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올해의 작가상 2014》
박수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올해의 작가상(2012-)’이 제 3회를 맞이했다. 이 제도는 공정하고 개방적인 작가 선정과 지원에 큰 비중을 두고 동시대 미술계에 응답하는 현장 중심적이며 실질적인 미술후원 제도를 지향하고 있다. SBS문화재단과 공동주최로 진행되는 이 제도는 실험성과 참신성을 갖추고 한국 미술계는 물론 세계 미술계에 새로운 이슈와 담론을 창출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다.
《올해의 작가상 2014》의 공정한 진행을 위해 제 2기 운영위원회(2013-15)가 발족하여 추천위원과 심사위원들을 별도로 위촉하였다. 운영위원회는 10인의 추천위원들을 위촉하고, 추천위원 각각은 1인의 작가를 추천하였으며 5인의 국내외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통해《올해의 작가상 2014》전시 작가들을 선정하였다. 전시 작가로 뽑힌 구동희, 김신일, 노순택, 장지아는 이번 전시를 통해 그들이 구상 중인 프로젝트를 넓은 공간에서 실현할 수 있게 되었고 관객은 미술에 대한 가능성과 성과를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2014 올해의 작가’ 최종 심사는 동일한 심사위원단에 의해 진행되며 수상자가 전시기간 중 선정, 발표된다.
구동희: 재생길
구동희(1974-)는 진부한 일상에서 출발하여 퍼즐을 맞추듯 우연적 상황을 개입시키면서 영상, 설치 등의 작업으로 작품을 풀어나간다. 작가는 주변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관심을 가지고 TV, 인터넷 등 각종 매체를 통해 자료를 수집한다. 작가는 어떤 사안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기 보다는 작품 제작 과정에서 물리적 한계 상황을 수용하고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즐긴다. 촬영된 영상을 편집함에 있어서도 임의적으로 편집 순서를 뒤섞는 등 전체 구성을 변화시키면서 새로운 내러티브를 발생시킨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 이게 어떤 것이 될까 생각하면 항상 맘이 들뜨잖아요. 근데 작업이 거의 끝나간다 싶을 때 다시 보면 굉장히 당황스럽죠. 제 작업 과정이라는 게 다분히 자연발생적이라. 처음에 아이디어를 내서 계획해 놓은 컨텍스트가 있긴 하지만 손이 막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면 결과물은 영 딴판이 되거든요… 매번 어딘가 올라갔다가 원점으로 되 튕겨 나오는 일종의 패턴 같은 게 있어요.”1
구동희는 내러티브를 담기 위해 비디오를 선택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명확한 이야기도, 등장인물의 행위에 따른 의미적 요소도 발견하기 어렵다. 각본은 주어지지 않고 작가가 설명해 준 역할에 의해 등장인물들은 각기 자신의 역할을 상상하며 촬영에 임한다. 영상에는 사건 전후가 불분명한 가운데 등장인물들의 생경한 모습과 유사하게 반복되는 구성에 의해 긴장감이 유발된다. 게다가 작가 스스로는 내러티브를 말하지 않으며 설명적일 수 있는 요소를 오히려 배제시킨다. 그리고 관객에게 해석할 여지를 남겨둔다. 이에 대해 아주마야 타카시는 “부조리함은 구동희 자신의 생활 속에서 실제로 느낀 감각들을 기본으로 한 것이다. 그녀는 일상생활 공간과는 구별되는 영상이라는 시간 축과 거기에 갇혀진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 그녀 자신이 느꼈던 부조리함을 관객들과 공유하려는 것이다.”2 비합리로 가득 찬 세계에서 부조리를 의식하며 깨어있고자 하는 열망을 세계와 인간 사이에 뒤섞여진 혼돈, 카오스(Chaos)로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있는 듯하다.
이번 설치작업인 <재생길>(2014)은 작가의 서울대공원에 대한 기억과 최근 들어 발생했던 사건 사고들에 대한 인상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미술관 설치를 구상할 때 서울랜드의 롤러코스터 트랙이 떠올랐다는 작가는 장방형 대칭구조인 전시장에 36개의 모듈, 길이 75m에 270도가 회전하는 뫼비우스의 띠 형태의 구조물을 관객참여공간으로 구현했다. 뫼비우스의 띠는 안팎의 구별이 없고 어느 순간 비틀림으로 안과 밖이 위와 아래로 사라지는 무한을 보여준다. 많이 비틀어진 부분에서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관객의 시점으로 찍은 영상을 무한 반복한다. 마치 인간 존재와 세계가 안쪽에서 출발해 가면 바깥쪽에 도달하게 되고, 바깥쪽에서 출발해 가면 안쪽으로 도달하게 되는, 끊임없이 서로 작용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 가는 유기적 관계임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트랙에 들어선 관객은 구조물 형태의 변화 속에서 구조물 전체상과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각하기 어렵다. 관객은 경험하는 주체로서의 지각과 바라보는 주체로서의 환영의 분리를 체험하게 되고 이 때 구조물을 둘러싼 각각의 오브제들은 관객에게 말 걸기를 시도할 것이다. 이 오브제들은 관객의 위치를 암시할 수도 있고 관객의 상황을 시각화할 수도 있다.
구동희는 “어떤 한 이미지가 다른 많은 이미지들을 낳으면서 계속 떠날 줄 모르고 있던 이 상황이 점점 더 크고 강하게 다가왔어요 그래서 비디오 작업을 하나 새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3 일상적 삶에서 본인이 느끼는 지점을 작업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을 예술가라고 한다면 구동희는 바로 그 지점에 위치해 있다. 놀이를 하듯 시각적 요소를 암시적으로 구현해 가는 작가의 작품에는 다층적인 의미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김신일: 이미 알고 있는(Ready-known)
김신일(1971-)은 ‘본다’는 시각적 행위를 통해 일상적 관념의 경계를 해체시키는 작업을 한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러한(Marshall McLuhan, 1911-1980)이 1960년대 말『매체가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에서 대중매체가 이용자에게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쳐 현실 경험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비판적 사고4에 작가는 공감하면서 지속적인 정보 과부하(過負荷)가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에게 미치게 된 수동성을 인지하였다. 또한 세상의 범주화가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하여 시각적 창조물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Ready-known)’ 관념을 해체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초기 작업은 압인드로잉이다. 하얀 종이에 선을 눌러 자국을 남긴 압인드로잉은 형태와 색채를 절제함으로써 빛의 방향에 따라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 압인드로잉으로 만든 영상 <Invisible Masterpieces>(2004)에서는 미술관 벽면에 있는 작품을 지우고 관객의 행위를 몇 개의 간결한 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품이 사라진 미술관에서 관객의 움직임은 과연 보는 것이 진실일 수 있을까 라는 ‘본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TV Enlightment>(2006)에서도 광고의 텍스트와 이미지를 삭제하고 빛 만을 TV에서 방출함으로써 일방적 정보 전달에 의해 관객을 수동적으로 만들기 보다는 오히려 관객의 감성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문자조각들과 영상이 출품되며 전시장이 하나의 구조화된 공간이 된다. 전시장에서는 센서가 작동하여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전시 공간 전체의 빛이 조절된다. 어두울 때는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청각적인 요소가, 밝을 때는 인간의 이성이 발현되는 시각적 요소가 부각된다. 조각은 겹쳐진 문자가 한 덩어리를 이루는 추상적 구조물이다. 이러한 글자 블록이 바닥에서 최대 2.4m의 높이로 세워진다. 단어와 글자 각각은 구체적인 시각적 현존물로써 읽히지 않고 보이기만 하는 요소가 된다. 작가에게 문자는 더 이상 사상의 운반체가 아니다. 언어의 의미론적 기능이 유보되고 간과된 감각적 측면이 전면에 대두되는데 이에 따라 관객은 의미의 바깥에 놓이게 된다.6 ‘마음(MIND)’, ‘믿음(BELIEF)’, ‘이념(ISM)’을 형상화한 문자구조물이 낮은 저음으로 흔들리는 거울 앞과 중앙에 거대하게 설치되어 있다. 중앙 구조물에는 빛이 투사되어 구조물의 면은 압인드로잉의 홈처럼 빛을 머금게 된다. 이성적 관념인 ‘마음’, ‘믿음’, ‘이념’ 구조물은 읽을 수 없음으로 인해 이성적 분별이 해체되고 관객은 소리와 거울로 상징되는 내면의 흔들림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인체의 원초적 소리라 할 수 있는 심장, 맥박 소리와 생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빛을 제시함으로써 인간 본연의 근원적인 측면에 접근하게 되고 직관이 부각되게 된다. 이처럼 직관적으로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는 영상작품 <42,000초 안에서의 대화>(2014)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제목인 42,000초는 하루 중 이성이 깨어있는 시간이라 할 수 있는 12시간을 초로 환산한 수치와 유사하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인공의 풍경과 자연 풍경 사진을 픽셀이 드러날 때까지 확대하고, 두 개의 영상을 교차시키면서 인간의 시각, 이성이 파악할 수 없는 실체로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압인 드로잉을 포함하여 백색이 주(主)인 김신일의 작품은 비어있음으로써 충만한, 절제와 포용을 상징하며 비물질적이며 정신적인 세계로의 진입을 상상하게 한다. 전시장 역시 백색의 공간으로 관객은 긴 통로를 따라가야 작품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 길은 관객을 명상으로 이끄는 듯 하다. ‘보는’ 행위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관념을 해체하고 우리를 근원적인 세계로 인도하고 있는 작가는 드로잉, 조각, 영상을 넘나들며 시지각에 대한 실험을 절제된 시각언어로 구현함으로써 인간 이해의 영역을 한 단계 확장시키고 있다.
노순택: 무능한 풍경의 젊은 뱀
노순택(1971-)은 분단 현실을 주제로 한 사진 작업을 한다. 분단이 실제로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으며 우리 사회와 개인의 삶을 어떻게 왜곡시켜 왔는지를 제시해왔다. 분단이후 60년이 지난 이 시점에 남북의 정치, 군사적 상황은 바뀌지 않았고 사람들의 인식도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분단은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오랜 시간 고착된 사실처럼 무심코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 노순택은 분단 이데올로기의 관점을 우리의 일상에서 예민하게 포착하고 집요하게 읽어나간다.
그는 다큐멘터리 보도사진에서 출발하여,『분단의 향기』(2005), 평택시 대추리 미군기지 레이돔을 촬영한『얄읏한 공』(2006), 남북한 특유의 모습을 담은『붉은 틀』(2007), 2008 올해의 독일 사진집으로 선정된『비상국가』(2008), 전쟁무기의 노출된 모습을 담은 『좋은, 살인』(2010),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 인터뷰를 담은『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2011),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되돌아보게 하는『망각기계』(2012), 연평도 포격사건을 다룬『잃어버린 보온병을 찾아서』(2013) 등 여러 책들을 출간해 왔다. 관통하는 주제는 ‘분단은 오작동(誤作動)으로써 작동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분단은 특정시간, 특정 공간만을 점유하지 않는다. 분단은 부유한다. 분단은 스며든다… 기억과 망각, 안도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조장하는 것이다”7

이번 전시는 한국사회가 어떻게 작동되어 왔고 그 안에서 카메라가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지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이다. 요즘은 사진과 관련된 환경과 조건이 많이 변화되어 누구나 카메라를 쉽게 소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진을 찍는 행위가 일상화되었다. 작가는 시위 현장이라는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지점 또는 정치 사회적 맥락 안에서의 특정 상황을 기념하거나 증거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이 사진을 통해 작가는 카메라가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와 같이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사진이 지닌 한계 또한 제시하고 있다. 이번 신작의 제목은 ‘무능한 풍경의 젊은 뱀’이다. 여기서 ‘무능한 풍경’이란 잔인하지만 현실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풍경이며, ‘젊은 뱀’은 다른 매체에 비해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뜨겁고 교활한 사진의 속성을 의미한다. 마치 객관적 진실을 다룰 것만 같지만 실은 표피적이며 맥락 없이 프레임 안의 풍경만을 제시함으로써 영악한 시선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사회적 참사를 바라보는 언론의 시선이 문제 제기되면서 도대체 사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사진 매체에 대한 작가의 자기 반성적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노순택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이념의 대립으로 풀어나가기 보다는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으며 미적 감각을 동반해 시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대를 끌어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사진 환경 속에서 사진이라는 매체를 두고 고민하는 작가의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오늘날 사진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통용되고 제시되고 있는 지 우리에게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장지아: 금기는 숨겨진 욕망을 자극한다
장지아(1973-)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것을 몸을 통해 다루는 작가로 퍼포먼스, 영상, 설치, 사진을 통해 구현한다. 작가는 사회적 시각을 반영하는 문화적 산물로서의 몸을 다루기보다는 몸의 내적 깊숙한 부분, 감각체계로서의 몸을 다룬다. 여성을 관음적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로서 드러낸다는 점에서 페미니즘미술과 연관시킬 수도 있겠으나 몸과 관련하여 터부시되는 영역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발현한다는 점에서 미술의 경계를 건드리고 있다. “나의 작업은 공적인 소통보다는 개인적인 내밀함을 곱씹게 하는 역할을 하도록 의도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거나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호와는 상관없는 개인의 욕망으로 드러나게 된다.”8 작가는 내 안에 존재하는 인간 본연의 것을 직시하는 것이 사회적 시각을 드러내거나 세상을 변화시키는 발언에 앞서 선행될 부분이라 믿는다.
2004년 이후 작가는 몸의 구멍,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온 끈적이는 액체를 소재로 한 작업을 진행해 왔다. 오줌, 침, 피 등이 그것이다. 여성이 서서 오줌을 누고 오줌으로 식물을 키우고 침을 모으고, 소 피로 블록을 만드는 행위는 미술의 영역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불편해하거나 불결해하는 것들이다. 이 작품들이 전시장에서 보여질 때 작가적 상상력은 관객의 경험으로 확장될 뿐만 아니라 수치심을 유발시킨다. 이것은 절단된 사지나 피, 정액, 머리카락, 토사물, 배설물처럼 몸에서 분리되어 더 이상 전체의 일부가 아닌 대상과 마주칠 때 느껴지는 고조된 공포나 수치심을 뜻하는 아브젝시옹(abjection)으로 볼 수 있다.9 이러한 작품들은 사회적 금기에 도전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을 재확인하게 하는 반미학적인 것들이다. 아카이브 공간에서 제시될 오줌작품 <P-Tree>(2007)의 다양한 드로잉들은 작가적 상상력이 전시장이라는 실제 공간과 만나면서 현실적으로 어떻게 변모되어 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롭다.
장지아의 작품에서는 고통과 쾌락, 폭력성과 아름다움 등 극단이 교차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아름도운 도구들 시리즈 2>(2012)는 기능성으로 사용되는 외과용 수술도구에 의외의 장식성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작가적 상상력과 재해석에 의해 고문도구로 재탄생했고, <앉아 있는 어린 소녀>(2009), <나의 죄를 고백합니다>(2011)는 일견 에로틱해보이거나 장식적으로 보이는 이면에 도사린 폭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번 신작인 설치 및 퍼포먼스 작업 <아름다운 도구들 3(브레이킹 휠)>(2014)은 작가가 5-6년 전부터 구상해온 것으로 흰 천이 드리워진 성소가 전시장에 구현된다. 성소 안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1950-60년대 수레용 바퀴 12개가 있다. 바퀴는 한때 고문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었던,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선택된 오브제이다. 그 바퀴에는 깃털이 달려있으며 큐빅이 박힌, 뚫린 안장 위에 퍼포머들이 앉아 고통스럽게 바퀴를 돌리며 노동요를 부른다. 바퀴를 돌려야하는 노동이 수반되는 한편 깃털이 음부를 스칠 때의 쾌락이 동반된다. 노동요의 곡은 서양 중세에서 불완전하고 퇴폐적이라 성가 사용이 금지되기도 했던 프리지안 음계이며, 가사는 우리나라에서 오랜 세월 구전된 충북 음성의 디딜방아타령으로, 상반될 것 같지만 음란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두 요소를 작가는 결합시키고 있다. 성소 밖 그림자를 통해 은밀함이 드리워지며 성스러운 분위기와 세속적 행위가 묘하게 결합되면서 미술관은 위반의 영역이 된다.
플라톤의 『고르기아스』에 따르면, 목마를 때의 결핍과 욕망은 고통스러운 것이나 마실 때는 결핍이 채워지며 쾌락을 준다. ‘마시는 동안’은 ‘목마를 때’와 일치한다. 따라서 목마를 때 마신다고 말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때 동시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고통과 쾌락은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이는 인간의 실존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금기시되었던 욕망은 작가의 상상에 의해 현실에서 미적 언어로 탄생하고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본능을 들여다보게 한다. 작가는 작품화하기 어려운 주제를 일관성 있게 추구함으로써 미술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현대미술이 확장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번에 선정된 네 명의 작가는 현대미술의 다양한 경향을 반영하듯 개성적인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노순택은 사회 정치적인 현실을 삶의 문제,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으며 장지아는 개인의 몸, 욕망을 통해 삶의 이면, 인간의 본능을 들여다보게 한다. 구동희는 일상의 진부함에서 발생하는 부조리함을 다층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김신일은 관념의 경계를 해체시킴으로써 인간의 근원적인 측면을 작품을 통해 표출하고 있다. 이렇듯 인간의 삶과 가치를 예술적 산물로 투영시킨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고민을 성찰하게 된다.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미술의 현 위치와 방향을 확인하고, 우리 미술계에 새로운 담론을 이끌어내는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