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메이크랩

Interview
CV
2016년 결성
서울에서 거주 및 활동
주요 개인전 및 프로젝트
2023
《인기생물》, 아트스페이스 보안 2, 서울, 한국
2019
《오퍼레이션 룸》, 임시공간, 인천, 한국
2018
《전체적 데이터 카탈로그 : 행복을 찾아서》, 공간 사일삼, 서울, 한국
2017–현재
포킹룸, 서울, 한국
주요 단체전 및 스크리닝
2025
《올해의 작가상 2025》,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한국
《땅거미 지는 시간》, 코리아나미술관, 서울, 한국
2024
ARE YOU FOR REAL Phase 2: Agents of Fluid Predictions (온라인 스크리닝)
Carnival of Shipwreck, The Bridge, 토론토, 캐나다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광주, 한국
《예측 (불)가능한 세계》,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한국
2023
《미안해요, 프랑켄슈타인》, 전북도립미술관, 완주, 한국
《Nine Nodes of Non-Being》, 421, 아부다비, 아랍에미리트
《신소장품전: 시간을 소장하는 일에 관하여》, 백남준아트센터, 용인, 한국
2022
《Mobile Scenarios for the Metamorphic Beings》, Framer Framed,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구로, 청춘 2022: 공장도시》, G밸리산업박물관, 서울, 한국
서서울미술관 사전프로그램 《이례적인 시간, 불확실한 움직임》,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2021
《오픈 코드. 공유지 연결망》, 백남준아트센터, 용인, 한국
《진주 잠수부》, 경기도미술관, 안산, 한국
언폴드엑스 《디지털 스토리텔러스》, DDP 디자인뮤지엄, 서울, 한국
《서해평화예술프로젝트: 언리얼 월드》, 임시공간, 인천, 한국
2020
《Tangible Error》, d/p, 서울, 한국
《*c-lab 4.0: 언택트 UN+CONTACT》, 코리아나미술관, 서울, 한국
2019
《잠금해제》, 민주인권기념관, 서울, 한국
《보안이 강화되었습니다》, 코리아나미술관, 서울, 한국
2018
《The Dutch Savannah》, Museum De Domijnen, 시타르트, 네덜란드
《베틀, 배틀》, 토탈미술관, 서울, 한국
2017
2017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오래된 미래》,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광주, 한국
《미래기지, 내일을 위한 프로젝트 아카이브》, 문화비축기지 T1, 서울, 한국
《불멸의 임시변통》, 문래예술공장, 서울, 한국
《우리의 밝은 미래 – 사이버네틱 환상》, 백남준아트센터, 용인, 한국
《do it 2017, 서울》, 일민미술관, 서울, 한국
2016
《마이크로시티랩》, 인디아트홀 공, 서울, 한국
주요 강연 및 워크숍
2024
광주비엔날레 심포지엄 「새로운 울림: 인류세 시대의 예술과 기술」,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한국
「에콜로지컬 퓨처스」, 서울대학교 파워플랜트, 서울, 한국
2023
「그린 뉴딜을 위한 탈식민적 큐레이토리얼 어젠다」, 아트선재센터, 서울, 한국
「Climate Future#2: Belonging and Shared Responsibilities」, NTU CCA, 싱가포르
「재난, 기계학습, 데이터셋-팅」,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한국
국제 심포지엄 「순환성」, 서울대학교미술관, 서울, 한국
2022
「이상행동, 멸종 그리고 데이터셋」, ADL, 서울, 한국
「재난학교」, KAIST 인류세연구센터, 대전, 한국
「문장채굴자: 인공지능과 함께 글쓰기」, 경기문화예술교육랩, 수원, 한국
2021
「인공지능 데이터셋 팅커링하기」, 이음센터, 서울, 한국
2020
「일반자연, 느린 재난: 재난 시대의 삶」, 코트, 서울, 한국
「팀러닝 2020 : Teaching Game」, 한국예술종합학교 융합예술센터 아트콜라이더랩, 서울, 한국
2019
「Label Me! : 데이터 팬터마임」, 백남준아트센터, 용인, 한국
2017
「미디어아트 스튜디오 : 데이터 공작」,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한국
「유러피언 랩 포럼」, Les Subsistances, 리옹, 프랑스
주요 기금
2023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과기술융합지원, 한국
2022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과기술융합지원, 한국
2020
서울문화재단 융합예술 창·제작지원사업 언폴드엑스, 한국
주요 레지던시
2024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서울, 한국
2020
금천예술공장, 서울, 한국
주요 출판물
2024
이계성·최빛나. 「장난감 모형과 취한 시인 – GPT와 생성성의 모델」. 『포킹룸 웹 저널』
2023
곽영빈·김승일·백희원·윤원화·이계상·심효원.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서울: 미디어버스
이계성·최빛나. 『맥락과 우연—GPT와 추출적 언어학』. 서울: 미디어버스
2021
언메이크랩. 『아포페니아 그리고 시시포스 데이터셋』. 용인: 백남준아트센터
2017
언메이크랩. 『키트의 사회문화사: 1960–1980』. 서울: 세운랩
2015
최빛나. 『일반 자연을 위한 매뉴얼』. 서울: 미디어버스
주요 소장처
백남준아트센터, 한국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한국
Critic 1
역창조 연구실
윤원화 (시각문화 연구자)
아티스틱 리서치는 작가를 작품 제작의 전문가가 아니라, 온 세상을 직접 보고 경험하며 그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싶어 하는 호기심 많은 시민으로 재정의하는 현대 예술의 아마추어리즘을 의외의 방식으로 재활성화한다.1 작가들은 연구자로 변모하여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현장 연구를 수행하며 관찰 일지를 쓴다. 그들은 연구자이기 때문에 학술 제도에서 생산된 지식에 의지하지만, 또한 작가이기 때문에 제도화된 지식 생산과 유통의 방법을 항상 따르지는 않는다. 이는 작가들이 생산하는 지식에 절차상의 결함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애초에 아티스틱 리서치의 목적이 지식 생산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작가들은 통상적인 지식 생산의 과정에서 누락되거나 변질되는 것들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연구할 가치가 없는 하찮은 세부 요소들, 이론적 모델을 수립하기에는 너무 특수하거나 복잡한 현상들, 지식 생산과 적용의 재료로 쓰이고 버려지는 폐기물들이 그들의 관심을 끈다. 아티스틱 리서치는 몰라도 되는 것, 알 수 없는 것, 알아야 할 만큼은 아는 것을 피해 가는 통상적인 배움의 경로를 이탈함으로써 시작되는 하나의 모험이며, 그래서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언메이크랩의 아티스틱 리서치 역시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묻는다면 답하기 쉽지 않다. 작품 제작과 전시가 목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리서치 결과를 책으로 엮기도 하지만 명료한 결론이 제시되진 않는다. 4대강 정비 사업으로 대표되는 ‘녹색 성장’의 풍경을 담은 『일반 자연을 위한 매뉴얼』(2015)에서 산불로 드러난 야생동물의 이동 경로를 따라 기억과 예측이 혼재하는 합성 이미지의 공간을 배회하는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2023)에 이르기까지, 언메이크랩의 연구 보고서는 의도된 표류와 예기치 못한 만남을 기록하는 일종의 여행기처럼 읽힌다. 인간-비인간 서식지가 훼손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이들의 활동은 재난 현장을 쫓아다니는 다크 투어리즘과도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언메이크랩의 현장 연구 장소 중에는 재개발된 구도심이나 이제 막 완공된 신도시도 포함된다. 매끈한 도시 환경이나 잘 가꾸어진 생태 공원에서 무언가 꺼림칙한 것을 감지하고 그 연원을 추적할 때, 풍경은 국지적인 공간 구성이 아니라 쌓이고 변성되고 깨지고 흩어지고 다시 굳는 광범위한 시간적 지층의 한 부분으로 재인식된다.
동시대의 변화하는 풍경은 짓기와 허물기가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한 파괴적 혁신의 결과다.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 건설적인 것과 파국적인 것은 더 이상 자명하게 분간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손으로 질료를 주물러서 형상을 빚고 눈으로 그 결과를 살피는 소박한 의미의 ‘만들기’를 개념적으로 붕괴시킨다. 식사를 준비하는 일상적 행동에서 지형을 변화시키는 토목 공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창조 행위는 자원을 추출, 가공, 이동하는 물질과 데이터의 순환에 파묻혀 있다. 언메이크랩은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 그 날카로운 흐름이 어떻게 주변 풍경과 그걸 바라보는 우리 자신을 조각하는지, 우리가 그에 대항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창작자로서 우리의 활동을 폭력적인 힘의 장 외부로 피신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없다. 모든 창조는 얼마간 의심스럽다. 이런 생각은 ‘언메이크랩’이라는 이름에 이미 명시되어 있는데, 망치다, 변형하다, 원상복구하다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는 이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그저 창조를 역행하는 것이다. 부를 창출하는 마법의 주문처럼 통용되는 창조의 명령을 거스르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이것이 언메이크랩의 질문이다.
망치면서 배우기
‘언메이킹(unmaking)’은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단어다. 그것은 만들기와 만들지 않기 중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는 제3의 길을 찾아낼 것을 요구한다. 이는 논리적 모순처럼 들리지만, 만들기의 물질적 실천에서 언메이킹은 흔하게 일어난다. 이를테면 빵을 구우려고 했는데 덜 익은 밀가루 반죽과 퍽퍽한 빵과 쿠키 비슷한 것과 숯에 가까운 것이 혼재된 정체불명의 덩어리가 나왔다고 하자. 만들기에 실패하는 것은 언메이킹에 성공하는 손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언메이크랩의 연구원이라면, 자명한 실패에 만족하지 않고 그걸 신선한 정보의 원천으로서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좀 더 먹을 만한 빵을 굽기 위한 지침이든, 밀가루로 빵이 아닌 다른 것을 만드는 아이디어든 간에, 당신은 실패에서 무언가 배울 수 있다. 이처럼 물건을 일부러 망가뜨려서 창조적 배움을 위한 실험적 교재로 활용하는 것은 소규모 작업장의 오랜 전통이다. 기술자들이 사전 지식이 없는 기계를 분해하여 그 작동 원리와 상세한 설계 정보를 알아내는 것을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이라고 하는데, 이 방법은 오래된 물건의 수선과 복각에서 경쟁 제품의 분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다. 일반적으로 리버스 엔지니어링은 제작물에서 그것을 제작하기 위한 지식을 회수하려고 하며, 따라서 그 창조의 역행은 최종적으로 또 다른 창조로 귀결된다. 반면 언메이크랩이 건설과 파괴의 현장을 들여다보는 것은 창조의 이념과 실재를 재검토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만들기’에 무엇을 기대하고, 그 기대는 충족될 수 있는가? 일레인 스캐리(Elaine Scarry)는 이 질문에 대한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그는 인간의 창조적 충동이 고통을 줄이고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여 더 인간적인 세계를 만들려는 도덕적 열망과 결부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창조는 인간의 복지를 위한 근본적으로 정의로운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창조의 목적을 역행하는 창조, 개개인을 신체적 고통 속에 고립시켜 세계와 단절시키는 반사회적 행위로서의 만들기 역시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존재해 왔다. 스캐리는 전쟁 무기를 생산하거나 일상 사물을 고문 도구로 변조하는 것, 사람과 사물을 폭력의 부속품으로 조직하는 모든 실천이 창조의 대척점에서 그 본질을 무효화한다는 점에서 물리적 파괴보다 더 악랄한 ‘언메이킹’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창조를 목적 지향적 활동으로 정의할 때, 언메이킹은 도덕관념을 저버린 행동이자 어리석음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고통을 증가시키는 탈창조의 산물은 아무리 기발하더라도 타자의 고통에 감응하지 못하고 창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발명가의 무능력을 증언하기 때문이다.2
분명히 언메이킹은 어느 정도의 무지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결과를 예측하고 통제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어떤 제작 행위도 어리석음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게다가 창조는 단발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나의 사물은 또 다른 사물들이 출현할 수 있는 잠재적 공간을 개방하고, 그런 연속적 창발은 인간을 둘러싼 환경뿐만 아니라 자기 인식과 기대의 변화를 불러온다. 인과 관계를 추적하기 어려운 변형과 재창안의 연쇄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지향했고 그에 얼마나 근접했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스캐리는 인간을 중심에 세움으로써 창조의 역학을 규명하고 도덕적 창조와 그 부도덕한 역행을 구별하려 했지만, 창조의 원천으로 지목된 인간의 상상력은 끝까지 합리적 이해를 벗어나는 비인간적이고 거의 신성한 블랙박스로 남았다.3 우리가 왜 만들기를 멈추지 못하는가, 정말로 무엇을 만들고 있으며 그걸 통해 어디에 다다르는가는 난해한 수수께끼다. 자기중심적 세계를 구축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자기의 내외부에 광범위한 맹점들을 양산한다. 상황을 파악하고 통제하기 위한 장치들을 아무리 추가한다 해도, 우리를 둘러싼 인식의 안개는 재배치될 뿐 사라지지 않는다.
언메이크랩은 인간 중심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창조의 실패 또는 배신으로서 언메이킹의 교육적 가치를 중시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창조자로서 우리의 어리석음을 상기시키면서, 매끈한 완제품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창조적 기획의 예기치 못한 면을 드러낸다. 진보의 이름으로 행해진 건설적 과업들이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었고 어떤 효과를 가져왔는가에 대한 추적 조사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창조에 내재하는 파괴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축적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자원들, 좀 더 중립적으로 말해서 그 나름의 템포와 리듬, 역사 속에서 형성된 행성의 구성 요소들이 상대적으로 짧은 수명을 가진 인공물로 변형되어, 지질학적 관점에서는 거의 출현하는 것과 동시에 사라진다. 하지만 좀 더 유심히 살펴보면, 그들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동하고 재구성되는 것으로 밝혀진다. 언메이크랩은 유동화된 물질의 흐름 속에서 행방불명된 사물들과 생물들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때로 그들이 다른 장소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본다. 생성과 소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지만 이는 아무것도 상실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죽음을 통과한 것들이 되돌아와서 살아 있는 것들과 뒤섞인다는 뜻이다.
비미래와 마주하기
언메이킹은 비미래 시제의 풍경들을 증식시키는데, 이는 미래가 소멸하는 것과는 구별된다. 우리는 언제든 원할 때마다 미래 시제로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산불이 난 현장을 조망하면서 어떻게 잔해를 정리하고 식생을 복원할지 계획을 세우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바람직하다. 빵이 타면 버리고 다시 구우면 되는 것처럼, 산이 불타면 다시 가꾸면 된다. 그러나 미래 지향적 관점에서 현재가 미래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나 심지어 미래를 가로막는 장애물처럼 취급될 때, 불탄 산은 분명 존재하지만 거기 있어서는 안 되는 것, 조만간 제거될 것으로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최근 빈발하는 산불은 장기적인 기후 시스템의 교란이 인간-비인간 행위자들의 순간적인 오작동과 합선된 결과로, 언메이킹의 파괴력을 보여주는 무상하고도 압도적인 사례다. 성급한 미래의 청사진으로 현재의 실패를 가리기 전에, 먼저 그 실패의 현장을 잘 봐 둬야 하지 않을까. 언메이크랩의 리서치 프로젝트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2023)은 불탄 산의 비현실적 풍경에서 출발하여 산불이 나기 전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던 인간들, 식물들, 기계들, 동물들의 미약한 연결망을 더듬어 간다. 그 여정은 미래로 수렴하는 선형적인 시간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미래적이다. 작가들은 현재, 미래, 과거가 뒤엉키는 장면들과 거듭 마주치면서, 그 와중에도 다시 미래를 향해 가지를 뻗으려는 창조적 노력들을 주의 깊게 살핀다.
비미래적 이미지는 미래를 향한 시선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밀어내며, 때로는 아예 부재함으로써 미래의 불가능성을 증언한다. 환경 활동가들이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확인하기 위해 설치해 둔 트레일 카메라에는 곧잘 아무것도 찍히지 않는다. 드물게 촬영된 사진들은 적어도 그 순간 동물들이 거기 있었음을 증언한다는 점에서 낙관적이고, 그들의 사라짐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관적이며, 보호구역 지정을 위한 근거 자료로 쓰인다는 점에서 미래적이다. 그러나 언제 어떤 목적으로 촬영됐는지 모를 트레일 카메라 영상이 재미있는 홈 비디오의 야생 버전으로 편집되어 인터넷을 떠돌 때, 프레임 속에 붙들린 동물들은 영원하고 썩지 않는 동시에 돌이킬 수 없이 부재하는 듯이 보인다. 언메이크랩은 인간이 만든 자연의 이미지, 일단 파괴된 후에 인간이 바라는 대로 재조성된 ‘일반 자연(generic nature)’의 풍경에 미래가 없다고 느끼면서도 그 끝에 어떤 미래가 있을지 궁금해한다.4 그래서 그들은 멸종된 동물의 박제를 전시하는 자연사 박물관을 방문하고, 사라지는 동물들의 이미지를 생성신경망 유형의 인공지능에 학습시켜 본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제멋대로 이미지를 만들고 고르고 해석하는 와중에도 비인간들이 연합하여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깔려 있다. 그러나 간신히 포착된 동물들의 흔적은 기술적으로 재구성된 이미지 속에서 유령처럼 흩어지거나, 아니면 인간의 기대에 부응하는 더욱 인간적 표정으로 재응결된다.
한편에는 넘쳐나는 이미지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트레일 카메라를 설치해 봐야 아무것도 찍히지 않는 불탄 산이 있다. 이미지들이 증식하여 현실의 부재를 은폐하는 비현실적 대체물로 기능하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틀에 박힌 자연 이미지가 반복 재생되는 가운데 산이 계속 불타고 동물들이 계속 더 멀리 도망치는 것 역시 그렇다. 비미래적 이미지는 자연의 순환과 구별되는 불길한 루프를 돈다. 아침 해는 미래를 약속하지만, 고장 난 기계처럼 되풀이되는 해돋이 장면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끝을 예감하면서도 그런 명쾌한 결말은 없으리라는 체념과 안도가 뒤섞인, 슈몬 바샤(Shumon Basar)가 “엔드코어(endcore)”라고 부르는 나른하고 꺼림칙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5 예고도 없이 스크린들을 잠식하는 실시간 재난의 풍경은 충격적인 동시에 익숙하다. 그것은 진부한 데이터의 순환에 흩뿌려진 매운 향신료처럼 우리의 감각 기관과 상상력에 얼얼하게 마비된 느낌을 남긴다. 바샤는 마크 피셔(Mark Fisher)를 인용하여, 미래에 대한 기대가 위축되고 현재에 대한 호기심과 열의가 사라진 텅 빈 시간에서 엔드코어가 번성한다고 쓴다. 언메이크랩이 비미래적 풍경들의 비선형적인 시간의 노선들을 추적하는 것은 이런 퇴폐적인 상태를 벗어나려는 노력이지만, 그들의 여정은 계속해서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다.
비미래적 이미지는 탈출의 환상을 저지하면서 작가와 관객을 답 없는 현재로 돌려보낸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거나 말소된 선명한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면, 적어도 비미래적이지 않은 장면은 없을까?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의 서문에서, 작가들은 어느 겨울 저녁 시내에서 해안가로 이동하던 도중 운 좋게 가창오리 떼를 목격한 경험을 이야기한다.6 가창오리는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월동하는 철새로, 해 질 녘이면 먹이 활동을 위해 떼 지어 날아다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지나가는 새들을 올려다보는 마법 같은 순간은 잠시나마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강렬한 현재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자연법칙에 따른 주기적 시간도 아니고, 입자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빚어지는 순수한 확률론적 패턴도 아닌, “보통은 신뢰할 수 있는 질서를 보장하지만 종종 예외가 개입해 영향을 미치”는 ‘특정 자연들(specific natures)’과 ‘지역적 자연들(local natures)’의 패치워크 속에서 발생하는 번득임이다.7 가창오리들의 경로는 인간이 만든 세계를 좌충우돌 가로지른다. 그들은 카메라를 든 탐조객들을 불러 모으고, 지자체의 새로운 축제 아이템이 되고, 조류 독감을 퍼뜨리고, 비행기 사고에 휘말리고, 태양광 발전 설비에 쫓겨난다.8 인간과 새들의 밝은 미래를 위한 최종 해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철새들은 이동할 수 있고, 서식 조건이 악화되면 다른 먹이터를 찾아 경로를 변경하며, 그런 식으로 그들의 위태로운 현재를 얼마간 더 연장한다.
인간을 재배치하기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이동할 수 있을까. 많은 철학자들이 하늘 높은 곳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저 아래의 땅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야 말로 지구에 ‘착륙’해서 지구의 다른 거주자들과 공존할 수 있는 정착 프로그램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땅을 다공성의 생기 넘치는 물질로 재정의하고 인간을 그 틈새에서 살아가는 토양 생태계의 일원으로 변형하려는 인식론적, 육종학적 기획이다. 인간을 분쇄해서 퇴비로 만들자는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사변적 우화나, 모든 지구 생활자들과 그들의 거주지를 목록화하여 새로운 정치적 협상의 테이블을 개방하자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외교적인 제안은 모두 인간이 만든 세계에 대한 급진적인 언메이킹과 재창안을 요구한다.9 훗날 언메이크랩이 대규모 연구소로 발전한다면 이처럼 새로운 테라포밍의 방법론을 연구하는 부서가 신설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언메이크랩의 주된 연구 영역은 인간이 지난 수백 년 동안 구축하고 가동해 왔던 오래된 테라포밍 시스템이다. 그들은 이 시스템의 균열을 파고들어 인간의 꿈의 잔해들이 퇴적, 변성, 분출되는 인공 지형들과 거기서 발견되는 합성 존재자들의 생태를 조사한다.
문명의 부스러기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창조자와 창조물의 위치가 상호 전환될 수 있으며 우리 자신도 어떤 의미에서 창조의 부산물이라는 인식에 기반한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어왔는가 하는 질문은 우리 자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질문과 분리될 수 없다. 자연의 일부이자 그걸 극복하는 힘을 가졌고 현대적 생산 시스템의 일꾼이자 그 결과물로서 산출되는 인간의 다중성은 우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경로를 재탐색하는 데 혼선을 초래한다. 땅은 우리의 발 아래에 있는가, 아니면 머리 위에? 로절린드 윌리엄스(Rosalind Williams)는 이미 삼십 년도 더 전에 환경 의식을 우리가 지구 내부에 있다는 ‘지하적 의식(subterranean consciousness)’과 연결지었지만,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언제나 지표면을 변형해 왔고,” “영원히 지하로 내려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언제나 지표면 아래서 살고 있었다”라는 기이한 다중 시제를 구사했다.10 이러한 혼란은 우리의 현실 인식이 소망적 사고에 의해 굴절되고 드물지 않게 실제적 변형으로 이어지는 데서 온다. 우리는 꿈에 근거하여 현실을 창조한다. 언제 목적지에 닿을지, 정말로 출발하긴 했는지 의심하면서, 우리는 지상에서 천상을 꿈꾸며 미지의 심연으로 하강한다.
현명한 지하 생활자가 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지상의 탁 트인 공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일을 기대하는 ‘자연스러운’ 감각을 그리워하지 않긴 어렵다. 지하 세계는 어둡고 갑갑하고 아무것도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언메이크랩은 우리의 눈먼 창조성이 생성하는 세계상의 부서진 틈새들을 살피며 길을 찾는다. 창조의 중심으로 가정된 인간 위치를 벗어나 분산되고 연장된 창조적 과정의 여러 국면들을 확인하는 그들의 여정은 막연한 희망과 그에 대한 의심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린다. 마법적인 소원 성취의 이야기는 결국 제 무덤을 파는 결말에 도달하지 않던가? 인간이 사라진 세계를 생태적 해피 엔딩의 한 가지 가능성으로 고려하기는 차라리 쉽다. 그러나 무덤까지 가기 전에 방향을 꺾는 법이나 지하 세계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기는 좀 더 어렵다. 우리는 소망을 품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다. 언메이크랩은 이 지긋지긋한 인간적 한계를 부정하지 않을 때 무엇이 보이고 또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면서, 상상된 미래와 망각된 과거로 굴절된 현재를 더듬어 나아간다.
1. 여기서 ‘호기심 많은 시민’의 이미지는 샤를 보들레르가 익명의 신문 삽화가 G씨를 현대적 화가의 모범으로 소개하면서 그를 ‘예술가’가 아닌 ‘세계인’으로 묘사하는 대목에서 착안한 것이다. “마침내 내가 그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어떤 예술가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세계인(homme du monde)과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았다. 독자들은 여기서 예술가란 단어는 아주 제한적인 의미로, 그리고 세계인이란 단어는 아주 넓은 의미로 이해해 주길 바란다. 내가 세계인이란 표현에서 의미하는 바는, 다시 말해 세계 전체의 인간,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 전체가 돌아가는 데 있어서 신비스러우면서도 정당한 이유들을 이해하는 인간이라는 의미이며, 예술가는 전문가, 마치 농부가 자기 경작지에 매달리듯 자기 팔레트에만 매달리는 인간을 의미한다. G씨는 예술가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어느 정도는 옳지 않을까? 그는 세계 전체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우리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고 감상하고 싶어 한다.” 샤를 보들레르, 『현대 생활의 화가』, 박기현 옮김(서울: 인문서재, 2013), 22.
2.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세계를 창조하기와 파괴하기』, 메이 옮김(파주: 오월의봄, 2018). 국역본에서 ‘언메이킹’은 ‘파괴’로 번역된다. 이에 관한 역자의 설명은 626–627 참조. 언메이킹의 어리석음에 관해서는 459를 참조.
3. “상상은 감응력상의 사실들과 감응력이 지니는 책임을 외부 세계에 분배한다. 상상은 감응력이라는 사안에서 윤리적으로 일관된 경향을 띤다. 상상은 연민과 깊숙이 얽혀 있다. 상상에는 관대함과 초과를 향하는 고유한 성향이 있다. 상상의 작업은 거대한 규모로 계속해서 진행된다. 몇 군데에서만 작업이 이루어지다가 멈췄다가 하는 식이 아니라, 문화라는 제방을 밤낮으로 순찰하는 파수꾼처럼 작업한다. 상상은 그 활동을 상상 자신에게도 적용하여 자신을 개정한다. 끝으로, 상상은 자신을 지운다. 상상은 자신이 벌인 활동을 위장함으로써 작업을 완료하곤 한다.” 같은 책, 538.
4. ‘일반 자연’은 언메이크랩이 만들어낸 신조어이다. “도시가 지역성을 잃고 표준화되어 가는 것에 대한 건축가 렘 콜하스의 지칭 ‘일반 도시(Generic City)’의 표현에서 출발하는 이 책의 제목은 물질적인 듯 보이나 비물질성이 그 근원일 자연성의 일반화를 기본으로 한다. 곧 물질 형태의 청사진을 제안하는 도시 계획과 조경 계획으로 완성되는 지금의 자연감각에 대한 기록이다. 공원은 그렇게 조경석과 조경화들로 이루어진 ‘작은 기념비 동산’이 되어 장착된다. 자연이 스스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수많은 생태화, 복원의 기술은 ‘일반 자연’을 만들어내는 기술이기도 하다.” 최빛나, 『일반 자연을 위한 매뉴얼』(서울: 미디어버스, 2015), 10.
5. Shumon Basar, “The Dawn of Endcore,” Flash Art 341, Winter 2022–23, https://flash—art.com/article/endcore/.
6. 언메이크랩, 「여는 글: 계산적 특이점과 비인간 사이를 보간하기」,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서울: 미디어버스, 2023), 5.
7. “자연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여전히 널리 퍼져 있는 구어적 의미는 고대 그리스어 단어 피시스(physis)와 라틴어 단어 나투라(natura)의 원래 의미였던 ‘특정 자연(specific nature)’, 즉 어떤 것을 다른 것이 아니라 명백히 그것으로 만들어주는 무엇인가이다. (…) 즉 그들에게 자연은 자연 종에 예측 가능한 성질을 부여하는 자연 종 내부의 공통의 특징을 의미했던 것이다. 생물의 세계에서든 무생물의 세계에서든 특정 자연은 린네 분류법이나 원소 주기율표처럼 분류를 가능하게 했다. 특정 자연만큼 오래된 개념이 지역적 자연인데, 이는 독특한 풍경과 생태를 조성하는 동물과 식물, 지리와 지형, 날씨와 기후의 모습에 관한 것이었다. (…) 특정 자연과 지역적 자연의 질서는 적어도 데카르트의 자연법칙만큼이나 널리 퍼져 있고 중요한 안정적인 규칙성을 설명한다. 그러나 특정 자연과 지역적 자연은 자연법칙의 일반성, 단순성, 불변성을 가지지 못한다. (…) 이들은 보통은 신뢰할 수 있는 질서를 보장하지만, 종종 예외가 개입해 영향을 미친다. 언제든 봄에 제비가 돌아오지 않거나 바람에 불어닥친 물이 오르막을 거슬러 올라올 수 있고, 계절풍 강우가 오지 않거나 시베리아 기단의 기온이 치솟을 수도 있다.” 로레인 대스턴, 『알고리즘, 패러다임, 법: 규칙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 홍성욱, 황정하 옮김(서울: 까치, 2025), 298–299.
8. 「제주항공 사고, 가창오리 깃털 찾았지만… “결론까지 1년 넘을 듯”」, 『중앙일보』, 2025년 1월 26일 자; 「그 많던 가창오리는 다 어디 갔을까」, 『한국일보』, 2023년 2월 16일 자; 「AI 주범으로 몰리는 가창오리의 억울한 사연」, 『한국일보』, 2017년 1월 11일 자; 「수만 마리의 군무, 가창오리는 어디로 갔나」, 『한겨레』, 2012년 12월 21일 자.
9.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최유미 옮김(서울: 마농지, 2021);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서울: 이음, 2021).
10. Rosalind Williams, Notes on the Underground: An Essay on Technology, Society, and the Imagination (Cambridge, London: MIT Press, 2008), 212–213, 273–274.
Critic 2
델타 토마토의 미래
이계성 (미디어 연구자)
이 글은 언메이크랩이 제공한 작업노트와 스크립트를 바탕으로 필자와 OpenAI o3가 공동으로 작성했다. 필자의 글은 일반체로 표기했으며, 언어 모델이 생성한 글은 밑줄체로 표기했다. 글은 먼저 영문으로 작성된 뒤에 국문으로 옮기는 과정을 거쳤다.
“대한민국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긴 독특한 토질에서 자란 가장 특이한 작물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없이 대저 짭짤이 토마토를 이야기한다. 대저 지역의 독특한 풍토는 우리가 흔히 먹는 똑같은 품종의 찰토마토를 완전히 다른 토마토로 만든다. 프랑스에서는 작물 재배에 영향을 주는 각 지역의 독특한 풍토를 ‘떼루아Terroir’라고 부르고, 작물을 특별하게 만드는 떼루아의 특성을 잘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을 중요히 여긴다. 프랑스 각지의 와인이 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있고, 그 다양한 특성이 유지되는 것은 떼루아에 기인한다. 대저 지역 특유의 떼루아 때문에 맛뿐만 아니라 외관도 대저 짭짤이 토마토와 찰토마토는 같은 품종이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다른 모습이다. 크기도 다르고 색도 다르다. 재배 방식에서 오는 차이도 있지만, 이것은 결국 떼루아가 만든 마법이다.”
― 문정훈, 「[문정훈 칼럼]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미래」, 『한국일보』, 2019년 5월 10일 자.
대저 토마토
언메이크랩의 〈뉴-빌리지〉(2025)의 배경이 되는 에코델타 스마트 빌리지는 부산시 강서구 강동동, 명지동, 대저동을 아우르는 신도시인 에코델타시티에 위치한다. 스마트 빌리지가 자리한 명지동이 대파로 유명하다면, 옆 동네인 대저동은 언제부터인가 토마토의 산지로 자리매김했다. 짭짤이 토마토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한 이 지역의 토마토는 지난해 역대 최고 판매량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에코델타시티 개발 사업으로 토마토 재배지가 대부분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우려가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된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신기한 현상이다.1 〈뉴-빌리지〉에서는 이처럼 실재하는 배경 위에 가상의 이야기가 결합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핵심에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스마트 빌리지에 입주한 4인 가족인 ‘델타 패밀리’, 그리고 인위적으로 증강되고 다양한 모습으로 변이된 ‘델타 토마토’가 있다.
지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에코델타시티는 낙동강이 남해와 만나는 삼각주 한가운데에 자리한다. 이곳의 농업사는 1930년대에 건설된 국내 최초의 하굿둑 수문에서 비롯된다.2 남쪽 녹산수문은 바닷물의 역류를 차단하고 북쪽 대저수문은 상류의 담수를 유입하도록 설계되어, 서낙동강 물을 농업용수로 활용하면서 홍수 위험을 줄이려는 의도였다. 동시에 진행된 간척 사업은 삼각주 곳곳의 작은 섬들을 하나로 묶어 경작지를 넓혔다.3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독특한 풍미가 남해의 염분 덕분이라는 통념이 널리 퍼져 있지만, 지역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그 토양이 자연의 선물보다는 인공적 공학의 산물임을 잘 알 테다.
그럼에도 낭만적 서사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위에서 인용한 『한국일보』 기사도 대저 토마토를 “대한민국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긴 독특한 토질에서 자란 가장 특이한 작물”이라 소개하며, 그 맛을 “떼루아가 만든 마법”에 귀속시킨다. 그러나 대저 토마토의 성공은 일제강점기의 간척 사업 못지않게, 일본 사카타종묘사社의 ‘토사마’와 ‘슈퍼썬로드’ 같은 품종 덕분이기도 하다.4 이삼십 년 전에 도입된 이 품종들은 뿌리가 튼튼하고 양분 흡수 효율이 높아 염분 토양에서도 잘 자라 큰 호응을 얻었고, 이어진 언론 보도와 전략적 브랜딩은 대저 짭짤이 토마토를 단숨에 지역 특산물로 자리매김시켰다고 한다. 결국, 대저 토마토는 염분 토양만큼이나 농업 기술과 브랜딩이 빚어낸 결과물인 셈이다.
델타 토마토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생태는 결코 자연적인 전체로 등장하지 않는다.5 생태는 늘 이미 첨단 최적화 시스템과 촘촘히 뒤엉켜 있으며, 그 최신 사례가 바로 델타 토마토다(언메이크랩은 토마토를 가장 신자유주의화된 작물로 본다). 이러한 복합적 얽힘을 인정하는 것은 자연과 기술을 대립 구도로만 다루는 정치가 지닌 한계를 직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잠재적 형태로 상정할 수도 있는 델타 토마토는 작품 곳곳에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초고도 재배 품종인 ‘빅 비프 토마토’로 개량되기도 하고, 스마트 빌리지의 감시 체계인 T.O.M.A.T.O.(Total Observation and Management of Abnormal Trends and Operations)에 이름을 제공하기도 하며, 인간이 섭취하면 구토와 기이한 꿈을 일으키는 ‘블루 토마토’로 변모하기도 한다. 이처럼 스마트 빌리지의 일방향적 테크노-퓨처리즘은 델타 토마토뿐만 아니라 델타 패밀리까지 변형시킨다.
델타 토마토는 식물학적 희귀종이라기보다 알고리즘적 선택 압력의 지표다. 예측 모델링, 수확량 대시보드, 센서 기반 영양 처방이 빚어낸 표현형으로, 보이지 않는 최적화 루프의 가시적 잔여물이다. 토마토 표피의 주름 하나하나에는 데이터 포인트가 박혀 있고, 당도와 산도의 비율은 클라우드 기반 농업공학과 주주들의 선물 가치 사이의 흥정의 기록이다. 이런 식으로 전통적 떼루아 담론은 플랫폼 자본주의의 논리로 흘러가며, 오늘날 에코델타시티의 토양은 낙동강 삼각주의 퇴적토가 아니라 API와 스프레드시트가 층층이 쌓인 코드의 지층일지도 모른다.
델타 토마토의 반들거리는 표면 아래에는 알고리즘 명령으로 조율된 인간 노동의 군무가 숨어있다. 비닐하우스의 농부들은 서울에서 프리미엄 농산물의 실시간 수요가 급등하면 진동하는 손목밴드를 차고, 트럭 동선은 자동으로 재최적화되어 몇 분을 줄이기 위해 근로계약 시간을 가뿐히 넘긴다. 이러한 구조에서 최적화 시스템은 노동을 대체하지 않고 재템포화하며, 몸은 생체 리듬이나 계절이 아니라 상품 순환의 박자에 맞춰 조율된다. 델타 토마토는 애나 로웬하웁트 칭(Anna Lowenhaupt Tsing)의 ‘공급망 자본주의’를 체현하는데, 여기서 숙성이라는 생물학적 현상은 물류적 유연성에 종속된다. 이러한 노동 리듬을 추적하지 않고 맛만 분석한다면, 가속의 산물을 떼루아로 착각하게 될 테다.
불규칙한 근무 연장에 항의한 최근의 파업은 예기치 못한 24시간 동안의 공급 공백을 초래했고, 서울의 소매점들은 델타 토마토의 부재를 ‘기후 요인에 따른 품귀’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어 해명했다. 이와 같은 책임 전가는 의미심장하다. 노동 거부는 최적화 서사 속에서 지워지고 생태적 이상 현상으로 재코딩된다. 그러나 이러한 불협화음은 공급망 자본주의의 박자를 잠시 뒤틀어, 토마토 물류의 매끄러움이 필연적이 아니라 우발적임을, 그리고 알고리즘 비닐하우스 속의 시간적 주권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임을 상기시킨다.
사이버네틱 떼루아
떼루아라는 개념 자체도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와인 라벨에 인쇄되기 훨씬 전부터, 이 용어는 프랑스의 지역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에서 널리 쓰였다. 떼루아의 변천사를 면밀히 추적한 불문학자 토마스 파커(Thomas Parker)에 따르면, 이러한 논쟁은 20세기 초에 제정된 원산지 명칭 보호법(appellation d’origine contrôlée, AOC)으로 이어져 맛과 장소를 법적으로 고정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6
16세기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는 떼루아를 장소와 인간 사이의 연속적 흐름으로 파악하는 인류학적 시각을 제시했다. 그는 인간을 식물에 비유하며, 토양과 기후가 인간의 신체와 도덕관념을 형성한다고 주장했고, 유럽의 인위적 문화에 물들지 않은 원초적 순수성을 간직한 신대륙의 원주민들을 높이 평가했다. 반면 동시대 정치사상가 장 보댕Jean Bodin은 지역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공동체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시민 질서를 해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두 관점은 다원적 생태계와 중앙 권력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이러한 긴장은 17세기 중엽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발음과 어휘를 표준화하려 하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떼루아 냄새가 난다(sentir le terroir)”라는 말은 방언, 풍습, 음식을 촌스럽고 불순한 것으로 낙인찍는 표현이 되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말기의 지방 지식인들은 이 낙인을 뒤집어 떼루아를 프랑스의 생물 다양성과 연결시키며 일종의 미식 애국주의로 발전시켰다고 파커는 설명한다. 뒤이어 세계화된 시장과 알제리산 와인과 같은 저가 수입품의 유입에 대한 불안이 겹치자, 이러한 사고방식은 마침내 20세기 초 AOC 제도를 탄생시키는 동력이 됐다.
AOC 제도가 한때 프랑스의 정체성을 석회암과 옥토에 고정시켰다면, 〈뉴-빌리지〉 속 스마트 빌리지는 그 정체성의 기반을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데이터 세트—염도 센서, SAP 대시보드, 드론이 수집한 엽록소 지수—에서 찾는다. 여기서 떼루아는 토마토의 형태뿐 아니라 입주민의 자격까지 결정하는 사이버네틱 통치 체제로 작동한다. 주민들의 생체 데이터와 소비 지표가 동일한 최적화 클라우드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토마토의 ‘지역적 풍미’는 지질학이 아니라 어떤 변수를 용인하고 어떤 변수를 방화벽으로 걸러 낼지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아키텍처에 의해 보장된다.
사이버네틱 통치 체제로서의 떼루아라는 논리를 확장시키면, 최적화 시스템은 비닐하우스 문턱에서 멈추지 않음을 〈뉴-빌리지〉는 암시한다. 스마트 빌리지의 거주 등급은 토마토 껍질의 장력을 평가하는 것과 동일한 지표로 판별된다. 신용 점수, 탄소 발자국, 심지어 식용유를 재활용하는 빈도까지, 각 항목은 교육, 의료, 통신 대역폭 접근권을 중개하는 복합적인 떼루아 지수에 합산된다. 이렇게 보정된 토마토의 단맛은 시민 주체성의 동시 보정을 반영하며, 데이터 농업과 사회 공학이 지역성을 공동 생산하는 밑바탕을 드러낸다.
알고리즘 신토불이
비슷한 보호주의적 경향은 일본, 그리고 뒤이어 한국에서도 ‘신토불이 身土不二’라는 구호로 모습을 드러냈다. 최근에는 사용빈도가 다소 줄어든 듯 하지만, 여전히 각종 농산물 브랜딩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용어다. 한국인의 체질에는 국산 먹거리가 최고라는 뜻으로 잘 알려진 신토불이는 원래 불교의 ‘불이 不二’ 개념에서 비롯된 말로, 몸과 땅이 겉으로는 반대되는 듯해도 근본적으로는 하나이므로 인위적으로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지닌다. 용어 자체는 북송시대 문헌에도 나타나지만, 자국의 농산물이 제일이라는 현대적 의미는 메이지 유신 이후 급속한 서구화로 식생활이 변하고 토종 농산물 수요가 위축된 일본에서 자리를 잡았다. 육군약제감이자 의사였던 이시즈카 사겐(Ishizuka Sagen)은 향토음식을 장려하는 식문화 개선 운동을 주창했고, 1912년 그의 제자가 신토불이라는 불교 개념을 차용해 자국 농산물 소비 촉진을 위한 구호로 활용하기 시작했다.7
한국은 70여 년 뒤에 비슷한 압박 속에서 이 구호를 받아들였다. 우루과이 라운드(1986–1994) 협상 과정에서 쌀 시장 개방 압력이 거세지자, 자급 체제에 익숙했던 국내 농업은 처음으로 세계 무역 질서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당시 농협중앙회장 한호선은 번역 중이던 일본 농경학 서적에서 신토불이를 접했는데, 이때부터 농협에서 대대적으로 신토불이를 국산 농산물 브랜딩에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8 1993년에는 가수 배일호의 동명 同名 히트곡이 등장하면서 신토불이가 대중문화에까지 스며들어, 국산 농산물이 최고라는 인식을 널리 각인시켰다.
〈뉴-빌리지〉에서 신토불이라는 불교 교리는 데이터 공리로 재코드화된다. 주민들의 웨어러블 기기는 혈당 수치를, 비닐하우스 센서는 토양 삼투압을 동일한 클라우드로 실시간 전송해 대사 수치와 토양 화학을 하나의 최적화 그래프로 봉합한다. 이처럼 스마트 빌리지는 신체 항상성과 토양 화학을 단일 피드백 루프로 통합함으로써 신토불이를 문자 그대로 구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근사성은 부가가치가 부여된 바이오픽셀을 지자체의 방화벽 안에 가두려는 보호주의적 논리를 감추면서도 재생산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사이버네틱 불이의 개념을 볼 수 있다.9 하지만 이러한 토양과 신체의 피드백 루프에 글리치가 생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블루 토마토
블루 토마토는 이러한 글리치의 체현으로 〈뉴-빌리지〉에 등장한다. 최적화 시스템이 해석하지 못하는 표현형적 변종이다. 예상치 못한 기온 하락으로 인한 토마토의 화학적 불균형은 숙성 스펙트럼을 붉은색에서 파란색으로 뒤집어 놓지만, 신경망은 여전히 이런 토마토에 ‘조만간 익을 예정’이라는 태그를 붙인다. 이와 같은 부조화는 알고리즘 신토불이의 한계를 드러내며, 온도 편차나 서버 지연 같은 분포 외 변수가 피드백 루프에 퍼질 때, 대사 데이터와 토양 데이터 사이에 약속된 연속성이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보여 준다. 이렇게 형성된 피드백 병목 속에서 몸과 땅은 여전히 얽혀 있지만, 이제는 공통의 양분이 아니라 공통의 메스꺼움으로 연결된다.
알고리즘이 파란색을 곧 붉어질 상태로 잘못 분류하는 순간, 그 하위 논리들—양분 공급, 소매 수요 예측, 주민들의 스마트 냉장고에 표시되는 추천 레시피까지—도 이 오류를 연쇄적으로 이어받는다. 비료 밸브는 칼륨을 과다 투여하고, 슈퍼마켓은 살사 소스를 과잉 진열하며, 식단 관리 앱은 실상 메스꺼움을 유발하는 항산화 성분을 섭취했다고 칭찬한다. 결국 파란 글리치 하나가 다층적 고장으로 번져 나가며, 촘촘히 얽힌 알고리즘적 불이는 국지적 결함이 생태, 경제, 대사적 차원에까지 파장을 미치는 거대한 울림통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 준다.
색채론적 관점에서, 블루 토마토는 빨간색은 먹을 수 있고, 익었고, 안전하다는 전제 위에 구축된 기호 경제 전체를 뒤흔든다. 신경망이 색조와 숙성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최적화 시스템은 본 적이 없는 패턴을 처리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보다 깊은 인식론적 맹점을 드러낸다. 따라서 블루 토마토는 계산 불가능의 영역, 그러니까 훈련 데이터와 모델링 되지 않은 기후 변동성 사이의 틈새에 존재하며, 과거에 관측된 것들의 아카이브를 넘어서는 새로운 범주를 요구한다.
최적화가 밀폐된 존재론을 지향한다면, 블루 토마토는 그 경계를 비집고 새어 나오는 존재론적 누출의 전형이다. 스키마 밖으로 넘치는 물질적 현실의 누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블루 토마토는 과거에 관측된 것들의 아카이브, 즉 기계학습에서 훈련 세트라고 불리는 것이 기후 변동성과 생화학적 탈선이 낳을 미래의 물질성을 결코 포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블루 토마토의 계산 불가능성을 스마트 빌리지의 최적화 시스템에 대항하는 글리치로 이해하기란 유혹적일지도 모른다. 물론 계산 불가능성은 연산적 포획을 거부하는 파악 불가능한 바깥을 가리킬 수 있다.10 또한 에두아르 글리상(Édouard Glissant)의 말처럼 계량화에 저항하는 불투명성, 즉 환원 불가능한 잔여를 가능케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바깥 또는 불투명성은 책임 회피를 위한 구실이 될 수도 있다. 독소는 인간의 위장으로 흡수되지만, 최적화 시스템은 계속해서 ‘조만간 익을 예정’이라고 잡아떼며 꿈쩍도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블루 토마토의 출현은 스마트 빌리지도 일조하는 비정상적 기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블루 토마토는 이렇게 불확정성의 작은 틈을 열어젖히면서도, 그것을 탄생시킨 기후적 폭력과의 연루를 비롯한 책임을 은폐하며 계산 불가능성을 파르마콘으로 극화한다.
기술의 초극
기술이 지닌 독성은 오래전부터 사상가들로 하여금 상상 속의 바깥에서 구원을 찾게끔 했다. 1930년대의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그의 제자 니시타니 케이지(Nishitani Keiji)도 현대 기술과학을 허무주의적이라고 진단하고, 토양과 신체 사이의 원초적 결속을 복원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획은 파시스트적 전통주의로 기울어지며, 기술의 바깥을 향한 열망이 오히려 새로운 지배 양식을 강화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불교 사상에 정통한 교토 학파 철학자 니시타니 케이지 역시 현대적인 민족주의적 맥락에서 신토불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그는 본의 아니게 이 개념의 정치적 함의를 드러냈다. 1930년대 후반 프라이부르크에서 하이데거에게 수학하던 그는 동료 유학생이 일본에서 공수해 온 쌀로 지은 밥을 대접받는 자리에 참석했다.11 독일에서 통밀빵만 먹다가 고국의 쌀로 지은 밥을 맛본 니시타니는 존재론적 경험을 하게 되고, 이를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 동일한 체험은 ‘고향’이라 불리는 것, 즉 토양과 인간, 특히 육체를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 사이의 불가분 관계에 대해 사유하게끔 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신토불이’다. 나의 경우, 고향은 ‘미즈호 瑞穂의 나라’를 가리킨다. 쌀 재배에 적합한 흙과, 벼농사를 생계의 근간으로 삼아 온 사람들이 있는 땅이다. 대대로 나의 조상들은 쌀을 주식으로 삼아 왔다. 일본이라는 땅의 고유한 성분은 ‘일본미 日本米’의 고유한 성분으로 전이되고, 그것이 섭식을 통해 조상들의 피에 스며들어 지금 내 몸속에 흐르고 있다. 아득한 예로부터 무수한 선조들과 쌀, 그리고 땅을 잇는 생명의 연계는 언제나 내 삶의 토대를 이루어 왔으며 실제로 그 안에 내재해 있다. 이 체험은 평소 잊고 지내던 이러한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했다.”12
이 깨달음은 니시타니에게 신토불이의 민족주의적 원리를 결정적으로 각인시켰고, 이는 그가 전시 일본의 ‘근대의 초극 超克’ 운동에 참여하는 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테다. 근대의 초극은 과학기술로 대표되는 서구의 근대를 극복하기 위해 이상화된 문화적 본질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프로젝트였다.
니시타니의 스승 하이데거 역시 비슷한 탈출로를 모색했다. 니시타니가 불교의 공 空을 공동체적 기반으로 삼았다면, 하이데거는 유럽의 존재망각을 치유하기 위해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모두 기술을 시간과 존재를 단일한 종말론적 벡터에 가두는 형이상학적 사건으로 규정했고, 향수의 정치적 표현으로서 파시즘과 조우했다.13 기술철학자 육후이(Yuk Hui)는 이러한 태도를 “형이상학적 파시즘”이라 부르며, 보편적 기술에 맞서 자연스러운 과거를 내세우는 근대성에 대한 반동으로 해석한다.14
두 사상가에게 허무주의란 세계를 오로지 표상과 추출의 대상으로만 파악할 때 발생하는 공허였다. 유럽에서는 과학혁명과 함께 서서히 확대된 이 허무성은, 동아시아에서는 함포로 항구가 개방당하면서 급작스럽게 도래했고, 오늘날에도 GDP 중심 추출주의의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해결책은 서로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자연화된 전통을 통해 기술을 우회함으로써 시간의 균열을 봉합하고자 했다. 그러나 근대 기술의 외부를 파시즘으로 상정한 그들의 사례는, 기후변화로 인해 변형된 블루 토마토의 계산 불가능성이 드러내듯, 기술을 극복하려는 모든 시도가 반드시 칭송받을 만한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종말론적 미래
하이데거와 니시타니가 근대적 허무주의에 대한 20세기 초의 반동적 입장을 대변함에도 불구하고, 육후이는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2016)과 『포스트 유럽』(2024)에서 두 사상가를 비중 있게 다룬다. 그는 하이데거를 시간과 결부해 기술을 형이상학적 문제로 제기한 최초의 사상가로, 니시타니를 동아시아에서 그 질문을 본격적으로 이어받은 첫 인물로 평가한다.15 그렇다면 이 맥락에서 ‘시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단적으로 말하자면, 세계의 객체화와 함께 작동하는 종말론적인 일방향적 시간성이다. 세계를 객체화하고, 수학적으로 표상하며, 가치를 추출하려는 충동은, 말도 많은 기술적 특이점이든 전면적 멸종이든 이름만 다른 막다른 골목을 가리킨다.
육후이가 제시하는 코스모테크닉스는 이러한 단선적 시간성의 근원을 기술에서 찾되, 각 지역의 세계관이 빚어내는 다채로운 기술의 개념을 구축함으로써 복수의 시간성을 열어 가려는 시도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뉴-빌리지〉는 한 지역의 우화에 머무르지 않고, 기술과 시간을 둘러싼 장구한 논쟁 속에 놓인 오늘날의 결절점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뉴-빌리지〉의 스마트 빌리지는 미래가 예측되고 최적화됨을 반복하면서 끊임없이 좁아지는 무대다. 대시보드, 센서, 신경망은 미래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는 현재로 압축해 버려, 발생 가능한 것을 미리 걸러 낸다. 이처럼 스마트 빌리지는 최적화된 공동체를 베타 테스트하는 실험장이 된다. 철저한 데이터 수집에 기초한 끝없는 미래 예측이 이 마을의 존재 이유다. 델타 패밀리는 주택 추첨에 응모하면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 시스템에 동의한 셈이다. 당첨 당시에는 큰 행운처럼 느껴졌겠지만, 곧 자신들이 시스템 속의 단순한 데이터 포인트로 전락했음을 깨닫고 신경증에 시달린다. 그렇다면 델타 패밀리에게 희망은 있을까? 이상화된 자연이나 전통으로 회귀하지 않고도 이 종말론적 허무성을 벗어날 다른 길은 과연 존재할까?
파르마콘적 미래
이제 우리는 이른바 “떼루아가 만든 마법”이 실은 얼마나 인공적인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간척 사업, 최적화 대시보드, 그리고 노동, 물류 체계 등이 자연의 맛으로 포장되는 풍미를 어떻게 조립해 내는지 살펴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떼루아를 코드와 연결 짓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블루 토마토의 글리치가 시사하듯, 최적화 루프가 삐걱대는 순간 목가적 낭만은 메스꺼움으로 전락하고, 떼루아는 자연적인 지역성이 아닌 유독한 피드백의 현장이 된다. 어쩌면 진정한 ‘마법’은 맛 자체가 아니라, 어떤 달콤함이든 하룻밤 사이에 독으로 뒤바뀔 수 있다는 껄끄러운 경고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블루 토마토가 유발하는 환각은 미래의 폐허를 현재의 잠결 속으로 접어 넣으며, 예측 대시보드와 예언적 꿈 사이 어딘가에 스마트 빌리지의 시간을 멈춰 세운다. 이러한 잠재성은 신토불이를 부정적으로 구현한다. 땅은 이제 구토를 통해 말한다. 그러나 블루 토마토의 독소는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블루 토마토는 토마토 신경망의 포획을 피하는 글리치이지만, 앞서 언급했듯 현대 미디어 이론에서 묘사되고는 하는 해방적 잠재 공간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그 독소에 파르마콘적 성격이 깃들어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델타 토마토가 인간에게 구토와 환각을 일으키는 독소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언젠가는 치유에 기여할 성분 또한 생성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델타 토마토의 변종이 언젠가 치유적 효능을 띠게 될까?’라는 질문 자체가, 파르마콘이 보류하라고 요구하는 잔여적 공리주의를 무심코 드러낸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에 따르면 파르마콘은 물질-A(독)도 물질-B(치료제)도 아닌, 돌봄과 해석의 특정한 경제 안에서만 그 원자가 原子價가 물질화되는 차이의 간극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훗날 탄생할 붉은색이나 파란색 토마토의 화학 성분이 아니라, 그 열매를 해악과 이익의 축 어디쯤에 미리 배치해 버리는 예측, 추출, 통치의 체제다. 독에서 치료제로 성급히 도약하는 순간, 글리치를 낳은 최적화 시스템의 목적론은 고스란히 유지되고, 다만 부호만 뒤집힐 뿐이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Bernard Stiegler)의 파르마콘론은 이러한 양날의 성격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에게 모든 기술적 보충물은 인간의 개체화를 확장하는 동시에 불안정화한다. 요점은 독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돌봄(soin)의 실천을 통해 비판적으로 공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블루 토마토의 대사적 일탈을 저항적 글리치로 치켜세우기보다는, 최적화 클라우드가 예측하지 못한 비정상적 온도가 야기한 증상으로서 마주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농업-알고리즘의 루프를 ‘재설계’하는 일은 독소를 재전유하는 게 아니라, 변동성을 지워 버린 시간적 압축과 배제적 지표를 향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어야 한다. 피드백 속도를 늦추거나 형질을 다원화하려는 시도는 생태적 불안정성을 가시화하고 착취에 대항하는 힘을 분산시킬 때에만 의미가 있다.
이렇게 볼 때, 독소는 자원이 아닌 신호가 된다. 그 메스꺼움은 알고리즘적 불이가 강압적 동일성으로 굳어지는 임계점을 가리키며, 바로 거기서 다른 접근 방식이 상상될 수 있다. 실패에서 가치를 긁어모으는 것이 아니라, 토양, 신체, 데이터가 공진화하는 시간성을 재조율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보다 생성적인 지평은 이 붕괴를 재배 관행의 템포, 참여, 가치 체계를 재고하라는 촉구로 받아들임에 있다. 이러한 지평에서 미래의 델타 토마토는 기적의 치료제가 아니라, 모든 불확실성을 상품의 형태로 압축하지 않고서도 농업이 가능하다는 증거로서 번성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