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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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CV
2014
‘가상 윤곽: Hung-Chih Peng & Kira Kim 듀얼 전시’, 아트 이슈갤러리, 타이완.
‘마지막 잎새’, 페리지 갤러리 앤 홀, 한국
2013
‘Artist Lunchbox’, 서울 시립미술관, 한국
2012
‘두개의 문, 김기라, 신학철 2인전’, Gallery 157, 한국
2010
‘공동선_모든산에 오르라!!’, 두산아트센터, 한국
‘Great Deed Great Death’, 분더샵, 한국
2009
‘WOW This wonderful world’, 분더샵, 한국
‘Super Mega Factory’, 국제갤러리, 한국
2008
‘선전 공화국(The Republic of Propaganda)’, 대안공간 루프, 한국
‘골드 크리스탈’, 국립창동미술창작스튜디오 갤러리, 한국
2007
‘신기루궁전(A Palace of Mirages)’, King’s Lynn Arts Centre, 영국
2006
‘Gagami V-Je t’aime, Moi non plus’, 프랑스
2003
‘Window Exhibition’, 갤러리 팩토리, 한국
‘주변 혹은 전체(Minority or Cosmopolitan)’, + Gallery, 일본
2002
‘0.000Km’, 대안공간 루프, 한국
‘표준’, 갤러리 보다 컨템포러리, 한국
<주요 단체전>
2014
‘더 브레인 The Brain프로젝트 대전 비엔날레 2014 Project Daejeon’ , 대전시립미술관, 한국
‘DREAM SOCIETY : X brid 2nd The Brilliant Art Project’, 서울 미술관, 한국
‘Weaving Viewpoint’, Space Cottonseed 갤러리, 싱가포르.
‘우리가 경탄하는순간들’, 샹산 현대 미술관, 항저우, 중국
2013
‘TRANSFER KOREA-NRW 2011/12/13 쿤스트 할레 뒤셀도르프’, OSTHAUS 하겐미술관. 독일
‘Crystallize – New Media Art Lab UK & Korea’, Old Billingsgate, 런던, 영국
‘Historical Parade ; Images from elsewhere,’ Art Lab AIch Nagoya, Japan
‘Move on Asia’, ZKM, Karlsruhe, 독일
2012
‘몽유_마술적 현실 (Dream Walking in the Magical Reality)’,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
‘Historical Parade ; Images from elsewhere’, CASO SPACE GALLERY, 오사까, 일본
‘Cynical resistance’, Canvas International gallery, 암스텔담, 네덜란드
‘Historical Parade ; Images from elsewhere’,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 서울, 한국
‘인 더 루프’, LOOP 갤러리, 서울, 한국
2011
‘한국현대미술의 스펙트럼’, 카오슝시립미술관, 대만
‘Fashion into Art’, 삼성미술관 플라토(구 로뎅 갤러리), 서울, 한국
‘코리안 렙소디’, 리움 삼성미술관, 서울, 한국
2010
‘거대한 눈’, 길드아트 갤러리, 뭄바이, 인도
‘City States – Media Landscape, Zone East 리버풀 비엔날레 2010’, Contemporary Urban Centre, 리버풀, 영국; 런던 한국문화원, 런던, 영국
‘한국현대미술, PLASTIC GARDEN’, Minsheng Art Museum, 상해, 중국
2009
‘신호탄(Beginning of New Era)’, 국립현대미술관서울분관, 서울, 한국
‘박하사탕: 한국현대미술 중남미 순회전 귀국 보고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
‘A Different Similarity: Towards the Sea’, 샌트럴이스탄불, 이스탄불, 터키
‘Trans-Dimensional Interesting Dynamics in New Korean Painting’, 프라하 비엔날레, 캐를린홀, 프라하, 체코
‘After Gogo: New Era of Korean Art 2009, The Bienniel of Graphic Arts’, Cankarjevdom Gallery, 루블라냐, 슬로베니아
‘Doors Open – Don’t Panic’, Sylvia Wald and Po Kim Gallery, 뉴욕, 미국
2008
‘Modest Monuments: Contemporary Art from Korea’, 킹스린아트센터, 노르폭, 영국
‘Correspondence’, 아트선재센터, 서울, 한국
‘낭비, 부산 비엔날레’, 부산요트경기장, 부산, 한국
‘제 3회 난징 트리엔날레’, 난징 미술관, 난징, 중국
‘Is the World Flat?, Arti et Amicitiae’,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2007
‘Contemporary Korean Art – Wonderland’, 중국국립미술관, 베이징, 중국
‘Contemporary Art from Korea- Peppermint Candy’, Museo Nacional de Bellas Artes,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현대미술관, 산티아고, 칠레
‘The Drawing Show’, 갤러리 팩토리, 서울, 한국
Critic 1
떠도는 삶의 좌표를 알려주는 부표
이선영(미술평론가)
21세기 한국의 떠도는 삶
김기라는 ‘2015년 올해의 작가’ 전에 ‘floating village’라는 부제로, 우리의 부유하는 삶을 총체적으로 다룬다. 전시에 주어진 공간이 아파트 40여 평 크기라는 점에 착안하여, 마치 40평 아파트 같은 공간구조로 연출했다. 이러한 구조는 전시회에 자주 오지 않는 일반대중들에게도 왠지 모를 친숙한 공간감을 줄지 모른다. 마침 그의 작업실이 있는 합정동은 몇 년 전부터 대규모 아파트공사가 진행되어 주변의 주택가와 상권을 재편하고 있는 중이다. 개발 때문에 임대료가 올라 그도 곧 다른 곳으로 작업실을 옮겨야 하는 처지다. 아파트공화국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주거 현실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는 것, 그들이 오기 위해 살던 곳을 떠나야 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체감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국 중산층의 로망인 40평 아파트 크기의 공간 이곳저곳에 배치된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이미지와 메시지는 40평 아파트가 제시해야 할 밝고 풍요로운 미래에의 기대를 배반한다. 관객의 동선이 이어지는 입구로부터 출구까지 공간들을 거치는 동안,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로 전도되며, 각각의 방으로 제시되는 전시공간은 이러한 전도가 일어나는 사건 현장이다.
그곳은 느긋한 심미 체험의 장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는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들을 하나하나 까발려지는 장이다. 어두운 방에서 밝혀지는 진실들이다. 과거의 종교적 공간을 떠올리는 신성한 화이트 큐브를 아파트 평수로 환산하는 것 자체가 불순하다. 그러나 그것은 김기라가 현실과 예술을 함께 섞어서 짜온 그동안의 방식이었다. 그간의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는 논쟁이 되는 사안들이 존재했다. 논쟁은 철학자나 정치인들의 일 아닌가. 미술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현대미술이 시작된 이래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왜 이렇게 힘들고 험한 일을 굳이 예술가가 해야 할까. 역설적이지만, 예술이 가지는 자율성이 그러한 간섭을 가능케 한다. 삶과의 거리가 있어야 삶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정치가 자율적일 때 국민들은 고통받는다. 그렇고 그런 노회한 정치인들이 계속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현실을 보면, 우리의 정치가 매우 자율적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예술적 자율이 잘못 이해되면, ‘예술을 위한 예술’이 되지만, 제대로 작동된다면 자율적 삶을 위한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단지 예술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 현실을 위한 잠재력을 담보하기에 소중하다.
예술은 작가의 자유, 더 나아가 타자의 자유까지 원한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강조되는 개인주의와 달리, 나의 자유와 타자의 자유가 상치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는 점에 예술의 진면목이다. 미술계 현장에서 김기라의 작품을 2000년 대 초부터 쭉 봐왔지만, 매 전시마다 그는 가벼운 농담부터 심각한 주의주장에 이르는 현실에 대한 발언을 지속해왔다.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당면했던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현실도 주체도 조금씩 변화하기에, 발언의 내용과 형식은 조금씩 달라진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는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다 보여주겠다는 거창한 의도가 아니라, 보다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 공적 무대를 최대한 활용하여 현실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바를 더 촘촘하게 접어 넣고자 한다. 그가 접어 넣은 메시지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전시장을 통과하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물론 그의 작품이 읽고 듣고 보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방식은 예술조차도 손쉬운 소비 항목으로 만들고 만다.
소비되는 충격은 항시적 접속 상태에 있는 인터넷이나 휴식 중의 저녁 뉴스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가 발굴한 현실들은 충격적이긴 하지만, 현대미술이 곧잘 그렇듯이 충격을 위한 충격은 아니다. 김기라의 작품은 그 자리에서뿐 아니라, 그곳을 벗어나서도 자꾸 생각나는 충격을 준다. 작가는 질문을 던질 뿐 답을 제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절하게 제기된 질문에는 대답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단지 자신의 작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하여 현실을 보고, 그렇게 다시 본 현실을 통해 작품을 이해하는 선순환적인 구조를 가진다. 십 수년 간 현실 참여적인 작품을 지속해온 그의 방식은 다소간 개인적이다. 그는 감히 누군가를 대표해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자처하지 않는다. 그러한 보편적인 지식인의 역할은 1980년대에 맡은 바 소임을 마치고 역사로 사라졌다. 주어진 분업 시스템에만 충실한 전문가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한 전문가들, 가령 ‘쟁이’들의 한계는, 그들이 가진 놀라운 기술들을 모순을 확대 재생산할 뿐인 지배적 체계의 들러리로 세울 뿐이라는데 있다. 대중이나 민중이 아니라, 다중(multitude)의 시대, 작가 또한 그들과 더불어 개인이다.
작가의 현실참여
김기라는 개인과 개인의 유대를 중시하며, 각 영역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협업자가 함께하는 이번 전시에서 이러한 유대는 극대화된다. 그는 정치적 명분과 힘을 실어줄 수도 있을 만한 어떤 진영의 논리도 피하면서 이러한 작업들을 해왔다. 그는 한때 문화예술계의 대세가 되기도 했던, 권력의 풍향계에 민감한 단순한 시대반영을 넘어서, 개인의 의지와 능력이 얼마나 작업을 지속하고 확장시키는데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작가이다. 다음을 위해 아껴둔 에너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매번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작업으로 푸는데 올 인함으로서 그다음 단계의 작업도 가능케 하는 다소간 맹목적 스타일의 작업방식을 가지고 있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은 맹목이 아니라 예술이 현실에서 버티고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아닐까. 어떤 작가라도 초월할 수 없는 작업과 삶의 대면에서, ‘살려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면 살 것’이라는 삶의 지혜(?)가 떠오르지 않는 바도 아니다. 김기라의 작품에는 많은 죽음이 등장하지만, 예술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에도 죽음은 스며있다.
죽음을 애써 잊어버리려는 삶이 피상적이듯,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예술은 잉여에 머문다. 특히 김기라가 다루는 죽음은 사회적 죽음이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죽음에는 모호한 실존적, 운명론적 이유가 큰 몫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김기라의 예술은 정치를 위한 도구일까. 예술은 단지 도구가 아니라 작업하는 삶 자체의 처절함이나 철저함 때문에 정치적일 수 있다. 작업을 계속하면 죽을 것 같다. 그러나 작업을 하지 못한다면 더 빨리 죽을 것 같다는 것이 맞다. 미술계의 많은 구성원들이 아직도 가지고 있는 환상은 미술을 통해서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헛된 기대를 일찌감치 버린 이만이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1974년생으로, 갓 마흔을 넘긴 작가가 서 있는 이러한 처절한 전후 맥락을 생각해 보면 ‘플로팅 빌리지’라는 전시 부제는 매우 느긋해 보인다. ‘지구촌’이라는 단어가 ‘세계화’라는 단어에 비해 평화스럽게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floating village’는 이국적인 수상 가옥이나 미래주의 풍의 건축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을 보는 작가의 관점이 압축된 것이다. 하기야 불과 몇 십 년 전에도 청계천에는 이러한 유형의 판자촌들이 즐비했다. 그러한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빠른 물질적 성장을 거듭해온 한국 사회에서, 작가는 부유(富有)가 아닌 부유(浮遊)를 본다. ‘플로팅’이란 정보사회를 자유롭게 서핑하는 것이나 어디든 갈 수 있는 유목 같은, 21세기에 대한 자유 발랄한 비전이 아니라, 죽음을 지시한다. 한국의 부유하는 현실의 이면에는 보다 결정화된 지배체계가 공고화되고 있기에, 자유롭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김기라의 작품에서 ‘플로팅’은 죽어서나 표면 위로 떠오를 수 있는 비극적이고도 역설적인 이미지와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사회에 편재하는 죽음은 작품 [On the Bridge]나 [지워진 길 그리고 빛없이 있었던 것 2015] 등, 이 전시의 여러 작품에서 나타난다. 또한 ‘floating village’는 3개월이라는 기간 동안의 한시적인 장을 유지할 뿐인 전시장에 대한 자기 지시적 언급도 포함된다. 그는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이 안착하지 못하는 삶을 본다.
그는 관객에게 가장 구체적으로 다가올 공간에 주목한다. 아파트를 본뜬 공간은 대지와 밀착된 자리(place)이기보다는 추상적인 공간(space)을 강조한다. ‘아파트공화국’의 공간은 보다 명확한 가로/세로축 위에 한 개인을 위치 짓는다. 사는 동네와 아파트 이름, 평수는 거주민의 계급을 명확히 규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좌표축은 변한다. 온 사회가 관리하는 사람과 관리받는 사람으로 나뉘며, 보다 많은 다수들이 장기판의 말 같은 신세가 된다. 겉보기의 풍요 뒤에 깔린 다수의 불행과 비극을 추동하는 구조적인 힘이 있으며, 작가는 그 힘 및 그 힘과 역학관계에 있는 또 다른 힘의 실체를 드러내려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암시적인 또는 명시적인 적대관계가 깔려 있다. 떠도는 마을이라는 개념은 개인이 구체적인 현실계인 땅에 뿌리내리기보다는 매번 재배치되는 가변성을 의미한다. 그러한 가변성은 전통과 다른 현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현대인이란 다름 아닌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을 말한다. 그러나 그 자유에는 소유라는 조건이 붙어있고, 소유관계는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방식으로 결정화되고 있다.
평수가 더 큰 아파트로의 지향이든 재개발로 인한 쫓겨남이든, 양쪽 모두에 있어 떠돎은 공통적이다. 저 머나먼 곳에 우리 모두가 나아가야 할 이상 사회가 있고 거기에 가까워지든가 멀어지든가가 있을 뿐, 안정된 자리 잡음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floating village’는 빨리 잊고 싶은 과거와 ‘선진국’을 향한 미래가 있을 뿐, 지금 여기가 없는 현실을 표현한다. 이러한 과도기적 상태의 현실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나름의 역동성–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갖는 인상이라고 한다–을 만들기는 하였지만, 삶의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인 안정감을 빼앗는다. 작가는 ‘floating village’에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플로팅의 원 의미처럼 개인의 정보나 이미지들이 사이버나 SNS의 공간에서 떠다니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정치의 실종, 비정규직(쌍용차 문제, 정리해고), 집 없음, 월세, 전세, 기러기아빠, 정치, 노동자 문제, 88만원 세대, 세월호, 자살처럼 사회현상으로 침착되지 못하고 개인의 사회 문화적인 전반들이 붕 떠다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하나는 부유하는 그 개인의 문제들이 그래서 얼마나 중요한가의 의미가 있습니다.’고 밝힌다.
그가 열거하는 수많은 갈등들은 기본적으로는 노동과 자본 사이의 근본적 모순에 바탕 한다. 이 전시의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분단모순도 노동/자본의 모순과 함께 얽혀 있다. 첫 번째 방에 배치된 작품 [정부, 소비자, 개인]은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들을 죽 보여준다. 갈등의 구체적인 모습이 아니라, 갈등이 벌어지는 장소를 카메라로 훑어주면서 이후에 전개될 본격적인 탐구에 대한 도입부 역할을 한다. 작가는 카메라를 길바닥에 질질 끌고 가면서 갈등의 현장들을 녹화한다. 서울역과 남대문을 지나 시청과 광화문, 그리고 맨 마지막에 도착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까지가 그 갈등의 무대들이다. 상징적 랜드 마크가 두루 포함된 그의 동선에 의하면 갈등은 편재적이다. 어디 한군데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붉은색의 뜨거운 상징색으로 강조된 서막에서 갈등의 정치경제학은 분명하다. 핏빛이 연상되는 붉은색은 전쟁에 이르는 경쟁을 암시한다. 한국 사회의 주요 문제를 4채널 비디오로 보여주는 입구의 작품 [이념의 무게를 위한 네 가지 질문] 중에서 두 남자가 마주 선 채 서로 목이 묶여 있는 작품은 서로 엮여 있는 착종된 현실을 은유하며, 죽어가는 이에게 숨을 나누는 작품은 공동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
도입부를 지나면 보다 거시적인 차원이 펼쳐진다. 작품 [붉은 수레바퀴]는 잔인한 권력과 그 권력에 휘둘리고 있는 희생자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대조된다. 그는 ‘늘 이념은 아름답고 평화롭다. 그러나 그 이념들이 만든 역사는 늘 폭력적이고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러프(ruff) 컬러 옷을 입은 미모의 여인과 물 폭탄 세례를 당하고 있는 이는 아름다움과 폭력을 대조한다. 권력은 아름답게 치장되며, 권력 자체가 폭력적인 것이다. 권력과 아름다움의 결합은 지구 상에 남아있는 수많은 기념비에서 명확하며, 기념비가 사라진 현대에도 각자가 스스로를 조절하는 일상 속에서 내면화된 권력이 확인된다. 미술사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초상화들의 주인공은 대부분 왕족이나 귀족들이며 당대의 지배계급을 대표한다. 수레바퀴를 닮은 고풍스러운 컬러는 격세 유전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이들은 은유한다. 그 옷은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제유법이지만, 어떤 특징을 통해 전체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환유법이다. 목에 바짝 붙어있는 러프 컬러는 사회의 머리 역할을 하는 지배적 위치를 강조한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 같은 역사적 사례에서 몸의 말단으로 간주되어온 성난 민중들은 지배자의 목을 쳤다.
몸은 상징적 질서를 재현해왔다. 그리고 그만큼 빈번한 위반의 장이 되기도 한다. 몸으로 재현되는 질서는 그 위반적 상황이 가장 민감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전문 배우와 무용수 등, 몸 언어의 전문가들이라 할 만한 이들을 이번 작품에 대거 초대했다. 뻣뻣한 러프 컬러는 일하는 노동자가 결코 입을 수는 없는 의상이다. 그것은 지배집단(또는 지배자에 대한 풍자를 위해 광대가 즐겨 착용한)의 패션이었다. 러프 컬러는 구조 면에서도 흥미롭다. 그것은 중심을 향하는 주름들이 주변의 것들을 빨아들이는 구조이다. 또한, 이러한 과정은 수레바퀴가 돌 듯 반복된다. 수레바퀴는 여기서도, 그리고 그때도 돌았을 것이다. 니체는 당대의 직선적 역사주의에 대항하여 영원회귀의 사상을 주장하면서, 필연적인 것만이 되돌아온다고 하였다. 그 관점에서 보자면 권력은 필연적이다. 인간사회가 있는 한 권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권력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상호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독재자를 국민 스스로가 선출하는 경우도 역사에서는 자주 발견된다. 김기라의 작품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쌍을 이루는 두 개의 바퀴를 통해 굴러간다.
역사가 굴러온 실제의 과정과 달리,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주도하는 하나의 결정적인 세력이 있는 양 말한다. 김기라는 대조되는 두 화면을 통해 상상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면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낯설게 한다. 상대편이 고통받을 때마다 잔혹한 여주인공의 히스테리컬한 웃음소리는 커지며 그녀의 하얀 컬러는 점차 붉어진다. 붉은 꽃잎도 떨어진다. 권력자도 차츰 쇠락해가는 분위기지만 착취는 방식을 달리할 뿐 계속될 것이다. 양쪽의 두 인물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뭉개놓은 피와 물이라는 액체의 이미지는 폭력적 현실을 재생산하는 경계가 소멸되어야 함을 말한다. ‘붉은 수레바퀴’는 솔제니친의 소설제목에서 온 것이고, 무차별적으로 이어지는 물 폭탄 세례는 작가의 실제 체험으로부터 왔다. 화재현장을 진압하듯 벌어지는 물 폭탄은 체계가 위험에 대처하는 원초적인 방식이다. 과거의 독재자들이 반대편을 피로 씻어왔다. 합법적으로 진행되는 물세례는 피에 비해 덜 폭력적인 듯하지만, 동질성을 교란하는 이질성을 세척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은 같다. 위생에 대한 강박관념은 정치에 반영된다. 특히 전체주의 시대에 강한 힘을 발휘한다.
정치학-의학이 결합된 담론은 내부를 교란하는 외부의 적을 없애야 한다는 명분을 제공한다. 그것은 동일자가 타자를 규정하고, 규정함으로써 배제하고, 배제함으로써 억압하는 방식이다. 피와 물의 대조는 공개처형 대신에 이어진 근대에 시작된 총체적인 ‘생명정치(biopolitics)’(미셀 푸코)를 떠올린다. 투명한 물은 피와 달리, 긍정도 부정도 아닌 중성적인 느낌의 액체이다. 피는 뜨겁지만 물을 차갑다. 물은 생명 안팎에 촘촘하게 펼쳐진 그물망 사이로 소리 없이 작동하는 미시 권력에 해당된다. 피가 혁명적 상황 같은 거시권력이 작동하는 시기에 범람한다면, 물은 일상적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생명정치의 개념을 주장한 미셀 푸코의 선행 연구를 통해, 자연 생명이 국가권력의 메커니즘과 계산속으로 통합되기 시작하고 정치가 생명정치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정치란 인민의 생명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되었다. 아감벤은 정치란 ‘비정치적인 것(즉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결정’이라고 정의한다. 근대 국가는 다수에게 공포감을 주는 피 튀기는 잔인한 폭력이 아니라, 합법적 폭력을 통해 지배하는 것이다.
벤야민과 데리다가 강조했듯이, 법과 폭력은 반대되지 않는다. 데리다는 [법에서 정의로]에서, ‘법적 힘과 우리가 항상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폭력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데리다는 [벤야민의 이름]에서 ‘폭력은 법질서에 외재적이지 않다. 법을 위협하는 것은 법의 기원에 속해 있다’고 하면서, ‘폭력을 독점하려는 법의 이해관계가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다. 해체주의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작가도 합법적인 폭력의 토대를 해체하고자 한다. 데리다는 다시 [법에서 정의로]에서, 법의 구조는 본질적으로 해체 가능하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이 구조의 궁극적 토대가 정의상 정초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체 가능성으로부터 모든 역사적 진보와 정치적 기회를 발견할 수도 있기에 ‘해체는 정의’라는 것이다. 해체주의에서 해체의 1순위는 이항대립이다. 그것은 기존의 모순을 지속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김기라의 작품에도 이러한 구도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영상으로 마주한 서로가 아니라, 각각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곤 한다.
분단과 이념, 그리고 일상의 안녕함
김기라가 주목하는 우리 사회의 또 하나의 주요한 모순은 분단이다. 작품 [이념의 무게_한낮의 어둠]은 국가보안법의 위세가 강력했던 1980년대의 끝 무렵에 겪었던 트라우마 때문에 자살 시도 등, 인생이 거의 망가지다시피 한 한 화가가 등장한다. 실재인물이자 등장인물인 중년의 남자는 자기가 그린 걸개그림 때문에 간첩으로 몰려 당국에 끌려가 곤욕을 치루었다. 신경정신과 의사와의 최면치료를 통해 당사자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충격적이다. 관객은 한 개인에게 자행된 국가의 폭력을 적나라하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김기라는 의사와의 만남을 주선했을 뿐, 개입하지 않고 치유의 과정을 중개할 뿐이다. 픽션은 없다. 단지 픽션처럼 보이는 강력한 현실이 있다. [한낮의 어둠]이라는 역설적 제목은 러시아 작가 아서 쾨슬러의 작품 ‘한낮의 어둠’에서 온 것으로, 러시아 혁명 지나고 대규모 숙청 바람이 불자, 이러한 역사적 현실에서 밝은 혁명의 이념이 어두운 죽음으로 귀결됨을 깨닫는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의사는 그 화가를 최면 상태에 빠지게 하고 시간을 사건이 있었던 1989년 8월로 되돌린다. 의사의 질문에 종종 격한 반응을 보이는 80년대 화가의 한 개인의 몸과 뇌리에 강하게 각인된 국가 폭력을 드러낸다. ‘그냥 걷고 있는데,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이 갑자기 차에서 튀어나왔어요’…..‘차 문을 발로 차고 저항을 했지만, 강제로 차량 뒤 자석에.., 마치 꾸겨지듯이 쳐 박혔어요’…‘큰 철문으로 된 문을 통과하는 느낌이 들고’…‘복도가 죽 있고요..그 복도엔 양 쪽으로 계속 철문들이 있어요’…‘서로 번갈아 가면서 다른 질문을 하고….그 답을….볼펜으로 쓰게 합니다’…‘묻…묻는 질문에 답을 적습니다..계속 같은 질문을 합니다’….‘하루 24시간 동안 내 눈앞에 계속 조사관들이 있어요’…..‘제가 쓴 자술서의 종이 분량도 엄청나게 많고…내가 쓴 볼펜도 10자루가 넘어요’….‘똑같은 내용을 계속 반복 합니다’……‘그들을 칼로 찌르고 싶습니다’
40여 분 간 이어지는 의사와 화가의 대화는 체계의 광기와 폭력이 개인의 광기와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작품 [한낮의 어둠]은 고백이라는 방식이 형사들에게서나 정신과 의사에게서나 마찬가지임도 말한다. 범죄자와 광인은 타자화되는 것이다. 권력은 무지막지한 폭력에서 다른 형태로 이동한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억압하는 권력에서 스스로 관리하고 조절하게 하는 편재적 권력으로의 변화를 말하며, 이는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의 주제이기도 했다. ‘한낮의 어둠’이란 역설적 표현은 광기를 떠올린다. 광기는 전시장이라는 공공영역에서 드러나고 분석된다. 정상/비정상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은 그의 초창기 작업인 ‘표준’ 전(2001)까지 소급될 수 있다. 김기라는 이번 전시를 영상으로만 채웠지만, 그의 작품에서 드로잉의 역할은 크다. 2014년 페리지 갤러리에서 열린 ‘마지막 잎 새’ 전에서는 이번 전시와 관련된 컨셉과 이미지들이 포함된 드로잉을 대거 선보인 바 있다. 그 전시에서 그는 명확한 하나의 표현을 위해 갈고 다듬는 방식이 아니라, 즉발적으로 이미지들을 쏟아냈다.
이미지들은 광인의 횡성수설처럼, 낙서처럼 배설된다. 그것은 보존된 것이 아니라 낭비된 것이다. 예술은 하나의 길이 아니라 다수의 길, 지름길이 아니라 우회로이기에 지배자들은 그것을 낭비적 요소로 간주한다. 그러나 생산지상주의가 자체의 한계에 이르렀을 때 그러한 낭비는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할 것이다. 과거의 사회에서는 축제처럼 공동체가 대대적으로 낭비하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가짐으로써 과잉 생산과 축적이 가질 위험성을 해소하곤 했다. 그러나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이 고무되는 세계화 시대에는 과잉축적의 위험이 전쟁으로나 해소된다. 무한한 성장만을 원하는 현대사회에서 전쟁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체에 내장되어있다. 보통 깨끗한 벽을 더럽히는 낙서는 위반된 금기를 상징한다. 사회는 금기를 통해 질서가 정립되고 유지되지만, 역사는 위반되지 않는 금기도 없음을 알려준다. 낙서 스타일의 드로잉은 여러 이미지들이 어지럽게 겹쳐 있는 양상이다. 영상을 포함하여 그의 모든 작업의 기본이 되고 있는 드로잉은 신체의 여러 구멍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운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연결된다. 그것들은 끝없는 ‘그리고’, ‘또는’이라는 접속사를 통해 나열될 뿐 유기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계층화된 질서를 암시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뿌리줄기처럼 사방팔방으로 접속이 가능한 ‘기관 없는 신체’(질 들뢰즈)이다. 유기체는 자기방어적인 항상성에 충실하다. 그러나 유기적 질서가 해체되어 있는 ‘기관 없는 신체’는 변형에 적합하다. [이념의 무게_한낮의 어둠] 등, 영상작품의 배경에도 종종 나타나는 드로잉은 동일자적 권력이 끝내 정복할 수 없는 타자적 욕망으로 충전되어 있다. 이번 전시에서 드로잉은 그림자처럼 배후에만 존재하지만, 발상을 자유롭게 전개하는 매개가 되고 있다. 가령 그의 영상은 부드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튀는 드로잉처럼 도약과 비약이 심하다. 그리고 이 빈 시공간 속에서 중요한 메시지가 생성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주어진 것을 보고 듣는 것을 넘어서 상상력을 요구한다. 그의 영상은 드로잉과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영상이 한 장 한 장의 드로잉처럼 표현되었다고 말한다. 가령 우연히 작가의 눈에 들어온 러프 컬러는 낙서하듯이 그려지고, 여기에 서사를 더해서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완성된다. 공간 때문에 이번 전시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조각이나 조각 설치작품도 그 출발은 드로잉이다.
그것은 김기라가 이후에 조각과 문화이론을 공부했지만, 처음에는 회화로 시작했던 작가의 이력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기는 그에게 일종의 모태 언어로, 회화는 물론 조각, 설치, 영상, 개념적인 작품에 이르는 전방위적인 작업의 씨앗이 되며 여러 버전으로 현실화된다. 남북회담을 소재로 한 [이념의 무게-마지막 잎새]에서는 분단 상황을 소리로 체험케 한다.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 중계를 시작으로 이에 관련된 수많은 이미지들이 있어왔지만, 통일은 아직도 요원한 상황에서 작가는 물신적 시각성을 넘어서고자 한다. 시각성이 추동하는 재현주의는 그 어떤 소재를 취해도 시각적 소비에 머무르게 한다. 구글링을 하면 죽 나오는 울고 웃는 그 광경들은 일종의 스펙터클이다. 그것은 [스펙터클]의 저자 기 드보르의 결론처럼 모순을 모순인 채로 봉합한다. 관객이 들어간 방은 컴컴하고 당시의 녹취 자료를 각색해서 대사 연기를 한 성우의 목소리만이 들려온다. 작가는 만남의 현장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당국의 거부로 보지 못했기에 어둠 속 상상으로 구현했다. 부재와 결핍은 작업의 불가능이 아니라 작업의 몸통으로 전화된다.
어둠의 방 속에서 관객은 한반도가 아직도 어둡다는 것을 체감한다. 이 작품은 주제 면에서 [이념의 무게_북으로 보내는 편지_수취인 불명_황해](2013)를 떠올린다. 그것은 만나서 같이 냉면이나 먹자는 소박한 메시지를 황해에 띄워 북한 쪽에 보냈던 작품이다. 분단을 주제로 한 그의 작품들에는 같은 민족끼리 가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상황이 드러나 있다. 그들의 대화가 다 녹취되어있다는 것, 그리고 남북당국자들이 함께한다는 것은 담론과 권력이 서로 내재적인 관계임도 알려준다. 김기라는 분단 같은 거대 담론뿐 아니라, 일상에 편재하는 미시 담론도 문제 삼는다. 작품 [99일_미래로 돌아가다 2015]는 매일 우리가 접하는 뉴스 프로그램을 활용했다. 방송국의 협조를 얻어 구해온 뉴스 영상에서 아나운서들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는 산뜻한 멘트로 뉴스를 시작하지만, 그 뒷배경은 지금여기의 총체적 난국을 알려준다고 할 수밖에 없는 갖가지 사건사고 이미지들이다. 그는 무엇을 특별하게 강조한 것이 아니라 뉴스 앞머리만 수집해서 편집했을 뿐이다. 작가는 예술보다 더 강력하게 다가오는 현실은 그 결을 최대한 살린다. 많이 가공하지는 않는다.
물론 현실을 현실로 다가오게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예술적 장치의 힘이다. 그의 작품은 평이한 실행이지만 평온해 보이는 일상의 실체가 잘 드러난다. 이 작품 옆에 배치된 작품 [On the Bridge]는 다리 위에서 물 아래로 자살을 암시하는 것으로, 갖가지 사건사고가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사회적 죽음임을 보여준다. 어떤 정치인은 세월호 사건을 ‘단순한 교통사고’라고 표현하기도 해서 공분을 산 바 있는데,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의 자살률을 보여주는 조용한 죽음들이다. 요 근래의 우리의 일상을 뒤흔든 사건 중에서 가장 큰 사건은 세월호 침몰일 것이다. 그 사건을 우리가 결코 안녕하지 않음을, 그리고 안녕할 수 없음을 알려주었다. 작품 [지워진 길 그리고 빛없이 있었던 것 2015]는 자식과 손자를 양차 대전 중에 잃어 열렬한 반전주의자가 된 독일의 화가 케테 콜비츠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자식을 보호하려는 모성 이미지는 세월호 사건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드러내는 무용으로 가시화되었다. 여기에는 전문 무용수는 물론 아역 배우까지 다수가 출연한다.
김기라는 이번 전시를 위해 스텝 진을 포함하여 근 100명이 넘는 이들과 협업을 진행했다. 소위 무명시인이라고 말해지는 시인 위재량도 그들 중 하나이다. 그는 서울시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재직하여 난지 물 재생 센터에서 분뇨를 처리하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시인으로 등단했던 사람이다. 청소부 시인의 작품으로 김기라는 영화감독과 함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이를 위해 하위문화의 뮤지션과도 협업했다. 오프닝 퍼포먼스에는 시와 음악을 연결하며 힙합 공연을 할 것이다. 배우, 무용가, 뮤지션, 영화감독, 정신분석가, 시인 등등 그가 이번 전시를 위해 불러 모은 이들은 단순한 출연자가 아니라, 현대미술의 공동작품자가 되었다. 김기라의 현실 참여적 작품이 단순한 소재주의나 예술을 도구화시키는 것이 아닌 것처럼, 타자들은 담론의 장에 함께 참여한다. 그래서 전시장은 동시에 공론장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작품의 창조자이자 주체이기보다는 매개자이자 상호적 주체로 자리매김 된다. 축제와도 같은 이러한 대화적 상상력 덕분에 묵직한 현실의 주제들은 자체의 무게로 가라앉지 않는다. 그것은 망망대해에서 우리의 좌표를 알려주는 부표처럼 떠 있다.
Critic 2
메타모르포시스, 포착된 자본
조은정 (미술사학자, 미술평론가)
‘표준’에서부터 ‘분단’까지. 김기라는 자신이 속한 현대 한국사회 내부의 이슈를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반권력적 성향을 지닌 작가이다. 작품이 잘 팔리기로 이름난 작가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는 유명 갤러리 소속작가이기도 한 그에게서 반권력적 요소를 언급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시각적 체계를 전복시키고, 인식적 세계관에 경종을 울린다는 일상화된 현대미술에 대한 설명문은 정확히 그에게 들어맞는다. 그의 작업은 ‘불편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현대’를 벗어난 적이 없고, 전통이 되어버린 온갖 터부를 건드리지만, 조형언어의 새로움이라는 도식에서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다. 물론 반권력적인 작업 또한 실은 저항이란 권력의 체계에 의해 생성되는 탓에 전적으로 체계를 침식시킬 수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장치일 수도 있다는 불편함을 떨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햄버거에서 지젝(Slavoj Zizek, 1949~ )까지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들이 작가에게 포착된 순간, 그 어떤 것도 포르말린에 적신 핀에서 자유롭지 못한 곤충처럼 표본화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유의미하다.
그는 “조화와 공존이 없는 번영은 폭력”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 사회에 떠도는 증기같은 관념들이 실은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호기로움에 감탄사를 불러일으키는 초기의 젊은이다운 실험적 몇몇 작품을 지나, ‘우리 내부’의 소수에 대한 집중에서부터 대중을 향한 포화를 열었다. 그의 주목할만한 첫 개인전 명은 <표준>이었다. 표준은 한국 근대사회를 규정하는 가장 힘 있는 언어 중 하나이다. 사적인 자본인 공장에서 생산되는 모든 제품들은 국가가 규정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인 ‘표준’에 맞추어져야 한다. 공업표준은 물품을 상품으로서 유통시키게 하는 인증서이다. 근대화와 함께 국가권력으로서 행사된 ‘표준’의 시스템은 당연하게도 문화와 인간에 적용되었다. 신사임당이나 세종대왕의 모습을 전 국민이 모두 하나의 모습으로 상상하는 집단성의 원동력이 바로 ‘표준’이다. 위로부터의 강력한 제재의 수단으로 동원된 공업적 표준이 사회 구성원에게도 적용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문화와 개인에게 적용되는 ‘표준’은 내부의 존재를 타자화하고 개인의 차는 거세된다. 결국 억압과 폭력에 의한 표준화 시스템은 주체를 표준화를 향한 욕망적 존재로 화하게 한다.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이 실체들, 구별의 욕망과 그것을 도모하는 것들의 욕망에 대한 드러내기이다.
그의 작품에 따르자면, 표준의 준거는 권력적이어서 통합이 아닌 타자를 생산하기 위한 시스템의 원리일 뿐이라고 해석된다. 표준은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에게 가해졌던 것과 같은 분리 혹은 격리의 정책을 정당화한다. 근대 위생과 이성의 ‘합리적인’ 대응 방식이 식민지 권력을 정당화하였던 것처럼, 다운증후군과 자폐아라는 이른바 장애는 그들의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방식에 의해 구별하게 한다. 빠르게 재생된 춤 추는 장애우의 녹화 화면은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빠르게 재생된 필름 안에서 우스꽝스럽지 않을 수 있는 인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지팡이를 흔들며 걷던 뻗정다리 찰리 채플린의 가속화한 필름 속 삶이 눈앞을 스칠 때, 장애와 우스꽝스럽다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몫이 된다.
장애인 부부에게 명품 옷을 입혀 결혼사진을 찍어주는 <웨딩프로젝트>는 사회적 차별이 실은 자본주의의 속성임을, 그 욕망에서 발원한 것임을 드러낸다. 명품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 사진을 찍는 호사를 장애인 부부에게 누리게 한다. 결혼식 사진이라는 일상이 꿈을 실현하는 프로젝트 같아 보이는 이 낯섦의 실체는 무엇일까. 장애와 비장애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별 짓고 게토화 하는 전략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결과는 생각보다 참혹하다.
실체가 없는 관념들은 사회구성원의 고통의 실체이기도 하다. 임신과 육아에 의해 커져 버린 몸체의 아줌마들은 사회구성원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살을 빼야 한다. 출렁거리는 지방층은 더 이상 지모신의 당당함이 아니라 게으름과 식욕이라는 자본주의의 악을 상징할 뿐이다. 제어되지 않는 신체의 반응을 넘어서야 하는 아줌마의 비현실적 노력의 결과로 그들 삶은 현실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힘겹게 올라간 고층 건물 밖으로 내던져진 카메라가 훑는 시선들을 쫓는 우리의 시선이 눈물범벅이 되는 것은 아이엠에프-IMF, 나는 F 학점이다-를 겪은 1997년 이후 한국에서의 삶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 작가의 숨소리가 삽입됨으로써 가정의 가계를 책임지는 가장을 떠올리게 되고 자살을 택한 그가 바라본 마지막 세상의 모습을 공유함으로써 ‘루저’의 시선을 나 또한 갖는다. 시선의 공유를 통하여 작가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벗어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이른바 YBA 작가들을 대거 배출한 골드스미스에 유학을 다녀왔다. 어느 정도 학벌이 작용하는 한국사회에서 주변부에서 중심으로의 이동을 작가 스스로 경험하였다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서구세계의 유학은 일상적이지만 소수의 일이고, 과거 국가의 인재양성시스템에서부터 부모세대의 자본주의적 사회계층 형성의 욕망 체계로 이동되었지만 교육을 통한 계급의 차를 낳는다는 점에서는 변한 게 없다. 공리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의 학습은 국내에 돌아와 재회한 자본주의적 욕망의 천박함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차별과 편견에 대한 거친 항거와도 같았던 그의 작업이 욕망구조를 파헤치는 데 주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근대화에 동반된 상품의 선전과 정치적 선동의 프로파간다인 선전이 유비되는 언어적 작업은 철저히 자본의 모습을 띤다. 팝아트와 정크푸드를 떠올리게 하는 <Coca Killer>는 한국사회에서 단순한 자본주의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 이후 미국 군정과 그에 따른 서구 자본주의에 의해 생성된 한국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을 은유한다. <We are the One>은 한국인 모두에게 88올림픽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급하게 편승한 코스모폴리타니즘의 허구성을 또한 은유한다. 그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고 인기 있도록 한 한창때 네덜란드 정물화를 닮은 화면은 밝고 반짝이며 세부를 들여다보는 재미로 유혹하는 키치의 모습이다. 화면 가득히 많은 것들이 그려져 있다. 먹다 남은 더러운 콜라컵에 붙어있는 하잘것없어 보이는 파리와 메뚜기들이 메멘토모리, 개선장군의 뒤를 따르며 죽음을 기억하라라고 외치는 고대의 노예임은 누구나 안다.
과잉의 이미지들은 <Security Garden as Paranoia>, <Super Monster>시리즈에서 극대화한다. 갤러리 안 선반에 얹힌 물건들의 일관성 없음, 영웅적 괴물이라는데 어이없는 모습 앞에서 선택된 혹은 수집된 이미지에 직면한다. 서양인들이 동양의 물건들로 수집한 것들은 기호로서 조합하면 맥락없는 단어임에도 다다처럼 그것은 동양의 모든 것으로서 작동한다. 동양이라는 개념은 결국 물건으로서 상징된다. 그것은 개인의 공간으로 옮겨올 때조차 제국주의의 박물관적인 시각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최근의 <마지막 잎새>는 그리하여 글로컬리즘에 기반한 분단 이미지 소비하기가 아닌 지점에 이른다. 우리 내부의 타자, 목소리만 있고 실체는 없는 그들, 떠도는 욕망의 비가시적 이미지는 우리 내부의 주변부의 상징적 기호로 작동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작동의 메카니즘을 응시하는 작가는 한국사회의 특이한 현상을 소비와 착취, 열광과 냉소의 무한궤도로 파악한다. 자본주의의 장인(匠人)으로서 그의 작업은 스펙타클 하지만 공허하고, 소박하지만 강렬하게 한국 현대사회의 일상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