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인

홍영인
홍영인(1972~)은 최근까지 영국을 본거지로 하여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광주비엔날레(2014)와 런던 ICA(fig-2, 2015) 등에서의 전시와 공연,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폭 넓은 작품활동을 이어왔다. 작가는 ‘동등성’ 이라는 주제와 개념이 어떤 방식으로 미술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해 설치, 퍼포먼스, 드로잉, 자수,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의 작품을 통해 지속적으로 질문해 왔다.

Interview

CV

www.younginhong.com

<주요 개인전/프로젝트>
2018
The Moon’s Trick, 엑시터 피닉스, 엑시터
2017
The Moon’s Trick, 주영 한국문화원, 런던
2016
A Fire that Never Dies, 시실리아 힐스트롬 갤러리, 스톡홀름
2015
홍영인 6/50, fig-2, ICA 스튜디오 및 극장, 런던
2014
익명의 이미지, 아트선재센터 배너프로젝트, 서울
2013
꽃의 기만, 신도리코 문화공간, 서울
이것은 그라피티가 아니다, 시실리아 힐스트롬 갤러리, 스톡홀름
2012
도시의 리츄얼: 제스처, 아트클럽 1563, 서울

<주요 단체전>
2019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대구 예술 발전소
2018
씨실과 날실로, 서울 시립 미술관
2017
공예의 자리, 서울 남서울 미술관
베니스 아젠다: 컨트렉트 2017, 베니스 비엔날레 오프닝 영국문화원 후원 프로젝트/ 폭스턴/ 터너 컨템포러리 마게이트
블록 유니버스 퍼포먼스 페스티발, 런던
2016
Making is Thinking is Making, 2016 밀라노 트리엔날레, 한국관 전시
아트파리 아트페어, 한국 주빈국 초대 퍼포먼스 프로그램, 그랑팔레, 파리
2015
‘[ana] please keep your eyes closed for a moment’ 마라야 아트센터, 샤르자
2014
터전을 불태우라, 광주비엔날레
스펙트럼-스펙트럼, 플라토, 서울
퍼블릭 도메인, 델피나 파운데이션, 서울
2013
Making & Being, 브뤼셀 한국문화원 개관전시
Tell Me Her Story, 코리아나 미술관, 서울
기울어진 각운들, 국제갤러리, 서울
2012
플레이타임, 문화역 서울 284, 서울
The Shade of Prosperity, 필름 스크리닝, 리빙턴 플레이스, 이니바, 런던
플라스틱 네이처, 갤러리 바네사 쾅, 파리
2011
코리안 아이: 에너지와 물질, 서울 국회의사당 로비
2010
코리안 아이: 판타스틱 오디너리, 사치 갤러리, 런던

<수상>
2011
김세중 조각상
2003
석남 미술상

<레지던시>
2015
금천예술공장, 서울
[Public Domain] 델피나 파운데이션, 런던
2014
[Performance as Process] 델피나 파운데이션, 런던
2013
아르코 노마딕 레지던시, 첸나이

Critic 1

동등성에 접근하는 또 다른 방식

문혜진 (미술비평)

 

홍영인은 ‘동등성(equality)’이라는 개념이 질문될 수 있는 방식을 찾고 예술을 통해 실천하는 것이 자신의 작업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이 말에서 1980~90년대 성행한 사회정치적 행동주의 미술을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우선 소재 면에서 작업의 다수가 사회로부터 마이너리티로 규정지어지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고, 매체적으로도 보통 고급 미술로 취급되지 못하는 바느질이나 자수를 수단으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홍영인이 동등성에 접근하는 방식은 사회정치적 의제에 접근하는 익숙하고도 전형적인 양상과 상당히 다르다. 주변부를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많은 경우 이분법적 대립 구도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소수자라는 표식을 다는 순간 중심과 주변이라는 기존의 위계를 승인하게 되고, 주변부의 권리에 대한 주장이 중심을 주변으로 대체하려는 인정 투쟁이 되는 경우도 많다. 소외된 사람들에 주목하되 그들을 특정 범주로 집단화하지 않고, 주변부를 포용하되 이들을 구분하거나 대상화하지 않는 방식은 무엇일까. 홍영인의 실천은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해 이런 방식도 가능하지 않겠냐고 우리에게 넌지시 건네는 하나의 작은 제안이다.
동등성을 미술로 구현하고자 할 때 작가가 결정해야 하는 지점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작업의 소재로서, (동등성에 대한) 내용의 구현이요, 다른 하나는 제작이나 형식 면에서의 적용이다. 비교적 쉽고 일반화된 방식은 전자이나 이 경우 작업의 내용과 매체가 별개로 작용하는 한계를 피할 수 없다. 홍영인의 모색이 돋보이는 지점은 바로 여기인데, 그녀는 작업의 내용뿐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과정과 이를 담는 몸체(형식)의 속성에서도 기존의 위계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거스른다. 그 결과 동등성은 작업의 내용뿐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안팎으로 작동하며 실행된다.

그중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바느질 혹은 재봉틀의 사용이다. 주로 아시아 지역 여성 직공들의 저임금 노동인 바느질은 젠더와 계급의 측면 모두에서 타자성을 가리키는 좋은 표식이다 (실제로 작가는 동대문 의류 상가의 봉제공들에게 이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그녀는 바느질을 통해 여성성이나 아시아성을 강조하지 않으며, 하위문화적 정체성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홍영인이 바느질을 활용하는 것은 타자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던 경계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고급 미술이라는 범주를 가르는 기준이 일례다. 개념적이고 지적인 작업의 내용을 구현하는데 공예라는 이름으로 순수 미술에서 배제된 바느질을 도입함으로써 고급 미술이라는 장르 내부에 내재한 구분을 흐리고 다름을 공존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단지 미술 내부의 제도 비판뿐 아니라 작업의 내용과 필연적으로 조응하는 것이 홍영인의 작업이 지닌 밀도다. 일례로,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로 촉발된 촛불 집회의 장관(壯觀)을 자수로 수놓은 <Burning Love>(2014)는 공식 역사의 주인공이 아닌 평범한 시민들(특히 십대 소녀들)의 정동(affection)을 대상으로 한다. 한 땀 한 땀 정직한 노동을 요하는 자수라는 형식은 자발적으로 거리에 나온 한 명 한 명의 개인들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조명하기에 알맞은 방법이다. 여기서 시위에 참여한 군중은 민족이나 국민 같은 집단의 일원이 아니라 개성과 인격을 지닌 각기 다른 개개인들의 군집, 즉 다중(multitude)이다. 작지만 뜨거운 각자의 열망은 하나하나 정성스레 수놓아져 은하수를 이룬 별빛처럼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된다.

한편 동등성이라는 키워드를 푸는 다른 한 축인 퍼포먼스는 사회적 주제와 순수 미술의 영역을 훨씬 적극적으로 교차시킨다. 우연적이고 비물질적인 퍼포먼스는 (바느질 같은 비정통적인 수단을 활용하더라도) 독창성과 유일무이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오브제 포맷의 작품의 한계를 쉽게 탈피할 수 있다. 더욱이 미리 정한 퍼포머가 아닌 일반 대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면 작품을 통제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광주비엔날레에서 처음 선보인 <5100: Pentagon>(2014/2017)은 자원한 관객들이 5.18 광주항쟁을 모티브로 한 안무를 수행하는 퍼포먼스다. 참가자들이 매번 달라지므로 퍼포먼스 또한 매번 달라진다. 미술 밖의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스스로 작업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되면서 퍼포먼스는 미술관이라는 닫힌 범주에 작은 틈을 낸다. 광주의 아픈 역사를 제각기 되새김하는 현재의 각기 다른 타자들은 일시적이고 느슨한 작은 연대를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파문은 미술과 비미술의 경계를 지우며 참여자 각자에게 긴 여운을 남긴다.

최근작인 <Prayers>(2017)에서 자수와 퍼포먼스는 하나로 만난다. 작가는 전후 한국의 풍경을 기록한 뉴스 사진의 일부를 자수로 옮기고 이를 ‘그림 악보(graphic score)’ 삼아 연주했다. ‘사진 악보(photo-score)’라고 불리는 이런 방식의 작업은 남한과 남성 중심의 주류 역사를 다시 쓰는 행위기도 하다. 보도 사진의 메시지 전달과 무관한 사소한 세부는 기록되지 못한 역사의 일부다. 작가는 중심을 지우고 세부를 살짝 건져 올림으로서 역사 서술의 무게중심을 가볍게 전치시킨다. 이렇듯 작가의 자수를 통해 일차적으로 재기술된 역사는 악보가 되면서 또 한 번 크게 뒤집힌다. 악보는 하나더라도 해석은 연주자의 수만큼 무수히 분화된다. 퍼포머에 따라 달라지는 연주는 개인이 쓰는 역사의 또 다른 버전이다. 나의 경험과 너의 경험이 다른 만큼 내가 기억하는 2019년과 네가 기억하는 2019년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 그 무수한 기억들을 뒤로 한 주류의 역사란 그 얼마나 일천한가. 퍼포머에 따라 달라지는 해석은 끊임없이 흩어지며, 갈라지는 파본들의 이어짐 속에 나와 너, 남자와 여자, 한국과 외국을 뒤섞는다. 이 가운데 작가와 관객, 예술과 사회의 경계도 어느새 지워진다. 내가 쓴 역사와 네가 쓴 역사가 사이좋게 공존하며 합주하는 유쾌한 혼성의 장, 이것이 차이를 바라보는 홍영인의 관점이요, 그녀가 품는 희망일 것이다.

《올해의 작가상 2019》 전시에서 홍영인은 동등성의 개념을 인간을 넘어 비인간 행위자로 확장한다. 세 개의 신작으로 구성된 <사당 B>는 새와 동물을 주체로 놓아 강자(인간) 본위의 시각을 재고하고자 한다. 관객이 새장 안에 갇혀 새장 밖의 새들의 공간을 바라보는 역설적 상황이나 무던히 동물이 되고자 애쓰는 음악가들의 즉흥 연주, 여성의 노동과 동물의 몸짓을 흉내내는 퍼포머들의 안무는 기묘한 낯섦과 조우하게 만든다. 이 같은 불편함은 실상 필요한 감정이다. 한편으로는 타자가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케 하고 다른 한편 결코 완수될 수는 없을지언정 약자의 입장이 되어보고자 애쓰는 시도 자체의 가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지극히 특수한 동시에 보편적이고, 개별적이지만 집합적인 어떤 균형을 섬세하게 찾아가는 홍영인의 탐색이 보다 많은 이에게 공유되길 바란다. 여전히 이분법과 큰 목소리가 지배적인 한국에서 목적 없는 저항, 집단 아닌 주체, 구분이 아닌 공존은 너무나 드물고 희박한 가치다. 이번 전시가 그 진정한 급진성이 관객 각자의 마음속에 조용히 번지는 장관을 목격할 기회를 주길 바란다.

Critic 2

사당 B: 홍영인

사샤 크레덕 (평론가 및 독립 큐레이터)

 

사당은 제례 공간이다. 그러나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사당B’는 사당이라는 절대적인 상징이 내포할 수 있는 의미를 대체한다. 홍영인은 자신의 전시가 어떤 주제나 주제의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의 끝으로 기능하기 보다는 주제를 둘러싼 질문들에 대한 참여가 되기를 바란다. 사당 B는 사당 A, C, 어쩌면 D도 존재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여기서 사당은 유일한 것이 아니며, B는 다양한 범주의 일부이다. 따라서 ‘사당 B’라는 제목은 평행, 질서, 과정, 근거 같은 다른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다. 삶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펼쳐지는 듯 싶다

홍영인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적합한 매체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매우 노련한 작가이다. 세 작품으로 구성된 《사당 B》에서는 세 종류의 시점, 행위, 의식이 전시장의 세 섹션에서 전개되고, 작가 특유의 풍부한 레퍼토리는 즉흥 음악 연주, 바느질한 오브제, 녹음된 새소리, 안무된 동작이라는 다양한 형식을 통해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영속성의 개념은 일시성의 도전을 받는다. 자수, 콜라주, 걸개그림, 드로잉 작업의 주목성은 무심함으로 전환되어 마치 하늘이 스카이라인으로 보이는 상황을 모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물, 건축, 나무, 교차로 같은 것들이 2차원적 평면으로 전환되어 실루엣으로 그 실체를 담아내고 있다. 평면을 구성하는 선에 역할이 부여될 때 일상적인 것은 보다 장대한 연극 무대로 승격되거나 그 반대로의 격하도 될 수 있다. 최근 작업에서 홍영인은 옛 사진 속 사건과 인물의 실루엣을 추적하면서 격동과 분열로 점철된 지난 30년간의 한국사를 다루려 노력했다. 여기서 작가는 한국의 문화적, 민속적 도상을 활용해, 중요하지만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무언가를 마치 법의학적으로 파헤치려는 듯 싶다. 작가의 고향인 서울에서 일어난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투쟁들은 압축된 공간 혹은 경험으로 시각화된다. 작가에게, 어떤 사건이 단순하게 드러날 때는, 국가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의 영향을 경계해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홍영인이 발견된 이미지와 역사박물관 사진 아카이브를 분류하고 살피는 과정은 현재 본인이 거주하는 런던에서 거리를 두면서 유년시절, 청소년기, 학창시절의 기억들에 [그 이미지들이 합쳐져] 근본적이고 다층적인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된다.

한 쪽에서는 새가 불길하게 지저귀고, 다른 한쪽에는 음산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첫 번째 작품 <새의 초상을 그리려면>에서 작가는 자유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듯하다. 원하는 바를 무엇이든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새들이 높은 톤으로 지저귀는 이 거대한 새장은 당신이 여기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안에서 관객은 경이로운 전령 같은 자수 이미지들이 일련의 문장처럼 함께 모여있는 것을 마주하게 된다. 신념의 문제와 관련되는 이 작품은 종(種)의 위계, 예를 들어 동물 또는 새의 왕국에 존재하는 위계의 차이를 비교하고 궁극적으로 특정 인간을 다른 인간보다 우위에 두는 국가주의적 사고에 도달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자신들도 모르게 경계로부터 자유로운 새들처럼 평면적인 선으로 바느질된 새들과 실제 새의 그림자가 때로는 나란히 등장한다. 펭귄, 오리, 플라밍고 등 다양한 문화를 연상시키는 새들은 각 나라의 지역적 장소와 기후를 재현하는 듯하다. 단순하고 단정하고 섬세한 전통적 아이콘들에 붙여지거나 수 놓인 명확하고 은유적인 표현들은 새가 그 어느 권력 있는 사업가보다도 더 멀리, 더 오래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기존의 위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어디에도 무고함이란 없다는 듯 홍영인은 파괴, 보존, 취향, 역사, 정체성의 주제들을 그녀의 작업 안에서 추적하거나 흩뿌린다. 그러한 작업은 문화사의 가치, 역할, 흡수와 거부에 대한 질문들로 가득하다. 거대한 제국주의 풍경과 식민지 건물들에 대한 통제는 어떠했는가? 그것들은 붕괴되어야 했는가, 아니면 새로운 역사에 의해 덮여야만 했는가? 홍영인은 일제시대의 잔재로 완전히 파괴된 서울의 조선총독부 건물을 예로 들며 무척 불편해한다. 이 건물은 ‘아름다운’ 정원이 있어 어린 시절 작가에게 중요한 기억의 일부가 되었다. 정부는 조선총독부 건물이 ‘국가의 기의 흐름을 막는다’고 주장했고, 대중은 이에 동의했다. 외세의 지배를 상징하는 것에 대해 이견의 여지를 갖는 것은 불가능했고,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6년에 파괴되었다.

비록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사당은 여전히 구축된 구조물이다. 여기서 관객의 역할은 변화에 대해 적극적이며 입체적으로 질문하는 작가의 역할과 동일시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자체가 신념과 관련된, 종교적 유물로서의 중요성은 예술을 제작하고 영구화하는 전 과정에 수반한다. 나아가, 상당히 막연하기는 하지만, 가치라는 것이 물질의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다른 함축성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수반한다. 홍영인은 하나의 전체 구조물을 유희적으로 구축한다. 그리고 신념을 파기한다. [새장 안의] 그녀의 작업은 진실과 거짓을 동시에 말하는 예술을 동요시키면서 근대사가 드러나는 방식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홍영인은 역사가 변화의 필연성과 당대의 정황 때문에 돌진하는 역사적 구성 요소들을 고양시키는 것에 대해 다루고 있다. 누군가의 영웅이 궁극적으로 다른 이에게는 지옥의 화신일 수 있음에, 작가는 예술적 감각으로 의미를 구축해냄과 동시에 제사 의식의 의미성에 주목하면서 작업한다. 작가가 거리를 두고 그녀가 외부에서 관찰하는 한국은 엄격한 집안의 가장이 가족의 최상의 인상을 과시하고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다.

전시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관람객의 적극적인 개입은 시작된다. 홍영인은 복합적이고 밀도 높은 공간인 사당을 만들어, 여성이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한 가정의 아들들이 집례했던 유교의 조상숭배 의식을 추상적으로 제시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기반이 되는 주제의 일부인 여성 행동 방식에 관대한 사회적 기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관람객은 비록 자발적으로 전시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지만, 새장 안에 갇혀 관람을 시작하게 된다. 관람객은 불가항적으로 작품 속으로 들어가고, 작품에 둘러싸이며, 개입된다. 그다음 공간으로 진입했을 때 동일 관람객은 헤드폰과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듣는 관중으로 변화하도록 이끌린다. 두 번째로 만나는 작품 <하얀 가면>은 [음악이라는 점에서] 전달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직접적이지만, 작품과 작가의 관계는 복잡해진다. 런던의 ‘노트 이네갈’(Notes Inégales)이라는 유명 그룹과의 협업 과정에서 연주자들에게 작가의 설명 내용을 따르도록 요청 혹은 지시하는 과정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홍영인은 음악가들에게 각자의 클래식 악기 연주를 통해 동물되기를 재체현하거나 그들 머릿속에서 동물되기를 온전히 실현하기를 부탁했다. 연주자들은 음악을 통해 동물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거나 동물이 되었고, 명료한 결과를 보여준다. 이들은 가장 진지하고, 솔직하며, 창의적인 협업과 즉흥 연주를 통해 음악을 만들어 내었고, ‘사실 우리 인간은 이미 동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홍영인은 재능 있는 음악가이기도 하다. <기도>(2017), <하늘에서 내려다보면>(2017)과 같은 최근 작품들에서 서울의 역사 사진 속 실루엣을 추출해 악보를 만들고 연주했다.

<비-분열증>을 전시하는 공간은 벽면에 투사되는 퍼포먼스 영상과 로비 및 전시장 밖의 불특정한 장소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 스케줄을 알리는 자수로 된 안내판으로 구성된다. 퍼포먼스는 옛 사진 속에 등장하는 여성 공장 노동자들의 반복적 동작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다. 퍼포머들은 근대사에서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복종하고 따라야 했던 지시를 실연해 보이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견한 이미지 분석에 기반해 홍영인은 퍼포머들 및 안무가와 협업해 동작들을 구성하는데 여기에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몸짓은 물론 더 ‘가치 없다고’ 여겨지는 동물과 새의 움직임을 차용한 안무이다. 작가는 자신들의 노동이 남성의 노동보다 저급하다는 인식을 극복하려는 여성들의 투쟁을 실제로 인지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안무 움직임은 모든 시도들을 총괄하여 아래를 보고, 위를 올려다보고, 심지어 종(種)의 차이를 넘어 여기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자 노력한다, 거기에는 보다 나은 소통 방식이 있고, 존재 방식이 있지 않을까. 홍영인은 온라인 프로젝트 홍보와 모집 광고를 통해 현대무용가, 연극배우, 일반 대중, 대학생, 고등학생 등을 모집했다. 이렇게 구성된 전문가와 혹은 비전문가로 구성된 자발적 참여자 그룹의 집단적인 동작은 강력하고 감동적이다. 퍼포머들은 6~7명으로 구성된 두 그룹으로 나뉘어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로 ‘우리는 항상 웃어야 했음’을 역설한다. 근대사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이름이 아닌 숫자로 불리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들은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는지 모른다. [이 전시에서] 각각의 작업은 서로 다르면서도 연결되어 있다. 퍼포머들의 어조는 동등성을 지향하지만, 그것을 보고 있는 혹은 거기에 있는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한다. 퍼포먼스 프로그램은 전시장 내부가 아닌 외부 공간 어딘가에서 진행되고 그것은 나아가 홍영인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 그리고 그녀가 현재 작가로서 개입하는 장소로 작품을 불러온다.

홍영인의 작업은 실제의 재현뿐 아니라 그것의 작용 방식을 협상하면서 다소 복잡하지만 분명하게 명백히 신뢰할 만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상당 부분 과거와의 불안정한 관계에 기반하며, 그러한 관계가 회화적인 혹은 감성적인 언어로 바라보고, 보존되고, 재고되거나 관찰되는 다양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작가는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갈구하면서 그것이 추적 가능하고 식별되는 것이라면 주변에서 기능할 수 있는 무엇이든 취해서 변환시킨다. 예를 들어 사진 속 수평선의 윤곽은 작곡에 응용되고, 재봉틀은 악기로 변하며, 수를 놓거나 투사되고, 그려지거나 콜라주 된 새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전하는 조짐이 되며, 동시에 가두어진 열망의 재현이 된다. 그 열망은 자신감 있고, 발랄하게 고무적이며, 정치적 의지를 기획하는, 열린 응시를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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