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순택

노순택
노순택(1971-)은 분단 현실을 주제로 한 사진 작업을 한다. 분단이 실제로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으며 우리 사회와 개인의 삶을 어떻게 왜곡시켜 왔는지를 제시해왔다. 그는 다큐멘터리 보도사진에서 출발하여, 『분단의 향기』(2005), 『얄읏한 공』(2006), 『붉은 틀』(2007), 『비상국가』(2008) 등 다수의 책들을 출간해 왔다. 관통하는 주제는 분단 이데올로기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노순택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단지 이념의 대립으로 풀어나가기 보다는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으며 미적 감각을 동반해 시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대를 끌어내고 있다.

Interview

CV

<주요 개인전>
2013
‘어부바’, 류가헌 갤러리, 서울, 한국
2012
‘망각기계’, 학고재, 서울, 한국
2010
‘좋은 살인’, 상상마당, 서울, 한국
‘성실한 실성’, 고은미술관, 부산, 한국
2009
‘Estat d’excepció’, La Virreina, 바르셀로나, 스페인
2008
‘비상국가’, Württembergischer Kunstverein, 슈트르가르트, 독일
2007
‘붉은 틀’, 갤러리 로터스, 파주, 한국
2006
‘얄읏한 공’, 신한갤러리, 서울, 한국
2004
‘분단의 향기’, 김영섭화랑, 서울, 한국

<주요 단체전>
2013
‘사진과 사회’, 대전시립미술관, 대전, 한국
‘에르메스 미술상’, 아틀리에 에르메스, 서울, 한국
2013
‘Real DMZ’, 아트선재센터, 서울, 한국
2012
광주비엔날레 “라운드테이블”, 광주, 한국
‘PUBLIC: Occupied Spaces’, Museum of Contemporary Canadian Art, 토론토, 캐나다
2010
‘Re-Designing the East’, Württembergischer Kunstverein, 슈트르가르트, 독일
미디어시티서울 “신뢰”,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죄악의 시대’, 대안공간 루프, 서울, 한국
2008
‘39조2항’, 아트선재센터, 서울, 한국

Critic 1

앓는 작가 노순택

김현호(사진비평)

세계는 여러 겹의 반투명한 층으로 조각조각 나뉜 거대한 덩어리다.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의 삶이란 지독히도 멀다. 우리는 좁고 얄팍한 층 안에서 제각기 살아가다 외롭게 죽는다. 동시대는 어쩌면 상상의 산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단순한 물리적 거리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명백히 서로 다른 시간과 속도를 살고 있다. 예를 들어 대의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최후 승리를 자랑스럽게 말하며, 지금이 역사 발전의 최종 단계에 위치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당대가 어째 동시대에 존재하는 먼 미래처럼 느껴진다면, 아직도 낡은 군복을 입고 산 속이나 사막에서 게릴라 투쟁을 벌여야 하는 이들의 당대는 여전히 지겹게 끝나지 않는 근대의 악몽 속이다. 어떤 시간은 빛살처럼 날아가고, 어떤 시간은 뒤를 돌아보며 흐물흐물 웃는다. 더 빠르게 질주하려 하는 더운 욕망과 낙오되어 튕겨나가지 않으려는 질긴 공포가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시간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지금-여기’의 세계를 직조해낸다.
일상은 금이 간 유리잔처럼 연약해서, 작은 사고로도 꽤 간단히 부서지고 만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세계에서 아무리 참혹한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우리의 일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벽 너머에서 아무리 끔찍한 울음소리가 들리더라도 우리는 어제처럼 출근을 하고 학교에 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단절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동시대를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은, 매일 흥미진진하게 다른 이들의 세계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조각난 세계의 다른 층에 침투해 들어가서 이미지를 채취해 오는 것은 탄생 초기부터 사진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였다. 어떤 이들의 세계는 밝고 화려하고 말랑말랑하고, 어떤 이들의 세계는 숨막힐 듯 어둡다. 가장 용감하고 뜨거운 사진가들은 벽을 부수고 다른 이들의 시공간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든다. 그들로 인해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힘든 이들을 돕기 위해 안온한 삶을 아주 조금쯤은 포기할지도 모른다. 사진은, 사진가들은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바꾼다고, 그렇게 믿어져 왔다.
사진가들은 카메라를 통해 단절된 세상을 연결하며, 약자를 돕고 강자에 맞서는 자신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다.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그들의 뜨겁고 오롯한 열정, 영웅적인 사진가의 신화에 우리는 열광한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는 그들은 충분히 칭찬받을 자격이 있을 것이고, 어떤 사진들은 실제로 세상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글은, 가장 앞장서 달리면서도, 자신과 자신의 사진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마는 사진가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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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은 올해 마흔세 살의 남자다. 매체 기자로 사진을 시작해서 해외의 유수한 미술관과 비엔날레에 ‘작품’을 내보내는 ‘아티스트’가 된 드문 경우다. 물론 운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노순택의 책임은 아니다.
하지만 한 비평가는 노순택에 대해 꽤 독한 말들을 늘어놓기도 했다. ‘한국 사진의 역사가 가질 수 있는 어떤 최대치’라는 상찬을 늘어놓은 지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아서였다. 다시 읽어 보면 꽤나 오글오글한 단어들이다.

이천 년 전 예수의 말만큼 ‘믿음’을 명쾌하게 정의하는 것은 없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않는 것의 증거다. 고향을 찾는 이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나, 그들의 고향은 바로 하늘에 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중략) 하지만 노순택처럼,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이는 고향에 가지 못할 것이다. 그는 정치적인 것도 사진적인 것도 포기하지 못한 채 괴로워하는 활동가이자 작가로 머무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머리에 ‘의식 있는 작가’라는 관을 씌울 것이고, 다른 이들은 정치적인 이미지를 팔아서 ‘아트’를 한다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어떤 손은 그를 위대한 작가로 끌어올릴 것이고, 또 다른 손은 그를 잡아서 바닥에 내팽개칠 것이다. 노순택은 방황할 것이고, 평온을 찾지 못할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 모든 것이 노순택이 자초한 일이고, 그가 온전히 감내해야 할 몫이다.

나약한 비평가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강력한 언어로 작가와 작품을 포획하고 싶은 무책임한 욕망에 패배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 년이 지났다. 이제는 이 글을 이어서 써야 할 시간이다. 바뀐 건 없다. 전시장의 사진들은 노순택이 변함없이 현장에서 끈질기게 사진을 찍고 있었음을 증언할 것이다. 세계는 여전히 어둡다. 구름은 해를 가리고, 물대포는 눈송이처럼 표표히 날리고, 노순택은 구르듯 달리면서 사진을 찍는다. 어둠 속에서 그의 플래쉬가 희미하게 반짝이고, 사람들은 웃는 듯 우는 듯 괴이한 모습의 사진이 된다. 노순택은 표본을 갈무리하듯 사진을 정성껏 정리해서 미술관의 벽에 건다.
그러나 작은 승리도 좀처럼 오지 않고, 지겨운 패배만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매향리에서, 대추리에서, 용산에서, 강정에서 노순택과 동지들은 연이어 패퇴하고 전선은 점점 더 뒤로 물러난다. 그의 세계와 사진은 이 년 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의 사진을 겨누는 내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연 조금이라도 더 먼 곳으로 갈 수 있을까? 별로 자신은 없지만 나는 죽어라고 써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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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의 이번 작업은 사진 찍는 이들을 찍은 사진들이다. 현장에서 취재하는 사진가 동료들, 집회에 참석한 이들의 채증 사진을 찍는 경찰들, 기념 촬영하는 사람들, ‘셀카’를 찍는 노인들, 길에 누운 사람을 재미있다는 듯 찍고 있는 아이들까지, 사진 찍는 이들의 다양한 군상이 가득하다. 이 연작은 사진이 생산되는 순간의 상황은 사실 프레임 속의 완결된 이미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매우 잘 보여준다. 우리가 앉아서 받아보는 ‘결정적인 순간’의 뒷쪽에는, 사진가가 저렇게 한 다리를 들고 이상한 자세로 서서 렌즈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흐르는 시간의 어떤 이상한 순간을 사진으로 예리하게 베어내는 일, 그것의 뒤틀린 모습과 괴이함을 발견하는 일을 노순택만큼 잘 해내는 사진가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진 찍는 행위가 주는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시각화하는 것이라면 마틴 파가 먼저 했었다. 그는 피사의 사탑과 파르테논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의 모습을 교묘하게 뒤틀어서, 우리에게 도무지 잊기 어려운 이미지를 건네주었다.
<젊은 뱀>은 마틴 파의 그것처럼 간결하고 명쾌한 작업은 아니다. 작업 기간이 워낙 길어 <얄읏한 공>, <비상국가>, <좋은, 살인>등처럼 일관적인 미적 스타일을 지닌 연작이 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망각기계>와 같은 거대한 스케일의 대작도 아니고, <남일당 디자인 올림픽>처럼 일촉즉발의 첨예한 긴장감이 감돌지도 않는다. 여러 현장에서 채집한 사진의 편차는 꽤 크고, 여기에서 가시적인 주제의식을 해석해내기도 쉽지는 않다.
원래 이 사진들은 <조류도감>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노순택의 가장 오래 지속된 작업이다. 노순택은 이 연작에 <젊은 뱀>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사진 찍는 이들이 뱀처럼 여기저기에 스멀스멀 기어들어간다는 뜻일까? 도대체 뱀 같은 이들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알 수 없다. 고민이 많은 이들은 원래 이해하기 어려운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어쨌거나 사진 찍는 행위에 대해 노순택만큼 계속, 계속, 계속, 계속 고민하는 작가는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는 그 질문을 되짚어 올라가는 것으로 노순택의 사진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노순택은 처음부터 사진에 대해 질문하고 있었다. 작가 노순택의 ‘공식적인’ 경력은 2004년의 여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분단의 향기>라는 투박한 제목의 전시와 책을 들고 등장한 노순택은 그리 센세이셔널하지는 않았다. 전시와 책에 수록된 사진들은 잡다했다. 어떤 사진은 매체 사진의 직설적인 프레이밍 안에 박혀 있는 것들이었고, 다른 사진들은 노순택 특유의 뒤틀린 블랙유머와 독특한 미적 감각을 이미 지니고 있었다. <분단의 향기>는 작가 노순택의 유전자 정보가 기록된 DNA와 같았다. 정치적인 주제의식과 독특한 미적 감각, 윤리에 대한 강박, 매체 사진가 특유의 작업방식 등은 훗날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되어 훗날 ‘작가 노순택’을 직조할 것을 예고했다.
매체를 그만둔 지 삼 년이 지난 때였지만, <분단의 향기>에서의 노순택은 여전히 ‘매체 사진가’처럼 보였다. 현실에 대한 강렬한 비판 의식과, 당면한 사회 현상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려는 집착, 부조리를 알리고 사회적 참여를 이끌어내려는 욕망과 강박이 사진에 그득하게 담겨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노순택은 자신의 사진에 대한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사진이란 건 어딘가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 내가 찍는 사진을 과연 믿을 수 있는 걸까? 마치 숙주 속에서 자라나는 나나니벌의 애벌레처럼, 그런 의심이 노순택의 사진 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노순택의 작업 방식과 매체 사진가들의 작업 방식이 그리 다르지는 않다. 그들은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작업할 것이고, 아마 현장에서는 서로 위화감을 거의 느끼지 못하면서 어울려서 사진을 찍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터질 듯 파열음을 내는 우리 사회의 현장에 달려들어가 분노에 떨며 셔터를 누른다. 폭력적인 시위 진압이 이루어지는 서울의 밤거리에서, 강제철거를 앞둔 평택 대추리에서, 백발이 성성한 늙은 신부가 악을 쓰며 전경과 맞서는 제주 강정마을에서 노순택은 사진을 찍어서 우리에게 보낸다. 우리는 그의 사진을 통해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게 된다. 전형적인 매체 사진의 기능과 효과다.
하지만 노순택은 사진을 찍으며 자신이 찍은 사진을 의심하는 독특한 인간이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내가 찍은 사진을 당신은 정말로 믿는 거냐고 질문한다. 사진에 대한 이런 차가운 의심과 매체 사진의 뜨거움 사이의 간격은 생각보다 더 멀다. 그 두 가지가 하나의 몸과 마음에 담겨 있기란 대단히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사실 ‘매체 사진가’와 ‘사진을 매체로 사용하는 작가’라는 정체성은 사뭇 다르다. 매체 사진가들은 자신이 든 카메라의 힘을 믿으면서 다른 이들이 사는 세계 속으로 거침없이 돌진해 들어간다. 그러나 이 뜨거운 사진들이 곧바로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딘가에 재현 가능한 진실이 있고 사진을 통해 그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식의 믿음은, 미학적으로는 대단히 보수적이다. 작가라면 사진이라는 매체의 영역과 한계에 대해 성찰하고, 그것이 생산해내는 진실조차도 의심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사진을 의심하고, 보는 이들에게 사고를 요구하면서, 거리를 달리는 노순택은 작가 노순택이 된다.
<분단의 향기> 이후 불과 두세 해 동안 작가 노순택은 고장난 소방 호스처럼 격렬하게 요동치며 마구 사진을 토해냈다. 대단한 작업량이었다. 그의 득의작인 <얄읏한 공>과 <비상국가>, <붉은 틀>이 거의 대부분 그때 만들어졌고, <조류도감>과 <국기사용법> 등의 수많은 작업이 함께 진행되었다. 연작으로 묶이지 않은 작업까지 포함한다면 더욱 엄청난 분량이었을 것이다. 이것들은 하나같이 매체와 예술 사진의 경계 사이를 애매하게 맴도는 작업들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보자. <얄읏한 공>과 <비상국가>가 만들어진 2005년과 2006년의 평택 대추리는 서글펐다. 한미 양국의 ‘협의’와 국회 비준을 거쳐 미군부대 이전이 확정되었고, 주민들은 대를 이어 살아온 땅에서 난데없이 쫓겨나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대다수는 토지 수용을 거부하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국방부는 법원에 토지보상금을 공탁한 후 강제로 땅에 철조망을 치고 땅에 심은 작물을 포크레인으로 뒤엎으며 사람들을 내쫓았다. 농투성이들은 ‘공권력에 정면도전하는’ 불순분자가 되었고, 노인들은 머리에 띠를 질끈 동여매고 대오를 이루었다. 한 뙈기 농토를 더 만들기 위해 대를 이어 맨손으로 갯벌을 파고 흙을 부으며 소금기를 빼려 발버둥쳤던 땅이었다.
그들은 고립되었다. 군과 경찰이 함께 대규모의 진압 작전을 펼쳐 6백여 명을 연행했던 것은 2006년 5월 4일과 5일이었다. 대나무를 든 농부들을 상대로 수십 대의 블랙호크 헬기가 떴고, 포크레인을 앞세운 용역들과 공병대가 마을로 밀려들어왔다. 하필이면 어린이날에, 다른 아이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선물을 조르고 있었을 바로 그 시간에, 어떤 아이들의 아버지와 삼촌들은 두들겨맞았고 학교는 부숴지고 말았다. 우리의 세계는 이토록 단절되어 있다. 한 달 뒤 우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붉은 악마가 되어 목이 터져라 월드컵을 응원하고 있을 것이었다.
이런 현장에서 노순택은 어떤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만약 전형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였다면 그는 우리에게 국가권력의 잔혹한 폭력, 선량하고 순박한 농부의 그렁그렁한 눈망울, 아이들의 천진난만함과 엄마들의 망연한 표정 같은 것을 사진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껏 분노할 수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눈물 한 방울 정도를 흘릴 기회로 삼았을 수도 있다.
물론 노순택의 사진들 중 그런 것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얄읏한 공>과 <비상국가>를 구성하는 사진들 대부분은 도무지 우리에게 감정이입할 틈을 주지 않는다. 사진은 마치 블랙코미디의 가장 괴상한 부분을 정지시킨 장면들 같다. 노골적인 폭력과 슬픔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고, 심지어 가해자와 피해자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 사진을 본 우리는 도대체 대추리의 전후사정을 알 수 없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단지 괴이하고 스산한 풍경들뿐이다. <얄읏한 공>의 둥근 레이더는 먼 곳에서 뜨는 달처럼 우리를 바라보고, <비상국가>의 전경들은 마치 몰려드는 갑각류들처럼 반짝이며 빛난다. 전경에게 포위당해 쓰러져 있는 농민들은, 너무나 선명해서 오히려 연극적으로 보인다.
노순택은 ‘에둘러’ 간다. 레이돔과 대추리 풍경을 겹쳐보면서 동양화 같기도 하고 연극 같기도 한 사진을 찍으며 맴돈다. 대추리에 어린 딸과 아내와 함께 ‘위장전입’해서 사진관을 열고 마을 노인들의 영정 사진을 찍는 활동가 노순택, 분노에 떨면서 뜨거운 저주와 비판의 문장을 써내려가는 저널리스트 노순택은, 독특하게도 카메라를 들 때만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황새울은 지금 공 타령할 때가 아니다”, 노순택은 자조적으로 푸념한다. 핑계도 댄다. “흰 공으로 먼저 갔지만, 흰 공과 함께 고단한 삶을 살아온 황새울의 농민들에게로 이야기가 흘러가기를 바랐다.”
노순택은 괴로웠던 것 같다. 이 사진들은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과 비슷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명백히 다르게 작동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작업 방식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사진 이미지가 ‘진실’을 기록할 수 있다는 믿음과, 세계의 참혹함을 우리가 사진을 통해 본다면, 그것을 없애기 위해 행동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현실에 옮기며 자신의 윤리를 실천한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자신의 좁고 얄팍한 층 안에서의 따뜻하고 무력한 삶에 익숙해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진으로 강타한다. 그들이 안온한 삶에 머물지 않고 분노하도록, 세계의 단절과 맞서 연대하고 공감하도록 하는 것이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마지막 윤리적인 목표다.
하지만 노순택의 윤리는 훨씬 더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그의 윤리는 두 가지 궤적을 그리며 공전한다. 첫째는 일반적인 매체사진가들과 마찬가지로, 뜨거운 현장을 기록해서 전해야 한다는 윤리다. 노순택은 열심히 현장에 달려가 악다구니들 사이로 카메라를 들이밀어야만 한다. 둘째는 그런 자신의 행위와 사진 매체의 한계를 의심하는 작가 노순택의 윤리다. 사진은 과연 기록할 수 있는가? 사진에 찍힌 만큼만 딱 기억하겠다는, 그런 망각의 도구이자 핑계는 아닌가? 안온한 곳에 앉아서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단지 이미지를 통해 감동을 얻기 바라는 것이 아닌가? 과연 당신은 내 사진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이런 의심은 무망하다. 지금까지 해결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매체의 한계를 더듬는 문제의식이 노순택을 작가로 만들지만, 매체사진가 노순택과는 불화한다. 사실 노순택의 작업이 흥미로운 것은, 그가 지닌 복잡하고 지독한 윤리적인 강박 때문이다. 윤리적인 강박이 있는 작가들의 작업이 그렇지 않은 작가들의 작업에 비해 훨씬 ‘재미있다’고 생각해 왔다. 예술의 사회적인 책무라든가, 예술가의 사회 참여 의무라든가 하는 ‘지루한’ 이유 때문은 아니다. 윤리적 강박이 있는 이들의 작업이 훨씬 이상하기 때문이다.
윤리는 작업을 강력하게 끌어당긴다. 거기에 완전히 포획당하면 지루하고 퍼석퍼석한 사진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윤리의 강박과 작가적 욕망, 남다른 미적 태도 등이 각각의 방향에서 작업을 끌어당기고, 작가가 그중 하나도 포기하지 못하고 안간힘을 쓸 때, 작업은 기괴하게 뒤틀리게 된다.
작가 노순택의 사진이 지닌 아름다움은 사실 윤리에서 나온다. 사진에 중독되어 있으면서도 사진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노순택은 자신의 사진에 함부로 사람들이 감정 이입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인간애를 강조하고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다고 믿는 기존 다큐멘터리 사진의 미적 감수성을 차단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사진이 온전히 정치적, 윤리적 목적에 복속된 프로파간다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더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노순택의 사진 중 뜨겁고 참혹한 현장에서 찍은 것들이 더 서늘하게 아름다운 것은 그 때문이다. 윤리의 인력이 더욱 강력하게 작용하기에, 여기에 끌려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기를 쓰고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과 부모의 모습을 찍은 <어부바>보다는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갈 위기의 현장에서 만들어낸 <남일당 디자인 올림픽>의 어떤 사진들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아름답다. 하지만 물론 작업들의 편차도 그만큼 커진다. <남일당 디자인 올림픽>의 어떤 사진들은 대단히 아름답고 불길하지만, 인력을 이겨내지 못한 어떤 사진들은 평범한 매체사진에 지나지 않게 된다.
노순택의 예리한 프레이밍과 순간 포착을 통해 국가 폭력과 부조리는 그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민낯을 드러내며, 매체 뿐 아니라 미술관에까지 자신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작가 노순택은 똑같은 질문을 계속 중얼거리며 끝없는 쳇바퀴를 향해 달린다. 보통은 그렇게까지 계속 고민하지 않는다. 사진을 찍는 이라면 한번쯤 수잔 손탁과 존 버거를 읽는다. 그리고 사진이 과연 윤리적인 것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하지만 그러고 난 뒤에는 누구나 ‘결론’을 짓는다. 사진을 포기하거나, 현장을 떠나 자신의 미적 태도와 매체의 한계를 충분히 시험할 수 있는 ‘작가’가 되거나, 이러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고통을 알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되거나 하는 것이다.
한번 앓은 이들은 다시 앓지 않는다. 살다 보면 예전의 뜨거운 질문들을 다시 만나기도 하지만, 이미 이것은 끝난 문제다. 예전에 겪은 작은 열병의 경험은 오히려 새로운 열병에 대한 면역력이 된다. 하지만 노순택은 계속 앓고 앓으면서 열에 들뜬 채 사진을 찍는다. 끊임없이 망설이며 현장을 맴돌며, 작가와 다큐멘터리 사진가 사이를 오간다. 이런 깊은 열병 앞에서는, ‘사진이 좋지 않은 것은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의 다큐멘터리 사진의 클리쉐는 한갓 허장성세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예전에 노순택이 한국 사진의 어떤 최대치라고 썼다. 지금도 그렇게 믿는다. 노순택 앞에도 노순택은 없고, 노순택 뒤에도 노순택은 없을 것이다. 어느 누가 이런 무게의 고민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다음에는 노순택이 계속 방황할 거라고도 썼다. 역시 마찬가지다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 이제 와서 노순택이 모르는 척 사진에 속아줄 수도 없지 않은가.

다시 이번 전시로 돌아가자. 그리고 다시 사진가들의 괴상한 모습을 바라보자. 그들은 미디어에서 그렸던 것처럼 아름답지도 영웅적이지도 않다. 우스꽝스러운 촬영 포즈를 취한 모든 사진가들의 사진이 노순택의 셀프 포트레이트인 것만 같아서 조금은 마음이 무겁다.
이 사진들의 결은 다른 작업들과 꽤 다르다. 노순택은 항상 프레임 건너편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그리고 자신은 불편부당한 기록자가 아니며, 현장을 찍은 사진 역시 언제든 현장을 뒤트는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말해 왔다. 이제는 사진이 생산되는 순간의 이상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사고를 강요하고 있다. 예전의 작업들이 정치적인 장면들을 찍으면서 사진의 한계에 대해 에둘러 말하고 있다면, 이 사진들은 사진 자체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하면서 역으로 자신이 찍었던 현장 사진들의 불완전성에 대해 사유하도록 한다. 굳이 별 생각 없는 사람의 손목을 잡아끌며 제조과정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순대 공장 사장 같다. 자, 이래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겠어? 좋은 취미는 아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사진을 의심하면서 계속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가 그의 심각한 사진 중독 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의 사진에세이인 <사진의 털>을 보면서 나는 노순택이 좋아하는 것이 사실은 사진에 대한 의심,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진이란 얼마나 변화무쌍하고 변덕이 심하며, 그러므로 매혹적이지 않은가. 사진에 대한 의심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계속 중독자처럼 찍고 쓰고 할 수 있을까.
작가로서 사진 중독자가 지닐 수 있는 장점은 아마 엄청난 작업량일 것이다. 순간을 포착하는 노순택의 작업은 엄청난 작업량이 있어야 완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매체 사진과는 꽤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사진을 만들어내는 노순택은, 매체 사진가의 단련된 빠른 손과 엄청난 작업량을 활용해서 작가가 되는 드문 케이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노순택은 쉽게 지치거나 고갈되지는 않을 것이다. 단절된 세계는 계속 파열음을 일으키며 삐걱거릴 것이고, 원한다면 노순택은 계속 거리를 달릴 수 있을 것이다. 노순택은 여전히 자신이 분단의 현실 때문에 카메라를 들고 방황하는 거라고 믿으면서 아름답고 괴상한 사진들을 계속 만들어낼 것이다.
노순택은 쉽게 변하지 않는 종류의 인간이다. 심지어 2013년에 출간된 <어부바>의 도록 맨 앞에도 “핵전쟁의 전운이 감도는 / 2013년 한반도의 봄 / 한가하게 어부바 타령이나 하고 있다니”라고 썼다. 2006년의 <얄읏한 공>의 서문과 거의 비슷한 구조의 말이고, 2004년의 <분단의 향기>와 비슷한 세계관이다. 참으로 변치 않는 성격이고 황소 같은 믿음이다. 예전에 노순택과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대부분 ‘분단의 현실’의 자리에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든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 같은 것들을 끼워넣은 것 같다.
그러므로 작가 노순택 역시 쉽게 고갈되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통일이 되고 남북한이 빠르게 동질화되는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세계에는 여전히 문제가 많을 것이다.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빛의 속도로 유통되고 소비되는 사진 역시 예전보다 더욱 강력한 믿음과 불신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작가 노순택이 사용하는 재료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점점 강한 자극을 원하는 중독자 노순택이 과연 이런 것들로 만족할 수 있을까. 흰머리를 날리며 현장을 뛰어다닐 때도 지금과 똑같은 사진을 찍으며 흡족하고 있을까. 생각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작업이 다르게 변하는 경우도 많다. 생각보다 노순택의 사진은 꽤 많이 달라졌다. 칼날처럼 빠르고 날카로웠던 스냅 연작인 <좋은, 살인>과 의심할 여지가 없는 대작 <망각기계> 이후의 노순택은 어째 예전처럼 장난스럽지가 않다. 사진의 톤과 컬러가 가벼워졌고, <얄읏한 공>이나 <비상국가> 때처럼 블랙 코미디 같은 농담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요즘의 노순택의 사진은 예전보다 훨씬 처연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젊은 뱀>은 노순택이 오랫동안 만지작거리다 내놓은 카드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순택의 손에 남은 카드는 얼마나 될까? 사진이 만들어지는 현장의 괴상함에 대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뒤에는 무엇을 보여줄 생각일까? 망연한 질문이지만 노순택이 쉽게 멈추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낼 수 있는 카드가 모두 떨어졌을 때 진짜 게임이 시작된다. 더는 갈 곳이 없을 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더 중독될 수 없는 순간에 진짜 중독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이 글을 형식과 내용이 함께 진보할 것을 요구하는, 나를 포함한 비평가들의 무책임에 대해 쏘아붙이며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런 순간이 대체 언제 오기라도 했었다는 말인가. 과연 올 수 있으리라 믿는가. 고작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짧은 순간 같은 것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으면서, 작가들 앞에서 거드름만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글을 쓰면서 마음이 달라졌다. 작가 노순택 본인이 그러겠다는 데 어떡할 것인가. 사진의 내용과 형식의 진보에 대해 정작 자신이 중독되어 있는데 다른 방법이 있는가. 그러므로 수잔 손탁을 읽고 조용히 카메라를 내려놓았던 우리 낙오자들은, 앓는 작가 노순택의 우스꽝스럽지만 처연한 뒷모습을 함께 조용히 바라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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