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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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욱은 이야기를 짓는다. 정확히는 그가 바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짓는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늘 어떠한 과정에 있거나 무엇인가 하고 있다. 양정욱은 누군가의 반복적인 행동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삶의 모습을 상상한다. 일상의 크고 작은 고난과 희망 사이에서 숫자로만 표시되는 가능성을 뒤로 한 채, 해보고 또 해보는 사람들이 그가 다루는 주제다.
Interview
CV
시흥에서 거주하고 활동
820309.net
학력
2011
경원대학교 조소과 학사, 성남
주요 개인전
2022
《아무런 말도 않고》, 더소소, 서울
2021
《Maybe, It’s like that》, OCI미술관, 서울
2020
《대화의 풍경: 우리는 가끔씩 휘어지던 말을 했다》, 부천아트벙커B39, 부천
2019
《어제 찍은 사진을 우리는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었다》, 갤러리현대, 서울
2018
《어제 쓰던 안경으로 오늘을 보아도》, 신도문화공간, 서울
《우리는 바람이 부는 날에 작은 동물원과 그리고 더 작은 미술관을 갔다》, 동탄아트스페이스, 화성
2017
《”홀롱, 나는 그것이 필요해요”》, 케르게넥미술관, 비냥, 프랑스
2015
《말이 없는 사람》, 두산갤러리, 뉴욕, 미국
2015
《은퇴한 맹인 안마사 A씨는 이제 안마기기를 판다》, OCI미술관, 서울
2013
《인사만 하던 가게에서》, 갤러리소소, 파주
주요 단체전
2024
《올해의 작가상 2024》,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2
《나너의 기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2
《채널: 입자가 파동이 되는 순간》, 창원조각비엔날레, 창원
2021
《상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 대전시립미술관, 대전
2020
《리듬풍경》, 오타와 미술관, 오타와, 캐나다
파라다이스 아트랩 페스티벌, 파라다이스 아트스페이스, 인천
2019
《APMAP 2019》, 오설록 티뮤지엄, 제주
《가장 멀리서 오는 우리: 도래하는 공동체》, 부산현대미술관, 부산
2018
《별 헤는 날: 나와 당신의 이야기》,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철-인》, F1963, 부산
2018
《도시 인상》, 63아트, 서울
《구조의 건축》, 수원시립미술관, 수원
《그 집》, OCI미술관, 서울
2017
《리듬풍경》, 주일한국문화원, 도쿄, 일본
《빈 페이지》, 금호미술관, 서울
2016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 갤러리현대, 서울
2015
《리듬풍경》, 경기도미술관, 안산
《아티스트파일 2015: 동행》, 일본국립신미술관, 도쿄, 일본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5 랜덤 액세스》, 백남준아트센터, 용인
2014
《로우테크놀로지: 미래로 돌아가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더 브레인》, 카이스트, 대전
《일상의 생각: 별과 사람》, 닻미술관, 광주
《누구나 사연은 있다》, 경기도미술관, 안산
《숨을 참는 법》, 두산갤러리, 서울
2013
《제35회 중앙미술대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공중시간》, 성곡미술관, 서울
2012
《사이의 변칙》, 사루비아다방, 서울
2011
《나는 미래다》, 김종영미술관, 서울
《Class of 2011》, 갤러리현대, 서울
《Boiling Point》, 쿤스트독 갤러리, 서울
주요 수상 및 기금
2020
김세중청년조각상, 한국
2018
파라다이스 아트랩, 한국
2017
SINAP(신도작가지원프로그램), 한국
2015
OCI 영 크리에이티브, 한국
2013
제35회 중앙미술대전 우수상, 한국
주요 레지던시
2018-2019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인천, 한국
2016
케르게넥미술관 레지던시, 비냥, 프랑스
2014
경기창작센터 창작레지던시, 안산, 한국
2013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고양, 한국
주요 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경기도미술관, 한국
서울시립미술관, 한국
OCI미술관, 한국
전남도립미술관, 한국
Critic 1
만약 이 세상이 대답이었던 것이라면 그 질문은 무엇이었을까?1
김소연 (시인)
프롤로그. 완벽한 세계: 차근차근 일어났고 차근차근 소멸해 간 어느 오후를 칭하는 말
어느 여행지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끝없이 논과 밭이 이어진 시골 마을에서 한 달여를 잘 쉬고 잘 놀고 실컷 읽고 쓰며 지내다,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가겠구나 했던 오후. 나는 숙소에서 빌려주는 자전거를 타고서 온 마을을 실컷 돌아다녔다. 마지막날이라고 생각하니, 주변의 모든 것에 눈길이 갔다. 이별하는 마음으로 그 모든 것에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누군가 내다 버린 의자, 찌그러진 표지판, 깨진 가로등, 그 옆에 대롱대롱 매달린 커다란 거미와 거미줄, 어느 집 대문에 낀 이끼, 살갗을 핥는 바람 냄새, 잘 익은 벼들의 실루엣을 돋보이게 만들며 기우는 해…… 늘상 그곳에 있던 그것들만으로도 나에겐 이별할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기러기들이 여럿 모여 날아오고 있었다. 너네들도 늘 거기에 있었던 거야? 그걸 여태 내가 몰랐던 거야? 그들은 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스르르 날개를 접으며 착지를 했다. 검고 반짝이는 물웅덩이에 둘러서서 주둥이를 대었다. 어제이거나 그제였다면 ‘귀엽군’하며 잠깐 걸음을 멈추고 지켜보다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내일이면 그곳을 떠날 예정이었으므로 나는 그들을 더 오래 지켜보았고 물웅덩이에 빗방울이 하나씩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기러기들은 태연히 비를 맞다가 다시 날아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물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동심원이 생겼고 동심원이 점점 커다래지다가 사라져갔다가 다시 생겨나길 반복했다. 그 동그라미가 어찌나 완벽한 도형이었는지, 새 빗방울이 나타나 그 완벽을 깨고 새로운 동그라미를 그리는 모습이 만들어 내는 박자가 어찌나 적절하던지, 나는 자전거를 세우고 멀찌감치 쪼그리고 앉아 버렸다. 한 아이가 나를 흘낏대다 물웅덩이로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짚고서 호주머니에서 종이배를 꺼냈다. 물웅덩이에다 그걸 띄웠다. 그 자그마한 배는 출항하지도 정박하지도 않은 채로 조금씩 삐거덕대며 찰랑대고 있었다. 인부들이 높다랗게 포갠 기왓장을 이고 지나가다가 그 애에게 무어라 말을 건넸고 그 애는 씨익 웃기만 했다.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아이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여러 사람이 합창을 하는 듯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아이를 부르는 소리 같았다. 그 아이는 일어서서 손을 털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그 아이가 안 보이게 될 때까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종이배를 가져갈까 그냥 둘까 한참이나 생각했다. 그 자리에 앉은 채로.
까맣게 잊고 있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의 종이배가 하얗게 눈앞에 나타났다. 한 아이가 호주머니에서 꺼낸, 손수 접어 장난감을 만들었을 때의 마음 같은 것. 그것을 띄워 보려 바깥으로 뛰어나온 아이를 위해 마침 비가 내려서 조금 더 수위를 높인 물웅덩이의 마음 같은 것. 그리고 그걸 그냥 두고서 자기를 부르는 쪽으로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받아 내는 길 끝의 집 한 채 같은. 그동안 머물렀던 마음과 더는 그곳에 머물지 않게 될 마음으로 모든 것을 차근차근 둘러보던 한 이방인의 시선을 싣고 있던 종이배. 나는 그날 종이배를 목격하지 않았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종이배를 목격했기 때문에 완벽한 하루를 보낸 듯해졌다. 차근차근 일어났고 차근차근 소멸해 간 어느 오후의 마침맞음들. 여행지에서의 마지막날로 더할 나위 없었다. 누군가 마지막 날에 무엇을 했느냐고 내게 묻는다면, 자전거를 탔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는 하루였지만, 물웅덩이에 번지던 동심원처럼 완벽한 세계가 반복해서 나타났다 사라진 하루였다.
1. 같은/비슷한/닮은, 둘 혹은 셋: 건네받은 이야기
나는 그날 밤 그 식당에서 마지막까지 식사를 한 손님이었고, 우산 꽂이에는 내 우산이 아닌 모르는 우산이 하나 꽂혀 있었다. 얼핏 보면 내 것과 같아 보이지만 내 것은 아닌 우산. 식당 주인은 그 우산이라도 가져가서 이 폭우를 피하는 게 맞다고 내게 말한다. 나는 익숙하지 않게 그 우산을 펼쳐서 무사히 집으로 온다. 그 우산은 그때부터 내 우산보다 더 오랫동안 내 우산으로 살다가 떠나게 된다. 우산을 잘 잃어버리는데 그 우산은 어째선지 잘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런 방식으로 나의 집으로 오게 된 것이 우산뿐이지는 않다. 옛날에는 라이터가 특히 그랬다. 어느 날 가방을 털어 보면 형형색색 여러 개의 라이터가 우당탕 쏟아졌다. 내 친구 고양이 후추도 그런 식으로 나타났고 지금껏 내 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 내가 키우는 상록넉줄 고사리가 심어진 화분에 이따금씩 우산처럼 피어나는 버섯들도 마찬가지다.
선물로 받은 화분을 몇 년 동안 정성껏 키우다 분갈이를 해야 할 시점이 왔을 때, 나는 일부러 두 개의 화분에 나눠 심는다. 선물 준 친구에게 한 개를 다시 선물로 준다. 자신이 선물로 주었던 그 녀석인 걸 대번에 알아보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그냥 어떤 화분인 줄로만 아는 친구도 있다. 사람 자식을 그렇게 선물로 받아서 둘로 키운 후 그 하나를 다시 선물로 준다면 어떠했을까를 한 친구와 까불며 이야기해 본 적이 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문제적이었다. 개체의 번식과 개체의 성장, 돌봄과 유대의 문제, 나눔과 선물의 정체성, 생명 윤리 등으로 끝없이 가지를 뻗어 개진되는 서로의 농담들이 거대한 인류사의 끝을 만지고 선회한 후, 우리 둘 사이에 놓인 자그마한 화분에게 열매처럼 맺혀 있는 듯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의 모르는 밭에서>의 전구 소켓 안쪽이나 나무 뒷면 같은 곳에다 내 화분에 함부로 피어난 자그마한 버섯처럼 남몰래 숨겨 볼 생각이다.
2. 결과물: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도 그 자리에 영원히 남아 있는 귀
누군가가 신이 나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기뻐하며 듣게 될 때, 이 이야기들이 허공에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잘 숨어 있다가 다시 나타나 끝없는 이야기로 떠돌았으면 싶을 때가 있다. 누군가가 신이 나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기뻐하며 듣고 있을 때에 그 이야기가 끝이 난다 해도 듣고 있는 나는 그 자리에 계속 남아서, 이야기 없이도 웃고 이야기 없이도 박수를 치고 어깨를 들썩였으면 싶을 때가 있다. 내가 쓴 시도 그렇지만, 나는 누군가의 창작물이 그런 모양새이기를 바란다. 그렇게 끝없는 이야기로 공기 중에 떠돌기 위해 만들어지기를. 이야기가 떠난 이후에도 그 자리에 남아 이야기가 끝나 버리지 않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귀 같기를.
프랑크푸르트에서 뮌헨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을 때의 일이다. 내 좌석은 네 사람이 마주 앉는 자리였고, 앞에는 노부부가 타고 있었다. 일정 때문에 피곤했던 나는 앉자마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며 눈을 붙였다. 귓가에서는 대화 소리가 점점 더 커져 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잠에 빠져 들었다. 사람들과 왁자지껄 떠들다 웃는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옆에 앉은 여자가 나를 보고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이 여자는 자신의 농담 때문에 내가 웃는 줄 안 모양이었다. 그들은 독일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나는 독일어를 거의 모르기 때문에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는 처지였지만, 꿈속에서 나는 그들과 일행이 되어 함께 떠들고 함께 웃었다. 앞자리에 앉은 노부부는 은은하고도 능란하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매순간 놀라워하며 그 이야기에 대해 농담 섞인 리액션을 했다. 할아버지의 입담에 자신이 하던 노트북 작업도 뒷전이 된 상태였다. 나는 이 여자의 농담 때문에 웃은 게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었다. 그런 것 같기도 했고 그럴 리 없기도 했다. 나는 잠에서 온전히 깨어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표정을. 말투를. 제스처를. 내가 지켜본 대화는 언어에 기인된 것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나는 그 4인석에서 맨 마지막에 내렸다. 내가 내릴 역을 안내하는 방송을 듣고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커다란 귀 하나가 쿠션처럼 내 좌석에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귀가 나의 것인지도 모르고 그 자리에 두고 내렸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나는 그때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퇴직을 하고 시골로 이사하기 위해 낡은 집을 사서 리모델링을 하게 되었는데, 집 고치는 일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웃과의 마찰, 관공서와의 마찰, 그 집에서 대대로 살아온 영혼들과의 마찰. 그 모든 과정들에서 이런저런 양보와 타협을 하고 나니, 원래 계획한 집과는 많이 다른 집이 되었다는 이야기. 내 옆에 앉은 여자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깃든 작은 지혜들을 발견할 때마다 경탄을 했고, 할아버지는 경탄을 경쾌한 농담으로 되돌려 주었고, 옆자리의 여자는 크게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3. 그들은 모르는 우리의 주말2: 다급한 일들은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여러 선후배 동료들과 오대산에 간 적이 있다. 왕복 4시간 정도의 비로봉 코스를 선택해서 천천히 산을 오르다가 잠시 냇가에 앉아 쉬기로 했을 때였다. 어느 선배 두 사람은 바위에 걸터앉아 신발 속에 갇혀 있던 발을 잠시 꺼내 시원한 냇물에 담갔고, 어느 선배는 가방에 넣어온 과일 도시락을 꺼내어 사람들에게 권했고, 어느 후배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전화 통화를 했다. 나는 한 후배와 함께 시냇물에 손을 담가 보았다. 발을 꺼내 놓았던 선배 두 사람은 서로의 등산화에 관심을 표하며, 등산화에 탑재된 새로운 기능과 발바닥의 피로에 대한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고, 어느 선배의 가방에서 바깥으로 나온 과일들은 넙적한 바위 위에서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 통화를 하던 후배는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멀어지며 계속해서 통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와 후배는 시냇물 속에서 아기메뚜기 한 마리가 허우적대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옆에 놓인 나뭇잎 하나를 집어 들어 아기메뚜기를 건져 보려 했다. 아기메뚜기는 시냇물 속에서 허우적댈 때보다 한층 더 위험을 감지한 것처럼 보였다. 다가오는 나뭇잎 때문에 잔뜩 겁에 질린 듯해 보였다. 후배는 자그마하게 외쳤다. “무서워하지 마! 구해 주려고 하는 거야!” 나도 덩달아 자그마하게 외쳤다. “여기에 올라타!” 우리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아기메뚜기는 나뭇잎 위에 올라타게 되었고 마침내 무사히 땅을 딛게 되었다. 그러나 내려 둔 그 자리에서 메뚜기는 납작하게 앉아만 있었다. 몸이 젖어서였는지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서였는지 가만히 있었다. 몇 초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메뚜기는 앞다리를 들어 올렸다. 자신의 더듬이를 만지기 시작했다. 브이 자로 갈라져 있어야 할 더듬이가 물에 젖어 하나로 딱 붙어 버린 탓에 움직이기 어려운 듯 보였다. 아기메뚜기는 계속해서 앞다리를 이용해 더듬이의 물기를 털어 보려 했고, 붙은 더듬이를 갈라 보려고 애를 썼다. 그의 동작이 점점 조급해져 갔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그를 지켜보려 했다. 아기메뚜기는 불현듯 신중해졌다. 아주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붙어 버린 더듬이 사이로 다리를 넣기 시작했다. 노파가 코끝에 돋보기를 올리고서 실 끝을 침으로 축여 꼿꼿하게 만든 다음 마침내 덜덜 떨던 손으로 바늘에 실을 꿰듯, 아기메뚜기는 더듬이를 브이 자로 원상 복구하는 데에 마침내 성공하고 있었다. 늠름한 브이 자를 앞세우며 아기메뚜기는 저 멀리 순식간에 날아갔다. 후배와 나는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고, 주변에서 쉬고 있던 일행들은 물가에 갓 건져졌던 아기메뚜기처럼 깜짝 놀라 우리를 쳐다보았다. 하산을 하고서 나는 내내 사람들의 대화에 끼지 못했다. 우리는 벼르던 곳에 함께 갔고 중요한 대화를 나누었고 오래 고민해 온 프로젝트에 대하여 실마리를 찾았다는데, 나와 후배는 소근소근대며 브이 자를 그리고 날아갔던 아기메뚜기 이야기만 했다.
4. 양말: 앞머리가 곧 자라듯이3 너와 나는
사고를 당하고 큰 수술을 받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 몇 년을 누워 지내던 친구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찾아간 적이 있다. 휠체어도 없이, 목발도 없이, 친구는 내 옆에서 잘 걸었다. 하룻밤 함께 잠을 자고 난 다음 날, 친구는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양말을 신으며 말했다. 양말을 스스로 신을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쁘잖아. 허리를 동그랗게 말고서 양말을 신는 자세는 허리가 건강한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자세라는 것은 내 친구처럼 다쳐 본 사람만 안다. 그렇게 행복하면 한 겹 더 신어 볼래? 하며 나는 내 양말을 손에 들고 흔들며 농담을 건넸지만, 이후로 양말을 신을 때마다 나는 친구의 투병 기간을 떠올리게 되었다. 부서진 신체가 나사의 힘으로 버티며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회복해 나간 시간들. 그 오랜 시간을 견딘 친구의 기다림들. 노력들.
5. 가만히 있는 무언가를 본 적이 있다4면: 그 장소는 해변이나 벼랑처럼 당신이 아는 가장 끄트머리가 된다
어느 날엔가 동네를 산책하다가 풀숲에 버려진 축구공을 발견한 적이 있다. 외피가 다 벗겨지고 실밥이 뜯어진 축구공을 잠깐 바라보다가 지나갔다. 계절이 바뀌고 밤새 폭설이 내린 이른 아침에 나는 숫눈을 밟으며 또 동네를 산책했다. 발자국을 뽀득뽀득 남기는 재미에 취해 있었는데, 새하얀 이불을 덮은 듯한 세상에서 동그랗게 드러난 갈색 흙을 보게 되었다. 그 자리에 놓여 있던 축구공이 퍼뜩 떠올랐다. 흰 눈 사이에 드러난 동그란 흙 덕분에 나는 축구공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 낡은 축구공이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 발로 뻥 차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을지도 모를 일. 나는 허공에 안 보이는 포물선을 그려 보며 축구공 생각을 했다. 어디 다른 곳에 날아가서, 눈이 녹고 또다시 눈이 내린 날에 흰 눈을 소복이 얹고 가만히 놓여 있다가 또다시 누군가가 발길질을 하는 상상. 실밥 뜯어진 축구공을 어딘가에 은닉해 주고 있는 누런 풀밭. 동그란 흙 옆에는 동그란 눈을 이고 있는 주먹만한 돌멩이가 있었다. 나는 돌멩이를 주웠다. 큰 동그란 흙 옆에 작은 동그란 흙이 생겼다. 돌을 집에 가져가야지. 축구공 옆을 지키고 있던 돌을. 나에게 허공에 포물선을 보게 해 준 축구공을 지키고 있던 돌을. 그 돌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서 나는 시를 썼다. 축구공 생각과 포물선 생각을 하자니 내가 외야수가 된 것만 같았다. 공책을 펼치자 실밥이 뜯어진 낡은 야구공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나는 글러브를 낀 채로 내가 아는 가장 끄트머리에 서서, 그 가장자리를 지키며 서 있었다. 야구공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계속해서 날아왔고 나는 팔을 뻗어 그 공들을 죄다 받아 내려 했다. 놓친 공들도 더러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놓친 공들은 또 제 나름대로 어딘가로 굴러가서 내가 딱 한 번 보았던 축구공처럼 눈을 베레모처럼 쓰고서 동그란 흙 하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차를 마시면서. 혹은 일 이야기를 하다가 드문드문 스몰 토크를 할 만한 순간들에. 하려면 할 수도 있지만, 하지 않는 걸 선택한다. 이야기로 전할 수 없는 종류의 경험들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로 전해질 리 없는 이야기들. 이야기로 전해질 수 있는 이야기보다 더 가냘프고 켜켜하며, 누군가의 숨결과도 같이 겨우 느껴지는 것들에 대한. 아무도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는 이야기들.
6. 노동의 안 보이는 부분
나는 낮에는 일을 하러 나갔고 집에 돌아와 밤마다 이 글을 조금씩 써 나갔다. 열어 둔 창문 바깥으로 차 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리기 시작하면 창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헤드라이트를 켠 트럭들의 행렬. 내가 사는 아파트로 들어서는 택배 차량 하나. 아침에 현관문을 열면 내가 주문한 물건이 상자에 담겨 도착해 있다. 상자를 집어 현관 안쪽에 옮겨 둔 후 복도를 나선다. 복도에서 옅은 락스 냄새가 난다. 말끔해진 복도 바닥을 딛고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간밤 태풍에 몇 그루의 나무가 쓰러졌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는 쓰러졌다던 나무 옆에 두 명의 인부가 서 있다.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나무가 다시 세워져 있을 것이다. 고속도로 아스팔트 정비는 한밤중에 이루어진다. 깨지고 갈라졌던 낡은 도로가 윤기가 흐르는 새 도로로 변해 있다. 인부들은 한밤중에 장비를 챙겨 들고 깨진 고속도로로 갔을 것이다. 그는 동이 틀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갔고 밤새 굽혔던 허리를 눕히고 비로소 휴식을 취한다. 나는 밤마다 조금씩 계속해서 글을 쓴다. 남겨진 글보다 지워 버린 글이 더 많다. 나타났던 생각보다 나타나려다가 사라진 생각이 더 많다. 문장이라는 몸을 얻지 못한 채로 명멸하는 경험들. 기억들. 그것들이 형광 물질이었다면 한밤중에 글을 쓰는 내 몸은 어둠 속에서 연둣빛으로 발광하고 있었을 것이다.
7. 몸짓: 보이는 것과 보일 리 없는 것의 해후
나는 이것을 움직임이 아니라 몸짓이라고 부르고 싶다. 하나의 장면과 하나의 이야기가 뿌리로 걸어오는 나무처럼 변신하여, 표정과 동작과 감정이 육체의 관절들에 연동된다. 그리고 하나의 몸짓을 만들기 시작한다. 고정되어 온 공기가 흩어지고 공기들이 부산히 움직이면서 이전과는 다른 공간을 직조하기 시작한다. 몸짓은 언어에 도움을 받아 도약한다. 몸짓을 구상했던 예술가의 맨 처음 장면을 고스란히, 누락 없이 건사해서 공간 속에 새롭게 흩뿌린다. 물질로 가두지 않으면서, 동시에 물질이 아닌 것들의 관념에 기대지 않은 채로. 몸짓은 물질과 물질이 아닌 것의 해후를 구현해 낸다. 우리가 진작에 알아차렸으면 좋았을 풍경들이 허공 속에서 양각처럼 배어 나온다. 또렷할 리 없고 구체적일 수 없는, 누락된 이야기들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와 해후한다.
에필로그. 완전할 리 없는 세계: 정지하지 아니하고 영원히 반복되는 것으로 빚어진 아름다움을 뜻함
작품 하나가 낮은 조도 속에 놓여 있을 때에 그 공간에는 위와 같은 이야기들이 흘러 다닌다. 악력이 낮은 채로 경사가 낮은 채로 졸졸졸 흘러 다닌다. 누구의 귀도 지배할 생각이 없고, 누구의 심금도 울릴 욕망이 없는 채로. 덧없고 힘없이 삐걱이며. 반복하며. 덧없음과 힘없음의 동작이 영원히 반복될 때의 묵직함을 믿으며.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지만 흐르는 대화가 우리 주위를 배회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의 이야기와 맞물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듯하다. 정교하게 계산되지 않는 계산 속에서 설계된 움직임들. 움직임이란, 구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대화를 건네는 보디랭귀지로서 작동한다. 대화를 꺼내 보라는 제안처럼 작동하기도 한다. 우리가 꺼내고 싶어해 온 이야기들에 대한 응답을 장치화한 것이기도 하다. 고개를 끄덕이듯이, 입가가 퍼지며 시원한 미소를 짓듯이. 우리는 이야기한 적 없던 이야기를 이 장소에다 건넨 후, 대화해 본 적 없었던 대화를 경험한 사람이 되어 간다.
분명 본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까맣게 잊어버렸거나, 기억에서 누락되었거나, 애써 고개를 저어 안 본 것으로 하고 싶었던 장면들. 일상에 편재된 언어로는 말해 본다 한들 아무 소용도 감흥도 없을 이야기들. 이야기라기보다는 이야기의 배후들. 암나사와 수나사처럼 서로 단단히 맞물려 있는 이야기와 이야기의 배후들. 이야기의 주인공이 이야기의 배후가 되었다가, 이야기의 관찰자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가, 이야기의 청자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들. 다시 말해 보자면, 이야기의 풍요로움들. 다리가 너무 많은 벌레와도 같은, 팔이 너무 많은 나무와도 같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사귀의 뒷면에 감춰진 잎맥 같은, 우리들 몸속 구석구석에 장착된 실핏줄 같은 이야기들. 이미 하나의 이야기였으나 이야기가 되기 위하여 오래 기다려 온 이야기들. 이야기가 끝나고 들어 주는 사람이 사라진 이후에도 살아가게 될 이야기들. 나는 이 이야기들이 어디선가에서 무사하다는 전갈을 받은 사람이 되어 작품 앞에 서 있다.
1. 필자의 시, 「경배」 부분, 『i에게』(서울: 아침달, 2018), 13.
2. 양정욱 작품명 <우리들의 주말을 거북이만 모른다>를 변용함.
3. 양정욱의 작품명 <앞머리는 곧 자란다>를 응용함.
4. 양정욱의 작품명 <가만히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를 변용함.
Critic 2
이야기 기계가 그리는 얼굴 없는 초상
이임수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
그의 작품은 ‘이야기 기계’라고 부를 수 있다. 양정욱의 이야기 기계는 공간을 차지하면서, 우리 몸을 암시하고 그 현존을 일깨운다. 균형 잡힌 구조와 반복되는 움직임으로 전달하는 이야기는, 거창한 서사시라기보다는 소소한 일상의 담소, 따뜻하게 건네는 위로, 끝내는 전해야만 하는 진심 같은 것이다. 양정욱이 말이나 글보다는 움직이는 기계를 이야기하기의 미디어로 삼은 이유는 이야기가 전하는 사람의 정서와 삶의 감각을 더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결국, 양정욱의 작품은 단순한 기계 미학의 실험, 기술 매체의 기능, 기술적 객체의 존재에 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인간 주체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타자와 환경을 포함한 광범위한 상호 주체성에 대한 관심이라 하겠다.
1. 삶으로부터 온 이야기 기계
펠릭스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는 주체화의 기계적인 차원을 고려하면서, 디지털 기술이 일상화된 오늘날 기술적인 정보 기계와 소통 기계가 인간 주체성의 핵심에서 작동함을 지적했다. 이러한 기계는 기억과 지성 속에서뿐만 아니라 감정, 정서, 무의식적인 환상 속에서도 작동한다. 주체성을 재정의하려는 시도는, 주체성 생산을 관장하는 요소들의 이질성에 대한 강조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1 양정욱의 이야기 기계는 자본과 정보 기계와 소통 기계를 대신할 미학적 기계의 사례로서 등장한다. 이야기 기계는 주체성을 생산하는 여러 요소들에 이질적인 층위를 부여함으로써 단절과 변화의 계기를 만든다. 양정욱의 이야기 기계는 모든 수사를 동원해서 특정한 상황에 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하기라는 미술 작품의 목적은 지극히 고전적이다. 유구한 미술사를 통틀어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많은 그림과 조각들이 영원히 기억되고 되새겨질 위대한 인물, 역사적 사건, 신이 창조한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를 위하여 예술가들은 아름답고 이상적인 몸을 형상화하기 위해 부단한 훈련과 방대한 자원을 투여해 왔다. 양정욱 또한 이야기를 위해 세심한 노력과 시간을 투여한다. 그러나 양정욱의 작품이 생산하고 전달하는 이야기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주변의 소소한 경험들로부터 온 관찰과 상상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 짓기이고, 일종의 초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양정욱의 이야기 짓기는 다른 사람에 대한 관찰, 그리고 자신의 행위와 말을 포함한 일상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이 과정을 추동시키고 이끄는 것은 대상에 대한 ‘약한 마음’이라고 말한다. 우연히 마주치는 특정 직업군의 사람들, 친밀한 관계 속에서 생활하는 가족, 그리고 뒤돌아봤을 때 보게 되는 그들의 참모습, 그래서 울리는 마음 등이 작품에 표현된다. 여기에는 대상에 대한 애틋한 마음 씀씀이가 있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만든다. 양정욱의 작품은 언어 기호의 구조를 띠는 대신에 조형 기호의 관례를 따르면서 이야기를 생산한다.
이때 그는 나무와 모터를 이용한 움직이는 장치를 동원하는데, 이러한 작품의 시작은 감동을 주는 작은 선물로서 만들어진 오토마타였다. 이후 그는 몸의 움직임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하나의 기계 장치를 만들어 그로부터 야기되는 마음의 움직임까지도 포착하고자 했다. <고난은 희망이라고 속삭인다>(2011), <저녁이 되서야 알게 된 세 명의 동료들>(2013), <서서 일하는 사람들> 연작(2015, 2022), <사랑하는 사랑의 어깨를 안마기기는 모른다)>(2015), <그는 선이 긴 유선전화기로 한참을 설명했다>(2016)와 같은 작품들은 제목에서부터 한 인물과 그가 처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작품의 주제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더 나아가 <대화의 풍경> 연작(2018–2019), <당신은 옆이라고 말했고 나는 왼쪽이라고 말했다>(2021), <우리는 어제를 힘껏 안고, 좁게 앉아, 익숙한 방향을 바라보았다>(2022)와 같이 상호적 관계에서의 위치와 주고받음으로 확대된다. 신작 <아는 사람의 모르는 밭에서>(2024)는 한 사람이 일궈 놓은 풍경을 통해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양정욱의 작품에 동원되는 기술은 생각을 구현하기에 족한 정도의 최소한의 것으로서, 인간적인 시간이 보존되고 사랑의 에너지가 모일 수 있는 정도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기술은 살아온 경험 속에서 습득한 수단으로서의 최소한의 기술이며, 이런 기술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는 정성의 기계라고 말한다. 그는 자동화되어 인간의 손이 필요 없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의 돌봄이 필요하고 온기가 남아 있는 기계를 만든다.
양정욱의 이야기 기계는 한 번 설치된 이후에는 사라진다. 작품은 한 번 설치된 이후에 소장처와 컬렉터를 찾지 못하면, 오직 작가의 머릿속에만 존재하게 된다. 작품의 물리적 구조물이 보관되고 보존되어 다음에 같은 것이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기억에 의지하여 그것을 다시 제작한다. 양정욱의 작품은 다른 이가 대신 제작할 수 있을 정도의 상세하고 규격화된 설계도가 없기 때문에 작가 자신만이 반복할 수 있다. 이 상황은 마치 구술자가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다시 다른 버전으로 반복하는 것과 같다. 산업 사회의 여러 직업인들의 고단한 삶의 풍경과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의 장면들이 순간적인 직관에 의해 포착되고 공간적인 장치들의 움직임을 통해 지속적인 시간 속에서 몸과 몸의 만남으로 전환된 이야기가 되어 펼쳐진다.
2. 움직이는 기계, 말을 거는 몸
양정욱 작품은 관찰의 기억에서 떠올리는 움직임에서 시작한다. 한 캐릭터의 이미지를 움직이는 장치로 구체화함으로써 작품은 움직이며 말을 거는 몸이 된다. 이 장치의 신체성은 전시장에 하나의 분명한 물리적 현존으로 존재하면서 시각과 촉각으로 동시에 지각되는 상황과 연결된다. 몸을 통해 습관적으로 지각된 세계가 바로 우리의 현상학적인 현존을 이룬다. 이때 물리적 공간과 거기에 놓여 있는 구체적인 대상, 그 대상을 경험하는 주체가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대두된다. 회화로 미술을 시작한 양정욱이 평면이 아닌 입체 작업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의 관찰로부터 한 대상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이를 움직임으로 실재화한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다수의 기계들이 그 내부를 알 수 없는 블랙박스인 반면, 양정욱이 만든 기계는 역학적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며 작동의 메커니즘을 보여 준다. 양정욱의 이야기 기계가 조직화되는 과정은 기계의 물질성과 관련된다. 다시 말해, 기계의 물질성이 이야기의 생산과 연결되어 있다. 기계의 물질성과 이야기를 잇는 것은 감각과 정동의 흐름이다. 이 기계는 실제 공간 안에 견고한 사물로 놓인다. 부분들은 물리적인 힘의 교환 관계로 서로 연결되고, 원운동과 직선운동의 상호 전환을 통해 특정한 신체적인 움직임을 표현한다. 전체 나무 골조에 모터를 단 수평, 수직, 원형의 부분 구조물들이 나무 관절과 베어링, 끈 등으로 연결되어 이완과 긴장을 반복하며 움직인다. 군데군데 달린 등과 다른 재료들이 움직임의 흐름을 중개하고 에너지의 강도에 반응한다.
이렇게 양정욱의 기계는 시각적, 촉각적, 청각적 요소를 통하여 이야기를 전달한다. 작가는 하나의 관찰 대상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지만, 정작 작품 안에서는 비사유적인 요소들을 가져온다. 시각을 통해 즉각적으로 파악되는 형태와 구조는 작품이 작동하는 방식을 인지하게 하며, 이때 인지된 움직임은 시각적이라기보다는 몸 전체를 개입시키는 촉각적인 것이다. 양정욱의 기계들은 뼈, 인대, 근육, 그리고 여러 감각 기관을 모방하여 모터의 움직임, 소리, 진동 등으로 다양한 감각을 동시에 자극한다. 작가가 작품의 주재료로 나무를 선택한 이유도 그것이 손으로 만져 보는 행위를 유도하는 재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손으로 감지되는 대상의 상태, 몸을 통해 지각하는 공간, 청각으로 입력되는 정보들로 자신만의 상상적인 세계, 상상적인 대상을 만든다. 사람과 그가 서 있는 환경이 기계적인 구축물로 전환되고, 이 과정에서 구분된 둘은 가타리가 말하는 기계의 작동에서 발현시키는 타자성의 차원에 의해 상호 의존하게 된다.2
양정욱의 기계가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강력한 구체성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상상적인 차원으로 후퇴해 가는 이유는 바로 이 기계가 이야기 기계라는 점에 있다. 이 기계는 하나의 역학적 기계이면서 동시에 담론의 기능을 하는 추상 기계인 것이다. 양정욱의 기계들은 실제 공간과 상상 공간 사이에서 말을 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위해 사용하는 디지털 기기가 가상 공간을 경유하고 분절된 신호를 배열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양정욱의 이야기 기계들은 실제 공간에 견고하게 놓인 모습으로 관객들을 상상의 공간으로 이끈다. 한 사람과 마주쳤던 순간의 기억으로부터 하나의 도상, 이미지가 떠오르고, 그것은 감정과 느낌이 실린 형태와 색의 뉘앙스로 전환되어 기계의 구조와 움직임을 통해 표현된다.
바닥 위에 놓인 작품을 비추는 빛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그림자는 그것을 둘러싼 물리적 공간에 대한 지표적인 요소들이며, 동시에 작품을 하나의 상상적인 퍼포머로 전환시키는 요소들이다. 빛과 그림자는 하나의 무대를 연출하여 관객과 작품이 만나게 한다. 무대는 전시된 작품이 두 가지 차원을 오가게 하는데, 하나는 물리적인 현존으로서의 견고한 몸이고, 다른 하나는 각본에 의해 전개될 이야기이다. 이렇게 실제 공간의 빛과 그림자가 상상적인 공간을 구축한다. 실제 공간에서의 움직임이 상상의 영역으로 미끄러지는 것은 작가가 결국에는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양정욱의 이야기 기계는 관객에게 관조하는 재현 이미지를 제시하기보다는, 움직이는 기계의 구조를 띤 한 주체를 직면하게 한다. 관람자를 주체화의 벡터 앞에 서도록 함으로써 언어적인 인식이 아니라 정서적인 인식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세계의 현존 속에서 새로운 주체로서 재탄생시킨다. 이것은 가타리가 말하는 모든 주체화 양식의 뿌리가 되는 정념적 주체화(pathic subjectivation)이다.3 이렇게 양정욱의 기계는 물리적인 요소들이 배열된 장치이면서, 서로 다른 요소들의 얽힘과 움직임을 통해 의미를 생성하는 추상 기계이고, 관객들의 타자성으로서 등장하여 상호 주체성에 의한 자기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기계이다.4
3. 이야기 기계가 그리는 얼굴 없는 초상
양정욱의 기계가 전달하는 이야기는 한 주체의 실재에 대한 것이다. 앞에서 양정욱의 작품이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 짓기라는 점에서 일종의 초상 작업이라고 했다. 작가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과 그들에 대해 새겨진 감정들로부터 작품의 물질적인 구조와 움직임을 상상한다. 다시 말해, 이 초상 작업은 얼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세, 움직임, 긴장과 이완 등의 몸체로부터 시작한다. 이 이야기 기계는 언어로 상징화되거나 이미지로 치환하는 대신, 전 기표적인 기호 체제, 즉 몸짓, 리듬, 잡음, 빛 등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계가 전달하는 이야기는 체험된다. 관찰된 인물의 사연, 운동하는 신체의 현존, 상상적인 표현의 차원들이 뒤얽혀 있기 때문에 양정욱의 기계는 기이한 환상 신체도, 합리성의 기계 장치도 아닌 이상한 것이 된다.
이 기계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가 강조하는 기호계의 다른 두 축인 의미 생성과 주체화의 지층을 형성시킨다.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해 기입된 기표들, 그리고 기계의 전 기표적인 요소들의 배열과 움직임으로부터 형성되는 의식, 정념 등이 이끌어 내는 주체화를 위해서는, 기표를 기입할 흰 벽과 의식, 정념, 잉여들을 위치시킬 주체화의 검은 구멍이 필요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의미 생성과 주체화의 두 층이 생산하는 얼굴을 말하는데, 이것은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에 의해 태어난다.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는 경제와 집단, 권력의 필요에 의해 작동하면서 개별화되지 않은 얼굴을 생산한다. 이 기계는 검은 구멍과 흰 벽의 체계를 만들고, 이에 따라 얼굴의 사회적 생산이 이뤄진다. 그러나 이러한 얼굴의 사회적 생산으로부터 탈주한 기계는 탈영토화된 얼굴을 만든다. 탈영토화된 얼굴은 눈, 코, 입뿐만 아니라 얼굴화된 가슴, 손, 온몸, 도구 자체도 포함한다. 얼굴화된 몸체와 관계 맺는 기표와는 거리를 두면서 몸체의 탈코드화가 가능하다.5 양정욱의 기계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탈코드화된 얼굴을 넘어서, 얼굴 없는 몸체의 탈코드화를 통한 초상 만들기를 수행한다. 작가는 얼굴을 만드는 두 눈을 찍을 필요 없이, 그리고 눈을 찍을 흰 벽을 세우는 대신에 작동하는 사지를 조립한다.
이 이상한 기계가 그리는 초상은 두 개의 축 위에서 구성되는데, 하나는 이야기라는 의미 생성의 축과 다른 하나는 기계적 움직임에 의한 주체화 축이다. 기계가 전하는 이야기는 작품 제목이 제시하는 문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하나의 장면, 또는 그때의 직관이다. <점심을 먹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나)>(2012), <3명의 남매는 집으로 가면서도 가게를 간다>(2013), <우리들의 주말을 거북이만 모른다>(2014), <아버지는 일주일 동안 어떤 잠을 주무셨나요>(2016)와 같은 제목들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 기계로부터 실재와 상상 사이에 만들어지는 균형에 의해 파토스(pathos)가 온다. 이 정서적인 강렬함은 얼굴의 표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분열된 몸이 만드는 복합적인 리토르넬로(ritornello)에서 온다. 가타리가 말하는 리토르넬로는 실존적 정동(affect)을 결정화하는 반복적인 연속체인데, 이것은 소리 차원, 감정 차원, 얼굴 차원을 지니고 끊임없이 서로를 침윤한다.6 양정욱의 기계가 만드는 움직임은 바로 이러한 리토르넬로이다.
양정욱은 분열된 몸들의 파편들로 기계를 구성하면서 직관성, 이야기, 효과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찾으려고 한다. 이 기계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탈영토화된 얼굴성의 기계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요소의 배열 장치이면서 문학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감각적 체험을 제공하는 미학적 기계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기계로부터 팽팽한 관계의 확장과 함께 감각과 의미의 다변화를 꿈꿀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 기계가 그리는 초상은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탈코드화된 몸체들의 리토르넬로로 그려진다. 즉, 언어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이야기가 물리적 공간에서의 움직임을 통하여 현실로 끌어내진다. 이야기 기계는 디지털 기기와 네트워크 상에서 만들어지는 흘러가 버리는 이야기와는 다른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구사한다. 인간의 경험과 기억이 말로 전승되던 아주 오래 전부터 되풀이되는 이야기처럼 그것은 우리에게 체화된 반복 구조를 통하여 하나의 관찰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움직임으로 전한다.
이런 의미에서 양정욱의 작업은 이야기 기계가 그리는 얼굴 없는 초상이라 하겠다. 이 초상은 관객과 더불어 마주한 상호 주체성으로서 삶과 인간에 대한 깨달음을 준다. 그것은 마치 거울 속 내 얼굴을 보았을 때, 내 옆의 가족을 대할 때, 삶의 순간마다 타인을 만날 때, 무심하게 주변 풍경을 돌아볼 때 느끼는 이상한 떨림이 주는 충격 같은 것이다. 다만, 양정욱의 기계에는 소름 끼치는 검은 구멍과 흰 벽 대신에 그것을 해체하면 풀려나오는 몸짓과 소리가 있다. 반복하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무엇일까? 검은 구멍의 눈이 바라보는 인간의 초상, 삶의 진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