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올해의 작가상 2015》
마동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올해로 4회를 맞이하는 <올해의 작가상>은 한국현대미술의 가능성과 비전 그리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작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이 공동 주최하는 제도로서 2015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최된다.
올해의 작가상의 공정한 진행을 위해 운영위원회(5인)를 발족하였고, 운영위원회는 추천위원(10인)과 심사위원(5인)을 별도로 위촉하였다. 각 추천위원은 1인/팀의 작가를 추천하였으며, 국내외 미술계 인사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의 엄정한 심사를 통해 <올해의 작가상 2015>전에 참여할 후보작가 4인을 선정하였다. 후보작가로 선정된 김기라(1974), 나현(1970), 오인환(1965), 하태범(1974)은 <올해의 작가상 2015>전을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전시기간 중 이루어지는 심사위원단의 최종 심사를 거쳐 ‘2015 올해의 작가’ 1인이 선정된다.
이번 전시의 참여작가 김기라는 불확실한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며, 나현은 서울과 베를린의 도시 개발과 역사적 경험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오인환은 공간적 의미의 사각지대를 사회 문화적 맥락으로 확장하며, 하태범은 사건 사고의 현장을 전달하는 대중 매체의 태도를 재해석한다.
김기라 : 떠다니는 마을
김기라(1974-)는 퍼포먼스와 설치, 영상 작업을 통해 예술과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작가이다. 작가의 시각언어는 많은 기호들을 수집하여 편집하는 행위를 기반으로 작가 특유의 유머와 은유적 화법을 통해 현대 사회와 개인의 관계, 공론의 장을 찾기 위한 방식들이다.
작가는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갖고 있는 사회, 문화적 위치와 그에 반하는 개인과 집단의 욕망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 전문가들과 협업을 시도하며 다층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그 과정 및 결과를 시각예술에 접목하여 생각의 노동이 작품화되는 지점을 탐색한다.
‘플로팅 빌리지’(Floating Village)는 일반적으로 수상가옥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우리 사회의 단면과 고민을 보여주기 위해 사회문화적 개념이 함축된 합성어로 이 용어를 차용하였다. ‘플로팅 빌리지’의 개념은 개인화 된 미디어를 통한 정보와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의미의 ‘플로팅’과 개개인은 ‘집(성전)’이라고 명명한 성경 구절에서 착안한 것으로 최소 단위의 마을 공동체의 경험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공동선’이라는 명제 아래 작가적 입장과 태도에서 바라본 대한민국의 현실, 역사, 이념, 정치, 세대, 지역, 노사문제 같은 갈등과 대립, 충돌 등을 심미적 관점에서 풀어낸다. 예컨데 영화감독, 신경정신과 의사, 성우, 무용가, 시인, 현장미술가, 연기자, 음악가, 가수 등 타 장르의 전문가들과 협업하여 그 과정의 결과를 <이념의 무게-한낮의 어둠>(2014), <붉은 수레바퀴>(2015), <떠다니는 마을>(2015) 등 플로팅 빌리지의 개념을 대입한 영상 설치 작품으로 선보인다.
작가의 작품은 사유, 공유, 향유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사유’는 사적 영역인 개인의 경험과 그 역사의 상처가 기억과 인지의 문제적 담론화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번째 ‘공유’는 사적 영역의 문제적 담론들이 비현실적 현상인 미술이라는 환영으로 전환돼 공론의 장으로 파고듦으로써 공공과 공동이 되는 것을 드러낸다. 끝으로 ‘향유’는 실재했던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공공의 비현실적 장소가 공적 공간으로 확대되면서 담론의 장으로 확대 재생산된다는 전제를 제시한다.
나현 : 바벨탑 프로젝트-난지도
나현(1970-)은 역사적 사건과 기록에 관한 자료를 기반으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작가이다. 역사학, 인문학, 문화인류학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아카이브를 수집, 분석하여 구조적 재배치를 시도하는 작가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직접 탐방하거나 관련 자료를 조사하며 작가 자신의 주관적이며 창조적인 아카이브를 구축해간다. 작가는 인류 혹은 민족과 필연적인 관계에 있는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갖고 이를 작가의 사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관념적으로 학습된 역사에 대한 관찰자의 상상력 확장을 유도한다.
모든 인간들이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을 때, 마치 하늘까지 닿을 것 같은 높은 탑을 쌓았다.
그러나 신은 폭풍바람을 보내어 그 탑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모두에게 각각의 고유한 언어를 주었다.
그런 이유로 그 도시는 바빌론이라 불렸다.
(Antiquities of the Jews 1.4.3)
작가는 서울의 난지도와 베를린의 악마(Teufelsberg)의 산을 바벨탑의 유적으로 추정하고, 그에 대한 사회문화적 의미를 탐구하고자 리서치 프로젝트 <바벨탑 프로젝트-난지도>를 진행한다.
베를린의 악마의 산은 2차 세계대전 후 폐허가 된 도시의 재건을 위하여 베를린 서쪽에 전쟁 쓰레기들을 한데 모아둔 곳으로, 이것이 거대한 탑을 이루면서 평지인 베를린에 해발 120미터의 인공산을 이룬 것을 지칭한다. 그리고 본래 난초와 지초가 자라던 서울의 서쪽 끝에 위치한 난지도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던 급속한 산업화 시대의 찌꺼기들을 1978년부터 1993년까지 받아오던 95미터 높이의 세계에서 유래 없는 규모의 쓰레기 매립장이었다.
본 전시에서 작가는 악마의 산과 난지도의 두 장소가 가지고 있는 근, 현대의 다양한 기억과 시간의 층위를 발굴하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연결장치로서 목조우물을 설치하고 그 속에 내재된 불안과 폭력의 속성을 드러낸다. 작가는 특히 ‘민족’의 의미에 집중한다. 바벨탑에 관한 기록과 함께 백여 년 전 독일제국의회에서 벌어졌던 Mischehe(다른 민족이나 종교간의 결혼) 차별 법제화 논의와 단일민족임을 자부하던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의 급속한 다 민족화 현상을 은유적 제스처로 표현한다. 작가는 서울의 난지도에서 채집한 다양한 귀화식물을 전시장에 설치된 바벨탑에 식재하고,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과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들의 인터뷰를 연결 지어 보여주며, 다양한 언어와 민족의 기원과 확산을 담아 내고 있는 난지도가 하나의 바벨탑임을 증언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바벨탑은 과거의 전설이나 판타지가 아니라 현재에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실의 한 단면임을 주장하고 있다.
오인환 : 사각지대 찾기
오인환(1965-)은 특정한 공간과 시간의 문맥을 활용하는 참여적이고 장소특정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작가이다. 작가는 정체성의 문제에서 시작해 사회 전반의 규율과 예술의 상관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개념적이고 문화비판적인 작업을 시도한다. 또한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개인의 정체성과 집단과의 관계, 그 연결적 맥락에서 형성된 문화적 코드들을 해체하거나 재해석하며 차이, 다양성, 소통 등 현대미술의 키워드를 작품으로 녹여내고 일상의 경험과 연결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미술 작업을 진행한다.
<상호 감상 체계>(2015)는 전시장 내에 설치된 CCTV의 사각지대를 활용하여 사각지대에 대한 공간적인 경험을 관객들에게 제공한다. 분리된 두 개의 장소에 설치된 CCTV의 사각지대를 찾고 그 결과를 테이프 등을 활용하여 시각화하는 것이다. CCTV는 실시간으로 전시장 내부의 모습을 반대편 장소에 설치된 모니터로 전송하지만 사각지대에 설치된 작업은 모니터를 통해서는 보이지 않는다. 관객들은 전시장을 직접 방문했을 때 비로소 사각지대를 시각화한 설치 작업을 감상할 수 있으며 모니터를 통한 감상과 현장에서의 직접적인 감상의 차이를 발견한다.
<나의 사각지대-인터뷰>(2014-2015)는 일상에서 개인들이 경험한 사각지대 찾기의 사례들을 수집한 것이다. 예컨대, 군대를 경험한 전역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병영생활에서 자신만의 사적인 공간을 찾았던 개인들의 경험을 소개하고 일상의 경험으로서 사각지대 찾기의 의미를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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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각지대-도슨트>(2015)는 <상호 감상 체계>를 퍼포먼스를 통해 재연결하는 작업이다. 신청자에 한해서 1대1의 방식으로 진행될 안내 퍼포먼스에서 퍼포머로서의 도슨트는 관객들을 분리된 두 개의 장소로 안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나는 미술가가 아니다/나는 미술가이다>(2015)는 미술전문가로서 교육을 받았거나 또는 미술가로서의 경력을 쌓았던 사람들이 미술활동을 포기하거나 중단한 사연을 듣는 인터뷰이다. 오늘날 작가가 된다는 것은 아카데미, 전시회, 레지던시 등의 제도적인 과정에 편입되는 것이고, 동시에 이러한 미술제도에 작가가 개입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인의 작업, <나는 미술가가 아니다/미술가이다>에서는 작가의 정의 및 역할을 미술가 개인과 미술제도와의 상관관계의 차원에서 성찰해보고자 한다.
<사각지대 찾아가기>(2015)의 출발은 전역자들에게 군복무 기간 동안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했던 자신만의 사각지대를 찾아가는 방법들을 수집하고 이를 연결하여 사각지대를 찾아가는 길 안내문을 만드는 것이다. 작가는 다양한 장소에서 사각지대를 찾아가는 안내문이 지시하는 내용을 따라 이동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퍼포먼스의 과정은 작가가 하늘을 향해 들고 다니는 비디오카메라에 의해 녹화된다. 다양한 장소에서 촬영된 영상들은 편집을 통해 통합되고 재구성된다. 동일한 길 안내문을 따라 이동하는 퍼포먼스를 다양한 장소들에서 실행할 때 차이 또는 불일치들이 발생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퍼포머에게 해석자의 역할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각각의 퍼포먼스 장소는 지시문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문맥이 되는 것이다. 즉 작가의 사각지대를 찾아가는 퍼포먼스는 동일한 지시문을 따라가는 반복적인 과정인 동시에 다양한 장소, 시간, 행위를 복합적으로 결합하여 차이를 드러내는 해석의 과정이 된다.
하태범 :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
하태범(1974-)은 사진 이미지를 기반으로 영상 및 조각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이다. 작가가 주로 관심을 갖는 주제는 동시대의 사건, 사고 현장과 이것을 일반인들에게 전달하는 대중 매체의 태도이다. 작가는 미디어에 노출된 재앙적인 사건, 자연재해, 전쟁 등 사고 현장들에 대한 보도사진을 수집하여 이를 흰색의 오브제로 재해석한 뒤, 미디어가 보도한 이미지와 같은 구도로 촬영하거나 특정 이미지를 클로즈업하여 작품으로 재생산 한다. 작가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사건의 실상을 전달하는 대중 매체가 지닌 일각의 정치적 태도와 그 결과물을 끊임없이 소비하고 있는 이 사회의 소비주의적 단상을 지적한다.
작가는 매일 인터넷에 올라오는 여러 사건들을 다룬 뉴스 사진들을 작품의 주요 자료로 수집한다. 이 이미지들은 대부분 분쟁지역이나, 재해를 다룬 사진들로 파괴된 건물과 잔해 등, 폐허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흰색의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 사진으로 완성시킨다. 작가는 사진의 배경을 의도적으로 삭제 하면서 생기는 여백을 통해 자신의 방관적 시각을 점점 극대화 한다. <연평도>(2011), <일본쓰나미>(2012), <필리핀론토>(2014)등이 이러한 맥락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반면 <시선>(2015) 시리즈에는 어린이들의 얼굴만이 부각되어 있다. 작가는 주로 비영리 구호단체 광고로부터 난민 소년, 소녀들의 이미지를 접한다. 뉴스가 사건 현장의 참혹함을 생생히 ‘제공’한다면, 비영리 구호단체에서는 그 안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모습을 ‘제공’함과 동시에 무언가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고 작가는 말한다. 구호단체는 한 달에 2만원이면 그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외친다. 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작가 또한 소소한 금액의 기부를 하고 있다. 그러나 구호의 손길은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고 있고 우리의 삶은 점점 나아지는 것같은데, 아직도 그들은 변함없이 배고픔과 죽음이란 공포에 떨고 있다. 다양한 매체와 커다란 전광판은 오히려 슬픔에 잠긴 어린이의 모습을 더욱 드리우고, 나날이 도움의 손길을 요구하는 광고가 늘어만 가는 것에 작가는 씁쓸함을 느낀다.
그런데 이러한 광고에 보이는 얼굴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그러나 이내 작가는 그 얼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얼굴은 단지 전쟁의 소용돌이에 희생당하는 어느 배고픈 나라에 사는 어린이들의 상징일 뿐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것이 한 개인의 초상이 아닌 우리의 슬픔과 연민을 자극하는 매개체로서의 상징물이라고 말한다.
“얼마의 기부금은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면죄부를 위함이 더 큰 것은 아닌가?”작가는 조용히 외친다. 이것은 나와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인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