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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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CV
교육
2008
예일대학교 그래픽디자인 석사, 뉴헤이븐, 미국
2000
서울대학교 디자인과 산업 및 시각디자인전공 학사, 서울
1998
서울대학교 기악과 피아노전공 학사, 서울
주요 개인전
2020
《오민: 초청자, 참석자, 부재자》,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서울
2018
《연습곡》, 아틀리에 에르메스, 서울
2017
《Notations》, 두산갤러리 뉴욕, 뉴욕, 미국
2016
《1 2 3 4》, 두산갤러리, 서울
2015
《오민: TRIO》, 디뮤지엄 프로젝트 스페이스 구슬모아당구장, 서울
2012
《모음곡》, 네덜란드 중앙은행 미술관,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2011
《사물이 진솔하게 말하고 노래하는 법》, 에어퍼트 미술관, 에어퍼트, 독일; 오노마토피, 아인트호벤, 네덜란드
주요 그룹전
2021
《토마》, 공동기획: 박수지, 오민, 토탈미술관, 서울, 대한민국
《워치&칠》, 온라인 스트리밍 전시와 국립현대미술관, 대한민국 ; M+, 홍콩; MAIIAM, 태국; MCAD, 필리핀
《▭이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 수원시립미술관, 수원, 대한민국
2020
《Liebesding – Object Love》, 모르스브로이히 (Morsbroich) 미술관, 레버쿠젠, 독일
2019
《액면가로 ( ) 받아들이기》, 기획: 킴킴 갤러리, 호주문화원 갤러리, 시드니, 호주
《포에틱 딕션》, 포항시립미술관, 포항, 대한민국
2018
《Nuit Blanche》, 파리국제예술공동체 (La Cite internationale des arts), 파리, 프랑스
《2018 타이틀매치: 이형구 vs. 오민》,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서울, 대한민국
《Object Love》, 드 도메이넨 (De Domijnen) 미술관, 시타르트, 네덜란드
《소장품 특별전: 동시적 순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대한민국
2017
《2017 송은미술대상전》, 송은아트스페이스, 서울, 대한민국
《장면정면전면직면》, 기획: 방혜진,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서울, 대한민국
《무빙/이미지》, 기획: 김해주, 아르코미술관, 서울, 대한민국
(screening) 《Le monde Plié》, 라 제네랄 (La Générale), 파리, 프랑스
《스코어: 나, 너, 그, 그녀(의)》, 대구미술관, 대구, 대한민국
2016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가상현실》, 수원시립미술관, 수원, 대한민국
《유명한 무명》, 기획: 김성원, 국제갤러리, 서울, 대한민국
(screening) 《La Nuit de l’Instant》, 마르세이유 엑스포, 마르세이유, 프랑스
《관계적 시간》, 아르코미술관, 서울, 대한민국 (라익스아카데미와 공동 주관)
2015
《MOVE & SCALE》, 시청각, 서울, 대한민국
《2015 랜덤 액서스》, 백남준 아트센터, 용인, 대한민국
2014
《젊은 모색 2014》,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대한민국
2013
(screening) 《모던 타임스: 모던 하우스키핑》, 씨네마 자우드 (Cinema Zuid) 기획, 스크리닝: 아이 (EYE), 필름 미술관 스크리닝,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시네마 자우드 극장, 안트베르펜, 벨기에
2012
《라익스아카데미 오픈》, 라익스아카데미,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KAAP》 라우헨후크 요새 (Fort Ruigenhoek), 흐로네칸, 네덜란드
2011
《라익스아카데미 오픈》, 라익스아카데미,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주요 기금 및 수상
2021
서울문화재단, 서울
2020
송은문화재단, 서울
2020
서울문화재단, 서울
2019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
서울문화재단, 서울
2018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
서울문화재단, 서울
2017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서울, 대한민국 & 파리, 프랑스
송은미술대상 우수상, 서울, 대한민국
2014
도머링 파운데이션,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주요 레지던시
2018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레지던시, 파리, 프랑스
2017
두산레지던시 뉴욕, 뉴욕, 미국
2014-2015
파리국제예술공동체 아티스트 레지던시, 파리, 프랑스
2014
금천예술공장 입주작가, 서울
2011-2012
라익스아카데미,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주요 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두산갤러리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송은문화재단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네덜란드 중앙은행,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라익스아카데미,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Critic 1
근대의 시간성을 해체시키는 감각 실험
임근혜 (아르코미술관장)
오민의 작업은 기존의 매체나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이를 해체, 교차 또는 확장하는 실험성,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가-협업자-관람객의 관계 형성 방식과 그를 위한 태도, 근대적 시스템이 길들인 정형화된 시간성을 전복시키는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점으로 인해 흥미롭다.
작가의 작업에 관한 텍스트에 음악 용어와 개념이 주를 이루는 까닭에 미술 언어에 익숙한 관람객은 그 텍스트들을 다소 생소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민이 “음악의 보편적인 구조를 활용해 불안의 감각을 다루는 작가”이고, 음악적 요소가 작업의 본질이라기보다 상황과 사물을 ‘통제’하는 방법이나 재료라는 점을 이해하면 조금 다가가기 쉬워진다. 작가는 초기 작업이 “자기 고유의 통제 영역을 침범하는 외부의 힘에 대한 반감과 조소”를 담고 있고 이후 모든 작업에서 “규칙, 시스템, 의식, 위계 등 모든 통제의 방법을 고민”한다고 밝힌 바 있다. ‘소리 없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의 영상 작품은 작가가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써 선택한 음악적인 구성을 통해 퍼포머의 행위를 통제하고 이를 극도로 절제된 조형미로 영상화하여 미묘한 긴장감과 미적 쾌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역설적으로, 작가의 작업이 더욱 흥미롭게 전개되는 시점은 작가 자신이 강박적으로 추구한 완벽한 통제가 타인과 우연의 개입으로 인해 흔들리는 순간부터다. 작가는 2010년까지 촬영, 녹음, 퍼포먼스, 내레이션, 작곡, 연주 등 작업 전 과정을 혼자 했으나, 시간을 ‘개념적으로 사유’하고 ‘재료로써 구성’하는 수행적 실험을 위해 시간예술에서 타 장르의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쌓는 동시에 적절한 거리와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타인과의 협업’은 궁극적으로 ‘작가의 욕망과 가치에 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즉, 일방적인 지시에 따르는 일사불란한 퍼포먼스와 달리 협업은 “완벽한 통제를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영감을 얻거나 기술적 폭을 넓혀가는 즐거움을 발견”하면서 스스로 타협점을 찾아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갈등과 충돌을 감수하고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견디는 예술가, 협업자, 관람객으로 형성된 일시적 공동체의 감각이 오민의 작업을 더욱 여유로우면서 단단하게 만든 것 같다.
작가는 최근 천착하고 있는 ‘시간의 속성에 대한 연구와 실험’을 위해 공연의 현존성과 이미지와 사운드를 결정화된 시간 속에 집적시킨 영상 간의 관계와 구조를 연구하면서 “신체가 시간을 감각하고 운용하고 소비하고 발생시키는 방식을 탐색한다. “이는 시간의 개념을 실질적으로 구현하거나 사운드와 이미지를 통해 시간 감각을 생성시키거나 시간예술의 재료와 형식에 대한 다양한 질문 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작가의 관심사는 다소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자신과 세계에 대한 관계의 (재)설정과 일상적 감각의 (재)구축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차원에 맞닿아 있다고 유추해본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시공의 감각이 사실 오랫동안 사회 시스템에 길들여진 결과일 뿐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요소 사이의 새로운 연결성을 찾고 통제의 긴장과 협업의 유연함을 아우르며 기존의 틀과 규범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식과 감각을 연마하는 오민의 수행적 작업에서 거대한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개인적 주체성을 지키려는 수고로움이 느껴진다. 코로나19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진 지금, 기존의 담론을 재생하거나 시류에 편승하기보다 내면에 귀 기울이며 자신만의 방법론을 만들어가는 새로운 작업이 기대된다는 이유로 오민을 2021 올해의 작가로 추천했다.
참고 문헌
기혜경·방혜진·안소연·주일우. 『2018 타이틀 매치: 이형구 vs. 오민』. 서울: 서울시립미술관. 2018
방혜진. 「A/B: 오민X방혜진 대담」. 『오큘로』, 2016년 3월.
오민.『부재자, 참석자, 초청자』. 서울: 작업실유령, 2020.
오민. 『스코어 스코어』. 서울: 작업실유령, 2017.
이정선. 「오민, 음악의 구조를 실험하다」. 『헬로! 아티스트』. 2016년 12월 20일 자. 2021년 10월 1일 접속.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80967&cid=59154&categoryId=59154
Critic 2
위태로울 만큼 긴급한 지금-여기
박수지(독립큐레이터)
들어가며
여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긴급한 것과 가장 중요한 것은 대체로 일치하지 않는다. 긴급한 것은 다수의 목소리로 규합되고, 요청되면서 그 시급성을 더욱 확실하게 증명받는다. 때로는 당연, 긴급하기 때문에 중요해지기도 한다. 반면 중요한 것이 늘 긴급해 보이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탄생 이후 세간의 평가가 쌓여, 어느 시대에서든 훌륭하게 여김 받으며 재방문 되는 것이 자명한 작품을 일컬어 고전(classic)이라고 칭하는 것이라면, 예술에 관한 한 줄곧 중요시 되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중요한 것은 수백 년이 지나도, 또한 중요성을 호명하고 요청하는 주체의 개별성 혹은 기호와는 별개로, 그저 중요하다. 예술의 역사에서 오랜 기간 중요성을 차지해온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새로움이 분명하다. 새로움은 실험되고, 혹사당하고, 도전받고, 진부해졌다가, 다시금 부활하면서 끊임없이 회자되었다. 예술에서의 새로움은 사회의 변혁, 문화의 발굴, 전통의 전복을 위해서 전략적으로 요구된 가치가 아니었다. 새로움 그 자체의 운동성은 새로움을 발동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새로움은 일종의 고전적 가치다.
그렇다면 더 이상 새로움은 없다는 명제는 어떤 오만의 발로일까, 아니면 일종의 포기일까, 혹은 현학적 수사일 뿐일까? 예술이 새로움에 복무하기 위해서 창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새로움에 관한 극단적인 논의는 너무 과장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새로움에 대한 판단은 어디까지나 판단 주체의 경험과 앎에 의거하게 된다는 점에서 대단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는 감각을 인지하고 해석하는 주체인 ‘나’의 감각지가, 켜켜이 쌓인 다채로운 경험치 만큼이나 낡은 것일 수 있다는 의심을 암시한다. 또한 ‘나’는 기껏해야 100년을 살고, 알고자 해봐야 서기 2000여 년의 과거에 대한 완전한 앎이란 있을 수 없으니, 지금으로부터 고전이 될 만한 예술작품을 가늠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만큼 예술가는, 특히나 감각에 대해서라면 자신의 것을 가장 신뢰하는 동시에, 자신의 것을 완전히 배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오민은 자신의 앎을 지속적으로 확장해가면서, 자신의 앎에 대한 믿음을 0으로 돌려놓는 일을 서슴지 않는 드문 기질의 예술가 중 하나일 것이다. 이 확장의 방향성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만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과거에 대한 회귀도 아니라는 점은 그가 구축하는 앎의 체계를 독특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에게는 모종의 사명감이 있는 것 같다. 흥미롭게도 그 사명감에는 소위 ‘목적’이 없다. 목적이 없다는 사실이 그 사명감을 흥미롭게 만든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때의 목적이란 행위가 행위 그 자체로부터 충족하고 충족되는 것 외에, 행위를 수단화하여 얻고자 하는, 행위 그 자체의 참된 기쁨과는 유리된 결과물을 일컫는다. 활동하는 인간, 그중에서도 예술가에게 있어 기예(technē)와 탐구(methodos), 행위와 선택1은 그 자체로 대단히 의미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들 행위의 동기와 과정, 추구하는 바와 지양하는 바를 궁금해한다. 이어지는 글은 예술가 오민의 예술관, 태도와 관점, 수행과 구성을 뒤쫓는다. 더불어 한 가지를 시도해본다. 오민의 개별 작품들 고유의 특이점에 대해 순차적으로 일일이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작품에 대해 동시에 이야기할 수 있을까?
기예(technē)와 탐구(methodos), 행위와 선택
“그래서 만약 ‘행위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들(prakton)’의 목적이 있어서,
우리가 이것은 그 자체 때문에 바라고, 다른 것들은 이것 때문에 바라는 것이라면,
또 우리가 모든 것을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이 좋음이며, 최상의 좋음(ariston, 최고선)일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러니 이것에 대한 앎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큰 무게를 가지지 않겠는가?”
- 아리스토텔레스, 「제 1권, 제 2장 최고선과 정치학」,『니코마코스 윤리학』2
오민은 줄곧 자신의 모국어를 음악 연주라고 말해왔다. 이 진술로는 작가가 모국어에 얼마만큼 능통한지, 과연 여전한 애정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모국어의 시원성이 내포하듯, 그에 따른 오랜 시간이 그 언어에 투여되어 있음을 짐작해보는 것은 가능하다. 이 시간은 아마도 연주자의 관점과 태도로 신체와 사유를 벼려온 과정이었을 것이다. 연주자의 관점이란 무엇일까? 화가의 태도, 조각가의 관점과 견주어 어떻게 다를까? 셋 모두에게서 수행이 일어난다는 점은 동일해 보인다. 다만 연주자의 수행의 결과로 발생한 소리는 ‘흘러가는’ 시간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즉 발생했다가 ‘사라진다’는 점에서 다소 명징한 차이를 갖는다. 이는 마치 우주의 섭리와도 같은 ‘자연스러운’ 상황이지만, 발생했던 소리가 사라진다는 것, 즉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을 정면으로 맞이해야 하고, 불멸성을 억지로 꾸밀 수 없고, 가시화된 물질로 남길 수 없으며, 무한한 척할 수 없는 음악 연주의 세계관은 오민에게 주지할만한 질문을 남겼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간 오민은 “과연 미술에서 시간을 재료로 받아들인 것이 맞는지”를 질문해왔다. 미술의 역사와 시간은 결코 떼어낼 수 없는 화두임이 분명한데도 이 질문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오민이 이야기하는 미술에서의 시간은 요컨대 함축된 시간, 깊이로써 쌓인 시간, 드러나지 않는 시간, 비선형적인 시간, 흐르지 않는 시간, 안 들리는 시간 등의 ‘관념적 시간관’을 일컫는 듯하다. 이 시간관은 흥미로운 작품이 탄생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가 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민은 시간의 가장 가혹한 실체, 1분 1초가 흘러가며 발생시키는 변화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오민에게 ‘재료로서의 시간’은 무엇일까? 이 논의를 위해 우선 그가 정의하는 예술의 재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예술의 재료는 소위 전통적인 물질 재료들 외에도, 빛과 소리, 움직임 등의 비물질적인 재료로 확장되어왔다. 오민은 이에 덧붙여 “미술에서 재현을 다룰 때 긴밀하게 연관되어 온 사건, 역사, 문화 역시 재료에 포함된다. 이는 내용 혹은 주제 역시 재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게다가 “형식 역시 재료가 될 수 있으며, 질문과 사유 또한 재료”라고 말한다. 심지어 “재료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재료를 대하는 태도 역시 재료 연구에 포함된다”라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예술의 형식(form)’에 대해 오민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형식이란 확장된 재료들이 맺는 물리적, 관념적, 역사적 관계를 의미하며, 그 관계에 따라 결과적으로 만들어지는 관계 구조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덧붙여 “형식은 사유하는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계기이며, 사유의 도구이자,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요컨대 오민에게 재료란 가시성을 기반으로 한 물질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민의 재료는 복잡성과 순수성을 동시에 갖는다. 그는 수행자의 몸짓, 타인의 생각, 관객의 경험 등 통제할 수 없고,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는 영역까지를 재료로 삼는다. 이는 통제 불가능한 사건을 발생시킨 뒤, 그저 작품의 결과로 수용할 뿐이었던 기존 미술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오민에게 형식이란 조형화를 가능하게 하는, 내용을 담는 틀에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내용은 곧 형식이며, 형식은 예술의 외관이나 소통 방식의 꾸밈이 아니라 예술의 근원적인 실체가 된다. 이때 예술가의 기예와 탐구, 행위와 선택은 비로소 재료, 형식, 구성, 관계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논의는 예술가의 자기 정립으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이 정립은 결코 완성되는 법이 없다. 완성 불가능의 특성은 예술의 발생 동력이자, 무구한 예술 지향의 다른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급진적인 관계의 충분조건들
“의미의 위기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예술과
전해 내려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기록 명제들로 이루어진 체념적인 예술 사이의 경계선은
다음과 같은 데에서 찾을 수 있다.”
- T. W. 아도르노,『미학이론』3
가장 급진적인 정치에는 목적이 없다. 이는 재료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사유하는지에 관한 작가의 태도와도 직결된다. 오민은 종종 ‘감각재료 사이의 대등함’에 대해, ‘어떤 것이 다른 것의 배경이 되지 않는 상태’에 대해 질문하곤 한다. 이때 ‘대등함’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대등함은 지위의 등급, 즉 위계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운동이 아니다. 여러 재료를 동등하고, 동일하며, 공평하게 구성한다는 것은 즉 아무런 차이를 발생시키지 않고자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며, 즉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기 때문이다. 결국 감각재료 사이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고유 특질의 유효성 차원에서 독립성을 지닌다. 각각의 상호 인정과 깊은 이해만이 이 독립성을 와해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등함’은 총체적인 감각 상태에 관한 순수한 지향에의 충분조건이 된다. 달리 말하자면 진정한 최고의 정치, 즉 목적 없는 행위가 행위 그 자체를 촘촘하게 포개고 있는 상태가 바로 ‘대등함’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급진적 관계 설정에 있어, 어떤 조건을 고려해야 하는가? 오민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종속적인 관계, 필수적인 관계에서부터 질문을 시작하는 것 같다. “음악에서 소리는 필수적인가?”라는 질문은 과연 음악은 어떤 조건들로 정립되는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 질문 방식은 여러 질문을 파생시킨다. 미술에서 이미지는 필수적인가? 사유에서 체계는 필수적인가? 결국 우리가 ‘자연스럽게’ 여기는 거의 모든 것에 제동을 거는 이 질문 방식은 경험을 구성하는 상식과 통념에 강력한 문제를 제기하며, 그 자체로 충분히 급진적인 예술 모델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민은 급진적인 제스처에 그치지 않는다.
확장된 재료 개념과 급진적 형식 개념을 충족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예술로 논하기 어렵다. 그러나 요즘의 전시장에서 ‘예술가’가 나열을 구성이라고 부르며 안주하고, 결합을 창조라고 일컬으며 만족하는 관성에 쉽게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역할이 실험되는 것과 호칭이 남용되는 것의 차이는 재료의 구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오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성은 합리성의 체계 안에서 재료들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과정인 동시에, 수많은 변수를 받아들이는 복합적인 활동이다. 구성은 여러 확장된 재료들이 확장된 형식 안에서 맺는 모든 크고 작은 관념적/실질적 관계이자,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선택하고 결정하는 활동이다. 창작자와 재료 간의 멈추지 않는, 어디로 갈지 장담할 수 없는 운동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구성은 창작의 모든 선택 과정을 포괄하는 운동성의 집합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불확정적인 운동성의 총체인 예술작품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에 직면하게 되는가?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나는 벗겨지면서 반쯤 뒤집어져 안과
밖이 동시에 보이도록 말려있는 양말 한 켤레를 상상했다.
또한 분명 끊임없이 이동하는데 좌표상으로는 제자리에 머물러있는 운동을 가정했다.
한편, 수많은 가지 중 어느 부분이 잘렸고 어느 부분이 잘리지 않은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상태로 다듬어진 정원수를 떠올렸다. 안과 밖, 전과 후, 자연과 가공.
분명 양립하는 다른 두 가지가 굳이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하게 그리고 단정하게 얽혀 있는 상태를 그려보았다.”
- 오민,『강진안, … 57스튜디오,』4
요즘 들어서 나는 문해력(literacy)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문해력은 언어라는 공통의 약속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소통에 근거한다. 때문에 세계를 인식하고 사고를 형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때 언어는 문자로 구성되기도 하지만, 감각 정보들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문자 혹은 감각 정보를 눈 뜨고 본다는 것에 그치는 일이 아니다. 보는 것을 사유하는 것, 들은 것을 이해 가능한 상태로 재구성하는 것을 뜻한다. 어쩌면 문해력은 곧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채 이해의 영역으로 끌어당기는 일인 셈이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일과, 눈에 보이는 것을 발생시키는 이면의 것을 ‘보는’ 일은 어떻게 다른가? 후자는 생각의 다른 말이다. 물론 여기서의 ‘보기’는 세계와 나 사이의 살갗으로 밀려드는 진동 모두를 포괄하는 감각을 일컫는다. 그러니 시간을 마주한다는 것은 어떠한 종류의 내러티브를 보는 일과 같다. 더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시간은 그 자체로 내러티브다. 이때 아주 분명하고 완고한, 그와 동시에 미시적이고도 거대한 차이를 인식하게끔 의도된 것을, 구성된 내러티브로 본다. 그리고 그 내러티브의 특성을 어떻게 파악하느냐가, 어떤 시간을, 어떻게 보는지를 결정짓는다.
내러티브의 창작과 이해에는 몇 가지 능력이 요구된다. 하나의 구성 안에서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하며, 기억과 상상을 동원해 전과 후,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연결시켜야 한다. 연결이 매끄러운 경우를 우리는 보통 전형적인 내러티브로 여긴다. 가령 우리는 대중문화에서 제공하는 내러티브를 금세 이해한다.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발생과 반응이 충분히 예견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지각, 인지, 감각, 사유, 지식, 상상 등 모든 것을 총동원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오민의 경우, 내러티브는 “시간의 수평적 구조와 그 흐름”을 의미하고, 텍스처는 “시간의 수직적 구조와 동시성”을 말한다. 오민의 작품을 보는 일은 이러한 내러티브와 텍스처의 덩어리를 하나의 공고한 세계로 맞닥뜨려야 하는 과정이다. 그러니 이 세계에 ‘그저 있음’과, ‘보면서 있음’은 대단한 차이를 갖는다. 이 차이는 감각하는 개별 주체에 의존한다. 이때 보는 것은 곧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민이 줄곧 말해왔던 ‘동시성’은 현실에서 구성되고, 주체에게서 와해된다. 와해는 곧 재구성이다. 봤던 것을 기억하고, 볼 것을 예상하며, 보이는 것으로부터 자꾸만 빠져나가는 그 모든 과정은 무한한 가짓수로 열려있다.
불가능한 완성과 열린 결정
“연습곡에는 ‘연습’과 ‘최종’ 두 가지 개념이 공존한다.”
-오민, 『에튀드』5
언젠가 오민은 “전시가 시작되어도 작업은 끝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작품의 완결을 결정하는 예술가의 판단에 관한 질문은 회화와 조각을 막론하고 자주 등장하는 질문이다. 이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작가는 어떻게 알게 되는가? 때때로 예술가는 ‘만족’과 ‘충분’으로 완성을 결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오민에게 있어 ‘완성’은 일종의 ‘가변성’의 다른 말인지도 모른다. 그에 앞서 오민이 자신의 ‘영상’ 작품을 ‘시간 기반 설치(time-based installation)’로 부르기로 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상은 기본적으로 한정적인 지속시간(duration)을 전제로 한다. 필연적으로 특정한 시간을 구성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이때 오민의 구성은 이미지의 배치에 치중해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이미지와 소리를 발생시키는 ‘움직임’과 ‘변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러니 매체의 넓은 구분 정도인 영상이라는 단어는 불충분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즉, ‘시간 기반 설치’의 등장은 구성의 내용이자 형식으로서의 시간이 전시장에서 매번 새로운 형태의 설치로 드러난다는 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때, 작품이 시간을 기반으로 하는 설치라면, 자연스레 작품의 완성이란 공간에 배치된 시간 그 자체가 된다.
완성에 관한 그의 아이디어는 ‘연습곡(étude)’으로 출발한 일련의 작품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연습곡(étude)이란 연습을 위해 작곡된 간단한 악곡을 뜻한다. 연주자가 기술을 연습하기 위한 교본이자, 때로는 그것 자체로 높은 예술성을 지닌 완성된 연주곡이 되기도 한다. 작가에 따르면 연주자는 전체 악보에서 연주하기 어려운 부분을 따로 뽑아, 원곡과는 다른 템포, 리듬 또는 악센트로 연습한 다음, 원래의 연주 방식으로 돌아가곤 한다. 이 연습을 통해 음악가를 둘러싼 모든 감각, 인식, 몸, 소리가 변화하고 연주가 음악의 본질에 더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연습과 완성은 어떤 차이를 갖는가? 애초에 시간을 연습과 완성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시간은 결코 연습 되는 법 없이, 무한히 새롭게 완결된다. 우리는 매초의 완결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아가거나, 이것이 ‘쌓여’ 어떤 완성에 가 닿기를 희망하지만, 이런 사고는 환영에 가깝다. 연습은 곧 다수의 완성이다. 달리 말해, 시간 기반 설치는 항구적인 완성의 가능성을 영원히 유보하면서 만들어내는 한시적 원본으로서의 완성인 것이다.
오민은 한 인터뷰에서 “시간은 얄궂은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간은 발생시키고 사라지게 한다. 결국 지금-여기는 항구적으로 도달되자마자 도착하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을 일컫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이때 공연의 구성 혹은 수행의 순서나 방법에 대한 기록을 일컫는 스코어는 과연 무엇을 완결시키고, 무엇을 가능하게 하며, 어떤 종류의 미완을 예고하게 될까? 스코어가 향후의 시간을 구성하는 내용과 형식을 미리 예비하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발생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원래의 질문을 교란시키고, 자꾸만 되돌아가게 하고, 의심하게 하고, 반추하게 하는 스코어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엇일 수 있을까? 스코어가 동일한 규칙을 지닌 악보라던가, 최대한 해석의 이탈이 없도록 고려된 지시문이라던가, 완벽하게 기록된 결정체가 아닌, 무한한 해석이 가능한 지금-여기의 구성 원리라면? 이쯤에서 오민의 질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완전 질문(question total)의 탁월성
질문은 답을 예고하는 것이 아닐 때 성립한다. 무언가에 질문이 생기는 때는 답을 기대하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지만, 질문 그 자체로 생각을 팽창시키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러니 좋은 질문이란 사유와 사유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오래도록 탐구하도록 지구력을 부여하는 도움닫기이자, 차이가 발생시키는 마찰을 열광적으로 즐기도록 만드는 부싯돌이다. 즉, 질문에는 오래전부터 의구심을 품어왔지만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는 갈증과, 부정확하지만 자신의 앎을 토대로 예견 해볼 법한 응답의 상태가 함께 들어있다. 더불어 좋은 질문은 그다음 질문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렇다면 질문 역시 고전이 될 수 있을까? 몇백 년을 버티며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 있을까?
흥미롭게도 오민의 질문은 진보 혹은 발전의 메커니즘과는 거리가 멀다. 각각의 오민 작품이 갖고 있는 질문은 늘 현재형이다. 과거의 질문이 지금의 질문보다 뒤처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가 작품을 통해 길어 올린 질문 중에 해소되어 폐기된 질문은 없어 보인다. 각각의 작품은 재료의 선택, 관계의 배치, 수행의 종류 등에 따라 주요하게 제기하는 질문이 현격하게 달라지지만, 하나의 작품에서 다른 작품 속 질문도 견주어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의 질문은 하나의 발생이 있기까지, 그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갈래를 낱낱이 사고한다. 공연예술 그 자체에서 발견 가능한 요소들에 대한 재고, 음악 공연과 무용 공연의 차이, 공연예술과 영상 작품의 창작의 차이에 대한 의문들로 구성되어 왔고, ‘시간 기반 설치’로 공연을 할 수 있는지 묻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일련의 질문들은 파편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차이이자 반복으로서 완전하다.
그럼에도 근원을 재고하게 하는 오민의 질문은 우주의 탄생사라던가, 모종의 불가지론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관계에 관한 그의 사고가 사물과 사물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따져 묻는 동시에 상대적 독립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대적 독립성을 통해 비로소 추상의 공간이 열린다. 모든 사물이 변화한다는 사실이 행위 자체를 무색하게 만들지 않는 이유는, 지금-여기를 둘러싼 온갖 변화 사이에서 주장하고, 투쟁하며, 논의하고, 탐구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변화 사이에서 실시간으로 도출되는 사유에 시간과 공간을 마련할 의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우리가 ‘질문’이라는 것을 30년 동안 생각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질문에 관해 어떤 개념을 얻게 될까? 우리는 무엇을 어디까지 사고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 상세하게 고려할 수 있는가? 통합적인 인식과 상세한 발견은 서로를 지탱한다. 이미 충분한 밑줄을 그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펼쳐보면 새로 발견하게 되는 문장이 있는 책처럼, 오민의 작품을 볼 때마다 발견하게 되는 질문의 차이란 그 자체로 충분한 기쁨이 되고야 만다.
최고의 각성 상태
“내가 만든 영상에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수행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정말 가만히만 앉아 있는 경우는 없다.
등장인물의 대부분은 훈련된 무용가이고 정교하게 짜인 스코어를 최고의 각성 상태로 수행 중이다.”
- 오민, ≪오민: 초청자, 참석자, 부재자≫(2020) 中
오민의 작품에서 무엇이 움직였는지, 누가 어떤 수행을 하고 있는지 들을 수는 있지만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움직이는 사물 혹은 수행하는 인물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으로 간주될만한 또 다른 수행자가 무언가를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은 가능하다. 작가의 말마따나 이 모든 것은 정교하게 짜여 있다. 그렇다면 오민의 작품에서 작가는 어디에, 어떻게 위치하는가? 연주를 모국어로 삼는 오민은 스스로를 작품의 짜임 안에 삽입하는가 혹은 작품 외부에 놓는가? 영상과 공연을 오가는 오민의 작품에서 작가는 언제나 어떠한 종류의 수행 중이다. 그가 종종 예시를 들곤 하는 것처럼, 공연을 가장 흥미롭게 볼 수 있는 관객은 아마도 그 공연을 만든 안무가 그 자신일 것이라는 추측과 마찬가지로, 오민의 작품을 가장 흥미롭게 지켜보는 이는 오민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 저자로서 차이를 가장 섬세한 단위까지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며, 반복으로부터 비동일성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작가와 작품 사이의 관계가 어떠하든 간에, 오민의 신체와 사유는 언제나 무수한 지금-여기를 오가며 도무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관객 또한 마찬가지다. 싱글 채널 작품이든, 두 개 이상의 채널을 가진 작품이든, 오민의 작품을 보는 경우의 수는 무한하게 증폭된다. 채널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 채널로만 파악 가능한 일, 그 채널이 설치된 전시장의 상황까지 모든 요소는 매분, 매초 처음 발생하는 시간이 된다. 게다가 이때의 채널은 프로젝션의 채널과 사운드 채널로 다시 구분된다. 이것은 작품을 보는 주체가 다르기 때문이며, 더 상세하게는 경우에 따라 보고, 듣고, 생각하는 요소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그 누구도 같은 시공간에서 같은 작품을 동일하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오민의 지금-여기를 독특한 위상으로 옮겨놓는다. 한편, 이미지를 보고 소리의 시각적 근원이나, 이야기를 파악하려 드는 습관은 작품을 보는 데 때때로 방해가 되기도 한다. 방향, 색, 포커스, 거리, 밸런스, 질감, 노이즈, 속도, 사운드, 순서, 패턴, 카운트, 제스처, 표정, 생각, 기억이 재료로서 구성된 작품에서 모두가 모든 것을 한 번에, 동시적으로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여러 번 보고, 보기를 연습한다면 다르다. 이때 관객의 신체에 나름의 각성 상태가 요청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불가능성을 거스르는 훈련으로서의 보기는 작품의 독해를 다른 차원으로 옮겨놓는다.
세계라는 시간의 총체 안에 새롭게 구성된 시간을 만드는 오민의 지금-여기에 접속하는 일은 꽤나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일단 접속을 시도하면, 다중의 지금-여기 중에서도 가장 긴급하고도 선명한 지금-여기가 ‘최고의 각성 상태’로 나를 여기에 있게 만든다. 그러다 보면 결국 오민의 작품을 글로 옮긴다는 것은,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가진 시공간을 하나하나 다 써보기를 시도하거나, 그 시공간 자체를 덩어리째 옮겨와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마저 품게 된다. 깨어있는 상태로 현존하는 경험은 이토록 다층적이고 강렬한 일이다.
나가며
1990년대를 변곡점으로 미술계는 새로움을 ‘주제’에 집중시켜왔다. 여러 시대적 테제와 세계적 이슈를 경유해오면서, 지금 미술계에서 가장 주요하게 ‘새로움’으로 명명되는 주제는 ‘정의로움, 옳음 혹은 평등함’에 관련된 요소들로 주목되는 것 같다. 여기서 위치 지을 수 있는 예술가의 애매한 입장은 몇 되지 않는다. 사회학적 화두를 예술가의 관점으로 가시화해 공개적인 고발자가 된다거나, 인류가 인간중심주의적인 면모를 반성하도록 종용한다거나, 조형화한 대상에 당대의 유행과도 같은 주제로 의미부여 하는 일에 심취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니 이제 3~4년 남짓 주기로 교체되는 ‘주제’는 예술가가 사유하는 재료라기보다, 지금 ‘유행하는 새로움’의 일원이 되어 소속감을 얻는 도구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갸우뚱거리게 된다.
누군가의 신념은 어떻게 신뢰받는가? 어쨌든 예술가는 어느 특정한 시기에만 살아있으며,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생존 시기와 함께 번성하기도, 예술가의 사후에 특별히 고려되기도 한다. 예술가의 진정한 야심은 당대에 있을 수 없다. 고전에 최소 100년의 시간이 필요한 만큼, 예술가의 질문은 지금-여기에 있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이 삼은 과제는 대체로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한 헌신적인 반응처럼 보인다. 예술가 고유의 질문은 타인이 인정할법한 질문으로 빠르게 대체되어 간다. 이제 역사를 비추어 예술의 존립이 가장 위태로워진 시기에 진입한 것이 아닐까? 그러니 가장 정치적이며, 긴급한 지금-여기는 바로 이 시대가 누락하고 있는 질문이 있을 수 있는 지금-여기가 아니겠는가? 오민의 다음 질문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것 같다.
1 “모든 기예(technē)와 탐구(methodos), 또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제 1권, 제 1장 좋음과 목적」, 『니코마코스 윤리학』, 강상진, 김재홍, 이창우 옮김(서울: 도서출판 길, 2011), 13.
2 같은 책, 14.
3 T. W. 아도르노,『미학이론』, 홍승용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1997), 245.
4 오민, 김성완, 신예슬, 『강진안, 공연화, 김민정, 김성완, 배기태, 슬기와 민, 신예슬, 신진영, 심우섭, 오민, 옥상훈, 이민성, 이신실, 이양희, 이영우, 이태훈, 이혜원, 장태순, 정광준, 조세프 풍상, 한문경, 허윤경, 홍성진, 홍초선, 57스튜디오,』(서울: 스펙터 프레스, 2019).
5 오민, 장지혜, 『에튀드』(서울: 스펙터 프레스, 2018).
Critic 3
그림자를 드러내기 위한 빛
신예슬(음악 비평가)
올리비아는 생각했다. 때로는 생각 속에서 빠져나와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을 바라보았다. 크레인에 매달린 카메라, 돌리 위의 카메라, 사람 손에 쥐어진 카메라가 모두 올리비아를 향해 있었다. 올리비아는 다시 생각 속으로 들어갔고, 아주 잠깐은 생각하는 몸짓만을 연기하다가 성대를 진동 시켜 허밍으로 노래했다. 소리는 입을 닫았음에도 몸 밖으로 새어 나왔다. 올리비아는 다시 생각했다. 동시에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카메라들은 같은 방향을 바라봤지만 서로 미묘하게 다른 장면을 포착했다. 빛과 색을 받아들이는 방식, 초점을 맞추는 속도, 그리고 어떤 물체나 신체에 매달려 있느냐에 따라 그들이 매개하는 장면과 움직임은 서로 달라졌다. 카메라들은 최적의 장면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방향을 잡아보는 것처럼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들은 올리비아를 가장 또렷이 보다가도 그의 등 뒤에 놓인 벽지를 가장 선명히 바라보았다.
벽은 때때로 움직였다. 제 자리를 지키다가도 어느 순간에 위치를 바꾸었던 가벽에는 선명한 패턴으로 이루어진 노란빛의 벽지가 붙어있었다. 벽지는 일렁거리는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날 그곳엔 총 세 종류의 벽지가 준비되어 있었고, 올리비아 뒤에 놓인 벽지는 한순간에 달라져 있곤 했다. 세 벽지 모두 또렷한 색과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어 어떤 빛이 비치느냐에 따라 그 벽지가 사뭇 다르게 보였다.
조명은 계속해서 색과 위치를 바꿨다. 살구색, 갈색 등 여러 색의 빛을 벽과 인물에 비췄고, 얼굴을 밝히기도, 실루엣을 드러내기도, 얼굴을 절반만 비추기도 했다. 빛은 장면에 녹아들거나 인물의 일부가 되지 않고 스스로의 목적에 따라 움직였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던 동시적 영역에서 빛 또한 색과 형상을 끊임없이 조형했다. 아마도 빛의 입장에서 모든 것이 균형 잡힌 상태를 찾아가기 위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 속 올리비아와 카메라와 벽과 조명,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일견 한 시공간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5채널 영상, 8채널 사운드를 통해 네 주체의 움직임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이것이 아무래도 ‘같은 시간’ 같지 않다는 작은 의심이 피어올랐다. 처음엔 동시에 한 장면을 다른 각도로 찍은 것이라 믿었지만, 어떤 때는 다른 시간에 찍은 다른 테이크를 여러 채널에 동시에 배열한 듯했다. 이따금 들려오는 허밍 소리는 올리비아를 카메라로 촬영한 시점에 노래된 것이라 이해했지만, 어느 순간엔 올리비아가 허밍한 시간과 화면에 등장한 시간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 같진 않았다.
여기서 시간은 일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았다. 시간은 어떤 식으로든 꼬여있었다. 그리 낯설 것 없는 행위들은 예상치 못한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든 일이 동시에 벌어진 것 같다가도 어느새 현재와 과거가 동시에 펼쳐지는 듯했고,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다른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 같았고, 무언가 반복될 때면 저것을 과거의 재현으로 보아야 할지, 과거와 다른 현재로 보아야 할지 모호했다. 시간의 어긋남이 연쇄했다. 알 수 없는 시점이 교차하던 이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운동하던 이들의 총체를 도대체 무어라 명명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도달했다.
열쇠 말
‘헤테로포니’라는 말은 내게 이 작업의 비밀을 풀어주는 거의 유일한 열쇠 말이다. ‘이질적인’, ‘다른’이라는 뜻을 지닌 접두사 ‘Hetero-’와 소리를 뜻하는 접미사 ‘-phony’를 합성한 이 단어는 음악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상태를 일컫는다.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 뿐, 이런 상태는 생각보다 일상에서 꽤 자주 만날 수 있다. 예컨대 두 사람이 같은 노래를 흥얼거린 것이 확실하지만 들려오는 소리가 분명히 다를 때. 두 사람이 같은 노래를 부르는 도중 한 사람이 노래를 일부 변형해 불렀지만 그것이 여전히 같은 노래일 때. 이처럼 같음과 다름 사이를 모호하고 유연하게 오가며 서로 얽힌 상태를 우리는 헤테로포니라 칭해왔다.
물론 다른 ‘-포니’들도 있다. 서양음악에서 목소리들이 얽히는 방식을 지칭하는 개념은 헤테로포니 외에도 모노포니, 호모포니, 폴리포니 등이 있다. 모노포니는 하나의 목소리, 즉 단선율 음악을 뜻한다. 호모포니는 하나의 목소리를 주선율 삼아 그 아래에 화성적으로 반주를 쌓은 형태를 말한다. 폴리포니는 목소리들이 독립적으로 각자의 노래를 부르다 여러 교차점 위에서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다선율 음악이라 부를 수도 있다. 이들의 차이는 목소리가 하나냐 여럿이냐, 그리고 목소리들 사이에서 중요도의 우선순위가 있느냐 없느냐다.
이들은 내게 이런 형상을 상상케 한다. 모노포니는 단 하나의 선적 움직임. 호모포니는 벽돌들로 쌓아 올린 성벽. 폴리포니는 가로로 넓게 뻗은 평행선들과 그 사이를 잇는 몇 개의 수직선들. 그리고 헤테로포니는 엉킨 실들로 이루어진 선이자 덩어리인 것. 모노와 호모, 폴리는 비교적 형상이 또렷한 데 비해 헤테로포니의 형상은 명쾌히 규정하기 어렵다. 이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 혹은 다르면서도 같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관점에 따라 헤테로포니는 다른 것들이 ‘같음’을 지향하는 것이라 볼 수도, 같음 안에서의 ‘다름’을 지향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주체들이 헤테로포니적인 상태 안에서 맺는 관계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헤테로포니가 선사하는 어떤 흥미로움이 있다면, 그건 표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의 얽힘만이 아니라 듣는 자를 때로 혼란스럽게 만드는 목소리들의 ‘관계적 상태’일 것이다. 같음과 다름의 경계면에서 벌어지는 미세한 움직임들, 같아지려고 모여드는 목소리들, 같은 것에서 다른 것으로 분화되려는 목소리들은 헤테로포니라는 상태 안에서 계속해서 발견된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감각과 인지의 불일치는 어디까지가 같은 소리고 언제부터가 다른 소리냐는 질문을 건넨다.
문제는 오민이 만들어낸 헤테로포니가 소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리 객체들이 다른 사물 같은 것으로 단순 치환된 것도 아니다. 여기서는 소리의 자리에 손쉽게 바꿔 넣을 수 있는 다른 대상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어떤 위상반전이 이루어진다. 음악에서 발견되는 헤테로포니는 일정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가 얽히며 만들어내는 상태를 지칭했다. 시간은 조건이자 범위였지 헤테로포니적인 상태를 만드는 재료는 아니었다.
그러나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라는 제목은 헤테로포니라는 상태가 이질적인 ‘시간들’로부터 만들어짐을 밝힌다. 나의 방식으로 풀어쓰자면, ‘같거나 다른 시간들로부터 발생하는 엉킨 선이자 덩어리 같은 상태’라는 것이다. 목소리들의 엉킴이 아니라 시간의 엉킴은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가. 목소리들의 덩어리가 아니라 시간의 덩어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시간들은 왜 헤테로포니적으로 만나는가. 보통의 헤테로포니에서 듣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선율의 같음과 다름을 파악하고 그들의 관계를 추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에서 보고 듣는 자는 시간의 같음과 다름을 파악하고 그들의 관계를 추적해보라는 무언의 제안을 받았다.
시간의 구조
다시, 여기엔 올리비아와 카메라, 벽, 조명이라는 네 주체가 있다. 이들은 각자의 안무를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한다. 네 존재자가 각자의 안무를 수행하는 데는 꼬박 3분이 걸린다. 네 주체의 움직임은 독립적이지만, 이 3분이라는 시간은 각자의 움직임이 ‘함께 변화하는’ 기점에 따라 다섯 부분으로 세분될 수 있다.
a. 올리비아는 무언가를 본다. 카메라는 올리비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조명은 실루엣이 보이도록 빛을 비춘다. 벽은 그대로 있다.
b. 올리비아는 움직인다. 카메라는 살짝 뒤로 빠졌다가 다시 올리비아 쪽으로 다가간다. 다른 조명이 추가되어 올리비아의 얼굴을 밝힌다. 벽은 그대로 있다.
c. 올리비아는 생각한다. 카메라는 좌우 상하로 계속 위치를 바꾼다. 또 다른 조명이 추가되어 벽을 밝히고 짧은 주기로 빛의 색을 바꾼다. 벽이 조금 움직인다.
d. 올리비아는 허밍한다. 카메라는 서서히 한 위치로 고정된다. 조명은 점점 사그라든다. 벽이 왼쪽으로 움직인다.
e. 올리비아는 촬영팀을 바라보며 즉흥적으로 움직인다. 카메라는 올리비아에 초점을 맞추다가 벽에 초점을 맞추기를 반복한다. 조명은 얼굴에 그림자를 만든다. 벽은 오른쪽으로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네 주체의 행동은 서로 교차하며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만약 이 3분짜리 시퀀스가 이 작업의 전부였다면 이것은 ‘헤테로포니’가 아니라 ‘4성부 폴리포니’에 가까웠을 수도 있겠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그다음의 문제다.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에서는 이 시퀀스가 총 다섯 번, 미묘하게 다른 조건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아래의 구조로 설치됐던 5채널 영상 중에서도 동그라미로 표시한 채널들이다.
3분짜리 시퀀스가 다섯 번 반복되는 동안, 내가 파악한 것이 맞다면 각 반복에서는 다음의 큰 조건 변화가 발생한다. (각자가 포착한 변화는 아래 내용과 전혀 다를 수 있다.)
첫 번째. 세 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찍은 장면들을 동시에 펼쳐놓는다.
두 번째. 한 대의 카메라로 다른 시간에 찍은 세 개의 테이크를 동시에 펼쳐놓는다.
세 번째. 두 채널은 동시지만 한 채널은 다른 시간이다.
네 번째. 올리비아를 보여주던 세 채널 중 두 채널이 촬영팀의 두 인물을 비춘다.
다섯 번째. 세 개의 다른 벽지가 동시에 공존한다.
동시지만 카메라가 다르고, 카메라는 같지만, 시간이 다르고, 한 쌍의 같은 시간과 다른 시간이 공존하며, 다른 사람과 다른 벽이 등장한다. 분명히 무언가 반복되는 것 같지만 분명히 무언가 불일치하는 이 상황은 의뭉스럽기 그지없다.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미진한 영역이 생긴다. 이들을 서로 독립적인 사건들로 볼 수도 있지만, 그 경우 이 사건들 사이에 발생하는 친연성이 발목을 잡는다. 이들을 반복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여기엔 반복이 어느 정도의 닮음까지 포용할 수 있냐는 질문이 뒤따른다. 나아가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것을 과연 ‘반복’이라 부를 수 있냐는 근본적인 물음도 기저에 깔려 있다. 아마 이런 물음은 시간 기반 장르에서 등장하는 모든 반복에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에는 이런 물음을 생성하는 순간들이 넓게 포진해있다. 나는 이 다섯 번의 시퀀스로부터 모종의 이질감을 느낀다. 일방향으로 흘러 마땅한, 믿음직스러운 전제처럼 굳건히 자리를 지켜줘야 할 것만 같은 ‘시간’이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생각이 이어진다. 동시(同時)처럼 보이는 것과 이시(異時)처럼 보이는 것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정말로 동일한지 다른지, 아까의 것인지 지금의 것인지, 그 어느 때의 것도 아닌지 의심스럽다.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에서 오민은 도대체 왜 이러한 시간의 꼬임을 구성하는가.
오민의 ‘지금-여기’
작가 오민은 연주를 모국어 삼아 시각예술의 언어를 다루며 시간 기반 작업을 만들어왔다. 시기에 따라 주제는 조금씩 달라지곤 했지만, 작업들은 모두 연쇄하는 질문 속에서 만들어졌고, 그 주제들은 결코 분리되지 않은 채 촘촘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중 몇 개를 일별하자면 다음과 같다.
공연자들의 신체에서 발생하는 집중의 표정과 촬영된 매체에서도 발견 가능한 ‘공연성’[<마리나, 루카스, 그리고 나>(2014)], 시간예술의 재료와 연습, 표현의 탐구[<이영우, 안신애, 그리고 엘로디 몰레>(2015)], 사물과 움직임이라는 구체적인 언어로 재구성된 소리 관계[<ABA>(2016)], 음악의 폴리포니 개념에 대한 실험[<오성부>(2017)], 창작자와 수행자와 관객의 관계를 뒤틀고 반응이나 표정을 공연의 재료로 구성하는 일[<관객과 공연자>(2017)], 연습과 공연의 범주에 대한 탐구[<연습무의 연습무>(2018), <연습곡의 연습곡>(2018), <연습련> 연작(2018)], 시간의 구조와 공연의 재료에 대한 실험[<강진안, 공연화, 김민정, 김성완, 배기태, 슬기와 민, 신예슬, 신진영, 심우섭, 오민, 옥상훈, 이민성, 이신실, 이양희, 이영우, 이태훈, 이혜원, 장태순, 정광준, 조세프 풍상, 한문경, 허윤경, 홍성진, 홍초선, 57스튜디오, 라이브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2018)], 다원적 예술의 장르·매체·구성·수행·설치·관람방식에 대한 집요한 물음[<부재자>(2020), <참석자>(2020), <초대자>(2020)], 관념적 시간, 구성적 시간, 수행적 시간과 ‘지금-여기’라는 난제[<412356>(2020)]까지. 그간 오민의 작업은 연쇄하며 확장되는 흐름을 형성해왔다.
이 과정에서 출현과 사라짐을 반복하며 지속적으로 탐구된 개념은 작업의 재료와 시간의 구성, 공연과 공연 안팎, 작업을 이루는 것들의 관계, 그리고 ‘지금-여기’다. 그리고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에서는 이 개념들이 한데 모여 시간이라는 대주제 아래 하나의 거대한 총체를 이룬다. 끊임없이 운동하는 덩어리 같은 이 작업은 물론 그 자체로 독립적 영역을 구축하고 있지만, 그 내부를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다 보면 이전 주제들과 긴밀하게 연결되면서도 새롭게 다듬어진 질문들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재료.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는 시간을 작업의 주재료로 사용한다. 이제껏 시간은 ‘시간 기반 작업’이라는 표현처럼 주로 작업의 조건으로 자리해왔고 이 작업 또한 마찬가지로 시간에 기반하지만,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는 시간을 구체적인 재료로도 삼는다. 즉 이 작업에는 러닝타임에 해당하는 조건으로서의 시간과 그 내부를 구성하고 있는 재료로서의 시간들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적 시간과 구성적 시간과 더불어, 시간에 대해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이 작업엔 관념으로서의 시간 또한 내포되어 있다.
이어서 구성.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는 3분짜리 시퀀스를 다섯 번 반복한다. 혹은 서로 다르지만 어딘가 닮아있는 다섯 개의 시퀀스를 배열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구성한다.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이 동시인지 이시인지 질문하게 만드는 이 구조는 여러 시점이 한데 공존하는 듯한 이질적인 시간성을 불러일으킨다. 시간이 구성 가능한 재료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소위 ‘자연스럽게 인지되는 시간의 흐름’을 위배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구성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다음은 안팎. 촬영되는 자와 촬영하는 자는 때로 구별되지 않는다. 카메라들은 벽 앞에 앉아있는 올리비아를 찍지만, 한편엔 이 카메라들을 찍는 또 다른 카메라들이 있다. 어느 순간엔 촬영팀의 두 인물이 올리비아를 보여주던 채널에 자리하고, 올리비아는 촬영팀을 보여주던 채널로 배치된다. 그들은 서로 자리를 바꾼다. 동시에 관찰하게 되는 공간의 범위가 훌쩍 넓어진다. 카메라의 안팎, 수행되는 영역의 안팎, 공연의 안팎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채 뒤섞인다. 안과 밖의 개념은 점차 흐려진다.
그리고 관계. 올리비아와 카메라, 벽과 빛은 서로 독립적으로 움직인다. 카메라 앞의 인물은 이른바 ‘주인공’처럼 가장 중요한 존재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고, 모든 움직임이 인물에 의해 촉발되거나 다른 움직임이 인물을 위해 기능하는 경우도 많지만,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에서는 그런 선명한 위계를 발견하기 어렵다. 작업을 이루는 주체들은 각자의 흐름에 따라 운동한다. 어느 한 요소가 다른 요소들을 압도하거나 지배하지 않는다. 내게 이들은 시간과 상황을 공유하며 최대한으로 동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지금-여기. 시간을 다루는 이 작업은 지금-여기라는 시간을 샅샅이 파헤친다. 지금-여기라는 말은 일견 명쾌해 보이지만, 동시와 이시에 대해 묻는 순간 많은 것이 모호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정체를 캐물을수록 그 존재는 흐릿해진다. 지금-여기는 도대체 언제의 어디인가. 지금이라는 시간의 길이는 어디까지를 포함할 수 있고 여기라는 공간의 영역은 어디까지를 포함할 수 있는가. 동시와 이시, 안과 밖이 조밀하게 교차하는 이 작업을 보다 보면 지금-여기라는 대상이 도무지 그 길이와 크기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처럼 여겨진다.
작업 안에서 관찰할 수 있는 상황 속의 사람들은 최대치로 집중하며 자신들 눈앞의 지금-여기를 아주 긴급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만, 5채널 영상 속에서 뒤섞여있는 이 새로운 시간의 흐름에서 ‘지금-여기’의 존재를 추적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수행적 시간으로서의 지금-여기는 화면 속 수행자들의 신체에 분명 존재하는 듯하다. 그러나 구성적 시간으로서의 지금-여기는 어디까지 늘어나거나 꼬일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관념적 시간으로서의 지금-여기는 어쩌면 허상일 뿐,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남는다. 그리고 이 모든 시간의 층위를 전시장에서 추적하는 관객의 경험적 시간으로서의 지금-여기는 다시, 화면 속 수행자들의 신체처럼 몹시 긴급하다. 이 작업의 표면과 내부와 지지대와 바깥 사이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이들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운동
이 작업을 둘러싼 모든 것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은 채 입체적으로 운동한다. 그 어떤 부분부터 보기 시작하더라도 우리는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의 시공간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모든 것이 제 나름의 흐름을 이어가며 서로 교차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관객은 그들의 관계를 파악하며 시간의 흐름을 차곡차곡 인지해간다. 오민은 이렇게 말한다.
“…시간의 묘미는 ‘보이는 이미지’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미지’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그 어떤 재료도 시간 위에 배치되는 순간 ‘보인 즉시 사라진다.’ 이때 ‘기억’이, 사라진 시간을 추상화하는 ‘기술’로 작동한다. 이는 창작이나 수행뿐 아니라 감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시간예술의 감상은 관망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능동적으로 러닝타임을 소비하면서 감각재료를 수집하고, 기억하고, 사후에 기억된 이미지 간 관계를 추상적으로 조합하여 보이지 않는 그림을 그려낼 때, 감상은 비로소 마무리된다.”
여기서 잠시 이런 상상을 더해본다. 만약 이 모든 조건을 반전한다면 우리는 어떤 광경을 보았을까. 아마도 여러 대의 카메라로 찍은 것 중 단 하나의 샷만이 남았을 것이고, 싱글채널로 충분했을 것이고, 올리비아의 허밍은 중첩되지 않았을 것이고, 벽은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고, 최적화된 상태로 조율된 빛은 올리비아의 피부와 벽의 표면에 밀착되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카메라를 촬영하는 카메라는 있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카메라 뒤의 인물들을 호명하는 목소리도, 그들을 바라보는 장면도 보고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단단하게 완결된 ‘지금-여기’가 그 결과물로 만들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러닝타임을 가질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만약 질서정연하게 완결되어 닫힌 가상적 장면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러나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는 결코 하나의 고정된 장면으로 귀결될 수 없는 수많은 움직임들을 시간 위에 풍성히 펼친다. 시간이 있는 한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눈앞에서 신체가 운동하는 세계와 영상으로 편집된 세계는 다르게 움직인다. 오민은 이렇게 쓴다. “영상의 시간과 라이브의 시간은 다르다. 영상의 시간은 사각형이고 라이브의 시간은 다면체다. 사각형의 바깥은 늘 엄청난 비밀로 채워져 있고, 다면체에는 비밀이 아예 담기지 않는다.”
사각형 밖에는 무수히 많은 잠재적 세계가 놓여있다. 누군가 사각형 안에 담아놓은 감각 정보는 그 현장에서 벌어진 일 중에서도 극히 일부일 뿐, 그 다면체적인 시간과 경험을 모두 담을 수 없다. 비밀은 그렇게 생성된다. 그러나 라이브의 시간에서는 그 어떤 비밀도 없이, 수많은 주체들이 각자의 ‘지금-여기’를 향유하며 교차하고 운동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영상과 변별되는 의미로서의 ‘라이브의 시간’에서 발생하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실상 시간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일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바깥 세계로 되돌아 나가는 길
시간이 무엇인지 분명히 안다고 믿었지만, 누군가 시간에 대해 묻는 순간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다고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는 말한다. 너무나 명쾌한 것 같으면서도 질문하는 순간 우리를 난제에 빠트리는 것은 비단 시간만이 아니다. 시간 위에서 펼쳐지는 음악과 공연 또한 이런 난처함을 공유한다. 음악이 무엇이냐 묻는 순간, 손에 잡히지 않는 음악이라는 존재는 어딘가로 슬며시 사라져버리는 것 같다. 공연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수많은 몸과 시간이 개입한 시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고정된 형태로 완결되지 않는다. 그 시작과 끝이 정확히 언제인지, 사건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어쩌면 시간 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확정적인 하나의 결론을 내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민은 왜 시간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하고, 여러 층위의 시간을 발견하고, 그 시간들을 층층이 쌓아 시간적 구조물을 만드는 것일까. 오민은 시간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시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추상적 산물(라이프니츠)이며 세계를 인식하는 형식(칸트)이다. 시간이란 사물의 변화에 의해 나타나는 개념(마흐)이므로, 변화가 없으면 흐르지 않는다(아리스토텔레스). 동시에 변화와 상관없이 흐르기도(뉴턴) 한다. 혹은 아예 흐르지 않는다(로벨리). 흐른다면 그 속도는 상대적(아인슈타인)이다. 현재는 과거의 응축(베르그송)인 동시에, 과거, 현재, 미래는 집요하게 계속되는 착시(아인슈타인)일 뿐이다. 시간을 측정할 수는 있지만, 시간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기 어렵다. 어쩌면 시간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맥타가트)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다각적인 난점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대하는 감각과 세계를 대하는 감각이 분리되지 않은 채 언제나 상호작용하는 것이라면, 작품을 경유하여 시간을 사유하는 일은 결국 시간 일반에 관한 감각과 연결되는 것일 테다. 때문에 우리는 시간에 관해 긴급하고 중대하게 다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는 일견 세계로부터 동떨어져 순수한 작품 내부의 세계를 탐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곰곰이 돌이켜 보면 이는 결국 세계 안에서 실제로 발생하고 구성되며 경험되는 시간에 대한 오민의 탐구를 담고 있다. 시간과 동시를 이해하는 일, 관계와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무언가를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와 연결되어 있다. 시간 안에서 만들어진 우리의 경험에 고정된 장면이란 없고, 프레임의 안과 밖은 언제나 가변적이다. 시간 속에서 세계는 멈추지 않고 운동하며 그것을 바라보고 경험하는 우리 또한 멈추지 않고 운동한다.
그리고 그것이 시간의 본질이라면, 단 하나로 완결지어진 가상의 ‘지금-여기’를 만드는 것보다, ‘지금-여기’라는 존재 자체를 계속해서 의심스럽게 만드는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 속의 이질적 시간이 어쩌면 조금 더 실제에 가까워 보인다. 5채널의 영상과 8채널의 사운드로 시간을 어긋내는 이 작업을 보면서, 내가 보고 듣는 것은 무언가의 극히 일부고, 그것은 완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관객을 어두운 방에 초대해 교차하는 시간들 속에 놓아두는 이 작업은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라는 한 세계의 내부를 경험하게 한다. 동시에, 헤테로포니적인 구조로 이루어진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을 경험케 한다. 그리고 그건 우리가 시간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의 구성원리를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다.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에서 나는 무언가를 보고 들음으로써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고 들을 수 없는지에 대해 더 풍부하게 인지하게 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 내가 보고 듣지 못하는 영역은 더욱 분명히 감지되고, 나를 둘러싼 시공간은 조금 더 두텁게 확장된다.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들려줌으로써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암묵적 영역을 조금 더 선연히 드러낸다. 시퀀스의 마지막 순간, 올리비아의 얼굴에 드리우는 빛이 실은 그 바깥의 그림자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