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올해의 작가상 2013》
김경운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올해의 작가상》은 지난 1995년 처음 도입한 이후 15년 동안 운영하여 오던 《올해의 작가》전을 새로운 수상 및 후원제도로 개편하여 2012년에 처음으로 출범시킨 제도이다. 그 결과 《올해의 작가상 2012》전은 『중앙일보』 선정 2012년도 화제의 전시 1위, 『아트인컬처』 선정 2012년도 최고의 전시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냈으며, “올해의 작가 2012”로 선정된 문경원․전준호 작가는 국내작가로서는 20년 만에 카셀 도큐멘타에 초청되고, 광주 비엔날레에서 ‘눈예술상’을 수상하는 개가를 올렸다.
올해로 두 번째의 무대를 맞이하는 《올해의 작가상 2013》전은 한국 현대미술의 미래적 잠재성과 비전을 제시한 역량 있는 작가와, 작품 활동을 통해 한국 미술의 발전 및 진흥에 기여한 작가를 선정하여 후원하고 전시함으로써, 한국 현대미술문화의 발전을 도모하고 새로운 한국현대미술의 경향 및 담론을 주도하고자 하는 목표를 견지하고 있다. 이번 제2회 《올해의 작가상 2013》 전시를 위해, 그간 운영위원회의 위촉을 통해 미술관 내·외부 10인에 이르는 추천위원들의 추천과, 5인의 국내·외 심사위원단에 의한 심사가 이루어졌다. 본 과정을 거쳐 선정된 작가는 공성훈, 신미경, 조해준, 함양아이다. 이 4인의 작가는 2013년 7월 19일부터 10월 20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 《올해의 작가상 2013》전에 참여한다.
특정한 주제를 염두에 두고 작가를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작가들의 역량과 잠재력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는 본 전시와 제도의 성격상, 금번 전시 역시 각양각색의 작품세계를 펼쳐 보이는 작가들이 제각각 구상한 프로젝트를 나란히 보여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매체와 방법론을 구사하는 작가 4인의 개인전이 동시에 개최되는 것을 방불케 하는 형태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동시대미술에 대한 통찰력과 감각이 뛰어난 관객이라면, 이들 다양성을 아우르는 어떤 공통된 저변을 은근히 느낄 수도 있으리라.
조해준: 사이의 풍경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이겠으나, 그야말로 동시대미술다운 동시대미술은 그 작품이 자리하고 있는 시간대에 가장 첨예하게 떠오르는 시대적 쟁점을 그저 외면하고 지나쳐버리지 않는다. ‘동시대미술가’로서 조해준의 작품 역시 이러한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의 하나로 꼽을만하다. 그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최근 한국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사회적 쟁점 중 가장 주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로 세대 간 갈등과 괴리의 문제를 꼽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작가 조해준은 바로 작가 자신의 아버지인 조동환과 2002년부터 시작한 공동작업을 지금도 지속해가고 있는데, 이는 격변하는 한국사회 속에서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온 아버지의 개인사를 풀어내는 구술내용에 바탕을 둔 드로잉 연작들이며, 공동작업의 소산으로 나온 본 연작들은 작가 조해준의 작품세계에서 비중 큰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이 연작들은 드로잉에서 나아가 전시장 안의 설치형태로, 또 출판된 만화책의 형태로, 그리고 최근에는 아버지를 포함한 여러 제작진의 참여로 완성되는 영화의 형태(<사이의 풍경>)로까지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이 성장하면서 경험해왔던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곱씹어본 아버지는 다음으로 자신의 기억 속에 공백으로 남아있는-서로 무뚝뚝하고 서먹서먹한 한국의 부자(父子)관계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아들의 학창시절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하며, 하여 아들이 구술한 성장기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어깃장 난 아들-1979년부터 1990년까지>를 제작하게 된다. 아들이 제작자이자 편집자로서 이끌어가는 방향 아래 언뜻 어눌한 듯도 하지만 아주 꼼꼼하게 그린 그림들을 아버지가 놀라울 정도로 풍부하게 쏟아내는 공동작업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가 알지 못했던 각자의 삶 속 내밀한 경험들에 조금씩 다가가면서 서로의 삶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해나간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세대갈등이 날카롭게 표출되는 사건들이 뉴스에 터져 나오는 우리 사회 속에서, 세대 간 소통의 물꼬를 트는데 예술이 이만한 역할을 해낸 사례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개인사의 특수성에서 출발하되, 결국은 각 세대가 겪어온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보편적 경험을 도출해내던 드로잉 연작 공동작업은 이제 그 인식의 지평을 더욱 넓혀, 마침내는 세상의 주변부에서 서성이고 있는 소수자들의 이야기에 관한 일면 인류학적인 보고서(<볼가도이치: 독일 밖에서 비추어 본 풍경>, <북조선: 북한 밖에서 비추어 본 풍경>), 더 나아가 세계사적인 차원의 지각변동(<아랍의 봄: 아랍 밖에서 비추어 본 풍경>)에까지 다다르고 있다.
이와 같은 공동작업을 한창 진행하던 어느 날, 작가의 아버지는 1960년대 초에 자신이 그려 국전에 출품하였다가 낙선한 작품을 층계창고에서 발견한다. 그림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작가가 되려는 꿈이 좌절된 채 평범한 삶을 살아오다 막내아들이 마련해준 계기로 인해 뒤늦게나마 그간 쌓인 창조력을 마음껏 분출시킬 수 있게 된 데 대해 풀어낸 아버지의 소회는 사뭇 감동적이다.
작가가 되고자 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아버지가 일상 속에서 짬짬이 만들어왔던 일종의 아웃사이더 아트, 언뜻 진부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양식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이는 소박한 창조물들은 아들의 지휘와 연출을 통해 보는 이들의 마음에 잔잔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동시대미술작품으로 훌륭히 탈바꿈한다. 그림, 부조, 조각, 각종 오브제 등 창작욕구의 다양한 편린을 모아놓은 일종의 아카이브를 통해 우리는 아버지 세대들에게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범부, 어느 평범한 아버지인 한 인간이 눈에 띄지 않게 품어왔던 창조본능, 지극히 인간적인 창의력의 소산물들을 풍부하게 접하게 된다. 여느 아버지와 별다르지 않은 이 아버지가 보여주는 인간의 창조본능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이 지극히 인간적인 본능에 새삼스러운 경탄을 느끼게 하는 소중한 순간을 제공한다.
몇몇 프로젝트의 지속을 통해 시각예술을 매개체로 하여 대화나 편지 등 문자와 음성언어로 소통하던 아버지와 아들은, 최근 영화매체 속의 공동작업을 통해 신체로도 소통하는 새로운 경험을 쌓게 되었다. 우리는 예술이 세대 간의 갈등과 괴리를 중재하고 마침내는 소통과 화합을 이끌어내는데 긍정적인 동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는 하나의 모범적 전형을 조해준의 작업세계에서 발견하게 된다.
함양아: 넌센스 팩토리
먼 미래의 시점에 존재하는 가상의 생활사, 혹은 역사박물관을 상상해보자.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눈에 과거의 생활양식이 얼마나 생소해 보이는가를 상상해 보기란 어렵지 않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일상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에 오늘날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이란 상상 이상으로 기이하고 묘해 보일는지 모를 일이다. 전제하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과거 속의 사람들이 오늘날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경우를 가정해보거나, 현재의 우리가 미래의 삶을 겪어볼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해볼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눈으로 볼 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들은 얼마나 신기하고 희한해 보일 것인가. 몇십 년 전만해도 사람들이 전화기를 들고 다니는 풍경은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19세기의 사람들이 오늘날 운행되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대중교통수단을 상상해 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미래의 사람들 역시, 현재 우리가 이용하며 타고 다니는 전화기와 교통수단을 보면서 ‘이렇게 불편한 상태로 도대체 어떻게 살았지?’라고 뇌까릴지 모른다. 지금 막 묘사한 바와 같은 것들은 주로 일상의 세부에 관련된 것들인바, 개개의 생활과 일상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사회의 구조와 작동기제 등, 좀더 거시적인 차원에 있는 것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21세기 초의 시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기며 들이마시고 있는 사회시스템이, 17세기의 사람이나 25세기의 사람이 보았을 때도 과연 자연스러워 보일까? 함양아의 <넌센스 팩토리>는 앞서 가정해본 미래의 박물관 속 한 부분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 21세기 초 고도산업사회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은유적으로 재현해놓고, 그에 관한 관람과 경험을 유도하는 일종의 체험관 같은 것에 비견해볼 수 있지 않을까?
<넌센스 팩토리>는 작가가 2010년에 개최한 주요 개인전의 제목 일부로 사용된 어구이기도 하고, 같은 전시에 출품되었던 복합적인 설치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며, 그 밑그림을 그려낸 짧은 자작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넌센스 팩토리>라는 개념은 이제 본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하나의 굵직한 줄기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가는 듯한 바, 필자의 눈에는 그저 제목이나 개념이라기보다 오히려 함양아 작가의 주요 화두 중 하나로 보인다. 작가가 구상한 이야기에 따르면 <넌센스 팩토리>는 “첫 번째 방: 중앙 이미지 박스 통제실”, “두 번째 방: 복지정책을 만드는 방”, “세 번째 방: 쿠폰을 만드는 방”, “네 번째 방: 예술가들의 방”, “다섯 번째 방: 팩토리의 지하”, “여섯 번째 방: 새로운 팩토리의 도면을 그리는 방” 등 여섯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부분들은 각각 이미지경제의 쟁점, 현대사회에서 이데올로기화된 행복, 자본주의시스템의 화폐경제, 예술계의 문화적 속물주의, 아슬아슬한 상태에 처한 이상주의의 가치, 성장제일주의의 무한경쟁 등 우리가 속하여 살아가는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동시대의 사회적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작가에 의하면 <넌센스 팩토리>는 우리 시대가 처해있는 여러 가지 위기들로 인해 촉발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인데, 우리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 같은 은유이며, 밑그림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지니는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를 시각화하여 현실의 부조리를 드러낸다. 이 분위기는 어떤 면에서 사무엘 베케트나 프란츠 카프카가 표현해 낸 현대사회의 부조리를 연상케도 한다. 요컨대 본 작품은 동시대미술의 주요 방법론 중 설치와 영상의 작업을 채택하여 구현한, 현대사회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은유인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매일 마시는 물과 공기처럼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들이 마셔왔던 지금의 삶을 되새김질해보고, 그 맛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뜻하지 않게 놀라는 경험을 하게 된다.
공성훈: 겨울 여행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동시대인들의 삶 속에서 거의 일상적으로 내면화된 불안, 그 일상화된 위기는 ‘화가 공성훈’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여러 평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작가의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불편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불온한 그림이다. 초기작에서 다양한 매체와 개념을 구사하여 미술이 제도로서 사회 속에 자리 잡고 유통되는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였던 작가는 자아에 대한 탐구를 거쳐 가장 기본적인 미술적 실천이면서도 더 이상 동시대적이어 보이지 않고 철지난 듯 느껴지는 회화작업이라는 ‘기본’을 통해 처음부터 죽 자신이 탐구하여왔던 문제해결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도전을 감행했다. 현대 혹은 동시대미술에 어느 정도 식견이 있다면 이러한 의문을 떠올려볼지도 모른다. 회화라는 매체는 얼마나 동시대적인가? 작가의 그림은 일견 매우 고전적이어 보이는 풍경의 장관 속에 동시대성을 드러내는 단서들을 언뜻언뜻 드러냄으로써 이에 관해 답하는 일종의 퍼즐 찾기 놀이 같은 게임을 제안한다. 그림 속 작은 구석에는 뜻하지 않게 산통 다 깨는 요소(비행기 구름, 헬리콥터, 낙하산 등)가 급작스럽게 등장함으로써 그림감상에 소격효과를 준다. 이 요소들은 마치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마지막 장면에 밝혀지는 범인의 정체와도 같다. 얼핏 19세기의 낭만주의 풍경화처럼 보였던 그림이지만, 그 작은 단서들에 의해 21세기의 풍경이라는 정체가 탄로 난다. 이것은 일상성을 전략적 무기로 삼는 여러 동시대 회화들과 공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상성과 통속성을 통해 동시대성을 획득해내는 동시에 관람객을 그저 편안한 상태에 놓아두지 않는 회화를 그려내는 것이 여전히 가능함을 보여줌으로써, 공성훈은 우리 시대에도 카라바지오나 쿠르베가 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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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가 걸어온 행보를 염두에 두고 서울 주변 신도시 언저리의 교외를 다룬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미술, 또는 나아가 회화를 떠올리게도 된다. 새로운 시각매체가 속속들이 등장하는 사회문화적 변화 속에서, 나름대로 차별화의 움직임을 이어오다 결국은 사회와 유리되고 주변화되어버린 오늘날 미술이 맞닥뜨리게 된 난처한 상황을, 삶의 공간들이 이루는 전체 체계 속에서 주변화된 공간인 위성도시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으로 번안해낸 알레고리 혹은 은유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 미술 속에서 회화가 차지하는 위상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자, 회화의 죽음이 종종 공공연히 거론되기도 하는 상황 속에서 회화를 구원할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그 답을 회화의 윤리에서 찾아낸다. 인간의 머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고를 매우 직접적인 경로인 몸을 통해 표현한다는 매체적 특성 말이다.
작가의 그림이 우리 시대 삶의 상황을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이미지임은 물론 당연하다. 이는 이념으로서의 산수화라는 위상을 갖고 있는 여러 전통회화들에서 엿볼 수 있는 동아시아 산수화의 상징주의적 전통과도 이어지는 듯한 태도로 보인다. 또한 작가는 그림을 그저 단순한 실제 모습의 재현이나 진부하게 아름다운 뻔한 장식물로 받아들여 버리고 말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구사한다. 언뜻 대단히 관습적이어 보이는 낭만주의 양식을 보여주는 그림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작가가 의식적으로 사용한 방법적 차용임을 뚜렷이 드러내는 것이다. 과장되게 반짝거리는 표면처리로 마감되는 표면은 그러한 장치의 일부이다.
이러한 장치들이 노골적으로 구사된 그림은 자연에 대한 외경이나 그로부터 비롯되는 숭고미가 아니라, 더 이상 착취될 수 없을 정도로 착취된, 인간에 의해 포섭되어 한갓 연극무대장치처럼 변해버린 자연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풍경을 뒤덮는 구름과 폭풍은 여전히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어떤 것이 건재함을 시사한다. 그것은 자연일수도 있지만 인간의 통제능력을 벗어난 어떤 알 수 없는 힘, 비속한 예를 들자면 금융위기 같은 상황적 변수자체, 혹은 고정된 형체를 지니지 않은 인간의 욕망 따위의 속성일지도 모른다. 이 힘이란 일상화된 위기, 일촉즉발의 전쟁위협, 혹은 더 나아가 우리가 오늘날 속해있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삶의 기본전제를 정초시킨 현대성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이들 그림에서 느끼는 경탄은 그림 속에 재현된 자연에 내재한 숭고로부터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자연은 마치 한껏 과장된 옷과 차림새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지만 왠지 모를 서글픔과 애처로움을 느끼게 하는 피에로처럼 보인다. 자연은 스스로의 장관을 한껏 뽐내고 있지만, 그 한껏 과장된 웅대함의 장관은 화면 한 구석에 조그맣게 등장하는 인간의 흔적에 의해 일거에 풀죽어버리고 만다. 따라서 우리가 이 그림에서 경탄해 마지않는 숭고함은 재현된 자연의 속성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자연의 장관을 일거에 의미심장한 은유로 전환시켜버리는 화가의 화면 장악력, 그 능력의 숭고함이 아닐까 싶다.
신미경: 트랜스레이션-서사적 기록
조각을 주된 매체로 하는 신미경의 작업은 서구 고전주의의 전범을 재음미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이식된 문화에 관한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식민의 경험을 특징으로 하는 나라에 태어난 작가로서, 그녀는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서 비롯되었지만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통하는 정전으로 확립된 서구미술의 전범을 재음미한다. 한데 이 곱씹음이 뜻밖이어보이는 이유는, 지금 이 시점의 동시대를 살아가는 세계인 거의 대부분에게 보편화된 일상용품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서구미술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여러 시대를 관통하면서도 시간을 초월하여 불변하는 가치와 전범을 상징하는 사물을, 공간적으로는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지만 시간적으로는 특정한 시간대와 함께 존재하는 소재인 비누로 옮겨내는 것이다. 비누는 그 속성에 있어서 지극히 동시대적인, 상대적으로 한정된 시간 내에 소진되도록 만들어져 특정 시간대와 운명을 함께하는 소비재이다. 이러한 옮겨냄은 서구문명의 고전에서 비롯한 지배적 가치를 영속화시키는 토대를 침식하고 전복하는 효과를 수반하게 된다.
작가는 이 옮겨냄의 작업을 ‘트랜스레이션 translation’, 즉 ‘번역’이라 명명한다. 본디 번역은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의 글로 옮기는 것을 가리키는 바, 신미경의 작업은 한 물질을 다른 물질로 옮겨내는 물질문화의 번역이라 할 수 있겠다. 물질문화의 전파와 교류가 일찍이 경험할 수 없었던 정도로 즉각적이게 가속화되고 활발해진데다가 갈수록 혼성화되는 문화를 특징으로 하는 오늘의 세상 속에서, 이 번역은 각별한 시사점을 지니며, 나아가서는 물질문화에서 번역의 윤리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
서구미술사에 있어서 가장 고전적인 정전에 해당하는 대상들을 골라 겉보기에는 비슷한 외양을 가지고 있지만 그 속성과 쓰임에 있어서는 상극을 이루는 매우 대조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번역하는 것은 그 번역행위 자체로 지배적인 규범에 대한 의문제기에 다름 아니다. 로렌스 베누티가 지적하듯이, 때때로 번역의 행위는 그 자체로 저항의 활동이 될 수 있다. 지배적인 규범의 전당인 박물관과 그 유물을 비누라는 언뜻 하찮고 소소해 보이는 소재로 번역하는 실천은 공고한 지배적 가치를 침식시키고, 현대사회의 속도감을 반영하듯 빠르게 풍화시킨다. 이렇듯 물질문화의 번역을 통해 원본과 번역된 사물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작업은 문화적 차이의 인정을 이상으로 삼는 차이의 윤리를 지향하게 된다. 이러한 차이의 윤리는 바로 번역의 윤리가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원본과 번역된 사물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는 조각상의 얼굴을 작가 자신의 얼굴로 바꾸어 놓는다거나, 서구의 시각에서 바라본 중국풍을 띤 수출용 도자기들을 투명한 유령처럼 옮겨낸다거나 하는 직접적인 방식이 되기도 하지만,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그 향기를 통한 보다 간접적인 방식이다. 작가의 작품을 마주하면서 우리는, 우선 시각적 인식을 통해 그 대상물이 돌, 유리, 구운 흙 등 단단한 재료로 되어있을 것이라 판단한다. 하지만 곧이어 다음 순간 따라오는 후각적 인식은 방금 전 인식한 대상물에 관한 진실을 폭로하여, 그 대상물이 무르고 녹기 쉬우며 향기 나는 비누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러한 경험은 사물을 인식하는데 있어 시각중심주의와 구별되는 또 다른 경로인 향기, 즉 후각을 부각시키게 된다. 시각만이 아닌 후각이라는 또 다른 경로를 통해서야 비로소 사물의 실체를 온전히 파악하게 되는 새삼스러운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작가는 근대 이후 서구사회 모더니티의 토대이자 특징인 시각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넘어설 또 하나의 단초를 제공한다. 이렇듯 의미심장한 각각의 번역활동은 또 다른 원본들을 생산해내고, 다양한 형태와 원천을 지닌 이 작품들은 한데 모여 신미경 작가의 거대한 아카이브를 구축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문화적 범주와 정의의 영원성과 불변성을 느슨하게 만드는 효과를 일구어낸다.
본 전시는 운영과정의 공정성에 무게를 둔 수상제도의 일환인 만큼, 작가적 역량에 중점을 두어 수상후보작가를 선정하였으므로, 전시의 주제를 미리 잡고 참여작가를 선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각 작가들이 보여주는 작품세계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니 어렴풋이 드러나는 저류에 관한 진단 정도를 제시해보자면, 작가들 공히 예술이 가지는 윤리적 책무에 관한 의식을 저버리고 있지 않다는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조해준은 일상사의 아카이빙을 통해 세대 간의 불통을 극복하고 소통을 이끌어내는 윤리적 역할을 해내는 예술의 사례를, 함양아는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잃지 않는 예술의 윤리에 대한 고민을, 공성훈은 몸을 통해 사고(思考)를 표현하는 매체인 회화의 윤리에 관한 사색을, 신미경은 문화적 범주의 고착화를 뒤흔들면서 서로 다른 문화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번역의 윤리를 보여준다. 인류학적 아카이브실, 21세기 초의 사회상 체험실, 사회에 대한 발언을 중층적으로 담아낸 풍경화실, 물질문화를 색다르게 번역한 조각실은 이렇게 모여 하나의 커다란 윤리적인 예술의 뮤지엄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