나온 것을 알려주고, 확인시켜주는 이미지들인 것이다. 동사형으로 ‘replay’는 테이프, 비디오, 영화 등의 매체를 ‘재생(play back)’하는 기능을 의미하거나 어떤 일련의 사건들을 ‘반복’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명사형으로 ‘replay’는 녹음이나 녹화된 것을 반복재생하여 꼼꼼하게 살펴본다거나,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이나 양상들의 반복적 패턴을 의미하는 것이다. 작가는 ‘재생’과 ‘길’을 함께 붙임으로써, 우리의 일상성과 기억을 환기시키며, 우리가 걸어온 길이 이미지화되어 우리의 기억 속으로 다시 돌아오는 지점들을 연결시킨다. 이 지점들은 잊었던 기억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작가가 <재생길>처럼 하나의 미로처럼 빠져드는 공간으로 만든 예는 이전에도 있었다. 아르코 미술관 30주년 기념전에 설치했던 <누가 소리를 내는지 보라(Look who’s talking)>(2009, mixed media, installation)는 굽이치는 공간을 따라 가다보면 그 공간에는 우리가 일찍이 봐왔던 시각적인 작품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미로같이 형성된 길 자체를 설치로 볼 수 있지만, 관람자는 모니터와 대형 거울, 새집 둥지 등을 지나면서도 미술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미술관 안에서 우리가 느끼고 보는 작품들은 시각성(visuality)을 자극하는 작업들이지만, 미술관의 깊숙한 곳에서는 앵무새 한 마리라 자리 잡고 있다. 전시 기간 동안 미술관의 도슨트나 일하는 스탭들은 앵무새에게 전시 순간부터 단어나 언어를 가르치고 앵무새는 이를 따라하고 반복하며 학습하게 된다. 미술관의 공간은 작가가 제어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작품이 설치되지만, 구동희에게는 “불가항력적인 공존”의 공간으로 미술관과 동물원의 상호관계성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제레미 벤담이 모든 죄수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판옵티콘’을 디자인할 때, 베르사이유 궁전의 동물원을 하나의 완벽한 모델로 생각했듯이 대상을 제어하고 공간을 분배하는 데에는 동물원의 모델들이 시각중심주의를 형성하는 완벽한 모델로 여겨지곤 했다. 구동희 작가는 본다는 것의 시각성, 그리고 그러한 시각성의 한계성,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형식들을 미술관의 관례 속에서 재고할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사람들의 언어를 모사하는 앵무새 소리가 오브제 중심의 미술관의 관례를 깨뜨리는 새로운 규칙이 되듯이, 시각과 청각은 묘하게 이러한 중성적인 공간에서 교류하게 된다. 미로와 같은 구축물과 코너의 지점들을 이어주는 모니터들은 2009년도의 작업에서 실험된 바 있다.
그동안 구동희의 작업들은 일관된 미술사적인 양식을 만들어내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을 해부시켜서 여기서 발생하는 발상들과 우연적인 연관성에 더욱 관심을 두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명백한 미학적 발상이나, 미학적 효과를 마음에 두고 그 목적을 향해 작업하지도 않는다. 그의 작업을 글에 비유한다면 작가는 일관적인 스토리를 제공하는 이야기꾼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단어를 서로 이어주는 이미지나 언어의 힘 자체에 더욱 관심을 쏟는다. 그런데, 이번 작업은 약간의 변화를 느끼게 해준다. 대체로 그의 작업은 지적이고 개념적인 작품으로 다가왔지만, 구동희의 이번 작업이 이전 작업에 비해 설치 자체의 몰입을 많이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금각사의 모델을 보여주었던 에르메스 공간에서의 설치도, 플라토의 <공간연구>에서 보여주었던 공감각적인 작업도, 최근 두산갤러리에서 전시했던 작업들 모두 사변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며, 개념적이면서도 다소 모호하게 다가왔었다.
그런데, 노란색의 ‘재생길’을 보는 순간 아주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던 우리의 집단적인 기억을 연상시킨다. <재생길>이라는 ‘반복적 구조, 혹은 반복적 패턴’을 강조하는 제목을 듣는 순간, 누구나 인생에서 한번은 경험했을 법한 반복적인 길, 과도기적인 길, 한번 왔기 때문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고 여겼지만, 계속해서 재등장하는 이 낯설지만 익숙한 기억들을 곱씹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 경험을 일깨우는 <재생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느꼈던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근저에서 끄집어내는 것 같다.
재생길은 작가의 말대로 “일종의 끝도 없는 구간반복적 성향에 대한 암시”로 사용한 것이면서도 “공간에 유기적으로 반응하는 신체지각경험과 눈으로 본 것에 대한 기억의 관계가 별 다른 충돌 없이 분리되는 상황에 개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작가가 <재생길>에서 모델로 생각하는 상반고리관 같은 경우, 형태와 기능성을 연결시켜 생각한다면 우리 신체 내에서 방향을 잡아주는 장치로 작용하는 일종의 자이로스코프[gyroscope]로 여겨진다. 이는 팽이의 원리처럼 기울어지면서도 그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기기이다. 아슬아슬하게 쓰러질 듯하면서도 중심축의 균형을 잃지 않는 자이로스코프의 원리처럼, <재생길>을 걸어가는 참여자들은 묘한 현기증과 위태로운 강박성, 그리고 일종의 유희를 느끼게 된다.

II. ‘타임트랙’의 시각장치(visual apparatus): 유희, 그리고 현기증
서울에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으로 오는 길은 서울랜드를 거치게 된다. 코끼리 열차를 타고 미술관으로 왔던 기억이 있다. 한 편에서는 한국근현대미술사에서 획을 그었던 미술가들의 기획전이 열리고 있고, 한 편에서는 놀이기구를 타면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군중들이 놀이문화를 즐기고 있다. 한쪽의 미술관과 다른 한쪽의 유원지는 정서적으로 다른 축을 형성해왔다. 서울랜드는 작가의 말대로 “자유이용권을 끊은 채 일몰 전까지 단 하루, 정해진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놀이기구를 탑승하려 발버둥 쳤던 기회와 꿈의 장소”였다. 특히, 예술과 일상이 상당히 괴리감을 가지고 있던 우리에게 이 둘은 같은 개념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미술관은 조금 더 고급스러운 문화와 지적인 교육이 형성되는 공간이었고, 유원지는 놀이와 즐거움, 레저가 넘쳐나는 오락의 공간이었다. 어찌 보면 두 공간 모두 근대적 생산물이다. 또한 문화와 여가의 공간으로 분리된 개념은 아니지만, 우리의 기억과 교육 속에서는 분명히 분리된 개념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미술관에 ‘어른을 위한 놀이터’를 구축한 구동희의 작업은 유희, 순간적인 현기증(Ilinx/vertigo)과 아찔함을 불러일으킨다.
1968년 팔레 닐센(Phalle Nielsen)은 미술관 내에 <질적인 사회를 위한 모델(Modellen. En modell for ett kvalitativt samhalle (The Model-A Model for a Qualitative Society))>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스톡홀름의 현대 미술관을 일종의 놀이터(playground)의 개념으로 접근하게 하였다.3 놀이터에서는 성별, 나이 구분 없이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으며, 미술관이라는 제도를 통해 시각적인 오브제를 전시하는 공간은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함의들을 다루는 장소로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구동희와의 차이가 있다면 닐센의 놀이터는 어른들은 들어갈 수 없는 아이들만의 공간이었다. 부모와 같이 동행한 아이들도 혼자 놀이터인 미술관으로 들어가야 했다. 닐센의 작품이 시도되기 10년 전인 1958년,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는『놀이와 인간: 가면과 현기증(Les jeux et les hommes: Le masque et le vertige)』에서 유희란, 지각의 안정성을 순간적으로 파괴하면서 뚜렷한 의식에 일종의 패닉을 불러일으켜, 쇼크, 경련 등으로 일상의 안정성을 깨뜨린다.4 카이와가 설명한 놀이의 유형 때문에 생겨난 ‘현기증’은 그네나 미끄럼틀 등 순간적인 속도감을 느끼면서 타는 놀이기구에 모두 나타난다. 이는 유원지나 놀이터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두려움이나 즐거움(jouissance)이 섞여있는 감성으로, 순간적인 쾌락과 두려움을 동반하는 미묘한 감정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감정 때문에, 놀이기구는 현기증을 일으키지만, 반복적으로 타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안정된 지각으로부터 이탈, 즉 일링크스(Ilinx)를 일으켜 어지러움이나, 현기증 등을 유발하게 된다. 호이징가(Johan Huizinga)가 1938년 썼듯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의 인간)로, 놀이란 일상생활에서 분리되어 특정적인 룰과 규칙이 존재하며,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요소를 만들어낸다. 구동희의 이번 작업은 ‘놀이터’의 모델을 바탕으로 유원지에서 놀이기구를 타고 순간적인 이탈과 현기증을 유발하는 아슬아슬한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구동희가 미술관 공간에 장치한 놀이터같이 설치한 구축물에는 이러한 심리적 요소들이 두려움과 일종의 쾌, 즉 ‘주이상스(jouissance)’와 함께 공존한다.
이러한 놀이터는 2012년에 아틀리에 에르메스(Atelier Hermes)에서 전시한 <Helter Skelter>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헐터 스켈터’란 나선형의 놀이터로(도판*) 2012년 전시 도록에서 구동희는 “언어로서 ‘Helter Skelter’는 고층타워나 유원지에 있는 나선형 계단의 모양의 미끄럼틀을 형상하며 사전적 의미로서는 정신없이 심란한 상태 혹은 시각적으로 정리가 안됨을 뜻하기도 한다”고 밝히고 있다.5 헬터 스켈터를 참조한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영국과 미국의 슬라이드 이미지 외에도 뒤집어진 콘 모양의 아이스크림이었다. 당시 아틀리에 에르메스에서 삼차원적인 구축물로 존재했던 <Helter Skelter>는 <재생길>에서는 구체적인 건축적 구축물로 사람들이 슬라이딩처럼 탈 수 있는 구조로 변화되었다. <재생길>이 철제구조와 나무로 사람들이 탑승할 수 있는 구축물이라면, 콘 모양의 <헬터 스켈터>는 원형모기향을 겹겹이 쌓아올린 모습이다. 특히, 모기향이 타면서 생기는 파편들은 하나의 원형식 군도를 형성하고 있으며, 두 개의 원형 모기향을 붙였을 때는 자이로스코프(gyroscope)의 모델을 구성하고 있다. 방향에 있어 균형감을 부여하는 자이로스코프가—아이러니하게도—쉽게 부셔질 수 있는 모기향으로 구성되어 위트감을 유발한다.
모델의 유형과는 차이가 있지만, 이러한 ‘유희,’ 놀이, 게임의 요소들은 구동희의 2008년 작에서도 엿보인다. 그는 <대어(The King Fish)>(34 min.19sec.)를 제작하며, 실제로 낚시를 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사람들을 영상으로 찍었다. 낚시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간, 특히 남성들이 즐기는 여유로운 놀이의 한 유형이다. 거친 야생에서 원시인들이 노동의 개념으로 행했던 낚시는 근대인들에게는 유희의 일종으로, 현대에 와서는 야외 낚시터를 확대해 실내 낚시로 변형되었다. 이러한 실내 낚시장은 자연이 실내로 들어오면서 ‘가공된 자연’으로 변화한다. 구동희에 따르면, “낚시는 대자연으로부터의 증여라는 생각으로 오랫동안 야외에서 행해왔던 일종의 정적인 유희”로, 현재는 실내공간에서 “소유나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영세적인 아날로그적인 가상 게임”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작업에는 “자연-물건, 자연-자연, 자연-가공된 자연”6을 구성하는 특이한 요소들이 존재한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문명의 역사에는 ‘유희’, ‘놀이’가 함께 존재했다. 그러나 근대의 산업화로 인해서 놀이는 제도화되고, 산업화, 자본주의화 되면서 이윤의식이 없던 유희는 이제 금전적인 게임이나 오락의 형태로 변질되고 있었다. 특히, 낚시는 하나의 증여(gift)로 인류의 변화와 함께 해왔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가 원시문화에서 가장 높이 평가했던 ‘증여’는 서구에서는 물건이나 상품을 통한 일종의 거래, 교환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보았다.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 자연에서 유희를 찾고 평안과 여유를 찾고자 하지만, 사람들은 이제 자연적인 것을 경제적인 것으로 치환하였다. 구동희의 작업은 이러한 놀이, 증여, 문화생산과 같은 어법들이 등장하며, 이러한 유희, 게임의 요소는 적어도 지금까지 작업한 작품에서 일관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재생길>에서 구현된 장치들은 길을 잃을까봐 순간적으로 트랙을 주시하는 우리에게 의식과 무의식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카이와에 따르면, 유희는 인간의 본능이자 인류의 문화와 함께 해 왔으며 특히 ‘일링크스’를 억압하게 될 때 인간은 알콜이나 마약 중독에 빠져들 수 있다고 설명한다.7

III. 합성적(composite) 편집, 합성적(synthetic) 체험
구동희는 그간의 작업에서 서로 상통하지 않는 모순된 부분을 묘하게 합성시키는 편집을 구축해왔다. 그것은 단순한 이미지의 편집이 아니라, 두 개의 다른 트랙으로 형성되어 있는 이야기나 이미지 구성을 한 공간에서 합성된 것처럼 만들어나가는 구조를 구축해왔다. 두 개의 이미지, 두 개의 이야기를 일치화 시키거나 동기화 시키지 않고, 서로 완전한 의미를 만들지 못하도록 제어하고 미끄러지는 작동(operation)이 진행된다. 여기서 구동희의 경향을 특징적으로 짚어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개별 작품들은 특이성(singularity)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2006년 구동희는 알렉시 바이앙과의 인터뷰에서 작가가 1990년대 후반 예일 대학교에서 수학하던 시절 비디오 편집 툴을 배웠다고 토로하며, 비디오는 “내러티브나 주제를 뽑아내는 거친 도구”라고 설명한 바 있다. 영상과 설치, 조각, 미니멀한 오브제 등을 아우르는 구동희의 작업은 작가의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특정 주제에 흥미를 가지면 이와 연관된 이미지와 내용을 찾기 위해 컴퓨터의 인터넷에서 많은 자료들을 발견한다. 일상적 리얼리티는 가상적 합성이 존재하는 디지털 매체와의 만남 속에서 본래의 뜻과 의도는 끝없이 각색되고, 새로운 내러티브가 생성된다. 컴퓨터를 이용한 정보와 온라인에 부유하는 디지털 이미지를 데이터로 사용하는 방식은 2008년에 개최한 작가의 전시 제목인《합성적 체험》과 가장 잘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자연이나 인공물(artefact)의 본질적인 차이는 그다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작가의 손을 거쳐 가공한 풍경이야 말로 진짜보다 더 실재같은 일루전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면, 2012년 미디어시티 서울의 《Spell on you》전시에서 보여주었던 <Under the Vein; I spell on you>(15 min.30sec.)는 자연 그 자체의 정원을 닮아있다. 이 개울은 구청에서 수도꼭지를 틀어서 흘러 보내는 인공개울인 것으로 드러났지만, 이 사실을 몰랐더라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개울의 모습인 것이다.
‘합성적’이라는 표현은 아날로그에서는 쉽게 사용하지 못했던 특징이었다. 이질적인 공간과 시간, 장소를 함께 결합시킴으로써, 가짜 금각사 설치는 더욱 실재적인 사원으로 전시실에서 감상되고(2008년작 <기념품(Souvenir)>), 국내의 천연기념물 공식 사이트를 검색해서 조합한 <천연기념물–남한의 지질 광물> (C-프린트)은 “합성적 아름다움과 기괴함을 지닌 동굴”로 재탄생한다.8 <기념품>에 등장하는 금각사는 실제로 방화사건으로 원본이 사라지고 사원의 원형을 바탕으로 현재는 ‘복원된’ 금각사가 존재한다. 그는 “실제 이미지의 원형이 어떤 유형으로라도 계속 무한재생되길 기원하는 마음”에서9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를 읽고 일본의 금각사를 보게 되지만, 이미지의 실체에서는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비록 금각사 모형인 기념품이긴 하지만, 이미지의 실체와 마음속으로 유추한 이미지를 (거울로 무한 반사시켜) 병치시켜 심리적 괴리감을 전개하였다.
복원된 금각사에는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가 존재하였고, 원본이 불타 사라진 금각사는 복원 과정을 거쳐 또 다른 원형으로 존재해왔다. 합성적’ 편집, ‘합성적’ 체험이라는 표현은 -구동희는 단순한 단어로 규정할 수 있는 작업과정을 부정하는 작가이긴 하지만- 그의 작품을 접근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겠다. 그는 “방대한 이미지와 정보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영속 가능할 듯한 기존 가치나 신념이 5분 안에 클리쉐로 전환하는 현상을 목격하며, 이러한 진부함 속에는 어느덧 관점에 따라 위상이 바뀌는 아이러니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요소들을 관찰하고 조합한 후에 또 다른 물리적 변형을 통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 나의 작업방식이라 할 수 있다.”10 이러한 방식에서 그는 디지털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을 묘하게 합성하였는데, 예를 들면 <증인(Witnesses)>(2010)은 캔버스 천에 고화질의 디지털프린트(Giclee print on canvas)를 이용하여, 특정 종교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검색한 종교적 도상들을 컴퓨터 상에서 합성하여 다소 키치적인 요소를 부여하였다. 다양한 동물이나 식물들은 인공풍경을 연출하여, 다소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이발소 그림같은’ 그러면서도 광채를 발하는 글로벌 풍경화이다. 구동희에게 아날로그 이미지나, 컴퓨터에서 발견하는 언어와 이미지는 일종의 재료처럼 뒤섞이고 서로 이어지면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의미체들이 발생한다. 현대의 음악가들이 소음이나 대화를 수집해서 작곡을 하듯이, 작가는 컴퓨터나 일상에서 좀비처럼 떠다니는 정보들을 하나의 시나리오로, 재료로 활용한다. 이러한 과정으로 인해, 필자는 지금까지 조각을 공부한 구동희가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조형물을 본 적이 없다. 그에게 정보(information)는 미디엄(medium), 즉 매체이며 누구에게나 배포할 수 있는 이미지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합성(composite)’적 과정은 구동희가 2006년에 제작했던 HD 고화질의 싱글 채널 비디오 <과적된 메아리(Overloaded Echo)>에서 느껴진다. 이 작품의 출발점은 2004년 독일 스튜트가르트의 아카데미 슐로스 솔리티유드(Akademie Scholoss Solitude) 레지던시 작가로 독일에 체류할 시절에 김선일 참수사건에서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참수장면이 차단되었지만, 해외 온라인 사이트에서는 참수동영상이 좀비처럼 떠다니고 사람들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펴보고 이미지를 소비했던 것이다.11 그러나 이 이야기를 실제로 참고로 하지 않아도 이 작품은 순간적인 이미지만으로도 한 남자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바로 느낄 수 있다. 전라의 남자는 머리에 복면을 쓰고 원형의 탁자 위로 올라가 끊임없이 돌고 있다. 그는 우리를 볼 수 없지만, 그를 관음증적으로 바라보는 구경꾼들은 마치 자신과 무관한 듯 이 남자의 반복적 행위를 바라보고 관찰한다. 구경꾼은 가해자로, 중앙에서 복면을 쓴 이는 피해자로 보이는 구조지만, 이 구조는 너무나 쉽게 뒤바꿀 수 있는 흔들거리는 줄과도 같은 것이다. 구동희의 작업은 일차적으로 사회적 이슈나 쟁점을 집요하게 다룬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지만, 그 어떤 작가보다도 치밀한 사회 논평자이며, 세대를 대표하는 리얼리스트이다. 물론 작가는 이러한 타이틀에 동의도,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작업 과정상 그 어떤 미학적 효과를 출발점으로 삼는다거나, 구동희의 작품을 쉽게 읽기 위한 공적인 매뉴얼, 스테이트먼트를 설정해야 하는 것에 거리낌을 느끼는 부정(negation)의 미학을 바탕에 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미지의 위계질서와 정보의 편성방식, 아우라의 위치 전복 등으로 설명할 수 있는 포스트-미디엄(post-medium) 시대에, 구동희는 스펙터클한 이야기, 진실이라고 믿었던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스마트나 트위트, 블로그 등에서 떠돌아다니는 이미지와 정보를 흙이나 물감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에게 일종의 거친 재료들이라 할 수 있으며, 그는 사회적 틈새를 읽어내는 관찰자이자 참여자로서 디지털 매체의 물리적 속성을 주무른다. 파편화된 이미지들은 인공적인 풍경, 인공적인 합성체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과 장소, 보편적으로 평이하게 인식해온 시각적인 실체에 질문을 던진다. 구동희의 작업을 이야기하며 ‘우리 시대’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데, 그의 작업에는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세대적인 것(the generational)이 서로 침투하고 교차한다. 또한 그가 선택하는 언어들의 교합은 하나의 의도나 뉘앙스가 아니라 다의성을 강조하여, 전혀 예기치 못한 ‘세런디퍼티(Serendipity)’를 접하게 한다.12 이 과정에서, 구동희의 영상작업은 ‘연극적’이라는 표현을 받기도 하지만,13 때때로 그의 작업은 난독증(難讀症)을 유발한다. 그의 영상 작업에는 일관된 이야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구조에 익숙한 관람자들은 인물들의 몸짓과 행위 등을 통해서 뭔가를 밝혀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것은 기승전결을 가진 이야기, 스토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면, 이미지의 연결로 ‘타블로(tableau/picture)’로 만들어진다. 미술관에서 반복-재생으로 돌아가는 구조 속에서 관람자들은 뭔가를 읽어내려 하지만, 때때로 영상 자체는 하나의 이미지로, 나와 조우하는 순간적인 인상, 글랜스(glance)로 존재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구동희는 시각예술이 지나치게 시각성을 담보로 시간과 공간, 장소성을 한정지어 온 모습에 일격을 가하는지 모른다. 작가는 텅 빈 캔버스처럼 무한의 가능성을 담보로 한 공간, 그리고 선형적이고 합리성을 우선으로 하는 현대의 시간성에, 아주 단순한 한 획으로 이 모든 것을 흩트려 놓는다. 2007년 12개의 C 프린트로 제작한 <장님 보름달(Blind full moon)>에서는 눈을 감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고, 플라토에서 전시한 <Blind Spot>도 밀폐된 공간에서 눈으로 보지 않고 몸으로 공간을 느껴가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IV. 부조리: 그리고 끝나지 않은 이야기
구동희는 주어진 물리적 공간을 일종의 ‘타임트랙’으로 가정하여 공간을 재구성하였다. 관람자들은 미술관에서 관습적으로 관람하던 동작과 행동에서 벗어나게 된다. 겨우 두 명 정도 갈 수 있는 공간에서 직립보행의 인간은 걷기에 있어 일종의 방해를 받는다. 몸을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바라보는 공간은 수직성 보다는 수평성을 물리적 조건으로 한다. 이렇게 본 수평계는 “자연광이 없는 납작한 육면체”의 공간에서 우리의 시각과 시간성을 교란시킨다.14 알베르 카뮈의 글에서 시지프가 바위를 쌓아 올려도 그 바위가 그대로 떨어져 내리듯이, <재생길>을 끝까지 따라가도 부조리의 현실처럼 막다른 길은 또 다른 <재생길>로 펼쳐진다. 구동희의 작업은 이 지점에서 압축 가능한 아주 간명한 언어로 응축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람자들이 직접 걸을 수 있는 건축구조는 놀이기구처럼 유희와 현기증, 환희와 비명을 동반하면서도 동굴같은 은신처(shelter)처럼 따뜻하고 포근하다.

정연심비평(도판삽입)

New York circa 1905. “The Helter Skelter, Luna Park, Coney Island.” 8×10 inch dry plate glass negative, Detroit Publishing Company

 

1. 작가와의 인터뷰, 2014년 6월 6일과 2014년 7월 28일; 구동희는 이 작품의 제작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 제시된 공간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전시장 도면을 기반으로 확장된 일종의 조건들, 즉 해마다 개최되는 ‘올해의 작가상’전의 제도, 3개월의 전시 유효기간, 그리고 이런저런 사고가 많은 현재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 등으로부터 구성되었다. 미술관의 3,4차원의 조건들, 자연광 노출이 없는 납작한 육면체, 그 안의 대칭형 기둥 9개, 출입구 1개, 철거 불가능한 벽 하나는 내가 전시장에서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보다는 한시적 시공 자체를 작업으로 취하는 실험을 모색하게 하였다.”
2. 조세희, 「클라인氏의 炳」, 『문학과 지성』(1978년 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문학과 지성, 1978, p. 280.
3. Lars Bang Larsen, “The Mass Utopia of Art Activism: Palle Nielsen’s The Model – A Model for a Qualitative Society,” in Palle Neielsen. The Model-A Model for a Qualitative Society, (Barcelona: MACBA Collection, 2010), pp. 28-112; 미술관 제도의 변화는 장-프랑수아 쉐브리에(Jean-Francois Chevrier)에 의하면, 공적인 것, 거리에서의 스펙터클이 미술관으로 진입해 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Jean-Francois Chevrier, The Year 1967. From Art Objects to Public Things. Or: Variations on the Conquest of Space. Barcelona: Fundacio Antoni Tapies, 1997, p. 136; quoted in Lars Bang Larsen, p. 49.
4. Roger Caillois, Man, Play and Games, (Illinois: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2001 [1958]), p. 23.
5. 구동희, 「Helter Skelter」, 2012 Hermes Art Award (July 27,2012-Sept.25, 2012, Seoul: Atlier Hermes).
6. Inaugural Festival of the Nam June Paik Art Center, Now Jump! (Nam June Paik Art Center: 2008, 10.9-200.2.5).
7. 최희승, 「카르슈텐 횔러의 ‘의혹의 실험실’ 연구」,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석사논문 (2012년), pp. pp. 50-62 참조. 횔러가 언급하는 ‘카이와’ 참조 (p. 59). 횔러의 작품이 대형의 설치인 점은 구동희와 차이가 있으나, 놀이기구나 과학기구 등에 관심을 둔 구조적 관점에서 보면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스펙터클한 횔러의 작업과 달리, 구동희의 작업은 사적이며, 의미를 일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8. 김성원, 《우회전략(Oblique Strategies)》(2010.8.31-10.24, 국제갤러리).
9. “Blind Spot: Artist interview on Space with Soyeon Ahn,” Space Study (May 5, 2011-July, 10, 2011, Plateau).
10. “Blind Spot”
11. 임근준(aka 이정우), 「구동희 개인전 리뷰」, 『월간미술』(2007년 1월호); 그는 구동희의 작업을 “‘마음의 생태계’를 탐구하기 위한 시뮬레이션 게임의 일종”으로 칭한다.
12. 이러한 과정은 작가가 언어를 사용한 일련의 작업에서 엿보인다. 즉, “일종의 시어를 이러 저리 바꾸어 말장난(pun)과 같은 언어유희에 이르는 현상인데 이러한 수사학적인 전략은 그의 전 작업에서 지배적으로 등장한다. 그는 언어와 이미지의 실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탐정가처럼 그것들을 발가벗기기 시작한다. 이러한 작업은 <Mess with one guard and you mess with them all>이라는 작업인데, 한 마디로 거칠게 번역하면 ‘한 명이 엿 먹이면 전체를 엿 먹인다’고 할 수 있는 말이다. 그가 온라인 사이트인 이베이에서 구입한 개머리 모양의 지팡이에는 이러한 언어와 이미지의 자의적인 관계, 인위적인 합성에서 오는 유희를 이끌어 낸다. 다소 ‘시니컬한’ 이 표현은 한명이 전체와 얽혀있고 공모하는 관계를 보여주는 말이다.”
13. Takashi Azumaya, 2010 Busan Biennale, Living in Evolution (Sept. 11, 2010-Nov.20, 2010, Busan Museum of Art); 유진상, 「구동희」, Mediacity Seoul 2012: Spell on You (Sept. 11, 2012-No.v 4, 2012, Seoul: SeMA); 2007년의 <실뜨기와 정전기>, 2010년의 <The Cast>
14. 이브 알랭-부아, 로잘린드 크라우스 (정연심, 김정현, 안구 역), 『비정형: 사용자 안내서』(미진사, 2013); ‘수평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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