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우

백승우
백승우(1973~)는 디지털 이미지의 과잉 시대에 사진을 찍는 행위가 마치 ‘물속에서 물총을 쏘는 것’과 같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고 고백한다. 사진의 고유한 가치였던 ‘찰라’와 ‘진실’의 아우라는 미술사의 비석에 새겨진지 오래다. 그런 의미에서 백승우는 ‘사진’을 전공하고 ‘사진’의 언어를 주로(잘) 사용하는 현대미술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미지를 ‘포착’하기보다 ‘수집’하고 사진의 표면을 부유하는 이미지를 조작하여 의미망을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현실과 비현실, 가상과 실제, 보이는 것과 감춰진 것들의 미묘한 경계를 드러낸다. 백승우는 정교한 미니어처 도시 사진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탐색하며, 거대한 영화 세트 같은 북한의 비현실적인 풍경 속에 감춰진 리얼한 현실의 아이러니를 들춰낸다. 또한 북한이 체제선전용으로 배포한 고해상도 사진을 변형시키거나, 개인의 추억이 담긴 스냅 사진을 수집하여 새로운 해석을 덧붙이는 등 ‘사진’의 한계를 뛰어 넘는 다양한 의미와 표현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있다.

Interview

CV

<주요 개인전>

2015
Walking on the line, 센터에이, 밴쿠버, 캐나다
Photographs 2001-2015 by Seung Woo Back, 고은사진미술관, 부산, 한국
2012
틈, 실현불가능한 일반화, 가나아트센터, 서울, 한국
Memento, 두산갤러리 뉴욕, 뉴욕, 미국
2011
판단의 보류, 아트 선재 센터, 서울, 한국
Blow Up, 미사신 갤러리, 도쿄, 일본
2010
Utopia / Blow up, 일우 스페이스, 서울, 한국
2009
Revised Ideals, 가나아트 뉴욕, 뉴욕, 미국
2007
Real World, 인사 아트센터, 서울, 한국
Real World, 포일 갤러리, 동경, 일본
2006
Blow up, 가나 보브루 갤러리, 파리, 프랑스

<주요 단체전>

2015
나는 불꽃이다, 서울 首尔, 63스카이아트, 서울, 한국
한국현대미술의 흐름Ⅷ – 사진의 여정, 김해문화의전당, 김해, 한국
크로스 밴쿠버, 크로스 게이즈, 2014-2016 밴쿠버 비엔날레, 벤쿠버 전역, 벤쿠버, 캐나다
Dislocation, Smith college Museum of Art, 메사추세스, 미국
Seoul vite vite, Lille 3000, 릴, 프랑스
Lies of Lies, Huis met de Hoofden,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거짓말의 거짓말, 토탈 미술관, 서울, 한국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한국
NORTH KOREAN PERSPECTIVES, Drent Museum, 아센, 네덜란드
NORTH KOREAN PERSPECTIVES, 시카고 현대사진 미술관, 시카고, 미국
2014
The Third Print, 토탈 미술관, 서울, 한국
Well-constructed: contemporary photography from Korea, AANDO FINE ART, 베를린, 독일
2014 서울사진축제 <경성에서 서울로>, 서울역사박물관, 서울, 한국
2014 Real DMZ Project, 강원도 철원 DMZ 접경지역 일대, 철원, 한국
art:gwangju:14 특별전 <잠상 潛像>, 김대중컨벤션센터, 광주, 한국
Open Borders / Crossroads Vancouver, 밴쿠버 비엔날레, 밴쿠버, 캐나다
2013
사진과 사회 : 소셜아트, 대전시립미술관, 대전, 한국
상대성 도시, 토탈 미술관, 서울, 한국
미술관의 탄생: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특별 건립기록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 한국
AIR 3331 × MIK: Made in Kanda, 아트치요다 3331, 동경, 일본
2013 Real DMZ Project-From the North, 아트선재센터, 서울, 한국
2012
Being Political Popular: Art at the Intersection of Popular Culture and Democracy Movements in South Korea, 1980-2010, 캘리포니아
어바인 대학 미술관, 캘리포니아 어바인, 미국
배움의 정원, 부산 비엔날레-부산시립미술관, 부산, 한국
사진의 마술, 대구 사진 비엔날레-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 한국
두산갤러리 서울 재개관전, 두산갤러리, 서울, 한국
2011
2011 서울사진축제,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제 8회 주안미디어문화축제, 주안역 광장, 인천, 한국
2010
드림랜드, 퐁피두 센터, 파리, 프랑스
Chaotic Harmony, 산타 바바라 뮤지엄 오브 아트, 산타 바바라, 미국
archiTECHtonica, CU Art Museum. 콜로라도, 미국
한국 현대 사진의 최전선, 국립 대만 미술관, 대만
On the line, 한국 문화원, 런던/로스앤젤레서, 영국/미국
Man Ray & His Heritage, 서울 시립 미술관/ 제주 도립 미술관, 한국
2009
Chaotic Harmony, 휴스턴 뮤지엄 오브 아트, 휴스턴, 미국
트랜스포메이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
악동들 지금 여기, 경기도 미술관, 경기도, 한국
멕시코 사진 비엔날레, The Centro de la Imagen, 멕시코 시티, 멕시코
Magic Moment (Korean Contemporary Art Exhibition), 하노버, 독일
Double Fantasy, Marugame Genichiro Inokuma of Contemporary Art, 마루가메, 일본
Platform 2009, 기무사, 서울, 한국
사진비평상 10년의 궤적-시간을 읽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Photography now, China, Japan and Korea, 샌프란시스코 뮤지엄 오브 모던 아트, 샌프란시스코, 미국
2008
39조 2항, 선재 아트 센터, 서울, 한국
The Bridge, 가나 아트 센터, 서울, 한국
Real illusions-Young Korean Artists, 가나 아트 뉴욕, 뉴욕, 미국
Untitled, Bauhaus, 베를린, 독일
Memory of the Future, 대구 사진 비엔날레, 대구, 한국

Critic 1

김인선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대표)

사진을 다루는 작가는 화면에 포착되어 드러난 혹은 읽히는 이미지와 실재 현상과의 간극을 드러냄에 있어서의 한계를 어디까지 극복할 수 있을까. 사진 이미지는 그 화면이 완벽한 추상성을 획득하였을 지라도 카메라를 들이댄 대상이 존재하는 한 사실성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러한 의문은 언제나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백승우 작가는 이러한 매체적 특징과 한계를 정확히 보고 있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한계를 활용하는 동시에 그대로 드러내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그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까지 만으로 자신의 작업 범위를 가두고 있지 않는다. 이미지의 범람과 함께 ‘조작’이나 ‘가상’, ‘비현실’ 등의 단어들이 누구에게나 가용되는 일상적 행위일 뿐인 오늘날에 백승우 작가의 작업을 사진 이미지라는 특정 장르의 결과물로서 읽는 것은 충분치 않아 보인다. 백승우 작가의 작업 과정을 살펴보면 사진 장르에서 수많은 작가들이 시도했던 현실과 이미지 사이의 틈을 비집는 행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시각예술’로서의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대상을 다루는 방식은 카메라에서 손을 놓은 후 출력된 이미지를 들여다보는 순간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사진매체를 다루는 기본적인 일련의 순서 또한 작업 진행의 과정이며 동시에 이미 작품으로서의 개념적 레이어를 만들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지의 허구 사이의 틈이 발생함으로써 드러나는 작업과정, 그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외부요소들의 개입, 그리고 결과물에 대한 관객들의 태도에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 <유토피아 Utopia>시리즈는 특히 이러한 태도를 명확히 보여준다.

2011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작가는 “판단의 보류”라는 제목의 전시에서 <유토피아>시리즈를 발표하였다. 이 중 <유토피아 #32>는 13개로 분리한 이미지 데이터를 13개 국가로 보내 이를 프린트하여 다시 한곳으로 받아서 전시한 작업이다. 사용된 이미지는 북한에서 사용하는 홍보용 이미지인데 이를 디지털화하여 재구성한 뒤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는 각국의 출력소에 같은 수치의 데이터를 지시하였고 인화지 역시 같은 것으로 지정하여 그 결과물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결과물을 다시 받았을 때는 미묘하게 혹은 확연하게 다른 색채톤의 이미지들이 돌아왔던 것이다. 작가의 손에 돌아온 13장의 이미지들이 다시 하나의 이미지로 결합되었고 이는 거대한 사이즈의 사진 작업으로서 전시되었다.

관객은 이 사진에서 노출된 데이터의 오류를 있는 그대로 목격하게 된다. 작가로부터 정확한 수치들이 지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협의가 불가능한 채 남겨진 이 간극은 기계작업이 개입되는 사진이라는 장르에서도 결국 수많은 필연적 오류의 흔적과 개별적 차이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러한 차이를 목격하게 하여 인식체계를 수치화한 데이터들이 각국마다 다른 결과물로 이미지화됨을 밝히면서 어떠한 조직이든 내제될 수밖에 없는 견고하지 않은 시스템의 허점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정 정보 속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드러냄으로써 위태로운 시스템을 폭로하였던 백승우 작가는 <블로우업 Blow Up>시리즈를 통해 보다 미시적인 접근으로 개인의 시각을 보다 능동적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보여주었다. 그는 2002년도 북한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찍은 사진들은 심하게 통제를 받았다. 이미 찍힌 사진도 각도가 벗어나면 여지없이 그 자리에서 폐기 되었고 남한으로 들고 온 사진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뻔한 풍경 사진이라 그는 몇 년 동안 자신이 찍은 사진을 처박아두었더랬다. 어느 날 외국 작가의 비슷한 경우로 만들어진 사진 속에서 우연히 자신의 사진 속에 등장했던 인물을 발견하였다. 이를 계기로 작가는 지금껏 보관했던 필름을 다시 한 번 세밀히 들여다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전체 풍경을 구성하고 있는 우연한 대상들을 포착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가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의식적으로 대상을 다루는 태도, 즉 특정 현장의 특정 시간에 구애받을 필요 없이 이를 자유롭게 다루는 방식으로 사진을 대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자신의 눈과 몸이 반응하면서 찍었던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장면이 통제되면서 느끼는 무력감, 그를 통제하였던 존재, 즉 국가가 창작자 역할을 하면서 작가를 피동적 존재로 전락하게 하는 경험 이후 직접 이미지를 촬영하는 과정이 필요 없어지는 방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경험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블로우 업>시리즈는 권력으로부터의 감시와 통제를 비껴가는 작가의 시각의 흐름을 보여주었다. 남북의 특수 상황으로 인하여 이 작업은 한편 정치적 이슈로 확장될 수 밖에 없는데, 이러한 시선의 개입 또한 사진이라는 매체이기 때문에 형성되고 있는 사회적 푼크툼(punctum)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특별히 이 작업을 정치적 이슈로서 다루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정 이슈를 배제하여 보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작가가 취한 작업 방식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개인의 기억을 동원하여 개별적 이야기를 재생시키는 <아카이브 프로젝트 Archive Project>가 탄생하게 된다. 관객의 참여 요소가 중요한 프로젝트성 작업인 <아카이브 프로젝트>에서는 우선 직접 촬영방식을 벗어나 이미 누군가가 촬영한 익명의 필름 약 5만여 장을 수집하였다. 그리고 이 중 2,700 여 장을 출력한 후 이를 분류하고 이야기를 찾는 과정에서 작가의 주관적 개입을 최소화 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미지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기억과 이야기를 환기시키는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과정을 집어넣은 것이다. 이는 상호간의 통제를 극소화하고 자율적 해석과 조작, 그리고 정보의 모순과 오류가 난무하는 이미지의 더미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조작된 가상 세계이다. 작가는 본인을 포함한 지인들에게 모아놓은 사진 속에서 적당한 이미지를 골라서 일련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하고 각 장면의 순서와 정확한 날짜를 정하도록 한다. 참여자들은 이미지속의 단서를 바탕으로 나름의 추론을 통해 이야기를 구성하여 정해진 숫자의 사진을 순서대로 배열하고 제목을 붙인다. 그리고 관객은 이미지와 결정된 시간의 순서 및 제목을 통해 다시 한 번 나름의 스토리를 짐작하면서 사진을 관람한다. 백승우 작가는 이 작품에서 사진이기 때문에 가능한, 진실에 근접한 이야기를 보고 있다는 착각을 매우 효율적으로 끌어내고 있다.

2012년 부산비엔날레에서 작가는 부산의 전경을 사진에 담았다. 그것은 도시의 도로와 빌딩 숲 사이의 미로와도 같은 복잡한 풍경을 재구성한 장면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사진과 실재 도시는 분명 다름에도 불구하고 전지자적 시점에서 조합해 낸 이 풍경은 분명 부산이었다. 그것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도로 군데군데 보이는 익숙한 랜드마크가 눈에 띄기도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미 머릿속에서 인식된 부산의 이미지는 그리 정확하지 않아도 바로 구분 가능한 대상의 이미지를 미리 규정해 놓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식과 시각 이미지, 그리고 실제 현상 사이에서 ‘부산’이라는 하나의 지역으로서 규정된 개념적 판단에서 생성되고 있는 정보의 괴리감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는 통상적 차원에서의 일반화 된 착시임과 동시에 개개인에게 발생한 공통된 경험이었다. 개인적 경험의 차원으로 동조를 끌어낸 이 작업은 이전에 작가가 실현했던 보다 거대한 차원의 시스템의 오류가 개개인에게도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환기시켜 주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과 작가간의 작업 사이의 밀접한 개입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들여다 볼 수 있게 하였다.

매체의 한계에 대한 의문은 작가가 해당 매체를 다룸에 있어서 그 의존도에 따른 기우일 뿐, 백승우 작가가 보여주는 작업에서는 이 글의 첫 문장의 질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작가는 우리에게 매체를 다룸에 있어서 확장적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고, 그 다음 작업에서 보여줄 또 다른 시도를 기대하게 한다.

Critic 2

사진으로 사진을 의심하는 사진

신보슬 (큐레이터, 토탈미술관)

백승우는 사진작가다. 하지만, 그가 찍어내는 사진은 어딘가 다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백승우의 사진은‘찍은’사진이라기보다‘그려내는’ 혹은 ‘만들어 내는’ 사진에 가깝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고, 컴퓨터 보정이나 합성이 더 이상 생소하지 않은 지금, 사진을 만들어낸다 한들 크게 문제될 것은 없겠지만, 그의 사진이 그저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는 ‘합성’에 그쳤다면, 굳이 애써 그의 사진에 대해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사진이 다른 사진들과는 꽤 많이 다르다는 것인데, 지금부터 그 다른 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의 사진이 어디가 다른 것인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진부하지만 사진의 사전적인 의미부터 짚어보기로 하자. 1839년 존 F.W 허셀 경이 처음 사용했다는 사진(Photograph)라는 단어는 ‘물체에 반사된 빛과 같은 전자기적 발광을 감광성 기록재료 위에 기록하여 얻은 빛 그림, 즉 광화상을 의미’한다. 사진의 어원이 빛을 의미하는 그리스 어 ‘φώς’(phos)와 펜 또는 붓을 뜻하는 ‘γραφίς’(graphis), 또는 그림을 뜻하는 ‘γραφή’(graphê)의 합성어라는 점을 볼 때, 사진의 출발은 확실히 ‘빛의 그림’이었다. 때문에 근본적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빛과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담아내는 카메라와 같은 장치/기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이러한 사진의 근본적은 부분들이 심하게 흔들렸다. 대상이 없어도 사진은 생산되고, 카메라가 없이도 사진이 만들어지고 유통된다. 사진이 조작되고, 변형되며, 범람하는 이 시대에 사진은 과연 무엇인가? 백승우의 작업은 이러한 의심에서 시작한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디지털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오리지널한 사진’을 찍는 행위가 마치 ‘물속에서 물총을 쏘는 것과 같이 무의미하게 느껴진” 시점에서, 사진작가로서 아니 아티스트로서 그에게 남아 있는 가능성은 무엇일까. 그것도 사진을 전공했고 제대로 찍는 사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작가에게 말이다.
백승우가 찾고 있는 대상을 찍어내는 것이 아닌 사진의 가능성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그 본격적인 출발이 된 Blow up 시리즈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2000년 백승우는 북한에 갈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기존의 북한 사진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사진을 찍겠다는 야무진 각오로 많은 필름을 준비했다. 하지만, 실상 북한에서 그가 다르게 찍을 수 있는 사진은 별로 없었다. 사진가와 동행하는 북한 가이드가 찍을 수 있는 것과 찍으면 안 되는 것들을 지시할 뿐 아니라, 찍은 사진들도 인화하여 검사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모두가 비슷한 아니 똑같은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북한에서의 사진 찍기는 더 이상 흥미로운 작업이 아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당시에 찍은 사진의 사진들을 박스에 넣어두었고, 사진들은 잊혀졌다. 4~5년쯤 지나서 우연히 프랑스에서 북한을 찍은 다큐멘터리 사진전시에 갔다가 낯익은 사진 한 장을 보았다. 꽃을 들고 있는 북한 소녀. 백승우는 그 소녀가 북한에서 만났던 소녀를 닮았다는 생각에 북한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다시 꺼내었다. 그리고 그 사진들을 확대했다. 그 과정에서 당시에는 보지 못했던 부분들, 감시원도 통제하지 못했던 순간과 장면의 기록들이 드러났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했다. 확대과정에서 사진들은 기이하게 잘리기도 하고, 초점이 나간 듯 뿌옇게 흐려지기기도 했다. 이런 사진들은‘잘 찍은’사진을 기대했던 관객을 종종 당황하게 한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인지 작가의 이야기는 무엇인지 쉽사리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목과 연결시켜 생각해본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블로우 업’이라는 제목은 이미 사진을 확대하는 행위 자체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좀 더 방점을 찍고 있는 지점은 ‘블로우 업’의 또 다른 의미, 즉 ‘폭발’에 관한 부분이다. 어떤 것이 폭발되었을 때, 그 전과 후의 물리적인 양태와 상황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일종의 파괴이자 동시에 생성이다. 마치 사진의 한 부분이 확대되고 잘리면서 원래의 인덱스를 잃어버리지만,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과 유사하다. 기존의 다큐멘터리 사진들이 북한에 대한 정보를 주는 혹은 작가의 의도가 분명한 사진들이었다면, Blow up 시리즈의 사진들은 북한에 대한 그 어떤 제대로 된 정보도 주지 않는다. 대신 기존의 맥락에서 튕겨져 나와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사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기록, 지시적 의미들은 이러한 ‘폭발’과정에서 사라지만, 이미지 자체가 독자성을 가지게 된다. 이는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꽤 도전적인 질문이자 시도이고, 사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의심이다. 때문에, 단지 Blow up 시리즈가 북한에서 찍은 사진들이라는 이유로 북한을 주제로 하거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주제의 전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듯하다. 이 시리즈에서 ‘북한’이 강조되었을 때, 작가가 의도한 여러 가지 본질적인 질문들을 무력하게 할 뿐 아니라, 종종 그의 사진을 오독할 여지를 남긴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Blow up 시리즈 에서 중요한 것은 북한에서 찍은 북한 사진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대하는 기존의 태도, 혹은 사진의 본질에 관해 질문이기 때문이다.
사진에 만드는 혹은 사진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유사한 하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의 질문은 북한과 관련된 다른 시리즈는 Utopia 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어느 날 백승우는 일본인 작가와 함께 일본에 있는 북한관련 상품들을 파는 레인보우통상이라는 가게에 들렀다.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와 배용준의 브로마이드, 류시원의 사진이 함께 걸려 있는 곳, 북한의 군가에서부터 조용필의 앨범이 있는 그 가게에서 이데올로기나 국가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모든 이미지들은 그저 소비되는 상품이었을 뿐. 백승우는 그 이상한 가게에서 북한 정부가 찍은 건물사진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북한 건물들을 찍은 사진들과 남한 건물을 찍은 사진들을 뒤섞어 ‘어디에도 없는’ 건물들을 ‘구축’했다. 의도적으로 독일 바우하우스의 미니멀리즘적인 건축이나 포포바의 드로잉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특징들을 차용했다. 여기에서 실재하지 않지만, 실재할 것만 같은 느낌은 ‘사진’이라는 매체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실재에 대한 흔적이 만들어낸 우리들의 고정관념일 뿐이라고 작가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허구의 건물들에 ‘유토피아’라는 제목을 붙였다. ‘유토피아’가 낙원을 의미한다면, 남한과 북한의 건물들이 만났다고 낙원은 아닐 테지만, 유토피아의 어원이 ‘없다’라는 의미의 ‘ou’와 장소를 의미하는 ‘topos’가 만나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 허구의 건물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그렇게 단순하지 만은 않은 것 같다.
Utopia 시리즈 중 Utopia-#032(2011)는 그가 사진이라는 매체에 가지고 있는 의구심,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 변화된 사진제작의 지형에 대한 의구심을 잘 보여준다. 백승우는 유토피아 시리즈의 사진 하나를 13개로 분할한 다음 13개 국가에 보내어 인화를 요청했다. 동일한 수치의 사진데이터를 보내고, 공통된 인화지를 지정해주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변경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예상했듯) 조금씩 다른 색감과 톤의 사진들이 돌아왔다. 이 작업은 종종 거대한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차이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디지털테크놀로지에 의해 빚어지는 그릇된 인식, 그리고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작업들은 완벽하게 동일할 수 있다는 오해와 환상에 관한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실제로 그에게 되돌아온 서로 다른 화질의 사진들처럼, 사진을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은 어디에서도 동일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라는 점을 13개의 조각난 작품은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완성된 결과물은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Re-Establishing Shot도 작가의 태도적인 면에서 유사하다. 사방으로 뻗어 있는 도로, 빼곡한 건물들은 어딘가 있음직한 도시의 사진이다. 하지만, 이 사진은 전 세계 수많은 도시들의 편린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도시의 모습인 것이다. 도시에 대한 많은 사진들 중에서 유독 이 시리즈에 눈이 가는 이유는 그가 도시의 구조적인 면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도 언급하듯이 도시라는 것은 역사적이거나 사회적 배경과는 상관없이 거의 모든 곳에서 유사하게 작동한다. 그래서 Re-Establishing Shot은 컴퓨터 합성으로 만들어진 없는 도시의 사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도시’라는 현대사회를 지탱하는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초상사진처럼 다가온다. 사진 속 도로와 빌딩들 하나하나에 대응하는 대상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수십 개의 조각난 편린들은 이미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세상을 구성하였고, 그것이 대상을 지칭하던 말든 이미 새로운 가상의 이미지 세상 안에서 새로운 의미구조를 만들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Blow up 이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으로 작업했고, Utopia가 우연히 발견한 사진이지만 적어도 출처가 상대적으로 분명한 사진들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 Memento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혹은 출처가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아카이브 바탕으로 작업을 전개한다. 물론 여기에서도 작가는 일관되게도 사진이라는 매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본질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과감하게 왜곡시키는 장치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되묻는다. 이 작업에서 백승우는 사진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떨어져, 마치 사진의 의미가 어떻게 만들어지며, 기억이라는 것과 기록이라는 것이 어떻게 사진에 작동하고, 어떻게 관객에게 이미지와 의미가 소비되는지를 살펴보려는 관찰자처럼 상황만을 만들어 놓고 슬쩍 사라진다.
2011년 작가는 미국의 한 벼룩시장에서 5만 여장의 슬라이드 필름 사진을 구입했다. 한 때는 누군가의 추억이고 기억이었을 이 사진들을 중 2700여장의 사진을 추려내었다. 그리고 8명의 지인들을 초대했고, 그들에게 각각 8장의 사진을 고르게 했다. 참가자들은 자신이 고른 사진들을 각자 정한 순서대로 배치하고, 나름대로 사진에 스토리를 담아 제목을 지었다. 2015년에는 2011년에 선택된 사진 60여장을 의사, 변호사, 미술평론가, 큐레이터, 배우, 공학자 등 각기 다른 직종의 8명에게 보내고, 다시 8점을 골라 첫 번째와 동일한 방식으로 선택한 사진에 따라 각자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도록 요청하여 선택된 사진과 내러티브가 전시되었다. ‘Memento’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작업은 일차적으로 ‘기억’에 닿아있다. 사진은 종종 기억의 보조 장치로 간주된다. 그러나 비록 사진이 찍혔던 순간은 생생하게 이미지로 포착할 수 있다하더라도, 당시의 감정이나 느낌 상황은 시간`이 지나면서 곧잘 왜곡된다. 특히 사진을 찍힌 대상이나 찍은 주체로부터 일탈된 사진에서 ‘기억’의 의미는 처음과 같지 않다. 게다가 그 사진이 전혀 무관한 제 3자에게 전해지는 경우, 새로운 이야기와 추측, 상상이 발동한다. 여기까지가 Memento의 객관적인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질문이 생긴다. 작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상황을 세팅하고 바라보는 관찰자인가. 실제로 작가는 5만장의 사진을 구매했고, 참가자를 선택했다. 나머지 결과물들은 모두 참가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선택과 스토리다. 당연히 참가자들이 만들어 낸 스토리는 사진이 원래 가지고 있던 의미나 맥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사진에 다른 내러티브를 담고 있고,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거짓인지도 불분명한 상황을 보는 관객의 심정이 편치 않다면, 이 모든 세팅의 주인공인 작가는 누구보다 가장 적극적인 창작자임은 분명한 것 같다. 모름지기 사진이라는 것은 사실의 기록이고, 찍힌 대상과 뗄 수 없는 내러티브의 맥락이 있으며, 견고한 인덱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믿음을 흔들었다면, 이 작업이야말로 백승우가 그 언제보다 적극적인 작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백승우의 작업은 자신이 찍은 사진을 가지고, 혹은 기존의 아카이브를 통해서, 포토숍과 디지털 조작을 하던 간에 제3자의 개입을 통해서 각각의 시리즈의 결과물의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사진이라는 매체의 본질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사진이 더 이상 사실의 기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에, 아니 사진이미지의 사실성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시대에 애써 이런 수고스러운 작업을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작업이 아니어도 사람들은 사진 이미지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사진이미지는 언제나 조작할 수 있는 가능성에 열러 있음을 알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역할이 새로운 관점을 열어 주는 역할, 이미 알고 있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것을 의식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의 수고스러운 작업들을 좀 더 주목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Blank Medium 은 그동안 진행해온 작업의 연장에서 사진, 나아가 이미지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 그의 질문들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전시제목인‘공백매체’란 기준이 되는 데이터만 이미 기입되어 있고, 나머지 공간은 비워둔 데이터 매체를 말한다. 64기가 메모리 카드의 경우 4기가 정도는 프로그램 등을 구동할 수 있게 하는 변형불가능한 절대적 데이터가 들어있고, 실제 사용하는 용량은 60기가 정도이다. 이때 이 60기가 비어 있는 공간을 지칭하여 공백매체라고 한다. 작가도 언급했듯이 ‘사진’을 하나의 매체로 이해한다면, 사진으로 작업하는 행위는 아마 이 비어있는 공간, 아직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는 공간을 메워가는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매체의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지속적인 의심을 근간으로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진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변화된 사진 지형에 대한 실험은 공백을 메꿔가며 그만의 매체를 만드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Betweenless, Framing from within, Wholeness 그리고 Colorless 이렇게 네 개의 작품은 공백매체로서의 사진에 관해 사실에의 기록, 아카이브, 그리고 픽쳐라는 개념들을 근간으로 한 작가의 생각들이 압축적으로 그려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BetweenlessFraming from within은 거의 유사한 과정으로 진행되지만, 상반된 결과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먼저 Betweenless의 경우, (Blow up 시리즈에서처럼) 작가가 수집한 35mm 슬라이드 필름에서 인물만을 ‘확대’한 작업이다. 물론 확대된 인물들은 사진의 주인공이 아니라 작가가 설정한 어떤 규칙에 의해 선택된 인물이다. 인물이 원래의 사진에서 잘려나가는 순간, 사진 속에서 인물이 가지고 있던 맥락들은 삭제되며, 확대되는 과정에서 거칠고 흐릿한 윤곽선이나 색상만 남는다. 사진 속 인물이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는 정보나 그 어떤 인덱스도 없지만, 흥미롭게도 관람객은 마치 몽타주를 통해 범인을 유추하는 것처럼, 관람객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교육과 경험을 바탕으로 인물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만일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특징이 기록과 증명이라면, 이 시리즈는 실패한 사진이 되고, 그로인해 사진의 지위마저도 훼손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작가의 개입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의 아카이브가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말대로 기존의 아카이브를 훼손시킴으로써 자신만의 ‘픽쳐1(Picture)’아카이브를 새로이 구축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Framing from within은 (역시 Blow up 시리즈에서처럼) 사진을 보는 다른 방식에서 출발한다. 일반적으로 관객이 사진을 볼 때는 사진 속 주인공과 그리고 배경, 혹은 전체 구도 등을 살펴보게 된다. 하지만, 백승우는 자신이 찍은 사진 속에 의도치 않게 우연히 들어가 있는 인물들을 주목했다. 물론, 그렇게 주목된 인물들은 누군지 알 수 없고, 특정부분만 다시 ‘프레이밍’됨으로써, 원래 사진이 가지고 있던 맥락도 사라진다. 그렇게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들어간 인물을 중심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36개의 사진은 자체의 사진아카이브를 만들었다.
동일한 이미지가 서로 다른 사이즈로 반복되어 설치된 Wholeness에서도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한 ‘픽쳐가 된 사진’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아카이브 역시 기록이나 기억에 관련된 것이라면, 작품 속 이미지는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카이브의 기능을 상실했다. 실제로 작가는 미국의 한 퍼블릭 아카이브에서 이 사진을 가져왔다고 하지만, 일단 아카이브에서 이탈되어 작가의 작품화 되어버리면서, 사진은 아카이브 안에서 가지고 있었던 맥락은 사라지고 그저 이미지로 존재한다. 더 이상 (우리가 기대하는) 사진의 역할도, 아카이브의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처럼 이미지 그 자체가 되는 지점에서 사진은 ‘픽쳐’가 된다.
마지막 작업인 Colorless는 세 면이 순자척으로 회전하는 광고판 형식의 설치작품으로 각 면에는 그레이스케일차트, 반사율 18%의 중간회색, 끝으로 ‘Everything is purged (모든 것은 제거되었다)’라는 텍스트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명도에 따라 화이트에서 블랙까지 밝기의 차이를 단계별로 나눈 그레이스케일 차트와 피사체가 평균적으로 광선을 18% 반사한다는 가정에서 노출값을 구하기 위해 사용되는 중간회색은 사진이라는 것이 시각적 평균에 기반하고 있는 매체이며, 표준화가 가능한 매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마지막 ‘Everything is purged’라는 텍스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사진에서 기존의 기능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사진은 ‘픽쳐’로서 재조정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생각을 넌지시 이야기한다.
그의 사진이 ‘사진이 아닌 픽쳐’로 인식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영민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백승우 사진의 피사체들은 표면상에 묘사데 실제 피사체들이라기보다는, 이미 ‘픽쳐(picture)’가 되어버린 것들로 우리가 즉각적으로 인지하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그의 사진적 이미지들은 단순히 원래 ‘있어왔던 것’을 포착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인덱스적인 사진의 본질을 충족시키는 대신에, 이미 익숙한 픽쳐로 인식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문영민, Out of pictures, Out of Archives)
픽쳐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두 가지 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백승우의 사진은 기존의 사진이미지들과 다르다. 둘 째, (때문에) 백승우의 사진을 읽기(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과 다른 인식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사진이미지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인덱스와의 연계에 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기에, 인식의 방식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고자 한다. 문영민의 말을 다시 정리하자면, 픽쳐화 된 사진이란 기존의 사진과 인식의 방식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Framing from within 을 예로 들어보자. 백승우는 이 작업에서 의례 사진에 따라붙게 되는 많은 장치들을 의도적으로 파기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야 볼 수 있을 만큼 작은 사진들을 멀찌감치 높이 설치했다. 기존의 사진감상법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계속해서 사진의 출처를 사진 속 이미지를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의미를 읽으려고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언뜻 개미처럼 작게 찍힌 인물들 사이의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 것도 같고, 시리즈 속 사진들을 관통하는 이미지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관객의 추측일 뿐. 확인할 길이 없다. 게다가 의도적으로 작품과 관객과의 거리가 가능하지 않도록 이미 계산된 설치방식으로 인하여, 관객은 픽셀처럼 보이는 작은 36개의 프레임 된 사진 이미지들의 표피에서 계속해서 미끄러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관객은 사진 속에서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물론 이는 Framing from within 뿐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던 전작들 전반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심지어 비교적 명확한 이미지와 대형사진이라 할 수 있는 Betweenless, UtopiaRe-Establishing Shot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관객은 사진을 보지만, 사진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사진은 재구성된 이미지로만 의미가 있을 뿐, 사진에 맥락을 씌우거나 찾아내야 할 정보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때문에 관람자는 오히려 좀 더 자유롭게 사진의 표면에서 색감과 구도를 감상할 수 있다. ‘픽쳐화 된 사진’의 자율성, 독자성은 여기에서 생겨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의도를, 작품이 전하는 의미를 파악하고 싶다면, 역설적이게도 관객은 작품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한다. 그 의미는 개개의 사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작품을 제작한 방식, 태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 중에는 완벽하게 만들어진 이미지 보다는 오히려 불완전해 보이고, 독해가 불가능한 이미지들이 많다. 사진이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그 어떤 아카데믹한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그의 사진은 어렵다는 관객의 불만을 감수해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백승우의 사진이 어렵다는 불만은 기존의 사진감상법으로는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 Blow up 에서부터 Colorless 이르기 까지 그는 교묘하게 사진과 사진을 둘러싼 장치들 사이를 오가며 작업한다.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분명 사진 그 자체이지만, 사진을 둘러싼 장치들을 보지 못하면, 작품을 즐기기 어렵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백승우는 그 어느 작가보다도 분명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한 번도 흔들림이 없었다. ‘물속에서 물총 쏘기’의 헛헛함에 대한 삐딱한 시선. 그 많은 작업들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찍을 수 있는 ‘사진 찍기’라는 것이 동시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도 아티스트라는 직업인에게. 그가 내린 결론은 결국, 사진으로 사진을 의심하는 방법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다시 사진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백승우에게 사진은 ‘찍는 것’에 보다는 ‘그리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그것은 그의 사진이 ‘픽쳐화 된’것이기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여기에서 아카이브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것은 기존에 언급되었던 것처럼, 그가 아카이브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Blow up, Utopia는 물론 MementoWholeness에 이르기까지 그는 무수히 많은 사진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작업을 해 왔기 때문에, 아카이브는 그의 작업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로 보일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 살펴본 작업들 중에 ‘아카이브’ 자체가 주제였던 적은 없다. 때문에, 그의 작업을 논하면서 아카이브에 방점을 찍는 것은 전체 시리즈의 그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흐리게 할 여지가 있다. 오히려 백승우에게 아카이브는 화가에게 물감과 같은 것이다. 아카이브에서 가져온 그 무수한 사진들은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물감을 고르듯, 개별사진으로 작가에 의해 선택되었을 뿐이다. 아카이브 자체가 주제라고 하기 어렵다. 때문에 (다소 반복되는 느낌을 받더라도) 그가 선택한 사진의 일부를 잘라내고, 확대하고, 리사이즈하는 과정들에 주목하고, 그렇게 ‘그려진’ 그의 사진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아카이브는 그가 ‘픽쳐화 된’ 사진을 그리기에 아주 중요한 재료이자, 그의 사진을 다양한 층위에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토대로서만 이해하는 편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에게 사진은 분명 ‘공백매체’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진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본질적인 부분에 맞춰 잘 찍은 사진이 아니라,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 부분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을 바탕으로 한 또 다른 사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흡사 공백매체의 공백을 다양한 방식으로 채워가는 과정과 닮아 있다. 그렇게 그려진 그의 사진은 그가 말했듯이 이제 사진을 찍는 것이 ‘투명한 물속에서 검은 먹물을 쏘는 것’같은 행위가 되어 관객에게 사진 보기의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고, 또 다른 인식의 유희가 가능한 토대를 제안하는 것이 될 것이다.

 


1. 문영민은  Out of Pictures, Out of the Archives 라는 글에서 백승우의 작업을  ‘픽쳐(picture)’와 ‘아카이브(archive)’라는 두 개의 용어를 바탕으로 설명하면서, ‘픽쳐’를 그림이나 사진이라는 용어로 번역하지 않고 영어식 표기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그려진(painted)’이라는 라틴어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픽투라(pictura)라는 어원을 바탕으로 한 픽쳐라는 용어가 단순히 그림이나 사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들거나 기계로 제작된 다양한 이미지들을 지칭할 뿐 아니라 은유적으로는 어떤 상황을 이해한다는 의미에서도 쓰이며, 설명하거나 묘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필자 역시 그의 입장에 동의할 뿐 아니라, 작가 자신도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데 있어 픽쳐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본 글에서도 영어식 표기법에 따라 픽쳐라 표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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