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진

백현진2
백현진(1972~)은 음악, 미술, 문학, 영화를 오가며 가수, 작곡가, 화가, 퍼포먼스 아티스트, 시인, 배우, 감독으로 일하는 ‘전방위 예술가’이다. 몇 년 전까지 작가의 회화에 자주 등장했던 익명의 초상(肖像)이 평범한 사람들의 황량한 삶의 분위기에서 유래했듯 그는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불안정한 모습을 관찰하면서 직관적으로 하염없이 붓질한다. 그림의 표면에 나타난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흔적들은 ‘온전할 수 없는’ 감정과 ‘체계 없는’ 생각으로 구성된 우리의 보편적인 삶과 닮아있다. 현란한 색과 소리, 몸짓이 서로 간섭하며 기묘하고 복잡다단한 풍경을 자아낸다. 이 안에서 우리 삶과 일상에 스며있는 사소하고 평범한 생각들에 의지하며 각자의 도상과 지표를 찾거나 부질없이 가로질러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도 즐거운 일이다.

신작 <실직폐업이혼부채자살 휴게실>은 전시장을 하나의 도피처이자 휴게실, 명상의 장소이자 복합문화공간으로 변모시킨다. 한국사회 곳곳에서 도미노처럼 발생하는 병리 현상, 처참하고 슬프고 쓸쓸한 이 모든 조건은 나의 이야기이자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그의 ‘서울식 휴게실’에는 어느 남성의 삶에 관한 가상의 시나리오 ‘시’가 놓인다. 일인다역을 맡은 작가는 공간을 구성하는 집행자와 사용자를 넘나들며, 관객들을 그 장면에 자연스럽게 유입시켜 한편의 극을 경험하고 완성시켜나간다.

Interview

CV

<주요개인전>
2017 그 근처, 페리지 갤러리, 서울, *performance
2016 들과 새와 개와 재능, PKM 갤러리, 서울, 한국
2013 초이 앤 라거 갤러리, 쾰른, 독일
2012 43 Inverness Street Gallery, 런던, 영국 *performance
2012 옆집 그림, 꿀&꿀풀, 서울, 한국 *performance
2011 열 세점 + 보너스, 두산 갤러리, 서울, 한국
2010 디 엔드, PKM 갤러리, 서울, 한국
2008 산만과 실체,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한국 *performance
2007 형용사적 모습, 비아파리니, 밀라노, 이탈리아 *performance

<주요단체전>
2017 실직폐업이혼부채자살 휴게실, 올해의 작가상 2017,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한국 *performance
2016 창동레지던시 입주보고서 2016,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서울, 한국 *performance
2016 돌아와요 부산항에, 베스트포센 미술관, 베스트포센, 노르웨이
2015 Have a Good Day, Mr.Kim!, 미하엘 호어바흐 재단, 쾰른, 독일
2015 그림/그림자, 플라토(구 로댕미술관), 서울, 한국
2014 82-33-44, 초이 앤 라거 프로젝트, 파리, 프랑스
2010 플라스틱 가든, 민생현대미술관, 상하이, 중국
2007 Elastic Taboos, 쿤스트할레 빈, 빈, 오스트리아
2006 Alllooksame? / Tuttuguale? Art from China, Japan and Korea, 산드레토 레 레바우덴고 재단, 토리노, 이탈리아
2006 EgoMANIA, Galleria Civica, 모데나, 이탈리아
2001 Active Wire, 아트선재센터, 서울, 한국

<소장처>
서울시립미술관, 한국

<레지던시>
2016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한국

Critic 1

호경윤 (아트저널리스트)

뮤지션으로 먼저 알게 됐던 백현진의 첫 그림을 본 것이 2004년 쯤인 것 같다. 그리고 2008년 그의 개인전도 봤다. 한때 그 자신을 문학, 음악, 미술을 하는 청년이라고 소개했던 그는 이제는 스스로를 ‘전방위 아티스트(Omnidirectional Artist)’라고 불리고 있다. 과거 그의 음악, 다시 말해 어어부프로젝트의 팬이었던 나 역시 예전에는 그가 다양한 장르의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은 그의 다양한 활동이 하나로 보인다. ‘전방위 예술’라는 말의 정의를 나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것이 저마다 다른 업계일 수는 있으나, 일련의 그가 펼치는 활동들은 각기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창작’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나오는 분출의 결과물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백현진은 지난해 개인전 <들과 새와 개와 재능(Field, Bird, Dog and Talent)>을 열었다. 그의 회화 및 드로잉 신작 25점을 선보이는 동시에 한 달 여의 전시 기간 동안 작가가 매일 마다 나와서 벽을 보고 선 채로 즉흥적인 사운드 퍼포먼스 <면벽(Face to Wall)>을 진행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무대 위에서 노래도 하고 그림도 그리는 백현진만이 작동시킬 수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심지어 그가 퍼포먼스를 하지 않는 나머지 시간에 그 전시를 봐도 그의 그림들은 충분히 퍼포먼스적인 상황에 놓여져 있는 기분이 든다.
왜냐하면 백현진이 펼쳐 온 창작 활동에서 일관된 것은 ‘몸’이기 때문이다. 공연에서 하는 퍼포먼스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했던 연기도 그렇지만, 그의 그림조차 캔버스에서 움직이는 붓놀림, 즉 그의 몸이 느껴진다. 또 그가 부르는 노래는 몸 속 깊은 곳에서 끌어낸 어떤 울부짖음에 가깝다. 과거 미술평론가 이선영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야기를 덧붙이며 그의 작품을 두고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위계화되지 않은 몸의 가변성과 유동성을 보여 준다. <천 개의 고원>에 의하면 몸체는 이미 밸브, 체, 수문, 주발이나 연통관의 집합에 불과하다. (…) 위계화된 유기체의 폭발은 죽은 몸이 아니라. 더욱 살아 있으며 다수성으로 가득 찬 몸, 즉 ‘기관 없는 몸체’이다.”
한편 그의 작업에서 위의 ‘몸’ 이야기와는 상반되는 또 한 가지 요소, 즉 변수는 그의 작품 제목이다. ‘뇌신경학과 입자 물리학을 거쳐 다시 괴석이나 괴목 따위를 경험한 이후 어느 동양인에 의해 나올 수 있는 모던 토킹(Modern Talk Coming from an Asian who Has Experienced Strange Stones and Trees After Neurology and Particle Physics)’ ‘벡터건 픽셀이건 나발이건(Vectors or Pixels or Whatsoever)’ ‘당신이 어떤 영화에서 본 듯한 외모를 가진, 선천적으로 굉장히 긍정적인, 하나 독거노인처럼 굉장히 막막한: 빈곤한 청년(A Young Man with a Face Reminiscent of someone from the Movies, By Nature Positive, But Like an Old Man Living Alone, Very Poor and Forlorn)’ 등 상당히 문학적인 표현은 아직 채 정리되지 않은 산만한 머릿속 풍경과도 같다.
과거 그가 출간했던 아트북 <오르가니즘 메카니즘 블러리즘> 중에서 맨 첫 페이지에 실린 드로잉을 보면 ‘글’, ‘그림’, ‘음악’이라는 단어가 삼각관계로 엮여있다. 그의 예술적 근간은 머릿속에 정리되지 못한 채 무한하게 생성되고 엉켜가는 산만한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러나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마치 ‘병렬 연결’ 식의 그의 창작물에서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과 꿈틀대는 잠재력을 느낀다. 전시가 열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역시 근미래의 예술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백현진을 추천하며, 또한 <올해의 작가상> 이라는 주어진 경쟁적 구도 속에서 그가 만들어 낼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궁금하다.

Critic 2

어둠은 당신의 촛불

맹지영(두산갤러리 큐레이터)

“우리는 아직 한 번도 세상의 모든 문을 두드려본 적 없이 스스로 세상을 떠난다.”

라이너 쿤체 <자살>

 

1. 시작과 끝은 같다

아침. 갑작스런 문자. 지인 아버지의 부고. 누군가의 죽음은 내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시간을 확인시켜 준다.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시간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잴 수 없는 죽음의 무게. 단어의 허무함과 속절없음. 곧 닥쳐올 부재의 두려움. 병으로 인한 서서히 다가가는 죽음에서도 죽음을 앞둔 당사자와 그 주변의 사람들은 그렇게 서서히 같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에 앞서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도, 죽음의 전조를 느끼며 한 순간에 해치울 죽음을 향해 다가간다.
자신을 짓누르는 사회의, 도시의, 가족의 무게에 오늘은 술 한 잔으로 잠시 망각의 숲을 다녀왔다가도 내일은 숨이 턱턱 막히는 현실에서 되도 않는 욕을 퍼붓는다. 세상은, 내가 어렸을 때의 해맑음, 화사함과 두려움, 희망으로 점철되어 있는 단순한 공간이 아닌, 한없이 복잡하고 어이없고 절망적이며 희망차며 좌절을 주며 이해하지 못하는 것 투성이다. 아니 어렸을 때도 세상은 성인이 된 후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그대로였고, 어린 나에게는 무지와 망각과 외면이 만든 좁은 길이 있었을 뿐이다. 성한 곳이 없는 상처투성이의 표면, 기억과 상처가 덮이고 지워지고 다시 그려진 뒤에 남은 흔적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 것일까?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져 주면서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후벼 파내는 날카로움은 위안을 주면서도 뭉클하게 만들고, 생각을 복잡하게 하면서도 한 순간에 지워버린다. 처절한 고통은 침묵하게 하고, 차오르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아무것도 밖으로 꺼낼 수 없도록 만든다. 작은 한숨을 내쉴 수 있는 순간이 오게 될 때에는 이미 그 슬픔에 거리를 둔 후일 것이다.

 

2. 한국의, 어디선가, 여기

풍경에 대해 생각해 본다. 서울. 끊어질 듯 이어져 있는 빽빽하게 밀집된 도시. 무엇이든, 부수고, 파헤치고, 다지고, 뒤덮고, 올리고, 닳고, 또 다시 반복. 몇 십 년 전에 깔렸을 보도블럭 깨진 공간의 공백은 시멘트로 엉성하게 덧 발리고, 차선을 그리는 도중에 흘렸을 몇 방울 도료의 흔적. 다닥다닥 붙어있는 다세대 주택 밀집지역 좁은 골목 안에, 아직 쓰레기차가 오지 않아 쌓여있는 쓰레기 봉지들 조합. 그 지저분하고 덕지덕지한 표면을 비집고 나온 선들과 스며들어 보이지 않았던 색들.
그렇게 덕지덕지.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

모두 다른 환경에서 자라났다고는 하지만, 그 시대에 국가가 가지고 있었던 기조, 시스템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리고 그것은 정말 의식하지 않았던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내 몸 안에 박혀 나의 일부가 된다. 현실의 무거움, 복잡함 부당함, 억울함 등이 경중을 얘기할 수 없을 만큼 자리를 돌려가며 이야기를 하는데, 답답하면서도 숨통이 트이기도 하고, 짜증이 나다가도 위안을 받기도 한다. 누군가를 만나서 삶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의 무의미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사회 시스템에 분노하며 술을 진탕 마시고 괜히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러 보기도 하고, 언제부터 행동가였다고 광장에 나가 다수의 물살에 슬쩍 몸을 흘려 넣기도 한다.

사각의 보도 블럭, 사각의 타일, 사각의 건물, 사각의 화면……사각의 방……다시 그림. 성한 곳 하나 없는 거칠거칠하고 조각난 세상들이 화면 안 여기 저기 발려있다. 거칠지만 매끄럽고, 무심한 듯 정성스럽게 칠해진. 때론 모났던 모서리를 둥그렇게 다듬어주기도 한다. 발리고, 덧 발리고, 덮이고, 그리고 다시 지우고. 세상을 향한 창은 이 네모난 화면 안에서 생겼다 사라지고 다시 생긴다.

하루에도, 단 몇 시간 안에도 무수히 많은 감정 변화가 일어나듯이 그렇게 기쁨과 쾌감, 허무함과 무기력함, 아픔과 슬픔, 포기하고 싶은 절박함이 나타났다 사라짐을 반복한다. 부분으로서의 삶과 전체로서의 삶이 다르지 않다. 그림은 부분이기도 하고 전체이기도 하다. 화면 어디에서도 온전치 않음을 피력하며 오히려 위로를 툭 건넨다.
아직은 수면 위에 있다.

 

3. 어둠은 당신의 촛불 1

다시 아침이 왔다. 우글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또 몸을 던져야 한다. 매일 반복되는 이 패턴이 매번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아직 세상에 무뎌지지 않은 탓이리라. 그래도 이쯤 되면 무감각해질 만도 한데, 집 앞 조금씩 다른 크기의 쓰레기봉투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듯 어깨를 나란히 기댄 모양새는 어제의 그것과 또 다르다. 골목 끝 슈퍼 앞 보도블럭의 깨진 금은 하루가 다르게 틈이 벌어져 그 아래 맨 살을 다 드러내놓고 다른 생명을 조금씩 내보낸다. 골목을 지나 큰 길가로 나가기 떡 하니 동네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듯 위용을 자랑하던 전봇대는 어제 저녁의 늠름한 모습이 무색하게 밋밋한 회색 위로 덕지덕지 붙은 자극적인 색깔의 대출 광고전단으로 오늘 하루를 미리 얘기해 주는 것만 같다. 그게 뭐였더라. 학창시절 하교 길에 갑자기 쏟아진 장대비 속을 미처 우산을 준비해 가지 않아 온 몸으로 맞았던 기억. 교복이 흠뻑 젖어 어머니께 무거운 빨래 감을 안겨드려야 하는 걱정보다 비를 맞았을 때의 그 짧은 해방감이 금방이라도 뭔가 쏟아질 것 같은 회색 빛 하늘과 회색 전봇대를 순간 스쳐 지나간다. 그때가 봄이었던가 아님 가을이었던가. 비를 맞았어도 춥지 않았었으니 여름이었던가? 몇 세기가 지난 것처럼 오래 전 일인 것 같은데, 그때의 감정은 바로 엊그제 일보다 더 선명하다. 일터로 가는 길. 그 한 시간 남짓의 거리에 수 십 년의 감정이 오버랩 되는 것은 매일 있는 일은 아니다. 아니 매일이 그렇게 수 십 년의 중첩이며 역사다. 한 두 번을 갈아타고 가는 것이 싫어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타려다 보니 집에서 한참을 걸어야 한다. 지하철 안, 속까지 훤히 다 들여다보일 것 같은 백색 조명이 왜 그리 불편한지 모르겠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출퇴근 시간에는 그 빛을 신경 쓰지 않도록 만드는 다른 장치들을 사용할 수가 없다. 빽빽한 사람들 틈에서는 무언가 사유한다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진다. 핑계일지도 모르겠다. 타인과 나의 구분이 무색하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내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도 타인이 나를 구분하게 되면 너무 일방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정말 그렇게 타인과 나를 구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회사로 와서 책상 위 컴퓨터를 켜고 또 하염없이 모니터를 바라본다. 그 안에 무슨 일거리가 그리도 많은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생각을 정지시킬 만큼 강력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오랜 시간 눈을 한 곳에 고정시키다 보면 모니터를 끄고 나오기 전까지는 내가 한 동안 사라진다. 그렇게 몇 년을, 몇 십 년을 반복하다 보면, 그 시간 이외에도 자꾸 내가 사라져간다. 어차피 사라질 인생이지만, 나도 모르게 그렇게 소실되어 버리는 내가 자꾸 불쌍해진다. 사회 안에서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지만, 항상 내 계획대로, 내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 난 잘하고 있었는데, 난 그냥 큰 것 바라지 않고 타인에게 피해주지 않고 살아가려고 노력한 것뿐인데, 여기저기서 나를 짓누르는 무게들이 쉬이 가벼워지지 않고 젖은 솜처럼 점점 묵직하게 눌러온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은 전화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한 때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었고, 그렇게 계속 서로 한 약속대로 유지될 줄 알았는데 어느덧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내가 알던 목소리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전화벨 소리에도 흠칫 놀란다. 옆 자리 동료가 생각 없이 던진 한 마디에 가슴 한 편이 저릿하다. 분명 나에게 하는 얘기는 아닌데 왜 괜히 흔들릴까? 엘리베이터를 두고 계단실로 터벅터벅 내려왔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짧은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 나를 응시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다. 내가 만들어 내는 감정의 흐름을 누구도 눈치 채도록 만들고 싶지 않다. 이제는 내가 안간힘을 가지고 붙들고 있던, 쥐고 있던 모든 것을 놓고 나를 쉬게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내부에서 외부로 나왔다. 공간은 달라졌지만 나는 그대로 여기 있다. 한국.
어둠이 다시 왔다.

 

4. 내가. 그림을. 그렇게.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는 언제나 싸움 중이다.
눈을 씻고 보아도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다.
억지로 각을 맞추려다 보면 어색하기 마련이다. 여기저기 생각날 때마다 끄적거린, 계획 없어 보이는 붓질이 더 자연스럽다.
찌그러지고,
누그러뜨리고,
날카롭지 않고,
부스스하고,
흐트러진 돌발행동,
명확함을 가장한 불명확함,
부산스러운 가운데의 고요함,
무언가를 연상케 하지만 연상케 하지 않는 힘,
불균형을 향해 가는 균형 있는 붓질.
그러나 또 다시 그 안의 균형을 깨뜨리는 붓질. 모양. 색깔.
뜬금없는 돌출은 화면 내부의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우회하게 만든다.
수많은 머뭇거림,
지우기와 그리기의 반복.

 

5. 휴게실

치킨, 파산, 이혼, 자살
2015년 작가 백현진의 연남동 작업실에서 캔버스 위 어딘가에, 혹은 벽에 붙인 종이쪽지 위에서 발견한 일련의 단어들은 뉴스에서 접하는 분절된 단어들처럼 그렇게 동떨어져서 작가와 내 주변을 떠돌았다. 그들이 그림 위에 잘 안착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내가 그 단어를 파편이 아닌 연결된 고리로 인식하게 되기까지 꽤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어떤 이유에서든 내 시선이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만드는 이미지들 앞에서 난 혼란스러우면서도 안도감이 들고, 당황스러우면서도 흥분하게 된다. 바라보는 당시에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뇌리를 떠나지 않는 그 느낌, 그 감흥을 차곡차곡 담아두고, 언젠가 그것을 적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되기를 고대하며 그렇게 묵혀둔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한 단어가 되기도 하고 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그림을 보며,
그림을 긴 시간 동안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림이 하는 이야기를 온전히 다 담아내는 데에 ‘나’라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음을 절감하며 좌절하기도 했지만, 그림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은 나를 정지시키면서 또한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그림이 곧 내 ‘휴게실’인 셈이었다.
한 개인이지만 개인이 아닌, 희극도 비극도 아닌, 지금 한국 사회 속의 누군가의 삶과 그가 살고 있는 풍경을 여덟 화면에서 이야기하는 것에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그리고 또 불가능한 도전인지, 변화하는 백현진의 그림을 보면서 체감할 수 있었다. 사소하고 습관적으로 나오는 듯한 형태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쑥 드러나는 붓질은 그런 습관으로 보이는 행동의 패턴을 깨뜨리며 보는 이의 관성을 끊임없이 거스른다. 그리고 미묘한 감정 변화의 신호를 전달해 주는 색과 그 발림의 정도, 그리고 색면 안의 붓터치.

어쩌면 그가 그리는 익숙한 서울 풍경은 점점 희귀한 풍경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돈된 아파트 단지에 익숙해져 가는 세대들이 자라고, 세상은 점점 더 잘 닦이고 매끈하게 바뀌어 간다. 그런 매끈함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없어진다. 아무것도 없던 시기에는 덕지덕지 어떤 표면을 만들기에 바빴고, 만들기에 바빠 너무 거칠어진 표면을 다듬기에 바빴던 시기에는, 그런 거칠거림은 부정적인 대상으로 치부되어 매끈하고 반질거리게 만들기 바빴다. 그럼 이제 그 매끈함의 다음은 무엇일까? 그것을 깨뜨려 파괴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백현진은 본능적으로 그 매끈함의 다음을 여덟 그림을 그리면서 순차적으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한 사람이 직면한 현실, 그 풍경을 결코 감추려 하지 않는다. 그는 울퉁불퉁하고 상처투성이의 현재를 직관적인 선택으로 쌓고 지운 붓질의 흔적으로 남긴다. 그는 그 풍경을 불편하고 부끄럽고 바꿔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공감하고 안타까워하며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려 한다.

어쩌면 작가도 나도 언젠가는, 모든 것이 매끄러워지고 난 후에는, 그림들에 담긴 ‘지금’의 풍경을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 풍경이 돌아보게 만든 ‘지금’ 사회, 그리고 그 안의 사람. 그래서 그는 그림을 통해 자꾸만 각인을 시키려 한다. 자꾸 각인시키지 않으면 잊어버린다. 작가가 그의 몸에 각인된 역사를 온 힘을 다해 그림에 담았듯이 나 역시도 그 역사를 보며 내 안에 각인된 역사를 잊지 않으려고 보고 또 보고 또 본다.

 

6. 완벽한 사각을 찾아서

생각의 흐름을 끊는 많은 방해물들 속에서 그림은 내게 온전히 나일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그림 속 이미지들이 떠드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흩어져 있던 나를 볼 수 있다.
한 사람을 통해 세계가 열렸다 닫힌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쏟아만 냈던 격정의 시기가 있었고, 그것은 상대를 배려하지 않은 일방적 대화였다. 배려하지 못했던 이유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쏟아만 냈던 시기에서 보였던 격정은 대화를 차단했다.
이제 상대를 위한 공간이 조금 생겼고, 대화를 시도한다. 그 대화는 종료되지 않았고 진행형이지만, 누구에게나 열려있다고 얘기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림을 시간을 들여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조금 내 줄 수 있다면, 말을 걸기 시작할 것이고,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보다 보면 의외의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대화의 시작과 한시적 종료를 동시에 알리는 신호가 감지된다. 처음에는 그림 안에만 머무르도록 붙잡아 두더니, 이제는 슬슬 밀어내기도 한다.
해야 할 말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지만 한 동안은, 적어도 당분간은 침묵의 시간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내가 의지하고 기댈 사각 화면을 찾아 헤맨다.
무엇을 찾았고 무엇을 보았는가?
표면 위의 붓질의 흔적은 징후일지도 모른다.
한 인간의 역사를 통한 현 사회 내면의 드러나지 않은 민낯.
그러나 그림으로 드러난 그것은 너무나 직설적이면서도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어 직접적으로 무엇을 폭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폭로가 과연 필요한가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정교하고 치밀하지 못한 인간의 사고는 한 순간에 그 치부를 드러내지 못하고, 차곡차곡 쌓아 알아차릴만할 무렵 다시 누군가에 의해 지워지고 덮이고 또 다시 순환한다. 화가는 몸에 각인된 그 역사를 시간을 두고 그림에 옮긴다. 붓질의 시간은 하염없고, 그것으로 드러난 무언가도 크게 부화뇌동 할 만큼의 충격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화가가 붓질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수 십 겹의 부조리와 고통과 슬픔, 환희의 역사가 점철된 이 사회의 한 틈을 그렇게 고집스럽게 파고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무엇을 보았으며, 무엇을 느꼈으며, 또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일까?
매일매일 흘러가는 시간 안에서의 변화와 변하지 않는 지루함을 묵묵하게 붓질로 응대하며 또 응시하고 있는 화가는 그렇게 세상과의 거리를 좁혀간다.

 


1. 미국의 뮤지컬 드라마 <더 겟 다운 The Get Down>의 에피소드
Wor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