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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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영의 작업은 보통 사회적, 문화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묘한 불편감을 주는 무언가를 만났을 때 시작된다. 그는 개인이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 그리고 더 ‘나은’ 상태를 위한 ‘노력’에 관해 여러 작업을 만들었고, 다양한 방식으로 감춰져 있는 내면이나 내부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도 만들어왔다.
Interview
CV
jiyoungyoon.com
학력
2013
시카고 예술대학교 대학원 조각과 석사, 시카고, 미국
2010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학사, 서울
주요 개인전
2021
《옐로우 블루스_》, 원앤제이 갤러리, 서울
2015
《적당한선에서》, 빙앤띵아카이브, 서울
2014
《휘황찬란》, 마나컨템포러리, 시카고, 미국
주요 단체전
2024
《올해의 작가상 2024》,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2
《길 위에서》, 5·18기념문화센터, 광주
《라이프-사이즈》, 원룸, 서울
《몸짓하는 표면들》, 피비갤러리, 서울
2021
《젊은 모색 2021》,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20
《같이 잇는 가치》,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서울
《예술과 에너지》, 전북도립미술관, 완주
《하나의 사건》,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우리와 당신들》, 경기도미술관, 안산
2019
《밤이 낮으로 변할 때》, 아트선재센터, 서울
《막간극》, 인사미술공간, 서울
《에이징 월드》,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생태감각》, 백남준아트센터, 용인
《We Don’t Really Die》, 원앤제이 갤러리, 서울
2018
《아크로바틱 코스모스: 비-오-오-케이》, 챕터투, 서울
《장르알레고리-조각적》, 토탈미술관, 서울
《가공할 헛소리》, 네이버 파트너 스퀘어, 광주
《관객행동요령》, SeMA 벙커, 서울
《아크로바틱 코스모스》, 원앤제이 갤러리, 서울
2017
《도면함》, 시청각, 서울
2016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서울
《뿔의 자리》, 인사미술공간, 서울
《After Dinner, Before Dancing》, 시카고 필름메이커, 시카고, 미국
《현실활용가》, 두산갤러리, 서울
2015
《Physical Information》, 디피브릴레이터 갤러리, 시카고, 미국
《Future Proof》, LODGE 갤러리, 시카고, 미국
2014
《Surrealism and War》, 국립재향군인미술관, 시카고, 미국
《Forced Air》, ACRE 갤러리, 시카고, 미국
《Upon The Skin》, 49B 갤러리, 브루클린, 미국
2013
《In Plain Cloak》, 더 바이크 룸, 시카고, 미국
2010
《2010 신진조각가전》, 김종영미술관, 서울
주요 수상
2023 DAAD 아티스트 인 베를린
주요 레지던시
2020-2021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인천, 한국
2019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서울, 한국
2018
관두미술관 레지던시, 타이베이, 대만
2017-2018
서울문화재단 금천예술공장, 서울, 한국
2016
바우하우스 레지던시, 데사우, 독일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고양, 한국
2014
맥도웰 레지던시, 피터버러, 미국
주요 미술관 소장
수원시립미술관, 한국
서울시립미술관, 한국
Critic 1
보이지 않는 면이 존재한다
김정현 (미술비평가)
‘오직 염원하는 수밖에 없을까.’ 지척에서 끊이지 않는 위기와 좌절과 고통에 대하여, 그것을 보고, 듣고, 가까이에서 또는 스스로 겪고 있는 이들이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윤지영이 지금 붙들고 있는 질문과 작업은 비는 마음에 관한 것이다. 완성된 작품을 보지 못하고 그것의 전말을 이해해야 하는 어려움을 달래기 위하여, 작가가 근작에서 주요하게 참조했다는 ‘봉헌물(ex-voto)’ 전통에 관한 논문을 몇 편 읽다가 떠올린 질문은 엉뚱한 것이었다. ‘어떻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모든 고통을 겪으면서 어떻게 다시 염원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의식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달래고자 하는 보편적인 습성이 있다. 죽음 너머, 죽음을 초월한 존재에 대한 희구, 날마다 조금씩 죽어 가는 신체에 대한 의식을 유예하도록 하는 살아 있음에 대한 정신적 관념. 이에 관한 종교와 제의는 인간종의 유구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어떻게 고통 너머를 바라보고 세계의 잔존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가령 위장이 수축하며 심각한 통증을 유발하는 신체적 증상은 흔하게 알려졌지만, 직접 겪어 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알고 있지만 겪어 보면, 겪을 때마다 당혹스럽고 고통스럽다(그럴 것이다). 현기증을 일으키며 숨이 멎을 듯한 강력한 통증에 의식은 하얗게 흐려진다. “육체적 고통은 무언가에 대한 것이거나 무언가를 향한 것이 아니다.” 고통은 그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삭제하고 모든 것을 압도한다. 고통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선언은 고통이 초래한 것이다. 길잡이가 되는 사고는 이러하다. “대상화를 향한 길 위에 고통 자체를 올려놓음으로써 고통의 탈대상화 작용을 뒤집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실질적이고 윤리적인 중요성으로 가득 찬 기획이다.”1 고통, 그리고 대상. 고통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아니, 그것보다 더욱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과제로서, 고통은 어떻게 대상을 만들어 내는가. 고통의 자기 침묵하도록 하는 성질을 지극히 의식하면서 바라본 곳을 바라본다.
‘구멍은 두려움, 고통, 죽음이다.’ 윤지영은 하얀 조개껍질을 바라본다. 조개껍질에 뚫린 구멍 사이로 실을 꿰어 목걸이를 만들던 손이 멈춘다. ‘구멍은 왜 어떻게 생겼을까? 정교한 구멍은 분명 밖에서 뚫린 모양새이다.’ 포식자의 공예적 침략에 희생되어 구멍 뚫린 껍질만 남기고 속이 사라진 연체동물의 운명은 조각의 ‘겉과 속, 감춰진 구조, 각각의 역할’2에 대한 조각가의 사고를 촉구한다. 이때 과거와 미래에서 온 사고의 파편이 구멍에, 두려움과 고통과 죽음의 초점인 깊이에 엮인다. 우리가 고통으로 인해서, 그것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언가를 의지하고 염원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고통을 대상화하는 것으로써 믿음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 윤지영이 ‘표현’이 아니라 ‘염원’을 말할 때, 믿음의 설파가 아니라, 믿음을 만드는 의지(意志)와 의존(依存)의 구조를 드러내려는 그의 시각적 방법에 우선 주목하게 된다.
역량과 취약성의 변증법
균형은 이미 무너졌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이 한편이 기울어지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에, 역설적으로 자기 언어의 전개에 대한 선명한 예감이 싹텄다. 윤지영의 작업 초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로, 단편에 그치지 않고 연작으로 이어진 《Dear Peer Artists(동료 예술가들에게)》(2014)는 위기에 관해 논한다. 위기는 작가 자신의 것이자, 특히 예술가로서 작업하며 살아가는 삶의 위태로움에 관한 것으로, 비슷한 처지에서 창작하는 삶을 살아 보려고 마음먹은 많은 예술가가 공유한 문제이기도 하다. 예술가는 어떻게 사는가? 오래된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단계적 성질을 지니기 때문에 하위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그다음 단계의 욕구가 비로소 발생할 수 있다. 예술 창작에 관한 욕구는 생리적 욕구나 안전의 욕구와는 달리, 애정 및 소속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와 같은 상위 단계의 욕구와 관련될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 창작의 욕구를 지녔다면 그보다 하위의 욕구가 이미 충족되었다고 전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 수 있듯이,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마슬로우의 오류(Dear Peer Artists 1)〉(2014)는 2차원의 도표 형상을 참조하여 3차원의 조각으로 형상화했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Abraham H. Maslow)가 세운 5단계 욕구 단계설의 고전적인 피라미드형 구조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며, 방사 주기형 다이어그램의 수평적인 구조를 도입한 것이다. 에어 펌프로 부풀린 다섯 개의 구가 서로를 압박하다가 어느 순간 가장 약한 개체가 터지도록 고안됐다. 욕구 단계설의 오류에 대한 지적은 타당하지만, 창작 욕구를 지닌 예술가의 삶이 그대로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윤지영이 자신의 직관에 따라 세운 이론에 따르면, 서로 다른 욕구는 수평적이지만 불가피하게 서로를 억압하는 관계에 놓이고, 결국 균형이 깨져 어딘가 한쪽이 터지게 된다. 각각의 욕구는 가능한 만큼 팽창할 뿐이지만, 부분이 서로 경계하기에 홀로 무한히 커지거나 모든 것이 최대한으로 가득 찰 수 없다. 도표적 형상의 참조에 그치지 않고 인접한 조각의 팽창과 상호 압력의 속성을 개념화한 이 작업은 조각의 논리적 구조를 통해 심리적인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어지는 질문. 한쪽 구석이 부서지고 깨진 개체는 어떻게 연명할 수 있을까? 중심 구조가 한번 깨지고 나면 외부에서 주어진 새로운 구조에 의지해 형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마슬로우의 오류(Dear Peer Artists 1)〉(2014)는 2차원의 도표 형상을 중심에 둔다. 몸통에 난 구멍 사이를 관통하고 조각의 바깥을 칭칭 감싼 줄은 텅 빈 내부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을 것이다. 크기와 질감이 다른 나무창은 구멍과 줄 사이를 관통하며 휘거나 부러져 있다. 여기에 바닥을 바라보고 살짝 고개를 든 타원형 구조가 연결되어 원형 구조를 고정하면서 동시에 움직임을 암시한다. 작가는 사회적 욕구를 만족하거나 해소하는 것과는 별개의 미지의 동력으로 살아가는 예술가들이 사회적 파열에 매개자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외부의 입력이 외유내강한 매개체(아쿠아 레진)를 통과해 출력되는 구조물을 설계했다.
이처럼 조각 매체의 물리적 개념에 대한 탐구를 사회 심리학적 통찰로 능숙하게 매개하는 윤지영의 시각 언어는 작업 초기부터 눈에 띄었다. 특히, 그의 시각적 방법론 중 ‘매달기’는 다양하게 변주되며 중요한 ‘시각-언어’로 자리 잡는다. 가령, 앞서 언급한 작품의 제목을 포함하여 여러 작품에서 문자 언어를 다루는 방식을 보라. 〈둥근다리의순간〉, 〈적당한선에서〉(2015)와 같이 띄어쓰기를 무시하거나, 〈저_기 저_위_에_선〉(2016)과 같이 마찬가지로 정해진 분리의 원칙을 무시하고 밑줄로 음운을 연결하여 문자 언어를 낯설게 한다. 이렇게 제목에 쓰인 모든 음운이 연결되거나 새로운 관계 속에 배치되는 것과 같이, 작품의 물리적 형상 또한 매달기의 방법을 통해 부분과 전체를 특수한 연결 관계 속에서 드러나게 한다.
전통적으로 조각은 바닥에 놓인다. 바닥과의 관계야말로 조각의 근본적인 매체적 조건 중 하나를 형성한다(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근세 이후 미술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건축을 장식하는 부속품에서 독립한 조각은 물리적 독립의 표식으로서 좌대를 가지게 되었다. 서구 주도의 모더니즘 미술에서 조각의 좌대는 조각의 부속품이 아니라 조각의 일부로서 재고된 바 있다. 그러므로 조각은 조각의 몸통과 구성적으로 어우러지는 이런저런 조형적 받침과 함께 제시되기도 할뿐더러, 좌대에서 내려올 수도 있게 된다. 조각 작품이 분리된 영역을 표시하는 관습에서 벗어나면, 조각은 다시 건축과 풍경 속으로 녹아들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현대 미술의 확장된 표현 형식의 역사를 돌아보면 조각의 내적 속성에 관한 관심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페이지에나 적혀 있을 것 같다.
윤지영의 시각적 실천에 주목해야 하는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물질적 재료를 꾸준히 모색하고 시험하며 고전적인 조각가의 미덕을 유지하는 동시에, 조각 작품의 관습적 제작에서 벗어나 제작의 관습에 관한 독창적인 개념적 탐구를 지속적으로 보여 준다. 작가는 조각이라는 고전적인 매체가 품고 있는 시각 언어의 가능성에서 미술의 동시대적 실천의 근거를 찾는다. 그의 작업에서 확장되는 것의 요체는 조각이 물리적으로 점유하는 공간이나 설치의 맥락이 아니다. 조각의 구조에 대한 사고이자, 구조적 사고의 감각적 확장의 가능성이다. 여기서 ‘매달기’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조각을 공중에 매달 때는 세부 요소 간의 관계와 균형이 더욱 중요해진다. 윤지영의 작업에서 때로 바닥에 떨어진 것은 깨지거나 속이 터져 있다. 추상화된 개체의 연쇄 작용은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했던 ‘희생이나 믿음의 구조’라는 주제를 드러낸다.
〈달을보듯이보기〉(2013–2014)에서 작가는 아찔한 순간을 연출한다. 천고가 높은 공간의 천장에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묶고 그 바로 아래 세워 놓은 철봉에 매달려 버티면서 머릿가죽이 벗겨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 스스로를 노출한다. 양쪽 사다리에 올라선 두 명의 조력자가 천장에 고정된 머리카락의 매듭을 사무용 가위로 잘라 내어 몸이 자유로워지고 나면, 작가는 양손을 풀고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낙하지점의 바닥에 놓인 빈 거북이 등딱지를 밟아 깨트리며 긴장감 속에 착지한다. 위험을 무릅쓴 행위는 거북이 등딱지를 부수고 나서야 안전한 상태에 도달한다. 이렇게 ‘선행된 희생이 이어지는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나’라는 작가의 질문이 특유의 시각적 논리 구조 안에 펼쳐졌다. 물질적 조각이 아니라 퍼포먼스 형식의 작업에서도, 조각에 관한 개념적 탐구를 통해 찾은 창작의 방법이 흥미롭게 도입된다. 한편, 작업 과정에서 작가는 스스로 필사적으로 매달려 버티는 힘과 함께, 타인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상대는 중대한 책임을 다해야 하는 상호 의존의 구조를 만들었다. 위험을 대상화할 수 있는 창작의 힘에 대한 믿음을 보여 줬다고 생각한다.
안과 밖
윤지영의 작업에는 두 가지 차원의 지평이 공평한 무게감을 가지고 교차한다. 한 가지는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이나 자각으로부터 시작해서 사회적인 인식으로 이어지는 주제적 문제의식이다. 다른 하나는 조각의 시각성에 대한 이해와 해석으로부터 떠오르는 물질에 대한 개념적 아이디어이다. 결과적으로 나타난 작업에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의 기표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가장 단순하게는 감각적으로 디자인된 사물로, 좀 더 복잡하게는 조각 매체에 관한 메타 담론을 펼치는 것처럼 보인다. 감상의 해석은 종종 여기서 멈춘다. 그도 그럴 것이, 근대 미술의 역사에서 매체 담론은 자율적인 것으로 논의되었다. 동시대 미술에서는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미술이 따로 부상하여 직접 개입을 불사하기도 한다. 그 사이 또는 바깥에 있는 어떤 것들은 개인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쉽다. 여기서 윤지영의 작업에 다시 주목하게 된다. 그의 작업은 미술의 사회성에 관한 이분법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개인적인 것이 사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적인 것으로 제시되며, 자율적으로 보이는 것에서 의존적인 구조가 드러난다.
그는 사건의 비가시적 구조,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사고하는 과정에서 조각의 ‘몰드 메이킹’을 중요하게 해석하며 전유했다. 구체적인 장면 하나. 2014년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인 마음의 구조를 바꿀 만큼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작가는 세월호 참사 이후 몇 년의 고통스러운 변환의 시간을 겪은 후에야 마치 개인과 예술을 압도할 듯한 사회적 재난에 관해 운을 떼었다. 〈구의 전개도는 없다_맷으로 추정되는〉(2018)에서 작가는 인체 형상의 전개도와, 그에 따라 실리콘으로 만든 피부 조각을 제시한다. 이때 제목에서 언급된 구와 같은 추상적인 도형 대신 ‘구체적인’ 인간 형상이 작업에 도입된다. 작품에 사용된 인간 형상은 캐나다의 3D 스캐닝 업체에서 구매한 남성(Matt)의 신체 측정 데이터에서 온 것이다. 작가는 〈맷에게 보내는 편지〉(2018)에서 “곡률 때문에 구를 평평하게 펼칠 수 없는 것처럼 인체 역시 전개도를 만들기 어렵”다고 설명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실리콘으로 피부를 만들어 전시장 바닥에 놓았”다고 밝힌다. 인간 신체의 3D 스캐닝 데이터만으로는 인간 형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물리적인 조각으로 구현하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하다. 이 작업에서 결과물로 제시되는 것은 내부 구조 없이 바닥에 볼품없이 눌어붙은 껍데기이다.
3D 그래픽 이미지는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 또는 지금 이곳에 직접 보여 줄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자주 사용된다. 미디어에서 재난을 보도하는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거짓말처럼 선박이 바다에 거꾸로 선 현장이 사진과 영상으로 전해져도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비극의 속사정이 서서히 드러나고 사태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들 속에서, 언론에는 선박의 전복과 인명의 희생 과정을 분석적으로 보여 주는 3D 시뮬레이션 이미지가 등장했다. 여기서 추상적인 3D 도형이 인간 신체에 환유되었다. 그러나 인체의 망토를 두른 도형은 윤지영이 〈구의 전개도는 없다_맷으로 추정되는〉에서 보여 줬듯이 껍질 속의 인간에 관해 그리 많은 것을 알려 주지 못하며 사실상 아무것도 대표하지 못한다. 이해의 껍데기는 똑바로 서지 못하고 바닥에 허물어진다. 현실의 부조리와 압도적인 폭력이 자아내는 고통은 종종 예술을 가장 작고 사적인 것으로 축소하게 한다. 무력감과 수치심을 안고 자기 비하에 빠지거나, 닫힌 세계에서 찰나의 순간에 위안을 구하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와중에 비명을 삼키고 끝없는 회의와 대결하며 윤지영은 어렵게 운을 뗀다. 세계의 은폐된 지점, 그것이 드러날 때의 충격, 주체의 인식과 삶을 전복하는 계기를 가리킨다. 바라보고 있는 것의 무엇을 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질문하게 한다.
조각은 신체다. 인간 신체 크기의 추상 조각은 과거 미니멀리즘 조각이 환기했듯이 조각을 마주하는 관객에게 현상학적 현전의 감각을 일으키도록 한다. 윤지영은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으로 조각의 요소를 인간 신체에 비해 왔다. 그러면서 미니멀리즘 조각처럼 차갑고 익명적인 산업용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라텍스나 실리콘과 같이 비정형하고 피부를 연상할 만한 재료를 즐겨 다룬다. 외부로 드러난 시각적 표면에 천착하기보다, 피부 너머를 상상하며 촉각적인 감성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서사적인 사고를 자극하려는 듯하다. 피부의 감각은 신체적 증상과 같이 내부의 숨은 작용이 드러나는 현상의 인화지 역할을 한다. 인간 신체 부피의 구형 조각 〈계속 밤〉(2019)은, 온도에 반응하여 표면에 새겨 놓은 이야기가 드러나도록 했다. 가려진 내용을 보기 위해 관객은 조각을 끌어안고 조각에 체온을 전달해야 한다. 작가의 설명에 따라, 자기 피부의 열을 계속 견뎌야 한다고도 할 것이다. 〈구의 전개도는 없다〉에서 인체 형상이 환유로서 작용했다면, 신체에 대한 사고를 보다 심층적으로 펼치는 〈계속 밤〉과 같은 작업에서 조각은 신체의 은유다. 조각은 신체의 은유로서 인간 신체에 관한 확장된 성찰을 요구한다. 동시에 신체는 조각에 관한 은유로서 조각 매체의 시각성에 관한 확장된 해석을 요구한다.
윤지영은 무엇보다 여성의 신체에 대해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신체는 차별의 기호가 가장 극단적으로 작용하는 대표적인 전장이다. 지난 십여 년에 일어난 여성주의적 인식의 재부상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중 한국에서는 2016년부터 문화 예술계 안팎에 ‘미투 운동’과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다. 온라인으로 확산하는 여성 운동은 그동안 은폐되어 온 여성 차별의 현실을 본격적으로 가시화하고 사회적 논쟁을 주도했다. 여성 혐오 범죄가 연일 중요하게 보도되고, 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애도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에 전해진 뉴스가 ‘텔레그램 n번방(여성 협박 성 착취 영상물 제작 유포 조직범죄)’에 관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충격적일 만큼 조직적인 행태와 거대한 규모로 인해 사회의 구조적인 추락을 직시하도록 했다. 여성의 신체가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포르노그래피적 시선의 문제를 넘어 인간성의 파괴와 변형을 예감하게 하는 두려운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윤지영은 갈급하게, 예외적으로 구상의 직설을 빌려 〈레다와 백조〉(2019)를 만들었다. 여성 타투이스트들과 협업하여 만든 이 작업은 제우스의 강간 신화 도상에서 관음증적 시선의 방향을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게 돌려준다. 이 무렵부터 작가가 여성의 존재론적 공통 지평에 대한 인식에 더욱 천착하게 된 듯하다.
개인과 예술을 삭제할 듯이 위협하는 것은 개인적 불행이나 사회적 재난의 연속만이 아니다. 하나의 사건보다, 그것의 구조적 핵심에 해당하는 것이 더욱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윤지영은 여성의 신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또 다른 위기에 대한 맞섬을 통해 조각의 안과 밖에 관한 사유를 심화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개인 주체가 전 세계적으로 고립되었을 때, 작가는 신체적 감각과 경험의 빈곤에 비례해 비대해지는 고통스러운 자의식과 위화감을 형상화했다. 〈미, 노〉(2021)는 부피는 같지만, 형태가 다른 6개의 도형이 서로 옷을 바꿔 입은 인간 신체 크기의 작업이다. 예를 들어 별기둥 조각은 구형 조각의 외피를 거의 찢어버릴 듯이 걸치고 있고, 하트기둥 조각은 별기둥 조각의 외피를 헐렁하게 입었다. 바깥으로 드러난 검은 속, 조각의 뼈대는 빛을 거의 반사하지 않는 반타블랙이고, 단단한 구조에 간신히 걸쳐져 군데군데 찢겨 있는, 옷이자 피부에 해당하는 겉은 실리콘으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이 전달하는 비애미는 겉과 속의 엇갈림, 괴리로 인해 빚어진 상처, 여섯 조각이 고요히 모인 사연과 같은 것을 끊임없이 상상하게 한다.
온 힘을 다해
미술의 시각 언어는 종종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드러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은밀하고 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은밀함은 배타적으로 타자를 소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더욱 깊숙이 연루시키고 비상사태의 사고를 촉발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 십 년, 대체로 조급하고 소모적인 서울의 미술 현장에서, 윤지영은 타협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기 언어를 추구해 왔다. 한편으로는 언제나 소진과 소멸을 염려했던 듯하다. 조각은 물리적 속성상 조금씩 마모되어 낡을 것이며, 무겁고 까다로운 재료를 다루는 데 필요한 만드는 사람의 신체적 능력도 시간의 경과에 따라 퇴화할 것이다. 일상적으로는 디지털 매체가 확산하며 인간 신체의 감각과 지각이 변형되고 있다. 지구의 생태적 위기를 맞아 물리적 개입으로서의 예술적 창작은 생태주의적 (비)개입의 윤리를 고민해야 한다. 세계의 사정이 이러한데, 조각은, 조각에 관한 매체적 사고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한 가지는 분명하다. 실존적 주체의 운명, 사회적 구조의 일부로서 개인의 운명, 예술 매체로서 조각의 운명은 분리되지 않는다.
윤지영은 예술가로서 고독한 자율성을 추구하기보다, 대화와 협업의 혼란을 기꺼이 감수해 왔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제가 [그들의] 생각을 믿는 사람들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며, “믿어야 묻고 듣고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3 팬데믹 시기에 지구 반대편에 사는 동료 작가와 함께 만든 작업 〈온힘을 다해〉(2020, 스티븐 콱과 협업)는 물리적 만남의 한계를 배경으로, 디지털 공간을 통해(서지만) 물리적 속성을 공유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담았다. 그동안 알고 믿던 것이 모두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한 예감 속에서, 작가는 다시 창작과 삶을 가능하게 하는 우정과 연대의 능력에 의지했다. 온 힘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벗어날 수도, 벗어날 생각도 없이 겪어 내는 고통은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는 무자비한 힘이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듯이 찾는다. 온 힘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우리 각자가 무엇을 보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시각은 공평하게 편재한다. 여기 보이지 않는 면이 존재한다. 조각가의 선택에 의해.
1.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메이 옮김(파주: 오월의봄, 2018), 10.
2. 윤지영이 2023년 ‘DAAD(German Academic Exchange Service) 아티스트-인-베를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코먼 그라운드(Common Ground)》에서 공개한 〈더 백 스토리(The Back Stories)〉(2023) 발표 영상 참조. https://vimeo.com/858739023
3. 윤지영(인터뷰이), 박원재(인터뷰어), “Artist Talk | Jiyoung Yoon | 윤지영 작가와의 대화”, 원앤제이 갤러리(ONE AND J. Gallery) 유튜브, 2022.2.25. https://www.youtube.com/watch?v=D7m2qTO5lQM
Critic 2
노란 달 하나, 귀 하나의 자리1
이진실 (미술비평가)
취약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군가의 신체적·정서적 약함과 위태로움이며, 그 신체가 사회적 생존이라는 경합의 장에서 얻는 감각이자 현실을 의미한다. 누군가의 취약함에 대해, 혹은 취약한 이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곧장 치료, 또는 보호라는 해결책을 떠올리곤 한다. 건강하고 자립적인 한 개인으로서의 역할을(대개는 노동을) 너끈히 해낼 수 있도록 재활과 정상성을 위한 의학적, 경제적 대책을 강구한다. 그러나 동시대 철학자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듯, 이 취약함은 이미 계급화, 젠더화, 인종화되어 있다. 취약한 몸은 생물학적인 동시에 사회적·정치적이며 어떤 삶의 조건이 불평등하다는 표지가 된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삶을 다양하게 지속시키는 조건들 없이 삶은 있을 수 없으며, 그러한 조건들은 전적으로 사회적”2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 취약함, 위태로움은 삶이 지닌 공동체적 본성을 일깨우는 근간이기도 하다. 취약함 그 자체가 바로 우리 삶의 본질이며, 그래서 우리는 결국 누군가에 의존해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체적 상호 의존성과 연관성이야말로 우리가 정치를 사유하는 근간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감상을 좀 덜어 내 보자. ‘정치’라는 말은 어떤 세대에게 여전히 숭고한 말이겠지만, 어떤 세대에게는 이제 누더기가 되어서 쓰레기통에 내던져도 될 만한 말이 되었다. 공동체라는 말도, 연대라는 말도 석화되어 부서져 내린 지 한참이다. 이런 시대에 삶의 연결성, 공동체적 본성을 미술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냉소와 비관의 시대, 각자도생의 시대에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려는 예술가라면, 그/그녀는 누구보다 강인한 신념을(혹은 낙관을?) 지니고, 다수에게(또 소수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소통 가능성(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성)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윤지영은, 내가 아는 한, 그런 사람이 못 된다. 그러한 강인함, 외향성, 낙관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다. 어린 시절 심한 피부 질환에 시달렸던 사람, 여전히 장염을 비롯해 여러 면역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 자신의 신체적 취약함과 경계를 항상 의식하는 사람, 자의식을 호방하게 확장하기보다 외부 환경에 자극받고 자주 고통받는 사람. 그런데 윤지영은 작업에 대해 말할 때 꼭 이런 말을 덧붙이곤 한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한 여성으로서…” (내 기억에, 그녀에게서 “한 작가로서”와 같은 말을 들은 적은 없는 것 같다.) 몇 해 전 그녀를 처음 만나 이 말을 들었을 때 꽤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그 평범한 말이 매우 단호하게 들렸는데, 그 단호함은 당당한 권리의 선언이 아니라 어떤 다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월호나 재난이라는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누군가의 고통과 죽음을 초래하는 구조를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고 이에 연루되어 있는 나 자신을 기어이 의식하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조각의 형식으로 펼쳐 놓는 그녀의 작업들에서 ‘사회’, ‘관계’라는 주제 의식은 이러한 취약함과 다짐에서 출발한다. 공적 자아라든가 신념의 연대가 아니라, 그렇게 취약하고 결핍되어 있고 상실로 아픈 존재들이 서로를 녹이고 때우고 불어넣는, 그러한 관계의 존재론에서 출발한다.
나는 나/너의 껍질을 부수고 착지한다
윤지영이 석사 시절 만든 작업 가운데 상체에 걸치는 노란 폼 상자가 있다. 기록된 사진에서 작가는 이 ‘상자 조끼’를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착용하고 문 뒤 벽장처럼 보이는 가설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노란 셀로판지 칸막이 뒤에 서서 사람들과 대화한다. 그 광경을 본 나는 ‘저것은 일종의 스퀴즈 머신(squeeze machine)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동물학자이자 신경 다양성 및 자폐 권리 운동가인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템플 그랜딘>에서 그랜딘은 이모의 텍사스 농장에서 예방 주사를 놓기 위해 소를 안정시키는 기계 장치를 발견하고, 이와 비슷하게 자신을 옥죄어 주는 장치, 스퀴즈 머신을 개발한다. 대학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자신에게 불안과 과호흡이 찾아올 때 그녀는 그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추스르는 법을 익힌다. 사람과의 접촉을 싫어하는 그랜딘에게 기계의 압박은 편안함과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영화 속 대사를 빌자면, “사람이 안아 주는 것은 싫지만 기계가 안아 주는 것은 좋다”는 것이다.
<복어마냥>(2013)은 윤지영이 위스콘신주의 한 레지던시에서 거주할 때 제작했던 퍼포먼스 영상 작업이다. 영상 속에서 그녀는 양봉가처럼 방제복과 망사 마스크로 온몸을 감싸고 항공기 구명 조끼처럼 생긴 망토(그녀는 이것을 직접 만들었다)를 걸친 채 들판과 숲을 탐사한다. 마치 어떤 바이러스가 있을지 모를 행성에 착륙한 우주인처럼 그녀는 평온한 들판과 초목 사이를 거닌다. 도깨비풀 같은 식물을 만났는지 그녀는 달라붙는 것들에 손사래를 치다가 망토에 달린 튜브를 훅 불어 복어처럼 조끼를 부풀린다. 이 영상에서 작가가 입었던 방제복과 망토, 노란 상자 조끼 등은 <침투장비모둠>(2013–2014)이라는 작업으로 실험실 캐비닛의 진열품처럼 전시된다. 그런데 사실 저 물건들은 침투 장비라기보다 방호 장비이지 않은가. 왜소하고 허약한 아시안 유색 인종 여성으로서 그녀의 일상은 신체적·심리적 방어전의 나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세계에 ‘침투’한 이방인이면서,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환경에 노출된 허약한 신체. 흔히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이 겪는 주요한 문제들로, 감각 처리, 언어의 지체와 장애, 사회적 교류 능력의 결핍, 자존심 문제 등이 열거된다. 등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문제는 비장애인이라 할지라도 아시안 유색인이 영어권에 갔을 때 겪게 되는 일련의 증상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그녀의 작업들은 자신의 취약한 피부(자아)와 맞닿는 경계들에 완충 지대를 만드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달을보듯이보기>(2013–2014)는 윤지영이 작업의 테마를 이러한 자신의 완충 지대로부터, 타인들과의 신뢰, 윤리적 책무의 수행, 희생과 헌신으로 돌리는 전환점으로 보인다. 작가는 타인에게 맡겨진 동시에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안위라는 신뢰와 보상의 구조를 하나의 상황으로 연출하고 수행한다. 그녀는 높은 층고의 천장에 머리카락이 묶인 채 철봉에 매달려 있고 양쪽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동료들이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른다. 그녀의 팔 힘이 다 빠지기 전에 때맞춰 머리카락을 잘라야 하고, 떨어질 때 그녀는 빈 거북이 등딱지 위에 정확히 착지해야 다치지 않는다. 그녀의 착지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딱딱해진 피부(거북이 등딱지는 뼈가 아니라, 손톱과 같은 단백질 각질층이다)를 부수고 아슬아슬하게 삶에 착륙한다. 이 작업은 한편으로는 신뢰의 구조를, 한편으로는 희생의 구조를 보여 준다. 잘린 머리카락은 희생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봉헌으로 바쳐진다.
특히 이러한 희생의 구조는 <적당한선에서>(2015)와 <모난절충>(2016)에서 매번 다른 방식으로 재상연된다. <적당한선에서>에서는 한쪽 모서리로 서기 위해서 싸개가 주욱 잡아당겨지는 사각 평판 조각, 다른 것들을 일으키기 위해 자기 몸을 누여 버티는 조각이 등장한다. 한편에는 언제든 다른 모든 조각들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기계 체조 링 한 쌍이 균형감을 뽐내며 매달려 있다. 모든 조각들이 줄로 연결되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버틴다. 작가는 이것이 마치 주어진 삶에 적응하기 위한 개인들의 타협과 같다고 말한다.3 이 작업과 같은 맥락에 있는 작업 <모난절충>에서 작가는 지름이 50cm인 공 하나와 지름 25cm의 공 8개를 연결해 설치했는데, 큰 공의 부피는 나머지 공 8개의 부피를 합한 것과 같다. 여기서는 나머지 8개를 눌러 큰 공 하나에만 바람을 넣거나, 큰 공 하나를 희생시켜 8개의 구에 바람을 넣은 상태가 전시된다. 또 반으로 갈라졌지만 간신히 맞붙은 반구들에 여러 개의 줄이 관통한다. 이 또한 구(球)라는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다른 존재들의 노력이 필요한지를 보여 준다(우리는 대개 원이나 구에 완전체의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의 무대를 이루는 이러한 조각들의 상연은 얼핏 보면 그 전모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우화 같지만, 어떤 서사가 숨어 있는 게 아니라 철저히 조각들의 물성과 역학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수학적이고 철저히 물리적인 상황 안에, 특히 이 거미줄 같은 연결망 속에 버티기와 희생 같은 관계의 가능성뿐 아니라 어떤 목표나 위장으로 인한 불안, 갈등, 위험까지 우리가 매일 겪는 신체적이면서도 지극히 사회적인 정동이 가득 차 있다.
배치로서의 신체, 기능으로서의 신체
윤지영은 이처럼 조각을 일종의 신체로 구현한다. 하지만 몸의 형태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유기체처럼 기능하는 오브제를 만든다. 구이든, 입방체이든, 깔때기이든 아니면 길고 부드럽거나 뾰족한 가시가 달린 것이든, 그것은 몸에서 출발한 것이면서도 인간 신체의 ‘모양’과는 별 상관이 없다. 오히려 재료의 물성이 신체적 의미를 발생시킬 때가 많은데, 캐스팅이나 몰딩의 조형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뼈와 싸개의 역할(겉틀/속틀과 같은)이나, 온도, 습도, 장력 등과 같은 외부의 힘에 반응하고 변형되는 안과 밖의 상태가 그러한 것이다. 때로 그녀의 조각은 피부와 같은 싸개, 근육이나 뼈와 같이 지지체로서 힘을 발휘하거나 유기체의 소화 작용처럼 속에 삼키거나 밀어 넣은 것들을 쏟아 내기도 한다. 이러한 조각의 신체성은 흔히 인간의 신체를 떠올리게 하지만, 엄밀히 보자면 조각에 ‘인간 동형론적(anthromorphic)’인 의식을 부여하는 일과는 좀 다르다. 오히려 이 조각들의 신체성은 제스처, 정지 상태, 접촉, 움직임으로 이뤄진 형태론적 순간을 출현시키기 때문이다. 그것도 서로의 관계 안에서.
정녕 신체란 무엇인가. 버틀러는 개인적이고 생물학적이라고 여기는 신체의 출현 그 자체가 공적이고 정치적인 협상의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브뤼노 라투르와 이자벨 스탕제의 논의를 빌려, 출현의 공간을 협상하는 것이 사실은 일종의 생물학적 행위라고, 곧 유기체가 가진 어떤 탐구 능력들 중 하나라고 주장할 수 없을까?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신체를 갖추고 출현하지 않은 채로 주위 환경을 돌아다니거나 식량을 구할 수는 없는 일이며, 이 세계에 출현한다는 것이 함의하는 취약성과 이동성으로부터 탈출할 수도 없는 법이다. (…) 말하자면, 출현이란 신체가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고통받고 움직이기 위해, 다른 신체들과 관계를 맺고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어떤 사회 조직을 확립하기 위해 그 위험을 감내해야 하는 어떤 형태론적 순간일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4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에게 신체적 접촉과 연결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순간인지를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이는 윤지영이 희생의 구조나 상호 의존 관계가 먼저 가시화되는 조각 설치의 양식으로부터 신체의 경계와 그 취약함을 재탐색하는 계기 또한 되었다. 물론 신체의 체적과 피부는 작가가 <저_기 저_위_에_선>(2016), <구의 전개도는 없다_맷으로 추정되는>(2018), <레다와 백조>(2019)와 같은 작업에서부터 천착한 요소이지만, 실리콘 재료를 주로 사용하는 《옐로 블루스_》(2021) 연작에서부터는 본격적인 주제가 된다. 사람의 피부를 쉽게 연상시키고 심지어 성형의 주재료로 쓰이는 실리콘은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굳어지면 힘껏 잡아당길 수 있는 신축성과 탄력을 지녔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과천)에서 열린 전시 《젊은 모색》을 통해 선보인 《옐로 블루스_》 연작에서 작가는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환될 수 있는 실리콘의 가소성(plasticity)을 이용해 다양한 신체 조각들을 선보였다. 각기 경도가 다른 세 개의 덩어리들이 서로 끌어안고 있는 노란 조각, 서로를 올라타 피라미드를 만든 탁구공 같은 노란 미니 조각들, 노란 줄의 결박에 표면이 파이고 깨져 가는 슬픈 구 조각 등이 등장했다. 이들은 이제 줄로 연결됨 없이 섬처럼 서로 저만치 떨어져 한 편의 옴니버스와 같은 광경을 연출한다. 가장자리에는 팔꿈치 아래부터 손을 캐스팅한 석고 조각이 놓여 있는데, 마치 떨어져 내리는 눈이나 낙엽을 받으려는 듯한 손의 형상을 띠고 있다. 고요하게 매달려 이들을 비추는 둥근 흑경까지 이 모두가 서정적인 모습을 자아낸다. 이 조각들에는 모두 “옐로 블루스_”라는 작품명이 붙어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소설 『봄에 나는 없었다』에서처럼, 작가는 팬데믹 기간 동안 고립 속에서 자신의 행동이나 태도를 곱씹어 보게 되는 자의식의 상태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은 해 원앤제이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이러한 자의식과 느슨한 고립은 좀 더 드라마틱한 구조로 변주된다. 풍선처럼 덩그러니 바닥에 놓인 얼굴 조각 <–없는 몸>(2021)은 “틀 없는 몰드 그리고 하나-여러-얼굴”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아시아 여성 머리의 평균적 부피를 지닌 그 얼굴 조각에서 유일하게 개인(윤지영)의 윤곽을 드러내는 것은 살짝 독특한 한쪽 귀의 모양뿐이다. 무엇보다 《옐로 블루스_》 연작에서는 인체의 크기가 의식적으로 사용된다. 채도가 낮은 살굿빛 커튼 뒤로 등장하는 검은 조각 여섯 개의 각 부피는 약 65,416cm³으로 동일한 반면, 구, 입방체, 삼각뿔, 기다란 별기둥, 하트기둥 등의 다면체들로 만들어졌다. 철로 된 조각들의 표면은 99.4% 빛을 흡수하는 아크릴 안료로 칠해져 있어서 입체감보다는 오히려 블랙홀과 같은 심연을 만들어 놓는다. 이들 몸의 입체성을 실감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들이 걸치고 있는 싸개인데, 각자의 몸으로부터 떠 낸 실리콘 싸개는 서로 바뀌어 있다. 하트기둥은 별기둥의 싸개를 망토처럼 뒤집어썼고, 삼각뿔은 하트기둥의 싸개를 입다 못해 구멍을 뚫어 버렸으며, 삼각뿔의 싸개 속에 포옥 들어간 구는 고양이처럼 귀여운 귀를 얻었다. 그런데 이 싸개들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맞지 않는 싸개들은 ‘온전한’ 상태의 자기라는 소망을 달성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일 수도 있을까?
이처럼 윤지영의 조각에서 실리콘의 예민함과 가소성은 피부라는 우리의 신체의 경계와 취약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다는 희망, 상처, 절망 또한 드러낸다. 차이, 차별, 감염, 혐오의 접면이자 자의식과 쾌락이 발생하는 아주 민감한 지대로서 피부는 자신과 세상의 ‘경계’일 뿐 아니라, 다양한 감각들로 자아를 형성하는 심리적 싸개이기 때문이다. 정신 분석학자 디디에 앙지외(Didier Anzieu)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피부는 피상적이면서도 심층적이다. 피부는 진실하면서도 기만한다. 피부는 지속적으로 고갈되면서도 재생된다. 피부는 신축성이 있지만 전체에서 떨어져 나간 한 조각의 피부는 놀라울 만큼 작게 수축된다. 피부는 자기애적이면서도 성적인 리비도의 투여를 불러일으킨다. 피부는 행복의 장소이면서 유혹의 장소이기도 하다. 피부는 우리에게 즐거움만큼이나 고통도 제공한다.”5
너의 안녕을 빌어
인체와 유사한 체적을 다양한 기하학적 입방체로 변주시키는 《옐로 블루스_》 연작처럼 윤지영의 조각이 지닌 신체성은 형태적, 기능적 유사성을 넘어간다. 그녀는 “입체만으로 신체성을 표현하고 싶다”6고 말하며, 조각의 신체성을 부피, 내지 볼륨(volume)이라는 기하학적 차원으로 추상화시킨다. 볼륨은 어떤 물체가 차지하는 부분, 공간을 추상(抽象)한 기하학적 대상이다. 볼륨은 그 자체로는 형태적으로 비어 있기에, 특정한 개별성도 동일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인간 크기의 입방체나 다면체를 주로 조각 그 자체로 제시한 이들은 미국의 미니멀리즘 조각가들이었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토니 스미스(Tony Smith)의 <Die>(1962)를 비롯해 미니멀리즘 조각의 입방체들이 지녔던 이 ‘인간 형태론’을 우리에게 인간학적 본성의 심연을 환기시켜 주는 행위적 순간으로 재해석한다.7 그에 따르면, 인간의 신장과 유사한 크기나 볼륨의 단순한 사물들은 고대의 거석이나 관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이는 말하자면, 인간 형태론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형태’ 없는 기하학적 유사성으로, 텅 빔의 불안을 일으키면서 우리에게 자신과의 닮음과 부재를 대면케 하는 ‘말 없는 심연’이자 “봉헌하는 유사 초상(quasi-portrait)”이다.8
윤지영의 조각들이 보여 주는 “유사 초상” 또한 그러한 닮음과 부재를 내포하지만, 1960년대 미니멀리즘 조각에서 발견되는 삶과 죽음의 변증법보다 익명적이면서도 서로 결코 무관하지 않은 존재들의 연쇄적인 출현을 가시화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간신히 얼굴 하나>(2024)는 영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윤지영의 친구들이 서로의 안녕을 바라며 쓴 편지가 하나의 봉헌물로 변형된 조각이다. 작가는 포노그래프의 원시적인 방식을 차용해 친구들의 음성을 밀랍 실린더에 기록한 뒤 이 밀랍 실린더를 녹여 다시 자신의 얼굴로 주조해 냈다.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해진 소망들을 물질로 형태화시키고, 이를 다시 신체화시킨 것이다. 실린더에 기록되었던 이들의 소망은 디지털로 재녹음되어 흑경이 가라앉은 우물과 같은 제단에서 메아리처럼 흘러나온다.
사실 이처럼 신체를 본뜬 봉헌물은 미술사 바깥에 깊고 폭넓은 유래를 지니고 있다. 디디-위베르만은 미술사에서 지워진 조악하고 세속적인 중세 봉헌물(ex-voto)의 대부분이 아픈 신체나 그와 연결된 도구들을 밀랍으로 떠 낸 오브제였다고 말한다. 이러한 봉헌물들은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기원, 혹은 치료의 기적에 대한 감사를 담은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후유증의 유물, 시련의 유물이기도 하다. 디디-위베르만에 따르면, 이 유물들은 종교적 치유에 깃든 접촉의 마법(“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내가 나으리라”9)을, 유사성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다른 마법으로 이행시킨다. 이러한 이행 속에서 밀랍은 “소망의 시간을 확장”시키며, 심지어 변덕스러운 소망을 따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형시키기도 한다. 밀랍은 여러 기능을 가지며, 그 가소성은 (실리콘보다 훨씬 더!) 유동적이고 반복적이다.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유기체에 들러붙는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말하자면 밀랍은 그 스스로 재현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쫓아내야 할 ‘증상’과 똑같은 양상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무엇보다 이 항구적인 변형 속에서 밀랍 그 자체는 모방을 통해(또 감염을 통해) 끊임없이 대체되고 재생되는 우리의 ‘살(flesh)’과 다름없다.
밀랍은 윤지영이 실리콘과 더불어 가장 주요하게 사용해 온 조각적 재료다. 《옐로 블루스_》에서 천정에 철사망으로 매단 노란 구는 바닥의 흑경 위에 놓인 사각 초와 한 쌍을 이룬다. 밀랍으로 만들어진 그 구의 밑면은 불에 타 구멍이 뚫려 있고 여기에서 녹아내린 왁스가 그 아래 작은 사각 틴 케이스에 모여 또 하나의 초가 된 것이다. 이 또한 희생과 재생의 우화를 작동시키지만, 한편으로 밀랍이 지닌 유동적이고 유기적(밀랍은 벌의 신체에서 나온 것이다)인 힘, 살의 작동을 보여 준다. 그것은 우리 신체의 유한함 속에 간직된 소망의 미약한 공간적/시간적 확장 가능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영원성, 초월성과는 거리가 멀다. 타오른 밀랍 초의 질량은 줄기 마련이고, 밀랍으로 만든 봉헌물로서 얼굴 조각의 노란 색은 갈수록 옅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변화무쌍하지만 결국에는 유한한 유기체로서 우리 신체와 사물들의 누추한 운명은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의 찬란한 항구적 인벤토리(inventory)와 무척 대비된다. 윤지영의 조각들은 그저 이러한 살의 취약함, 삶의 유한성을 조각의 행위와 기법, 역학으로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이를 통해 서로의 안녕을 비는 기도의 신체화를 보여 주면서 우리 삶의 고통과 상처가 각인된 공적 신체성을 가시화한다. 동양의 표현에서 오장육부는 신체의 한 기관이지만, 이러한 삶의 고통과 상처가 각인되는 상징적이면서도 지표적인 장소다. 깜짝 놀랄 만한 어떤 타격이 아니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몸에 누적되고 각인되는 고통과 부침의 흔적들로서 내장은 그럼에도 끊임없이 우리를 다시 살게 만든다.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몰라 내장을 꺼내 그물을 짓던 때가 있었다.>(2024)은 작가가 이번 전시를 위해 오랜 시간 손수 바느질하고 엮어 내고 바르고 말린 기원의 그물, 봉헌의 그물이다. 그것은 시련의 유물이면서 서로를 의존하는 힘으로 단단히 얽힌 거대한 기도문의 초상으로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