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성훈

공성훈
공성훈은 서울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서울산업대학교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하였다. 서양화로 작업을 시작했지만 주로 수제작한 멀티슬라이드 프로젝션 설치작업을 발표하며 주목 받았다. 개념적인 설치작업 이후 2000년부터 현재까지 다시 회화를 통해 익숙한 일상을 다룬 풍경화에 집중하고 있다. 2013년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며 밀도 높은 심리적 차원에서 회화를 보여주는 작가로 평가 받았다.

Interview

CV

<주요개인전>
2012
파도, OCI 미술관, 서울
2011
말 못할 속사정, 꿀, 서울,
2010
겨울여행, 신세계 갤러리, 서울
2009
공성훈 초대전, 아리랑 갤러리, 부산
겨울풍경, 아트포럼 뉴게이트, 서울
2008
근린자연(近隣自然), 대안공간 풀, 서울
2007
교외, 여가, 아트포럼 뉴게이트, 서울
2005
벽제의 밤, 아트포럼 뉴게이트, 서울

<주요 단체전>
2013
미적범주, 우민아트센터, 청주
2012
韓畵流 : 韓國當代繪畫, 국립대만미술관, 타이페이
(불)가능한 풍경, 플라토, 서울
플레이그라운드, 아르코 미술관, 서울
2011
서울, 도시탐색전,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이미지의 수사학,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부산, 익숙한 도시 낯선 장소, 신세계갤러리 센텀시티, 부산
사유의 방, OCI 미술관, 서울
The Spectrum of Contemporary Korean Art, 카오슝미술관, 카오슝
2010
젊은 모색 1981-2010,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과천
인터-뷰, 인천아트플랫폼, 인천
Made in Popland,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과천
21 & Their Times, 금호미술관, 서울
한국드로잉 30년: 1970-2000, 소마미술관, 서울
2009
My Way, My Works, 빛 갤러리, 서울
박하사탕,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과천
2008
양평환경미술제, MANAS 아트센터, 양평
Contemporary Kaleidoscope: Art in Korea Today, Central House of Artist, 모스크바
만추의 삼중주 – 김춘수, 정종미, 공성훈, 아트포럼 뉴게이트, 서울
오래된 미래,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서울
2007
한국현대미술 중남미 순회전: 박하사탕, 산티아고현대미술관 / 아르헨티나국립미술관, 산티아고, 부에노스아이레스
FAST BREAK, PKM 갤러리, 북경
2006
미디어아트 전시_ Homo-Eco-Ludens, 주안미디어문화축제, 주안역 광장, 인천
두 도시 이야기 CAFE 1, 부산비엔날레,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소장처>
경기도미술관, 안산,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과천, 한국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킨텍스, 고양, 한국
OCI미술관, 서울, 한국

Critic 1

리얼리티와 예술의 불가분한 길항(拮抗)관계에 대하여

김정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리얼리즘(Realism)은 단순히 문예학적 형식이나 양식을 지칭하는 용어 그 이상이다. 리얼리즘은 인간이 자신을 포함한 사물과 환경에 대응하는 태도이며, 정서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리얼리즘은 다양한 관점을 갖는다. 리얼리즘에는 자연과학적, 인문학적인 관점으로 크게 양분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리얼리즘의 탄생이 사회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나타났으며 – 역사적인 사례로서 콩트(Auguste Comte)나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의 과학적 철학과 이에 뒤따른 회화의 사실주의의 탄생이 그렇다 – 그런 의미에서 리얼리즘은 자연과학적 객관성을 추종하는 새로운 학문적 태도와 가깝다. 19세기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였던 쿠르베도 자신을 가리켜 사실주의자일 뿐 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라고 정의하였다.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현상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하는 엄격한 사실성을 담보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리얼리즘은 또 다른 지평에서 논의될 수 있다. 물론 이 인문학적 리얼리즘도 유물론적 객관성과 비판적인 검증을 내포하지만 더 나아가 사실에 대한 인간의 심리와 정서 그리고 감수성까지 포함한다. 사실주의는 사실을 적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반성할 때에 비로소 완성된다는 필자의 신념으로 공성훈을 바라보면, 그의 사실주의는 종점에 가깝다. 그가 설치나 영상작업을 수행하든 혹은 전통적인 방식으로서의 회화를 제작하던지 그에게 리얼리티는 예술과 현실을 잇는 최후의 구명선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성훈의 작품에 반영된 현실성, 즉 리얼리티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메타-모방(Meta-Mimesis)라고 할 수 있다. 그 근거로는 그가 취한 방식이 기존의 이념 속에서 설명하기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외견상 혹은 표면상의 모방이 아니라, 모방 그 자체를 문제시하는 작가의 태도에 기인하며, 더 나아가 현대사회와 시각문화를 정의할 수 있는 개념인 ‘시물라크르(Simulacre)’를 그것과 동일한 전략으로 폭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시 말해 예술이라는 ‘인공’으로 인공적인 현대사회와 풍경을 비판적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공성은 생산방식뿐만 아니라 예술의 소비행태에서도 찾아질 수 있다는 공성훈의 은밀한 메시지에서도 비롯된다.

1. 예술의 본질은 인공성(人工性)?
서양의 예술철학에서 예술(art)은 일찍이 기술(라틴어로는 ars, 그리스어로는 techne)의 한 방편이었으며, 이러한 분류로 인하여 자연과 대립 관계를 이룬다. 자연에서 소재를 얻어 자연을 대상으로 모방하는 행위와 결과로서의 예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 따라서, 모순되게도 비창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근세 초 예술(특히 조형예술)을 자유학예(ars liberales)의 경지에 올려놓음으로써 그리고 다시 한 번 18세기 바뙤(Charles Abbe Batteux) 등에 의해 순수 예술(fine art)로 정의함으로써 예술은 창조적인 행위와 그 창조를 실천하는 ‘천재’적인 예술가로써의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이후 이 정의 혹은 정언은 수많은 이견에 대립하였으며, 또한 순수라는 미명 아래 조형예술의 근거였던 공예(manufacture)적 속성을 잃게 만들었다. 공예적 속성을 잃었다는 것은 자연의 가공으로서의 예술적 본질을 잃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공예성을 잃었던 것은 예술뿐이었다. 과학과 기술은 오히려 예술이 버린 이 개념을 확대발전시켜나갔으며, 이제 미술은 그들에게 부족한 형식을 기술로부터 차용하는 처지에 놓였다: 비디오를 비롯한 모든 영상예술이나 다양한 설치(installation)에서 사용되는 장치나 재료들은 기술적 차원의 도움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공성훈은 소위 순수미술을 교육받았지만, 그 개념의 제도 속에 자신을 구속하지 않았다. 대학원을 졸업 후 그가 선택한 행로는 예술이 아니라 기술이었다. 공과대학에 재입학한 공성훈은 거기서 예술이 버린 기술을 배웠다. 그가 미술대학을 다니던 시간을 기억하면서 했던 말이다: “학교 다닐 때쯤을 생각해보면, 발이 지상에서 한 30센티쯤 떠서 다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졸업하고 나니 허망했습니다. 화가가 되려고 하는데 어디에 발을 디디고 서야 할이지 막막했거든요. 그래서 뭔가 분명하고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미술을 다시 시작해 보고 싶었습니다. 유일하게 물질을 다루는 예술인 미술을 제대로 하려면 뜬구름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는 미술대학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공예성을 공과대학에서 익혔으며, 더 나아가 순수라는 미명의 관념론이 아니라 실천과 비평을 겸비한 경험론적 태도를 견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테크놀로지에 착안한 영상이나 키네틱 등의 설치작업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인 개입은 그의 회화작업에서 나타났다. 자연을 재현하는 것, 즉 모방론의 한계와 극복을 위한 노력이 현대미술의 기본적인 태도와 본질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본질에 상응하는 여러 노력이 현대미술의 다양한 장르의 개척과 스타일의 구성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와 다른 시대적 독창성으로서의 모더니티(modernity)를 생산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공리이다. 이 공리 속에서 공성훈은 20대의 젊은 청춘을 고민했을 것이며, 꾸준한 실험과 전시로 이 고민을 노출시켜왔다. 그 고민의 원인들을 들춰보면, 공성훈의 진로에 대한 계기를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우선은 80년대 한국미술계의 상황이다. 제도화된 미술은 추상이거나 구상이거나 형식논리에 빠져 있었다. ‘순수’라는 허울로 미술은 단순히 조형적 질서 속에 부여된 감각적인 미를 생산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는데, 이를 가리켜 공성훈은 ‘평면성’이라고 가름하였다. 이와 대비되는 영역이 ‘리얼리티’였다. 추상화의 기형적 발전은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적 사실이었다.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탈정치성이 아니라, 현실과의 무관한 고도의 관념성이었다. 모노크롬(mono chrome)의 극단적인 추상화와 같은 것들은 한국에서 원래 내재되어 있어야 할 근성을 잃어버리고 장식이 되어갔다. 이 장식은 일반인에게는 4차원에 가까운 관념적 언어로 옹호되었다. 미술은 그야말로 색, 형, 질료만 남은 박물(博物)이 되어갔으며, 이러한 박물들은 미술시장에서 또한 비현실적인 가격과 말로 포장되어 거래되었다. 예컨대 제도적인 미술계에서 미술은 그들이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모더니즘의 이념을 지우고 형식만을 취한 것이다. 이즈음에서 미술은 현실과의 관계, 즉 ‘리얼리티’를 상실했다. 물론 당시 미술의 탈정치성을 비판하며 등장한 민중미술이란 것도 있었다. 제도적 미술이 지닌 형식주의와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며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펼쳤던 이 제도권 밖의 미술은 리얼리즘을 존재론적 이념으로 삼았다. 군사독재정권의 반공과 산업 이데올로기에 억눌린 사회 속에서 현대작가들이 운신할 사유의 영역은 좁을 수밖에 없었으며, 거의 동일한 생각과 그 결과를 재생산해내는 현실에 대한 첫 저항이었다. 물론 민중미술을 실천한 작가들도 거의 대부분은 제도적 교육을 받았으며, 그들이 취한 방식도 독창적이라기보다는 ‘사회주의리얼리즘’에서 발전된 양식을 수용하는 한계를 동시에 노출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삼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거나 사회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의식은 기존의 미술이 지닌 한계를 극복해 줄 가능성을 여는 것이었다. 실제로 팝아트나 즉물적 표현주의와 같은 방식들은 민중미술에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실험되었다. 공성훈의 학창시절은 이 두 미술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그는 그 경계선 위에서 고민했다. 그러나 민중미술도 아카데믹한 제도권의 미술도 그의 갈증을 해소해 주지는 못했다. 필자가 보기에 공성훈은 기술(=인공성)에서 현실을 여는 열쇠를 찾으려고 하였던 것 같다.

2. 설치 및 영상작품: 실용과 외부적 목적을 상실한 기계들
현대미술이 20세기 중반부터 펼친 독특한 역사적 현상으로 지목되는 것 중 하나가 설치미술(installation)이다. 과거 조각이라는 입체적인 조형 장르에서 발전된 형태이지만, 재현적인 성격이나 만들어진 조형물의 자율적인 존재성을 드러내는 방식을 탈피하여, 작품과 관객과의 관계 그리고 상황에 더 치중하는 양태를 띤 것이 이 설치미술이다. 임시적 혹은 반영구적인 구조를 설치함으로써 정해진 공간을 현실의 중립적 상태에서 예술적 의미로 재설정하는 것이 이 장르의 특징이다. 나아가 설치미술은 퍼포먼스, 해프닝 등과 같은 극적인 성격들과 대지미술이나 환경미술 등과 같은 공간개념의 재 정의를 동시에 반영하는 장르였다. 공성훈에게 설치는 그가 경험하고 의식한 세계의 재구성으로서 보편적인 가치를 갖지만, 그 이면에는 기계, 문명, 제도와 같은 개념들을 물리적인 상황으로 치환하려는 의도로서 수렴되어질 수 있다. <블라인드>는 커튼을 대신하는 현대적인 도구를 그 정해진 용처에서 가져와 작가 자신의 조형적 조작을 통해 다른 의미체로 전환시킨 것이다. 도대체 이 다른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작가는 어떤 의미를 지시하려는 것일까? 우선 그의 설치작업은 전기로 추동되는 운동이 있다는 점에서 키네틱아트(Kinetic art)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변화가 단순히 물리적 운동뿐만 아니라, 시각에서의 환각적 운동까지 동반한다는 점에서 옵아트(Optic art)까지 포함한다. 여기에는 근원적으로 움직임 혹은 시간을 몸체에 연계하려는 모빌(mobile)의 차원까지 끌어안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60/70년대의 현대조각의 발전을 잇는 계승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겠다. 그러나 공성훈에게 이러한 문제는 기계적 환경에 익숙해져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의식(혹은 무의식)을 반추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블라인드는 그가 선택한 샘플 중에 하나다. 어떤 것, 이를테면 형광등이나 주방용 집기 같은 것이었다 해도 무방할 것이지만, 블라인드는 차단과 투과를 동시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평면적이면서도 공간 속에 침투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탁월해 보인다. 그가 창조한 이 블라인드 조각-설치는 블라인드 결을 스펙트럼처럼 순차적으로 형광페인트로 도색하고 그 뒷면은 알루미늄 테이프를 사용하여 반사효과를 주었다. 이 블라인드는 의도한 바에 따라 특정한 구조를 가진 형상이 되며, 전기모터로 인하여 가동된다. 기계적 움직임과 반사되는 빛이 명멸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이 특징이다. 여기서 작가는 리터러시(Literacy)를 제거한 의미의 진공과 함께 ‘인스턴트’한 감상태도 등을 도출하였다. 이 기계(=작품)들은 다니엘 뷔렌의 무의미한 선(線)과 빅토르 바자렐리의 착시 그리고 알렉산더 칼더의 운동을 종합해 놓은 현대미술의 혼성물처럼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공성훈은 그 이전의 현대미술에 대한 독학을 수료한 것을 증명하듯이 이것들을 전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윽고 작가는 개념을 보편적 정의와 맥락에서 떼어내 임의적으로 분해·조립하여 새로운 의미체계를 만들어내는 데에 열중하면서 동시에 ‘쓸데없는’ 설치-해프닝을 펼쳐나갔다. 그 중 하나인 <예술은 비싸다-입장료 받기>에서 그가 작성한 작품의 논리적 흐름도(flow chart)는 예술 소비의 행태와 메커니즘을 분석한 보고서이다. <자판기로 작품팔기> 따위도 예술작품을 고급 소비재로 정의하는 사회와 제도에 대한 작가의 시니컬한 대응으로 나타났다. 이를 위해 작가는 전광판이나 자판기를 제작하여 전시장에 설치하였다. 공성훈은 공과대학에서 익힌 기술적 장치들을 활용하면서 그런 조형예술의 허구 – 이것은 조형예술을 둘러싼 담론의 허구일 수도 있다 -를 공격하고 현대미술을 재정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그가 고안한 기계들이며, 그 기능을 전환했을 때 파생되는 의미론적 가치들이다. 여기서 기계란 들뢰즈(Deleuze)의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기계란 고정된 본성을 가진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를 구성하는 성분이며, 그 관계 안에서 변하는 속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기계가 예술작품이 된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본래적 기능을 상실하고 그것이 마땅히 지녀야 할 관계성을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공성훈에게 기계들이란 예술작품일까? 칸트(Kant)식으로 표현하자면 자체의 목적 외에는 아무런 의도를 갖지 않는 순수한 물적 상태가 예술작품인데, 공성훈의 설치작품은 예술적 목적 외에 또 다른 목적, 즉 메시지를 담는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작가가 경험한 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언사다. 만약 단순하게 자본주의와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하이테크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언어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단으로 이 설치작품들을 해석한다면 작가의 메시지는 이제 은유적이며 보다 중층적인 의미구조로서 인식된다. 쉽게 말하자면 작품이 표출하는 말은 교묘하게 다의(多義)적이다. 기계들은 보다 정교한 수사학과 의미의 메커니즘을 형성하기 위한 도구이며, 또한 언어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수사학적 구성을 위해 공성훈은 비트겐슈타인 식 혹은 ‘꺽기도’ 식의 언어유희를 감행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유희를 개념적 차원에서 사용하는 것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가 실험한 개념유희는 설치와 해프닝에서 적절하게 활용되었고, 마지막으로 그의 회화작품에서도 적지 않은 효율성을 보여주었다.

3. 세상을 그리다 혹은 말하다
공성훈의 그림은 깊게 오래 보아야 한다. 짧은 감상에서는 놓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타 작가의 작품들도 예의상 오래 봐주어야 마땅하지만, 그의 작품은 긴 시간이 필요하다. 리얼리티는 여기서 시각의 문제로 환원되고, 이 시각은 현실과 가상 혹은 인공에 대한 변별력과 비판력에 대한 문제에 당면하게 된다. 그의 회화작품들은 얼핏 사진처럼 보인다. 적어도 작품들이 보여주는 시각정서는 디지털카메라가 포착한 모습과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감상이 깊어지면, 의외로 화면의 피부가 매우 강하게 회화적 행위를 노출시키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관객은 현실을 모방한 리얼리티와 더불어 작가가 캔버스 위에서 벌인 행위와 의도의 사실을 동시에 인지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볼 때에 조금 긴 시간이 요구된다. 공성훈은 대상을 깊게 그리고 정밀하게 본다 혹은 그렇게 보기를 관객에게 요구한다. 이것을 그는 작품을 통해 강요한다. 18세기 낭만주의 회화에 주요 이슈 중 하나가 숭고미(The Sublime)에 대한 도전이었다. 자연의 위대함은 범신론적인 종교였고, 인간의 발길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듯한 풍경은 그 자체로 초월적인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풍경화들은 과거 인간과 역사의 배경으로서 풍경화를 성화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시기를 주목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시대상황을 알 수 있다. 프리드리히의 시대는 산업혁명의 불꽃이 유럽 전역에 퍼졌던 시기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자원이 되어갔으며, 개척과 개발의 대상으로 변해갔던 시기이다. 그런 시기에 나타난 낭만주의의 풍경화들은 자연을 신으로 보았다. 즉 범접이 불가능한 스스로의 주체로서 자연은 당시 자연과학과 산업이 바라보던 객체로서의 자연에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200년이 지난 지금 자연은 보호가 필요할 정도로 황폐해졌다. 그러나 간혹 자연은 인간의 이성과 방어력을 우습게 넘어서며 파멸의 힘을 보여준다. 매번 인간은 그 앞에 속수무책이며, 또한 매번 자연의 위대함을 한 목소리로 외친다. 그리고 또 인간은 자연을 소비하는 일상으로 돌아가 그 위대함에 대한 기억을 지운다. 공성훈에 의한 최근의 풍경화들은 구도에 있어서 프리드리히를 많이 닮았다. 그 유사성은 구도뿐만 아니라, 그림에 담긴 정서도 비슷하다. 물론 시대적 상황과 환경은 다르다. 프리드리히가 그리는 자연은 초월적이며 숭고미를 지닌다. 반면 공성훈의 자연은 인공적이며, 그 숭고미 또한 인공적이다. ‘벽제의 밤’이란 주제로 5번 이상 전시된 그림들을 보면 그가 그린 자연이란 인간의 이기와 편이를 위해 ‘조작’된 환경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차이는 구체적이 된다. 프리드리히는 적막하고 삼엄한 슐레지엔의 산맥이나 북해의 해변을 찾아다녔던 것에 비해 공성훈은 단지 자신이 거주하던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기만 하면 되었다. 간혹 호수나 계곡 혹은 바다나 하늘을 그린 그림들은 프리드리히나 공성훈에게서 공통적으로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지극히 독존적인 현상을 보여주곤 있긴 하다. 심상치 않은 모습으로 그리고 언제든 인간의 기대와 희망을 간단히 무시할 것과 같은 절대성이 풍경을 통해 드러나는 것도 공통적이다. 그것에 대해 신앙적 태도를 프리드리히가 보여주었다면, 공성훈의 태도는 자본주의적 인간의 시선을 노출시키는 부분에서 마무리를 짓는다. 그리고 전자가 자연의 신적인 현현에 천착하고 있었다면, 공성훈의 태도는 자연의 불확정적 운동과 인간의 근시안적 자연관을 대비시키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성훈의 수사학이 드러난다. 공성훈이 그린 풍경화들은 인공적인 요소들로 채워질 때가 많다. 간혹 그 사이에 드러나는 자연이나 <근린자연>이란 제목으로 제시된 풍경들을 보면, 자연은 마치 신의 음모처럼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불안감을 조성한다. 그 풍경 속에서 인간의 일상적인 삶, 즉 먹고, 마시고, 배출하는 모습들이 암시적으로 그려져 있다. 불안한 환경 속에서 인간들은 오히려 태연작약하다. 그리고 그들이 설정한 인공적 환경 속에서 그야말로 기계적인 삶을 소비한다. 역설과 모순을 격한 태도로 노출시키는 힘은 공성훈이 가진 능력이다. 약간은 하드보일드한 태도가 있지만, 격한 감정은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시니컬한 정서로 가라앉혀있다. 그리고 이런 감정구조가 회화의 수사학을 이룬다. <벽제의 밤> 주제로 발표된 작품들은 추하고 음습하고 괴기할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 하다. 대개 사실주의를 천명한 작가들이 보여주는 정서의 단순성과는 많이 다르다. 그는 약간 복잡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것은 회화의 수사학이 아니라, 현실의 모습이기도 하며, 공성훈은 그렇게 현실을 경험하고 재현한다. 그리고 이 역설(paradox)은 사실에 사실성을 더함으로서 오히려 비현실적이며 환상적으로 만드는 아주 기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4. 디스토피아를 창조하다
모든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는 나름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하다못해 자국민과 타 민족까지 비극의 수렁으로 밀어 넣었던 독일의 나치(National-Sozialismus: 국가사회주의)도 그들의 유토피아를 상상하였으며, 심지어 이 유토피아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어디에도 없는 그리고 없을 그런 세계이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든 유사한 상태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한국사회의 현대사를 잠깐만 돌아보아도 이러한 의도와 실천을 찾아볼 수 있다. 온갖 개발로 점철된 나라는 인공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정신병에 가까운 신념에 사로잡혔다. 국민은 유토피아의 주체가 아니라 그것을 건설하는 기계가 되었다. 즉 수단으로서 인간은 ‘노동력’이거나 ‘인적자원’에 불과했다. 그러한 99%의 기계들은 1%의 지배층들의 목적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아 열심히 살고 먹고, 교미했다. 그리고 이런 욕망을 해결하고자 가장 인공적인 자연환경을 만들어놓았으며, 그곳에서 욕망을 분출하고 살았다. 공성훈에게 이러한 환경은 ‘근린자연’이란 개념으로 인식되었다. 근린(近隣=neighbourhood)자연은 이러한 이념과 그 이념을 현실화하려는 욕망이 만들어놓은 현대적 환경이다. 근린이란 거리상 이웃된 무엇이며, 물리적인 거리의 가까움과 더불어 친근성 등 심리적인 상황까지 발전할 무엇이다. 일상적인 용어로 ‘근린공원’이라는 것이 있다. 백과사전적 정의로는 “근린거주자 또는 근린 생활권으로 구성된 지역생활권 거주자의 보건·휴양 및 정서생활의 향상에 기여함으로 목적으로 설치된 공원”이라는 것이다. 이 말에서 또다시 근린거주자와 근린 생활권이란 개념이 전제된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이 삶과 환경을 제도화하기 시작한 즈음에 배태된 이 현상들과 개념들은 현실을 목적과 수단으로 분류하고 재 정의하는 힘을 지녔다. 그리고 그 힘은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사고 속에 뿌리 박혀 있다. 자연과 욕망의 결합체로서의 근린자연에는 자본주의와 배금주의에 오염된 인간성을 감추려는 의도가 도사리고 있으며, 이런 모습들을 작가는 특유의 사실성으로 노출하고 고발한다. 모텔, 개농장, 지역축제, 관광지, 개발을 기다리는 나대지, 인공호수 등등에서 현대사회의 정치성을 읽어내고 있다면 그 관계성은 관념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정치적인 언사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사실주의의 윤리강력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사실주의의 속성은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과 더불어 판단을 강요하는 것을 지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적이며 또한 불온하다는 느낌마저 소거되지는 않았다. 공성훈의 발언은 충분히 정치적인 의혹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디스토피아를 유토피아로 전달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불순하기 때문이다. 이 불순함은 우리가 이미 그의 영상과 개념작품에서 익히 경험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 불순한 정치성은 주변적이다.

5. 리얼리즘을 넘어서…….
20세기 미술에서 우리는 다양한 사실적 재현을 경험하였다. 굳이 표현의 양태를 사실주의라고 정의하지 않더라도 미술은 여러 방식으로 사실성을 보여주거나 이것과 결부되어 있었다. 사실성(혹은 현실성)을 떠난 미술은 장식품이 되거나 아니면 조형의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공성훈에게 있어 ‘사실주의’는 미술에서의 공리를 넘어서는 정언적 명령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형식으로서의 사실주의는 단순히 그가 사용할 여러 방법론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까 공성훈은 사실주의라는 형식 자체를 자신의 작업을 위해 혹은 작업의 매뉴얼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가? 혹은 더 나아가 언어는 사실을 보증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살펴보면, 공성훈에게는 여러 해답이 존재한다. 그의 답에는 임기응변적인 요소들도 있어서 작가가 지닌 사고의 순발력을 잘 보여주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 숙고와 교정을 통해서 정련된 것들도 있다. 일단 그의 작품에 붙여진 제목을 살펴보면 이 현상을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미술에서의 제명(제목 붙이기)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가령 일련번호나 색 혹은 구성의 특징을 간단하게 기술한 이름들이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의 현대미술 속에서 유행했던 것이며, 이는 말레비치나 칸딘스키부터 미술의 음악적 opus개념을 대입한 이후 관념의 형식주의에 천착했던 역사를 반영한다. 모더니즘의 이상주의적 익명성은 이런 미술의 태도에서도 읽혀진다. 마치 개체들은 구조에 대해 구성성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보다는 – 이름 또한 전체가 부여한 아주 가벼운 개별성에 불과하지만 – 주민등록번호, 군번, 학번, 전번, 주소지번 등으로 그 정체성을 결정하였다. 공성훈에게 제목은 작품의 의미를 결정짓는 의미심장한 요소이다. 제목은 작품을 개별화된 단일체로 만든다, 즉 고유한 것으로 결정하는 힘을 지녔다. 예컨대 <개방과 국수>에서처럼 개집 안에 놓인 국수를 바라보는 관객은 이것이 개념과 현실 차이를 가로지르는 막연한 거리감 속에서 사유를 유발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혹은 현실은 있는 그대로일 수 없다. 이것들은 감각에 의해 왜곡되고 언어에 의해 정리되며, 또한 정치적으로 수정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성훈의 개념유희와 회화는 언어가 가진 힘에 의존하여 기존의 언어로 규정된 현실을 본래의 현실로 되돌려 놓는 일을 한다. 제목은 작품으로 전달된 현실 혹은 사실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사유의 프로세스를 재가동하게 한다. 그러니까 공성훈의 작품은 결론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결론이라 생각했던 것들을 반성하게끔 하는 계기와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6. 파편화된 결론
필자가 마지막으로 위의 제목을 들어 정리하고자 하는 의도는 공성훈의 작업을 종합하기에는 필자의 지적 능력이 그만큼 상응하지 못한다는 반성적인 실토와 함께 그의 작업이 이러한 파편화를 통해 전략적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작업의 진도를 설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물론 자신의 의지와 능력대로 다양하거나 일관된 작업을 수행할 수 있으며, 그 작업의 방향과 스타일의 형성과 전개는 그만이 가진 독자적인 영역이므로 필자와 같은 타자가 월권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공성훈의 작업은 다양하다. 그가 다룬 장르만 해도 앞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양하고 변화무쌍했다. 설치작업을 하다가 영상과 영상설치를 하기도 하였고, 개념을 문자 그대로 편집하는 해프닝과 함께 관객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퍼포먼스를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에는 – 이것이 그가 선택한 마지막 결정이었다고 보지도 않지만 – 전통적이라 치부할 수 있을 회화작업으로 전시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담론을 바탕으로 임의적인 다양성이나 방임적인 무작위성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몇 가지의 파편을 정리해 보는 것으로 글의 마무리를 짓는 편이 오히려 확고한 카테고리에 그를 가두는 편보다는 더 낫다고 판단된다. 몇 가지 가능한 의미들로 마무리 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그의 작업이 어떻게든 리얼리티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리얼리티는 순수재현적인 것은 아니다. 현실은 그의 그림이나 개념 속에서 비틀어지고 왜곡되며, 그의 시니컬한 태도로 인하여 조정된 상태로 재현된다. 그래서 작가 스스로 작품의 제목처럼 <버추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라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이것은 기존의 사실과는 다른 사실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공성훈이 정의한 ‘회화-회화’는 복고적인 것이 아니라 대안적이다. 둘째, 이 대안들은 현대성을 이루는 몇 가지 개념에 부합하는데,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 혹은 기계로써의 작품들이라는 점과 셋째, 포스트모더니즘의 화두처럼 회자되었던 장 보드리야르의 말, “디즈니랜드는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따로 만들어진 환상의 나라”라는 것처럼 인공적인 예술을 이용하여 인공적인 현대의 풍경과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현실을 예술적 상상력으로 공작하기 위해 그리고 그 공작을 통해 비현실성이 가공되는 이 이중적 프로세스와 논리가 공성훈의 독창적 작업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의 비현실성은 현실 위에 떠있는 관념적 유령은 아니다. 그것이 부단히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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