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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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CV
<개인전>
2017
열섬, 인디프레스, 서울
2014
먼지의 날들, 갤러리현대, 서울
2011
혹성, 갤러리소소, 파주
2009
아버지의 날, 갤러리현대, 서울
2007
황홀의 건축, 관훈갤러리, 서울
2005
오래된 아파트, 금호미술관, 서울
2004
청운시민아파트, 갤러리피쉬, 서울
2003
인천여행, 인천신세계갤러리, 갤러리피쉬, 서울, 인천
<주요단체전>
2017
그 집, OCI미술관, 서울
2017
우연히도 다시, 밤, 우민아트센터, 청주
2016
리얼리즘, 고암이응로기념관, 홍성
2016 홈그라운드, 청주시립미술관, 청주
2016
RETRO-SCENE, 스페이스 K, 서울
2015
집의 귀환, 국민대학교박물관, 서울
2015
우주 생활, 일민미술관, 서울
2014
즐거운 나의 집, 아르코미술관, 서울
2014
강북의 달,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서울
2014
사회적 풍경, LIG 아트스페이스, 서울
2014
아파트 인생, 서울역사박물관, 서울
2013
진경, OCI미술관, 서울
2012
도시산책, 포항시립미술관, 포항
2011
부산, 익숙한 도시 낯선 장소, 부산 신세계갤러리, 부산
2010
조각난 풍경,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
2010
사-이에서, 원앤제이갤러리, 서울
2010
서울 아카이브-도시풍경, 대우증권갤러리, 서울
2010
지금, 회화로 표현되는 것들, 가나아트갤러리, 서울
<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서울대학교미술관
의재미술관
금호미술관
OCI미술관
Critic 1
지필묵, 근대, 몸
김학량 (작가, 큐레이터, 동덕여대 교원)
정재호의 2010년작 〈혹성〉 은 그가 해온 작업의 관심사와 주제·태도·개념을 잘 알려주는 표지라고 할 수 있다. 희끗희끗 굵은 눈송이가 사선으로 쏟아져 내리는 거친 눈밭을 달리는 구식 증기기관차가 화면 오른쪽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이것은 해방공간 사진 자료 가운데서 선택한 이미지인데, 그림을 그리고 난 뒤에 그는 증기기관차가 눈밭을 “표류”한다고 말한다. 정재호가 보기에 과거사의 특정 순간을 지시하는 이미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에 살다가 죽어 없어진 게 아니라, 마치 유령처럼 우리 앞에 끊임없이 다시 나타나 우리/현재의 방향·좌표·이념·욕망을 트집 잡는다. 이미지는 역사이고 심지어 우리 자신이다: “나는 차가운 눈밭을 달리는 증기기관차의 이미지에서 그 어떤 것보다 심한 고독감을 느낀다. 그것은 정해진 궤적을 달리지만 결국 종착지에 다다를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 같은 것이다.”
내가 화가 정재호를 《올해의 작가상 2018》에 추천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자의적인 해체·재구성·해석을 앞세운 일종의 심상 풍경이 유행하는 우리 동시대의 회화 상황에서, 그는 태도 및 개념 차원에서 또 다른 중요한 논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파트 연작 〈청운시민아파트〉(2004), 〈오래된 아파트〉(2005), 〈황홀의 건축〉(2007), 〈열섬〉(2017) 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다큐멘터리 감독처럼 세세하게 대상과 그 주변 맥락을 탐사한다. 특히 도심 재개발에 밀려 헐려나가는 낡은 아파트나 도심 내 서민용 집합주거 빌딩을 세밀한 필치로 그려냈는데, 여기서 그의 목표는 사진처럼 정확하게 풍경의 파사드를 재현하는 게 아니라, 역사와 내력과 체취를 머금은 포괄적인 환경 또는 살아 숨 쉬는 육체로서의 풍경을 그리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아파트는 저기에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 개인/집단/역사 와 함께 호흡하는, 우리 자신의 몸 그 자체이다. 아파트 연작과 더불어 잘 알려진 것이 아키비스트와 같은 자세로 한국근현대사에 관한 특정 사진이미지를 선택해 그린 연작 〈아버지의 날〉(2009), 〈혹성〉(2011), 〈먼지의 날들〉(2014) 이다. 글머리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이 연작에서 정재호의 과거/이미지는 유령이나 안개처럼 우리/현재를 둘러싸거나, 우리의 삶을 폐허 한가운데로 자꾸 데려다 놓는다. 우리는 화가가 심해에서 건져 올린 과거/이미지를 통해서, 수면에서 흔들거리며 간신히 버티고 있는 우리 자신을 어렵사리 만난다.
두 번째 이유는 한국근현대미술사의 거시적 판도 안에서 정재호의 작업이 전통매체 및 미학과 관련된 맥락화된 성찰의 지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져 있다시피, 20세기 수묵화와 관련된 실천과 담론은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 를 통해 우리 화가들에게 내면화된 식민주의 미학을 해방 이후에 조차 버리지 못했거나, 그에 대한 극단적 반동으로서 과거 문인화 미학을 교조처럼 떠받듦으로써 현대 삶과 회화를 접목시키지 못했다. 따라서 동시대에조차 수묵화가들에게는 한편으로 식민주의를 다른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적 민족·전통주의를 근본 차원에서 해체할 감각과 안목·역량이 과제로서 주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시서화라는 고전예술의 미학을 밀쳐두고서 서구식 시각예술의 체제와 문법·관례를 규준 삼아 근대화의 여정을 밟아오는 동안, 지필묵을 주요 매체로 사용하는 화가가 과연 자신의 몸을, 현실을, 세계를 오로지 자기 육신의 감각을 통해 새롭게 받아들이고 경험하고 질문하고 해석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정재호의 그림그리기는 한국근현대미술사 즉 시서화 이후의 미술사에서 돋보이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2017년 6월에 열렸던 개인전 《열섬》에서 그는 홍콩에서 보고 겪은 집합 주거 건물을, 그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보다도 더, 그 건물 구석구석을 칠하는 페인트공보다도 더, 심지어는 거기 사는 사람보다도 더 깊이 관찰하면서, 그림 기계가 되어, 그렸다.
다소 과장하는 듯이 들릴 수도 있지만, 정재호는 20세기 한국 수묵화(지필묵 그림)의 역사를 통틀어 1950년대의 이응노 다음으로 지필묵이라는 전통회화의 매체를 쓰면서도 자신이 속한 시간대의 문제 안에서 동시대 예술가로서의 감각을 익히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통해 도시와 도시 삶이라는 늪에 뛰어든 거의 첫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이응노는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에 줄곧 우수에 잠기거나 적막감이 감도는 풍경화를 중심으로 참여했지만,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 중반에 이르는 동안에는 도시 삶을 배경으로 곤고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서민계층의 일상을 활달한 필치와 즉흥적인 리듬으로 담은 생기발랄한 풍속화를 제작했다. 해방을 전후하여 그는 식민주의 규범이나 맹목적인 고전주의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누추하면서도 발랄하게 세속 삶이 펼쳐지는 거리로 나아갔다. 그것은 세계의 늪으로 자기 몸을 던져 자신의 손과 발, 눈과 귀와 코와 피부를 통해 세상과 맞부딪치기, 그렇게 해서 비로소 얻게 되는 생생한 감각과 감흥으로 그림을 그렸다. 정재호 역시 대학 졸업 이후 줄곧, 역사와 전통이 교시하는 것을 물리치고 그 대신 “몸으로 가서 만나는 것”과 대화했다. 문인화 이념이 강조하는 흉중일기(胸中逸氣)나 사의(寫意) 대신 정재호의 작업에서는 화가의 몸이 지닌 감각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후각·미각·촉각 등 이 곧 매체가 되었다. 이때 비로소 화가의 몸은 세계와 예술을 잇는 매체가 되고, 여기서 감각과 매체의 근대성이 비롯한다
한국의 수묵화가들이 20세기에 놓친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유럽식 미술개념을 통해 시각차원의 근대성은 얼핏 보기에 해결했는지는 몰라도, 감각과 인식, 태도, 그리고 몸 전체의 차원에 관해서는 질문할 줄 몰랐다. 1950년대에 이응노는 흉중일기·사의라는 관념적 투사와 재구성을 뿌리치고 자기 몸이 보고 듣고 맡고 만지고 맛본 것에 즉각 반응하며 자기 감흥을 더해 시원시원하게 수묵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갔고, 거기에 더해서 정재호는 실제 풍경이나 사물이든, 한국현대사의 문맥 안에서 어떤 순간에 생산된 몇 장의 이미지이든, 그것을 다만 세계에 관한 하나의 그림자가 아니라 도리어 세계에 과거든 현재든 관여하는 엄연한 육체라 이해하고 탐구한다. 정재호가 어떤 대상에 육박하는 핵심적인 개념은 일종의 생생함인데, 이 생생함 또는 생기라는 것은 대상의 외관을 묘사하는 문제를 넘어서서, 오히려 화가의 몸과 세계가 맺는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요컨대 이응노와 마찬가지로 정재호에게 그림 그리는 일은 육신을 일으키고 감각을 곧추세워 세계의 모양·소리·냄새·맛·질감을 실질(實質)로서 맞이하는 일이요, 삶과 죽음의 낌새 볕과 그늘 를 알아차리려는 몸가짐이자, 자기 몸 안팎의 모든 존재와 어울리려는 마음가짐이다(근대는 그러한 몸과, 그 몸이 여는 감각, 그리고 그 생생한 감각을 통해 해석하는 세계를 통해 생성된다. 수묵화가들이 이 점에 관해 온몸으로 깨우치지 않는 한, 그들이 말로는 그토록 벗어나고자 하는 식민지근대성의 트라우마에서 놓여날 길이 없다). 예술가는 예술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자기 몸을 열어야 한다.
Critic 2
녹슨 세계의 리얼리티 : 동시대와 겨루는 그리기
심소미 (독립큐레이터)
1 프롤로그 : 시대착오적 그리기에 대한 짧은 단상
혹자에게는 의아할 수도 있다. 이 시점에 우리는 왜 정재호의 작업을 되짚어 봐야만 하는가? 도시를 기록하며 근대화 이후를 추적해 왔기 때문인가 혹은 동시대 미술에서 생존하기 쉽지 않은 동양화를 이어왔기 때문인가. 둘 다일 수 있지만, 이 모두 이유가 아닐 수도 있다. 아파트와 동양화는 분명 정재호라는 한 작가를 규명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배경이 되어 왔다. 하지만 한국 미술계에 아파트, 건축, 근대를 질문해온 작가는 꽤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으며, 동양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고자 노력해온 작가도 그 뿐만은 아니다. 만약 내가 《열섬》(2017)1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이러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이 전시부터 언급하는 이유는 《열섬》을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는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이 전시를 전후로 이전이 우리가 알고 있던 ‘아파트 작가’ 정재호라면, 이후부터는 ‘리얼리즘’의 사유가 주요하게 대두된다. 이번 《로켓과 몬스터》(2018)•는 후자를 본격적으로 다룬 전시이다. 물론 현실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90년대 말부터 그를 도시 속으로, 아파트 속으로, 폐허와 같이 남겨진 근대성의 파편들을 추적하는 길로 이끌어왔다. 이 모든 여정은 그가 현실에 도달하기 위해 통과해야만 했던 것이다.
작년 이때쯤에도 그는 건물을 그리고 있었다. 돌출된 파사드를 그리기 해 벽면의 얼룩과 찌든 때까지도 일일이 세필로 그리고 있었다. 대상을 집요하게 그려내는 것을 보며, 나는 그의 사실적인 그리기를 어찌 봐야 할지 망설였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여전히 한 그림 앞에 매달려 있는 그를 보며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그리기는 너무나 시대착오적이지 않은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어떠한 새로움도 주지 못하는 시대에 있어, 이에 개의치 않고 사실적으로 그린다는 것은 분명 반-동시대적이자, 반-회화적 노선을 지향하기 때문이다.2 동시대 회화가 이룩한 반-재현의 어법을 그는 역설적으로 보란 듯이 더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로켓과 몬스터》를 홍콩의 낡은 맨션을 그린 《열섬》과 비교하자면, 두 전시는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어느 전시보다도 시대착오적이고, 반-동시대적 수행을 따른다는 점에서 이 둘을 이어서 생각해볼 것이다. 분명 그는 지나칠 정도로 ‘과도한, 과잉의 그리기’를 통해 동시대성이 간과해온 것들을 밝혀 보였기 때문이다. 이번 신작에서 그는 시간성, 장소성, 그리고 회화의 존재 방식에 걸쳐 더 광범위한 방식으로 동시대성에 맞선다.
2 아파트 없는 전시 : 로켓과 몬스터
정재호의 신작에서 그를 대표하던 아파트는 등장하지 않는다. 서울 도심 속 1960~70년대에 지어진 모더니즘 건물, 영화 스틸컷, 만화 속 로켓, 광고 이미지 그리고 세운상가의 옥상에서 내려다본 청계천 풍경이 다뤄진다. 그간 작업을 특징지어 왔던 중심된 소재가 빠진 듯해 의아할 수 있지만, 오래된 아파트는 2000년 후반부터 소재보다는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로 접근돼 왔다. 이러한 변화를 볼 때 작업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눠진다. 첫 번째는 2001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도시를 향한 시선이 점차 아파트, 건축 등 장소를 파고든 여정이며, 두 번째는 2009년을 기점으로 이러한 장소가 은유하는 시대적 배경에 주목해온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최근 또 하나의 변곡점이 등장하는데, 앞서 언급한 2017년의 《열섬》이다. 이 전시를 또 하나의 전환점으로 짚은 이유는 점차적으로 접근해온 장소, 시간이라는 두 축의 경계가 그리기를 통해 ‘무화’3되고 ‘기워지기’ 때문이다. 《로켓과 몬스터》는 제목만으로는 기존의 어떠한 전시와도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지금까지의 세 축이 서로 긴밀하게 연동된다.
먼저, 전시의 배경이 되는 근대성에 대한 성찰이다. 아파트, 건물, 사물, 장소, 시기를 막론하고 작업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시간적 축이 하나 있다. 작가의 시선은 근대화가 국가적으로 일어나던 60 – 70년대로 매번 돌아가곤 하는데, 과거를 기억하기보다는 오늘날 잔존하는 사회상을 바탕으로 그 퇴락한 풍경을 살피는 데 있다. 도시화는 급격한 근대화를 성취하는 핵심적인 계획이었으며, 건축물은 이러한 성장과 도약을 과시하고 홍보하던 시대의 파사드가 되어 왔다. 이번 신작에서 그가 건축과 더불어 주목하고 있는 것은 과학기술이 ‘조국근대화’의 기치 아래서 선전하던 사회적 상상이다. 대중과 소통하던 매체(영화, 만화, 광고)를 분석하면서, 집단적으로 꿈꾸었던 유토피아의 잔해를 파고든다. 《로켓과 몬스터》라는 다소 유치한 제목은 당시의 사회적 선전수단과 대중과의 관계로부터 파악된 것이다
제목이 은유하고 있는 ‘로켓’과 ‘몬스터’는 각기 근대성의 환상과 유령을 칭한다. 작가에 따르면, “로켓이 근대화 환상에 대한 극적인 픽션적 상징”이라면 “괴물은 근대화의 조류에서 밀려나 버려지는 존재”로 접근된다.4 그런데 전시에서 로켓의 등장은 처참한 폐허의 인상보다는, 구체적인 물질성을 지닌 대상으로 구현된다. 그 중심에 입체 작업인 달 착륙 우주선 로켓(〈조난〉, 2018)이 있다. 종이로 모형을 만들어 표면을 채색한 설치 작업으로, 포그머신을 통해 연기가 흘러나오는 이 우주선은 조난의 상태를 담고 있다. 얼핏 본다면 과학 체험관에서 등장하는 로켓으로 오인할 수도 있다. 그러한 이유는 어린이 만화에서나 등장할 만한 소박한 형태와 질감까지 아날로그적으로 재현한 방식에 있다. 이를 구현하는데 참조한 것은 작가가 유년기에 즐겨 읽던 만화 『요철 발명왕』이다. 1975년 만화가 윤승윤에 의해 발간된 책으로, 당시 과학기술을 향한 집단적 꿈과 환상에 대한 사회상이 담긴다. 이를 되새기는 정재호는 과학기술을 둘러싼 프로파간다와 현실과의 간극, 이러한 소망이 여전히 유령처럼 잔존하는 시대적 증후군을 살핀다.5
만화책을 보면 로켓 발사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다. 발명에 실패하는 것은 로켓뿐만이 아니다. 하늘을 나는 기계, 쓰레기서 추출한 석유, 우주식량, 타임머신 등 발명은 끝없이 실패한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를 상상력의 원동력으로 삼기에 만화는 그다음 또 다른 발명으로 이어지며 지속된다. 정재호가 그린 로켓의 달 착륙 장면은 만화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선 개천에 떨어지는 것으로 우스꽝스럽게 끝나지만, 이를 현실 속에서 상상한 작가는 로켓에 ‘조난’이란 상황을 부여한다. 역사와 진보의 노선 하에서 어디선가 표류하여 녹슬어가고 있는 로켓의 모습을 상상한 것이다. 이는 과학기술에 대한 염원도 상상력의 실현도 아니다. 오히려 국가적으로 장려됐던 과학기술이 대중에게 작동한 방식과 허상에 다가간다. 그림에는 미래를 향해 달려온 사회가 폐기해 온 미완의 상황이 담긴다. 작가는 상실된 집단적 유토피아를 조난당한 상황으로 그림으로써, 좌표를 잃은 시대의 일면을 가늠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3 평면의 조건으로서 입체 : 로켓은 어쩌다 입체가 되었나?
근대성에 대한 사유는 2009년 〈아버지의 날〉에서부터 본격화되어 왔다. 이후 〈혹성〉(2011), 〈먼지의 날들〉(2014)에 이르기까지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되짚을 새도 없이 “시간의 유속에 하염없이 부유하고 부식되거나 부패한 것”6을 성찰하고자, 이의 시발점인 60 – 70년대의 장면을 부단히 수집하고 그려왔다. 이때 선보인 한 그림에서 동일한 로켓이 발견된다. 달 표면에 불시착한 그림(〈발명왕〉, 2012)이 이번에 입체로 등장한 것이다. 전시에서 로켓은 세 번에 걸쳐 등장한다.7 하나는 앞서 언급한 〈조난〉이며, 두 번째는 빠이롯드 공장8에서의 〈비행사의 연구실〉, 세 번째는 세운상가에서 본 풍경 〈난장이의 공〉으로 이어진다. 로켓의 등장은 전시에서 동선을 구축한다. ‘날기를 소망하는 기계’에서 ‘로켓 실험실’로, 이를 통해 ‘밝은 미래를 꿈꾸는 소녀’가 등장하다, 이후 ‘불시착한 로켓’을 마주하는 식이다.9 이러한 흐름은 당시 대중적으로 성행하던 영화의 장면을 그린 작업과도 맥락을 함께 한다. 흐릿한 풍의 그림은 〈대괴수 용가리〉(1967), 〈외계에서 온 왕마귀〉(1967), 〈미워도 다시 한 번〉(1968) 등 신파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영화 이미지를 그리기로 재해석한 것이다.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정서적으로 호소하던 근대성의 희미한 잔상이 종이 위로 얹어진다.
그가 로켓을 종이로 만들 계획을 할 때, 나는 실패할 것으로 생각했다. 종이를 오려 구조물을 만들어 이를 차츰 실현하던 작가의 목소리는 작업 내내 상기되어 있어 이상할 정도였다. 불시착한 로켓에서 나오는 연기를 실험하기 위해 담배를 피워 연기를 내어보는 그는 엄청난 양의 작업에 지쳐 있다기보다 상상하던 것들을 실현해 내는 재미에 푹 빠져 보였다. 한 달, 두 달이 지나자 로켓은 조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듯, 낡고 방치된 표면의 흔적들이 한 겹 한 겹 입혀진다. 마치 요철 발명왕이 화가 정재호를 통해 부활한 것 마냥. 로켓이 하늘에서 추락해 개천에 빠져 막이 끝나도, 그다음 막에서 그림을 시작하는 것이다. 로켓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입체의 대상성이다. 로켓을 구현하기 위해 공간적 상황과 오브제의 물성을 극대화시켜도 될 텐데, 그는 굳이 종이 위 채색이라는 회화의 전통적 방법론을 고수한 것일까?
입체 작업의 시작은 그가 시민아파트를 조사하며 그릴 때인 2005년으로 거슬러 간다. 개발의 논리로부터 사라져온 낡은 아파트를 기념하고자 종이 기념비를 생각한 것이다. 2005년 〈대광맨숀아파트〉를 부조, 〈중산시범아파트〉를 입체로 제작한 것을 계기로 하여, 이후 〈아현아파트〉(2006), 〈시민아파트를 위한 기념비〉(2006), 〈안암아파트〉(2006), 〈남대문빌딩〉(2007) 등 기념비로 만들어 왔다. 이러한 입체 작업은 자본의 논리로부터 구시대의 괴물로 치부되고 폐기돼 온 장소에 대한 반어적 기념비이다. 이번 전시에서 〈조난〉은 상실과 망각의 기념비적 재현에 대한 작가의 의지를 공유한다. 이 모두 다 근대화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둘 사라질 수밖에 없는 낡은 시대의 괴물들이다. 그가 입체를 만든 방식은 회화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건물의 프레임을 그리면서, 그 위로 표면과 미세한 구조를 더해 나가는 과정이다. 〈조난〉의 경우에는 아파트 입체보다도 더 정교한 형태와 표면의 공정을 거친다. 하드보드지를 잘라 내부 틀을 만들고, 그 위로 종이 표면을 입힌 다음에 채색을 더하고, 시간의 물성을 살리기 위해 여러 번 칠하면서 디테일을 덧붙여나간다. 그렇게 건물의 견고함, 로켓의 견고함은 평면과 입체의 구분 없이 서로 동일하다. 흥미롭게도 대상의 견고함은 전체적인 구조와 더불어 수없이 입혀진 붓질의 레이어와 디테일에서부터 다가온다. 구현된 로켓의 입체성은 사방에 걸쳐 회화를 지시해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가 로켓을 경험하는 방식은 여느 입체와는 다르게 이 대상의 구석구석을, 누적된 시간의 레이어를 응시하여 표면을 파고들고자 하는 감상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대상을 360도로 회전하며 마주하는 각 표면마다 시선이 맺히는 것이다. 이를 보고 있노라면, 대상에 부여된 평면과 입체라는 이분법적 형식까지도 까맣게 잊게 된다. 이때 평면과 입체 사이에서 독자성을 규명하는 것, 무엇이 회화인가를 규명하는 것이 감상의 핵심은 아니다. 이 둘의 관계로부터 도출할 것은 “리얼리티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어떠한 그리기를 모색하는가?”라는 물음에 있다.
4 시점의 재구성, 정면승부
리얼리티의 추구는 대상을 향한 정재호의 시점에서부터 발견된다. 작업을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림에서 강조되는 하나의 시점이 있다. 바로 정면성이다. 주체의 관점에서 대상을 포획하는 원근법을 거부하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자 정면의 구도로 그려왔다. 여기서는 대상을 파악하는 화가의 시점보다는 본래의 대상을 그려내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다. 그는 초기 작업부터 꾸준히 이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데10, 시야의 한계상 인식이 불가능한 시점이기도 하다. 건물의 파사드를 균등하게
표현하기 위한 노력은 사진을 이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눈에 일일이 담을 수 없는 거대한 대상을 파악하는 과정은 작업실에서 사진을 세부적으로 관찰하는 것으로 지속된다. 현장의 감흥으로부터 사진에서의 사실적 요소를 더하고, 시점의 왜곡까지도 수정해 나가며 대상을 즉물적으로 그리는 방식이다.
건물의 리얼리티는 원근법의 포획이 아닌 표면의 돌출된 구조로부터 온다. 이때 작가가 관심을 갖는 것은 구조와 표면에서 다가오는 파사드의 입체성이다. 일차적으로 이러한 입체성은 건물의 구조(빔, 벽, 창호)를 기반으로 강조된다. 그다음으로는 파사드의 그리드에 개입하는 개별적이고 집합적인 묘사이다. 그리드가 근대의 기획, 아버지의 법과 규율을 상징한다고 볼 때, 이에 얹혀 지는 디테일은 지배적 형식을 전복시키고 구조에 부여된 힘을 다중으로 분산시킨다. 이는 《열섬》에서 돌출된
파사드가 전복해 보이는 평면성과도 연관된다. 《로켓과 몬스터》에서의 건물 작업은 10년의 세월을 두고 〈황홀의 건축〉(2007)과 《열섬》사이에 걸쳐 진다. 근대의 표상인 그리드와 이로부터 소거된 유령과 같은 시대의 잔상이 서로 포개지면서 건물의 리얼리티가 서서히 돌출된다.
건축물은 그가 서울의 도심을 산보하던 중 시선을 사로잡힌 것이다. 주로 60 – 7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자본주의 산업화의 상징물인 세운상가, 삼일빌딩을 선두로 하여 유행하던 건축 양식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가 그린 건물은 당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비적 건축이 아닌, 일상 속에서 별 의미 없이 존재해온 평범한 건물이다. 전시의 비화를 하나 말하자면, 작가는 이번 전시의 제목을 ‘평범의 건축’과 ‘로켓과 몬스터’ 둘 사이에서 꽤 고민했다. 사실 ‘평범의 건축’은 이번 신작만이 아닌, 그의 작업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주제라 할 수 있다. 그 자취로 〈황홀의 건축〉은 평범한 건축에 압도된 작가의 시선, 대상에 대한 경외심을 전시 제목으로 담고 있다. 그렇기에 ‘평범의 건축’과 ‘황홀의 건축’은 서로 동음이의어나 다름없다.
전시에서 총 7점의 건물은 제목부터가 평범하기 그지없다. 〈남대문 빌딩〉, 〈노들회관〉, 〈인사동 빌딩〉, 〈청파로 빌딩〉, 〈화남 빌딩〉, 〈소공로 99-1〉, 〈소공로 93-1〉. 건물의 실제 명칭이며, 이름이 없는 것들은 주소로 제목을 붙였다. 작가는 이러한 관심에 대해, “근대화의 한쪽 부분에서 이 관계가 건축에도 있는 것 같다. 모더니즘 건축과 그것의 카피, 아류, 사생아, 모방, 혼성 등”11이라 부연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생각의 잣대를 대상에 들이대지는 않는다. 주관적인 감정을 억제하고 최대한 사실적이고 정밀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집중되는 것은 평범한 형태를 견고하게 이루고 있는 표면의 요소이다. 격자형, 수직형, 수직수평형 등 건축물의 몸체를 그리드로 세운 후, 페인트, 타일, 벽돌, 석재 등의 마감까지 세심하게 표현한다. 평범한 건물의 비범함은 ‘형식적 조건’과 ‘사회적 코드’가 표면의 물질성에 정교히 스며들면서 서서히 드러난다.
5 유령과의 대결, 물질성과의 싸움
현대 건축은 자본의 속도로부터 매 시기마다 리뉴얼되어 왔다.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표면을 추구하는 건축은 통제되기 어려운 사적 공간을 깔끔하게 가려 보인다. 최근의 건물에서 파사드의 돌출된 형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표면은 더 평평하고 균질한 톤으로 무장된다. 이를 비교해볼 때 60 – 70년대 건물은 그 자체로 구식이자 너저분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작가는 파사드에 존재하는 시간의 흔적들을 표면의 생생한 요소로 불러일으킴으로써, 현실로부터 소멸되어가는 유령성에 강렬히 저항한다. 이는 오늘날 과거를 소환하는 방식인 폐허, 노스탤지어의 감성적 사태에도 맞선다. 사라져가는 근대의 자취에 대한 애잔함보다는 그 존재의 ‘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문제의식은 동양화가로서의 정체성을 고수하며 체감한 ‘물질성과의 싸움’과도 관계된다. 그가 “물질성의 죽음을 재현하는 형식”12이라 성찰하듯, 종이에 먹어 들어가는 대상을 일일이 드러낸다는 것은 유령과의 지루한 싸움일지도 모른다. 동양화의 숙명적인 유령성을 깨달은 그가 그리기에서 취한 태도는 대상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화면에 거주시키는 것이다.13 여기에는 자신의 신체적 중력까지도 조절하여 대상을 객관적으로 그리어, 현실을 낱낱이 호명하려는 기록화가나 장인과 같은 의지가 담긴다. 이러한 ‘노동집약적’ 그리기, 앞서 말한 ‘시대착오적’이고 ‘구시대적’인 그리기는 유령성에 대항하는 화가의 수행방식이다.
글의 도입에서 던진 질문 “그의 그리기는 시대착오적이지 않은가?”로 다시 돌아가 보자. 정재호는 분위기, 아우라, 정취, 메시지와 같이 회화가 전환하는 것들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새로운 시각적 감각, 유행하는 담론이나 동시대성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이보다는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방법으로서, 회화 자체에 대한 고민보다는 회화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14를 성찰한다. 그의 노동집약적인 그리기, 대상을 재현하는 충실한 그리기는 궁극적으로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대상, 그 리얼리티를 향한다. 작가는 ‘회화성’, ‘회화’로 이어지는 의심의 징검다리를 묵묵히 가로지르며 현실에 닿기 위해 부단히 그려 왔다. 개념과 형식이 아닌, 회화가 기술하는 리얼리즘에 주목한 것이다. 동시대 미술이 세련된 언어와 형식으로 세상을 매혹할수록, 그의 그리기는 더 시대착오적인 방식으로 대상에 몰두한다.
이러한 정재호의 그리기는 조르쥬 페렉(Georges Perec)15이 상실에 저항하여 세부적이고 강박적인 글쓰기로서 묘사한 장소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유년기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시각적으로 기술한 상세한 문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가 하나의 대상을 파악하기에 앞서 사소한 흔적까지도 일일이 열거한 그리기는 기억상실과 같은 근대사, 가까운 과거가 잔해로 사라져가는 동시대성에 맞선다. 지배적 담론에서 주변화된 현실을 밝혀 보이는 동시에 표면에 방치된 일상적 서사를 시선의 체계로 소환시킨다. 작가는 이렇게 장소상실을 경험하고 있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표면의 물질성을 생생히 보여줌으로써, 망각과 상실의 증후군에 꿋꿋이 도전한다. 이로써 그는 반-동시대적이자, 반-회화적, 시대착오적 방식으로 ‘동시대성’의 오류와 한계에 맞서는 ‘과도한, 과잉의 그리기’를 지속해 나간다.
6 난장이와 거인의 세계 : 세운상가를 둘러싼 풍경
이 사회는 괴물덩어리였다. 그것도 무서운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괴물덩어리였다. 동생과 동생의 친구는 저희 스스로를 물 위에 떠 있는 기름으로 보았다. 기름은 물에 섞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도 합당한 것은 못 된다. 정말 무서운 것은 두 사람이 인정하든 안 하든 하나의 큰 덩어리에 묻혀 굴러간다는 사실이었다.
– 조세희, 『육교 위에서』16
6월 어느 날 세운상가의 옥상을 찾았다. 그가 마지막까지 매진하고 있는 한 풍경을 보기 위해서이다. 이제 막 밑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 거대한 화면(〈난장이의 공〉, 2018)을 바라본다. 한 달은 족히 넘게 걸릴 풍경이다. 지난해 이맘때쯤에도 그는 그림 앞에 바짝 붙어 건물을 그리고 있었다. 얼룩, 먼지, 녹, 때, 눅눅함, 그림자까지도 종이에 서서히 얹히기 위해 하나의 그림을 석 달간도 붙잡고 있었다. 그때를 떠올려 보자면, 지금의 각오가 그리 비장한 것도 아니다. 작업실 바닥에는 한 장의 사진이 출력되어 있다. 세운상가에서 내려다본 청계천 일대의 풍경이다. 높은 건물들이 종로를 에워싼 가운데 세운상가의 주변으로만 낮은 지붕들이 빼곡하다. 도심 한가운데, 그것도 서울 한중앙에 아직 이러한 장소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지난 50년간 도시에는 낮은 집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거대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거인들 사이에서 남루한 건물들은 자연스럽게 난장이가 되어 버렸다. 난장이 집 마냥 바닥에 바싹 붙은 낮은 지붕들을 옥상에서 바라본다. 정재호가 그린 2018년의 서울 한복판이다.
“옥상에 올라가 봤더니 주변의 슬럼화된 구 상권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저곳은 세운상가가 지어질 당시에도 슬럼이었고 지금도 슬럼인 셈이다. 그에 반해 새로 만들어진 데크는 너무 반듯하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심장부에 존재하는 폐허 같은 풍경이라니.”17
작가가 놀라워하는 세운상가 주변의 풍경이다. 1967년에 세워진 세운상가는 발전과 성장을 과시하듯 당시 서울에 괴물과 같이 등장하여, 시대의 콘크리트 기념비로 인식돼 왔다. 한때는 “도심을 가로지른 괴물”18이라 불리며 철거 계획까지 추진되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건물이다. 하나의 건물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주변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세운상가는 주변의 슬럼가와는 대립적 구도로 근대화를 선전했지만, 5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이 또한 구시대의 기념비로 치부될 뿐이다. 난장이와 구시대 거인은 가파른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운명 공동체나 다름없다. 이들은 스케일과 외관상 서로 대립적인 풍경으로 보이지만, 이제는 모두 과거의 난장이일 뿐이다.
시민에게 개방된 세운상가의 옥상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맞은편으로 종묘가 보인다. 서울 한복판에서 몇 층만 올라가도 이렇게 시야가 뻥 뚫린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도시전망을 보는 명소로 알려진 종로타워가 33층, 63빌딩이 63층, 롯데타워는 123층, 심지어 타워팰리스도 68층이다. 이러한 고층 타워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도시를 빼곡한 빌딩 숲으로 조망한다. 건물이 하늘로 높이 솟을수록 난장이 집은 인간의 시선에서 멀어진다. 애당초 개발논리로 인해 고층 빌딩 주변으로 존재할 수조차 없다. 정재호가 그리고 있는 풍경은 자본에 점유된 도시로부터 배제되고 사라져온 것들이다.
세운상가를 가운데 두고 그 주변으로 슬럼과 같은 가건물들이 빼곡하다. 세운상가 주변으로 1900 – 70년대, 그 바깥으로 이후의 건물들이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풍경이다. 저 멀리 종로타워가 보일 때쯤 각종 기업과 호텔, 오피스빌딩이 줄을 잇는다. 90년대 후반 이 건물이 지어질 때 사람들은 종로의 괴물이라 우려하면서도, 완공 시 스카이라운지가 있는 맨 꼭대기 층에 올라가 도시 전망을 살펴보기를 희망했다. 인간의 이중성은 파괴와 생성의 순간에 직설적으로 드러난다. 세운상가 옥상의 좌측으로는 종로 타워를 너머서 시야가 광화문을 향해 나아가고, 우측으로는 광장시장을 지나 동대문 쇼핑센터까지 펼쳐진다.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 장대한 파노라마를 두고 작가가 그리는 풍경은 우측 동대문을 향한 곳이다. 도시의 스펙터클과 대립의 풍경에 관심이 있었다면 반대편인 종각 방향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고자 한 것은 도시의 조망하는 것도 스펙터클을 재현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이 압도당한 대상의 리얼리티를 조금이라도 현실에 가깝게 그리는 것일 뿐이다.
7 디테일과 파노라마 : 시선의 정치를 전복하기
“이쪽이 훨씬 더 디테일들이 많다. 이런 디테일을 그리기 위해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붕 위에 거의 내뱉다시피 한 디테일들.”19 직관적으로 나온 답변이었다. 우측 풍경을 선택한 것에 대한 나의 질문에 그는 잠시도 머뭇거림 없이 “디테일”을 말한다. 그가 압도당한 지붕의 풍경은 매끈한 평면성과는 거리가 멀다.20 누더기처럼 덧대어지고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풍경이다. 평면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시선의 체계로부터 발생한다. 세계는 결코 평면적이지 않다. 그의 입체 작업도 평면이 압축하고 있는 리얼리티를 되짚는 역설적 표현일 뿐이다. 천 쪼가리를 기워 붙이듯 이어진 슬레이트, 보수할 새도 없이 비닐로 덮어진 지붕, 엉클어진 전선과 고철더미, 닳고 닳은 기계와 무쇠 조각들까지. 흰색이었던 지붕은 갈변하여 짙고 어두운 색이 되었고, 얇은 페인트 막이 녹아내려 간 자리에서 또 다른 녹(綠)색이 생성된다. 건물의 파사드에서도 가려진, 지붕 위에서 묵묵히 시간의 풍화를 버틴 색이다. 녹슨 지붕의 녹물은 새는 빗물과 함께 건물 내부로 스민다. 녹아내리는 물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근현대라는 비대한 노선을 견뎌온 낮은 건물들은 치열하게 버티어온 역경의 시간을 내뱉듯 지붕 위로 노출해 보인다. 이는 동시대로부터 폐기되어 온 현실의 파사드나 다름없다. 가장 낮은 곳에서 생존해온 녹슨 파사드라 할까.
거인증에 걸린 현대도시는 메가톤급 규모와 초고층으로 너저분한 현실의 리얼리티를 은폐해 왔다. 이러한 건물에서 보는 장엄한 파노라마에서 난장이 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21에서 폭로된 사회의 모순과 대립은 여전히 우리 현실에서 반복 중이다. 재개발 문제와 소외, 콘크리트와 슬레이트, 단층과 고층, 난장이와 거인 같은 대립의 풍경은 〈난장이의 공〉에도 담긴다. 하지만 작가가 이를 그리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를 감동시킨 것은 대립의 풍경이 아니라, 콘크리트 기념비를 둘러싸고 그 주변으로 평범한 건물들이 서로 집적하며 생존해온 풍경이다.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의미의 세운(世運)상가는 야심 찬 근대의 프로젝트로 당대를 매혹했지만,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오늘날 이곳은 쇠락과 몰락의 시대를 상징할 뿐이다. 이러한 몰락의 장소를 지탱, 지지하는 것은 이 주변에서 생존해온 녹이 낀 난장이 건물들이다.
8 자본의 파노라마에 맞선 도시풍경
옥상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은 장대한 수직적 거리를 넘어 건물의 표면, 최대한 아래로 낮게 밀착된다. 그의 시선은 도시의 화려하고 장대한 파노라마의 스캐닝 방식을 거부한다. 오히려 도시 전망과 개인의 신체, 거시감과 미시감 사이의 거리감을 가로질러 대상의 표면에 가닿는다. 시선의 권력을 없애고 대상의 존재를 도처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리얼리티는 시각 체계에도 깊숙이 관여한다. 언젠가 그와 한 작가의 파노라마 사진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재커리 폼왈트(Zachary Formwarlt)22가 선보인 19세기 파노라마 사진은 당시의 도시를 엄청난 해상도로 보여주며, “이 사진이 도시전망을 담는가 혹은 새로운 자본의 체계를 보여주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파노라마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정재호의 작업에서도 성찰되어 왔다. 그가 〈난장이의 공〉으로 파노라마에 이르기까지는 여러 도시풍경이 있어 왔다. 이에 대한 관심사는 그의 첫 개인전인 2001년 남산서 본 서울 야경을 시작으로, 내부순환도로, 인천, 청계천, 해방촌 일대의 풍경으로 이어져 왔다.23 사라지는 장소를 지켜보는 작가의 복잡한 심경과 애틋함이 담긴 이 파노라마들은 거대한 전경을 구축하고 있는 집단적 실체를 집요하게 드러내는 데 점차 집중된다.
〈난장이의 공〉은 13년 만의 파노라마이다. 2005년 해방촌을 그린 〈강북찬가〉가 파노라마로는 마지막이었다. 이후 정재호의 시선은 도시 밖이 아닌, 도시의 내부를 파고들었다. 물리적 풍경들이 급격하게 변화되는 현실로부터 그는 도시 안을 거닐며 시민아파트를 그리고, 근대 이후 남겨진 건물의 잔해를 그려왔다. 그 시기 동안 오래된 아파트, 60 – 70년대의 건물, 낡은 사물, 그리고 집적된 건물의 파사드가 등장했다. 허물어지는 시간과 장소를 기록해오던 그의 시선이 집결된 작업이 바로 〈난장이의 공〉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도시풍경의 구조를 지니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지붕을 세부적으로 묘사하는 데 집중된다. 누더기처럼 이어진 지붕을 마주한다는
행위는 도시 이면의 리얼리티를 직면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도시의 실체, 자본의 폐허, 파노라마적 주체의 허위, 동시대성에 대한 반격, 누추한 사물의 대상성을 정립하는 것과 관련된다.
9 현실에 복무하는 회화, 리얼리즘
“어찌 보면 회화란 것을 자본주의가 무서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온갖 비릿한 냄새와 땟국물이 흐르는 동물들이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코카콜라의 백곰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24
도시를 내려다보는 조망은 환경에 대한 총체적 시각을 제공한다. 이러한 시선은 주체(보는 이)가 자본, 기술, 권력의 이데올로기의 한 중심에 있는 것 같은 환상과 착각을 준다. 심지어 최근에는 구글 어스와 같이 파노라마 뷰를 통해, 장소를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가짜 체험도 제공한다. 정재호의 도시 풍경은 이러한 시선에 결합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우리의 현실을 이루고 있는 물성과 감각의 실체를 마주하게 한다. 그의 그리기는 일차적으로 대상을 거리 두고 응시하고자 하는 주체의 권위를 무력화한다. 그리고는 대상을 지나칠 정도로 세부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이를 총체적이고 매끈한 감각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또한 좌절시킨다. 보는 이의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과도한, 과잉의 그리기’는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육화된 자본의 시선과 감각에 도전하는 데 있다. 이러한 그리기는 인천에서 청계천으로, 오래된 아파트와 건물의 파사드로 이어지다, 홍콩에서의 누적된 건물 파사드를 거쳐, 서울 한복판에 도달했다.
〈난장이의 공〉은 성장과 개발의 우위로부터 한없이 낮아진 현실의 풍경을 상세한 그리기로 ‘기워낸(sewn together)’25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하늘로 쏘아진 로켓은 현실에서 매개될 수 없는 집단의 꿈이자, 도시의 가장 낮은 지붕 아래 난장이가 하늘 높이 쏘아올린 공이다. 거인의 시선과 난장이의 현실, 그리고 몬스터의 실패한 비상이 엮어진 풍경이야말로 동시대적이지 않은가! 혹자는 그가 왜 로켓을 입체로 만들었는지, 향수와 노스탤지어에 빠진 것은 아닌지, 대상은 왜 이리도 구구절절 묘사한 것인지 이 모든 상황에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 일련의 과정을 조금이나마 근접해서 지켜본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한 가지 밖에 없다. “그저 그림을 보자.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자본과 물신의 시대에 있어 가장 폄하된 가치, 변덕 많은 동시대성으로부터 몰락한 대상의 리얼리티를 증명하는 데 있다. 그가 실천하고 있는 ‘시대착오적 그리기’는 누락된 대상에 생존하는 리얼리티를 생생히 보여줌으로써, 상실의 감각을 호소하는 동시대의 특권적 시선을 붕괴시킨다.
정재호는 폐허와 상실이라는 시대적 증후군까지도 자본화하는 레트로 미학의 허구성에 맞서, 치열한 현실의식을 바탕으로 동시대성에 봉인된 리얼리티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는 파사드(표면)에 맺힌 집단적 현실을 그리기로 증명해 보이며, 회화의 리얼리즘을 복권하고자 한다. “바다에 떠 있는 기름을 사람들은 보지 않으려고 한다.”26 소설의 한 문장처럼, 화가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표면에 일렁이는 기름의 형태와 찌든 색, 그리고 악취까지도 면밀히 파고든다. 이렇게 그는 오늘날 자본화된 시각과 제도화된 기억에 맞서 대상의 실체를 밝히고, 현실과 회화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자 노력한다. 현실로부터 멀어진 우리의 시선과 감각을 복귀시키기 위해, 이토록 간절하게 그리기를 수행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