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요

이주요
이주요(1971~)는 대표작 <나이트 스튜디오>, <Two>, <Commonly Newcomer> 등의 작업을 통해 가변적이고, 임시적인 그리고 견고하지 않은 일상 재료들의 심리적, 물리적 조합들로 사적인 경계와 공적인 경계가 교차되는 지점에서 사회와 그 주변부에 존재하는 것들에 가치를 담는 작업을 해왔다. 작가는 국내외를 오가며 전시뿐만 아니라, 공연, 출판 등 폭 넓은 행보를 보이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다.

Interview

CV

<주요 개인전>

2017
BARBED, Wilkinson Gallery, 영국, 런던
2015
OF PICTURES, Sophie’s Tree, 미국, 뉴욕
DEAR MY LOVE, Ursula Walbrol Gallery, 독일, 듀셀도르프
2014
COMMONLY NEWCOMER, 퀸즈뮤지움, 미국, 뉴욕
JEWYO RHII, Wilkinson Gallery, 영국, 런던
2013
나이트 스튜디오, 아트선재센터, 한국 서울
WALLS TO TALK TO, MMK, 독일, 프랑크푸르트
WALLS TO TALK TO, 반아베뮤지움, 네델란드, 아인드호벤
2012
WALL TO TALK TO, Ursula Walbrol Gallery, 듀셀도르프, 독일
2010
Project, 나이트 스튜디오, 이태원 스튜디오, 한국, 서울

<주요 단체전>
2017
DAWN BREAKS, SHOWROOM, 영국, 런던
도운브레익스 서울, 아트선재센터, 한국,서울
2016
11회 광주비엔날레, 제8기후대, 한국, 광주
2015
LE SOUFFLEUR : SCHURMANN MEETS LUDWIG, 루드위그 포럼, 독일, 아헨
DAWN BREAKS-UNKNOWN PACKAGES, 퀸즈뮤지움, 미국, 뉴욕
DAYS PUSH OFF INTO NIGHTS, Spring, 홍콩
2014
BOOM SHE BOOM, MMK소장전, 독일, 프랑크푸르트
2013
SOME END OF THINGS, 스위스, 바젤 쿤스트 뮤지움
2012
THE RIVER PROJECT, Campbelltown Arts Centre, 호주, 시드니
아마추어리즘, 하이델베르그 쿤스트베라인, 독일, 하이델베르그
리오프닝, 두산갤러리, 서울
2010
THE RIVER PROJECT, Campbelltown Arts Centre, 호주, 시드니
미디어시티 서울, TRUST, 한국, 서울
2009
EVERYDAY MIRACLE(EXTENDED) Walter and McBean 갤러리, 샌프란시스코
EVERYDAY MIRACLE(EXTENDED)II, REDCAT, 로스엔젤레스

<주요 수상>
2010
제3회 양현미술상, 서울

<퍼포먼스>
2017
십년만 부탁합니다, 퍼포먼스, 남산예술극장
2016
십년만 부탁합니다, 퍼포먼스, 문래창작센터

<레지던시>
2015
아티스트 레지던시, 퀸즈뮤지움, 미국, 뉴욕
2009
두산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 미국, 뉴욕
2005
아티스트 레지던시, 라익스 아카데미, 네덜란드, 암스텔담

<소장처>
매일유업 컬렉션, 서울
아트선재센터, 서울,
쌈지아트컬렉션, 서울
두산아트센터, 서울
반아베뮤지움, 에인트호벤, 네덜란드,아인드호벤
빌헬름슈만 컬렉션, 독일
마그데부르크 미술관, 독일, 마그데부르크
프랑크푸르트 현대 미술관, 독일, 프랑크푸르트

Critic 1

불확실한 정령이 범람하는 세계 한가운데서 외치다.
: “Love your depot!”

심소미 (독립큐레이터)

 

언젠가부터 세계는 고정성보다는 가변성을, 견고함보다는 유연함을, 정주보다는 이주의 경로를 따라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온갖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것들이 범람하는 세계의 단면은 미술계 안에서도 꽤 선명한 편이다. 전 지구적 물류 시대에 로지스틱스의 선언처럼 “이동이냐 죽음이냐”1의 문제는 미술의 생산 방식에 있어서도 가시적 흐름으로 포착된다. 상품의 경로처럼 이동하지 않으면 죽는 시대에 예술이 처한 미학적 조건과 실천의 방향은 어떠한가? 순환하기 위해서 민첩히 움직이며 생산 활동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경제 가치에 부합하는 작업을 생산할 것인가? 혹은 이상적인 예술 환경이라 생각하는 전 지구적 순환, 바로 글로벌 공급 사슬을 희망하며 작업할 것인가? 노마딕한 궤도로 작업을 해온 이주요는 앞선 언급 중 마지막 사슬, 바로 글로벌 순환 회로에 있던 몇 안 되는 한국 작가 중 한 명이다.

90년대 후반 한국미술이 국제적 도약을 위해 스펙터클한 물질성과 정치사회적 조건에 주목할 때, 이주요는 일찌감치 이러한 입장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중심보다는 주변부, 예술보다는 일상, 완고함보다는 약함, 형태보다는 상황과 사적인 관계에 집중해왔다. 작가는 제도와 개인 사이의 어긋남, 환경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는 개인의 심리를 작업으로 포용하면서 불안한 현재와 유예된 미래에 맞서왔다. 오늘날 불확실한 정령이 세계를 지배해 버린 시점에 있어, 이주요의 작업을 다시 이곳으로 소환하는 일은 한 개인의 서사를 넘어선다. 이 영역은 예술 생태계 전반에 거쳐 미술 제도, 예술 생산의 조건을 검토하는 것과 연결된다. 그간 작가의 작업이 미술과 사회에 주어진 익숙한 규범에도 진지하게 반응 혹은 대응하며, 자신에게 들어맞지 않는 불편한 상황을 오브제 및 구조체의 형식으로 드러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로 자신의 일상과 장소에 기반을 둔 그녀의 작업은 전시로 마주하고 나면 매번 어디론가로 흩어져 버렸다. 그렇다고 작업이 전시 후 즉각 폐기되거나, 소멸하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임시적 구조의 작업은 카트에 실려 작가와 함께 세계 여러 도시를 떠돌기도 하고, 누군가의 살림살이에 잠시 맡겨진 채 낯선 장소와 타인의 삶을 배회하기도 했다. 그녀의 작업은 위기가 닥치면 금방이라도 해체 가능하도록 투박하게 제작이 되어, 오히려 변용의 가능성을 내포하면서 그 삶을 끈질기게 지속해왔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듯 작가의 오브제들은 자신의 몸체도 조금씩 변형하고, 배치 또한 변화하면서 나름의 생존 방법을 터득해 나갔다. 이때의 임시적 구조는 세계의 완고함과 고착된 제도에 대항하는 나름의 미시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멈추지 않는 이동과 임시적 상태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미래로 유예시켜왔다.

근 20년 간 작가의 활동은 한국, 미국,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 초국적 이동 경로 속에서 이뤄져 왔다. 그녀가 여러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열린 전시와 전시 사이의 궤적, 한 장소와 다른 장소 사이의 여정은 전시의 상황에도 고스란히 담긴다. 2006년 서울 사무소(SAMUSO)에서 가진 개인전 《이주요》는 암스테르담에서 2년간 한 작업들이 카트에 실린 채 이동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 바 있다. 한참이 지나 2013년에 열린 아트선재센터에서의 개인전에서는 2010년 이태원 작업실에서 시작된 개인전 《나이트 스튜디오》가 이후 네덜란드, 독일의 개인전을 거쳐 2013년 한국으로 돌아온 여정을 작업으로 트래킹 하듯 이동과 변형의 흔적을 담아낸다. 당시 개인전을 한 반 아베 미술관(Van Abbe museum)의 디렉터 찰스 에셔(Charles Esche)가 주목하듯,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 한 도시에서 또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불편한 상황에서도 이주요의 오브제들은 임시변통의 기지를 발휘하며 변화와 변용의 상황, 시공간의 흐름을 내밀한 목소리로 품어왔다.2 이주요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불확정적 구조체의 힘은 그 자신을 현실 속에서 적응하고 지탱하는 데만 있지 않다. 허약하다는 말은, 부서지기 쉽다는 말이 아니다. 그녀는 이동할 때마다 이전의 장소에서 지탱할 수 없는 삶의 흔적, 유예된 운명을 이끌고 그다음의 장소로 자신의 시간을 견고하게 이어 나갔다.

이후 이주요의 활동은 동료들과의 관계 속에서 친밀한 연대와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데 집중된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만 있지 않듯이 그녀는 타자와의 연대를 통해 소수화된 목소리를 모으고,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공동의 무대를 차츰 마련해 오고 있다. 이주요가 정지현과 함께 뉴욕, 광주, 서울, 런던을 이동하며 선보인 《도운 브레익스(Dawn Breaks)》(2015-2018)에서는 아예 자신의 작업을 영아티스트를 위한 무대로 열어두며, 2017년 남산예술센터에서의 공연 《십년만 부탁합니다》에서는 십 년 전 개인전 후 위탁자들에게 맡겨둔 오브제의 흩어진 스토리를 불러 모으기도 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현실에서 정주할 수 없는 사물(존재)의 살아 움직이는 영토이자 무대로 타인의 시간과 조우하기도 하면서 지속되어 왔다. 이주요가 십 년간 떠나보낸 오브제들에게 건넨 안부처럼, 나는 이 글을 통해 이동의 궤적 어딘가에 있을 그녀에게 외쳐본다. 컴백(Come Back)! 이 간절한 외침은 2000년 초 이주요가 한강에서 한 작업(<한강에 누워>, 2003-2006)을 떠올린 것이다. 과거의 헤어진 연인에게, 만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보낸 간곡한 메시지 마냥 그녀를 향해 외쳐본다. 그런데 온갖 임시적이고 일시적이며 휘발하는 것들이 넘쳐나는 이곳에 이주요를 다시 호명하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90년대 이미 전 지구적 순환 시스템을 예감한 선지자로서 혹은 불확실한 세계의 일면을 일찍이 시각언어로 구축해온 작가로서 명시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녀의 떠남과 돌아옴 사이에 남겨진 반짝이는 스토리, 혹은 글로벌 서사의 잔여물을 동시대 한국미술의 궤적으로 엮어내고 싶은 것일까?

이 막연한 소망은 작가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단순한 꿈에 불과했다. 2019년 이주요는 돌아 왔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다. 그녀가 떠날 때마다 삶을 연장해왔던 오브제들과 함께 돌아 왔다. 지탱해온 시간과 이동의 궤적을 대변하듯 오브제들은 국제 운송용 목재 크레이트에 담겨 비장한 모습이다. 4개의 크레이트는 뒤셀도르프, 런던, 뉴욕, 서울 어딘가에서 출발하여 각기 다른 로지스틱스에 의해 종착지인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장으로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운송된다. 이 더미들은 한 예술가의 전 생애가 담긴 예술 작품인 동시에 상품경제 시스템에서 유통될 수 없기에 잉여로서 남겨진 것들이다. 박스와 창고의 어둠 속에 갇혀, 유예된 생이 언젠가는 발굴되길 한없이 기다리는 절박한 운명에 처한 것들이기도 하다. 이 크레이트 박스의 어둠 속에는 전시라는 찬란한 쇼가 은폐하는 예술 작품의 진짜 현실이 숨겨져 있다. 작업을 지속한 만큼 거대해진 작가의 작품 더미 앞에서 과연 예술 작품의 현재적 삶이 어디에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박스가 열리길 기다리며 수년을 어둠 속에 갇힌 예술 작품이야말로 가장 리얼하지 않은가? 공급되지 않을 경우 창고에서 그 생을 연명할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인 세상이다. 이 상황조차도 불가능한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 후 무수히 폐기되어왔다.

이렇듯 현시점에서 이주요를 소환하는 작업은 동시대 미술 작가 생존 모델과 미술 제도, 글로벌 시스템의 양가적 관계를 추적하는 일과 같다. 오늘날 동시대 미술계를 구성하고 작동하는 핵심 시스템은 공급 사슬망에 있다. 상품과 자본의 순환 시스템에서는 수요/공급 모델이 이윤의 추구와 축적 하에 작동하지만, 공급과 수요가 서로 맞지 않는 미술계에서는 수요의 역할을 메우기 위해 공급 사슬망이 더 부지런히 움직이는 편이다. 최근에 미술 제도의 역할이 증대되고 다변화되는 것은 결국 이 사슬망을 유지하기 위한 요구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동시대 작가(다른 말로, 생산자, 창작자, 행위자)는 공급 중심의 순환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생산을 멈출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심지어 더 빨리 생산하고 민첩히 순환하기 위해 견고한 물질성을 포기해야만 하는 게 현실의 실정이다. 작가는 이를 모른 척하면서 자신의 작업을 묵묵히 해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주요는 여기서 잠시 그동안 해왔던 작업을 멈추고,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 작가, 그리고 당장 작품을 폐기할 수밖에 없는 젊은 조각가의 생존을 위해 냉철한 플랫폼 설계자가 되어 미술 생산의 조건과 한계에 맞서기로 자청한다.

그리하여 이주요가 마련한 《Love your depot》은 그간 창작에만 집중되어온 예술의 상상력을 대안 경제 시스템에 접목한 것으로, 예술 작품의 지속가능한 시스템과 인프라에 더불어 콘텐츠를 구상하고 실험하는 플랫폼이다. 4개월 간 미술관은 관람이라는 주어진 조건에서 벗어나 현실에서부터 방기된 예술 작품을 위한 ‘대안 플랫폼’이자 ‘살아있는 창고’로 변모된다. 이 창고는 컴컴한 어둠의 공간, 공급과 수요를 마냥 기다리며 방치된 공간이 아니다. 어둠을 뚫고 나와 그 자체로 있는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어 사람들을 맞이하고, 이와 관련한 이차적 활동과 콘텐츠로 소통하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창고이다. 작가는 이를 이번 전시만이 아니라 3년간의 작업으로 수행할 계획을 세움으로써, “Come Back!”의 외침을 일시적으로 수용하거나 우회하지 않고, 가장 현실적이고 용기 있는 응답으로 대응한다. 미술 제도와 생태계의 모순과 한계,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술가가 지켜내야만 하는 창작의 윤리와 환경을 재점검하고, 한시적으로 유예되어 온 운명에 맞설 대안 플랫폼을 함께 발명해보는 것이다. 이 ‘살아있는 창고’가 우리에게 엄습한 불안을 이겨낼 새로운 영토로서, 불확실한 현재를 지탱하고 미래의 시간을 함께 축적해나갈 수 있길 지지해 본다.

 


1. 데보라 코웬, 『로지스틱스』, 권범철 옮김, 갈무리, 2017 참조.
2. 찰스 에셔, 「남은 것은…… (사람과 사물의) 양가적 관계들」, 『이주요: 나이트 스튜디오』, 박상미∙이성희∙조셉 풍상 옮김, 사무소, 2013, pp101-113.

Critic 2

전시 이후 작품들은 어디로 가는가?

찰스 에셔 (반아베 미술관 디렉터)

 

작품은 사람이 아니다. 예술 작품은 그 말의 일반적인 의미로 보아도 살아있는 것이라 볼 수 없다. 예술 작품은 비활성의 물질 또한 아니다. 세상의 원재료들은 예술가의 작업을 통해 의미와 일관성을 지닌 무언가로 바뀐다. 이것은 연금술과도 같이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쳤을 사물이나 물질을 변환하여 그 가치를 환기한다. 미술작품이 전시되어 관객에게 예술로 인식되면, 이는 집합적 문화의 한 자료로서 새로운 지위를 획득한다. 개별 작품에는 보존을 위한 적절한 보살핌이 요청되는데, 사회가 이에 필요한 조건을 기꺼이 제공하는 것이 이상적이라 할 것이다.

특정 작품이 가지는 ‘예술’로서의 정체성은 작가는 물론 무수한 사람들이 작품을 접하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작품은 겸손하지만 필연적으로 인간 표현의 역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여기서 작품의 운명에 대한 새로운 책임이 발생하고 이는 작가 개인에서 점차 사회 전체로 이관되고 공유된다. 예술 작품은 이렇게 한 공동체의 유산(heritage)이 되고, 이는 구성원간의 가치와 상호존중을 협의하는 길이 된다. 또한 이 유산은 개인은 누구인지, 무엇이고 어디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상식을 형성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인류의 문화 공동체는 문화와 역사의 한 시점에서 생산된 예술 작품과 또 다른 시점에서 나온 예술 작품들을 통과하면서 스스로 무엇인지 정의하는 방법을 배운다. 실제로 예술 작품은 공동체와 그 근원을 정의하고 공동의 목적지를 밝혀 주기도 한다. 이렇게 모든 예술 작품은 인류 문화의 유산이 되는 긴 여정을 떠날 것이고, 각자의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대개 그 시작은 매우 위태롭다. 이주요의 프로젝트는 바로 이 초기 단계에서 시작한다.

이주요의 <Love Your Depot>는 예술과 사회 서비스에 대한 제안이자 프로토타입이며 자칫 버려질 수 있는 작품을 돌보는 방법이다. 작가로서 이주요는 예술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필요한 신체와 감정 노동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 또한 교육자로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고 변형하는 예술의 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인력과 자원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 남과 다른 것을 배척하고, 정형에서 위배되는 것들을 몰아내려는 시장 경제와 도시 개발에의 강한 요구에 저항하는 동료작가들의 투쟁을 목도하였다. 효율성에 대한 인류의 집착은 예술 작품이 공동체의 이익과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는데 부정적 영향을 주고 예술가들에게 실존적인 어려움을 주었다. 예술 시장에 부적합한 예술가와 예술작품에 부적합한 시장이 만나면 서로의 가치를 폄하 하고 반목하며 투쟁하는 최악의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가치들은 반드시 경쟁하거나 서로 관련되지 않고도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는 것이다. 가치와 돌봄의 수평적 체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상호 공존은 매우 실용적인 선택이자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이다. 이주요는 <Love Your Depot>에서 필자가 아는 한, 상호 공존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대응을 제안하였다.

많은 이들이 근래의 유산을 보존할 사회적 책임을 위임 받은 제도가 미술관이고, 이곳에서 갈등이 해결될 것이라 기대한다. 이러한 점에서 미술관은 시장 경제 법칙의 예외가 되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 반대의 상황으로 가고 있다. 많은 미술관들은 외부 기업의 성패에 예산이 좌우되는 사적 주체이다. 시(市) 또는 주(洲)의 세금을 지원받아 재정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미술관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지난 30년간 시장의 우위에 구조적으로 압도당했고, 예술 시장의 기호를 따르거나 다수의 부유한 계층의 관심을 끌도록 창작된 작품을 수집하면서 시장의 언어와 가치 관념을 받아들였다. 이제 예술이 온전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단일한 사회와 문화를 기반으로 한 제도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일부 미술관들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는 가운데 <Love Your Depot>가 요구한 것 같이 대안적이고 수평적 체계를 제공하는 장소가 절실해졌다.

우리는 <Love Your Depot>의 프로토타입이 미술관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곳, 그러니까 외부의 상업적인 요구와 분명히 구별된 잠재력을 가진 공간에 <Love Your Depot>가 있다. 이들은 미술관에 이미 존재하는 규칙과 규정, 그것이 야기하는 많은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이곳에 집을 지으려고 한다. 이 시도는 미술관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와 미술관이 실제로 처한 현실 사이의 간극을 잘 보여 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예술가들로 하여금 작품을 제작하는데 영감을 주고,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을 돌보고 지원하며, 보존하는 힘과 능력을 가진 곳으로써 미술관을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궁극적으로 우리는 미술관이 구체적이고 비(非)이데올로기적인 경험을 공유한 관객들과 21세기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미술관에게는 충분한 시간과 자원 뿐 아니라 사회의 관심과 이해가 필요한데 <Love Your Depot>는 바로 이러한 조건을 구체화한 제안이다. 미술관의 이상은 사람들의 창의적 표현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포용하여 현재와 미래 세대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주요는 지금 당장의 생존 경제학을 넘어 유효하고 가치 있는 사고를 원하는 사람들을 향해 말하고 있으며 <Love Your Depot>를 통해 미술관 제도에 새롭게 필요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다.

전시 이후 어디론가 보내지고 때로 폐기되기도 하는 미술 작품과 전시의 물리적 과정은 대중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주요는 이번 설치작업에서 전시 이후 작품의 모습과 그것을 돌보기 위한 과정들을 관객의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 보인다. 그는 여러 종류의 보관과 진열을 위한 장치를 전시하고 때로 가능한 높게, 최대한 많이 작품들을 수용하도록 하는 설치 방식으로 작가가 대면하고 있는 짐/부담(burden)의 실체를 명확히 보여준다. 작품의 보관 장치들은 야심차게 조각의 외양을 취하면서 미술관의 통상적인 구분법을 허물고 예술 작품의 정의에 의문을 제기한다.

같은 의문을 제기했던 앞선 예술가들이 있음에도 우리가 <Love Your Depot>에 주목하는 것은 이 전시가 보관의 형식적 측면에만 머물지 않고, 보관하는 동안 작품의 삶이 확장 될 수 있는 실용적 방법을 제안한다는 것이다. <Love Your Depot>에서 팀디포(TeamDepot)는 전시장 안에 작업공간을 짓고 각자의 채널을 운영한다. 창고 안에 보관된 개별 작품의 의미와 해석에 대한 질문을 다루는 팀디포의 젊은 창작자들은 친밀하고 설득력 있는 중개자이다. 이들은 유튜브 등의 미디어를 통해 활동하며 창고에 보관된 작품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분주하게 움직인다. 이 같이 사적이며 주관적인 형식의 작품 해석 앞에서 미술관은 더 ‘중립적’인 곳이고 제도적인 담론을 위한 장소라는 스스로가 가진 인식의 한계를 대면하게 된다. <Love Your Depot>가 최종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열린 수장 공간에서 한 작품이 다른 작품 옆에 임의적으로 배치되고 그 사이의 연결이 형식이 되는 공동의 서사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미술관 큐레이터의 역할과 유사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서사가 바로 이 현장에서, 작품을 보는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 생성된다는 것이다. 앞서 보관 장치와 작품의 해석 방식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주요는 전시 중 일어나는 과정을 통해서도 미술관 관행의 한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게 하고, 예술이 그 사회의 잠재적 가능성을 촉발하기 위해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묻고 있다.

미술관과 아카이브는 <Love Your Depot>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의 진정한 관심은 예술가가 독립적 개체이자 감정의 주체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술가는 연약하고 위험에 처할 수 있는 것과 동시에 잠재적으로 강력하고 중요한 행위자로 제시된다. 이 연약함(또는 불안정함)은 예술가들이 처한 독립적 상태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대체로 다른 문화 생산자나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사회적 장치의 밖에 위치하며 어떤 제도적 지원 없이 스스로 생계를 꾸리고 각자의 작품을 지키도록 되어 있다. 반면 예술가들은 각자의 독립적 상태 때문에 남과 다른 삶과 인류에 대해 통찰력을 얻어 나간다. 물론 이것도 그들에게 충분한 공간과 시간이 허락되는 경우에 한해서 가능할 것이다. 제도적 장치가 없는 이러한 상황은 예술가에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스스로 모든 정신과 감정을 쏟아 부어 만들었을 과도기적 작업들을 폐기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면에서 <Love Your Depot>는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존중과 배려, 그리고 시간을 달라는 절박한 호소이다. 이것이 예술가들이 최선을 다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더 생존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할 때까지 작품의 삶을 연장하도록 지원하는 구조를 만들어 내면서, 이주요는 불안정한 상태에 어떤 위안을 제공하려 한다. 중요한 것은 이주요의 제안이 작품의 영구적 보존이 아니라는 점이다.

<Love Your Depot>는 스스로를 시간이 제한된 구역으로 제시한다. 그 안에서 작품을 만든 예술가는 작품이 존중 받으며 폐기되도록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다. 이러한 사려 깊은 폐기는 이주요의 프로젝트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일부이다. 따라서 <Love Your Depot>는 작가의 작품이 언제 보편적 의미의 예술이 되는가, 또 그것이 과연 예술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려하고 성찰하는 동안 작품의 죽음을 유예시키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이 장치는 예술 작품이 만들어진 후 작품이 작가가 바라는 대로 되어가는 사이의 시간을 이해하고 인간이 각자의 유년기를 보살피는 것처럼 작품들을 보호한다. 논의의 시작점으로 돌아가서, 예술작품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주요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듯 작품을 다룰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인간의 사려 깊은 태도와 존중감을 환기하며 우리에게 주변의 사물과 사람의 가치를 재고하게 하는 시작점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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