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민자

구민자
구민자(1977~   )는 노동, 시간, 사랑 등 모든 인간의 공통되고 근원적인 경험과 관련된 관념들에 대해 생각하는 퍼포먼스와 영상 작품에 전념해왔다. 플라톤의 <향연>에서처럼 젊은이들이 밤새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한국인의 시간 사용에 대한 통계에 따른 ‘평균적 삶’을 퍼포먼스로 수행해내고, 조리예에 나온 결코 포장 속 재료로 만들 수 없는 요리를 정성껏 완성해내면서 우리가 사회 속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인 관념들을 불편하고 낯설게 바라보게 한다. 여러 도시의 레지던시, 특히 서머타임제를 실시하고 시차가 존재하는 도시를 경험해왔던 작가는 시간이라는 자연스럽고 천부적인 요소에 개입된 문명의 작위성에 관심을 두었다. 하절기의 긴 낮을 저축해서 쓴다는 ‘서머타임’처럼,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가 0도의 기준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경도 180도에는 한 장소의 동쪽과 서쪽이 각각 다른 날이 되는 ‘날짜변경선’이 만들어진다. 구민자는 피지 타베우니 섬의 날짜 변경선을 오가는 퍼포먼스를 통해 “하루를 두 번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불가역적인 시간의 흐름과 삶의 의미를 묻는다. 작가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믿는 많은 것들이 사실 만들어진 것일 수 있고, 다른 문화권에서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살 수 있다는 인식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의문을 탐구한다.

Interview

CV

http://www.guminja.com

<개인전>
2018
Inside The Belly Of Monstro : 경복(鯨腹) – CItadellaan 7, 겐트, 벨기에
2016
Leaking Pipe, 라운드어바웃, 서울
2013
성격 개조와 자기 표현, 구민자 아트페어, 킴킴 갤러리, 서울
2011
대서양 태평양 상사, Moore Street Market, 뉴욕
2009
Identical Times, 스페이스 크로프트, 서울

<주요단체전>
2017
DO IT, Seoul – 일민 미술관, 서울
2017
The Great Machine IV – J. Trepat Museum, 타레가
2017
OK VIDEO Festival – 자카르타
2016
C as in Curry S as in Seen, Marion de Cannier Art Space, 앤트워프
2016
Who’s Who, 웨일리 아트, 타이페이 / 시청각, 서울
2016
Belgium Performance Festival 3, 브뤼셀
2016
Impact Festival: Authenticity, 유트레흐트
2016
시의 부적절한 만남, 대안공간 루프, 서울
2016
동백꽃 밀푀유, 아르코 미술관, 서울
2015
혼자 사는 법, 커먼센터, 서울
2015
View From Above, BIN, 뚜른훗
2015
And No Matter What The Phone Rings, the 6th Moscow Biennial Special Exhibition, CCI Fabrica, 모스크바
2014
생생화화, 경기도미술관, 안산
2014
응답하라 작가들, 스페이스 오뉴월, 서울
2014
아페로, 누하동 153, 서울
2014
안양 공공예술 프로젝트 2014, 안양
2014
Home/Work, 시청각, 서울
2014
Once Is Not Enough, 시청각, 서울
2014
The Part In The Story, Witte de With, 로테르담
2013
젊은 모색,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3
쭈뼛쭈뼛한 대화, 아트선재센터, 서울
2013
2의 공화국, 아르코 미술관, 서울
2013
Love Impossible, 서울 대학교 미술관, 서울
2012
Trading Futures, Taipei Contemporary Art Center, 타이페이
2012
세탁기 장식장, 서대문구 재활용센터, 서울
2012
Doing, 금호미술관, 서울
2012
그 거리의 창의적인 자세, 금천예술공장, 서울
2011
제 10회 송은미술대상전, 송은 아트 스페이스, 서울
2011
About Books: 셀 수 없는 모음, 상상마당, 서울
2011
안녕없는 생활들, 모험들, 부산 시립미술관, 부산
2010
제 3회 안양 공공예술 프로젝트(APAP 2010), 안양
2010
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 공간 해밀톤, 서울 / La General, 파리
2010
제10회 서울 뉴 미디어아트 페스티벌(NEMAF), 서교예술실험센터, 서울

<수상 >
2010
송은 미술대상 우수상 수상

<레지던시>
2016
가스웍스 레지던시 프로그램, 런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
2015–2016
HISK 프로그램, 겐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
2011
International Studio & Curatorial Program, 뉴욕
2010–2011
경기창작센터, 안산
2008
Hangar Residency and Fellowship, 바르셀로나(쌈지 스페이스, 앙가르 지원)
2007-2008
쌈지스페이스 스튜디오

Critic 1

세상을 열린 눈으로

박수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올해의 작가상 2018> 후보로 구민자 작가(1977-)를 추천한다. 구민자 작가의 삶과 작업은 동일선상에 위치한다. 특정한 브랜드의 완성된 작품을 제시하기 보다는 세상의 틀 안에 존재하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던 1cm의 지점을 포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틈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세상을 열린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작가이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져 온 집단 구성원들이 공유하는(혹은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떠한 틀, 그러니까 우리가 사회를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 합의된 시스템, 관념 등이 개인 삶의 틀로서도 작용을 하고 그것이 일상적 생각과 행동에 어떤 방식으로든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좀 두려워질 때가 있는 데 아마도 그것이 작업의 시작이 되는 것 같다” 1 그는 노동의 가치, 사회 제도의 기능과 역할, 평균화된 인식 등 거대한 담론을 지극히 일상적으로 접근하며 기존의 관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겨우살이>(2011)는 작가가 경기도 안산 선감도에서 주민들의 일손을 돕고 품앗이로 김장과 쌀을 얻는 과정을 TV로 상영하며 관객들과 김장 김치와 밥을 나누었던 작업이다. 노동의 과정을 작업으로 대체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직업의 세계>(2008)에서는 대만에서 직업을 구하기 힘들었다는 이주민의 얘기를 듣고 직접 길거리에서 구인광고를 내고 직업소개소를 찾아가며 직업을 구하고 노동하는 과정을 기록한 사진 작업으로 작가가 외국인 노동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42.195>(2006)에서는 작가가 실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몇 시간 안에 그 거리를 완주하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식사하고 다시 걸으면서 이틀에 걸쳐 혼자만의 주행을 완성한다. 속도전이라는 경쟁의 개념을 무력화하게 하는 작가의 저항을 보여주고 있다. <정통의 맛>(2014)에서는 상품 표지에 있는 음식의 이미지를 작가가 직접 재현하여 그 음식을 관객에게 제공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이것을 위해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따는 등 이 프로젝트를 실현하는데 2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상품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해 같은 그릇을 주문하고 자로 잰 듯한 동일한 색과 형태를 추구함으로써 디자인된, 의도된 이미지를 다시 실제화하는 과정을 통해 실제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고 있다. <23:59:60>(2016)는 3년에 한 번씩 발생한다는 윤초의 시간에 세계의 다양한 표정을 담아낸 프로젝트이다. 2015년 6월 30일 23시 59분 59초와 7월 1일 00시 00분 00초 사이에 윤초 1초가 더해졌다. 작가는 세계 각지에 위치해 있는 사람들을 수소문하여 작가의 일정 요구사항에 따라 찍혀진 사진들을 모아 작업으로 제시하고 있다. 가상의 상황을 설정한 <예술가-공무원 임용을 위한 공청회>(2013)에서는 예술가를 공무원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격조건, 업무 범위, 조직의 위치, 급여수준 등을 논의하기 위해 공무원, 예술가, 교수, 잡지사 기자, 큐레이터, 문화평론가 등이 모여 두 차례에 걸쳐 공청회를 열었다. 예술의 기능과 역할, 국가 조직, 젊은이의 취업과 연봉 등 사회 구조를 생각하게 하는 프로젝트이다.

이렇듯 작가는 일상적인 공간에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날카롭게 각을 세우기 보다는 그 의도와 과정에 중점을 둔 작업들을 덤덤하게 수행하며 사진, 영상, 출판 등의 방식으로 퍼포먼스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단지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스스로 실행하고 체험하며 관객과 나누는 과정을 통해 공유한다. 그는 예술이 사회에 기여하는 기능,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하는 힘을 작업과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 그의 사고는 인간을 중심에 둔 인문학을 바탕에 두고 있다. ‘평균’이라는 인식에 사람을 재단하기 보다는 그 인식과 가치를 재사고하게 하는 것이 구민자 작업의 특징이다. 사회가 다원화되고 SNS가 소통의 수단이 되고 있는 오늘날 단지 새롭다거나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미술에서 하나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요즘 작가들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경험하며 그 과정 속에서 작업을 완성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하나의 권위적인 진실,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예기치 못한 우연이 발생하며 상황에 따른 가변적인 의미가 생성된다. 작가는 이를 좋고 나쁨의 잣대로 판단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작품을 복합적이면서도 다층적인 구도로 엮어나간다.2 구민자 작가는 이러한 담론을 창출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작가로써 동시대 미술계에 실질적인 미술 후원제도인 올해의 작가상 의미에 부합되는 작가로 추천하고자 한다.

 


1. 구민자, 『젊은모색 2013』, 2013, p.18
2. 박수진, 「《젊은 모색 2013》전을 개최하며」, 『젊은모색 2013』, 2013, p.8

Critic 2

구민자의 작업에 관해

마틴 게르만 (헨트시립현대미술관 시니어 큐레이터)

 

구민자를 처음 만난 것은 2015년 봄이었다. 내가 일하는 헨트시립현대미술관(S.M.A.K)이 있는 헨트에서 초빙 강사 자격으로 고등미술원(Higher Institute of Fine Arts, HISK)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한 것이다. 이런 방문은 국제 미술계가 작동하게 하는 체제의 한 부분이다. 기관에 속한 전문가로서, 대체로 젊은 작가가 본인 작업을 소개하고 이를 판단하기를 기대하는 자리에 놓이는 것이다. 이상적인 상황에선 작가의 작업을 긍정적으로 판단한다. 그것을 기억하고 더 나아가 추천하기 위함인데, 작가를 위한 것이며, 여기에 대가를 지불하는 미술 기관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첫 방문에서 구민자 작가가 알려준 여러 프로젝트가 떠오른다. 컴퓨터 화면상으로 보여주었는데, 작가가 보여줄 수 있는 “재료”라는 측면에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중 일부는 작업으로 실현되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작가의 머릿속에 떠다니는 스케치에 가까운 것으로, 언젠가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작업들이었다. 작업실에는 벨기에 현지의 소비재들이 있었다. 파스타 면, 대부분 벨기에 슈퍼마켓 브랜드에서 구매한 식료품, 맥주 캔 몇 개—하지만 어떤 것도 전통적인, 재료 중심적 관점에서 볼 때 곧장 “미술”이라고 여길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 때 있었던 다른 일은 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구민자는 시에 이미 헨트에 4~5달을 머물렀다고 했다. 물론, 나는 그때까지 지던시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고, 가까운 미래에는 어떤 식으로 간을 보낼지 물었다. 작가는 향후 진행할 프로젝트가 정확히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른다고 했다. 이렇게 아주 솔직한 대답에 상당히 깊은 인상을 았음을 기억한다. 질문에 대답을 더 확장하기 위해, 구민자는 (모든 도시가 그러하듯) 도시를 작동하게 하는 기반시설에 대한 관심과 지역 인구 기록에서부터 현지 슈퍼마켓의 제품 구성에 이르는 온갖 통계와 정보에 대한 막연한 관심을 표했다. 어떤 면에서 작가는 우리의 삶이 순조롭고 안정적이며 되도록 장애물이 없도록 보장하는 모든 특정한 것과 보편적인 것에 대하여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공통의 의식에 대한 관심과 거의 마찬가지로 흥미가 있다고 밝힌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프로젝트와 관련해서는 평소처럼 견고하게 초점을 잡지는 않은 듯 했다. 스스로의 주저함을 이렇게 추상적인 방식으로 숨기는 가운데, 작가는 이미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렇게 진행한 작가와의 대면에서 놀랍다고 생각한 점은 구민자 작가가 앞으로 도래할 ‘적절한 것’을 어떤 식으로 찾는다고 주장한 바와는 큰 상관이 없다. 끊임없이 재창조하기 위한 힘이야 말로 예술가가 삶에서 마주하는 여러 도전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그보다 작가가 제 작업을 진행하는 속도를 대하는 안정감이 나의 호기심을 돋우었다.
처음에는 시간을 제대로 쓰지 않는 것 같았고, 혹은 ‘작업’에 관한 표준적 규준을 벗어난 것 같았는데, 작가 스스로 (예술) 생산에 관해 기존과 다른 태도를 가지면서도 이런 점을 온전히 의식하고 있는 듯 보였고, ‘생산’에 대해서도 그렇게 여기는 듯 했다. 구민자에게는 주체적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지, 그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확고한 주장이 있는 것 같았다. 최근 몇 년간 진행한 프로젝트 일부를 살펴보면, 구민자의 작업에 이런 태도가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결코 하나의 작업, 사물, 인공물에 관해서만 작업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민자의 작업 영역은 오히려 어떤 의미나 상황이 놓인 더 넓은 맥락을 추적하는데 있고, 작가는 몇 가지 제스처를 통해 이런 맥락을 “미술” 과 함께, 혹은 미술 안에서 구성하거나 채워낸다. 이런 상황이 활성화되는 순간에 물질적 결과물 혹은 제스처로써의 결과물이 자체적으로 생성된다. 여기서 작가가 2006년에 이틀간 뛰지 않고 걸어서 완수한 마라톤을 언급할 수 있겠고, 무미건조하면서도 불편하게 익살맞은 〈직업의 세계〉라는 제목 아래 대만의 원주민 여성이 남긴 40년도 더 된 일기를 따라 타이베이에서 구직 행위를 했던 2008년의 작업을 언급할 수도 있겠다. 구민자는 이 작업을 진행하면서 예술과 실제 삶의 경계가 증발하도록 실제로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이 해야 하는 모든 과업을 수행했다. 2015년에 작업실에서 만났을 때 명확하게 진행 중이었던 작업 가운데 하나는 2018년 초 헨트에서 전시되었다. 보통은 사적인 환경이라 할 작가의 아파트에서, 내용을 말해주는 “Inside the Belly of Monstro:경복(鯨腹)” 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것이다.

전시를 소개하는 글에는 구민자가 언제 벨기에에 도착했고 떠났는지를 알리는 정보만 있었고, 2014년부터 2016년 사이 작가가 어디를 통해 벨기에를 드나들었는지 언급하는 정확한 위치 정보가 담겼다. 이 전시는 기본적으로—사실은 거의 대부분—구민자가 HISK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으로부터 레지던시를 마칠 때까지 어떤 식으로든 소비하고, 사용하고, 접촉한 사물의 잔여물로 이뤄졌다. 출판물을 포함한 이 전시의 작업은 작가의 아파트가 방대하면서도 우아하게 분류된 온갖 종류의 잔해를 통해 천천히 채워지는 여러 단계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작가가 보낸 2년의 시간을 그린 진실된 초상에 다름 아니었다. 온갖 자연적이고 인공적인 사물과 물건, 쓰레기를 동일한 고고학적 태도로 분류하고 표시함으로써—문화적인 규정을 뒤로하고, 이것들을 “재료” 라고 불러보자.—사물 간에 거의 구별이 이뤄지지 않았다. 모든 사물은 그것이 ‘보관’된다는 점에서 비슷한 것으로 다뤄졌다. 빈 달걀 껍질, 포도알이 없는 작은 포도 송이, 감자 튀김을 먹기 위한 작은 막대, 담배 끄트머리, 털어놓은 과일, 플라스틱 병. 말 그대로 일상 생활에 사용하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 전시장은 시간의 흐름을 부정하는 공간으로써 존재했다. 전시 도록에 실린 일부 이미지에서, 작가가 실현하고자 했던 방식으로 사물의 구성과 조합이 이뤄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사물을 가지고 ‘object poetry’를 쓴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분류라는 개념이 작업의 핵심은 아니었다. 이러한 시도들, 결정적 “형식” 과 의미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근원적 바람은 미술에 대한 일반적 기대를 간접적으로 지시했고, 이를 통해 시적 무의미(poetic pointlessness)를 발산할 수 있다. 구민자의 프로젝트를 기존의 미술가 계보에 놓아 보자면, 예컨대 절대 비껴갈 수 없는 마르셀 브로타에스(Marcel Broodthaers)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Inside the Belly of Monstro: 경복(鯨腹)”은 삶에서 다양한 교환의 경제가 벌어지는 껍질을 거대한 규모로 축적한 것으로, 두 개의 껍질 안에 들어가 있다. 하나는 “생활 공간”으로써의 사적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기간” 이라는 의미에서 2년 동안의 시간을 표현한 것이다.

묘사법에 관해 생각해보면, 적어도 학문적 관점에서 구민자의 작업이 어디에 기반하고 있는지 살피고자 특정한 매체를 생각해보는 것도 앞뒤가 맞는다. 바로 구민자가 미술 학교에서 전공한 분과인 회화이다. 하지만 2차원 평면이 지닌 재현의 능력은 작가의 예술적 동기도, 작업에 대한 동기부여에도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회화에 대하여 작가가 생각하는 바, 즉 삶 속에 머무르면서도 동시대 생활의 시적 리얼리즘을 묘사한다는 점은 구민자가 작업을 시작하던 무렵부터 사회 공간에 관한 작업으로 방향을 이끌었다. “Inside the Belly of Monstro: 경복(鯨腹)”에서 작가가 묘사한 것은 앞서 본 것처럼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기간과 같이 단순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잔여물은 다음과 같은 질문도 제기했다. 당신을 붙잡고, 지시하고, 관리하고, 멈추어 두는 체제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당신을 가둔 우리의 철장 간격을 얼마나 넓게 두고 싶은가? 작업에 쓰인 사물들은 일상에서 쓰이는 기능과는 별개로 통제와 욕망, 안전과 자유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내밀한 일상의 세세한 뉘앙스로부터 국제적인 지정학에 이르기는 규모로 쉽게 크기를 바꿀 수 있다.

그러나 구민자의 작업이 작동하는 특정한 방식은 소비주의와 소유에 대한 단순한 비판의 경로를 벗어난다. 대신, 작가의 작업은 오늘날의 삶에서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작가가 예술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관점에서 기인한다. 사실, 이 점은 관점에 대한 그 어떤 생각에도 상반된다. 흔히 관점이란 언어를 통해, 즉 작가에게는 필수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도구를 통해 구체화된다. 그러나 구민자의 작업은 작가가 제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신화에 결부된 그 어떤 언어에도 국한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구민자의 작업은 그것의 반대 경우라 하겠다. 구민자가 구현한, 그 수가 작을 수 밖에 없는 프로젝트를 정제하기 위해서는 프로젝트 각각의 “언어”가 필요한데, 각각의 경우는 저만의 가능성과 원칙, 규준이 있는 특정한 환경과 주변에 긴밀히 이어져 있다. 예술적 어휘를 제공하도록 활성화되고 변형되어 있는 것이다.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구민자의 작업에 관해 글을 쓰는 자리에 두 번째로 초청받았다. 이 일은 다시 한 번 의례화된 방식으로 벌어지고 있지만, 이번에는 작가가 《올해의 작가상 2018》 후보가 된 상황에서 이뤄진다. 작가에게 영예로운 일이며 나에게도 좋은 소식인데, 내게는 작가에 대한 신뢰가 있고, 이런 상황에서 작가에 관해 의견을 내도록 선택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작가를 방문하지 않고 글을 쓴다. 구민자는 스스로 전시를 위한 프로젝트를 실현 중이다. 작가에게 연락해 작업 계획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려 애쓰고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구민자 작가는 2015년에 내게 이미 말해주었던 프로젝트를 실현하고 있다. 이번에도, 이 작업은 시간을 다루는 내용이며 따라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공간을 다루게 된다. 구민자가 준비하고 있는 퍼포먼스는 피지의 타베우니섬으로 작가를 이끌었다. 타베우니섬은 세계 속에서 궁극의 분리가 실제로 구현되는 곳이다. 날짜 변경선이 이곳을 통과해 지나는 것이다. 종이 한 장만큼 얇은 물리적 거리 안에서, 24시간이라는 단위에서 볼 수 있듯 세계를 작동하게 하는 통화로써 발명된 시간의 거리가 거의 무한대에 이른다. 수 많은 종류의 꿈이 그곳에서 완결되기에, (날짜 변경선이라는) 이처럼 역설적인 지점은 전 세계의 관광객을 불러모았다. 뿐만 아니라, 구민자 작가에게도 이처럼 기묘하면서도 문화적으로 규정된 현상을 퍼포먼스에 활용하겠다는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이 퍼포먼스는 기본적으로 같은 날을 두 번 살아보는 내용이다. 장소가—위키피디아에서조차 날짜 변경선을 “상상의” 구분선이라고 설명한다.—지닌 상상의 잠재성을 활용해 불가능한 어떤 것을 추구하는 퍼포먼스이다.

기본적으로, 이 작업은 하루를 두 번 살고자 시도하는 퍼포먼스의 실행과 이후 여기에 쓰인 도구에서 영상에 이르는 다양한 부분을 미술관에서 보여주는 것으로 구성된다. 작가에게는 거울 이미지에서 역할을 수행할 두 번째 인물, 촬영 카메라, 지시문, 하루를 구성하는 원칙, 촬영 장소에서 빌린 동일한 일상적 사물 한 쌍, 텐트 한 쌍, 음식, 그리고 이 작업을 준비할 수 있는 가능성—말하자면 한 쌍의 세계가 필요했다. 하지만, 수학에서 점근선(漸近線)은 절대 그것이 다가가는 다른 선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루를 두 번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로 남는다. 이 퍼포먼스—혹은 퍼포먼스라기 보다 기록은 미술관 안에서 사뿐하게 보여진다. 미술관 안에 있는 건축적 특징을 재료 삼아 설치로 구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시장 바닥의 환기구는 각기 다른 사물을 둘로 나누거나 거울 이미지로 보여주기 위한 구분선으로 쓰였다. 미술관의 여러 벽면에는 조각난 사진을 붙였고, 날짜 변경선 북쪽에서 본 시점을 정확히 보여주는 한편 퍼포머들이 입은 티셔츠가 놓인 진열 케이스를 배치해 온 카와라(On Kawara)가 수행했던 역사적인 작업을 건조하면서도 유쾌하게 인용한다. 이와 함께 퍼포머를 위한 정확한 지시문, 날짜 변경선 양쪽에서 찍은 여러 사진뿐 아니라 서로 날짜가 다른 공간에서 상대방을 마주하며—실제 진행 시간만큼 포착해 실제 시간에 맞춰 상영하기에—불가피하게 아주 긴 48시간 길이의 기록 영상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 사물을 함께 전시한다. 다시 한 번, 여기 놓은 사물은 그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즉, 작가가 날짜 변경선 너머의 날짜에서 발견한 것에서 틀을 딴 것으로, 사물도 그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바시프 코툰(Vasif Kortun)은 ‘연약한’, ‘내밀한’, ‘우아함’, ‘재치’, ‘시’와 같은 특성이 구민자의 작업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핵심적 특성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구민자가 이미 존재하는 제품, 통계, 기준으로 작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미 존재하는 식견에 내 의견을 보태고 있다. 그나저나, 언젠가 더글러스 휴블러(Douglas Huebler)는 널리 알려진 이 문장을 쓰지 않았던가. “세상은 사물로 가득 차 있고, 대체로 흥미로운 것들이다. 거기에 어떤 것도 더하고 싶지 않다. 그저 시간과 장소, 시간이나 장소라는 점에서 사물의 존재를 기술하는 쪽이 더 좋다.” 구민자는 1970년대에 쓰인 더글러스 휴블러의 현명한 문장을 차용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과 사회적 관계를 통해 이뤄지는 수행적인 추적에 대한 진정한 출발점으로 삼은 듯 하다. 구민자는 일상의 맹점을 통해 꾸준히 일상을 대면하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유동적임을 상기시킨다.

구민자의 작업이 정말로 고유성을 띄고 문화를 가로지르게 하는 특징은 바로 끝없는 사물의 행렬을 향한 세속적이면서도 카프카적인 조합, 그리고 여기에 맞서 하나의 순간이 지닌 헤아릴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가치라 하겠다. 구민자의 작업은 바로 서구적 사고와 동양적 사고의 결합, 순수한 목적론과 완전한 존재감의 연속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 구민자와 관련해 테칭 시에(Tehching Hsieh)를 생각하거나 앞서 언급한 온 카와라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이들도 ‘시간’을 작업의 재료로 사용했는데, 1960년대와 70년대의 개념주의적 미술사라는 허술한 지반에 바탕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변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분리와 양극화, 감축이라는 문제에 영향을 받는 세계에서, 예술은 자신의 기능과 자리를 절박하게 찾으려 애쓰는 중이다. 적어도 서구의 모더니즘적 개념에서 “타자” 라는 개념의 자리를 채우고 있던 상징적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구민자는 분명 이러한 창작법을 적용하고 있지만, 이제는 완전히 변해버린, 가속화되고 세계화된 세계 안에서 작업을 수행한다. 이런 점에서, 구민자가 보이는 느린 속도는 핵심적인 전략이다. 파도를 타는 것이 아니라, 파도에 저항하는 것. 오래된 것, 심지어 영원한 것을 주제로 느리게 작업하는 전술의 조합은 구민자의 작업을 감동적인 것으로 만들며 작가의 방식에 고유성을 안겨준다.

짧은 이 글은 구민자의 작업에서 “보편적 공감”(universal empathy)을 주제로 쓰고자 했다. 사실 나는 작가의 작업을 이끄는 원동력이 ‘공감’인지는 알지 못한다. 작가의 이러한 실천 뒤에는 확고하고 변치 않는 일종의 무심함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민자의 작업을 처음 본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공감에 전적으로 상반된다. 순수한 예술적 주체성을 고수함으로써 작가는 그 어떤 종류의 예술적 언어와 원형, 제스처, 표현에서 최대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같은 최대한의 억제는 우리가 살아가도록 이식된 권위적이고 지배적이며 기본적으로 부조리한 체제, 우리의 꿈과 욕망을 다루는 체제를 더 명확하고 밝게 보여준다. 구민자의 작업이 발화하고 있는 위치는 외부의 유토피아가 아니며, 우월한 관점에서 “더 나은” 것을 가리키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구민자의 작업은 인간적인 공존에서 가장 평범하고 흔한 내부로부터 발화한다. 구민자의 작업이 지닌 이런 기묘한 능력은 이제 공감과 비슷한 어떤 것, 즉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할 수 없이 외롭다는 것을 거의 감정적 차원에서 엿보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달팽이와 같은 전략으로, 혹은 저명한 독일인 미술가가 말했던 바와 같이 이뤄진다. “오늘날의 아방가르드는 사후적으로 이뤄진다.”

 

번역: 박재용

Critic 3

우리의 과거는 그의 미래며, 우리의 미래는 그의 과거다

문혜진 (미술비평가)

 

I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어제가 되는 곳. 〈전날의 섬, 내일의 섬〉 (2018)은 아주 오래 전에 읽은 한 SF 소설을 떠올리게 했다. 사고로 먼 미래로 보내진 한 우주비행사가 집으로(그리고 그가 속해있던 시대로) 돌아오려고 애쓰는 이 이야기에서, 우주비행사는 일 년에 단 한번 자신의 탄도와 지구의 공전 궤도가 교차하는 순간에 지구의 시간과 조우한다. 그 순간 그는 실제로 땅을 만질 수 있고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볼 수도 있지만, 그들은 각기 다른 시간대에 속해 있어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는 매년 우리의 현재에 나타나지만, 우리의 시간과 잠시 스쳐지나갈 뿐이다. 우리에게는 과거인 대폭발 이전이 그에게는 돌아가야 할 미래고, 다른 한편 우리의 미래가 그에게는 이미 거쳐 온 과거다. 뿐만 아니라 그가 출현하는 시간은 태양계 시간 속에서 계속 변화한다.1

허구의 세계에나 나올 법한 시간의 교차는 실재한다. 〈전날의 섬, 내일의 섬〉은 남태평양 피지에 위치한 타베우니 섬의 날짜 변경선을 주제로 한 4채널 영상이다. 이 가상의 선을 중심으로 서쪽은 동쪽보다 하루가 빠르다. 어제에서 한 걸음 걸으면 오늘이고, 오늘에서 한 걸음 걸으면 어제가 되는 장소가 바로 이 곳이다. 이 기묘한 시공간의 공존은 날짜 변경선을 가운데 두고 2명의 퍼포머가 각각 서쪽과 동쪽에서 24시간을 보내는 퍼포먼스로 형상화된다. 퍼포머들은 자정부터 자정까지 만 하루를 보낸 후 다음날 자리를 바꾸어 다시 만 하루를 보낸다. 다시 말해, 첫째 날의 경우 서쪽에 있는 퍼포머 A(구민자)는 2018년 6월 29일에, 동쪽에 있는 퍼포머 B(최수정)는 6월 28일에 존재하고, 둘째 날에 동쪽으로 이동한 퍼포머 A는 28일에서 하루가 지난 29일을 또 다시 보내며, 서쪽으로 이동한 퍼포머 B는 29일에서 하루가 지난 30일을 맞게 된다. (표 1 참조) 결과적으로 퍼포머 A에게는 동일한 날(29일)이 두 번 반복되고, 퍼포머 B에게는 29일이라는 하루가 실종된다. 이 같은 상황은 29 – 28일과 30 – 29일을 연속해서 촬영한 4채널 영상으로 기록된다. 반복되는 하루는 전날의 행동을 동일하게 반복하는 퍼포머 A의 행위로 표현되고, 사라진 하루는 소비되지 못하고 남겨진 하루 몫의 생필품으로 형상화된다.

 

II

어떤 사람은 특정 하루를 두 번 살 수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그 하루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2 철학적으로 흥미진진한 이 질문은 막상 영상 속 인물들에게는 여느 날이나 특별히 다르지 않은 평범한 하루로 체험된다. 그들은 별반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다. 하루 세끼 식사를 하고, 잠을 자며, 먹은 것을 정리하고, 남은 시간엔 책을 읽거나 주변을 돌아다닌다. 문자 그대로 ‘시간을 보내는 것’(작가)에 초점이 맞춰진 일상적 행동들이다. 가끔 날짜 변경선 표지판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이 배경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들은 퍼포머들의 시간 보내기에 관여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와 그로 인한 차이는 퍼포머의 행동을 조용히 제한한다. 일단 퍼포머들은 가상의 날짜 변경선을 넘어 반대편으로 갈 수 없다. 그들은 마치 서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분리되어 각자의 일상을 보낸다. 또한 반복되는 하루와 실종된 하루의 차이도 있다. 28일에서 30일로 건너뛴 퍼포머 B의 경우 하루의 실종이 가시적인 행동 변화로 나타나지 않지만, 29일을 두 번 사는 퍼포머 A는 전날의 행동을 반복한다.

작업을 살아가는 과정과 동일시하고 삶을 아카이브한다는 점에서 〈전날의 섬, 내일의 섬〉은 미술사의 두 선례를 떠올리게 한다. 1966년부터 거의 50년 간 매일의 날짜를 회화로 남기고, 그날 간 곳과 읽은 것, 만난 사람을 기록해 작가 자신의 일상적인 활동을 거대한 시간의 축적으로 환원시킨 온 카와라(On Kawara)와 1978년부터 1999년까지 6개의 생애작업을 통해 스스로의 삶에 제약과 조건을 부여하고 이를 이행함으로써 작업을 “몸소 살아내는 시간”3과 동일시한 테칭 시에(Tehching Hsieh)가 그들이다.4 직접적 연관성은 없지만 실제로 〈전날의 섬, 내일의 섬〉에는 이 두 작가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없지 않다. 작가 자신이 직접 퍼포머로 기록의 업무를 수행한다는 것 외에도, 퍼포머 및 관객에게 시간을 인지하게 만드는 방식에서 선배에 대한 유머 섞인 패러디를 슬쩍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 퍼포먼스 시작 시 각자 자신이 속한 날짜를 티셔츠에 그려 넣는 행위나 퍼포먼스 중간에 전달되는 신문은 자연스럽게 온 카와라의 〈오늘 연작(Today series)〉(1966 – 2013)을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같은 날을 반복하는 구민자가 첫째 날 읽고 먹고 잔 모든 행동을 기록하고 둘째날 이를 재생하려 애쓰는 행위는 유기적으로 흐르는 생물학적 시간을 시간기록계의 표준화된 규격에 맞추는 테칭 시에의 두 번째 1년 퍼포먼스 〈시간기록계 작업(Time Clock Piece)〉(1978 – 1979)과 맞물린다.

하지만 지향과 방법론에서 〈전날의 섬, 내일의 섬〉은 두 선학의 방식과는 결을 달리한다. 구민자의 퍼포먼스는 엄격하고 체계적인 기록 방식이 중요한 온 카와라에 비해 느슨하고 인간적이다. 지속과 집적이 중요한 〈오늘 연작〉과 달리 그녀의 작업은 단 이틀만 지속되는 단기적이고 일회적인 종류며, 드러내는 시간의 성격이 카와라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카와라의 시간은 한 개인이 겪은 경험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시각의 정확하고 순수한 분절”, “그 균질하고도 공허한” 순수 추상으로서의 시간이다.5 반면 구민자의 시간은 오히려 그 반대로 규정된 시간과 대비되는 각 퍼포머가 경험한 시간성이 중요하다. 또한 매 한 시간마다 시간을 기록하기 위해 수면을 비롯한 일체의 행동을 계량적 시간에 맞추는 테칭 시에의 고행과 달리, 구민자의 수행은 “자본주의적 시간 개념에 … 길들여지는 신체성”6보다 정확히 반복되지 않는 미끄러짐이 더 중요하다.

〈전날의 섬, 내일의 섬〉이 다루는 시간은 개인이 배제된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절대적 시간의 현시보다 규정된 시간과 경험적 시간의 차이다. 인위적으로 나눈 시간의 구획이 얼마나 자의적이며, 실제 몸이 경험하는 시간의 감각과 얼마나 다른지가 퍼포먼스의 핵심인 것이다. 어쩌다 영국 런던 그리니치 천문대의 정반대편에 위치한 바람에 선 하나를 경계로 같은 땅이 날짜가 바뀌는 타베우니 섬의 상황은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서로 안 보이는 셈 치는 퍼포머들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은유된다. 하지만 아무리 금 건너가 어제고 이쪽이 오늘이라고 한들, 유기체의 생체 시간이 무 자르듯 이전과 이후로 나뉠 리가 없지 않은가. 인위적 구획의 자의성은 퍼포머들이 속한 땅이 하나로 이어진 연속체임을 드러내는 몇몇 에피소드로 인해 강조된다. 서로를 무시한 채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 갑자기 선을 네트 삼아 배드민턴을 치는 두 퍼포머, 느닷없이 화면 안으로 들어와 경계선을 제 맘대로 넘나들며 먹을 것을 얻어먹는 개와 고양이는 제국 권력이 설정한 경도기준과 날짜 변경선이 얼마나 임의적이며 허망한 것인지를 슬며시 일깨운다. 제도와 규칙으로 생의 분방함을 잡아매려는 시도는 계속 엇나간다. 특히 어제를 반복해야 하는 작가의 퍼포먼스는 규칙 준수를 방해하는 대자연의 공습으로 끊임없이 방해받는다. 바람이 너무 불어 자야할 시간에 자지 못하고 대피해야 하거나 너무 피곤한 나머지 늦잠을 자버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7 계획에 차질을 야기하는 지속적인 누수는 생체 시간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합리적 시간의 실패다. 우리가 사회적 존재인 한 표준 증분으로 구획된 객관적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동시에 우리는 내 몸의 상태가 지배하는 주관적 시간의 영향 아래 있다. 〈전날의 섬, 내일의 섬〉에서도 퍼포머들은 외부에서 부과한 선형적 시간과 무관하지 않다. 매 3시간마다 동시에 시침의 해당 방향으로 정렬하는 퍼포머들의 간헐적인 제스처는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중에도 계량적 시간은 여전히 단절 없이 흘러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동일 인물이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는 노력도 생각만큼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고, 더욱이 서로 다른 인물인 퍼포머 A와 퍼포머 B의 주관적 시간의 차이는 훨씬 더 벌어진다. 비교적 움직임이 적은 퍼포머 A에 비해 퍼포머 B는 자주 사진을 찍고 훨씬 분주하게 주변을 돌아다닌다. 이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 20여년 알아오며 관계를 쌓은 오랜 친구지만,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의 차이는 서로 물든 시간 속에서도 동화되지 않은 개체의 완고한 생체 리듬을 드러낸다. 여기서 합목적적으로 계측되고 관리되는 외부의 시간과 개인의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내부의 시간은 지속적으로 교차하되 결코 합치되지 않는다.

 

III

표준화된 시간 계측의 불완전성, 시간에 대한 서로 다른 측정 방식, 계량화된 시간과 체험적 시간의 관계는 〈전날의 섬, 내일의 섬〉 이전에도 구민자의 꾸준한 관심사였다. 실제로 시간에 대한 작업은 그녀의 작업 중 상당수를 차지한다. 쌈지스페이스 옥상에서 열린 초기작 〈향연〉(2007)은 서른 살의 남녀 여섯 명이 달이 뜨는 시간부터 지는 시간인 오후 11시 5분부터 오전 11시 12분까지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퍼포먼스다. 이때 12시간이라는 물리적 시간은 밤새워 이야기하는 청춘남녀의 경험적 시간으로 치환된다. 하루의 반이라는 객관적인 시간의 분량은 잠이 부족한 누군가에게는 실제보다 더없이 길게 느껴지겠지만, 쌓인 속내를 공감 받는 누군가에게는 할 이야기도 다 못한 순식간일 수 있다.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길이는 감정 및 기억과 결부되어 저마다 달라진다. 스페인 레지던시 기간에 제작된 〈Identical Times〉(2008 – 09) 역시 동질적으로 나뉜 24개의 시간을 주관적으로 번역한 작업이다. 작가는 바르셀로나의 한 광장에 있는 시계탑을 기준으로 도시를 24개로 균등 분할해 특정 시간의 방위가 가리키는 장소를 탐색했다. 예를 들면, 3시에 3시 방향의 장소를 1시간동안 산책하며 거기서 발견한 사물을 관찰 및 묘사하는 것이다. 여기서 표준 증분의 기계적 시간은 작가의 몸에 새겨진 공간의 기억으로 환산된다. 비슷한 시기 제작한 〈24시간〉(2009)은 정해진 지시에 따라 시간을 보낸다는 점에서 〈전날의 섬, 내일의 섬〉의 퍼포머 A 파트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개인의 신체를 계량적 시간에 우겨넣을 때 발생하는 불협화음은 빡빡한 규정을 적용한 이 작업에서 훨씬 두드러진다. 퍼포머들은 24시간 동안 ‘한국인 평균 생활시간’에 자신을 맞춘다. 4시간 2분 동안 일을 하고, 5시간 5분 동안 여가 시간을 보내며, 21분 동안 청소를 한다. 남이 정한 기준에 자신을 끼워 넣는 과정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야기한다. 요리를 싫어하는데 정해진 가사노동 시간을 채우기 위해 저녁을 직접 해야 하거나, 할당한 이동 시간을 다 써버려 친구를 만나러 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평균치’라는 기준의 폭력성과 우연성은 퍼포머의 신체 시간과 한국인의 평균 시간이 어긋날 때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른다.

한편 비교적 최근작인 〈23:59:60〉(2015)와 〈일몰-일출〉(2017)은 개념 면에서 〈전날의 섬, 내일의 섬〉의 직접적인 전초 작업에 해당한다. 이들은 경험적으로는 동시이나 규범적으로 달라지는 시간의 상대성을 다룬다. 〈23:59:60〉은 지구 공전 속도에 따르는 태양시와 원자의 진동 단위로 계산되는 표준화된 원자시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3 – 4년에 한 번씩 도입되는 윤초를 대상으로 한다. 24개의 표준 시간대에 속한 68명의 참가자들은 윤초가 더해지는 순간, 자신이 있는 장소의 사진을 찍어 작가에게 전송한다. 비록 1초에 불과하지만 윤초의 존재는 과학적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증명한다. 더욱이 윤초가 더해지는 순간은 실질적으로는 동시이나, 시계상의 시간은 모두 다르다. 객관적 시간의 불완전함과 지리적 거리가 야기하는 시차의 문제는 〈일몰-일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최근 몇 년간 유럽에 체류하며 작가는 한국에 있는 친구와 동시에 메시지를 주고받기 위해 서로의 밤과 아침을 연결했다. 두 도시의 일몰과 일출이 비슷하게 겹치는 하지에, 런던의 작가는 일몰을 서울의 친구는 일출을 1분 간격으로 동시에 찍는다. 경험과 계측이 끝없이 갈라지는 모순 앞에서 시간의 정체는 갈수록 희미해진다.
다른 듯 서로 닮은 이들 작업 앞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구민자는 왜 시간에 관심이 있는 것일까? 동질적 시간의 허구성이 이 사람에게 왜 그토록 중요한가? 그에 대한 해답은 작가의 첫 작업 〈42.195〉(2006)에서 찾을 수 있다. 마라톤은 그저 42.195km를 달리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지만, 이 경주의 승리를 위해 투여되는 시간 및 자본, 노력은 어마어마하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무언가를 위해 모두 똑같이 내달리는 속도의 경쟁이 작가는 이상해보였다고 한다.8 외부의 속도와 다른 속도를 찾기 위해 작가는 오히려 더 천천히 걷는다. 나의 속도로 느리게 다른 시간을 되찾기 위해. 우연히 혹은 편의상 누군가의 관점에 따라 만들어진 규칙과 척도가 모든 이의 고유한 차이를 동질하게 무화시키는 조용한 폭력, 그것이 구민자 특유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다. 이때 눈에 띄는 것은 저항의 태도와 계기이다. 강압적 척도에 대한 거부는 다른 작가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반항의 방식에서 구민자만의 특징이 드러난다. 구민자는 비판 대상을 직접 공격하거나 명시적으로 거론하지 않는다. 안드레아 프레이저(Andrea Fraser)처럼 냉소적으로 패러디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테칭 시에처럼 자신을 시스템 안에 던져 넣는 자학적 형태를 취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방식은 온건하지만 다른 한편 완강하다. 이를 김해주는 “말없는 거부감”이라 부른다. 사람과 만물의 개별성을 한두 마디로 축약해 버리는 평균이라는 개념의 무례함에 대한 소박하지만 고집스러운 저항.9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연출한 구조가 계속해서 엇나가는 농담 같은 상황을 만들고 이를 통해 계량적 지표의 권위를 허무는 방식은 관객 스스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부드러운 설득이다.

그러한 저항이 합리주의적 세계관이나 세계를 동질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담론적 비판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구민자 작업의 또 다른 차별성이다. 이번 전시의 토대가 된 시간 작업들 역시 작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다. 〈Identical Times〉는 한국과 달리 ‘일광 절약 시간제(서머 타임)’가 존재하는 유럽에서 경험한 다른 시간 감각에서 출발했고, 〈일몰-일출〉은 멀리 떨어진 친구의 생활 리듬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시간대를 찾던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작업의 계기가 거대 담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경험에서 태동한다는 점은 구민자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특징이다. 이런 점은 작업의 또 다른 축인 제도 비판적 성향의 작품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일례로 〈스퀘어 테이블: 예술가 공무원 임용규정 마련을 위한 공청회〉(2013)는 라운드테이블을 스퀘어테이블로, 자유로운 예술 개념을 공무원, 임용, 공청회 같은 행정의 언어로 대치해 예술계를 규격화하는 미술제도를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하지만 여기서 비판의 토대는 제도를 구성하는 추상적인 관념(작가, 작품, 미술관, 담론)보다 작가로 살아내는 하루하루의 일상에 있다. 작가의 생존에 절대적인 공공 기금의 존재가 예술가를 공무원이 되도록 요구하는 아이러니가 작업을 낳은 것이다. 부모를 이사장으로 하는 가상의 재단에 대한 〈구&양 미술재단〉(2013) 역시 작가의 꾸준한 작품 활동이 부모의 후원 없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 시대 한국미술계의 현실을 노출한다. 작가로 버티며 피부로 겪은 개인적 경험을 공적인 제도의 문제로 치환하는 구민자의 전략은 체제에 대한 다른 저항의 방식이다. 주어지는 조건을 부정하지 않되 은근하고 꾸준하게 나름의 목소리를 내기, 무거운 상황을 유머와 여유로 무겁지 않게 극복하기가 그 태도다.

 

IV

이번 전시의 구성은 4채널 영상 〈전날의 섬, 내일의 섬〉을 중심으로 관련된 소작업들을 배치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동선의 앞쪽에 놓인 두 개의 가로등은 하루의 감각을 결정하는 해의 상징이자 시공간의 구획과 떨어질 수 없는 빛에 대한 은유다. (빛의 속도가 시간을 결정하고 시간은 공간과 분리불가능하다.) 가로등 사이에는 퍼포먼스에 쓰인 물건들이 놓인다. 접은 텐트, 냄비나 주걱 같은 조리도구, 돗자리, 캠핑용 간이 의자 등이 차분히 나열된다. 신문, 손목시계, 날짜를 그린 옷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퍼포머 B인 최수정이 건너뛴 2018년 6월 29일을 위한 물건들 또한 근처에 배치된다. 한편 메인 영상은 공간 안쪽 깊숙한 곳에서 상영된다. 메인 영상에서 파생된 소품들은 공간 사이사이에 흩어져 놓인다. 퍼포머 A의 반복을 위해 작성한 스케줄표, 날짜 변경을 상징하는 자정의 자리 교체 사진 6점, 피지의 돌, 조개껍질, 산호를 백자토 위에 굴려 만든 네거티브 프린트 흙판 등이 일례다.

주목해야 할 점은 소품이나 공간 배치에서도 척도의 상대성이 강조되도록 전시가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전시장 곳곳에는 현재의 날짜변경선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자료들이 있다. 타베우니 섬의 날짜 변경선 표지판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자리에 놓이게 되었는가를 알리는 텍스트 작업, 그리니치를 본초 자오선으로 삼기 이전 엘이에로(El Hierro)섬을 기준으로 한 카나리아 제도 지도가 그 예다. 한쪽 벽면에 위치한 빈 전광판도 “누가, 왜,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재현하는가”10에 따라 달라지는 지도의 가변성을 암시한다. (지도란 정해진 것이 아니다!) 특히 공간을 구획하는 가벽 4곳에 앞뒤로 배치된 8점의 세로 파노라마 사진은 날짜 변경선이 점이 아니라 선임을 인지시킨다. 관광객들은 모두 표지판이 놓인 장소에 몰리지만 실제 날짜변경선은 피지 섬을 남북으로 지나는 180도 경도에 놓인 모든 곳이다. 작가는 남쪽 해안에서 숲을 거쳐 북쪽 해안에 이르기까지 180도 경도를 지나가는 여러 장소를 방문한 후 그곳을 세로 파노라마로 기록했다. 세로 파노라마의 형식은 세로선인 180도 경도를 가리키는 동시에 그 자체가 일반적인 파노라마의 포맷(가로)에서 벗어난 다른 기준이기도 하다.

피지에서 찍은 작업을 서울에 설치하며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시공간 특정성도 전시에 부여했다. 본디 이틀간의 퍼포먼스라 상영시간이 48시간이던 영상의 길이는 미술관 개관시간에 맞춰 8시간과 11시간으로 편집되었다.11 여기서 미술관의 생체 리듬과 영상의 리듬은 실시간으로 완벽히 일치하게 된다. 영상의 시작이 미술관의 개장이요 영상의 끝이 미술관의 폐장이며, 실제 우리 삶처럼 반복은 없다. 한편 미술관이 자리한 장소의 방위도 디스플레이에 반영되었다. 위에서 보면 가벽과 세로 파노라마 사진의 배치는 일렬을 이룬다. 작가는 본디 이 선을 미술관의 남북 방위에 맞추려 했다. 하지만 현실적 조율 문제로 공간은 뜻대로 구성되지 못했다. 대신 작가는 미술관의 실제 방위를 알리는 방위 표시 기호와 (역시 방향을 상징하는) 남십자성 드로잉을 설치에 추가했다. 이 에피소드는 의도한 바가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지도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듯하다. 지도는 본래 정확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인지 체계를 규정하는 기준 또한 자의적이고 우연적이다. 타베우니 섬의 현재 표지판은 세 번이나 위치를 옮겼고, 그곳에 있는 교회는 어제에 목사님의 사택은 오늘에 위치한다.12 그곳에서 우리의 과거는 그의 미래며, 우리의 미래는 그의 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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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채널 영상 <전날의 섬, 내일의 섬>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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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집으로 걸어간 사나이」, 『갈릴레오의 아이들』, 안정희, 하현길, 김명남 옮김, 시공사, 2007, pp. 326~327.
2. 구민자 작가노트.
3. 백영주, 「테칭 시에의 생애 작업’에서 나타나는 시간성과 매체성」, 『기초조형학연구』 (vol. 13, no. 6), 2012, p. 223.
4. 초기 구상 단계에서 작가는 이 둘이 퍼포머라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했다고 한다. 구민자 인터뷰, 2018년 8월 1일.
5. 우정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온 카와라의 〈일일회화〉와 전쟁의 기억」,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27), 2007, pp. 52~73.
6. 백영주, 앞의 논문, p. 217.
7. 바람이 부는 장면은 영상에 포함되어 있고, 늦잠 부분은 채택되지 않은 첫 번째 촬영분에 있다.
8. 구민자 인터뷰, 2018년 8월1일.
9. 김해주, 「평균 없는 시선」, 문지문화원 사이 아트 폴더, 2012.
10. 임동근, 「지도를 비평하고 생산하기」, 『디자인저널 양귀비』 (1), 계원디자인예술대학 출판부, 2009, p. 18.
11. 미술관 야간 개장의 경우도 고려한 점은 작업의 모든 세부를 엄밀히 설계하는 작가의 귀여운 완벽주의다.
12. 날짜 변경선 표지판에 대한 텍스트 작업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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