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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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CV
<주요개인전>
2010
형용사적 삶 > 넌센스 팩토리, 아트선재센터, 서울
2005
Transit Life, 금호미술관, 서울
2004
Dream…in Life, 인사미술공간 기획초대전, 서울
<주요 단체전>
2013
미지의 힘, 토파네 이 아미레이 컬쳐 앤 아트 센터, 이스탄불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2013: 프롬 더 노스, 아트선재센터, 서울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2013, 철원
Move on Asia, ZKM, 카를스루에
2012
Kunst Mit Schokolade, 리터 미술관, 발덴부르크
2011
소통의 기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서울
Be mobile in immobility, creative politics, DEPO, 이스탄불 / 토탈미술관, 서울
스물 하나의 방, 백남준 아트 센터, 용인
미지의 대지, 여성비엔날레,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인천
2010
만인보, 광주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광주
2009
Yang Ah Ham&Fahrettin Orenli, 암스테르담 그래픽 스튜디오(AGA), 암스테르담
2008
Translocalmotion, 상하이비엔날레, 상하이미술관, 상해
에르메스코리아 미술상, 아틀리에 에르메스, 서울
Frieze art fair 2008, 프로젝트 PiST, 레전트 파크, 런던
플랫폼 2008: I have nothing to say, and I’m saying it, 구 서울역사, 서울, 한국
2007
Open Ateliers, 라익스 아카데미, 암스테르담
my lovely day-아시아 현대미술, 로댕갤러리, 서울
한국현대미술-원더랜드, 중국국립미술관, 북경
비디오날레11-IAS Media, 본 미술관, 본
2006
두 도시 이야기, 부산비엔날레,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El mar que tedos noms: videoart de Corea, 까사 아시아, 바르셀로나, 스페인
2005
올해의 예술상, 마로니에 미술관, 서울
e-flux video rental, 인사미술공간, 서울
번역에 저항한다, 토탈미술관, 서울
DMZ_2005, 파주출판단지, 헤이리, 파주
Ilusions of Memory, 중국-유럽 아트센터 (CEAC), 하문
<지원 / 수상>
2012 –2013
몬드리안 재단 (프로젝트 지원),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2010
몬드리안 재단 (개인전 지원),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2009
BKVB 네덜란드 시각예술 디자인 건축 재단,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2008
에르메스 재단, 에르메스 미술상 노미네이트, 한국
2005
예술위원회, 올해의 예술상, 최우수상, 한국
2004
박건희문화재단, 3회 다음작가상, 한국
Critic 1
비/의미
- 함양아의 미술에서 사회적 삶1
강수미 (미학, 동덕여자대학교 회화과 교수)
1. 독해법
“‘표류’라는 단어는 정치가 일련의 규칙들을 존중해야 하고 법이 사회적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 단어들은 오직 하나의 의미만을 갖고, 삶에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어의 확립된 의미에 따라서만 그 단어들을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을 두렵게 한다. 이는 전적으로 틀렸다. 말을 할 때, 우리는 단어의 의미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발명한다. (…) 이해한다는 것은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 관계의 미끄러짐이다 (…)”2
여기 인용한 말은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비포(Franco Berardi Bifo)의 동시대 자본주의 비판 중 한 대목이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를 ‘기호자본주의’라 정의했다. 사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물질적 상품을 생산하던 근대 산업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르게, 기호들의 미묘한 차이를 이용하는 각종 파생금융상품이나 감정노동 및 서비스산업이 사회적 생산과 소비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비포의 규정은 놀랄 것이 없다. 그런데 비포는 그 기호자본주의에서 “새로운 관계의 형식을 발명할 수 있는” 기호의 자율성(autonomy)이 “거짓말, 속임수, 사기”를 용인하는 기호의 변칙성(anomaly)으로 전도되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우리가 한때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 받아 무척 긍정적인 의미로 썼던 ‘표류’라는 용어는 그런 전도된 상황을 꿰뚫어 볼 대상 중 하나다. 현대 기호자본주의에서 ‘표류’는 경제권력(economic power)이 기호와 지시대상의 미끄러짐이라는 언어의 속성을 교묘히 활용해 정치의 규칙과 법의 정의를 자의적이고 변칙적으로 휘두르는 현상으로 오염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표류’는 자유롭고 풍부한 의미의 “발명”이라는 언어학적 이상 ―위 인용문은 비포가 그 원론적인 맥락을 짚은 것인데― 에서 탈구돼 경제 권력의 초법적 축재(蓄財)와 거짓 정치의 앞잡이로서 “독”처럼 퍼진 것이다. 의미의 발명은 이제 비(非)의미의 양산, 의미의 부패로 더럽혀진다.
정치, 경제, 인문을 교차시킨 위와 같은 동시대 비판은 함양아의 미술을 이해하는 데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여러 차원에서 도움을 준다. 그것은 우선 함양아의 작업, 특히 작가가 2010년부터 현재까지 지속성을 가지고 발전시키고 있는 프로젝트 〈넌센스 팩토리 Nonsense Factory>의 조형 예술적 면모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적 담론 가능성을 짚는 데 지적 배경이 될 수 있다(우리는 이에 대해 글의 맨 마지막에 다룰 것이다). 또 작가가 그간 미술의 범위에서 탐구해온 주제를 ‘사회적 삶의 이행 또는 유동성’, ‘관계의 자유 또는 불안정성’, ‘의미의 혼란 또는 가치의 오염’ 같은 화두와 접목시켜 해석할 때 이해의 기초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의 독자는 아래 단락으로 내려가기 전에 위 비포의 문장을 다시 읽으며 양가적 의미를 새겨봤으면 한다.
2. 이행
함양아는 1990년대 말 한국 사회 전반 및 미술계가 바야흐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다양화, 다변화, 다원화의 길로 나아가던 즈음 활동을 시작해 현재까지 국내외를 오가며 비디오 & 설치미술을 중심으로 주요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미술가다. 아마 독자에게 이 같은 작가 설명은 최근 다수의 미술 비평문에서 쉽게 마주치는 흔하고 진부한 문구처럼 읽힐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각종 전시 카탈로그나 갤러리 안내문에서 압축적 정보 제공의 모양새를 취하면서 암암리에 해당 작가를 ‘국제적 작가’로 홍보하는 위와 비슷한 말들과 마주친다. 바로 그 작가를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작가의 왕성한 국내외 활동에만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그런데 함양아의 경우 위에 쓴 문장은 작가의 화려한 경력보다는 작가의 미술(작품들)이 지닌 내용적 특수성에 더 많이, 더 중요하게 걸리는 말이다. 좀 싱겁게 들리겠지만, 그 사이 함양아는 말 그대로 국내와 국외 이곳저곳을 유목민처럼 떠돌면서 생활했고, 그런 삶의 양태는 그녀의 개별 작품들에서 사적 주체와 다수의 공동체, 사회의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들여다보는 특정 이미지 및 성찰로 결정화되었기 때문이다. 또는 뒤집어서 함양아의 미술이 작가로 하여금 그런 두 차원들을 ―친밀한 곳과 낯선 곳,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회의 가시성과 비가시성― 이행하는 삶(“transit life”)을 살도록 이끌어 왔기 때문이다.
특히 함양아는 자신과 같은 동시대인의 사회적 삶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그 관찰로부터 얻은 현실의 이미지와 본인의 경험을 기초로 한 성찰을 영상 및 설치미술 속에 결합해내는 데 독특한 집중성을 발휘해왔다. 말하자면 이 작가의 미술은 일관되게 나, 너, 우리의 삶이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현실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때마다 작가의 주관적 사변과 물리적 창작행위는 그 현실을 되비추고,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영상매체 및 설치미술의 언어를 통해 다른 현실로 구현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이때 ‘다른 현실’이란 함양아의 각 작품이 완전한 허구나 순진한 상상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직접적이고 즉자적으로 주어지는 현실을 우리가 그녀의 작품을 통해 달리 보고 달리 생각할 수 있도록 작가가 의도를 설정하고 예술적 기술을 발휘해 현실의 피상성과는 다르게 구축했다는 의미다. 예컨대 우리 대부분은 끊임없이 디지털 매체를 통해 가상공간을 건너다니고, 자동반사적으로 탈것에 몸을 맡긴 채 이동하며, 여행 가방을 끌고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글로벌리즘시대의 일상을 산 지 오래다. 그런데 작가는 그런 삶의 단편들을 하나의 영상작품(<랜드, 홈, 시티 Land, Home, City>, 2006) 속에 이미지로 종합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속속들이 유동적이 된 동시대적 삶의 진면모를 이미지들로 이뤄진 다른 현실로 현상해낸 것이다.
국내와 국외, 정주지와 이민지, 현실과 다른 현실, 객관적으로 전개되는 세계와 한 예술가의 의도 및 실행을 통해서 구축되는 세계. 이것이 우리가 함양아의 사적 삶에서부터 그녀의 미술에 이르기까지 핵심 동인(動因)이라고 생각하는 ‘이행(transition)’에 연관된 공간, 즉 그 이행이라는 사태/운동이 비로소 발생하고 존재 가능할 수 있게 되는 공간이다. 만약 우리가 한 곳에 고착된 채 하나의 현실만을 살아야 한다면, 그래서 주어진(所與) 세계 바깥을 결코 예감하거나 구상(imagination)할 수 없는 생을 살아야 한다면 ‘다른 상태나 조건으로의 변화’를 뜻하는 이행은 실질적으로든 개념적으로든 불가능하다. 1990년대 본격화된 ‘글로벌리즘’이라는 이슈가 전 세계적인 반향을 얻고 말 그대로 세계화될 수 있었던 원인도 바로 그 같은 맥락에서 찾아야 한다. 즉 글로벌리즘은 과거 서구 제국주의나 전체주의의 단일성과 폐쇄성을 극복하고, 다원적 주체들의 다양한 삶을 긍정하면서 우리 서로간의 수평적 교류 및 다차원적 이동을 촉진한다는 정신적 가치를 사람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미술가들 또한 이러한 시대적 가치 및 조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편으로는 국제 전시나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을 통해 실제 창작 활동 면에서 글로벌리즘에 동참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사 민속지학적 연구나 지역의 사회 정치에 개입하는 미술을 시도하면서 미적 글로벌리즘을 정치 사회적 의제로 충전시켜온 것이다.
함양아의 미술에서 이 같은 점은 2000년대 초반 몇 년 간 다음에 열거한 작품들에 집중적으로 담겼다. 작가가 중국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그곳의 중소 도시를 리서치하며 제작한 싱글 채널 비디오 <기억의 환영 Illusion of Memory>(2005). 목포와 제주 사이를 왕복하는 페리선의 밤풍경을 통해 공간적 이동뿐만 아니라 동시대 특유의 불안정성을 조명하는 <이행적 삶 Transit Life>(2005). 뉴욕, 시카고, 금강산이라는 상이한 세 공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관광마차를 ―낡은 문화 형태지만 오늘날 국제 관광산업(global tourism)이 여전히 효과적 기표로 전용하는 그것― 중심 소재로 포착해 사람들의 현실과 꿈,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현실 자본주의의 이해관계를 관객에게 들여다보게 하는 <삶 속의…꿈 Dream in…Life>(2004)과 <공산주의 관광 Tourism in Communism>(2005). 이런 작품들이 글로벌리즘에 대한 작가 함양아의 예술적 응답에 포함되는 것이다. 여기서 상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3 그 작품들은 당시 작가의 “유목적 삶의 양식”4 속에서 사적으로 포착된 글로벌-로컬의 이행적 풍경인 동시에 ‘글로벌리즘’이라는 동시대 이념의 의미를 재고할 계기를 마련한 것들이다.
3. 의미와 비의미
지난 십여 년간 함양아의 예술적 의도와 실천이 단지 현실의 이곳과 저곳, 이런 사회적 장소와 저런 삶의 풍경을 넘나들고 시각적으로 단순 콜라주하는 데 있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앞서 소개한 일련의 영상 설치작품들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직접적이고 단일한 의미를 지시하기보다는 보는 이의 관점과 해석에 따라 그 의미가 꽤 다양하게 산포될 수 있는 중립성과 모호성을 갖고 있었다. 비디오의 장면들은 기승전결의 내러티브 구조보다는 사건들의 단속적 운동에 맞춰 구성된 듯 보이며, 메시지의 명료한 제시보다는 이미지의 중층화와 그로 인한 의미의 자유로운 파생이 더 관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서 우리는 적어도 당시 작가에게는 자신의 작품이 현실 비판 혹은 사회적 통찰을 위한 이미지-텍스트보다는, 현실을 비추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양태로 의미가 확장 가능한 이미지-거울이 되는 쪽이 중요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그러한 경향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이 200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처음 제작하고 국내외 여러 주요 기획전을 통해 선보인 <형용사적 삶 – 아웃 오브 프레임 Adjective Life − Out of Frame>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물질들, 존재들과 심리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관계를 맺는 가운데 느끼고, 욕망하고, 향유하는 감각의 순간들을 포착한 ‘퍼포먼스 기반 영상설치작품’이다. 작가는 국제 미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럽 출신 큐레이터 두상을 초콜릿으로 조각했고, 다섯 명의 무용수에게 그 두상 조각을 가지고 퍼포먼스를 펼치도록 했다. 이때 함양아는 퍼포먼스의 내용이나 안무를 규정하지 않고 전적으로 행위자들에게 맡겼다. 영상을 보면 이들은 각자의 감각과 의지, 혹은 욕망의 흐름에 따라 초콜릿 두상과 만난다. 쓰다듬고, 핥고, 깨물고, 껴안는 그들의 즉자적 행위가 곧 그 조각상과는 물리적으로, 그 모델이 된 큐레이터와는 상징적으로 맺는 관계다. 대상을 향해 던지는 미묘한 시선, 초콜릿의 달콤한 맛과 부드러운 촉감에 매혹 당하는 혀와 손의 감각적인 움직임, 돌처럼 굳어있는 초상 조각과는 반대로 매우 원초적이고 섹슈얼하게 접촉하는 살아있는 신체들. 생경해하는 얼굴로 대상 주위를 맴도는 데서 나아가 점차 편안한 표정과 내밀한 몸짓으로 조각상에 반응하는 다섯 행위자의 변화. 그 일련의 행위 과정은 주체가 대상에게 느끼는 친밀성의 강도가 변화하는 순간들을 시연하면서, 그 친밀성이라는 것이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미묘한 감각의 퍼레이드임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그 때문에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존재들이 서로 얽혀 다채롭게 주고받는 느낌, 아주 미세하게 분할되는 감각, 예민한 지각 교환의 장(場)에 부지불식간에 끼어들어 그 지각을 공유할 수 있다. 우리는 작품의 이러한 장면들에 ‘소셜 인티머시(social intimacy)’, 즉 사회적 친밀성이 형성되는 역학 중 한 단면을 드러내준다고 의미를 부여해도 좋을 것이다. 해서 이를테면 <형용사적 삶 – 아웃 오브 프레임>은 우리 각자의 본능적 욕망과 감각이 다수가 공존하는 사회 내지는 공동체의 개방된 공간에서 특정하게 전개되고 이러저러한 양태와 속성으로 이행/변화하는 과정을 가시화한 이미지 집합체다. 또 감상자에게는 세속적 권력을 가진 인물 표상(달콤한 초콜릿 조각)과 무용수들의 신체 및 감정 표현 행위 속에서 드러나는 대상에 대한 호기심, 에로틱한 접촉, 갈망, 애증, 소유욕 등을 자신의 지각 속에 포함시켜 나와 세계의 관계로 중층화시키는 공동의 무대다. 이렇게 작품과 감상자가 삶의 관계 망이라는 층위에서 얽히고설킨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작품 제목 중 ‘형용사적’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자. 그것은 ‘삶’을 수식하는 하나의 수사(rhetoric)이자, 그 자체로 ‘삶이 형용사적’이라고 진술하는 술어(predicate)이다. 우리는 이로부터, 이를테면 작가가 삶을 명사나 동사, 또는 부사가 아닌 형용사형으로 보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작가의 미술이 삶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현상하는 것이 아니라 형용사라는 특정 수사를 통해 의미를 비결정적으로 매개하고 발생시키고자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이를 긍정적인 맥락에서 ‘의미의 표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생을 전적으로 완결되고 닫힌 체계로 보는 사람은 없거나 있더라도 아주 드물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삶을 형용사로 보는 작가의 관점은 특이하다. 형용사는 애초 명사에 덧붙여지는 꾸밈이며, 다른 어떤 수사에 의해서 곧 대리, 대치, 변경될 수 있는 불안정한 언어 지위를 갖는다는 점에서, 부정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양아는 ‘형용사적 삶’이라는 주제어를 통해서, 바로 그 지점, 즉 우리 삶의 본질(그런 것이 있다면)이 원천적으로 명사형으로 단정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동사나 부사의 형태로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를테면 작가는 명사, 동사, 부사와는 달리, 형용사는 삶의 성질이나 상태, 그리고 무엇보다 있음(존재) 자체를 표현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삶에 가장 부합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생각은 앞서 이미 설명했듯이 작가가 직접 이행적 삶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바이며, 그런 삶의 유보할 수 없는 독자적 가치를 긍정하고 예술작품으로 존재시키고자 하는 의지에서 발현된 것이다.
하지만 그 퍼포먼스 영상의 한국 버전이라 할 2010년 작 <형용사적 삶 – 아웃 오브 프레임>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사실과 맞닥뜨린다. 삶을 형용사적인 것으로 봤을 때, 새삼 그 형용사라는 것이 순진한 수식어구가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 축적된 경험과 의식으로부터 도출되는 표현의 총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요컨대 어떤 사회적 틀과 문화 조건 속에서는 형용사적 삶이라는 차원이 무척 어렵거나 가능하지 않다. 2007년 암스테르담 퍼포먼스와는 달리, 2010년 한국 판 퍼포먼스에서 십여 명의 한국인 남녀 행위자들은 상당히 투박하고 기묘해 보이는 행위들로 초콜릿 두상에 반응했다. 다소 무뚝뚝하고 무신경한 몸짓으로 그저 조각상 주위를 서성이던 이들이, 시간이 가면서 무례할 정도로 낄낄거리고, 노골적으로 그 초콜릿 두상을 ‘먹을거리’ 취급한다. 그러더니 급기야 마치 분풀이 하듯 발로 밟아 산산조각 내버린다. 누군가는 그 영상을 보며 연극 무대처럼 펼쳐진 퍼포먼스 공간에서 특정 감정을 극대화해 연기하는 배우를 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한국의 젊은 남녀 행위자들이 사물에 반응하는 방식, 대상과 관계 맺는 양태, 그들의 욕망과 그것을 표출하는 스타일에 주목하자. 요컨대 그들이 삶을 구체화하는 형태와 내용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것인데, 거기에는 매우 폭력적이고 거친 문화적 배경에서 돌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정제되지 않은 ‘동사’만이 난무한다. 지각의 섬세한 결을 더듬어나가기 전에 이미 일을 저질러버리기, 타자와의 델리케이트하고 섬세한 긴장 관계를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대상을 파괴하고 관계를 끝내버리기, 자신의 원초적인 본능에 휘둘리면서도 자유로운 것처럼 사건을 과장하기. 2010년 <형용사적 삶 – 아웃 오브 프레임>이 보여주는 것은 이 같은 동사적인 삶, 그렇다 하더라도 어딘가 ‘터무니없고 감각적이지 않은(nonsense)’ 행위의 삶이다. 앞서 우리는 함양아의 미술이 삶을 형용사적인 것으로 정의한다고 해석했지만, 분명 그 해석에 앞서 ‘모든 삶이, 즉 어떤 사회의식의 구조와 심리적 환경을 막론하고 형용사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전제가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 점을 <형용사적 삶 – 아웃 오브 프레임>의 한국 퍼포먼스 영상이 짚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의미가 부재하거나 자각(自覺)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넌센스적인 삶’도 있는 것이다.
4. 표류 ≠ 관계
감수성의 미세한 지점까지 교감할 수 있고 지각의 다채로운 순간 모두를 빠짐없이 형상화할 수 있도록 언어의 의미가 풀려나와서 상대방과 나 사이에 공감적 소통이 이뤄질 경우 우리는 자유롭고 아름다울 것이다. 반대로 그 의미들이 둔탁한 의식 또는 난폭한 행위 속에서 미처 분화도 되지 못한 채 사산(死産)된다면,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매양 같은 모습, 같은 정신 상태로 살아가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숨 막혀 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두 경우가 아니라 제3의 경우도 있다. 그 경우란 의미가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이상은 물론이고, 현실의 정치 경제적 질서 및 법 규범에서도 거짓 자유의 모습을 하고 풀려나와 변질된 수사학을 등에 업고 말장난, 헛소리, 기만을 효과적으로 각색하는 상황이다. 서두에 우리가 참조했던 비포의 동시대 자본주의사회 비판에서 ‘표류’가 바로 그 같은 양상을 함축하는 이름이다. 의미는 이제 ‘비우량주택담보대출(Subprime Mortgage)’, ‘자유 무역 협상(Free Trade Agreement)’, ‘파생상품(derivative products)’, ‘유동 자산(floating asset)’, ‘창조경제(Creative Economy)’ 같은 용어가 보여주듯이 알 듯 말 듯 한 신조어들 속에서 표류한다. “언어의 본질적인 인플레이션 (은유적) 본성 때문에”5 그렇게 의미는 표류하면서 금융 자본가들의 천문학적 연봉을 정당화하고, 다국적 기업의 불평등한 교역 조건을 합리화하고, 실물 없이 숫자로만 이뤄진 자본의 세계를 우리가 경외해야 할 유일무이한 가치의 세계로 옹립한다. 이것이 단지 우리가 경우의 수를 가정했을 때 예상할 수 있는 나쁜 답 중 하나일까? 아마도 우리 대부분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위의 용어들은 2000년대 들어 전 지구적 네트워크 안에서 귀가 따갑게 울러 퍼지는 신조어들이며, 그 현상들은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고 자의든 타의든 거의 맹목적으로 내 삶 속에 받아들여만 하는 엄연하고 냉정한 현실 질서이기 때문이다. 의미의 표류가 관계의 자유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르게, 말하자면 ‘구속적으로’ 실현되는 현실 말이다.
그렇다면 자유, 다원성, 유동성, 창조, 이행, 상호작용 등 우리가 과거의 억압, 획일성, 경직성, 복종, 폐쇄, 일방향성을 극복하고자 도입한 그 용어들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그에 대해 한 가지 답을 내놓을 수 있다. 그 용어들은 의미와 비의미 사이에서 완전히 혼란스러워져버렸다고, 그 용어가 담은 가치는 사회관계 속에서 점점 더 얼룩덜룩해지고 있다고 말이다. 함양아의 4년여에 걸친 프로젝트 <넌센스 팩토리>는 그런 동시대적 의미의 혼란, 그리고 정체를 파악하기 어렵게 된 가치의 오염을 재고하기에 꽤 탁월한 예술적 매체다.
5. 넌센스, 팩토리
앞서 다룬 <형용사적 삶 – 아웃 오브 프레임>을 기점으로 함양아의 미술은 그 전과 후로 나뉠 수 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비디오뿐만 아니라 회화, 조각, 퍼포먼스, 텍스트, 오디오 등 다양한 장르와 매체가 하나의 작품(프로젝트) 속에서 집결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영상 설치미술이라 해도 기존의 경우 대체로 싱글채널 비디오를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미적 형식이 국한됐다면, 2007년 이후로 함양아의 미술은 말 그대로 복합화, 다원화된 것이다. 헌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그런 형식의 변화가, 작품 속에서 더 비평적인 관점으로 동시대 사회적 삶의 의미를 묻고자 하는 작가의 생각, 의식, 내적 변화(혹은 성숙)와 동반해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우 작품은 미적 모호성을 띠며 의미의 중립적 지대에 머무르기보다는 감상자가 좀 더 구체적으로 작가의 의도와 동행하며 작품을 지각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가독성(의사소통 가능성)을 띠게 된다. 요컨대 그즈음부터 이 작가의 미술은 작가/작품과 감상자의 관계에서 어느 한쪽이 애초 부재하거나, 둘 중 하나가 사라지거나, 다른 쪽에 의해 방치되거나 하는 일반적 미술 감상을 넘어 양자의 관계가 내밀해질 가능성을 키웠다. <넌센스 팩토리>는 그 가능성이 ‘알레고리 형식의 사회 비판’을 담은 작품을 공통의 장소로 해서 우리가 우리 삶의 구조 및 그 내적 작용을 함께 들여다보는 일임을 알려준다.
애초 <넌센스 팩토리>는 함양아가 알레고리 기법으로 쓴 짧은 글로, 작가는 2010년 아트선재센터의 개인전 당시에는 시트지로 크게 인쇄해 전시장 2층 유리창 전면에 붙였다. 그것이 단지 전시의 시각적 장치 중 하나가 아니라, 반드시 그 내용을 읽어야 하는 텍스트 작품인 것은 작가가 그 글을 A4용지에 프린트해서 감상자들이 가져다 읽도록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럼 함양아는 사람들이 거기서 무엇을 읽기를 기대할까? 2013년 이 작품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작성한 프로젝트 계획서를 보면 작가는 이제 넌센스 팩토리를 명시적으로 사회와 등치시킨다. 즉 “넌센스 팩토리 = 사회”라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가 감상자인 우리에게 <넌센스 팩토리>에서 읽어내기를 바라는 점이 명확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의미와 비의미다.
가상의 어느 지역, 어느 도시에 있는 공장을 ‘사보(私報) 기자의 취재’라는 소설적 장치를 통해 묘사하고 있는 <넌센스 팩토리>에는 6개의 방이 등장한다. ‘중앙 이미지 박스 통제실’ ‘복지정책을 만드는 방’ ‘쿠폰을 만드는 방’ ‘예술가들의 방’ ‘팩토리의 지하’ ‘새로운 팩토리의 도면을 그리는 방’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각 방의 이름들, 특히 ‘통제실’이나 ‘복지정책’이라는 말은 우리 귀에 익숙하게 울리면서 현실의 어떤 모습들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아마도 이 이야기가 우리 사회를 모델화하거나 그 축소판처럼 다가오는 이유가 우선 그런 용어들에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런 용어로 지칭하는 방들이 이미 우리가 잘 아는 사회장치(social apparatus) 및 그것들의 기능을 환기시켜서일 것이다.
‘중앙 이미지 박스 통제실’이라는 부제가 붙은 첫 번째 방은, 첨단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만능 우산 아래서 점차 삶의 모든 세부들이 관리 ․ 조절 ․ 통제되는 지금 여기 유비쿼터스 사회와 구조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유사하다. 처음 함양아가 <넌센스 팩토리>를 구상하던 몇 년 전, 사람들은 조지 오웰이 1949년에 출간한 소설 『1984』를 거론하며 동시대 디지털 정보통신 기술에 의해 전면적이고 치밀하게 통제 관리되는 사회와 그럴 때 도래할 위험에 대해 갑론을박했다. 헌데 작가의 보다 발전된 <넌센스 팩토리>가 선보이는 2013년 오늘, 과거 비판적 지식인들의 불길한 예견은 전 세계의 현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설적 허구까지 초과했다. 지난 6월 초 미국의 전직 CIA 요원이자 컴퓨터 엔지니어인 스노든(Edward Snowden)이 영국 가디언지를 통해 폭로한 바, 미 국가안보국(NSA)은 오래 전부터 ‘프리즘(PRISM)’이라는 비밀 개인정보수집 프로그램을 통해 민간인들을 감찰하고, 다른 나라의 통신망을 해킹하며 전 세계의 온갖 정보들을 수집 관리해왔다는 것이다. 지구상의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모르는 가운데 이런 일이 현실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함양아의 작품은 그런 세계의 비(非)의식적 상황을 ‘어느 말이 안 되는 공장(nonsense factory)의 이미지 통제실’이라는 은유적 장치를 통해 노출시킨다.
작가는 <넌센스 펙토리>에서 ‘복지정책을 만드는’ 두 번째 방을 묘사하면서, “모두의 행복!”이라는 슬로건을 붙여놓고도 정작 그 자신은 일에 파묻혀 고개를 들 여유도 없는 청년 사원을 묘사한다. 그것은 어쩌면 2010년 개인전 당시 아트선재센터 전시장 초입에 그려놓은 작가의 드로잉, 즉 “I came for 행/항복”이라는 연필 드로잉의 ‘I (작가 혹은 그 문장을 읽는 순간의 각자)’의 모습일지 모른다. 아니, 그 모습은 이를테면 권력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떠들어대는 실체 없는 ‘행복’에의 약속 아래서, 무감각(non-sense)하게 체제에 ‘항복’한 우리의 그것이다. 그리고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책임진다는 미명 아래 모든 개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불법 감찰하는 일을 멈추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나라 미국에 대한 내부고발자(whistle blower)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스노든이6 그 사회의 심각한 부조리를 몰랐을 때의 얼굴일 것이다. 세 번째 ‘쿠폰을 만드는 방’에서 쿠폰은 분명 자본주의의 화폐 경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함양아는 텍스트에 넌센스 팩토리의 사람들이 그 쿠폰(단지 종잇조각일 뿐이지만 실질적으로 현실의 모든 것을 압도하는 그것)으로 부를 축적하거나 투기를 하는 모습, 또 팩토리 운영자들이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현실 자본주의 사회를 명시적으로 유비시켰다.
하지만 <넌센스 팩토리>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방은 네 번째 ‘예술가들의 방’이다. 여기서 작가는 조수들과 자신의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마스터 예술가를 등장시킨다. 특히 이 예술가 상이 의미심장해지는 부분은, 타인을 함부로 취급하는 그가 ‘예술가로서 중요한 태도’를 묻는 사보 기자에게 그럴싸하게 “타인에 대한 이해”라 대답한 대목이다. 놀랄 것도 없이, 이 장면은 인간, 특히 예술가 내부의 부조리와 근절할 수 없는 속물성을 논평하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보면 예술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연결시킨 함양아의 아이디어는 예술가 주체의 모순을 지적하는 정도를 넘어, 어느 때부턴가 ‘인권’, ‘배려’, ‘관계’, ‘소통’, ‘치유’를 대중연예오락과 문화산업은 물론 현실정치의 히트 아이템으로 남용하는 공적 담론 구조와 그 수사학적 기만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 가능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같은 화두를 내세운 예술작품을 빌미 삼아, 또는 권위적으로 전용해서 현실의 경제적 불평등과 착취, 폭력, 불균형, 불통, 관계의 파쇄(破碎) 양상을 감추고 사람들의 의식을 혼미하게 만드는 당대 패권적 주체들의 은밀한 이중성을 비춰볼 거울이 된다.
이상에서 볼 때 함양아는 ‘넌센스 팩토리’라는 어느 가상의 공장을 무대로 해서 실제 우리 삶의 구조와 속성, 우리 각자와 우리를 둘러싼 사회의 체제적 관계를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그럼 그 같은 의도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아마도 그녀는 우리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기를, 그 문제의식으로 예컨대 ‘자유 무역’과 ‘창조 경제’ 같은 묘한 이름에 가려진 거대한 부자유, 인간 창조성에 대한 심각한 침해 현상을 꿰뚫어보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거대 권력 체계와 자본만이 존재하는 세계, 그 안의 인간을 사회가 원하는 식으로만 살도록 강제하는 세계는 아무리 유연성, 다원성, 수평적 교류, 인적 ․ 물적 네트워크, 플랫폼 등 그럴듯한 이슈를 내놓고 거기서 휘황찬란한 의미들을 발명해내더라도 파시즘적이다.
2010년 텍스트 형태로 처음 나온 <넌센스 팩토리>의 마지막은 어느 “전도유망한 건축가”가 은밀히 들어앉아 그 팩토리의 건축 구조를 “생산성을 최고로 올릴 수 있는 시스템”으로 재설계하는 여섯 번째 방 ‘새로운 팩토리의 도면을 그리는 방’으로 끝난다. 그리고 작가가 2013년 대규모 설치미술 형태로 발전시킨 <넌센스 팩토리>의 시작은 반달 또는 배 모양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플랫폼 위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활발하게 섞이는 ―그 플랫폼의 구조상 요람이나 시소처럼 끊임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공간 ‘팩토리 지하’가 연다. 그런데 이 두 방이 <넌센스 팩토리>라는 한 “사회”의 처음과 끝을 이루는 두 요소라는 점에 주목할 경우, 우리가 은연중에 읽게 되는 작가의 의도는 그 사회의 양면성이다. 이를테면 생산성 극대화를 위한 집약적 시스템과 항상적 동요 상태의 구조, 정책 수립의 폐쇄성과 현상적 개방성, 비가시적 플랜과 가시적 역동성 등 말이다. 아마 작가는 자신의 <넌센스 팩토리>를 현실 사회와 직접적으로 유비시킬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만든 플랫폼이, 그 플랫폼 위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뒤섞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퍼포먼스 비디오가 어떤 이들에게는 자유롭고 친밀한 사회적 관계를 꿈꾸게 하기에 앞서 불안정성이 전 지구적 일상이 된 동시대, 교류와 소통이 강박이 된 이곳을 돌아보도록 돕는다.
1. 강수미, 『비평의 이미지』, 글항아리, 2013 수록
2. Franco Berardi Bifo, Gasry Genosko & Nicholas Thoburn (eds.), Arianna Bove, Melinda Coope (trans.), After the Future, Edinburgh: AK Press, 2011, p. 105.
3. 이 작품들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강수미, 『한국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서울: 현실문화, 2009, pp. 164-175 참조.
4. 이하 특별한 주석 없이 큰따옴표로 인용하는 문구는 모두 함양아의 작업 노트에서 온 것이다.
5. Franco Berardi Bifo, Ibid., p. 100.
6. 스노든의 가디언지 인터뷰. http://www.guardian.co.uk/world/2013/jun/09/nsa-whistleblower-edward-snowden-why
Critic 2
어떻게 이미지를 가공하는가? 혹은 이미지 가공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에서의 시체와 환영
함양아의 넌센스 팩토리
Chien-Hung Huang (국립타이페이 예술대학 교수)
함양아는 <넌센스 팩토리>라는 비디오 프로젝트로 ≪올해의 작가상 2013≫의 네 명의 최종 후보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함양아 작품에 담긴 이미지의 개념적 창조를 고찰하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함양아의 이미지들은 미학의 추상적 카테고리를 겨냥하는 기술적 추구도, 어떤 공공의 이슈에 주목하는 미디어 작품도 아니다. 심지어 작가 자신에 대한 재현이라 볼 수는 더더욱 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더 이상 누구 혹은 어떤 것에도 귀속되지 않는 인접(neighboring)의 이미지이다. 어떻게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인접성으로, 혹은 인접해 있는 이미지로 바라보는가? 이미지는 어떻게 인접해 있는가? 이 점과 관련해, 함양아는 들뢰즈와 유사한 기본 전략을 제안하는 것처럼 보인다. 들뢰즈가 가상과 실재가 구별되지 않음을 폭로한다면, 함양아는 한편으로는 일상생활에서 환영과 일상의 모호함을 제시하고자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독점’이 갖는 특유의 특권을 폐지하기 위해 역동적인 관계를 활성화시킨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자아와 이미지, 이미지와 이미지, 타자와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를 꿰뚫는 실험적 개념들을 집결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함양아의 개념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은 하룬 파로키의 이미지 개념뿐일 것이다.
우리는 2013년 작품 <넌센스 팩토리>를 2010년 작품 <형용사적 삶>넌센스 팩토리> 개념의 확장으로 볼 수 있다. <형용사적 삶>넌센스 팩토리>에 담긴 함양아의 아이디어와 하룬 파로키의 소프트 몽타주의 목적은 둘 다 오리지널이란 미명으로 현대미술을 상품화하고 권력화시키는 이미지의 구현을 멈추게 하는 데 있다. 외려 두 사람은 일상생활을 묘사하기 위해 지금 현 세계의 클리셰나 혹은 이 세계에서 사용되거나 생산된 클리셰를 관찰한다. 이런 활동을 통해 두 작가는 스펙터클한 사회의 역설을 다양한 모든 측면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일반 대중의) 위태로운 삶, (상품화, 기계, 스펙터클로 인한) 비인간적 이미지들. 이런 이미지의 재가공 방식은 파로키가 소프트 몽타주라 부른 개념적 전략이자, 함양아가 우리 삶을 고찰하는 데 사용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사실 두 작가는 모든 작품에서의 ‘관계’를 좀더 분명히 규정하기 위해, 동시에 중심화된 주체로서의 예술가 지위에서 벗어나 관계의 지속적인 변화상태를 보여주기 위해, 관계미학이나 포스트 프로덕션의 개념적 전략 너머로 나아간다. 결국 두 작가는 이미지 생산에 대해 언급하는 한편, 정치와 비평의 예술적 행위(말하자면, 예술 그 자체는 형용사가 되어야 한다1)를 이어가고 있다.
파로키와 함양아가 보여주는 예술적 행위에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예술적으로 보여주는 방식과 개념적 전략의 측면은 동일하다. 그러나 미학-정치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에는 차이가 있다. 강수미가 지적한 바 대로, 함양아는 아트선재에서 열었던 전시회의 한국 전시 명칭 <형용사적 삶>넌센스 팩토리>에서 부등호를 사용했다.2 여기서 부등호는 흔히 말하는 예술의 가능성들을 나타낸다. 부등호는 수학에서 근접함을, 정신분석학에서 충동을 의미한다. 라캉은 환상(phatasm)이 가진 정신분열증적 힘에 대해 더 파고든다. 자본주의 세계는 기 드보르가 과도하게 이데올로기에 젖은 어조로, 상품으로 구현된 세계가 실제세계를 대체해버렸다고 주장했던 것만큼이나 불운하다. 이런 주장은 함양아의 <형용사적 삶>이 의미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큰)의 가능성들이 보이는 것은 위태로운 관계로서의 형용사 때문이다.
게다가 대상 a와 대타자(A(S), big Other)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라캉과 파로키의 방식들이 환영 공식의 이중적 불평등, 즉 “$◇a”을 따르기 때문이고, 대타자로부터 대상 a가 산출되는 방식을 고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파로키는 매우 유럽적인 이 비평적 사고에 매달려 있고, 그는 종종 작품의 통제자로서 일종의 대타자와 연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함양아는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논쟁적인 또 하나의 가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철저한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상 소타자는 대타자 과잉에서 비롯되는 경험이며, 이런 경험은 환상과 판에 박힌 일상의 일치이다. 이런 측면에서 종종 대립적 태도로 작품을 배치하는 파로키와 달리,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비디오 이미지 모음에서 함양아는 경험의 관찰과 이해에 깊이 파고들어 이미지가 노출시키는 장인적 순간을 건드린다.
이번 전시에서 함양아는 회화 복원의 장인을 초대해 실제로 퍼포먼스를 실현시키고자 한다. 분명 이러한 전개는 이 프로젝트의 쌍방향성을 강화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가능성을 좀더 분명하게 파악하게 만들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심지어 기계적 생산의 한 부분만을 담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창조성(plus creativities)을 양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2007년 프로젝트 <형용사적 삶-아웃 오브 프레임>과 마찬가지로) 형용사 상태에 위치한 이 작가는 이미지 세계에서 시각적 미장아빔(‘mise en abyme’ 심연으로 밀어넣기, 한 작품 안에 또 하나의 작품을 집어넣는 예술적 기법: 옮긴이)을 생산할 수 있다. 이는 일상의 노동에 젖어 있는 관객들을 자아 세계로 돌려 보내고, 관객들이 스펙터클 사회로서 대타자의 밖에 있는 그 이상의 창조성을 볼 수 있게 만든다.
이것은 리차드 세네트가 논의한 것과 유사한 가능성이다. 세네트는 이러한 가능성을 규명하기 위해 거의 20년 동안 현장연구를 했다. 노동(labour)과는 구분되는 작업(work)의 의미를 정립한 스승 한나 아렌트의 뒤를 이어 한 걸음 더 나아간 세네트는 거대 서사의 유령 밖으로 이탈함으로써 해방의 가능성과 휴머니티의 가치를 좀더 깊게 고찰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이론가들은 모두 예술가의 난제를 피했다. (반대로 함양아가 예술가에게 주어진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아마도 몇 차례의 경제적 위기와 세계화의 새로운 무대가 된 아시아의 상황 이후, 함양아는 현장 작업 관점에서 주어진 감각 분할 경로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하는 듯 하다. 이런 시도는 아주 중요하다. 그녀가 우리 눈 앞에 보여주는 미장아빔의 시각성은 일상 노동과 그 이상의 창의성 사이에 차이를 만든다. 여기서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주어진 감성의 분할은 가상의 것에 인접해 있다는 점이다.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 분할 이론의 모호한 해방 개념과 대조적으로, 함양아는 한결 분명한 경험의 방법을 제시한다.
세계화 이후, 세계 도처가 공장과 과학 공원, 쇼핑 몰로 가득차 있는 것은 일반적 현상처럼 보인다. 게다가 거의 모든 이들이 과로의 상태로 살아 남으려고 노력한다. 19세기에 군사적인 관리의 위계가 사회의 본질적인 구조가 되었다면, 2000년 이후 아시아는 서구 국가들이 수십년간 계획해온 세계화 구조와 아주 똑같은 체제를 뒤따르고 있다. 사회 관계의 모든 커넥션, 특히 생산 관계의 커넥션은 개인화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생산 관계와 작업 상황을 진척시킨다. 한편으로 개인으로서 우리는 생산이 투자자인 일부 소수만 납득시키는 상황, 그러나 기계적으로만 생산에 임하는 거대 다수에게는 무의미한 상황에 점점 더 대처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 노동력의 분배와 밀접히 관련돼 있는 감성의 분할은 분명 우리에게 생산의 구조와 관계들의 차별화를 요구하지만, 이 차별화는 언제든지 구매할 수 있는 새로운 감수성들로 이룰 수는 없다.
전시장 입구에는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판재들이 걸려있다. 따라서 입구는 한정된 문틀로 축소된다. 어두운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관객은 자기 체중으로 인해 약간 흔들리는 무대에 오를 것이다. 무대 위에는 고정된 작업 벤치가 있다. 이 무대 장치는 일종의 상황의 선언이다. 즉 <다섯 번째 방: 팩토리 지하>: 우리는 흔들리는 표면에 위치한 채 고정된 작업 자세를 부여 받는다. 무대 앞에는 이 전시의 가장 큰 비디오 영상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이 여섯 개의 방(여섯 개의 각기 다른 생산 장소) 중 첫 번째 방인 <첫 번째 방: 중앙 이미지 박스 통제실>이다. 거기에는 전시 전체를 관통하며 많은 작품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통일 교회의 리틀 엔젤스>를 뒤집어 놓은 흰색과 검은색의 이미지다. 사실 이 전도된 이미지는 1972년에 텔레비전 방송 도중에 일어난 실수였다. 이처럼 우발적인 전도는 한국이 경험한 이데올로기의 신봉에서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감춰진 진실로의 (이행) 과정으로 간주될 수 있는 듯하다. 제한된 해상도(dpi)를 가진 이 뒤집어진 이미지가 확대되면, 사람들은 천사의 모습을 식별하지 못하고 오직 픽셀만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이 픽셀들에 감춰진 다양한 작업의 이야기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전도된 이미지처럼 모든 작업의 이야기는 일상과 전문가, 노동과 지식, 시스템과 발명 등 역설의 공존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가 이러한 모순적인 현실에 저항하는 동시에 그것에 예속돼 있음을 드러낸다. <중앙 이미지 박스 통제실>의 다양한 다큐멘터리 리포트에서 이 비디오 클립들을 볼 수 있는데 이 영상들은 전문지식과 그것의 뛰어난 실현의 순간에 집중적으로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작가를 통해, 우리는 노동과 창조 사이의 경계의 순간을 볼 수 있게 된다.
설치작업이 있는 전시장 공간 안에는 어떤 가이드라인이 없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첫 번째 설치작품에서 이미 모호함과 불확실함을 오가는 상태를 경험하게 되면서 전시공간 전체를 유령이 배회하는 공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관람객들이 본 것은 그들에게 친숙한 미디어 이미지로 그들은 물화(reification), 상품화, 환상(fantasization)의 자본주의 사회 속의 다양한 시체-이미지(cadaver-images)를 보고 있다고 느낀다. 넌센스 팩토리의 여러 방을 돌아다니는 관객들은 사실 시체에서 막 빠져 나온 유령처럼 아마도 작가가 의도했을 조우의 순간을 찾아 다니게 된다. (데리다의 유령(specter) 개념의 차원에서). 그러나 이러한 조우는 작가, 창조성 혹은 걸작과의 만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노동에 내재된 외부(dehors)와의 만남이다. 무대의 왼쪽 편에는 비디오 설치작품 <영원한 황홀>이 있다. 거기에는 세 개의 비디오가 있는데, 하나는 서로를 죽이는 벌떼의 이미지이고, 또 다른 하나는 거리의 한 장소에서 장시간 촬영한 이미지이다. 세 번째는 거리장면의 오른쪽 윗편의 한 건물옥상에 설치되어 있는 전광판이다. 전광판에서는 광고나 뉴스가 흘러나온다. 여기에 작가는 뉴스클립이나 자신이 만든 클립을 추가하여 다시 이 전광판 화면으로 되돌려 놓았다. 이 작품은 서울시장선거 기간에 완성됐다. 결국 작가가 이 특정 종류의 설치작품으로 관객들에게 인지시키려고 한 것은, 자연과 소외의 차이가 아니라 각기 다른 세 종류의 생활시간과 생존욕망의 공존이다. 관객들은 이 설치작업의 한 난간에 있는 창문으로 <넌센스 팩토리>의 간략한 프로젝트 담론을 이해할 수 있다. 함양아는 관객들이 즉시 몰입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전용하고 있지만, 매 순간 관객들이 이 이미지들에 자아를 투영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시각적 거리를 장치해 놓는다. 그는 관객을 유령처럼 만든다.
<중앙 이미지 박스 통제실>의 뒤쪽에는 두 개의 삼각형 구조물들이 위치해 있다. 한쪽 면에는 <여섯 번째 방: 새로운 팩토리의 도면을 그리는 방>이, 다른 면에는 <새의 시선>(2008)이 있다. 전자는 쥐의 머리에 설치된 카메라 샷(camera shot)이다. 이 작품에서는 물 공급 시스템으로 계속 움직이는 쥐를 관찰하고 규명하기 위한 각종 기구들이 사용되었다. 이 작품은 동시에 세 개의 다른 측면, 즉 아상블라주 드로잉, CCTV 모니터 이미지, 쥐에 관한 데이터 등을 제각각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시되고 있다. 후자인 <새의 시선>은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구 서울 역사에서 비둘기를 촬영한 비디오다. 비디오는 세 파트로 구성되었는데, 첫 번째는 고속카메라로 촬영된 제한된 공간의 비둘기이다. 두 번째는 비둘기의 등에 설치한 CCTV 카메라 파일럿에 의해 기록된 비둘기의 시각이다. 두 번째 비디오 이미지에서는 이전의 좁은 공간이 창문으로 개방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세 번째 비디오는 이 때 서울로 날아오는 다른 비둘기를 보고 있는 비둘기의 시각처럼 보인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비-인간 이미지에 대한 특정 종류의 환영을 창출하는 경향을 보인다.
<중앙 이미지 박스 통제실> 뒤에는 작가가 만든 모호하고 냉소적인 작품 두 점이 있다. 하나는 <I came for 행복/항복 >이라는 제목의 네온 튜브로 만든 설치작품이다. 로마자 필기체로 쓰인 영어의 끝이(I come for) 흐려지고 한국어 단어의 한 부분의 네온 빛이 깜박거리면서 모호한 한국어 단어는 행복/항복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또 다른 작품은 초콜릿으로 만든 조각상 <예술가>로, 이는 작가의 역설적인 의도를 나타내는 <지속적인 초상들> 프로젝트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각각 <두 번째 방: 복지정책을 만드는 방>과 <네 번째 방: 예술가들의 방>이 된다. 비록 미술작품으로 전시되어 있지만, 이 두 작품은 각각 대화의 상실, 그리고 불만과 키치에 관한 이야기 부분에 해당되는데 이 두 이야기는 이데올로기와 정체성의 중간에 내재된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
<팩토리 지하>의 무대의 다른 쪽에는 <세 번째 방: 쿠폰을 만드는 방>이 있다. 이것은 노동과 욕망의 암시와 가장 관련이 깊은 작품이다. 관객들은 통화나 신용카드처럼 금융자금을 다루는 수많은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또 생산라인과 유니폼을 강조한다. <쿠폰을 만드는 방>의 입구와 끝에는 각각 예술가를 가리키는 비눗방울 퍼포먼스 이미지와 <팩토리 지하>에 관련된 붉은 잉크의 펜 이미지가 보여진다. 붉은 잉크의 만년필 영상 뒤로는 관객들이 그 이미지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도록 계단이 있다. 이렇듯 올라감이라는 위계화된 특성을 통해, 관객들은 팩토리 공간 전체를 내려다 보면서 역사를 기록하는 권력자처럼 느끼게 된다.
사실 여섯 개의 주제가 있는 여섯 개의 방은 다큐멘터리 리포트의 특정이미지와 작가의 상상력이 엮인 팩토리 각 섹션의 여섯 개의 이야기와 일치한다. 여섯 개의 이어지는 이야기는 환상으로 가득 차고 부조리한 카프카적인 여행과 매우 흡사하다. 유일한 차이점은 카프카의 여행에서 성을 방문하는 측량사나 공무원이 함양아의 버전에서는 노동자와 노동자 신문의 리포터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카프카와 연관된 가장 심오한 이미지 예술가 오손 웰스를 언급해야 한다. 오손 웰스부터 테리 길리엄이나 스티븐 소더버그에 이르기까지, 이미지 내러티브의 핵심은 고딕적 어둠(noire)이 가득한 현실(the real)이었다. 함양아는 상대적으로 카프카식의 불합리를 꼬여 있고 계층화된 현실 경험으로 밀고 나갔다. 세계화된 창조적 산업 시대의 노동과 작품은 아렌트의 “생존하다/창조하다”의 이분법으로는 구분될 수 없다. 사실 일상생활은 사이성(in-betweenness)의 끊임없는 교차를 지속시킨다. 다시 말하면, 불안정한 욕망은 일상생활의 안락함과 역사의 상징적인 업적 사이에 위치한다. 비-인간 이미지(동물화된 대상성, animalized objectivity), 다른 이들의 이미지(일상생활에 대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작가의 이미지(자기해체)로부터 전개되면서, 이러한 공간 배치는 세부적이고 개별적인 노동의 경험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와 동시에, 그것은 교차하고 얽히는 관계의 공간에서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키는 리좀적인(rhizomatic) 세계를 낳는다.
함양아 작품의 이런 재구성을 통해 관객들은 경험과 세계에 대한 작가의 시각, 그리고 작가의 개념이 어떻게 이미지를 재생산하는지에 주목할 수 있다. 유령으로서 관객들인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 스스로를 바라 보고 들뢰즈의 노마드(nomad)의 해방의 순간, 즉 시체와 유령의 조우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