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찬숙

최찬숙
이주, 이동, 공동체를 주제로 시각언어를 꾸준히 구축해 온 최찬숙은 자신의 위치와 존재에 관한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여러 형식을 통해 선보였다. 작가는 오래 이주 생활을 하며 정신적 이주와 물리적 이주에 관해 ‘땅과 터전’을 기반으로 한 토지 소유 문제에 관심을 키워왔다. 타이베이 디지털아트센터(2020), 아트선재센터(2017) 등에서 개인전을 가진 바 있으며, 현대자동차 VH AWARD(2019), 서울시립미술관 신진 작가지원 프로그램(2017) 등에 수상했다.

Interview

CV

chansookchoi.com


교육

2009
베를린예술대학교 미디어 아트, 마리아 페더 스튜디오, 마이스터 과정 졸업

2008
베를린예술대학교 실험미디어 석사 졸업

2007
베를린예술대학교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디플론 석사 졸업

2004
베를린예술대학교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디플론 학사 졸업

2001
추계예술대학교 서양화과 학사 졸업


주요 개인전

2021
《qbit to adam I, adam》, 강 컨템포러리, 베를린, 독일

2020
《SUPERPOSITION—qbit to adam》, 디지털아트센터, 타이베이, 대만
《그들의 영토에서 빛들이 새고 있다》, 서울로미디어캔버스, 서울

2017
《2017 아트선재 프로젝트 #5: 최찬숙- Re-move (리-무브)》, 아트선재센터 프로젝트 스페이스, 서울
《음양수화, Ground-Signal-Code-Notation》, 훔볼트포럼, 베를린, 독일

2016
《Re move》, 그림미술관, 베를린, 독일

2015
《WE remember ME》, 마인블라우 프로젝트 스페이스, 베를린, 독일
《The Promised land》, 대안공간 루프, 서울

2013
《90억 가지 신의 이름》, 성곡미술관, 서울

2010
《Metamorphose》, 쿤스트독 갤러리, 서울


주요 그룹전

2021
《Mutual Fragments》, basis-frankfurt, 프랑크푸르트
《Embark》, 129 Gallery Berlin, 베를린, 독일
《all about Women festival》, 시드니오페라 하우스, 시드니

2020
《Sirene-Goldrausch2020 쿤스트라움 크로이츠베어그 베타니엔, 베를린, 독일
《디지털구애전》 제 20회 네마프 국제 대안영화제, 서울
《Na Hrane / At the Limit / Am Limit》 쿤스트할레, 브라티슬라바, 슬로바키아

2019
《광장 : 미술과 사회 1900~2019》전 2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아르스일렉트로니카 페스티발 2019, 린츠, 오스트리아
《디엠지》 문화역 284, 서울, 한국
《멜티-액세스4913》 서울시립미술관 신소장품전,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기록.기억》 서울건축센터, 서울

2018
《SURVIVE》, Hidden Dimension Kunstpunkt Berlin Galerie für aktuelle Kunst, 베를린, 독일, 독일
《악의사전》 강원 국제 비엔날레

2017
《DMZ 아루스에디션》 , 덴마크 아루스 쿤스트탈 미술관, 아루스, 덴마크
《No Limite》, UFPA 미술관, Belem, 브라질
《Never ending Song》 Meinblau Projektraum, 베를린, 독일, 독일

2015
《Links-Locality and Nomadism》, 갤럭시 현대 미술관, 사천, 중국

2014
《Dark Border》, 아시아현대미술플랫폼, 논베를린, 독일 ,베를린, 독일, 독일

2013
《Reality》, 경북도립미술관, 창원, 한국
《Believe it or Not》 Gallery ACC in 바이마, 독일

2012
《NOT IN MY OUR BACKYARDS》, Schauwerk 라이프찌히, 슈트트가르트, 독일

2011
《What happened to god》 Halle14 현대미술센터, 라이프치히, 독일
《la vie en gé né ral in v-kunst》, 갤러리 Greulich, 프랑크푸르트, 독일


주요 인터미디어 프로젝트

2017
《A matter of time B》, 아시아 태평양주간 10주년 오프닝 퍼포먼스, 베를린상공회의소
서울스퀘어 미디어 파사드

2016
현대모터스튜디오 미디어 파사드 (천대광 전 협업작가)

2013/14
《단테의 신곡》, 국가 브랜드 공연 , 종합극, 영상, 국립극장

2011
《Privatecollection》, 페스티벌 장, 기획, 연출, 영상, 문래예술공장

2009
《세컨드슬립》, 인터미디어 공연, 라디알시스템, 베를린

2007
《Leben oder Theater?》 Joanne Glä sel의 모노드라마, 유대인박물관, 베를린


주요 수상

2021
독일연방재단 STIFTUNG KUNSTFOND, 시각예술 작업지원

2020
골드라우쉬 여성작가 지원프로젝트, 베를린, 독일

2019
제3회 VH AWARD 수상, 현대자동차

2018
한국문예진흥위원회 국제예술교류 기금 기금선정

2017
신진 작가지원 프로그램 수상, 서울 시립미술관

2013
대안공간 루프 신진작가 선정

2012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상

2011
HALLE14 e.V 펠로쉽우 지원작가 선정, 라이프치히

2009
Elsa Neuman 유망 신진작가 지원 기금 선정, 베를린, 독일시


주요 레지던시

2019
금천예술공장, 해외작가레지던스, 서울

2018
Ars Electronica, 레지던스 프로그램, 린츠, 오스트리아

2016
ACT 페스티벌, 헤테로토피아 인 아시아 국제포럼, 광주 아시아문화전당
디엠지 양지리 레지던시, 사무소, 한국

2011
Studio14: 국제 펠로우쉽 프로그램, 할레14, 라이프치히, 독일


주요 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성곡미술관

Critic 1

개인의 파편적 기억의 굴레가 우리의 문제로 인식되는 순간:
나는 누구 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은주(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개인의 서사, 집단의 기억

우리는 작가의 작업을 통해서 그 작가의 정체성을 탐구한다. 한 개인의 문제, 사회의 문제, 국가의 문제 등 다양한 메시지를 한 작가의 인생을 통해 바라볼 수 있다. 최찬숙은 20년 이상 독일에 머물면서 인류 이주의 역사, 공간 이동을 가능하게 했던 과학기술 장치, 물리적 이동과 함께 따르는 정신적 이주의 문제를 계속 고민해 왔다. 미시적으로는 자신을 둘러싼 낯선 환경들의 변화에 예민해 했으며, 거시적으로는 이주 할 수밖에 없었던 인류 전체의 역사까지 탐구한다. 그는 영상, 퍼포먼스, 설치 등 다매체를 사용하여 나 그리고 나와 같은 여성들의 삶을 반추하면서 침착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축척해 나가고 있다.

최찬숙의 작업 전반은 인류, 역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로 출발하지만 그 시선은 지극히 인간의 내밀한 역사적 관점에서 출발한다. 통상 인류, 역사, 사회문제를 예술에서 다루게 되면 개인의 내밀한 삶의 시선은 의도치 않게 거대서사 속에 파 묻히기도 하지만, 최찬숙의 작업은 그와는 완벽히 대척점에 서있다. 단적인 예로, <약속의 땅(The Promised Land)>는 화려하고, 아름답게 자동화 되어 제작되는 자동차 회사(를 배경으로 전시장을 기계와 기술로 전시장을 디자인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얼마나 기계적인 공간에 놓여 있는지를 자각하게 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작가는 그 틀 안에서 인간의 지극히 평범하고 사적인 삶, 신에 대한 경외심, 낯선 곳에서도 주인공으로 살 수 있는 평범한 개인의 이야기 영상들을 자동화 시스템 속 장치에 동시에 배치한다. 자동화, 기술지향점 시각에서도 우리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인간애, 주변인들과의 친밀한 대화, 사적인 일상생활 등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기술한다.

즉 최찬숙의 작업은 극도로 산업화 되어 있지만, 그 이면에서 우리는 자동화 시스템에서 생성시킬 수 없거나 취급될 수 있는 인간애, 인류애를 다시 찾는다. 이러한 작업은 <FOR GOTT EN>에서도 이어진다. 이 작업은 최찬숙이 라이프치히 레지던시에 머물면서 70대부터 90대 여성들이 신과 믿음, 종교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서술해 나가는지를 기록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물리적인 (이동수단에 의한)이주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정신적 이주’에 관해 탐색하는 작업이었다. 따라서 이 작업은 <The Promised Land>에서 제기했던 물리적 이주와 정신적 이주가 모두 공존되고 있는 상황을 연출했다면, 이 <For gott en>은 ‘정신적 이주’의 개념이 더욱 실천적으로 확장된 작업이다. 실제로 이 인터뷰에 참여한 70-90대 여성은 동독에서 라이프치히로 이주한 여성들이다. 작가에게 정신적 이주는 곧 기억을 다시 이식시키거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어 재조직하는 문제도 포함된다. 작가는 이 여성들과 온전히 신과 믿음에 관한 문제에 집중하고자 별도의 인터뷰 공간을 마련했다. 이 인터뷰 공간은 이동식 도구로 제작되었다. 한국의 가마모양에 착안하여 제작되었으며, 외부와는 차단될 수 있는 특정 기억 기록 공간을 제작한 셈이다.

최찬숙은 현재의 시공간성에서 굳건히 서서 응시하고 직면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과 역사적 사건을 작업의 주요 중심 주제로 삼아왔다. 작가는 과거에 해결되지 않았거나, 해결 될 수 없는 문제들을 다양한 매체로 소환시킨다. 작업을 통해 다시 재소환 되는 문제들은 특수한 시기와 사건들이지만 역사학, 정치학, 사회학의 서술방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논증으로 펼쳐진다. 비무장 지대 경계에 있는 민북 마을에 수개월 머물면서 제작했던 <양지리 아카이브>를 비롯하여 위안부의 여성을 주제로 하는 <밋찌나> 작업이 그 예이다. 작가가 작업의 소재로 채택한 민북 마을과 거주민, 위안부여성, 이주 등의 주제는 한국사회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문제들이다. 최찬숙은 이와 같이 중요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한국사회 이면의 무거운 주제를 도발적이면서도 절제된 조형언어로 표현해 나가고 있다.

최찬숙은 <양지리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이주’와 ‘여성’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에 몰두했다. 실제로 작가가 몰두하고 있는 DMZ의 민북 마을과 위안부 여성에 대한 화두는 한국사회를 둘러싸고 생성되는 사회정치적 논의의 틀을 뛰어 넘어 있다. 작가는 전쟁과 일제강점기 등의 굴곡 많은 근대화를 겪었던 한국사회 이면의 문제를 마치 완결된 것처럼 포장된 해석과 평가에 자신의 사고를 내던지지 않는다. 또한 그는 ‘위안부 여성’이라는 사회적 금기시하고 봉합할 수 있는 내용들에 굉장히 긴밀하게 접근해 나간다. 필자는 작가가 주제에 대해 조심스럽고 내밀한 관계설정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양지리 아카이브>에서도 이 지역이 내포하고 있는 분단, 군사경계지역 등 그 마을을 둘러싼 정치적 이슈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이주여성의 삶을 조명한다. 최찬숙의 작업방식은 개인의 내밀한 삶의 경험과 기억을 돌아보며, 미시적 관점의 삶들이 점차 역사화가 되는 방향성에 표식해 나간다. 아니 어쩌면 그는 이 모든 것이 굳이 역사가 될 필요가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최찬숙은 자신이 다루고 있는 주제 속에서 특정상황과 사건이 역사의 오브제로 대상화 되지 않도록 작업을 구상한다. 어쩌면 그러한 구상을 시도 해 보는 것 자체가 역사와 여성, 사건과 사람들을 작업화 시키는 예술가의 역할일 수 있겠다. <미찌나>는 버마 미치나 지역에 끌려갔던 위안부 여성 20명에 관한 이야기 이다. 이 작업은 중국과 인도를 오가던 말로하호의 탑승기록 문서에서 출발했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최찬숙의 <밋찌나>는 그와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실제로 <밋찌나>작업은 단 한명의 증언자도 존재하지 않으며, 실존하는 증언이 없기 때문에 작가는 오히려 그 사진 속 인물들의 개인적인 서사와 감정을 이끌어 냈다. 사진 속 여성들이 미치나라는 낯선 지역에서 보았던 하늘은 어떤 풍경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하루 동안 어떤 소리를 들었을까? 등의 질문들로 작업의 서사구조를 조직해 간다. 그들이 보았던 하늘풍경과 전쟁의 공포 등 개개인들의 감정을 되새기는 ‘상상의 기억’을 써내려 간다. 이뿐만 아니라, 영상 속에 등장하는 각기 다른 3명의 여인들은 각각의 다른 이유로 미치나에 있었다. 3인의 여인들이 미치나에 있게된 다양한 입장이 서술된다. 한명은 속아서 끌려갔고, 한명은 위안부 여성 모집 공고를 보고 갔으며, 또 다른 여성은 글을 읽지 못해 모집공고를 읽지 못했다. 이처럼 하나의 상황을 두고도 각기 다른 입장이 펼쳐져 있다. 이는 하나의 사건을 두고 다양한 층위로 해석하거나,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는 정치적 상황을 설명한 대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결국 작가가 선정한 가상적 대화설정은 증언 없는 위안부 이야기였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다. 개인의 기억, 실체 없는 목소리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존재하는 우리의 문제들이 재현불가능성의 원리를 작동시키면 현존한다. 최찬숙의 <밋찌나>작업은 한 개인의 삶을 우리의 문제로 이끌어 내기 위해 대상화 하는 작업을 소멸시켰다. 최찬숙은 개인의 서사가 어떻게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는지에 관한 작업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1. 작가에게 있어 ‘정신적 이주(Inner emigration)’는 한 개인이 오랫동안 머물던 땅을 떠나 다른 낯선 세계에 놓이게 되더라도, 어느 순간 낯선 공간을 그 이전에 머물렀었던 공간처럼 익숙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본능적 관능을 가리킨다. 2015년에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렸던 《The Promised Land》는 「정신적 이주에 관한 보고서 파트1: 이동기술 편」이다. 이은주와 최찬숙과의 인터뷰, 2021년 1월 3일.
2. 영어로 Forgotten이란 단어를 작가는 <FOR GOTT EN>으로 표기를 했는데, 가운데 GOTT는 독일어로 신이라는 뜻이다. 작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져 가는 기억의 문제와 더불어, 그 기억이 신과의 관계에서는 어떠한 설정으로 펼쳐질지에 관한 탐구로 작품 제목에서는 GOTT의 의미를 강조하고자 했다.

Critic 2

다다를 수 없는 영락(零落abject)의 영토

이용우(미디어역사문화연구자)

자리의 얼굴성

땅은 과학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표식이다.
-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1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물리적 공간은 자연, 정신적 공간은 공간에 대한 형식적 추상을 의미하며, 사회적 공간은 물리적·정신적 공간에 대한 인간 상호작용의 장소라 말했다. 만일 정신적 공간이나 추상적 공간이 사회적 공간과 완전히 분리된 별도의 개념이 아니라 집단과 개인이 공존하고 역사적 맥락들로 구성된 하나의 구성체라 말할 수 있다면, 결국 공간적 실천이란 단순히 하나의 영토/토지의 물리적 영역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에 있어 모든 측면과 요소, 순간이 공간의 자장 속에 투영되는 하나의 인지적 영토”2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육신, 토양, 자연이 인간과 만나 주조해낸 위계질서, 종과 유형학이라는 근대적 배제와 포섭 논리 안에 인류가 발을 내딛기 전, 대지/장소/영토는 인간의 인식 속에 배제된 공백의 시공간이자 이성적 근대성의 영구적 타자성으로 존재해왔다.

최찬숙 작가는 이러한 인간의 인식론적 지형학 속에 의도하거나 의도치 않은 이유로 주변으로 밀려난 것들, 이주자와 정주자를 구분 짓는 인지적 방식들, 인간이 영토를 소유한다는 개념의 변천 과정들, 땅과 신체에 연관된 다양한 불가분의 관계성에 천착해왔다. 오랜 베를린 체류기간을 통한 타자/이주자로서의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적 이주와 물리적 이주에 배태된 장소성과 기억의 다양한 의미 양상을 마치 연극무대(scenography)를 연상시키는 아우토슈타트(Autostadt)3와 광유전학(optogenetics)4으로 대변되는 미래 기술의 형상인 옵토로돕신(opto-rhodopsin)5이라는 생경한 개념으로 풀어낸 《최찬숙 개인전: 정신적 이주에 관한 보고서 파트1, 이동기술 편》(2015) 전시, 일본군 위안부, DMZ 민북 마을 양지리 여성, 해방 후 작가의 할머니로 대변되는 한국인과의 결혼이 장려된 일본인 여성들 등, 디아스포라 이주민 여성들의 상흔의 궤적, 이들의 느슨하고 임시변통적 연대성과 정체성의 정치학, 비자발적 자의적 이주 안에 파생되는 불안정성과 망설임, 불안함과 동요라는 감정의 파동들이 야기시키는 기억의 아카이브를 프리즘처럼 펼쳐 보인 《Re-move》(2017) 전시에 이르기까지, 최찬숙 작가는 영원히 정주하지 못한 타자들이 촉수를 길게 늘어뜨리며 송신하는 이 미세한 진동과 일상의 균열에 주파수를 맞춰 파편화된 타자의 삶과 정동의 심상이 직조해내는 수행성의 성좌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는 유기체적 작업 서사들에 드러나는 작가의 관조적 시점은 종종 개인적 기억과 그 존재론적 타당성, 그리고 개체화된 사적 서사가 집단 기억과 맞닥뜨리면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불협화음, 역사적 사실/사건들 속에 망각된 개인적 정황의 지점들, 표백되고 공백화된 빈 공간으로 남은 자들의 흔적과 장소에 대한 기억이 지닌 잠재적 가능성들을 작품 속에서 환기시킨다.

 

유기체적 장소성과 영토화된 감각: <60호>

신작 <60호>(2020)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토지 개간 사업과 대북 선전을 위해 북측에 배치된 112개의 DMZ 지역의 민간인출입통제구역에 자리잡은 선전용 마을 여성들의 사적 서사를 다루고 있다. 삽슬봉 아래 펼쳐진 강원도 철원군 양지리 마을은 저렴한 토지와 집 소유를 약속한다는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언술로 대규모 이주민 거주 군락을 이루었고, 버즈-아이 뷰(Bird’s eye view)로 촬영된 구글 어스의 양지리 파노라마는 기실 ‘적’의 관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일괄적으로 북으로 창을 내고 형형색색 지붕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내부는 거주자들이 임시변통으로 각기 다른 복잡한 가옥 구조 형태를 띄고 있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개인의 감정과 행동이 고스란히 장소성—건축적 환경과 그 의도성—에 특정한 가시적, 비가시적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그로테스크한 양지리 가옥 내부 전경을 훑고 지나는 카메라 앵글은 영토 소유에 대한 개인적 심상지리의 내밀한 기원을 내시경처럼 투사한다. 해방 이후 수많은 이주민들을 전쟁, 찬탈과 수복, 투기라는 여러 겹을 지닌 DMZ 인근 민북 마을로 불러모은 그 들끓는 욕망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은 과연 우리의 소유일까? 원래 월북자나 일본인 소유였던 토지들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소유자 부재의 땅이 되었고, 1972년 국토이용관리법이 발촉되고 1980년대 초반 정부가 민통선 지역 토지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하면서, 땅 주인이라 주장하며 등기부 서류를 거머쥔 ‘토지소유자’들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며 양지리 거주민들과 마찰이 생겨났다.6 그 땅에 오랫동안 토착해온 이주민들, 특히 수많은 여성 이주자들은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한 채 결국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만다.

최찬숙은 이 기묘한 일련의 사태를 관망하며 땅/몸/소유의 관계망과 영토정치적 사건들이 환기시키는, 마치 인간과 토지가 하나의 신체처럼 꿈틀대는 유기체적 장소성으로 발현되는 지점들을 예리하게 포착해 낸다. 나아가 토지 소유권이라는 사회 법제적 방향성과 잠재적 변화가능성을 미시사적 관점에서 내밀하게 조망한다. 가부장적 호주제로 인해, 전쟁에서 혹은 일상에 산재한 지뢰로 남편을 잃은 여성 이주자들은 이제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 채, “부엌 한 칸, 방 한 칸”의 뒤틀린 양지리 마을 틈바구니에 은밀하게 포자 하는 양치식물처럼 위태한 생태계에 일시 정주한다. 이 적정의 순간, “순 묵갱이”같은 “남자 이름들이 새겨진” 땅을 개간하며 묵묵히 정주의 삶을 꿈꾸던 자들은 마을 군인들에게 숫자로 불리기 시작한다. <60호>는 다름 아닌 그 장소가 거주하는, 이제 숫자가 되어버린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름에도 습하고 서늘한 이 민북 마을 집안 곳곳에 실재 태양보다 더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온풍기들(<인공 태양>, (2017)이 숫자로 불리는 여성 이주자들의 삶에 온도를 부여한다. 핸드헬드 카메라가 양지리 가옥 미로를 롤플레잉 게임처럼 횡단하고, 역사적 파국의 상징인 DMZ 폐허 전경을 구글 어스로 간략히 요약할 때, 우리는 이 영상의 박진감과 충격의 무게를 동시에 부여하고 있는, 감정적 동요가 거의 없어 보이는 작가의 차폐(遮蔽)적 관점을 목도하게 된다. 작가의 이런 사심 없는 시선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비인간적 장소/영토, 나아가 타자화된 인간들이 결국 거시사적 풍경 속에 부조리하게 마주 해야만 하는 강압적 공존의 관계성과 그 세속화된 기억들을 보다 명징하게 인지하게끔 한다.

60호로 일컬어지는 영락한 자들의 비가시적 얼굴/얼굴성처럼7 비스듬한 영토/땅/장소라는 상징적 의미가 촉발시키는 어떤 이물감, 병리적 특질, 감정이나 분위기의 파동들, 나아가 거시적 세계관과 집합 기억이 결코 도달하거나 감지해내지 못하는 미세한 비가시적 파동은 결국 이름을 잃어버린 자들의 심상 지리의 폐부를 관통하며 인간 개체와 장소 간의 공명이 불러일으키는 인력(引力)과 척력(斥力)의 역학관계를 세밀하게 드러내는 기제로 작동한다. 마치 이들이 영상 속에 자조적으로 트로트 노래를 따라 부르며 (“내가 내가 드라마, 이 사연을 누가 알 텐가”) 페이드-줌 인앤아웃 되는 과정과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가 북한에 대고 “불과 분노를 맞게 될 것”이라는 정치적 언설을 통해 남북한 위기감을 조성하는 장면을 상호 병치하듯, 집적되고 산재하는 영토와 거주, 이주와 기억, 정주와 비정주, 그리고 이미지들의 나열과 리듬이 직조하는 연결고리들의 알레고리는 신체의 기억과 땅이라는 물질성이 지닌 서사적 상징적 골격(skeleton)들을 서서히 와해하고, 광물의 파편과 그 부유하는 무기물로 대체-형상화된다. 작가의 관조적 의도대로 우리의 시각은 마우스의 커서를 따라 서사를 이동시키는, 하나의 시각적 서사 기표로 작동하는 무기물의 형상을 쫓아 다닌다. <60호>의 돌, 혹은 구리의 광물이미지는 작가가 기존 작품들에서 구현한 주체들의 젠더화되고 타자화된, 땅을 소유한 적 없이 땅의 기억만을 내재하고 있는 신체를 대리하며, 영토화된 감각과 지리적 개념적으로 규범화된 구분틀 안에 영구 포섭되지 못한 채 암흑 속을 공회전하는 비인간적 영락의 주체들(광물/비인간적 주체들)과 조응하기 시작한다. 이 이미지들은 마치 댓구처럼 <qbit to adam>(2021)으로 이어진다/이어져 온다.

 

비정주성과 시공간의 초지역성:
<qbit to adam> 어느 누구의 것이 될 수 없고, 모두의 것이 될 수도 없는,

인간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과 장소는 처음부터 의미 있는 조건이나 배경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장소와의 관계를 통해 서서히 형성된다. 즉 장소와 환경을 기억하고 변형하면서 관계 맺은 행위와 기억의 집적은, 거주/정주의 일부이자 증표이며 이는 한 장소에 대한 감각을 보다 포괄적으로 제시한다. 최찬숙 작가가 팬데믹 기간 동안 진행해온 신작 <qbit to adam>은 DMZ, 경계지역, 이주와 여성 서사를 통해 천착했던 땅과 토지로 시각화된 주체성/주체화의 비정주성에 대한 관심사를 개념적으로 확장하고 시공간적으로 팽창한다. 양지리 마을에 인장처럼 날인된 밀려난 자들의 조각난 기억들, 이주하고 정착하고 소멸하는 자아의 상실감과 밀려난 공동체의 와해라는 구심적/원심적, 정적/역동적, 열림/닫힘의 로컬리티의 서사는, <qbit to adam>에서 칠레 북부 고대 아타카마 사막(Atacama Desert)과 광산에서부터 디지털 가상 시공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횡의 시공간성 안에 놓인 장소성/영토성을 통해 로컬리티에 대한 작가의 세계관을 확장시키고 로컬리티에서 초지역적 신체/땅/장소로 이어지는 질문들의 존재론적 맨살을 드러낸다. 최찬숙은 몸/땅/역사화된 텍스트라는 옹이진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재전유하며, “어느 누구의 것이 될 수도, 모두의 것이 될 수 없는” 땅/장소/공간의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의미망과 대안적 방향성, 인간-비인간 주체성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을 <qbit to adam>을 통해 ‘쏟아’낸다.

마치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önflies Benjamin)이 영구불변하며 유기적 부패에 저항하는 그레뱅 박물관의 밀랍 인형의 불멸성에 매료된 것처럼,8 코퍼맨이라는 은유로 시작하는 <qbit to adam>은 유기물과 무기물, 삶과 죽음의 경계, 미래와 과거의 탈구, 폐광산 폐기물 흙 위에 뒤덮인 또 다른 흙이라는 하나의 은유로서 “땅의 무덤”이 환유하는 무기물/땅의 소멸과 무기물/비인간의 죽음이라는 개체성의 획득, 땅의 소출과 영토 소유에 대한 근현대사적 영토 개념의 형성과정 속에 배태된 자아와 타자, 포섭과 배제, 몸과 땅에 드러나는 관계성, 디지털 환경과 데이타가 재전유한 새로운 영토성과 신체 감각의 확장된 영토로서의 가상-주체의 확장, 현재라는 관계적 시간 안에 개체가 개체로서 순수하게 상호 접촉할 수 있는, 하나의 성스럽고 완결된 개체성을 획득하는 장소로서의 공간성, 그리고 이 모든 질문들의 재귀적 귀결에 놓여진, 마치 우리를 청동거울처럼 희미하게 비추고 있는, 우리가 지금 디디고 있는 바로 이 정신적 물리적 장소의 의미라는 존재론적 질문들을 말하고 있다.

돌, 구리, 살, 금속으로 순환되는 파편들이 무중력을 떠다니는 땅의 조각이자 기억/데이터의 이미지로 형상화되고(이 순환 반복 구조는 3채널 스크린 앞에 구리 메쉬 반투명 스크린으로 설치된 영상에서도 반복된다), 33분 동안 교차되는 영상들을 서로 다른 3개의 목소리/선험적 주체로 관통하는 내레이션은, 작가가 전시라는 “장소” 안에 관객들을 온전히 작가의 서사 안에 포섭해 두려는 하나의 욕망이자 구심점 역할을 한다. 압도적 스케일의 스크린 위에 배치된 땅/몸/소유에 관한 개별 서사는 명징하게 개체를 작동시키는 시스템이나 그 존재의 이유, 혹은 존재 가능성을 설명하는 개체성의 척도로 제시되지 않고, 오히려 액체처럼 공간 안을, 스크린 속을 스며들며 땅/몸/전시공간이라는 서로 다른 지형과 이 지형들이 지닌 미결정으로서의 열린 공간, 어떤 평행의 상태와 기준면, 좌표를 빗겨 난 비위계적 유추를 편편하게 이어주는 간주곡으로 기능한다. 이 서사들은 전시라는 하나의 공간 안에서 합류하고 분리되며 관계를 재정립하는 하나의 여정 그 자체이다.

마치 몽골 샤면의 청동거울처럼 어둡고 흐릿하게 연출된 전시 공간의 바닥 면을 통해 자아와 스크린을 되비추는 자기반영적 심상의 차용은 (스크린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바닥과 같은 동박 시트로 마감되어 있다), 이미지를 비추되 원래의 상을 제대로 투영하지 못한다. 즉 자기반영성을 투영하기보다는 지속적 이미지의 탈구, 이미지의 비결정성과 변동가능성을 통해 현재의 장소와 현실의 자아에서 탈출을 시도하며, 미세한 이미지의 왜곡과 흔들림 안에서 끊임없이 생각을 자극하고 사유를 권장하도록 설계된 존재론적 거울로 작동한다.9 작가는 이런 시공간을 초월하는 횡단의 사유 공간적 설계를 마치 꼼꼼한 시노그래퍼(scenographer)처럼 전시 공간 우측에서부터 차례로 스크린의 경사를 10도, 23도, 28도로 미묘하게 기울여 놓는다. 평행하지만 조금씩 엇나가 결국 차이를 만들어내고야 마는 각운처럼, 화면들은 우주의 파장을 감지하는 안테나들과 태양이 뜨는 방향으로 ‘자라나는,’ 무릎 꿇은 참회자의 형상을 띄고 있는 땅의 형상 페니텐티스(Penitentes)처럼 비스듬히 형상화되어 있다. 인공 태양의 궤적을 따라 대지의 형상을 투영하는 스크린은 반사되고 중첩되는 이미지와 전시 공간, 그리고 3개의 이질적 목소리가 환기시키는 현전성이라는 다중 감각으로, 관객의 신체와 공간에 대한 공감각을 통해 마치 관객이 또다른 작품의 오브제가 되어 전시의 서사적 빈공간으로 메우는 무대적 장치로 작동된다.

<qbit to adam>은 이처럼 미완결의 서사들이 경계를 탈주하고 횡단하며 새로운 ‘땅’을 만나려는 시도이자, 수많은 개별 서사들이 교차하고 유목하며 특정한 자연/땅/토지/영토성에 붙박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며, 이전 개념과 논의들을 차용하고 반복하며 차이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생성의 흐름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전시적 변증법적 담론장이 된다. 이는 근대 역사의 서사 구조틀 안에 영구 타자화된 자연/땅/토지/영토성에 대한 담론의 파편적 시각화, 비이성적 타자적 비과학적 부정형(不定型, indeterminate form)으로 간주되어온 자연/땅/토지/영토성에 대한 사유와 이로 촉발되는 인간적 감응과 인본주의적 선택으로 대변되는 근대성이라는 서사의 뒷면을 복권한다는 작가적 명제로부터 출발한다. 최찬숙 작가는 이 야심찬 프로젝트를 통해 역사적 구술 안에 서사적 진공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자연/땅/토지/영토성 속에 놓인 인간적-비인간적 주체들, 그리고 바로 그 장소성 안에 인화된 다양한 기억과 해석들의 양피지를 내밀한 개인적 서사로 필사(筆寫)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재호명한다. 최찬숙의 <qbit to adam>은 또한 현 시각 예술 담론의 동시대적 관심사인 인간/자연의 위계 도상, 코로나19와 메타버스, 생태계의 급락을 통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도래 안에,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며 인류가 남긴 족적이 고스란히 그 궤적(인류세)으로 남는 현 지질 시대의 지구라는 행성의 파국적 동시대성에 대한 예술적 감응과 상상적 지형들을 신화적, 문학적, 과학적 논의들을 상상적 교차 서사를 통해 재현해낸다. 전시 공간의 실재성은 이제 관객의 상상력 안에서 상상력의 모든 편파성을 지니고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어김없이 우리를 매혹한다.

 

코다 : 순수 기억으로서의 영토성

반향은 세계 안에서의 우리들의 삶의
여러 상이한 측면으로 흩어지는 반면,
울림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의
존재 심화에 이르게 한다.
반향 속에서 우리들이 시를 듣는다면,
울림 속에서는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 시를 말한다.
그때에 시는 우리들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울림은 말하자면 존재의 전환을 이룩한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공간의 시학』 중에서10

과거가 현재를 규정짓는 선험적 조건이라고,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의 역설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현재와 과거가 동일한 시간 안에 존재할 때라야 현재의 시간이 오롯이 흐를 수 있다.11 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의 순수기억은 어떤 교훈을 과거로부터 배웠지만 이는 시간성에 의해 다시 반복될 수 없으며 이미 우리 신체 내부에 부재한다는 어떤 인식론적 상태를 의미한다. 순수 기억은 단순히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회상하는 행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 자체가 하나의 존재론적 독립성이라는 잠재적 가능성을 지닌,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무한하게 수축 이완하면서 동시적으로 공존 가능한 존재 양태를 만들어 내는 상태인 것이다.12 마치 미라의 무릎에서 탈구된 광물이 확대되어 프렉탈 이미지들을 드러낼 때, 기억에 관한 아낙시메네스의 아주 오랜 질문이 우리에게 순수 기억을 환기시키며 스며드는 것처럼. “신이 흙으로 인간의 몸을 만든 후 영혼을 위해 숨을 불어넣었다는데 그 숨은 차가운 바람이었을까? 따뜻한 바람이었을까?

차갑고도 따뜻한 바람을 불 수 있는 인간의 양가적 능력, 두 세계의 공존과 질서. 그리고 그 변환 가능성들에 대한 작가적 관심은, 디스토피아적 현실 세계 안에 곧 태어날 작가의 아이의 미래와 어머니의 임종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주검을 만졌던 죽음의 촉감을 생생히 기억하는 작가의 경험들과 혼재되어 있다. “내 몸이 맞게 될 죽음의 순서를 상상”하며 가상 임사 체험(near-death experience)에서 차가운 입김을 내뿜고 있는 모성성을 담보한 작가 자신과, 자고 있는 아이의 숨소리를 통해 따스한 숨이 넘나드는 개체들이 활약하는 생동성의 병치를 통해, 최찬숙 작가는 변화하는 온도를 견디고, 비워가고, 채워지는 비정주성으로서의 신체라는 장소성에 대한 질문을 제시한다. 베르그송이 순수 기억의 존재 양태가 이미지의 형태를 띄지 않으면서도 어떤 특수한 이미지로 존재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설파했듯, 작가는 신체와 물질이라는 어떤 현상의 바탕이나 증표가 아닌, 전체적이고 두리뭉실한 시제 없는 기억의 표상 체계, 즉 모든 것을 포괄하며 모종의 관념이 도사리고 있는/있을,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실체들의 공존가능성을 시각화하(려하)고 있다. 이 심상들은 결국 보이지 않되 현전하고, 우리 정신 속에 이미 내재해 있는”13 하나의 지각이자 기억으로 체험된다.

최찬숙의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무릎이 지닌 중첩된 메타포는 이런 의미에서 사뭇 의미심장하다. 코퍼맨의 무릎에서 파생된 광물은 무릎 꿇은 참회자의 형상을 하고 있는 땅의 형상인 페니텐티스 재현으로 이어지고, 이윽고 교차 스크린 속 강서구의 특수학교 설립 반대에 무릎 꿇으며 호소하는 어머니의 서정적 인서트와 합류한다. 무릎이라는 메타포는 기실 굴복, 참회, 깨달음(무릎을 탁 치다)의 순간이자, 개체에서 파생된 또 다른 개체 생성를 의미한다. (‘슬하의 자식’의 ‘슬하膝下’는 무릎 아래라는 의미이다.) 곧 태어날 아기가 기어다니게 될 근미래의 가장 안전한 비정주 공간에 대한 개인적 사유는 작가에게 땅/장소/영토성을 자각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절박하고도 중요한 순수 기억이다. 잠깐 사이 아이는 방에 놓인 것들을 입 속에 넣고, 뜨거운 것에 데이며 그렇게 세상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가장 안전한 땅/장소/영토인 자신의 무릎 아래에 놀게 한다. 최찬숙의 <qbit to adam>은 작가와 관객이라는 이질적 주체가 전시를 바라보는 개체적 몸/신체를 통하여 지각과 기억을 이끌어내고 사색과 성찰의 경험을 통해 실체의 공존가능성을 꾀하는 유기적 총체성으로서의 장소이다. <qbit to adam>에 드러난 장소성에 대한 환유와 기술의 진보로 인한 자연/땅/토지/영토성에 개념적 감각적 의미 확장은, 유기물도 무기물도 아닌 이 두개의 ‘상태’가 상호 공존하는 코퍼맨처럼(코퍼맨의 형상은 이후 사이버 아바타의 얼굴을 띈다), 영토와 신체의 분리불가분성 혹은 공존 가능성을 역설하고 있다. 작가는 고대 광산에서부터 가상 화폐 채굴에 이르는 역사적 노동과 가상적 소유라는 과거와 근미래의 ‘역사’를 조망하며 근대 인식론의 토대가 된 이성적 사고의 서사 체계와 담론틀을 차례로 전복하며, 이 프리즘들이 발광하고 있는 의미들의 방향성을 의도적으로 우회하고, 감응하며, 선회하고, 재현한다.

최찬숙은 이처럼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잠재성, 즉 소유와 약속의 개념 자체가 없었던 원초적 자연/땅/토지/영토성에 대한 순수 기억을 비통시적으로 서사화하고, 인간의 개입과 자연과의 교섭 결과가 결코 땅/공간/영토의 본래 의미를 해체할 수 없으며, 나아가 우리가 디디고 있는 땅의 감각이라는 현행성(顯在性, actuality)에 대한 온당한 의미들을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최찬숙은 작가 스스로 복권하고 싶은 타자의 기억, 비인간적 영토성의 주체성, 공동 침묵의 토대 위에 구축된 서사적-상상적 진공 상태로서의 타자/땅/공간/영토의 의미 해체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에서 말한 것처럼, 반향 속에서 우리는 시를 듣고 울림 속에 우리 스스로의 시를 읊조린다. 실체들의 공존가능성을 위한 반향과 울림은 그래서 ‘존재의 전환’을 이끌어낸다.

최찬숙의 <60호>와 <qbit to adam>이 제시한 메타 서사와 탈계보학적 상징 재현은 기실 이제껏 존재해왔지만 억누르고 감출 수밖에 없었던, 비가시적 자연/땅/토지/영토성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위계 지형을 가시화하고, 명확히 규정될 수 없던 잠재적 현실을 개체적 감각이 원래 지니고 있던 순수 기억의 서사로 와해하고 파열하며, 서서히 원래의 따뜻하고 매끈한 질감들을 회복할 수 있다는/있을 것이라는 어떤 다짐이자 증표처럼 읽힌다. 에필로그의 돌, 구리, 살, 금속 위에 읊조린 작가 개인의 내밀한 서사는 이렇게 마무리 된다. “내가 죽으면 돌아갈 땅이란 과연 어떤 곳인가?” 이 질문은 반복되는 돌림노래처럼 전시장 속을 울려 퍼지는, 반향과 울림처럼 관객들과 공명한다. 그 장소는 바로 “어느 누구의 것이 될 수 없고, 모두의 것이 될 수도 없는 약속”된 땅(promised land)인 것이다.

 


1. Johann Gottfried Herder, #Ideen zur Philosophic der Geschichte der Menschheit# (1784): “The land is not the object of scientific perception, but a sign that reveals what is within”
2. Henri Lefebvre, #The Production of Space#, Trans. Donald Nicholson-Smith (Oxford: Basil Blackwell, 1991), 8.: “spatial practice consists in a projection onto a (spatial) field of all aspects, elements and moments of social practice.”
3. 자동차와 도시의 합성어로 실재 존재하는 폭스바겐사의 공장 투어 프로그램이다. 이 거대 테마파크의 큐레이토리얼의 전유를 통해 작가는 자가용의 보급이라는 이동기술의 발전을 통해 신체성의 이주가능성 변화를 첨단 테크놀로지의 활기찬 가이드 멘트와 이와 상반된 텍스트/이미지를 통해 보여주고, 일상적 풍경과 기억의 찰나들이 다른 빛으로 지워 나가며 물리적 신체적 이주/ 정신적 이주에 대한 중첩되고 양가적인 작가의 관심을 보여준다.
4. 빛과 유전학의 합성어. 빛의 조절과 유전공학 기술을 통해 뇌 활동을 조절하는 기술을 일컫는다.
5. 빛과 눈의 망막을 감지하는 색소 단백질의 합성을 통해 눈을 통해 수용되는 빛의 전기적 자극으로 기억을 이식한다는 일종의 작가의 가상장치이다.
6. 1968년부터 1973년까지 박정희 정권이 DMZ 지역에 대남선전과 민간방위를 목적으로 재건촌과 통일촌 등 국가촌락을 짓기 시작했다. 양지리는 재건촌 중 하나인데, 재건촌은 영세민이 입주하여 삶의 질이 낙후되었고 국가가 토지나 주택의 사유권을 인정하지 않아 임시 거주지라는 인식이 만연했다. 1972년 「유신헌법」은 국토계획의 필요성을 명시하고 동년 제정된 「국토이용관리법」은 도시·비도시 지역의 체계적인 관리를 법제화했다. 토지관련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79년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정부가 경제활성화 방안으로 1980년대 초반 민통선 지역 토지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하고 소유자 미복구 토지의 복구와 보존등기를 허용하는 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예전의 토지소유 증빙서류를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 토지사유권을 주장했고, 이미 마을에 입주해 지뢰를 제거하는 등 위험을 무릅쓰고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온 입주민과의 마찰이 시작되었다. (정희남, 2010, 전상인・이종겸, 2017 참조)
7.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는 『기계적 무의식』(L’inconscient machinique, 1979)에서, 무의식의 잉여성의 공간적 형식을 ‘얼굴성’이라 불렀다. 그는 얼굴이 특정한 사회 구성체의 산물이자 계산된 표정을 통해 발산된 기호와 표현을 통해 특정한 감정을 발산하는 표정을 지니게 되었을 때라야만 비로소 신체/머리에서 분리된 독자적 ‘얼굴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표정이라는 기표가 내재한 얼굴이야말로 비로소 타자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도구이자 기호가 되는 것이다. Félix Guattari coined the term “faciality- landscapity” (visagéité-paysagéité) to describe the spatial form of the redundancy of the unconscious. Guattari explained that a face is a product of specific social formations. When certain facial expressions are acquired by symbols and expressions that are transpired through calculation, the face finally achieves its independent ‘faciality-landscapity’ that is detached from the body/head. In other words, a face embedded with facial expressions as signifiers is what becomes a tool and sign to convey one’s intention. Félix Guattari, #The Machinic Unconscious: Essays in Schizoanalysis# (Los Angeles, CA: Semiotext(e)/Foreign Agents Series, 2011).
8. 발터 벤야민은 그라뱅 박물관에 있는 밀랍인형을 이상적 이미지(Wish Image)라 묘사했다. 밀랍인형이 지닌 영원한 덧없음, 그 어떤 영구 불멸의 형태도 밀랍전시장이 보존하는 것처럼 덧없고 세련된 형태를 선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전 벅 모스, 발터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문학동네, p.369
Benjamin describes the wax figure in the Musée Gravin as a ―Wish Image as Ruin: Eternal Fleetingness,‖ that ―No form of eternalizing is so startling as that of the ephemeral and the fashionable forms which the wax figure cabinets preserve for us. quoted in Buck-Morss (1993: 369) Buck-Morss, Susan (1991) The Dialectics of Seeing: Walter Benjamin and the Arcades Project, Cambridge, Mass. and London, MIT Press, Korean translation (2004), Munhakdongne Publishing Corp
9. 캐롤라인 험프리(Caroline Humphrey)는 샤먼의 청동 거울이 만들어내는 난반사 효과의 원리가 실재 사람이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춰볼 수 없고 약간 왜곡된 모습으로 비추는데 이를 통해 우리의 생각을 자극하도록 설계된 것이라 주장했다. Caroline Humphrey, “Inside and Outside the Mirror: Mongolian Shamans’ Mirrors as. Instruments of Perspectivism.,” #Inner Asia# 9(2), (2007): 173-195.
10. The resonances are dispersed on the different planes of our life in the world, while the reverberations invite us to give greater depth to our own existence. In the resonance we hear the poem, in the reverberations we speak it, it is our own. The reverberations bring about a change of being. It is as though the poet’s being were our being (Bachelard, 2014: 7).
11. 매순간 현재와 과거가 통시적이라면 모든 지나간 현재들이 통시적이며 따라서 현재와 과거 전체는 늘 공존(coexistence)하기 때문이다. Deleuze says “what we call the empirical character of the presents which make us up is constituted by the relations of succession and simultaneity between them, their relations of contiguity, causality, resemblance and even opposition. […] what we live empirically as a succession of different presents from the point of view of active synthesis is also the ever-increasing coexistence of levels of the past within passive synthesis.” Gilles Deleuze and Paul Patton, #Difference and Repetition# (2001), 83.
12. 주재형, 「베르그손의 순수 기억의 존재 양태에 대하여」, 『철학』, 129호(2016): 153.
13.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박종원 옮김(서울: 아카넷, 2005), 151.

참고 문헌
바슐라르, 가스통. 『공간의 시학』. 곽광수 옮김. 서울: 민음사, 1990.
주재형. 「베르그손의 순수 기억의 존재 양태에 대하여」. 『철학』 129호. 2016년: 151~176.
베르그송, 앙리. 『물질과 기억』. 박종원 옮김. 서울: 아카넷, 2005.
전상인・이종겸. 「DMZ 지역 ‘국가촌락 사업’ 연구: 철원군 유곡리 통일촌 사례를 중심으로」. 『국토계획』 제52권 제4호(2017): 27~41.
정희남. 「정부수립 이후의 한국 토지정책 60년사 소고, 1948~2008」. 『부동산연구』. 제20집 제1호(2010): 281~306.

Critic 3

땅과 몸, 자아와 타자, 정착과 이주 사이의 변증법적 알레고리

이은주(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은신처의 위기(Refuge(e) Crisis)1

2015년 9월, 터키 보드룸 해변에서 3살짜리 아이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파도에 떠밀려온 시리아 난민 알란 쿠르디(Aylan Kurdi)의 자그마한 시신이 모래사장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참혹한 모습을 담은 보도 사진 한 장은 전 세계 네티즌에게 분노와 충격을 안겨주었다. 생과 사, 정착과 이주 사이에서 희생된 이 아이의 죽음으로 전 세계인들은 광기에 가까운 도덕심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 세계의 잘못으로 한 아이가 죽었다”, “이는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등을 구호로 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이는 곧 각국을 향한 난민법 개정 촉구로 이어졌다. 시리아 내전은 약 200만 명의 발길을 유럽으로 향하게 한 민족 대이동을 유발했다.

2017년 12월 겨울 프랑스에서 한 흑인 여성이 응급구조서비스센터에 전화해 다급한 목소리로 구급차를 요청했다. 하지만 상담원은 아프리카 이주민이었던 그 여성의 억양 때문에 구급차를 보내지 않았고, 여성은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시민들 사이에서 일파만파 퍼지면서 수사가 시작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공개된 녹음파일에는 “아파서 죽을 것 같다”라고 호소하는 흑인 여성의 울부짖음이 또렷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아프다고 호소하는 흑인 여성에게 “아프면 의사에게 직접 전화해라”, “당신도 언젠간 모든 사람처럼 분명 죽어요”라고 한 상담원의 응대 내용이었다.2 인류는 생존을 위해, 또는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이주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렇게 정착한 새로운 땅에서도 또 다른 위협을 만나게 되고, 다시 한번 이주를 결정한다.

“아이티에서 사람들이 대거 탈출한 것은 2010년 참혹한 지진이 발생하고 나서였다. 미국 정부는 ‘임시보호신분’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약 6만 명 아이티인들의 미국 체류를 허용했다. 이 프로그램은 자연재해나 장기적인 소요로 고통받는 나라의 국민에게 18개월간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아이티 생존자들은 구조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잔해더미를 뒤집어쓴 채 미국행 긴급 수송선에 올라탔다. 하지만 환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지진이 일어난 지 몇 달 만에 미국 관료들은 공군 화물용 비행기를 아이티로 보내 미국으로 오려는 사람은 누구든 체포해 송환될 거라는 메시지를 퍼뜨렸다.”3

최근 탈국경 이주가 폭증하면서 반이주 정책을 내세운 정치인이 득세하는 한편, 이주자들의 범죄와 혐오로 사회위기가 고조된다는 여론도 치솟고 있다. 인종 간의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자 순수 혈통 체계에 대한 위협이 가중되면서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 시선도 많아졌다. 최근 들어 타자에 대한 수용과 환대를 바탕으로 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장-뤽 낭시(Jean-Luc Nancy) 같은 철학자들의 시각이 담론화되고 있지만, 이주자들의 실제 삶은 여전히 불안하다. 전쟁,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선택하는 이주는 개인적인 삶의 문제를 넘어 사회공동체의 문제로 귀결된다.

최찬숙 작가의 예술적 여정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이주이다. 최찬숙의 작업은 영상, 퍼포먼스, 설치, 오브제 등을 통해 자신의 가족사와 타인의 삶을 자전적 형식으로 엮어낸다. 20대 초반 독일로 이주한 최찬숙은 한국계 아시아 여성으로서 유럽 사회에 완벽히 동화되지 못하는 한편 한국에서는 점차 잊힐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이방인에 대한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인류는 더 안정된 삶을 위해 이동을 선택하지만, 때로는 그 선택으로 인해 스스로 고립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이를 몸소 경험한 작가는 향후 수많은 질문을 본인, 그리고 타자를 향해 던지기 시작한다. 인류는 왜, 그리고 어떻게 이동하는가? 이동은 물리적 이동만 가능한가?

기후 변화에 따라 서식지를 옮겨가는 야생식물의 종은 날로 늘어가고 있으며, 이 현상은 대륙과 대양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움직인다. 인류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에는 위성으로 철새들의 움직임을 추적하여 촬영하고, 그렇게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한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인류의 이주 또한 특정 통계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이주하는 인구는 통계수치보다 더 많다. 이들은 이주하기,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 타자화되어 낯설어지기가 계속 반복되는 상황에 노출된다. 최찬숙은 이론화와 데이터화가 불가능한 경계의 틈바구니에서 ‘이주’에 관한 사유를 시작한다. 이주의 중심에는 타자화된 여성의 삶이 있지만,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은 타자화된 세상에서 주체적 삶을 이끈다.

최찬숙은 어느 날 몇 장의 사진을 들고 일본인이었던 친할머니의 흔적을 찾아 일본으로 이동한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으로 이주했던 할머니의 과거와 풍족한 삶을 사는 자신의 현재를 교차시켜, 현재라는 네모난 천 위에 파편처럼 분절된 과거의 시간성을 한 땀 한 땀 바느질했다. 먼 타국 땅에서 굉장히 친밀했던 할머니의 발자취를 추적하면서, 국가라는 굳건한 장벽과 그 장벽 속에서 고립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결국 이주를 통해 스스로 타자화되고 고립되지만, 국가라는 경계가 없었다면 인종차별주의적, 반잡종문화주의적, 계급주의적, 신식민주의적 관점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최근 대이동으로 인해 이주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같은 인식을 완전히 전환시키는 소니아 샤(Sonia Shah)의 주장이 많은 이론가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녀는 난민과 이주자를 새로운 이웃이 아닌 침입자로 낙인찍는 몇몇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들며, 인류는 원래 정착보다는 강한 이주 본능을 가졌고, 모든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출발했으며4, 더 나아가 원래 인류의 문화는 잡종 문화였다는 논지를 펼친다. 최찬숙의 작업에서도 이주에 대한 소니아 샤의 인류애적 포용력을 확인할 수 있다.

 

정착과 이주의 알레고리

최찬숙은 특정 주제를 선정하고, 그 주제를 긴 호흡으로 치밀하게 연구한다. 최찬숙의 신작은 항상 그 이전 작업에서 미해결로 남았던 부분들을 소환한다. 그래서 각각 다른 주제를 담은 작품들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즉, 강렬한 알레고리의 틀 속에 개인과 역사, 기억과 망각, 정신과 몸의 문제를 가두는 것이다. 최찬숙이 재구성한 세계를 따라 알레고리를 추적하다 보면, 작품 해석에 일정한 방향성이 드러난다. 그리고 각각의 주제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요소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예컨대, <FOR GOTT EN>(2012)은 종교를 중심으로 한 정신적 이주를 다루지만, 이주 여성들의 삶, 망각된 기억, 얼굴의 역사 등이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하며 등장한다. 군사경계지역이라는 장소성을 부각시킨 <양지리>(2018)은 그곳에서 거주하는 할머니의 삶을 자전적 소설의 형식으로 조명한 작품이다. 최찬숙은 양지리 마을에서 주변인물에 머물지 않고 고단한 타인의 삶에 깊이 관여해 그 일부가 된다. 또한 최찬숙은 양지리 마을이 형성되는 과정 내내 이곳에 정착해 살아온 할머니들을 법과 제도로 규정된 땅의 소유 문제에 대입시킨다. 이를 위해 법적 분쟁의 소지가 있는 땅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의 몸에 관한 이야기와 국가가 규정한 제도 밖에서 기본 자격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빌린다. 언젠가는 소유의 문제가 해결될 거라 믿는 양지리 마을의 할머니들은 정착과 이주의 경계라는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다. 최찬숙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불안한 뿌리를 가진 이들의 삶에서 정착과 이주를 반복해온 자신의 삶을 포착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일까. 최찬숙은 타인의 삶을 곧 자신의 삶으로 치환시킴으로써 이주와 정착의 역사를 보다 폭넓은 관점에서 전개한다. 타국에서 타자화된 자신의 정체성을 과거로부터 복구하고 싶었던 작가의 욕구는 시리즈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차츰 되살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과거에는 망망대해 같았던 낯선 시간성에 홀로 서 있었다면, 이제는 수많은 이주 집단 여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서 있다. 최찬숙은 이번에 발표한 <qbit to adam>(2021)이 완성되기까지 이주, 여성, 땅을 주제로 각각 <약속의 땅>(2010)5, <FOR GOTT EN>, <양지리>, <밋찌나>(2019)를 순차적으로 제작했다. 이렇게 완결된 각각의 파편들은 결국 최초의 작업으로 되돌아간다.

독일에서 꽤 오랜 시간 외국인(‘들이닥친 자’)6으로 살았던 최찬숙에게 이주와 여성의 삶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연구 대상이었고, 그는 그 연구를 계속 확장시켰다. 주체와 타자의 문제를 떠나 외국인은 곧 “‘이곳 사람이 아니다’라는 진술을 가능케 하고, 그 진술은 타자를 사회라는 공간으로부터 추방하고 거리를 유지하라는 명령 안에 그를 가두어, 타자를 그 존재 자체로 긍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7 이주를 하면 누구나 특정 장소에 정착한다. 그 정착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욕구와 함께. 이렇듯, 보편적으로 누구나 외국인이라는 시선에서 벗어나 안정적으로 정착하기를 꿈꾼다. 하지만 강한 이주 본능을 가진 인류에게 안정된 정착은 허락되지 않는다. 전쟁으로 떠밀려온 사람들, 식민치하에서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 생사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 영원한 이방인들, 그리고 영원한 타자들. 최찬숙은 이러한 상황에서 물리적 공간을 소유하고 정착된 삶을 산다 해도 외국인,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심리적 박탈감을 떨칠 수 없는 타지 생활의 고충과 쓸쓸함에 집중한다.

최찬숙에게 있어 ‘이주의 문제’는 단지 물리적 공간의 이동, 곧 국경과 국경 간의 이주를 의미하지 않는다. 최찬숙은 “2012년 쿤스트라움 할레 14의 지원 대상에 선정되어 라이프치히 교구 출신의 여성 여섯 명을 만나 오늘날의 신과 믿음, 종교 그리고 영성의 지위에 대한 조사·연구를 현지에서 수행했다. 작가가 만난 여성은 모두 60~90세 사이의 라이프치히 출신으로서, 1949년부터 1989년까지 종교의 자유를 억압했던 동독 체제하에서 자신의 믿음을 확고하게 지켜낸 이들이었다. 이렇게 최찬숙은 예술적 작업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 대한 심오한 고찰이 깃든 리서치 프로젝트 <FOR GOTT EN>을 시작했다.”8 이 전시에는 여섯 명의 여성이 신과 믿음, 기억과 망각 사이의 삶을 반추하는 인터뷰 내용이 영상으로 설치되었다. 이 작업을 관통하는 알레고리는 개인의 역사적 경험과 종교적 관점 간의 상호작용에 관한 성찰이다. 이 작업에도 <약속의 땅>과 마찬가지로 작업의 다른 구간으로 이동하는 장치가 설치되었다. 여성들과의 인터뷰를 위해 특수 제작한 가마는 이동수단이다. 이 가마는 여성들이 살아온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망각된 과거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 올린다. 가마에는 “당신의 눈은 당신의 몸/혼에 난 창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시간을 되돌리는 여정으로의 초대이자 그들의 개인적인 삶의 기억 속에서 일어나는 짧은 여행이다. 이런 기억들은 가마를 타고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진다. 최찬숙의 카메라는 기억의 과정과 여성들의 얼굴, 그리고 자신이 나오는 영상을 보고 보인 그들의 반응을 기록했다.”9 이렇듯 최찬숙은 할머니들이 과거와 소통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마련해 줌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내밀한 과거를 통해 현재의 삶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해준다.

“최찬숙이 만들어낸 이동형 시스템은 노인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작은 세계이고, 그 프레임 안에서 그들은 작가의 도움 없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친절한 환대, 여러 번의 자택 방문, 소박하지만 배려 넘치는 도움, 헌신하고 감사하는 태도 등 작가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노인들은 거리감과 경계심을 풀 수 있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외국인이며 외국인처럼 생긴 한국인이 발산하는 인상 때문이었다. 악센트가 섞인 독일어를 구사하지만 동독의 작센 지역과는 아주 먼 곳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한국인 말이다.”10

이 프로젝트의 디렉터였던 프랑크 모츠(Frank Motz)는 최찬숙이 라이프치히에 수개월 머물면서 <FOR GOTT EN>을 제작한 과정과 태도에 대해 매우 자세히 서술했다. 최찬숙이 외국인으로서 낯선 땅에서 타인들과 긴밀히 협력하여 진행한 작업 과정에는 이미 객관화된 타자와의 경계가 허물어져 있다. 최찬숙의 이러한 작업 방식은 <양지리>을 제작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최찬숙은 5개월간 양지리 마을에서 그곳의 할머니들과 가족처럼 지내면서 이 작품을 제작하였다. 어쩌면 타자에 대한 최찬숙의 따듯한 관심이 그들의 고단했던 삶의 여정에 큰 위로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양지리에서 생활하면서 처음으로 땅을 밟으며 살게 되었어요. 집 나서면 바로 흙, 땅을 밟아야 하는 곳이었죠. 어느 날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90세가 넘으셨죠, 그 할머님께서 지나가다가 툭 한마디 하시는 거에요. 어제 늦게까지 안 자던데… 그 집 살다 먼저 간 친구가 보고 싶어서, 잠시 걸터앉아 있다가 왔어…. 그러시더라구요. …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결국은 땅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안정된 정착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양지리에서의 경험과 그곳의 할머님들을 만나면서, 땅과 몸, 그리고 다른 방식의 소유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11

최찬숙은 강원도 철원 민북마을(Propaganda Village)에서 5개월 동안 생활하면서 오래전부터 그곳에 살아왔던 할머니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남북군사경계지역인 양지리 마을에는 1968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이들이 터전을 꾸리도록 정부가 땅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땅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었다. 최찬숙은 할머니들과 인터뷰하면서 이 마을의 땅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지뢰로 뒤덮인 척박한 땅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토지는 우리 소유로 된 것이 아니라서, 땅 주인이 나타나면 꼼짝없이 쫓겨나야 했던 이야기” 및 “내 땅이 아니라는 아쉬움을 토로하며 늘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흙 묻은 작물들을 털어내시며 풀풀 날리던 흙먼지처럼 셀 수도 없이 반복하여 들려주시는 고생담들” 말이다. 최찬숙은 양지리 마을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며, 사람들이 땅을 소유하는 방식과 땅에 정착하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땅은 왜 당신의 것인가?”

 

정착과 이주의 경계에서 땅, 땅을 소유한다는 의미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복음』 5장 5절).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기』 3장 9절)

“창조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땅을 가리킬 때 아레츠(aretz) 대신에 아다마(adamah: 흙)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인간이 만들어진 재료를 뜻하는 아다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인간의 이름(아담)이 되었다. 흙은 동산의 속성을 지니고,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동산에 두사 그 땅을 다스리며 돌보게 하셨다.(『창세기』 2장 15절)”12 거룩한 땅의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복받은 땅에서 어쩌면 인간의 몸과 땅은 하나였을 것이다. 최찬숙의 <qbit to adam>의 전시 공간은 세 개의 대형 스크린과 구릿빛 바닥 재질로 가득 채워져 있다. 관객은 작가가 설정해 놓은 땅의 질감 안에서 땅과 몸에 대한 서사를 읽어나간다. 최찬숙은 여러 해 동안 땅의 개념에 대해 연구했다. 땅의 경계는 누가 정하게 되었는지, 땅의 소유 개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물질로서의 땅이 앞으로 얼마나 효용이 있을지에 대해서. 그녀는 시간적 간격을 두고 사회, 역사, 종교의 영역에서 땅에 대한 문제의식을 해소하기 위해 애썼다. 그 결과, 땅, 무덤, 몸, 미라가 영상과 텍스트로 흩어지기도 모아지기도 하면서 한 덩어리의 알레고리를 탄생시킨다.

최찬숙은 흙으로 이루어진 땅과 인간 몸의 근원에 천착했고, 그 근원이 초월성으로 치환됨을 깨닫는다. 인간에게 숙명과도 같은 죽음은 인간을 다시 땅으로 돌려보낸다. 최초로 땅이 언급된 성경 속의 ‘땅’ 개념부터 현대사회의 ‘땅’ 개념에 이르기까지 땅의 역사와 범주는 매우 광범위하다. 땅과 몸의 경계가 사라지는 곳. 최찬숙은 23시간의 비행 끝에 칠레의 칼라마 도시와 가까운 아타카마 사막을 찾았다. “1899년 칠레 북부에 위치한 고대 광산에서 미라 한 구가 발견되었는데, 긴 시간 몸속으로 스며든 초록빛 구리로 인해 그의 몸은 광물이 되었다. 코퍼맨(Copper Man). 천천히 그의 몸을 들여다보면 더 이상 몸과 땅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는다.”13 이 작업은 땅과 몸을 연결한다는 시나리오에서 출발했다. 구릿빛 재질로 채워진 전시장 바닥은 땅과 몸을 하나로 잇기 위한 매개영역이다. 구릿빛 광물을 뒤집어쓰고 땅에서 나온 코퍼맨을 상징하기도 한다.


최찬숙은 <약속의 땅>, <양지리>, <블랙에어>(2019)를 통해 이주, 이동, 땅과 땅의 소유 개념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사유의 흐름은 꼬리에 꼬리를 물듯 계속 이어졌다. 《2021년 올해의 작가상 2021》 전시를 위해 완성한 <qbit to adam>은 최찬숙이 앞서 제시했던 주요 키워드들을 통합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최초의 땅에서 광야로 추방당한 아담. 사회, 정치적 맥락으로부터 떠밀려 난 사람들. 땅에서 평생 노동하면서도 그 권리를 찾지 못하는 노동자. 자본주의사회의 경제 논리로 사고 팔리는 땅들. 거대한 자연이 개인의 소유물로 탈바꿈되는 순간들. 그리고 여전히 정착할 땅을 찾지 못하는 이주민들. 최찬숙에게 땅은 떠도는 몸과 영혼의 안식처이자 타인을 포용하고 환대하는 공간이다. 여기에는 난민, 노동자, 이주자를 양산하는 사회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은 사고 팔수도 없고,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마치 땅 위에 봉긋 서 있는 무덤처럼 말이다. 이 사유의 끝에 다다르면 몸과 땅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깨닫는다. 마치 창세기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인류의 욕망이 거세된 땅의 질감과 촉감이 우리의 몸을 감싼다. 그리고 최찬숙은 질문한다.

몸의 경계와 땅의 경계는 어떻게 다른가?
죽은 자의 무덤을 내려다볼 때 무엇이 보이는가?


전시장에 설치된 3개의 대형 스크린에는 살아 숨쉬는 것 같은 땅의 질감이 상영된다. 그리고 이 땅을 배경으로 몸을 상징하는 살구색의 살 조각들이 회전한다. 땅의 촉감에 대한 묘사와 함께 스크린에는 구리 조각도 자주 등장한다. 영상의 오브제인 이 살 조각과 구리 조각은 몸과 땅의 분리 혹은 하나됨을 의미한다. 구리 재질로 마감된 전시장 바닥과 영상 속의 구리 조각은 상호 작용하며 관객의 몸을 둘러싼다. 관객은 땅과 몸을 이어주는 구리빛 바닥에 몸을 맡긴 채, 땅과 그 땅에서 밀려난 자들의 고단한 삶의 여정에 동참한다. 그리고 최찬숙은 다시 질문한다.

땅은 신체와 언제부터 분리되었는가?

데이터
최첨단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류는 컴퓨터 데이터로 구현되는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현실에 진입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뿐 아니라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친다. 땅의 개념과 그 소유 또한 마찬가지다. 가상현실이 처음 등장했을 때, 이것은 인류의 땅의 역사가 그랬듯이 공동의 자산이었다. 하지만 점차 공동소유의 개념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가상의 세계에서도 현실의 땅이 겪었던 일련의 과정들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는 가상의 플랫폼에서 땅을 사고, 아바타를 정성스럽게 꾸민다. 현실의 나는 곧 아바타가 되고, 그 아바타를 통해 가상 세계에 가꾸어놓은 내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또 다른 사람(아바타)을 만난다. 이렇듯 현실 세계의 시공간은 이제 가상의 공간으로 옮겨가고 있다. 먹고 마시는 것 외에도 그곳에서 집을 사고, 꾸미고, 친구들을 만난다. 땅의 개념이 변화함에 따라 인류가 개입하여 관리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그리고 그곳에 존재하는 자아는 몸이 사라진 신체, 즉 땅과의 연결이 끊어진 채 아바타라는 데이터로 변환된 자아이다.

 

토지의 이동, 가상의 땅 쟁탈전

테드 창(Ted Chiang)의 소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에서는 현실의 자아와 아바타가 한 시공간에서 살아간다. 오랫동안 구직 활동에 실패한 애나 앨버라도는 넥스트 디멘션(Next Dimension)의 윈도를 열고 평소에 즐기던 게임인 ‘이리듐 시대’를 시작한다. “교두보는 붐볐지만 애나의 아바타는 모두가 탐내는 강력한 아이템인 자개 갑옷을 착용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플레이어들에게서 자신들의 공격 팀에 합류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애나의 팀은 불타오르는 차량의 연기로 자욱한 전투 지대를 가로질러 사마귀들의 거점으로 가, 한 시간 동안 소탕전을 벌인다. 현재의 기분에 딱 들어맞는 미션이었다. 성취감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는 도전적이다.”14 현실 세계에서 애나는 누군가에게 거절당했지만, ‘이리듐 시대’ 속 애나의 아바타는 누구나 찾는 매력적인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데이터이다. 그리고 애나는 곧바로 친구를 만나기 위해 다른 인터넷 플랫폼인 데이터 어스(Data Earth)에 접속한다.

“접속하자 윈도는 그녀의 마지막 로그아웃 지점으로 줌인한다. 거대한 절벽 표면을 뚫어 만든 댄스클럽이다. 데이터 어스에도 독자적인 게임 대륙이 있지만,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애나는 언제나 사교 대륙에서 시간을 보낸다. 애나의 아바타는 아직도 지난번 방문 때 입었던 파티복 차림이다. 그녀는 좀 더 얌전한 옷으로 갈아입고 친구 로빈의 집으로 가는 포털을 연다.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가자 로빈의 집의 가상 거실에 와 있다. 너비 1마일의 반원형 폭포 위에 떠 있는 거주용 비행선이다. 아바타끼리 포옹을 나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15

가상세계가 등장하면서 현실 세계에서처럼 감정을 투사하는 아바타가 등장했다. 이에 더해 최근에는 NFT와 메타버스가 등장하면서 가상의 영역에서도 현실과 똑같이 땅, 집, 나무, 정원, 차, 옷, 가방 등의 소비가 이루어진다. 테드 창의 소설에서도 등장하듯이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이루어지고, 그곳에서 현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편리하게 할 수 있다. 이젠 물리적 공간에 놓인 몸뿐 아니라 가상공간을 딛고 서 있는 아바타의 존재도 살펴야 한다. 어쩌면 신체와 분리된 듯한 존재이지만, 우리의 영혼과 마음은 물질 없는 데이터에 더 다가가 있을지 모른다. 땅의 소유 개념이 이젠 가상 영역에서의 소유 개념으로 전환되고, 나의 신체는 아바타로 대체되었다. 넓고 황량한 대지 위에 서 있는 나와 광활한 우주 벌판 같은 무한증식 세계에서 부유하는 나의 모습을 추스른다. 그리고 내 몸을 움직여본다. 구리 질감의 바닥 위에 서서 땅의 영상을 바라보며, 땅과 몸의 강한 연결을 감지한다.

 


1 난민을 뜻하는 영단어 ‘Refugee’ 어원은 프랑스어로 ‘Refuge’, 즉 은신처, 숨는 곳(hiding place)이며, 이는 라틴어 ‘fugere’, 즉 “위험한 곳으로부터 보호하는 은신(Shelter)에서 유래되었다.
2 “Ce que l’on sait de l’histoire de Naomi Musenga, morte après avoir été raillée par une opératrice du Samu,” franceinfo, September 5, 2018, https://www.francetvinfo.fr/sante/ce-que-l-on-sait-de-l-histoire-de-naomi-musenga-morte-apres-avoir-tente-d-appeler-a-l-aide-le-samu_2743789.html.
3 소니아 샤, 『인류·이주·생존』, 성원 옮김(서울: 메디치, 2020), 80.
4 생물학적 근거를 가진 인종과 인종 간의 질서에 대한 신화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할 충분한 과학적 근거를 발견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서 널리 인용되는 통계에 따른 인간은 ‘인공과 관계없이’ 99.9퍼센트 동일하다. 그렇다고 해서 견고한 0.1퍼센트의 유전적 차이가 인종집단을 부정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소니아 샤, 같은 책, 251.
5 최찬숙의 물리적 정신적 이주에 관한 작업에서는 두 가지의 갈래로 같은 비중으로 병치되어있다. 개인의 이주역사부터 인류사에 관한 이주개념은 작업의 주요 내러티브로 상정이 된다면 ‘이동’의 개념은 주로 기술 발전에 의한 도구 및 장치로 풀어낸다. 이동의 수단을 통해 이주를 직접 은유하기도 하고, 이동수단을 배치시켜 상상적 이주도 표현한다. <약속의 땅>은 독일의 대규모 테마파크의 영상에 독일 최대 기술을 자랑하는 폭스바겐 쇼룸에서 퍼지는 전자동 시스템 설명 목소리를 콜라주하였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류는 기술에 더 의존한다. 최찬숙은 “인간이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전자동으로 이루어져 있어 안전하게 생산되고 있는 과정을 자랑하는 폭스바겐의 공장의 안내음성이 맞물려 궁극적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파라다이스는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이렇듯 최찬숙은 “기술의 발전 결과와 종교가 추구하는 목적을 쫓다보면 결국 유토피아적 관점에 도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 작업은 “유대인들이 신에게 받은 약속의 땅으로 상정하여 이동식 성전을 모티브로 하여 이동식 조립모빌 속에서 상영된다.”
6 기욤 르 블랑은 ‘외국인’이라는 이름 아래서, ‘들이닥친 자’라는 명명 아래서 파악되는 것은 언어와 국가의 법을 위협하는 침입의 사건이다. 이때 외국인은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자로 ‘타자화’된다. 더 중요한 것은 들이닥친 자에 대한 지배를 보증하기 위해 외국인을 타자로 설립하는 위계적 분할로부터 타자화가 태어난다는 것이다. 기욤 르 블랑, 『안과 밖 외국인의 조건』, 박영옥 옮김(파주: 글항아리, 2014), 34.
7 기욤 르 블랑, 같은 책, 26.
8 마카엘 아츠트·프랑크 모츠, 「“당신 자신의 기억은 혼자 짊어 지고 가야 합니다…”」, 『FOR GOTT EN』, 최찬숙 지음(LOOP Press, 2015), 141.
9 미카엘 아츠트·프랑크 모츠, 같은 책, 142.
10 미카엘 아츠트·프랑크 모츠, 같은 책, 143.
11 최찬숙, MMCA 작가 인터뷰, 2021년.
12 그러나 아담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숨는다. 그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그것은 그가 하느님의 믿음을 상실했다는 신호이다.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법을 지키지 않아 복 받은 땅은 저주의 땅으로 변화했다. 복 받은 땅에서 삭막한 광야로 쫓겨 난다. 이처럼 땅 자체도 인간의 불행과 운명을 같이 한다. 알랭 마르샤두르·다비드 노이하우스, 『약속의 땅, 성경과 역사』, 권유현 옮김(서울: 성서와함께, 2006), 28~29.
13 최찬숙의 영상 작업 <qbit to adam>의 스크립트 발췌.
14 테드 창, 『숨』, 김상훈 옮김(서울: 엘리, 2019), 99~100.
15 테드 창, 같은 책,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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