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기

이슬기
이슬기는 인간의 생활과 직접 관련된 사물과 언어, 자연에 대한 관심을 조형적 조각이나 설치로 표현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그는 특히 민속에서 소재를 얻어 공예 장인들과 협업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하는데, 통영의 누비 이불 장인, 멕시코의 전통 바구니 조합 장인들과의 협업 등이 대표적이다.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으며, 파리 국립예술센터와 호주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Interview

CV

이슬기 (1972. 한국. 프랑스 파리 거주)

교육
2000
파리 국립 고등미술학교 졸업, 파리, 프랑스

1999
시카고 예술대학 교환학생 프로그램 이수, 시카고, 미국

개인전
2020
《WE ARE NOT SYMMETRICAL》, 까사 데 세르카, 리스본

2019
《SOONER’S TWO DAYS BETTER》 라 크리에 아트센터, 렌느
《Machruk》, 라파르망22, 라바트
《Depatture》, 샤펠 잔다르크 아트센터, 투아르 2018
《다마스스》, 갤러리현대, 서울

2017
《DAMASESE》, 갤러리 주스 앙트르프리즈, 파리

2016
《메아리》, 신도문화공간, 서울
《SOUP》, 갤러리 HO, 마르세유

2015
《분화석!》, 미메시스 아트뮤지엄, 파주

2009
《IDEM》, 라 페름 드 뷔송 아트센터, 누아지엘

2008
《AUTOMATIC: homage au voleur》, 갤러리 콜렛파크, 파리

2004
《무형경제》, 쌈지스페이스, 서울

주요 단체전
2020
《ᄀ의 순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서울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부산비엔날레 2020, 부산
《내 나니 여자라》,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수원
《Ruch-Hive》, 마니페스타 13, 마르세유
《HYUNDAI 50》, 갤러리현대, 서울
《Reality Is Not What It Seems》, 갤러리 주스 앙트르프리즈, 파리
《Home is a home is a home is a home》, 갤러리 주스 앙트르프리즈, 파리

2019
《신물지》, 우란문화재단, 서울

2018
《장식의 힘》, KCDF 갤러리, 서울
《AFFINITé(S)》, 갤러리 주스 앙트르프리즈, 파리
《Navigator Art on Paper Prize》, 치아도 8 피젤리다지, 리스본
《L》, 샤또 드 랑티유, 뷔시-생-마르탱

2017
《달의 이면》,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Voir Une Poule Pondre Porte Chance》, 팔래 드 도쿄, 파리
《Zigzag Incisions》, CRAC 알자스, 알트키르슈 /SALTS, 비르슈펠덴

2016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 갤러리현대, 서울
《Potential Visual Evocations》, 플로렌스 로위, 파리
《The House Is Looking for an Admiral to Rent》, 부쿠레슈티 국립현대미술관, 부쿠레슈티
《Monstrare, l’Ermite au blazer raisin》, 샤펠 잔다르크 아트센터, 투아르
《Close Encounters》, 프랙티카블, 렌

2015
《Korea Now!》, 장식미술박물관, 파리
《Séoul, Vite Vite!》, 릴3000, 릴
《N’a pris les dés》, 갤러리 에어 드 파리, 파리
《Le Mauge》, 줄리앙 그락 공립고등학교, 보프로

2014
《Black Coffee》, 25 rue du Moulin Joly, 75011, 파리
《터전을 불태우라》, 제10회 광주비엔날레, 광주
《KUL LE ON HO BAK》, 생티카 포텐시엘, 스트라스부르
《Anti-Narcissus》, CRAC 알자스, 알트키르슈

2013
《Keep Your Feelings in Memory》, 국립 레지스탕스 박물관, 에슈-쉬르-알제트
《We Gave a Party for the Gods and the Gods All Came》, 갤러리 아르코, 느베르
《픽션 워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La vie des formes》, 알바트와 현대미술관, 툴루즈
《This & There》, 리카르재단, 파리
《Intense Proximity》, 라 트리엔날레 2012, 팔래 드 도쿄, 파리

2011
《Les Innommables grotesques》, 갤러리L md, 파리
《Basket Not Basket》, 갤러리 주스 앙트르프리즈, 파리
《La formule du binôme》, 레 쟁스탕 샤비레, 몽트뢰유

2010
《Plastique danse flore》, 베르사유궁 킹스키친가든, 베르사유
《사운드 이펙트 서울 2010: 장소특정적 소리》, 상상마당갤러리, 서울

2009
《Evento 2009: Intime collectif》, 라 비엔날, 보르도
《플랫폼 인 기무사》, 옛 국군기무사령부, 아트선재센터, 서울
《여기로부터》, 경기창작센터, 서울

2008
《연례보고》, 제7회 광주비엔날레, 광주
《En marche》, 갤러리 익스테리에, 파리
《B Side》, 갤러리현대, 서울

2007
《Elastic Taboos》, 쿤스트할레 빈, 비엔나
《We Can’t Be Stopped》, 갤러리 누크 / 발-드-마른 현대미술관, 발-드-마른

2006
《A Question(ing) of Gesture》, 라이프치히오페라하우스, 라이프치히

2005
《Attention à la marche: histoires des gestes》, 누와지-르-섹 현대미술센터, 누와지-르-섹
《Almost Something》, 플럭스 팩토리, 뉴욕

2003
《Propaganda》, 에스파스 폴 리카르, 파리
《May Your DV Be with You》, 팔래 드 도쿄, 파리

2002
《Korean Air France》, 글라스박스, 파리 / 쌈지스페이스, 서울
《Anomalie Italienne》, 스페이스리마, 밀라노
《Domino Party》, 글라스박스, 파리

2001
《Traversée》, 국립근대미술관, 파리

1997
《FLIRT》, 인포존, 파리

주요 레지던시
2009
경기창작센터, 안산

2004
쌈지스페이스, 서울

주요 수상
2015
신도리코 미술상, 한국

주요 프로젝트
2019
이케아 아트 러그 프로젝트, 스톡홀름

2017
Collaboration édition d’artiste, 에르메스, 파리

2016
PETITE DENT, 국립 고블랭 타피스트리 제작소, 파리

2014
파리 국립 조형예술 및 그래픽예술 재단, 파리

2002
Le collège invisible, 마르세유미술학교

2001
Le pavillon, 팔래 드 도쿄, 파리

주요 소장처
미메시스뮤지엄
국립 고블랭 타피스트리 제작소
빅토리아국립미술관
페이 드 라 루아르 지방의회
모쥬공립고등학교
프랑스 지역자치단체 현대미술 컬렉션(FRAC)

Critic 1

촉각적으로 말하기, 시각적으로 듣기: 이슬기의 작업

양옥금(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이슬기 작가는 서울에서 태어나 1990년 초 파리로 이주한 이후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공예와 조각, 대중적 디자인과 민속적 요소들이 결합된 혼성적인 작업들을 지속해 왔다. 전시와 다양한 협업, 그리고 공공 프로젝트 영역을 아우르며 활발한 작품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직접 대안공간 파리 프로젝트룸(Paris Project Room)을 설립하고 운영하기도 했다.

지난 2018년 작가의 개인전인 <다마스스(DAMASESE)>에서 보여준 이슬기의 대표작인 <이불 프로젝트: U>는 한눈에 화면구성과 시각적 기호들이 기하학적 추상의 계보를 잇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싹이 노랗다”, “우물 안 개구리”, “엎질러진 물”, “독수공방”, “내 코가 석자”와 같은 작품의 제목들은 이러한 강렬한 시각적 요소들을 뚫고 우리가 더욱 명쾌하게 작업에 다가갈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한다. 누빔천 이불 위에 견고하게 지어진 기하학적 추상 면과 문양들은 작품의 제목인 ‘속담’과 결부되면서 어떤 한 공동체가 지닌 집단의식이 내재된 속담의 서사와 함축을 간결하고 명징하게 드러나게 한다. 아를렌 베르셀리오 쿠르탱과 이슬기의 글에서 “속담은 어떤 상황, 그림을 통해 구축되는 하나의 은유이다. 사람들은 속담을 믿으면서도 믿지 않는다. 속담은 우리의 무의식을 움직인다. 어떤 형태, 기호들을 함께 알아보기 시작하는 순간 공동체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어디서 태어났던 상관없이 말이다.”고 언급한다. 겹겹이 쌓인 시간의 집적을 통과하면서 증발되지 않고 살아 있는 설화와 속담이 가진 함의는 이슬기의 작업에서 통영 누빔 공예장인과의 협업을 통해 수공적인 방법으로 시각화된다. 작가는 ‘이불’에 대해 “꿈과 현실의 경계선인 장소이자, 꿈에 영향력을 행하는 주술적인 조각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무의식과 의식을 연결하는 잠을 자는 행위를 위한 쓰임을 지닌 물건으로써 이불은 현대적인 미감의 시각언어와 공예가 지닌 촉각성과 결합되고 간결하고 해학적인 체계를 이루는 속담의 서사를 응축한다.

누빔 장인과의 작업 이외에도 이슬기는 결이 다른 다양한 협업들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과거로부터 소재 또는 재료를 차용하는 방식을 통해 사라지는 언어와 문화를 지속하게 하는 방식을 모색하면서 그 여정을 작업으로 끌어오는 것으로 확장한다. <바구니 프로젝트: W>는 멕시코의 오악사카 북부 지역의 작은 마을 산타마리아 익스카트란의 장인과 함께한 작업이다. 멕시코 소수 공동체의 사라져가는 주술문화와 언어는 이들의 상징적인 물건인 바구니와 그것을 직조하는 이들과 그 과정이 일종의 조형물과 영상으로 만들어졌다. 이 작업들은 과거에 존재했던, 그러나 지금은 소멸되어 가는 이들의 언어와 문화를 현재로 불러내고 이것들의 원시적 형태와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이는 어디론가 질주하는 이 시대에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과 존재를 소환하며 이들의 사라짐을 유예하고자 하는 시도를 통해 현재의 삶을 환기시킨다.

일상과 사물에 대한 탐색에서 시작된 이슬기의 작업은 그것들에 대한 고정된 개념들을 허물고 새로운 바라보기를 가능하도록 한다. 그리고 하나의 ‘사물’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순수미술과 공예, 추상과 구성, 전통과 현대, 문학과 미술, 언어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들의 혼성된 서사를 구축하는 촉각적인 직조를 보여준다. 여기서 직조는 이슬기의 작업에 있어 중요한 방법이자 장치로서, 작가가 언급했던 “엮기”, 즉 직조가 가진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이전 동작과 이어지며 다음 동작을 예견하는 리듬 속에 펼쳐지는 서술적 특징을 포함한다. 다 장르간의 혼성과 변환이 유연하게 작동해온 작가의 작업방식과 태도가 만들어낸 결과물들을 본다면 ‘올해의 작가상’은 이슬기에게 앞으로 작업의 반경을 보다 넓게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으며, 지금이 그 어느 때 보다 적절한 시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Critic 2

직조의 미학: 이슬기와 조각적 실천

김성원 (전시기획 / 비평,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이번 작업의 제목 ‹동동다리거리›는 고려시대 민요 ‘동동 (다리)’에 민요 형식인 ‘달걸이’를 연결한 이슬기식 신조어다. 둥둥거리는 북소리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동동’은 고려시대 한 여인이 부른 노래로서 달마다 다른 내용을 다루는 ‘달걸이’ 민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작가는 이 ‘달걸이’라는 단어에서 달을 거는 동작이나 달을 걸기 위한 장치를 연상하는가 하면, “달거리”로 발음되는 ‘거리’를 걸어 다니는 바깥 세상과 연결하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 연상은 일견 아이들 놀이처럼 장난스럽고 무의미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30년 남짓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작가에게 프랑스어나 한국어 모두 ‘익숙하면서도 낯선’ 언어일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작가가 언어와 맺는 관계가 단순한 말장난을 넘어,익숙함 속에서 낯선 것을 찾고 낯선 것을 익숙하게 다룰 수 있는 새로운 문법을 가능하게 한다.

‹동동다리거리›는 제목이 만들어진 방식처럼 익숙함에 기대지 않고 상상력을 자극하며 전시를 구성하는 문, 물, 놀이, 노래를 ‘생동하는 표상’으로 전환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유희와 연상작용으로 구현한 작품들을 설명하거나 이해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용이한 일은 아니다. 리처드 세넷은 그의 저서 『장인』(2009)에서 손동작과 생각의 관계를 설명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세넷은 세 명의 요리가가 요리법을 설명하는 방식을 사례로 들며 이들이 사용하는 공감적 예시, 장면서사, 그리고 은유하기의 효력을 강조하는데, 이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유가 곧 훌륭한 조리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방법이 비단 요리법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 컴퓨터 사용설명이나 음악 지도(指導)에서부터 철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적용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1 요리사가 은유를 통해서 요리법을 설명하는 것과 작가의 작업을 동일 선상에서 연결 짓는 일은 비약일 수도 있으나, “앞으로도 구르고 옆으로도 번지면서 새로운 의미를 쓸 수 있게 해 주는”2 은유의 특징은 이슬기의 작업을 이해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슬기의 언어와 생각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익숙함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상상력을 자극하며 ‘살아있는 형태’로 거듭나게 된다. 즉,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유의 프로세스와 그것을 시각적 형태로 구현하는 것이 곧 이슬기의 작품인 것이다. 이슬기에게 은유는 작업의 동력이자 곧 작품의 형태가 되며, 이는 동시에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치가 되어 전시의 전망을 한층 더 풍요롭게 한다.

은유로 말하는 전시

‹동동다리거리›라는 제목은 전시의 구체적 의미 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의 소리와 리듬과 움직임은 전시를 예고하는 팡파르처럼, 혹은 주술처럼 작동한다. ‹동동다리거리›의 핵심 요소들인 ‘문, 물, 놀이, 노래’ 그 자체는 중성적이고 중립적이며 심지어는 추상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요소들은 한국전통 문살, 문양, 단청, 다리세기 노래, 17세기 프랑스의 놀이기구, 세계 각국의 강물과 지인들을 연루시키며 구전문화, 수공예, 놀이문화, 그리고 현대미술과의 관계를 탐구하게 된다. 이러한 다양하고 이질적이며 시대착오적인 요소들은 동일한 시공간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연결되며 전통, 공동체, 물질과 문화, 인공물과 생명체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안한다. ‘동동다리’라는 민요를 선택하게 된 배경은 작가가 최근 몇 년 전부터 진행해 온 구전문화 연구의 연장선에 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여성들이 불렀던 속칭 ‘야한 민요’ [프랑스에서는 ‘가벼운 노래’(chanson légère)라고 표현한다]를 조사하고 전수자들과 함께 협업하면서 현대적 요소들을 개입시킨다. 한국 민요에서도 이렇게 가볍고, 은밀한 노래를 조사했지만 원하는 민요를 찾지는 못한 작가는 이에 준하는 내용을 담은 ‘각설이타령’과 함께 ‘달’을 중심으로 이번 전시의 밑그림을 그린다.그는 예전에 만든 보름달 속 토끼를 닮은 커다란 북과 신문고를 연결하며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광장을 상상한다. ‹동동다리거리›에서 ‘거리’는 광장의 표상이 되고, 전시는사람들과함께다양한서사가생성되고교환될수있는혹은노동요나혁명의노래가울려퍼지는 광장을 은유한다. 이제 이 광장(전시) 으로 들어가 보자. 광장은 거의 텅 비어있다. 아주 최소한의 장치들이 무심하게 여기저기 놓여있을 뿐이다. 작가는 이 텅 빈 공간을 두고 “공간을 벗긴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3 공간을 발가벗긴다는 의미겠다. 이런 의도는 ‘야한 민요’와 연관성이 있는 걸까. 아무튼 이 텅 빈 광장의 느낌은 나쁘지 않다. 이 ‘벗겨진’ 광장은 전혀 초라하거나 빈곤하지 않다. 항상 넘쳐나는 정보에 노출되어 있고 물질적 풍요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결핍과 상실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며, 의도적인 결핍과 절제된 상실의 광장에서 우리는 새롭고 이색적인 서사가 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 이슬기 특유의 화려한 색채나 형태는 없다.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키는 기하학적 벽화, 벤치처럼 사용할 수 있는 무채색 시멘트 기둥을 닮은 좌대와 나무로 제작된 구조물, 보일 듯 말 듯한 유리병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한 노래소리가 전부다. 하지만 이러한 최소한의 장치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은 없어 보인다. 광장에는 벽화로 구현된 네 개의 문(‹북동문›, ‹북서문›, ‹남서문›, ‹남동문›)이 있다. 출구와 입구가 애매한 사방으로 활짝 열린 이 문들은 일반적인 문과는 사뭇 다른 모양새다. 달의 회전과 문살의 기하학적 구조가 합쳐서 ‘달-문’의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여기서 반원(잘린 달)이 서로 포개지면서 둥근 달이 되어 회전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고 권유한다. ‘달-문’의 이러한 움직임은 광장을 비추는 달을 은유하기도 하고 만삭의 여인을 닮아 있기도 하며 동시에 미니멀한 기하학적 벽화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의 유일한 색조 작업이기도 한 이 ‘달-문’(‹북동문›, ‹북서문›, ‹남서문›, ‹남동문›)은 단청 장인들이 조개 분말이 들어간 단청 안료를 섞어서 직접 그렸다. 전통 단청색에는 존재하지 않는, 보라색의 등장은 이질적 개입 그리고 인공과 자연의 공존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광장 한가운데 기둥 뒤에 살짝 가려지게 놓인 구조물인 ‹13332244›(2020)가 있는데, 벽에 그려진 ‘달- 문’ 벽화의 격자 배열이 이 문살 구조물의 격자무늬와 닮아있다. 이 구조는 우물 정자(井)를 참조했지만 네 겹의 살이 겹쳐지면서 한국전통 문살을 재해석한 기하학적 형태로 탄생되었다. 작가는 이 구조를 “달과 가락을 품은 문(살)”이라 표현하는데, ‘동동’과 같은 사랑가의 장단을 배열하며 여성들이 부르는 사랑가의 악보를 은유하고 동시에 문살의 연결방식과 배열 규칙은 남녀 혹은 음양의 관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아주 단순한 ‘달-moon [문]-문’의 언어유희를 통해서 작가는 달의 회전(원형)과 한국전통 문살(기하학적 구조)을 연결하고 회전시키며 “문틀이 사라지며 문‘살’이 ‘뼈’대가 되기도 하고 내용이 되고”4 형태를 상상한다. ‘달-문’은 움직임과 유연성을 은유한다. 열고 닫고, 내부가 외부가 되고 외부가 내부가 되며, 익숙한 것이 낯설게 또 낯선 것이 익숙하게 보이는 이색적인 광장으로 향하는 문인 것이다.

호젓한 광장에는 기역(ᄀ)자형 길고 나지막한 회색 구조물이 있고 그 위는 이색적인 목재 놀이기구 (‹바가텔 1›, ‹바가텔 2›, ‹바가텔 3›) 세 개가 비치되어 있다. 알듯 모를듯한 이 놀이기구는 17세기 루이 14세 때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바가텔 놀이에서 유래한 것으로 오늘날 당구, 핀볼, 파친코의 전신이라고 볼수있다.바가텔놀이는막대로공을굴려서작은구멍에넣는놀이다.이기구는목재판에박힌작은 못들로 이루어진 경계선들과 그 사이사이에 지정된 작은 구멍들로 구성된다. 하찮은 물건이나 쓸데없는 일 또는 남녀의 정사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바가텔’에서 유래한 이 놀이는 고고학자 마리야 김부타스가 발견한 선사시대 여신의 몸을 입고 유니크하고 관능적인 ‘조각-놀이기구’로 재탄생한다.5 ‹바가텔› 옆을 지나다 보면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노래가 들린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듯한 노래는 이목을 끌기에는 너무 소박하며 광장의 노래치고는 존재감이 떨어진다. ‹다리세기›라는 이름의 이 소리들은 다리세기 놀이를 할 때, 세는 숫자 대신 아무 낱말이나 넣어서 부른 노래들이다. 통속적이고 투박한 낱말들이 연결된 무의미한 내용이지만 반복적 장단과 조화를 이루며 묘한 중독성을 유발한다. 할머니들이 직접 부른 노래들 다섯 곡이 1시간마다 5분, 10분, 15분, 30분, 45분에 흘러나온다. ‹동동다리거리›의 광장에서 ‹바가텔›과 ‹다리세기›는 놀이문화와 구전문화의 소박한 기념비로 존재하며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노는 시간’, ‘비생산적인 노동’, ‘세속적 토속적 가치’를 재조명한다.

공간 한쪽 벽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아주 작은 다양한 형태의 유리병들이 설치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빛의 흔적들만 보인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들이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투명한 유리 용기 속에 물이 들어 있는 것이 드러난다. 이 물은 아주 멀리 유럽과 미국에서 건너온 물이다. 작가는 지인들에게 그들이 사는 지역에 ‘바다로 통하는 강’(河口)이 있다면 그 물을 채집해서 보내 달라고 요청한다. 이러한 행위는 코로나19 범유행으로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세계에서 이동, 자유, 교류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은유한다. 벽에 걸린 유리병들 전체의 제목은 ‹강과 바다 사이›이지만 각각의 유리병은 채집된 강의 이름과 작가의 지인 이름이 더해지고 유리병 모양은 그 물이 채집된 강의 모양을 닮아 있다. ‘바다로 통하는 강’은 세계로 연결되며 유리병 속의 물이 된 그 지인들은 팬데믹 위기 속에서도 그 누구보다 먼저 전시를 감상하기 위해 서울에 도착하게 된다.

바구니를 직조하다

이슬기는 그동안 ‹이불 프로젝트 U›, ‹나무 체 프로젝트 O›, ‹바구니 프로젝트 W› 등 지역적 정체성, 토속문화, 전통을 탐구하고 수공예와 장인들을 관찰하며 거기서 발견한 특징들을 조형언어로 전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누비이불 수공예로 제작된 오색찬란한 기하학적 추상, 오래된 너도밤나무과의 나무로 만든 둥근 나무 체 조각,야자수 잎으로 짠 바구니 조각은 모두 이슬기가 지역 장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만든 작품들이다. ‹바구니 프로젝트 W›는 작가가 멕시코 오악사카 지역 원주민들과 협업으로 진행했던 프로젝트다. 이 마을 사람들은 세 살 때부터 야자수 잎으로 바구니를 짠다. 바구니 짜기는 이 작은 산골 마을을 지탱하는 일상이며 놀이이자 생업이기도 하다. 행위로 전수되는 바구니 짜기는 이 마을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반면 이들이 오래전부터 바구니 짜면서 사용해 왔던 익스카텍이라는 그들의 언어는 멕시코 국어인 스페인어에 밀려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작가는 원주민들과 함께 직접 짠 바구니에 익스카텍 언어로 제목을 붙이고, 프랑스의 금속공예 장인들이 만든 기하학적 좌대(플라밍고의 긴 다리를 연상시키는) 위에 바구니를 살포시 얹어 놓는다. 바구니들의 모습은 인간 같기도 하고 동물 같기도 하다. ‹바구니 프로젝트 W›의 W는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페렉의 『W 혹은 유년의 기억』(1975)과 ‘오악사카 원주민의 바구니 짜기와 익스카텍 언어’가 만나는 상상의 장소 같은 것이다. 이슬기의 그 작업에서 우리는 (언어)소멸, 단절, 상처 그리고 공동체의 기억을 재구성한다. 여기에서 ‹바구니 프로젝트 W›를 중심으로 살펴본 수공예적 실천과 구전문화, 그리고 현대미술이 그것들과 어떻게 만나며, 어떤 새로운 전망을 가능하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이슬기의 작업세계의 근간을 이루며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바구니 프로젝트 W›, ‹이불 프로젝트 U›, ‹나무 체 프로젝트 O›는 ‘은유’의 옷을 입고 화려한 색조와 독특한 형태로 탄생하지만 단순히 관조의 대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또 장인의 숙련된 기술로 정교하게 제작된 바구니, 이불, 나무 체가 전통수공예의 재조명을 위한 것은 더욱 아니다. 즉, 이슬기의 작업은 수공예를 현대미술 형태로 전환한 조각이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 현대/조각과 전통/수공예의 관계는 서로 연결되고 움직이며 보다 풍요로운 전망을 품게 된다. 나는 이슬기의 이러한 작업방식에서 영국의 저명한 인류학자 팀 잉골드의 ‘바구니 직조’에 관한 아름다운 설득력 있는 사유를 보았다. 그는 “… 동작 (직조)은 선형적 역사처럼 모든 움직임이 이전의 움직임에 따라 리듬감 있게 전개되는 동시에 다음 움직임을 예상한다는 점에서 서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6고 말한다. 이러한 논의는 손동작과 언어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전망일 뿐만 아니라,역사,인공물,생명체,자연과 문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세계의 ‘형성’에도 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잉골드는 저서 『용과 함께 걷기』(2013)에서 ‘바구니 짜기’ 사례를 통해 인공물은 만들어지고 생명체는 성장한다는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바구니는 물론 생명체는 아니지만 다른 인공물 제작과는 전혀 다른 ‘직조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데, 이 직조의 본질을 가만히 살펴보면 생명체의 성장 과정과 유사하다는 것이 잉골드의 입장이다. 바구니 직조는 재료의 성질이 변형되지 않으면서 장인과 재료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없는 특이한 표면을 구축하며 성장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묘사는 인공물 제작보다는 생명체의 성장에 더 근접해 있다. 잉골드는 이러한 논리를 통해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직된 구분을 완화시키고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재설정하며 세계와 삶의 관계를 설명한다. 잉골드는 보다 구체적으로 제작과 직조의 차이에 대한 논의를 펼친다. “제작개념은 주어진 오브제를 생산하기 위한 능력에 따른 활동을 규정한다. 반면, 직조는 오브제가 제작되는 과정의 본질에 집중한다. 제작에 초점을 맞추면 오브제를 생각의 표현으로 간주하게 된다. 직조에 초점을 맞추면 오브제를 리드미컬한 움직임의 구현 (화신)처럼 간주하게 된다.”7 그리고 “제작을 직조로 대신하고 역시 생각을 움직임으로 대체하자”라고 잉골드는 권유한다.

잉골드의 이러한 직조 개념은 이슬기의 예술 실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수공예와 구전문화를 재료로 전통, 공동체, 지역적 정체성, 민속, 토속성에 새로운 전망을 제안하며 세계와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그의 예술 실천은 잉골드가 얘기하는 ‘제작’보다 ‘직조’에 더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이슬기 프로젝트들은 모두 관조를 요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기능을 환기시키며 주어진 요소들이 마치 생명체처럼 진화하며 ‘형태’를 만들어나간다. 누비이불/추상화, 바구니 조각, 나무 체 조각, 놀이 조각 (바가텔) 등은 모두 기능성을 전제하는 조각 실천이다. 여기서 조각의 기능성은 직접적 ‘사용’보다는 우리와 세계를 연결하고 역사와 현재를 엮으며,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즉, 지속가능한 기술과 사라져가는 언어, 기억,공동체의 관찰에서 비롯된 바구니 조각,나무 체 조각,이불 조각이 완성된 혹은 종결된 작품이 아니라 살아 있고 열려 있는 그래서 무언가가 도래할 ‘과정’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바구니 프로젝트 W›뿐만 아니라 ‹이불 프로젝트 U›, ‹나무 체 프로젝트 O›, ‹여인의 섬› 그리고 이번 ‹동동다리거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 실천은 고정된 개념의 단순한 표현이라고만 간주할 수 없다. 바구니 조각, 나무 체 조각, 누비이불 조각은 각각 모종의 움직임을 구현하며, 전통과 현대, 조각과 수공예, 구전문화와 텍스트, 개인과 공동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지역과 세계를 직조하며 한층 더 풍요로운 전망을 제안한다. ‹바구니 프로젝트 W›에서 조르주 페렉의 『W 또는 유년의 기억』 소설은 사라져가는 이스카텍 언어를 부활시키며,‹여인의 섬›에서는 구전문화의 전수를 통해 죽은 표상(장소)가 다시 살아나고, ‹이불 프로젝트 U›에서는 누비이불 기법으로 만들어진 기하학적 도형과 토속적인 속담이 연결되면서 꿈꾸고 말하며 상상하는 이불/조각으로 재탄생하며, ‹나무 체 프로젝트 O›에서 둥근 나무 체들의 이색적 형태는 언어유희를 작동시키는 장치들이 된다. 이번 ‹동동다리거리› 프로젝트에서 ‘은유’는 상상력을 자극하며 문, 물, 노래, 놀이가 서로 섞이고 움직이는 광장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동동다리거리› 프로젝트는 대상들의 단순한 관조를 요하는 전시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작가가 던져 놓은 다양한 장치들과 함께 우리의 경험과 삶과 환경을 구성하는 모든 복합적 요소들을 호출하며 우리 스스로 세계를 직조하게 되는 것이다.

 


1 리처드 세넷, 『장인』, 김홍식 옮김 (서울: 21세기북스, 2010), 298–308. 2 같은 책, 309.
3 김성원, 이슬기 작가와의 인터뷰, 2020년 10월 14일.
4 같은 인터뷰.
5 Marija Gimbutas, The Language of the Goddess: Unearthing the Hidden Symbols of Western Civilization (San Francisco: Harper&Row, 1989) 참조.
6 Tim Ingold, Marcher avec les dragons (Bruxelles: Zones Sensibles, 2013), 217.
7 같은 책, 216.

Critic 3

달토끼 찾기

엘피 튀르팽 (CRAC 알자스 예술감독)

 

2020년 6월, 이슬기는 내가 매일 지나다니는 두 개의 강에서 물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고, 이 글은 그 요청에 답하며 시작되었다. 그중 하나는 내가 예술감독으로 있는 CRAC 알자스(Centre Rhénan d’Art Contemporain Alsace)가 위치한 프랑스 마을 알트키르쉬에 흐르는 일강이고, 두 번째는 이웃 도시인 스위스 바젤을 가로지르는 대하인 라인강이다. CRAC의 ‘R’(Rhénan)은 라인강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하다. 알자스 평야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통과하는 긴 하천인 일강은 라인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라인강은 독일과 프랑스의 경계를 나누며 북극해로 흘러 들어간다. 이 두 강에서 채집해 이슬기에게 우편으로 보내진 물은, 그것이 흐르던 곳의 모양을 연상시키는 작은 유리 용기에 담겨 기다란 체인 펜던트가 되었다. 이 물은 이슬기가 세계 각지에서 함께 일했던 여러 명의 큐레이터들이 각자 주변의 강과 바다에서 채집한 물들과 함께 나란히 벽에 걸렸다.팬데믹이 우리의 몸을 먼 거리,만남의 부재,검역, 그리고 격리로 속박하는 지금, 이슬기는 이러한 방식으로 서울에서 연구하고 전시 만드는 과정을 통해, 단지 은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그와 동행하는 예술 공동체를 구성하고, 나아가 부재하는 상대방의 몸들을 전시장에 집결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그 물의 표본을 구성하는 물질들은 그것을 발송한 사람의 주변 환경과 광물, 박테리아, 미생물, 심지어 이를 둘러싼 독성 입자들뿐 아니라, 그들이 활동하는 정서적, 정치적, 예술적 영토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강물을 채집한 장소를 기록하기 위해 촬영한 두 사진을 ⦾1, 2 다시 보니, 이슬기가 CRAC 알자스에서 열렸던 두 그룹전에 출품했던 작업들이 떠올랐다. 그 중 앞선 그룹전에서는 뱀장어 형상을 한 낚시 도구를 조각 작품으로 선보였다.⦾3 그것은 아마도 강가에서 주워 온 것으로 보이는 긴 나뭇가지였다. 그는 나뭇가지의 껍질을 벗겨 광택을 내고 작은 칼로 파낸 뒤 흑연으로 전체를 칠해 생선 껍질과 같이 빛나게 하였고, 삼지창으로 그 동물의 머리를 완성했다. 조작할 수 있는 이 작업은 «안티-나르시스» 전에서 미술관 입구에 놓여 전시 주제를 암시했다.1 전시는 관객과 작품 및 작가와의 관계, 그리고 주체와 객체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스스로를 인식하기 위한 대상으로서 작품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을 지닌 작가들이 생산한 사유의 한 형태로서 바라본 것이다. 이 전시에서 작가들은 어떠한 오브제를 생산하는 대신, 작품이 어떤 형식을 취하고 발언하게 된 환경으로부터 그 장치와 개념적 체제를 빌려와 발상의 틀을 구축했다. 이는 마치 다른 사람이 그것들을 구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전시에서 서로의 관점을 교환하고 타자의 시점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은색 뱀장어 형태의 이슬기의 ‹뱀장어›(2012)는 뱀장어를 잡기 위해 만들어진 작살처럼 생겼다. 그것은 관객이 보이는 사물의 시점에서 그 사물을 관찰하도록 하고, 발상의 전환을 유도하여 예술을 변화하는 주체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면서 이 전시의 실천을 활성화한다. 조작할 수 있는 이슬기의 작업들은 이렇듯 매우 수행적으로, 관객의 시점을 사유의 모티브가 된 대상의 입장으로 바꾸어 놓는다. 또 다른 전시실에서 이슬기는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된 한국 전통 이불인 누비이불을 선보였다. 2014년부터 통영의 뛰어난 누빔 장인과 협업하고 있는 이슬기의 기하학적 색채 구성들은 ‘누워서 떡 먹기,’ ‘수박 겉핥기,’ ⦾4 ‘오리발 내밀기’와 같이 이미지가 매우 풍부한 한국 속담을 시각적으로 치환한 것들이다. 우리가 잠을 자고, 꿈을 꾸는 이불이 우리에게 말을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몸을 감싸고, 따뜻하게 덥혀주고, 보호하는 이 작업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우리의 몸뚱이를 꿈이라는 현실로 옮겨 놓는다. 그러다 어느 날 영적인 것들과 불길한 말들이 깃드는 흑백의 자리를 남기고 색채들은 이불을 떠나갈 것이다. 악몽들의 연속으로. ⦾5

2020년 6월의 어느 날 해 질 녘 라인강변에서 촬영된 두 번째 사진⦾2은 어스름한 보랏빛을 내뿜으며 CRAC 알자스에서 열린 또 다른 그룹전 «지그재그 절개»에서 이슬기와 함께했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2 이 전시에서 이슬기는 작품과의 관계가 함축하는 변환의 과정을 더욱 깊이 탐색했다. 알트키르쉬의 황혼 녘 보랏빛으로 채색된 전시장 안에서 이슬기는 전시장 벽과 같은 색의 보랏빛 수프를 관객들에게 대접했다.⦾6 알트키르쉬에서 나는 제철 채소(자주색 당근과 보라색 버섯)로 요리해 만든 수프는 지역 도예가가 빚은 그릇에 담겨 제공되었다.이슬기는 우리가 먹는 것과 보는 것의 색이 같고,그로 인해 몸의 안과 밖의 색이 같아진다면 우리는 투명인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그런 환경에서 주체가 사라지고 녹아버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색을 인지한다는 것은 그 색이 지니는 관점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것을 흡수해 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색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 기나긴 도입부를 거쳐 이제 이번 전시 ‹동동다리거리›의 문에 다다랐다.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이긴 하지만,이 프로젝트를 특징짓는 네 개의 문 역시 천천히 변형을 거치게 되었기에,원래 색칠된 긴 각목을 복잡하게 쌓고 엮어 전시장의 크기에 맞춰 만들 계획이었던 기념비적인 문들은 점차 비물질화되었고,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전통의 장식적인 색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그렇게 원래 거대한 나무 조형물이었던 문들은 열린 문의 문살을 의미하는 네 개의 대형 벽화로 바뀌었다. 나무의 기하학적 얽힘은 색선들의 얽힘으로 대체되었다. 그것은 한국의 전통 건축이나 절의 외부를 단장하는 단청 전문가들과 협업으로 만들어낸 색채의 얽힘이다.⦾7 오브제가 사라진 회화는 장식적 기능을 버리고 순수한 행위 (agency)가 되었다. 안료들은 활기차고 강하다. 네 개의 문은 네 방위에 해당하는 네 가지 톤, 또는 음영으로 구성된다. 살갗의 색에서 (한국에서 악한 기운을 떨치기 위해 먹는 팥죽의 색과 비슷한) 진갈색으로 변해가는 문, 노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변해가는 문, 연보라색에서 진보라색으로 변해가는 문, 파란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해가는 문이 그곳에 있다.

네 개의 문은 각각 두 개의 문틀로 구성되고, 각 문틀에는 반달 또는 달의 일부 형태가 있어서, 집안에 있는 방의 덧문을 통해 보는 밤하늘의 별을 떠올리게 한다.이슬기의 이불들이 우리 몸을 잠과 꿈으로 빠져들게 한다면, 여기 색칠된 문들은 기이하게도 우리 몸을 비유적으로 방의 공간에 빠져들게 한다. 그것은 밤의 내밀함 속에서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달토끼를 찾는’ 것이다. 몸의 내밀함, 특히 여성의 몸의 내밀함은 그것이 얼마나 비물질적인지와 상관없이 이 장치 안에서 집결되고, 그들의 존재는 지연된다. 1990년대에 녹음된 노년의 여성들이 부르는 ‘다리세기’ 민요는 공간에 리듬감을 부여하며 박자에 맞추어 관람하게 한다.아이들이 마주 앉아 서로의 다리를 번갈아 끼우는 놀이를 하며 부르던 이 노래는,다섯 개의 목소리로 반복되며 일종의 주문이 된다.

전시장의 벤치 구조물 위에는 유럽에서 번성한 실내 테이블 게임‘바가텔’의 형태와 체계를 차용한 나무 오브제들이 놓여있다. 바가텔은 당구로 전승된 일종의 아날로그 핀볼 게임으로 오늘날 일본 파친코의 옛형태라고도할수있다.핀이박히고구멍뚫린경사진나무판위에서구슬과채를이용해게임을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바가텔’이라는 단어는 프랑스어에서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중요하지 않거나 쓸모없는 것, 또는 값어치가 없는 것을 의미하는 한편, 육체적 사랑이나 성을 뜻하기도 하고, 단순하고 가벼운 음악을 가리키기도 한다. 요즘은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바가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많은 표현들은 ‘바가텔을 좋아한다,’ ‘바가텔만 생각한다,’ ‘더 이상 바가텔에 관심이 없다’ 등에서 볼 수 있듯 성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슬기가 만든 조작하기 쉬운 바가텔은 사물의 용도와 그 다양한 의미를 종합한다. 구멍과 못들의 구성은 여성의 몸 전체, 또는 그 성을 연상시키거나 동시에 숨기면서 성적 행위를 게임을 통한 의례로 치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슬기가 전시에서 만들어낸 형태와 대상들은 매우 강한 성적인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강물 또는 바닷물이 담긴 펜던트의 긴 체인을 목에 걸면 다리 사이로 내려온다. 여인들이 부르는 다리세기 노래에서처럼 다리 사이로. 프랑스 속어에서 ‘달’은 ‘엉덩이’를 의미하는데, 이슬기와 함께 달토끼를 찾아 문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은,대중적인 이야기에 담겨 있는 숨겨진 모티브를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이렇게 장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지역의 전통적 실천들을 탐구하고 실험한다. 그것들을 응축하는 인식론, 대안론을 모색한다. 마냥 수수께끼 같은 이런 실천들을 대중적 움직임, 세계에 맞서 반응하고 저항하는 힘들로 추적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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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강, 알트키르쉬, 2020년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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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라인강, 바젤, 2020년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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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뱀장어›, 2012. 사진: Paolo Codeluppi. L’ANGUILLE,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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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U: 수박 겉핥기. Su-bak-keul-hal-ki.›, NGV 멜버른 컬렉션,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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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U: 칼로 물베기. Kal-lo Mul-be-gi.›, CRAC 알자스, 사진: Aurélien Mole,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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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수프›, CRAC 알자스, 사진: Aurélien Mole,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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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경복궁 집옥재, 서울.

 


1. Petra는 라틴어로 바위를 뜻하는 여성형 명사이다.
1 «안티-나르시스»는 케네스 엥거, 알랭 델라 네그라 & 카오리 키노시타, 르네 가르시아 아투크, 얀 가스베르제, 카푸아니 키왕가, 이슬기, 바심 맥디, 그리고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가 참여한 그룹 전시이다. 엘피 튀르팽 기획, CRAC 알자스, 2014.
2 «지그재그 절개»는 두 미술관에서 열린 그룹 전시로 아르만도 안드레드 투델라, 타니아 페레즈 코르도바, 프란체스코 페드라그리오, 로베트토 에반젤리스타, 시메나 가리도-레카, 이슬기, 피에르 르기옹, 펠리페 무지카, 에디트 오데르볼즈, 블린키 파레르모, 팔케 피사노, 줄리아 로메티, 그리고 조지 사토르가 참여했다. 빅터 코스탈레스와 엘피 튀르팽 기획, CRAC 알자스, SALT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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