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소정

Interview
CV
교육
2011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미디어아트, 서울, 한국
2005
서울대학교 조소과, 서울, 한국
주요 개인전
2023
《오버톤》, 바라캇 컨템포러리, 서울, 한국
2022
《그린 스크린》, 리움미술관, 서울, 한국
2020
《새로운 상점》, 아뜰리에 에르메스, 서울, 한국
2017
《Kiss me Quick》, 송은아트스페이스, 서울, 한국
2015
《폐허》, 두산갤러리, 서울, 한국
2014
《밤이 다 되었으니 이 밤을 잊으십시오》, 두산갤러리, 뉴욕, 미국
2012
《이면의 이면》, 갤러리 팩토리, 서울, 한국
2010
《심경의 변화》, 인사미술공간, 서울, 한국
주요 단체전
2023
《올해의 작가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 한국
《보통 사람들의 찬란한 역사》, 경남도립미술관, 창원, 한국
2022
《감각의 공간, 워치 앤 칠 2.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샤르자 아트 파운데이션, 아크데스, 서울, 샤르자, 스톡홀름
《경계협상》,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볼프스부르크 시립미술관, 볼프스부르크, 독일
《찬란한 날들》, 울산시립미술관, 울산, 한국
《직면하는 이동성: 횡단/침투/정지하기》, 아르코미술관, 서울
2021
《CIRCA》, 피카딜리 라이트, 런던, 영국
《다원예술 2021: 멀티버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한국
《Border Crossings-North and South Korean Art from the Sigg Collection》, 베른시립미술관, 베른, 스위스
《전술들》, 백남준 아트센터, 용인, 한국
《They do not understand each other》, Tai Kwun JC contemporary, 홍콩
2020
《리듬 풍경》, 오타와시립미술관, 오타와, 캐나다
《아트 플랜트 아시아 2020 : 토끼 방향 오브젝트》, 덕수궁, 서울, 한국
2019
《In one drop of water》, 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 시드니, 호주
《디어 시네마: 차이와 반복》, 국립현대미술관
MMCA 필름 앤 비디오, 서울, 한국
2018
《Unclosed Bricks: 기억의 틈》, 아르코미술관, 서울, 한국
《허구의 마찰, HIAP –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 프로젝트》, 광주, 한국
《re: Sense》, 코리아나미술관, 서울, 한국
《동시적 순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
2017
《삼라만상: 김환기에서 양푸둥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한국
《L’Art au centre》, 팔레드도쿄, 파리, 프랑스
《Tell me the story of all these things. Beginning wherever you wish, tell even us.》, 빌라 바실리프, 파리, 프랑스
2016
Travelling 렌느 영화제, 렌느 미술관, 렌느, 프랑스
《제8기후대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 제11회 광주비엔날레, 광주, 한국
《퇴폐미술전》, 아트스페이스 풀, 서울, 한국
《Who’s Who》, 시청각, 서울, 한국
주요 펠로십 및 수상
2018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한국
2016
눈 예술상, 광주비엔날레, 한국
빌라 바실리프 페르노리카 펠로우십, 프랑스
2014
송은미술대상 대상, 송은문화재단, 한국
Critic 1
보조 모음
밸런타인 우만스키
I. 선형적이며 서구화된 시간
1884년 워싱턴 DC에서 국제 자오선 회의가 열렸다. ‘공통의 경도 0도이자 시간 계산의 표준으로 삼기에 적합한 자오선’을 결정하기 위함이었다. 회의는 불변의 참조점인 본초자오선을 설정함으로써, 보편적 시간 기준의 시행에 동참하였다. 달리 말해 조직과 통제의 체계가 세워져, 나머지 세계의 생활과 사유 구조를 규제할 터였다. 예술집단 블랙 퀀텀 퓨처리즘이 지은 표현대로 이 ‘서구화된 시간 구성체’는 140년 동안 최고의 자리에서 군림해 왔다.
그러한 일치의 풍경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전소정의 신작 <싱코피>(2023)는 패권적인 시간 기준이 신체와 정신에 가한 피해를 전경에 세워, 현실을 경험할 새로운 접근법을 제안한다. 시공간을 조작하고 무너뜨려 만든 30분 길이의 비디오를 통해 작가는 더 바람직한 가능태의 미래를 불러낸다. 서울, 족자카르타, 파리, 도쿄에서 촬영한 영상과 모바일 테라리움 앱으로 생성한 클립이 뒤섞인 몽타주는 도시들의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며 대륙을 힘차게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기계 운동을 뒤따른다.
노선 길이 9,289km에 달하는 기차의 곡선 여정을 따라가는 <싱코피>가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첫선을 보였다. 이 사실에서 빚어지는 울림이 있으니, 분단국가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세계 최장의 열차 노선은 대단히 상징적인 시도로 남아 있다.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의 태평양 항구를 빠르게 이어 러시아와 동아시아 간의 교역을 확장할 목적으로 탄생한 이 열차는 한국과 유럽이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으나 잃어버리고 만 기회를 뜻한다.
미학적, 문화적, 개념적 전환을 일으키며 <싱코피>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가상의 「은하철도 999」로, 즉 행성 사이를 달리는 증기기관차로 변모시킨다. 마츠모토 레이지(松本 零士)의 일본 만화를 직접 인용하며 전소정의 작업은 우주여행을 끌어안는다. 영상의 내러티브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의 토대가 되었던 러시아의 만주 및 한반도 확장의 시간과 인류가 정신을 기계 신체로 옮기는 법을 알아내 불멸을 달성하였던 「은하철도 999」의 허구적 시간을 융합한다. 작품은 서구화된 시간이 시공간과 속도를 관리하여 어떻게 민족국가를 건설하고 연결하는지를 상기시킨다. <싱코피>의 핵심에 있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통해 전소정은 훨씬 훗날인 1955년 한반도 분단으로 막을 내릴 일련의 과정을 촉발하였던 러일전쟁(1904-1905)의 불씨를 지핀 것이 바로 이 철도 건설이었음을 정확히 짚어낸다. 횡단열차는 우리가 살아가는 가속주의 시대의 상징으로도 소환되는데, 그 속도와 선형적 경로를 작가는 능숙하게 전복시킨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작품의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 열차는 영상을 실어 나르는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작은 빛들이 천천히 프레임 좌측 하단으로 들어와 우측 상단으로 빠져나가는 첫 장면과 스타워즈의 저 유명한 오프닝 크롤을 모방한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나무를 바라볼 때처럼 벽에 흩뿌려진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생성된 텍스트는 화면 위쪽으로 저 멀리 사라지는 듯 보인다. 차창은 줄곧 시야를 제한하고 시점을 조건 짓는 스크린 혹은 프레이밍 장치로 기능한다. 전시실에 세운 임시 벽은 이러한 발상을 모방한 것으로, 작품을 드러내면서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갑자기 한국의 어느 기차역에 경적이 울려 퍼진다. 영화도 이 글도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갈 시간이다.
II. 분기점과 미로
수학에서 분기이론은
주어진 곡선 군의 위상 구조 변화를 다루는 연구이다.
분기이론은 하나의 군 안에서 일어나는 분기를 연구할 전략을 제공한다.
하지만 보통 말로 하면 분기란 길에 난 기로이고,
선의 끊김이다. 열차의 탈선…
한층 효과적으로 구조적 당김을 구사하며, <싱코피>는 두 명의 주인공 사이에서 분기한다. 두 사람 다 뮤지션으로 인생의 행로에서 탈선을 겪었다. 셀리아 휴엣은 프랑스에서 인도네시아의 족자카르타로 이주한 이야기를 작가에게 들려주며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내 인생의 두 번째 파트가 이렇게 시작되려는 것인지도 몰라.”
셀리아는 영화의 시작 시퀀스에서 우리가 처음 만나는 인물이지만, 박수로 촬영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 끝나기 전 아주 잠깐 등장할 뿐으로, 그녀의 작품 등장 자체가 당김하여 이뤄진다. 한국에서 프랑스 가정에 입양된 셀리아는 이미 전소정의 전작 <Interval. Recess. Pause.>(2017)1에 출연한 바 있다. 그녀의 디아스포라 여정은 <싱코피>의 중심에 있으니, 인도네시아는 영화의 배경이 되고 때로는 박동하는 심장이 되기도 한다. 이 새로운 고향에서 셀리아는 가믈란 연습을 시작했다. 가믈란은 인도네시아의 자바, 순다, 발리 사람들이 연주하는 전통 합주 음악으로, 주로 타악기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의 중요 장면 중 하나에서 셀리아는 인도네시아에서 세카튼 가믈란 소리를 처음 듣고는 데자뷔 내지 데장탕뒤(이미 들은 듯한 기분)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그러자 재귀하여 돌아가고, 가믈란 음악 역시 재등장하여 장면 내내 이어진다. 악기들의 소리는 작품의 사운드트랙과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작품에 스며든다. 인터뷰 중 셀리아는 기억의 감각적 차원, 개인과 집단의 경험을 잇는 소리의 잠재력을 강조한다. 어쩌면 그래서 <싱코피>에서 셀리아의 회상이 종종 시각이 아닌 소리를 통해 전달되는지도 모른다. 결국에 싱코피란 기억 소실과 동의어가 아니던가?
우리가 마주하는 두 번째 인물은 전소정의 전작 <이클립스>(2020)에 출연했던 박순아로, <싱코피>의 4장은 그녀의 여정에 초점을 맞춘다. 북한 가야금을 연주하는 그녀는 재일교포 3세대이다. 조부모님은 한국이 분단되기 전 일본으로 이주하였고, 박순아는 북한으로 건너가 가야금을 배운 뒤 서울에 정착했다. 전통 가야금 연주자로서 박순아는 일본, 북한, 남한의 문화를 종횡한다.
셀리아 휴엣(Celia Huet)과 박순아 두 사람 모두 디아스포라적 여정의 분기점을, 즉 전소정이 애호하는 사이성의 공간을 분명히 드러낸다. 전소정은 본인과 사이 공간의 관계를 논하며, 이렇게 설명하였다. “제가 관심을 가져온 것은 ‘경계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 모호함인데, (…) 도시의 속도감 가운데 누락된 개인들의 이야기, 시간, 풍경 등을 다시 쓰기 하는데 애정을 두죠.” 전소정의 작업 전반에 번역과 자역의 개념이 거듭 등장하는데, <광인들의 배>(2016)도 그러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전소정은 세 명의 인물을 등장시키는데, 모두 실시간 번역에 참여한다. 낭독을 통해 하나의 문장이 한 언어에서 다음, 그다음, 또 그다음 언어로 차례차례 깎이며 바뀌어간다. <싱코피>는 그렇게 교차하는 길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다. 인도네시아 거리의 그래피티처럼 길의 이미지는 때로는 상징적이어서, 머리를 땋은 여성을 그린 그래피티 속 여성은 경계를 넘는 셀리아에 다름 아니다. 베트남의 시인 비키 나오(Vi Khi Nao)가 가족의 망명에 관해 쓴 글이 떠오른다. ‘대탈출의 혼란 속에서 유산탄과 유리 조각들이 살을 베어 상처로 할머니의 몸에 혼돈의 지도를 새겼고, 훗날 뿌리를 찾는 내게 지도와 나침반이 되어줄 전쟁의 갈림길들을 만들어 냈다.’
신화 속 인물인 카르나(Karna)와 바리데기도 비슷하다. 반신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들은 둘 다 삶과 죽음 사이를 떠도는 노마드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들은 디아스포라적 여정을 나선 방랑자들을 보호하는 부적과 같은 존재이다. 카르나는 미혼의 여성 쿤티(Kunti)가 몰래 낳은 아들이다. 혼전 임신에 대한 사회의 분노를 두려워한 쿤티는 갓 태어난 아들을 바구니에 넣어 누군가 길러주길 바라며 갠지스강으로 떠내려 보낸다. 한편 바리데기는 영혼을 죽은 자들의 땅으로 인도하는 존재이다. 아프리카 요루바 신앙에 나오는 신령, 에슈-엘레그바라(Èṣù-Ẹlẹ́gbára)가 생각났다. 그는 교차로, 시작, 기회를 나타내는 장난의 신으로, 두 번째 기회를 선사하는 존재이다… 이들 모두가 경계의 신이다. 하지만 내가 에슈-엘레그바라에게서 좋아하는 부분은 그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제한다는 점이다. 이 신령은 종종 열쇠 한 묶음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장난꾸러기인 그는 시간을 가지고 논다. 가속주의 같은 모더니즘의 선형적 구성체를 우회하며, 그는 탈선한다…
하지만 보통 말로 하면, 분기는 길에 난 기로이고 선의 끊김이다.
전소정의 전시는 미로를 연상시킨다. 관객은 일련의 설치를 지나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든 최신작에 다다르게 된다. 제일 처음 마주하는 작품은 전소정의 전작 <절망하고 탄생하라>(2020)이다. 한 편의 영상과 조각들을 품은 미로와도 같은 설치 작품으로, 금속 파이프로 만든 곡선형의 통로 구조물이 백화점을 연상시킨다. 영상은 이상의 초창기 시 한 편을 인용한다. 본명 김해경인 이상(1910-1937)은 한국의 가장 유명한 모더니즘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작품은 그의 시를 통해 한국의 동시대와 근대를 교차시킨다. 이상은「오 마가쟁 드 누보테」(AU MAGASIN DE NOUVEAUTES)라는 제목의 시에서 ‘근대’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근대와 자본주의 경제의 관계를 문제시한다. 이 작품의 첫 전시를 기획했던 큐레이터 안소연2은 시의 수수께끼 같은 특성에 주목했다. 시는 ‘불어 제목’을 ‘일본어, 한자, 중국어, 영어’와 결합한다. <싱코피>의 셀리아처럼 김해경도 디아스포라적이라 할 언어에, 즉 분기하는 길의 공간에 거주한다.
<절망하고 탄생하라>는 이런 디아스포라적 질문 몇 가지를 문제 삼는다. 영상이 미래와 과거 사이를 진동하듯, 미로는 그 미래주의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 발명된 워디안 케이스의 디자인을 내비친다. 영국의 제국주의적 연구의 산물인 이 식물상자는 의사인 너새니얼 백쇼 워드(Nathaniel Bagshaw Ward)가 외래종 식물을 본인의 지역 및 시간대로 옮겨오기 위해 발명한 것이다. 1842년 「밀폐 유리상자 내부의 식물 성장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그는 1833년에 시작한 실험의 내용을 상세히 다루며, 두 개의 유리상자에 영국 고사리류를 넣어 호주 시드니까지 배로 보낸 과정을 설명한다. 내용을 보면 몇 달에 걸친 항해에도 식물들은 건강한 상태로 도착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글을 읽고 궁금해졌다. 그가 식물학 지식을 얻으려 식민적 탐구를 이어가는 동안 과연 다른 식물들은 얼마나 많이 죽었을까… 전소정은 백쇼 워드의 상자를 연구한 다음 상자를 디지털 세계로 옮겨, 모바일 테라리움이라는 애플리케이션 형식의 3D 애니메이션 조각으로 만들었다. 전소정의 표현대로 이 ‘이주하여 흩어진 식물’들은 <싱코피>에도 나오는 열대 다육식물인 에피필름, 즉 공작선인장의 씨앗부터 시작해서 퍼져나간다. 비디오에도 등장하고 앱을 이용하면 전체를 볼 수 있는 이 식물-조각들은 새로운 환경 속에 옮겨 놓을 수 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식물들도 ‘여기에 살지만’ 여전히 ‘다른 곳을 욕망’3하는지도 모른다. <싱코피>의 5장에서 프랑스에서의 삶에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말하는 셀리아처럼 말이다. 에피필름은 밤의 여왕으로, 밤에만 꽃을 피우고 해가 뜨기 전 꽃잎을 다문다. 외래종 식물인 그들은 ‘이곳에 머무를 존재가 아니다’4. 터키에서 그리스로 배를 타고 오다 파도에 휩쓸리고만 4살 유수프와 2살 유누스도 다르지 않았으니, 아이들의 여정은 전시장 안쪽에 자리한 <광인들의 배>에서 언급된다4.
마지막으로, 수학의 영역에서 분기이론은 주어진 곡선 군의 위상 구조 변화를 다루는 연구이다. 처음 <싱코피>를 보았을 때 떠오른 말이다. 작품의 각 장은 손으로 그린 곡선과 함께 시작되는데, 각각 다른 모양의 물결 패턴이다. 작품이 끝나 크레딧까지 지나고 나면, 모든 곡선이 한꺼번에 다시 나타난다. 마치 분기하던 길들이 다시 한데 모여든 것처럼…
III. 급작스런 산소 공급 저하
1993년 사회학자 폴 길로이(Paul Gilroy)6는 검은 대서양이라 명명한 이론적, 역사적, 사회적 틀을 논하면서, ‘당겨진 시간’의 효과가 반문화인 동시에 근대성의 구성요소라고 설명하였다. 이듬해, 역사학자 제임스 클리포드(James Clifford)는 「디아스포라」7에서 ‘지워진 이야기를 되찾고’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 당겨진 시간의 생산적 가능성을 한층 강조하였다. 이 이야기들을 염두에 두면 <싱코피> 여행에 도움이 된다.
전소정의 작품명에는 의학의 맥락이 암시되어 있다. 싱코피란 때로 맥박이 느려지거나 중지되어 뇌의 산소 공급이 급격히 저하하여 일어나는 단기 인지 장애, 즉 실신을 뜻하기도 한다. 대부분 자연스럽게 의식이 회복되지만, 실신과 죽음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실신은 신체에 대한 궁극적인 통제 상실, 맥박의 중지, 음악과 서사의 중단을 나타낸다. 작품에서 자주 일어나는 방해 중 하나가 작가의 마이크이다. 철도 건널목에서나 카르나 이야기가 나올 때처럼 여러 장면에서 마이크가 화면에 거듭 끼어든다. 마이크의 존재가 이목을 앗아가 유예하였던 불신이 다시 고개 들게 하고, 원활한 흐름을 방해하며, 궁극적으로는 작가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당김은 무엇보다도 편집에서 가장 잘 발휘된다. 여러 장면에서 화면은 세 개의 수직 창으로 분할되고, 화면 속 풍경은 조각난 화면으로 나뉘어 들어간다.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한 듯한 가운데 수직 창의 화면은 선명하지만, 그 좌우에 나타난 배경 이미지는 확대되어 픽셀화된 광경을 펼친다. 프레임 중앙의 이미지에 변형을 가해 반복함으로써, 우리의 시점을 약간 흐트러뜨린다. 픽셀의 바다 한가운데 전소정은 의도적으로 시선이 움직일 중앙 경로를 만든다. 작가 카트린 클레망(Catherine Clement)이 말하듯, “싱코피는 언제나 소란을 일으킨다. 분별이라고는 모르고, 자기를 보라고 요구해 댄다. [...] 싱코피는 과시하며 자기를 노출하고, 제 흥분이 겨냥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부수고 깨뜨리고 가로막는다.”8
마치 내레이터가 당김의 박자로 광속 여행이라도 하듯,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영상의 리듬은 점점 더 템포와 또 마디와 충돌한다. 바로 그때 한국의 뮤지션이자 DJ인 소월이 무대의 중심에 선다. 흐릿한 배경 앞에서 핑거드럼을 연주하는 모습이지만, 그녀의 몸과 작업대는 중력을 넘어 프레임을 이탈하는 것처럼 보인다. 뒤편의 배경이 기차 안에서 촬영한 서울 도심의 이미지로 변한다. 이미지의 속도는 점점 줄어들어, 거의 휘청이는 수준으로까지 느려진다. 그러다 갑자기 기차가 탈선한다. 시공간 연속체를 벗어나는 도약이다. “결국 우리 모두 다 서로 다른 속도” 소월이 말한다. “그 틈에서만 살게 될는지도 모르지.”
히말리 싱 소인(Himali Singh Soin)의 <입자와 파도>(2015) 비디오를 처음 본 후 간격 속에는 무엇이 살까 자문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파도』에 드러나는 리듬 패턴을 연구한다. 싱 소인은 소설 전체에서 시간을 재는 요점 삼아 세미콜론만을 남기고 모든 말을 지웠다. 비트, 단어, 시간 사이에는 무엇이 살까? 전소정의 에피필름처럼 비밀스레 퍼져나가 자라는 식물이, 균사체가 있을까? 가믈란이 내는 어긋난 음정의 소리에는 무엇이 살고 있을까?
전소정과 마지막으로 이메일을 나누면서, 박순아가 터득한 가야금 왼손 기법의 핵심인 농현의 개념을 좀 더 설명해 달라고 청했다. ‘농현은 기보화 되지 않은 소리’, ‘빈 공간’, ‘악보 바깥으로 나아가는 여음’이라고 전소정은 답했다. 재미있는 일이지만, 이 작품과 소월에 관해 파고들던 와중에 읽은 인터뷰가 있다. 기자는 소월에게 비트의 정확성에 관해 물었는데, 어떻게 메트로놈이 녹음된 클릭 트랙 없이도 그토록 정확하게 비트를 유지하느냐는 질문에, 소월 역시 그 간극을 높이 샀다. “저는 템포에 집착하는데, 템포는 제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고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어요. 박자에 맞춰 연주하는 것은 저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하지만 핑거드럼을 연주할 때는, 드럼을 칠 때 신경 쓰던 것들을 다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조금 더 자유로워지죠.” “핑거드럼 연주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폴 길로이(Paul Gilroy)가 『블랙 애틀랜틱』에서 촉구하였던 ‘카운터 비트’의 관점에서 행할 수 있을까? 악기 가믈란의 이름은 자바어인 가믈에서 유래한 것으로, 가믈이란 나무망치로 치는 행위, 즉 비트를 뜻한다. 하지만 가야금과도 연결되는 가믈란의 독특한 점은 표준화되지 않은 음계의 합주에 의존하는 악기라는 것이다. 가믈란 한 세트를 이루는 악기마다 각각 음정이 의도적으로 어긋나 있고, 모두를 동시에 쳤을 때에만 공명이 발생한다. 화음의 지점에 다다르는 불협이다…
미술사학자 다리아 칸(Daria Khan)은 앞서《싱코피》라는 동명의 전시9를 기획하며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싱코피란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나는 ‘부드러운 간격’으로, 음악에서는 강세 없이 ‘비어 있는’ 비트로, 언어학에서 음절이나 글자의 단축 생략으로, 의학에서는 부분적 내지는 전면적인 의식 상실로 설명된다. 이번 전시에서 싱코피는 황홀, 지연, 누락, 전치를 은유한다.’ 다리아 칸처럼 나 역시 질문해 본다. 지금과는 다른 시공간 연속체를 위해 싱코피로 틈새 속에 강세 없는 비트를 추가해 넣을 수 있을까? 음운학자와 언어학자들이 이러한 발상에 맞는 개념을 생각해 냈으니, 이를 보조 모음이라 한다. 보조 모음이란 어떤 단어를 발음하기 쉽게 모음 개방의 수단으로 ‘짧은’ 모음 하나를 삽입하는 발음 규칙을 말한다. 잉여 소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싱코피>의 마지막 장면은 바로 그 틈새의 공간을 점유한다. 기차가 광속에 도달한 후, 클라이맥스에서 영상은 필름에 난 스프로킷 홀, 필름의 연결 자국, 깜박임 등 아방가르드 영화를 연상시키는 실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소월이 연주를 마치면, 마치 하늘에 남은 혜성의 꼬리처럼 그녀의 몸이 단속적인 슬로우모션으로 오류를 일으키며 잔상을 남긴다.
이 글을 쓰며 마지막 줄에 다다르자마자, ‘단서들’이라는 이름의 불가사의한 PDF 문서를 받았다. 전소정은 문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농현은 가야금 연주에서 원래의 음 이외 여러 장식음을 내는 가장 특징적이고 중요한 주법이다. 기보화 되지 않은 농현은 객관적이며 주관적이다. 꿋꿋한. 큰 파도와 같은.’
참고 문헌
전소정. 「단서들」. 2023년 10월 29일 이메일로 받음.
Clément, Catherine. Syncope, The philosophy of Rapture [싱코피, 황홀의 철학].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4. 328.
Clifford, James. Routes: Travel and Translation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항로: 20세기 후반의 여행 그리고 번역]. Cambridge, Mass. and London: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Gilroy, Paul. The Black Atlantic. Modernity and Double Consciousness [검은 대서양: 현대성과 이중 의식]. Verso London, 1993.
Powell, Amy L. Time after Modernism: Postcoloniality and Relational Time-Based Practices in Contemporary Art [모더니즘 이후의 시간: 동시대 미술의 탈식민성과 관계적 시간기반 실천]. Wisconsin: University of Madison Wisconsin, 2012. 276.
1 <Interval. Recess. Pause.>(2017)은 전소정의 작품이 설치된 《올해의 작가상 2023》 2 전시실 입구에서 상영되고 있다.
2 안소연, “Standing before dazzling novelty” [현혹하는 새로움 앞에서], 2020, 2023년 10월 29일 접속, https://junsojung-text.tumblr.com/.
3 제임스 클리포드(James Clifford), “Diasporas” [디아스포라], Cultural Anthropology [문화인류학], vol. 9, no. 3 (1994): 255.
4 각주 3과 같은 책・같은 곳.
5 전소정, <광인들의 배>(2016).
6 폴 길로이(Paul Gilroy), The Black Atlantic. Modernity and Double Consciousness [검은 대서양: 현대성과 이중 의식] (Verso London, 1993).
7 각주 3과 같은 책, 264.
8 카트린 클레망(Catherine Clément), Syncope, The philosophy of Rapture [싱코피, 황홀의 철학](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4), 251.
9 《싱코피》(Syncopes)는 다리아 칸의 기획으로 2021년 미모사하우스에서 열린 그룹전이다. 쇼크 리 탄, 히말리 싱 소인, 랄라 루크, 미라 캘릭스, 루스 베라하, 치안 치안 등의 작가가 참여했다.
Critic 2
아야미, 움브라 가르텐
배수아
집들. 서로 떨어져 들판에 가만히 웅크린 몇 채의 낮은 집들. 구름과 버드나무. 겨울. 구릉과 강과 다리. 침묵하는 소녀들. 지금-여기에 없는 풍경들. 한 친구가 그렸다고 하는 이미지이다. 친구는 그 사실을 편지로 알렸다. 그 친구가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여행 안내인이자 중고서점 운영자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를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우리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심지어는 서로의 사진을 본 적도 없고 단지 편지를 주고받았을 뿐이다. 첫 편지를 받은 건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이니 우리의 편지 교환은 참으로 긴 세월을 이어져 왔다. 물론 사이사이 서로에게서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수년이 지나버린 기간이 몇 번이나 있었다. 우연이겠지만, 내 인생의 사건이라고 부를 만한 몇몇 일들은 공교롭게도 늘 그런 편지의 공백기에 일어났다. (결혼, 직장, 휴가, 여행, 이혼과 실직, 작은 성공과 큰 실패, 파산, 질병, 출생과 장례, 서류를 필요로 하는 일들, 환희와 절망을 포함하며 삶의 가시적인 내용을 이루는 그런 일들.) 아마 친구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나는 상상해 본다. 마치 잠시 꿈이 멈춘 사이, 비로소 기계적 리얼리티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그런 시기가 끝나고 서로를 문득 떠올리면서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 우리는 불현듯 ‘그늘진 정원’에 있었다. (지난 몇 년간의 침묵을 깨고 우리는 다시 움브라 가르텐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글에서 나는 그 친구를 임의의 이름으로 부르겠다. 그 이름은 악숨(Aksum)이다. 우연히도 악숨은 이디오피아에 있는 한 도시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와 특별한 연관이 있는 건 아니다. 나는 한 번도 이디오피아에 가 보지 못했고, 당연히 악숨을 모른다. 어느 날 악숨의 제안이 있었다. 그는 내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내 초상화가 아니라, 나로 인한, 내게서 발화된, 나로부터의 어떤 그림을. 그 일을 위해서 나는 하나의 고유한 어휘가, 이름이 되어야만 한다. 혹은 그것의 소리가 되어야만 한다. 그 소리를 자신은 듣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어휘와 어휘 사이의 그 무엇으로 이루어져 흐르는 소리.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악숨은 내 도움이 약간 필요하다. 약간이긴 하지만 물리적인 모든 경계를 초월하는 내면의 도움이. 나 자신에 대한 묘사나 나 자신을 직접 서술하는 글이 필요하단 말일까? 그렇지 않다. 물론 내 사진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내가 필요한 것은 당신의 상상 자체입니다.” 하고 악숨은 썼다. “이 순간 당신이 당신의 그림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 봐요,” 하고 악숨은 내게 썼다. “상상해 봐요, 당신은 어느 날 여행지에서 우연히 미술관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예상치 못하게 하나의 그림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당신의 이름과 같아요. 그 그림은 당신입니다. 당신은 화가의 이름을 확인합니다. 그는 악숨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선취하여 보고 있는 그 그림은, 내가 아직은 그리지 않은 당신의 그림인 셈이죠. 그 그림 앞에서 당신이 듣게 될 것을, 당신의 귀로 울려올 어휘들과 어휘들의 반향과 그 반향의 반향을 내게 써 보내주세요. 당신의 그 글을 토대로 나는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고 당신에게 무언가를 불러일으킬 그림을. 그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그 그림이 불러일으킬 당신의 글이 앞서 필요해요. 당신의 상상을 앞서 선취하는 상상이 필요해요. 그리하여 우리는, 아니 그림은, 모든 것을 열어둔 채, 우로보로스의 우주로 들어서는 겁니다.”
이것은 어느 소설의 일부이다. 이것은 모두 어느 소설 속 어느 이야기의 일부일 것이다. 최초의 어휘를 말하는 순간부터, 우리 모두가 이미 존재하는 어느 이야기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산다는 것은 저절로 이야기의 일부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이 소설을 쓰면서 나는 마치, 나로부터 나와서 존재하게 될 터이나 동시에 이미 과거에 그것으로부터 내가 만들어졌던, 그런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쓴다는 것은 곧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를 쓰고 있다는 의미이다. 앞서 속삭이는 자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것을 섀도잉(shadowing) 한다는 의미이다. “당신이 듣게 될 그것을 들려줘요.” 하고 악숨은 썼다. 그것이 내 글이 되었다. 글, 글의 최초는 무엇이었을까. 글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아마 한 권의 책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가 일생을 맡기기로 한 그런 일들. 갑자기 나는 인파로 넘치는 커다란 역 광장 한가운데에 있다. “아야미(Ayami), 이제 우리 기차를 타고 가요.” 하고 내 일행이 말한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이 아야미인 것을 안다. 어디로 가기를 원하느냐고 내가 묻자 일행은 주저 없이 얄루 강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자신은 그 강을 모르지만, 중국과 코리아의 국경을 흐르는 강이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추리소설 작가인 그는 얄루 강 철교를 건너는 기차 안에서 죽게 될 한 여인의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고, 그래서 오직 그 이유 때문에 직접 얄루 강으로 가야 한다는 느낌을 가졌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는 낯선 나라인 한국으로 왔다고. 장소는 마법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야기를 간직한 오래된 장소들이 자신을 끌어당긴다고 했다. 하지만 비행기로 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비행은 초자연적으로 발을 잃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발은 회귀하는 힘이다. 한번 발을 잃으면 두 번 다시는 강으로 회귀하지 못한다. 내 일행은 다시 말했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 막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얄루 강 철교 위에서 죽은 여자의 이름을 “아야미”로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내 이름을 듣자마자 그 이름이 자신의 주인공에게 어울린다는 섬광 같은 영감을 느꼈다고 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예의상 내 허락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설사 내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내 이름을 자신의 주인공에게 부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걸 나는 잘 안다. 이름은 고유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타적인 소유는 분명 아니기 때문이다. 또 아야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부여한 이름인데, 그 역시 내가 어딘가의 책에서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책에서 아야미는 정령의 이름이다. 정령은 샤먼의 꿈에 깃들어 그와 결혼하고 그와 일생을 함께한다고 써 있었다. 또한 아야미는 속삭이는 존재이다. 아야미의 속삭임을 샤먼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내 일행이 쓴다는 추리소설에 대해서 나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심지어 아야미가 등장하게 될 그의 추리소설은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고, 이제 겨우 초안을 스케치하는 중이다. 하지만, 아야미라는 이름을 가진 여주인공이 죽는다면, 그건 내가 죽는 것과 얼마나 다를 것인가? 나는 본능적으로 아야미의 죽음을 가능하면 막아보려고 한다.
독일에서 온 내 일행에게 나는 가벼운 어조로 말한다. “우리는 얄루 강으로 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여기서 기차를 타고 얄루 강이 있는 중국의 국경에 닿을 수는 없으니까요. 당신이 있는 이 나라는 섬과 같아요.” 내 일행은 크게 실망한다. 그리고 자신은 코카서스 동쪽으로 넘어온 적이 처음이어서 잘 몰랐다고 변명한다. 종종 하나의 문장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미지로 이루어진 문장이다. 조각난 어휘들 사이로 나는 간다. 내가 찾는 것은 언어도 글도 아닌 목소리이다. 동시에 엄습해 오는 여러 감각, 문법을 뛰어넘어 속삭이는 목소리를 나는 글의 형태로 옮겨보려고 시도하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내게 앞서 말해진 목소리와 그것을 받아쓴 문자 사이의 끝없는 간극이 불러일으키는 현기증이 있다. 하지만 때로 그 현기증은 쓰는 행위에 자유를 준다. 글쓰기란 목표를 찾아 질주하는 경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한없이 폐쇄적인 환경에서, 제한적인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예를 들자면, 얄루 강 철교를 건너는 야간열차의 객차. 예를 들자면, 개인의 일생이라는 섬. 예를 들자면, 미디엄(medium)의 구슬 안에서 일어나는 전 생애. “그러니까, 당신이 쓰는 글이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란 말인가요?” 내 일행이 다시 묻는다. 나는 추리소설을 쓰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 모든 말의 풍경은 사실 이곳에 없다. 이 대화는 한 번도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나와 내 일행의 만남은, 얄루 강은, 기차는 한 번도 있지 않았던 사건이다. 세계는 분리할 수 없는 눈들이 동시에 꾸는 꿈과 같았다. 나는 글과 목소리라는 이중 구조를 가졌다.
미디엄의 속삭임: 당신은 모르고 있지만, 내 이름은 밀(Mill)이다. 나는 그것을 M이라고 쓴다. 이름은 어머니로부터 왔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 이름은 나와 같은 밀이었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는 밀로 불리웠다. 그런데 나를 밀이라고 부른 사람은 어머니가 유일하다. 어머니 이외의 사람들은 나를 전혀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와 직장, 관청과 서류에서, 결혼과 이혼에서, 출생과 죽음에서, 나는 다른 이름으로 존재한다. 서류상의 이름, 공식적으로 익명을 선언하는 이름이다. 어머니로부터 떠나온 뒤 나는 내 이름을 잊었지만, 그러나 어느 날 아침, 내가 편지를 받은 이후부터, 나는 가장 많이 밀이 된다. 이것은 어느 소설의 일부이다. 밀은 희박하고 투명한 경계를 가졌다. 밀은 흐르고 관통한다. 이야기의 처음에 나는 한통의 편지를 받는데, 발신인과 수신인의 이름이 모두 밀이었다. 그것은 내게 이름을 주는 편지였다. 편지가 어떤 시간과 공간을 거쳐 마침내 내게 도착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편지가 내가 태어나던 해에 쓰였으며, 모종의 사정 때문에 이런저런 주소를 떠돌다가 내게 도착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오늘 아침 분명 베를린에서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밀은, 내 사랑 밀, 단 한 번도 태어난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 채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먼 곳을 향한 밀의 그리움은 오염되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선험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렇다면 반대로 나는 상실로 충만한가?
나는 내 일행에게, 나는 사실 한 그루의 나무라고 밝힌다. “그러므로 나는 국경을 넘을 수 없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단 한 번도 국경을 넘어가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에서 처음 만나지 않았던가요?” 하고 내 일행은 당황하면서 반박한다. “그때 당신은 앞좌석 등받이의 접이식 탁자에 노트북 화면을 펼치고 내가 읽을 수 없는 외국어로 글을 쓰고 있었지요.” 그래도 나는 내가 사실은 나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나에게는 한 예술가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의 전시가 어느 산 속 오두막에서 열렸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돌이 든 무거운 배낭을 지고 산길을 올라갔다. 몇 개의 돌을 반드시 짊어지고 가야만 했다. 하여간 그의 전시회에서 나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입맞추는 광경을 보았다. 원래 곡물창고이던 오두막의 높은 천장에 매달린 나무는 미세한 공기의 흐름, 습도와 온도 변화, 바람의 유무에 따라 특정 방향으로 잔잔하게 흔들렸고, 기후와 물리적인 법칙이 우연히 허용하는 짧은 순간에는, 바닥에 쓰러진 다른 나무의 가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전시회가 열리는 열흘 동안 우리는 오두막의 앞마당에서 침낭을 깔고 노숙을 했고 각자 준비해 온 마른 빵과 비스킷, 강가의 사과나무 열매로 끼니를 해결했다. 가을에 가까운 늦여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는 가장 먼저 밤 사이 떨어진 사과와 버섯을 주워 모았다. 햇빛이 뜨거운 낮에는 강에서 수영을 했다. 해가 지면, 오두막의 문과 창을 모두 열고 전시장의 조명을 켰다. 나무가 반짝이기 시작한다. 주방에서 직접 만든 사과 조림을 빵에 올리고 따뜻한 우유를 끼얹은 감자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사과는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우유와 감자는 이웃 농가에서 얻을 수 있었다. 밤에는 모닥불에 데운 돌과 함께 침낭으로 들어갔다. “권력과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중심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방식으로 하나의 혁명이, 하나의 예술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을까요?” 하고 악숨은 편지에 썼다. 그 질문은 나를 매혹시켰다. 그가 ‘성공’이란 어휘 대신 ‘생존’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전시회의 마지막 날 밤, 우리는 가지고 온 돌을 마당에 쌓았고 친구는 전시장에 있던 바싹 마른 두 그루의 나무를 그 위에 올리고 불을 붙였다. 나무는 오래오래 탔다. 우리는 재가 되었다. 재는 지금 형체를 잃은 그 어떤 것이 거기에 있었다는 암시이다. 지금 여기에 없는 사물과 풍경이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재. 베를린으로 돌아오는 밤 기차에서, 나는 그 전시에 대한 인상을 짧은 스케치로 기록하려고 했다. (권력과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중심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방식으로) 때때로, 도저히 맞설 수 없는 무한한 파도와 같은 감정이 나를 압도한다.
아야미는 여니(Yoni)라는 가명으로 한때 텔레폰 파트너 일을 했다. 오디오 극장의 사무원으로 얻는 수입이 너무 형편없었던 것도 한 이유였다. (“텔레폰 파트너라니, 그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혹시 일반적인 텔레폰 섹스 서비스를 완화해서 부르는 명칭인가요?” 하고 내 일행이 도중에 끼어들며 묻는다.) 게다가 극장은 곧 문을 닫을 예정이니 아야미는 실업자가 될 것이다. 아야미는 여니라는 이름을 행방불명된 자신의 독일어 선생에게서 빌려왔다. 몇 년 동안 아야미는 매일 여니의 집으로 가 독일어 강습을 받았다. 여니는 낡은 트렁크 속에 쌓여 있는 자신의 독일어 책과 노트 그리고 편지들을 꺼내 아야미에게 읽어주었다. 그것이 그들의 강습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니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갑작스럽게 사라져버렸으며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오직 불려진 이름만이 남았다. 몸을 잃은 이름은 재와 같다. 재는 먼지와 암시로 이루어진 어휘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여니를 찾아 나섰다. 내 일행은 여니에게 관심을 갖는다. 여니가 독일어 개인교습 교사와 텔레폰 파트너라는 두 가지 이질적인 직업을 동시에 가졌던 것도 (혹은 그것은 아야미였던가?) 그의 흥미를 끈다. 추리소설에 어울리는 설정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여니는 어떤 여자였나요?” 하고 내 일행은 생각날 때마다 묻는다. 여니는 마치 살짝 그늘진 빛 속에 잠긴 정원과도 같은 여자라고 나는 대답한다. 당신의 꿈속에서 매일 밤 나타나는 그런 정원 말이다. 어린 시절에 앓은 열병 때문에 심하게 얽은 얼굴과 익숙해진 오랜 고독도 아마 그와 무관하지는 않을 거라고. 일행은 여니를 아야미의 도펠갱어로 만들고 싶다고 한다. 물론 자신의 추리소설 속에서. 아마도 아야미는 여니라는 이름으로 죽을 것이다. 혹은 여니는 아야미라는 이름으로 이미 죽었을 것이다. 혹은 죽음 이후에도 아야미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사는 것일까? 나는 여니라고 불렸던 아야미일까? 혹은 그 반대인가. 때때로, 도저히 맞설 수 없는 무한한 파도와 같은 감정이 나를 압도한다. 내게 이름을 준 자를 생각한다. 그는 어느 날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편지봉투를 연다. 편지를 손에 든 순간 일생만큼 오래된 종이는 재가 되어버린다. 나는 탄다.
이름이 선물이라는 것을, 나는 알타이에서 처음 배웠다. 나는 초원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주변에는 끝없는 녹색 구릉과 양 떼, 분화구에 고인 차갑고 푸른 호수, 대지의 뼈와 같은 돌들이 굴러다닐 뿐이었다. 내가 알타이로 간 것은 그곳에 있는 스키타이족의 무덤을 보기 위해서였다. 안내인이 가리킨 스키타이족의 무덤은 커다란 구덩이에 흙을 덮어놓은 모양의 널찍하고 나지막한 둥근 봉분이었다. 초원 한가운데, 어떤 표시도 안내판도 없었다. 아마도 나는, 내가 거기로부터 왔을지도 모르는 어떤 장소, 어떤 상징 혹은 이름을 발견하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멀리서 말 떼가 달려갔다. 목동들이 말 떼를 뒤쫓고 있었다. 스키타이족의 무덤 앞에서 누군가 갓 태어난 망아지를 내게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아직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망아지라고 했다. 고맙지만 선물을 받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망아지를 집으로 데려갈 수가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당신은 망아지를 집으로 데려갈 필요가 없어요. 그럴 수도 없고 그건 안 되는 일입니다. 망아지는 당연히 어미말의 곁에, 자신의 종족들과 함께 머물러야 해요.” 안내인이 설명했다. “우리가 망아지를 선물한다는 것은, 망아지에게 당신의 이름을 붙여준다는 의미입니다.” 그사이 말 떼를 뒤쫓아 간 목동들이 밧줄을 이용해 망아지를 잡았고 내 앞으로 데리고 왔다. 나는 안내인이 시키는 대로, 이제 망아지의 것이 될 내 이름을 불렀다. 사람들은 금빛 사발에 든 마유주를 한 모금씩 나누어 마시고 나머지를 공중에 뿌렸다. 그건 신의 몫이었다. 바로 내 할머니가 하던 방식이었다. (한 숟갈의 밥과 고기를 공중에 뿌려라.) 선물은 전달되었다. 사람들은 밧줄을 풀어주었고, 망아지는 미친 듯이 말 떼를 향해서 달아났다. 내 이름이 이곳 스키타이의 땅에 머문다. 어미말의 곁에, 자신의 종족들과 함께.
실종된 여니를 찾아 나선 밤에, 내 일행이 나와 동행한다. 그렇게 해 주면 내가 내 이름을, 아야미를 그의 여주인공에게 빌려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공중전화 박스를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여니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나 매번 전화를 받는 것은 여니가 텔레폰 파트너용으로 녹음해 둔 자동응답기의 목소리이다. 일행은 내게 그것을 번역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나는 여니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일행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그래요, 당신은 여니와 대화를 하고 싶군요. 여니도 그렇답니다.” 이렇게 그 목소리는 매번 속삭였다고 말한다. “나는 당신을 위한 하나의 이야기를 갖고 있거든요. 그걸 먼저 들려드릴게요. 귀 기울여봐요……” 내 속삭임이 계속되는 동안 일행은 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이건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텔레폰 파트너의 서비스라고 하기에는 좀 일반적이지가 않아 보이네요…… 아마도 여니의 사업은 대단한 수익을 올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해요.” 그에 대한 설명이 될지는 모르지만, 여니 역시 아야미와 마찬가지로 가난했다고 나는 말한다. 여니의 텔레폰 파트너 서비스는 고객이 몇 명뿐이었고, 무엇보다도 독일어 교습생은 아야미 단 하나뿐이었으니 방세 내기도 힘겨웠을 거라고. 일행은 이해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기차를 타기로 한다. 얄루 강으로 갈 수는 없지만, 여니는 기차를 타고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이것은 내 일행의 주장이다). 상상해 봐요, 하고 그가 말한다. 상상해 봐요, 만약 당신이 궁극적으로 달아나고자 할 때, 지금-여기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또 다른 지금-여기를 간절히 원할 때, 아무도 모르게 그것을 원할 때, 그때 당신은 어디로 가는 기차에 올라타게 될까요. 예를 들자면.
우루(Uru). 그것이 내 대답이었다. 우루는 하나의 이름이다. 그 이름은 어느 날 갑자기 내 머릿속에서 최초의 태양처럼 갑작스럽게 솟아올랐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그 이름이 인류 최초의 도시 중 하나에서 왔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루는 브라질 북부의 어느 작은 마을의 여관에서 자신의 모든 기억이 사라졌음을 깨달으며 잠에서 깨어난다. 사실 우루에게 기억이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최초의 것은 축적된 기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정령이 그런 우루의 몸에 들어오기를 원한다. 정령은 몸이 필요하다. 원래 깃들어 있던 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거주할 몸, 집을 잃은 정령은 오랜 시간 동안 헤매고 다녔다. 우루를 찾아 나선 기나긴 여행이었다. 정령은 속삭임이다. 정령이 새로이 깃든 몸은 정령의 기억 역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우루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는 저절로 타오르는 떨기나무의 불이다. 아니 그것은 음악인가? 아니 그것은 시인가? “상상해 봐요.” 내 일행은 말한다. “상상해 봐요, 여니는 아무도 모르게 떠나버린 겁니다. 당신은 여니의 유일한 교습생이자 유일한 친구였으니 어쩌면 당신에게 편지를 남겼을지도 몰라요. 여니는 그 편지를 중앙역 우체통에 넣었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아직 당신에게 도착하지 않은 거겠지요. 상상해 봐요, 여행을 떠난 여니가 어느 날 갑자기 기차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기억을 모두 잃었을 거라고. 그래서 여니는 이름을 잊었고, 당신을 잊었고, 낯 모르는 어떤 장소에 도착한 순간 자신을 우루라고 믿게 되었다고 말이에요.”
이것은 어느 소설의 일부이다. 그 일이 시작되던 때, 우체부가 왔고 나는 편지를 건네 받았다. 편지에는 내가 태어나던 날의 일들이 적혀 있다. 때때로, 도저히 맞설 수 없는 무한한 파도와 같은 감정이 나를 압도한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그날의 일을 고스란히 기억에 간직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내가 아직 반투명한 막에 싸인 약간의 소금과 물, 속삭임, 그리고 그 밖의 연한 성분에 불과하던 날의 일을. 그날, 풀 한 포기 없는 이 황량한 세상에서, 당신의 이름은 움브라 가르텐(속삭임: 나는 마치 살짝 그늘진 정원 같아요, 당신의 꿈 속에서 매일 밤 나타나는 그런 정원 말이죠.), 누구인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을 내 귓가에서 속삭이는 자는, 아마도 그리하여 나는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리라. 수많은 세월이 흘러가버린 다음에야 잃어버린 몸의 기슭에 도달하게 될 편지, 밀, 내 사랑 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