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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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CV
교육
2011
영국왕립예술대학 조소과 졸업, 런던, 영국
2007
서울대학교 대학원 조소과 졸업, 서울, 한국
2004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서울, 한국
개인전
2018
《기러기》, 아뜰리에 에르메스, 서울
2015
《조건부 드로잉》, 두산갤러리, 뉴욕
2014
《검은, 분홍 공》, 두산갤러리, 서울
2013
《습관에 관한 소고》, 하다 컨템포러리, 런던
2008
《익명풍경》, 관훈갤러리, 서울
주요 단체전
2018
《더블 네거티브: 화이트큐브에서 넷플릭스까지》, 아르코미술관, 서울
《확장된 매뉴얼》,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서울
《Unclosed Bricks: 기억의 틈》, 아르코미술관, 서울
《포인트 카운터 포인트》, 아트선재센터, 서울
2017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 아뜰리에 에르메스, 서울
《균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레슨 제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신소장품 2013-2016: 삼라만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6
《APT Shots 2016: Mind Out》, APT 갤러리, 런던
2015
《Move & Scale》, 시청각, 서울
《막후극》, 인사미술공간, 서울
2014
《아트스펙트럼 2014》,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
2013
《Richard Smith》, 윈터 프로젝트, 런던
《젊은 모색 2013》,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2
《Young London 2012》, V22, 런던
《Twin Town》, 주영한국문화원, 런던
《White Rain》, 유니온 갤러리, 런던
《The Function of the Oblique》, 노 포맷 갤러리 / 손 갤러리, 런던
《30cm of Obscurity》, 올드 폴리스 스테이션, 런던
《In Forward-Reserve》, 슈바르츠 갤러리, 런던
《세상만큼 작은 나만큼 큰》, 갤러리현대, 서울
《The Forces Behind》, 두산갤러리, 서울 / 뉴욕
2011
《Bloomberg New Contemporaries》, ICA, 런던 / S1 아트스페이스, 셰필드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미지의 대지》, 인천문화예술회관, 인천
《A Future Pump House》, 펌프하우스 갤러리, 런던
《Space Study》, 삼성미술관 플라토, 서울
2010
《Future’s Future’s Future》, 주영한국문화원, 런던
《우회전략》, 국제갤러리, 서울
주요 수상
2013
두산연강예술상, 한국
2011
블룸버그 뉴 컨템포러리 선정, 영국
2007
제29회 중앙미술대전 우수상, 한국
레지던시
2020
명륜동 작업실, 캔파운데이션, 서울
2019
난지레지던시,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5
두산레지던시, 뉴욕
2012
가스웍스 레지던시, 런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
주요 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연강예술재단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Critic 1
사물과 공간 사이에서 움직이기: 김민애의 반응적 조각
윤원화 (시각문화연구자)
최근 한국 미술에서 조각은 회화에 뒤이어 활발하게 되돌아오고 있다. 조각가를 자처하며 새로운 조각의 방법을 연구하고 힘있는 조각 작품을 만들어 보이려고 애쓰는 작가들이 늘어났고, 이들의 활동을 개별적 또는 집합적으로 조명하려는 기획 전시들도 여럿 만들어졌다. 하지만 ‘되돌아온다’라는 것은 조각이 사라졌던 적이 있다는 말인데, 이런 주장은 반박당하기 너무 쉽다. 1995 년 건축물 미술작품 설치 제도가 시행된 이래 얼마나 많은 조각 작품들이 도시 경관에 들어왔는가? 조각적 생산이 양적으로 위축되었던 적은 없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조각이 법적으로 건축물에 부속하여 도시 환경에 꼭 들어가야 하는 것이 되면서, 그것은 역전된 레디메이드 같은 운명에 처했다. 원래는 미술 작품이어야 할 것들이 사실은 아무도 미술 작품을 기대하지 않는 비미술적 맥락에서 무관심하게 양산되고 방치되면서, 드물게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이들에게 미술이란 대체 무엇인가 하는 회의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회화나 조각처럼 전통적인 미적 매체를 바탕으로 미술 작품이라는 특별한 대상을 창조한다는 관념 자체가,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해도, 다소 구태의연하게 여겨지기 시작한지는 꽤 오래 되었다. 한국의 경우 늦어도 1990 년대부터 영상과 디지털 미디어가 매체 탐구의 새로운 관심사로 부상했고, 매체 중심적 사고를 넘어 미술 자체의 구획을 재고찰하는 다양한 방법의 개념적 작업들이 활성화되었다. 이와 함께 전시장은 일상 사물과 구별되는 미술 작품만의 특별한 거처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이질적인 것들의 기호적, 건축적, 수행적 배치를 구성할 수 있는 열린 무대로 변모했다. 이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상대적으로 잘 거론되지 않는 것은, 이렇게 달라진 미술 환경에서 조각을 한다는 것이 불현듯 하나의 수수께끼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소를 전공한 많은 작가들은 입체 작업을 하더라도 굳이 ‘조각’이라는 말로 작업을 설명하지 않으려 했고, 더 많은 경우에 미디어 설치로 작업을 확장하거나 아예 영상 작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김민애는 2000 년대 중반에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소를 전공했고, 미술의 의제로서 조각이 수면 아래로 내려 갔다가 다시 올라온 지난 십여 년 동안 꾸준히 조각적인 것의 문제를 탐구해 왔다. 하지만 그의 접근은 조각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기념비적인 덩어리로 공간을 장악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그는 조각이 놓이는 공간을 조각의 거푸집이자 좌대로 발견하는 독특한 관점에서 이상한 사물을 만들어내고, 다시 그 사물을 건축 자재이자 미디어 삼아 이상한 공간을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움직임을 이어 나갔다. 이때 조각적인 것은 사물의 배타적 속성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공간의 연합적 관계 속에서 출현한다. 김민애가 만드는 것들은 공간 속에 놓이는 여러 대상들 중 하나로서 일반적인 사물의 질서에 귀속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공간 속으로 스며들어 건축적 질서로 통합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의 작업에서 조각적인 것은 사물과 공간 사이의 틈새를 열어 보이는 역량을 가진 것으로서, 전통적인 조각의 매체—덩어리를 만드는 각종 재료와 그에 기반한 관습들의 총체—에 한정되지 않는 새로운 문제로 재정의된다.
김민애는 물리적 공간의 구조와 형태, 그 속에서 허용되는 이벤트의 유형과 범위를 구획하는 건축적 질서에 교묘하게 기생하여 그것을 교란시키며 공간 지각을 의외의 방식으로 변형하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형적인 예로, <젊은 모색 2013>에서 전시 장소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난간 형태를 차용하여 전시장 여기저기에 정체 불명의 난간 모양 구조물을 설치한 <상대적상관관계> 연작(2013)이 있다. 원래 난간은 계단처럼 단차가 있는 곳에서 관객이 다치지 않도록 움직임을 제한하는 장치지만, 작가가 만든 난간 모양 구조물들은 작품이 관객에 의해 훼손되지 않도록 접근을 금하는 안전선의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동선을 애매하게 가로막거나, 또는 계단이 없는 곳에서 마치 천장 너머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 것처럼 가상의 동선을 안내하기도 한다. 이런 작업은 전시장을 폐쇄하거나 전시장 바닥을 부수거나 하는 공격적인 제도 비판적 접근이나 또는 전시장을 순수하게 물리적 공간으로 새롭게 지각하도록 유도하는 현상학적 접근을 상기시키지만, 순순히 그런 부류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김민애의 사물이 특정 범주에 귀속되지 않고 자꾸만 미끄러지듯이 그의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 작가는 공간이라는 문제를 물리적이고 제도적인 제한 조건, 외부적 환경인 동시에 작가에게 이미 내재화된 하나의 틀로서 발견하고, 이 구속적 공간에 대한 탐구를 조각적으로 풀어 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대학원 재학 시절 입체 조형물을 보관하기 위해 그 형태에 꼭 맞게 홈을 판 상자를 재료 삼아 여러 가지 작업을 시도했는데, 상자의 내용물은 상자 안에 끼어 있기도 하고 (<030516>, 2005) 상자를 빠져 나와서 자기가 빠져나온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다가 (<040111>, 2004-7), 마지막에는 작별 또는 만남의 인사를 하는 듯한 포즈가 각인된 수백 개의 상자들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Hi-Bye>, 2006-7). 사물과 공간의 연쇄는 같은 자리에서 핑퐁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나아가고 다른 것으로 변모한다.
여기서 움직일 수 있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어쩌면 그는 조각을 넘어, 심지어 미술 바깥의 세계로 떠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민애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작가가 결국 제도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공간과 사물이라는, 한쪽에는 바퀴가 달리고 다른 한쪽에는 버팀쇠가 붙은 것 같은 이상한 이동 장치를 운전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뒤뚱뒤뚱 움직여 다녔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간의 행적을 딱히 조각에 대한 탐구라고 주장하지 않지만, 계속해서 조각적인 것을 규정하는 조건들을 의식하면서 그것을 반영하는 동시에 비스듬히 벗어나는 동선을 찾으려고 애썼다. 각각의 작업들이 그때그때 외부적으로 주어진 조건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전체적 궤적을 하나의 연대기나 체계로 말끔하게 정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작업이 위치하는 맥락에 따라 작가가 그에 대응하는 방법의 유형이 생겨나고, 이 유형들이 반복되면서 또 다른 형태로 진화하거나 돌발적으로 변모를 이루는 여정을 더듬어 볼 수는 있다.
먼저 운동과 정지 사이에서 모순적인 신호를 보내는, 간단히 말해 오도가도 못하는 상태를 상연하는 작업들이 있다. 작가는 기존 공간에 주변의 건축적 요소를 흉내낸 최소한의 사물들을 덧붙여서, 사방이 트였지만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거나 (<막다른 골목>, 2010) 또는 방향이 선명하게 주어져 있지만 그쪽으로 움직일 방도가 없는 (<Distant Stairway>, 2011) 상황을 조성한다. 그래서 작가가 도입한 사물들은 외관상 기능적 사물과 유사하지만 쓸모가 없는데, 이는 기둥이 불필요한 트러스 구조에 그 외형을 흉내내어 바퀴 달린 기둥을 덧붙인 <지붕발끝>(2011)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기둥 같아서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지만 사실은 거기 있을 필요도 없다. 제대로 된 사물도 아니고 의미 있는 건축적 요소도 아닌 채로, 빨간색 바퀴는 이중의 불필요성을 담담히 짊어지고 서 있다.
영국 유학 시절 주로 학교를 기반으로 형성된 이러한 접근은, 작업을 생산하고 작가를 양성한다는 공간의 프로그램에 대한 반응이기도 했고, 일상용품도 아니고 건축도 아닌 조각의 불가능한 위치 짓기에 대한 탐구이기도 했다. 여기서 좀 더 전시장용 조각 작품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사물의 자기부정성이 강화된다. 그것은 전시 공간의 직각 모서리에 꼭 들어맞게 세울 수 있지만 다리가 하나뿐이고 바퀴가 달려서 혼자서는 설 수 없거나 (<화이트큐브를 위한 구조물>, 2012), 목발 세 개를 연결하여 혼자 설 수 있지만 본래의 운동적 기능은 상실하거나 (<자립조각>, 2012), 또는 전시장 내에 합법적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물들의 기능과 의미를 모두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특정성을 스스로 무효화한다 (<황금 기둥들 – 테이블, 좌대, 오브제>, 2012)
작가는 사물 스스로 자기를 주장하고 입증해야 하는 이 ‘막다른 골목’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당시에는 이미 고전적인 화이트큐브처럼 오로지 미술 작품만을 위한 순수 공간을 표방하지 않고 장소의 역사성과 건물의 건축적 특성을 살려 미술 외적 맥락에 개방된 전시장이 많이 있어서 작가가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사물들은 일어서서 움직이고 싶다는 의지나 그 반대급부의 무기력을 버리고, 자기가 놓인 공간을 물리적 또는 가상적으로 반영하고 증식시키는 데 집중되었다. 이를 위해 벽체와 커튼, 창문과 거울과 액자, 또는 그저 여러 가지 크기와 투명도와 반사도를 가지는 평평한 사물들이 도입되었다. 특히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가짜 창문의 형상이다. 전시장의 내외부를 나누는 벽체 앞뒤에 창문 모양으로 틀을 짠 캔버스와 조명을 설치하거나 (<Behind the Scene>, 2012), 모든 칸이 똑같이 생긴 경찰서 유치장의 칸막이 벽 앞뒤에 거울을 달아서 (<La Reproduction Interdite>, 2012), 거기 창문이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장치들은 작가의 뜻대로 관객의 눈을 속이는 일루전에 그치지 않고, 관객 스스로 그 창문 너머에 대해—실은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확인할 수 없는 공간을—상상하도록 유도하는 일종의 공용 스크린으로 기능한다.
엄밀히 말해서, 이는 완전히 새로운 시도라기보다 2008 년 서울에서의 첫 개인전 <익명풍경>의 접근을 재차 시도한 결과였다. 다만 당시에는 작가가 자기 주변에서 직접 경험한 공간적 착각과 그로부터 촉발된 몽상을 전시장 내에 물질적으로 재상연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때의 작업들은 작가 자신을 포함해서 현재 그 공간을 오가는 사람들이나 과거에 그곳을 점유했던 사람들의 알 수 없는 기억과 상상에 좀 더 개방적인 구조를 취했다. 이러한 접근은 큐레이터 권혁규와 함께 진행한 일일 프로젝트 <리차드 스미스>(2013)에서 더욱 구체화되는데, 작가는 재개발을 앞둔 주택단지의 상점 건물을 활용한 프로젝트 스페이스를 무대로 그 지역에 살았던 가상의 인물을 상정하고, 그와의 만남을 상상해볼 수 있는 모호한 상황을 조성했다. 이곳에서 작가와 관객은 미미한 물질적 잔해만으로 잘 모르는 존재를 떠올려야 한다는 동일한 곤경에 처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셔터가 반쯤 내려간 이 공간의 입구는 첫 개인전 당시 작가가 요철 무늬 벽을 셔터 달린 문으로 착각했던 경험을 반추하여 전시장 벽면에 거울을 붙이고 셔터를 달았던 <지속된 반사>(2008)를 아주 닮아서,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마치 그 거울 너머의 공간이 시공간을 가로질러 런던에서 개방된 것 같은 허황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이 같은 가상적 도약 또는 비약의 움직임을 창출하는 것은 이후 김민애의 작업을 견인하는 주된 관심사다. 2013 년 두번째 개인전 <습관에 관한 소고>에서 처음 등장한 커다란 분홍색과 검정색 고무공은 구르거나 통통 튀어서 어디론가 떠나버릴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운동성을 함축한다. 이 요소들은 이후의 작업에서 비물질적인 조명 (<검은, 분홍 공>, 2014), 전시장 벽면에 밀착된 그래픽적 평면 (<조건부 드로잉>, 2015), 또는 작고 단단한 포켓볼 공 (<검은, 분홍 공>, 2018) 등으로 모습을 바꾸어 가며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쌀알을 흩뿌려 점을 치는 일이 정말로 미래를 읽어낸다기보다 특정한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강박적 불안을 해소하는 행위에 가까운 것처럼, 이 공들은 작가의 작업이 주어진 조건과 그에 대응하는 루틴에 기계적으로 종속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무작위성을 도입한다.
최근 김민애는 공간을 물리적으로 점유하기보다 최대한 비우면서 그 속에 일렁이는 무언가 이상한 상념, 인상, 또는 명령을 유령처럼 불러내는 데 집중한다. 2018 년 개인전 <기러기>에서 작가는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전시장을 일종의 무빙 이미지 장치처럼 변화시켰다. 대체로 날개 크기에 비해 뚱뚱해 보이는 새들의 하얀 윤곽선이 원래 크기와 무관하게 하얀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우는 크기로 돋을새김 되어, 빛과 소리의 움직임에 따라 얼핏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당연히 움직이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조각적인 것이 어떻게 움직여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작가의 전작을 꿰뚫는 하나의 문제 의식이었다면, <기러기>는 그에 대한 가장 최근의 답변이다. 조각적인 것은 여전히 광장공포와 폐소공포 사이에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갈팡질팡한 곳에 있지만, 그 속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그 움직임의 귀결을 조각이라고 불러야 할지, 또는 다른 어떤 매체의 발명이라고 평가해야 할지는,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작가는 그것을 가능한 오랫동안 미정으로 남겨 놓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Critic 2
기러기의 가호 아래
윤원화 (시각문화연구자)
그 제목에 걸맞은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인 『한국현대조각사 연구』는 “조각이란 저 홀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사물이다”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문장으로 시작한다.1 이 인용된 문장은 근대 조각의 전통과 20세기 한국의 역사적 조건 사이에서 태동할 수 있었을 어떤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조각에 대한 열망을 함축한다. 또한 그것은 한국 미술의 정체성에서 조각의 본질에 이르기까지 지난 세기에 열렬히 탐구되었던 주제들이 불현듯 그 인력을 상실한 듯한 새로운 세기 앞에서 스스로 조각의 견고한 현존에 상응하는 어떤 자명한 선언으로 성립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선언은 ‘그림은 그림이다’와 같은 자기 동일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회화가 그것을 그리는 손과 보는 눈 사이를 매개한다는 엄밀한 의미에서 매체로 주어지는 데 반해, 조각은 “저 홀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사물”을 형성해야 한다는 수수께끼 같은 과제로 상정된다. 우리가 이 오래된 스핑크스의 질문에 답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2 이 질문은 다시 둘로 분기한다.이제와서 굳이 조각을 열망해야 하나? 또는, 어째서 조각에 대한 열망만으로는 부족한가? 첫 번째 질문의 주체는 스핑크스를 피해서 다른 길로 가고, 두 번째 질문의 주체는 스스로 스핑크스의 형상을 빚는다.
김민애는 둘 중 어느 쪽도 택하지 않았다.그에게 조각은 존재하지 않기에 퇴치할 수도 없는 유령과 같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묶인 매듭이다.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공간을 점유하지만 그와 확연히 구별되는 자족적이고 자립적인 사물이라는 조각의 조건을 충족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아마도 인간의 몸을 가져다 놓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와 같으면서도 달라야 한다. 여러 가지 의미로 우리의 것이 아닌, 우리의 바깥에 있는 몸을 발견하는 것은 조각의 반복되는 주제이다. 조각의 범주가 인간의 몸에 대한 우리 자신의 불안과 환상, 호기심, 욕망과 혐오를 객체화하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은 그것이 거듭해서 돌아오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김민애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과 사물 간의 진동보다는 그런 인간의 불안정성에 휘말려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된 사물 자체의 불안정성이다. 조각의 이념은 보통의 사물들을 조각적 속성이 결핍된 것으로 재정의하고 스스로 조각이라고 주장하는 사물들을 초조한 심판의 시간에 들게 한다. 나는 무엇이 되어야 했는가? 나는 달리 무엇이 될 수 있었나? 김민애는 이 같은 사물들의 실존적 질문을 연극적으로 상연하면서 조각을 우화적 대상으로 변모시킨다.
‘…같지만 아닌’ 것들의 극장
우화는 문자 그대로의 내용과 다른 의미를 포함하는 텍스트이며 하나를 말하면서 다른 하나를 말하는 비약의 연쇄다. 조각이 우화적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 처지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해서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김민애의 작업은 대부분 이미 존재하는 것을 변조하거나 흉내 내서 이상하게 조립한 집합체로서 적극적으로 ‘나는 달리 무엇이 될 수 있었나’라는 질문에 응답한다. 그러나 이 사물들은 ‘나는 무엇이 되어야 했는가’라는 질문을 잊지 않고 그들 자신과 그들이 점유한 공간, 그리고 그곳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며, 그런 수수께끼 풀이의 반복 속에서 역설적으로 탈바꿈의 계기를 발견한다. 이렇게 확장되는 조각의 장은 어떤 합리적 체계나 필연적 진화로 귀결되기보다 일련의 사물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유랑 극단처럼 나타난다. 이들은 인간 형태로 한정되지 않기에 상황에 따른 재조합이 용이하며 배우에서 무대 세트와 소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극장은 어떤 식으로든 전시가 이뤄지는 장소 또는 미술이 요구되는 맥락에 반응하여 구축되기 때문에 장소를 옮길 때마다 부서지고 다시 지어지기를 반복하고, 그 과정에서 사물들은 사실상 일회용품처럼 소모된다.
김민애의 조각적 극장을 가동하는 것은 이런 사물들의 꿈과 정념이다. «검은, 분홍 공»(2014)에서 그가 이전의 전시에서 사용했거나 제작한 물건들은 흡사 코끼리 무덤처럼, 또는 그 무덤의 발굴 현장처럼 천막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분홍색 조명은 무거운 몸체를 내려놓은 사물들의 혼백 같기도 했고 그들이 선을 넘지 않도록 감시하는 초소의 불빛 같기도 했다.사물들을 드러내 보이는 동시에 그것들의 흐릿한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분홍의 도깨비불은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적힌 천막의 안과 밖 사이에서 어디에 눈과 발을 둬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관객을 무심하게 비췄다.그러나 관객이 의미불명의 빛 앞에서 무엇이 이 전시를 보는 올바른 시점인지 망설일 때, 우리는 이미 전시장에서 취해야 할 올바른 자세를 고민하다가 탈진해 버린 사물들의 극장 안에 들어와 있었다. 천막과 조명은 전시 공간을 극장과 그 이면으로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장처럼 보이지만 그와 미묘하게 구별되는 어떤 거울 저편의 공간을 생성했다. 여기서 사물들은 각자에게 할당된 위치와 역할을 거부함으로써 전시를 유보했다. 아직 준비가 덜 된 것처럼 또는 너무 예전에 준비가 되었던 것처럼, 이들은 잘못된 시간에 찾아온 관객을 무관심하게 응대했다.
공간 안에 수동적으로 놓여서 다른 사물들과 비교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위치하는 공간을 선택적으로 개조하고, 그럼으로써 일반적인 사물의 질서와 공간의 질서 양쪽 모두에 거리를 두려는 것은 김민애의 사물들이 가진 공통의 지향이다. 이들은 사물과 공간의 틈새로 움직이는 준 건축적 퍼포머가 되어 조각의 퇴로 또는 의외의 공격로를 그려 보이려 한다.하지만 이 사물들이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김민애의 작업에서 키네틱 장치가 쓰이는 경우는 빛을 움직일 때가 유일한데, 그 비물질적 움직임은 사물들의 불활성을 강조하면서 무언의 압력을 가한다. ‹기러기›(2018)에서 천장에 설치된 회전식 조명은 사물들이 사라지고 퍼덕이는 날갯짓 소리만 남은 전시장을 비추고 있었다. 행방불명된 사물들을 기리는 것처럼 전시장 벽면을 따라 돋을새김 된 뚱뚱한 새들의 이미지는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할 것 같으면서도 그럴 리가 없었다. 이렇게 자기가 아닌 것, 자기보다 높은 것으로 이행하려는 거의 가망 없는 꿈은 김민애의 극장이 상연하는 주요 레퍼토리다. 그래서 이들의 정지된 액션은 진지한 표정의 슬랩스틱 코미디에 가까워진다. 열쇠 구멍을 찾지 못해서 여기저기 열쇠를 꽂아 보지만 사실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열쇠도 아닌 희극 배우처럼, 사물들은 미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심각하게 검토하면서 계속 헛다리를 짚는다.
이 같은 사물들의 몸짓은 무대 뒤에서 이들을 부리는 미술가의 모습과 어쩔 수 없이 겹쳐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의인화된 사물이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인간의 이념과 닮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닮는다. 김민애의 공간에서 출몰하는 것은 자기를 표현하는 얼굴을 가진 몸체들이 아니라 주어진 공간 자체를 몸통으로 삼는 부분적인 대상들, 이를테면 목발 같은 것이다. 실제로 김민애는 세 개의 목발을 하나로 엮은 모양의 목재 구조물을 만들고 ‹자립 조각›(2012)이라고 명명한 적이 있었다. 목발은 홀로 설 수 없는 가짜 다리다. 그것들은 서로를 떠받치며 자립적인 구조체가 되지만 그럼으로써 움직임을 보조하는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자기를 기리는 앙상한 기념비가 되고 만다. 목발은 자립성 있는 건실한 사물이 되기 위해 테이블,기둥,좌대,심지어 대걸레로 모습을 바꿔 보지만 섣부른 갱생의 시도는 그 쓸모 없음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조각적으로 결함 있는 사물들은 올바른 상태로 이행하는 법을 연구하다가 종종 옴짝달싹 못 하게 된다. 목발은 발 대신 바퀴를 달고 멋지게 넘어져서 웃음을 유발하고, 다음 장면에서는 넘어지지 않게 또 다른 목발을 짚고 나타남으로써 심지어 웃기지도 않게 된다.
역사가 미래가 될 때
일상용품의 도덕과 조각의 규범, 교통 법규와 건축적 합리성 중에서 어느 하나도 제대로 준수하지 않는 사물들의 극장은 어디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나의 임박한 가능성은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지루할 만큼 자명하게 들리지만 의외로 잘 보이지 않는 미래이다. 기억의 총체로서 자기를 보존하여 도래할 시간으로 던져 넣으려면 어떤 교통 수단이 필요하며 그것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바퀴로 움직이는 조각›(2018)은 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다. 조각의 이념을 중심으로 불규칙하게 공전해온 사물들의 궤도를 각인한 일종의 자기 기념비로서, 이 작업은 전시장의 네 모서리를 떠받치거나 그에 기대는 자세로만 설 수 있는 바퀴 달린 목발들을 ‹화이트큐브를 위한 구조물›(2012)로 제시했던 과거의 작업에서 파생되었다. 김민애는 이 불완전한 외다리들이 서로 기대어 자립할 수 있도록 열십자 모양의 보철물을 새로 제작하고 그것을 장착한 모습을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재구성했다. 원 구조물은 흐릿한 형상으로 남고 빨간색 바퀴만 제 기능을 보존하여,이제 그것은 어디에나 녹아들 수 있고 여차하면 도망갈 수 있는 은밀하고 기동성 있는 사물로 변형되었다.
그렇지만 이는 애초에 미술관 소장품을 원작자가 직접 재해석하여 새롭게 설치해 보는 전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제작된 것이었다.3 원 작업은 이미 정부 차원에서 관리되는 역사의 일부가 되어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어떤 면에서 김민애는 잠시 돌려받은 그 물건을 플라스틱으로 본떠서 바깥으로 빼돌린 셈이었지만, 이 물질화된 잔상은 그 사이에 또 늘어난 기억을 문신처럼 새기고 지금 다시 미술관에 돌아와 있다. 김민애에게 주어진 올해의 작가상 전시 공간의 오른쪽 진입로를 살짝 가로막듯이 서 있는 이름 없는 사물이 그것이다. 전시를 이루는 사물들은 모두 각자의 이름을 지우고 하나의 집단 또는 극단으로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돌림노래처럼 반복한다. 이들은 주어진 공간을 반영하고 서로를 굴절시키면서 현재 전시의 장소이자 하나의 영묘로서 미술관이 가진 중력에 대항한다. 전시가 설치된 곳은 지상층과 지하층 간의 계단실을 둘러싼 공간으로, 공교롭게도 지금은 상층부에서 열리는 소장품 전시 때문에 통행이 제한되어 있다. 김민애는 이 막다른 골목을 중간에서 끊어진 레드카펫과 어딘가 음흉하게 들리는 옛날 노래로 장식했다. 이렇게 퇴로가 차단된 곳에서 사물들의 연극이 재개된다.
먼저 무용지물이 된 계단실에서 떨어져 나온 세 개의 직육면체가 있다. 이들은 계단실을 관통하는 세 개의 진입로를 그대로 본뜬 것으로,미술관을 이루는 건축적 공간의 실물 크기 표본이자 그 공간을 변경할수있는추가적인구성요소로작용한다.실제로사용할수있을것같지않은손잡이와바퀴를달고 자신이 이동식 장치임을 주장하는 이 커다란 직육면체들은 거울 또는 백색의 표면으로 주변을 가리거나 반사하면서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하지만 그 방해 공작은 미술관이 자연스럽게 부과하는 시선과 동선의 통제를 교란함으로써 보여야 하는 것과 보일 필요가 없는 것을 구별하는 비가시적 경계를 일시적으로 무력화한다. 이렇게 개조된 공간에 또 다른 사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온다. 전시물인지 아니면 전시를 보조하거나 방해하는 물건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것들,대체로 무언가 흉내 내는 것 같지만 그에 동일시하지 않는 광대 같은 것들이 무대 위에 선다.이들이 어떤 정해진 각본을 상연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세 개의 직육면체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묶이는 사물들의 집합을 각각 연극의 막처럼 분석하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
이를테면 한밤중에 스크루지의 침실에 나타나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 장면씩 보여주는 크리스마스의 세 유령들처럼, 전시장의 사물들은 제각기 그들에게 일어났거나 일어날 수 있었을 상황들을 연기하고 있다. 그것은 미술의 역사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미술관을 목적지로 하는 사물들이 공유하는 집합적 기억의 단편들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물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보다도 그런 패턴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사물들은 이 같은 기억을 다시 한번 반복하면서 어떤 조건에서 반복이 유발되며 그 과정에서 반복되지 않는 무엇이 나타나고 또 사라지는지 살핀다. 나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나는 무엇과 같고 또 다른가,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사물들은 질문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을 통해 사물들은 절박하게 자기를 과시하는 경쟁적 관계에서 공통의 운명을 탐색하는 협력적 관계로 이행한다. 그 끝에 조각이 있다면, 그것은 맹목적으로 추구되거나 폐기되어야 하는 이상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것들의 부활을 유도하는 하나의 촉매로서 유효하다.
지옥을 뒤집기
계단실로 이어지는 왼쪽 진입로로 들어가면 첫 번째 직육면체가 나타난다. 레드카펫을 흉내 낸 회색 시트지의 장식띠를 늘어뜨리고 유광 페인트로 그린 광채를 두른 이 높다란 상자는 브러시가 아직 그대로 꽂혀 있는 한 쌍의 페인트 통을 거느리고 있다.그것은 자신이 전시용 가벽이나 좌대와 같은 방식으로 제작된 합판 구조물임을 보여주면서 미술관 내에 존재하지만 전시물로 간주되지 않는 수많은 사물들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 자체는 좌대로 쓰이기엔 너무 높고 가벽으로 쓰이기엔 너무 두껍다. 자신의 실용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이 비대한 덩치는 미술관의 크고 높은 공간에 맞추어 자신을 키운 결과이다. 그것은 이 전시실 내에서 제작되었을 것이고 전시가 끝나면 아마도 같은 자리에서 해체되어 나갈 것이다. 재제작이 용이한 자기 자신의 기념비로서 그것은 자신을 가시화하는 데 성공하지만 자신을 구제하지는 못하며, 그럼으로써 부서지기 위해 만들어지는 전시용 사물들의 무상한 위령비가 된다.
계단실 아래로 지나가는 중앙 진입로 근처에는 두 번째 직육면체와 그 파생물들이 흩어져 있다. 거의 입방체에 가까운 이 구조물은 자신이 조그만 원룸 주택과 거의 같은 크기임을 알리기 위해 문과 창문의 윤곽을 얕게 새기고 있다. 그것은 사람의 몸에 비교하면 상당히 크지만 미술관 전시실의 높은 천장 아래에서는 그렇게 커 보이지 않는다. 미술관의 규모가 일반적인 거주 공간과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즉각적인 척도로서 이 주택 모양의 화이트큐브는 이곳의 사물들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크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그것은 좌석이 있는 낮은 연단과 인조 잔디밭으로 모습을 바꾸면서 만약 자신이 점유한 공간이 좀 더 현실적으로 활용된다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상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공간은 실제로 여러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거나 스포츠를 즐기는 공공 공간이 되기에는 조금 좁아 보인다. 미술과 현실 사이에서 상대적인 크기의 감각은 계속 뒤바뀐다. 미술가의 선량한 사물들은 집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크고 세상을 바꾸기에는 너무 작다. 결국 이들은 자기가 아닌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물질화된 기호로 남는다.
마지막으로 오른쪽 진입로의 연장선에서 가장 크고 위압적으로 보이는 세 번째 직육면체가 있다. 잿빛 천으로 감싼 형체들을 짊어지고 장식용 몰딩을 두른 그 모습은 제막식을 앞둔 조각상의 좌대처럼 보인다. 천 아래 숨겨진 것 또는 느슨하게 걸쳐진 천을 통해 나타나는 것은 세 마리 새의 형상이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오를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설령 천이 벗겨지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이들이 정말로 날아갈 일은 없다.그것은 날 수 없는 기러기를 위한 제단으로서 전시장 맞은편에 놓인 투명한 독수리 트로피와 호응하여 무제한으로 복제되는 예술과 권력의 상징들, 이를테면 마르셀 브로타에스의 ‹현대미술관, 독수리분과›(1968–1972)를 성립시켰던 미술의 자기 재현을 반복한다. 그러나 상징 이전에 하나의 이미지로 접근하면 높은 단 위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세 마리의 날 수 없는 새들은 오귀스트 로댕의 ‹지옥의 문›(1880–1917)에서 고개를 떨어뜨린 세 망령들의 또 다른 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다른 세계로의 입구 위에서 춤추지만 그 입구는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는 것,애초에 문이 아닌 한 덩어리의 사물로서 존재한다.
알렌카 주판치치는 무한함에 다다를 수 없지만 자신의 유한함에 만족하지도 못하는 인간의 조건에 대항하는 두 가지 상반된 전략으로 비극과 희극을 설명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비극은 해소될 수 없는 불만족한 간격을 고통스러운 자기 파괴로 내재화하는 반면, 희극은 파괴 불가능한 인간의 허영심을 외재화함으로써 삶을 지속한다.4 자신이 마땅히 되어야 하는 것이 되지 못한 자들은 지옥에 간다. 이곳은 지옥인가? 기러기는 묻는다. 기러기는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다가 불가피하게 실패하는 비극적 주체로서 불멸하는가 아니면 불가능한 차원 이동을 마치 달성한 것처럼 으스대는 희극적 대상으로서 박멸되지 않는가? 관객은 묻는다. 기러기에게 바쳐진 제단은 열리지 않는 문 대신에 커다란 거울을 달고 전시장을 비춘다. 거울 너머의 공간에는 이곳의 지난 전시와 작가의 지난 작업들에서 파생된 비논리적인 이미지들의 연쇄가 비쳐 보인다. 운 좋게 날씨가 맑고 전염병이 잠잠한 날이라면 그 사이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나 천창 너머 푸른 하늘의 빛깔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끝내 이 자리에 있다.
1 최태만, 『한국현대조각사 연구』 (서울: 아트북스, 2007), 15. Maria Rilke, Auguste Rodin, trans. Jessie Lemont and Hans Trausil (New York: Sunwise Turn Inc., 1919)에서 재인용.
2 어쩌면 이 질문은 의외로 오래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조각이 미술관에 소장되면서, 특히 앙드레 말로가 ‘상상의 미술관’의 핵심 기술로 지목했던 사진에 의해 원래 그것이 속한 특별한 장소에서 분리되어 파편화, 유형화되면서 하나의 단독적 대상이자 그리움의 대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실제로 릴케가 조 각가의 전범으로 숭배했던 오귀스트 로댕은 사진과 거의 같은 순간에
태어났고 스스로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사진의 사용자이기도 했다. 사진과 조각의 관계에 관해서는, 앙드레 말로, 『상상의 박물관』 (서울: 동문선, 1996), 김웅권 옮김, 112–141쪽을 참조하라. 로댕과 사진의 관계에 관해서는, 로댕 미술관 웹사이트의 ‘로댕과 사진’ 항목에 기존 연구가 잘 정리되어 있다. http://www.musee-rodin.fr/en/resources/educational-files/rodin-and-photography.
3 «확장된 매뉴얼»(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2018–2019).
4 Alenka Zupančič, The Odd One In: On Comedy (Cambridge, London: MIT Press, 2008), 53–58.
Critic 3
말줄임표, 여러 개의 마침표
김홍기 (미술비평가)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설령 애도가 삶의 정상적인 태도에서 심각하게 벗어난다 하더라도 결코 우리는 그것을 어떤 병리적인 상황으로 여기지 않으며 의사의 치료에 맡기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되면 애도가 극복될 것이라 기대하며, 애도를 방해하는 일은 부질없거나 심지어 해로운 것으로 간주한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애도와 우울증」, 1915.
1. 안녕하세요
김민애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인사만을 건넨다. 이 간결한 인사는 전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인사말을 제외한다면 전시공간에 작가가 남겨둔 메시지는 작품들의 캡션뿐이다. 캡션으로 열거된 개별 작품들은 심지어 제목도 없다. 일련번호로 지시되는 각각의 작품들에 대해서 캡션은 그 재료와 크기만을 건조하고 정확하게 전달한다. 이것은 일종의 동어반복에 해당한다. 표기된 물질과 사물은 작품에 쓰인 재료와 어김없이 일대일 대응하며, 작품의 높이, 너비, 깊이는 캡션에 기재된 숫자와 틀림없이 일치한다. 이는 작품의 물리적 속성을 단지 문자와 숫자로 번역한 것일 뿐이므로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의미를 전하는 메시지로 여겨지지 않는다. 어쩌면 1-1부터 5-1까지 이어지는 작품들의 일련번호가 전시의 구성 원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줄 암호일는지도 모른다.하지만 그걸 해독할 만한 추가적인 단서는 없다.장과 절의 번호만 남은 논문의 목차를 눈앞에 둔 것과 같은 당혹감을 피할 수 없다. 전시를 차분히 읽기 전에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작가의 메시지는 오로지 “안녕하세요”라는 전시의 제목뿐이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짧은 인사.
사실상 인사는 아무런 내용도 전하지 않는다. 인사는 어떤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 뿐, 그 관계의 내용을 전혀 규정하지 않는다. “안녕하세요”로 시작된 관계가 호혜와 우정으로 지속될지 파국과 재난으로 치닫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여전히 인사가 어떤 메시지일 수 있다면,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내용이 없는 메시지, 텅 빈 메시지, 말하자면 ‘메시지의 영도(零度)’일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한 형식적 구조를 (재)확인하는 제스처와 같은 것이다. 관계의 내용을 채우기에 앞서 관계의 형식을 작도하는 구조적 인식의 순간인 것이다. 그런데 김민애는 누구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일까? 누구와 새로운 관계를 꾸미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작가가 그간 보여준 작업들을 생각해보면 그가 인사를 건네는 대상은 무엇보다도 미술관의 전시공간 자체일 것이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전시공간의 건축적 구조에 재치 있게 반응하여 그것을 노출하고 변형하는 조각적 방법론을 선보여 왔다. 전시를 담아낼 건축적 공간과 인사를 나누며 작업의 구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인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전시공간의 구조에 반응하여 이에 기생하는 조각적 장치를 설치하면 애초의 전시공간의 구조가 어떤 변화를 겪게 되고, 작가는 그 변화된 구조를 새로운 초깃값으로 삼아 다시 “안녕하세요”라고 의뭉스레 인사를 건네며 또 다른 조각적 개입을 도모한다. 그가 캡션의 일련번호로 제시한 이 전시의 ‘목차’는 이렇게 중첩된 여러 차례의 “안녕하세요”에 나름의 질서를 부여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이 전시에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작가의 메시지는 “안녕하세요”뿐이지만, 이 유일한 인사말은 또한 반복되고 중첩된 다수의 “안녕하세요”이기도 한 것이다.
2. 원고지와 모눈종이
태초에 “안녕하세요”가 있었다. 적어도 김민애의 세계는 그렇다. 그 세계는 무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떤 공간적인 초깃값의 설정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곳의 모든 공간은 간격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예컨대, 그곳은 백지가 아니라 원고지이다. 우리는 아무런 글씨도 적혀 있지 않은 원고지를 텅 빈 원고지라고 부르지만,사실 그 평면은 이미 몇백 개의 정방형 단위로 구획된 공간인 것이다.또는 그곳은 백지가 아니라 모눈종이다. 텅 빈 모눈종이는 아무런 도면이나 그래프가 없더라도 이미 밀리미터 단위로 촘촘히 나눠진 공간인 것이다. 김민애는 그의 첫 번째 개인전 «익명풍경»(2008)에서 원고지에 글자가 적힌 칸을 까맣게 칠하거나 하얗게 도려낸 ‹원고지 드로잉› 연작을 선보인 바 있다. 내용을 감추거나 걷어내어 글쓰기가 전제하는 공간적 구조를 새삼 환기시킨 것이다. 다른 한편, 김민애의 2010년 작품 ‹난문제›는 렌즈의 자리에 거울과 모눈종이를 부착한 커다란 망원경이다. 확대된 사물을 보고자 하는 관객의 기대는 모눈종이와 대면하면서 배반당한다. 작가가 보여주려는 것은 특정한 사물의 확대된 형상이 아니라 관객이 임의의 사물을 지각하기에 앞서 전제해야 하는 공간의 격자이기 때문이다.
김민애에게는 미술관이라는 건축적 공간도 원고지나 모눈종이와 같은 것이다. 그가 전시를 실현하기에 앞서 인사를 건네는 미술관의 전시공간은 작품이 부재한다는 점에서는 텅 빈 공간이지만,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구획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다수의 눈금과 격자로 가득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곳의 벽과 바닥과 천장, 창과 문, 계단과 조명이 이루는 건축적 구조는 김민애가 작업을 구상하기에 앞서 통성명해야 하는 삼차원적인 ‘모눈종이’인 것이다. 작가가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지극히 기능적인 목적으로 설계된 건축적 요소들이다. 즉, 통로와 계단처럼 머무르는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 김민애의 관심을 더 끄는데, 그곳들이 전시공간 내에서 가장 간과되기 쉬운 요소들인 까닭이다. 작가는 공간을 구획하는 엄연한 요소들이지만 쉽사리 무시되는 사각지대를 눈여겨보는 것이다. 그것들은 의식적인 차원에서 잘 포착되지 않는 건축적 구조라는 점에서 인간의 감각과 운동을 무의식적으로 제한하고 인도하는 틀이다. 김민애는 ‹화이트큐브를 위한 구조물›(2012)에서는 전시공간의 모서리에 일종의 ‘보철’을 덧대고, ‹지붕발끝›(2011)에서는 천장의 구조물에 이와 유사한 ‘목발’을 괴이고, ‹블랙박스 조각›(2014)에서는 미술관의 에스컬레이터에 기이한 ‘분신’을 깔아둔다. 이런 식으로 그는 건축적 공간의 무의식적인 틀에 기생하여 그것을 이상한 방식으로 연장하고 복제하는 작업을 해온 것이다.
원고지라는 글쓰기의 틀, 모눈종이라는 수학적 형상의 틀, 건축이라는 일상생활의 틀. 이와 같이 김민애의 작업은 다양한 수준의 틀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 틀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한 자아의 사고와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규정하는 습관의 형태로 드러나고, 사회의 차원에서는 집단적 습관으로서 관습과 문화의 모습을 띠며, 미술의 차원에서는 미술관을 위시한 온갖 미학적 가치평가의 제도로 작용한다. 이처럼 주어진 틀에 개입하는 김민애의 작업은 개인의 습관, 사회의 관습, 미술의 제도를 눈앞에 드러내며, 그 반듯한 격자의 틈을 살짝 비틀어 반발의 제스처를 취하면서도 동시에 그 틀에 기생하며 타협의 자세를 가다듬는 자아의 이중성, 사회의 변증법, 아방가르드의 운명을 공간적 은유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3. 거울의 이면으로
김민애의 전시에 할당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전시실의 일부는 그에게 최적의 장소로 보인다. 여느 미술관의 화이트큐브보다 훨씬 더 복잡한 ‘칸’과 ‘모눈’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전시공간 한가운데 놓인 중간 벽이 그곳을 두 부분으로 분할하고 있고, 층고가 다른 그 두 부분을 중간 벽에 뚫린 세 개의 큼지막한 통로가 연결하고 있다. 게다가 중간 벽 안에는 미술관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까지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도 김민애가 처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공간의 대상은 통로와 계단이다. 우선 그는 각 통로를 꼭 맞게채울수있는세개의육면체를제작해마치젠가에서블록을빼낸것처럼전시공간에놓아둔다. 우리가 미술관 공간의 초깃값으로 무의식중에 전제한 세 개의 통로가 사실은 중간 벽으로부터 세 개의 육면체를 분리해냄으로써 만들어진 인위적인 결과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또한 작가는 그 중간 벽 속에 위치한 계단에 주목한다. 미술관 위층에서 열리는 전시와 김민애의 전시를 서로 분리시키기 위해 한시적으로 폐쇄한 계단에 김민애는 레드 카펫을 깔아 차단된 계단을 어떤 행사의 참석자가 입장하는 환대의 장소로 탈바꿈시키며, 이 희한한 상황을 북돋는 것처럼 빌리 조엘의 노래 「더 스트레인저」(1977)를 틀어 놓는다. 더불어 계단을 감싼 벽면에는 내부의 계단과 평행한 사선으로 길쭉한 창문처럼 보이는 라이트박스를 설치한다.
전시공간에 반응하는 김민애의 방법론은 그 공간의 구조를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하여 어떤 ‘분신’을 구상하는 데서 시작한다. 일종의 거울 효과를 의도하는 것인데, 물론 그 거울이 공간의 구획된 형상을 있는 그대로만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거울은 김민애의 작업에서 드물지 않게 등장하는 소재이다. 첫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인 ‹지속된 반사›(2008)를 시작으로, 앞에서 살펴본 ‹난문제›에서도 망원경의 렌즈가 있어야 할 자리에 거울이 등장하고, 이번 전시공간의 통로를 반영한 육면체에도 거울이 붙어 있다. 거울은 그 자체로 공간을 확장하고, 자기반영성을 표현하고, 실재와 가상을 맞세우는 장치로도 요긴하지만, 김민애의 작업에서 구사되는 거울 효과는 더욱 폭넓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거울 효과가 반드시 실제 거울을 필요로 하진 않는다.이를테면,김민애는 어떤 대상을 그것의 이미지와 대면시키되 특수한 방식으로 바꾸거나 뒤집은 이미지를 내세워서 독특한 거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부정적 공간으로 인식되는 허공의 통로를 실증적 육면체로 반전시키거나 계단의 살을 발라내어 그 뼈대만을 마치 창문처럼 바꾸어 되비추는 거울 효과를 구사하는 것이다. 그의 비범한 ‘거울’은 거푸집이기도 하고, 엑스선이기도 하다.
김민애의 세 번째 개인전 «검은, 분홍 공»(2014)은 관객을 거울의 이면으로 초대하는 전시라고 할 수 있다.작가는 갤러리 공간 안에 반투명한 천으로 또 다른 건축적 공간을 가설하여 그 안에 이제는 공간적 맥락을 상실한 그의 이전 작업들을 가져다 놓는다. 내부에서 분홍색 조명이 회전함에 따라 작업들의 그림자가 반투명한 천에 맺힌다. 특이한 것은 이 가건물의 반투명한 외벽에 쓰인 전시명, 작가명, 전시기간과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모두 좌우가 반전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그 외벽은 사물의 좌우를 반전시키는 거울로 마감된 것처럼 설정된 것이다. 그렇다면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주의에도 불구하고 그 건축 공간 안으로 발을 내디딘 관객은 거울의 이면으로 입장한 셈이 된다.그곳은 공간적 맥락을 상실한 김민애의 ‘기생 조각’이 버젓이 자립적인 행세를 하는 이상한 나라이다. 이렇듯 입장이 가능한 김민애의 상상의 거울은 외부 사물의 이미지가 아니라 거울 이면의 그림자를 투영하는 기이한 거울이다.
이번 전시 ‹1. 안녕하세요 2. Hello›에서도 그와 유사한 거울 효과를 볼 수 있다. 먼저, 계단의 사선과 평행하게 설치된 ‘창문’보다 더 깊숙한 공간의 벽에는 계단의 사선과 교차하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선의 좌우가 반전된 또 하나의 길쭉한 ‘창문’이 설치되어 있다. 서로 뒤집힌 두 사선의 ‘창문’ 사이에 자리한 관객은 무엇이 거울의 표면이고 무엇이 거울의 이면인지 알 수가 없다. 또한, 계단에 깔린 레드 카펫과 비슷한 너비의 검은 시트지가 전시공간의 한쪽 바닥에 비스듬히 내뻗어 전시된 작업의 벽면까지 기어오른다. 마치 레드 카펫의 그림자가 정체 모를 거울에 반사되어 엉뚱한 자리에 비뚠 각도로 드리운 것과 같은 모습이다. 끝으로, 김민애가 전시공간의 통로에 대한 반응으로 제작한 육면체에 달린 손잡이도 언급할 수 있다.전시장 말단의 한쪽 구석을 보면 그 손잡이와 똑같은 또 하나의 손잡이가 맞은편 벽에 나란히 붙어 있어서 마치 거울로 서로를 비추는 것처럼 대칭을 이루고 있다. 육면체의 외벽에 붙어 있는 손잡이와 전시공간의 내벽에 붙어 있는 손잡이가 서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거울 효과로 사물과 공간의 위계가 반전되고 관객의 지각에 전제된 좌표축이 교란된다.
건축의 차원에서 김민애가 보다 주목하는 요소가 통로와 계단이라면, 사물의 차원에서 그의 눈길이 더 각별히 가닿는 대상은 바퀴와 손잡이다.그것들은 모두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계단과 통로가 출발지도 목적지도 아니라 이동의 경로로만 소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퀴와 손잡이는 그것들이 움직이게 만드는 또 다른 사물들을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들이다. 역시 그것들도 원고지의 칸과 같은 것이고, 모눈종이의 눈금과 같은 것이다. 김민애는 이 사물들이 도구로 작동하지 않는 어긋난 환경을 상상함으로써 그것들을 비가시성의 영역에서 끄집어낸다. 쓸모없는 도구, 목적 없는 수단을 지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세 개의 육면체에도 바퀴와 손잡이가 달려 있지만,굴릴 게 없는 바퀴와 옮길 게 없는 손잡이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전시장의 벽에 달린 손잡이는 말할 것도 없다.그의 이런 방법론은 그 연원이 깊다.사물을 확대하지 않는 망원경,건물의 하중을 지탱하지 않는 기둥,허공에 떠 헛도는 바퀴,열리지 않는 창문과 드나들 수 없는 문,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하는 계단 등의 장치들이 김민애의 그간의 작업들에 즐비하다.
그중 많은 장치들이 이번 전시에도 어김없이 활용된다. 그의 쓸모없는 바퀴는 늘 그렇듯이 붉은색이고, 육면체에는 창문과 문의 실루엣만이 음각되어 있고, 잡아도 소용없는 손잡이가 군데군데 놓여 있으며, 레드 카펫과 그 그림자는 우리를 어디로도 인도하지 않는다. 그의 이런 자기 복제, 자기 회고는 그가 건네는 인사의 대상이 그가 마주한 전시공간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김민애는 주어진 공간에 반응하여 그 틀을 가시화하는 자기의 방법론을 노골적으로 반복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재고하고 또 확인한다. 자기 작업의 의도적인 유사성을 경유하여 자신의 이미지와 마주하고 인사하는 나르시시즘적인 거울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나르시시즘적인 장치가 자폐적인 데까지 나아가지 않는 이유는 그가 거울을 통해 인사하려는 대상이 그의 고립된 심리적 자아가 아니라 작가라는 제도적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김민애는 ‘작가’와 ‘작품’의 가능조건을 성찰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 성찰의 일원으로 소환된 이는 아이 웨이웨이다. 김민애의 전시 ‹1. 안녕하세요 2. Hello›가 열리기 전에 이 전시공간은 «낯선 전쟁»이라는 기획전에 할애되어 있었다. 전쟁에 관한 그 전시에 참여한 아이 웨이웨이의 출품작 ‹폭탄›의 일부가 말끔히 철거되지 않고 김민애의 전시에 약간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전시공간 맨 안쪽 벽의 좌측 상단에 폭탄의 이미지 일부가 찢긴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김민애는 전쟁이라는 전시 주제의 맥락에서 이탈된 그 이차원적 이미지를 삼차원의 조각으로 복구하여 전시공간 한가운데 배치한다. 그의 거울 놀이에 아이 웨이웨이를 동참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쟁이라는 전시 주제의 맥락에서 분리된 중국 작가의 작업을 자신의 작업으로 전유하면서 김민애는 ‘기생 조각’이라는 자신의 방법론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성찰한다. 제도적 틀에 의존하지 않는 작가의 독창성이란 가능한가? 작품이 공간적 맥락과 분리되어 자립할 수 있는가? 온전히 자율적인 작품이 존재할 수 있는가?
4. 애도의 인사
이 전시 ‹1. 안녕하세요 2. Hello›는 얼핏 김민애가 스스로 기획한 김민애의 회고전처럼 보인다. 주어진 전시공간에 반응하여 그곳에 기생하는 조각을 설치하는 그의 갖가지 방법론이 이번 전시에 직간접적으로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쓸모를 상실한 바퀴와 손잡이를 활용하는 것, 공간을 침범하고 교란하는 카펫과 거울을 배치하는 것, 동일한 전시공간에서 직전에 열린 전시의 흔적을 도입하는 것 등의 방법론은 작가가 이미 여러 다른 공간에서 선보인 바 있는 것들이다.이와 같은 자기 반복과 자기 회고는 그저 김민애의 나르시시즘을 드러내는 징후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그가 지금까지 구축해온 방법론을 긍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의하기 위한 되새김질에 가까운 것이다. 재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작별하기 위한 역설적인 ‘회고전’인 것이다.
“안녕하세요”는 분명히 만남의 인사지만 그 배후에는 작별이 전제되어 있다. 작별은 만남의 그림자와 같다. 누군가와 작별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와 만날 수 없다. 거울의 이편에서 만남의 인사가 이루어질 때 거울의 저편에서는 작별의 인사가 건네진다. 전시공간에 놓인 세 개의 육면체 중 하나는 다른 두 개의 육면체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육면체의 한쪽 면을 마치 어떤 제단의 정면처럼 조형한 것이다. 게다가 그 육면체 위에는 방수 커버를 뒤집어쓴 기러기 세 마리의 형상이 있다.제단이라는 모티프와 생명체를 천으로 덮는 행위는 모두 죽음을 함의한다.또한 이 육면체의 규모와 윤곽은 오귀스트 로댕의 ‹지옥의 문›(1880–1917)을 참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작가가 아이 웨이웨이의 시트지 이미지를 본떠 만든 폭탄의 수직적 형상들은 죽음의 기념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작가는 이번 전시가 올해의 작가상이라는 수상 제도의 일환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아무것도 기념하지 않는 공허한 트로피를 크리스털로 제작해 수직의 좌대 위에 올려놓는다. 수상 제도의 텅 빈 틀을 형상화한 이 트로피도 역시 어떤 열정의 결말, 어떤 시기가 종료된 후 남겨진 마침표와 같은 것이다.
이런 죽음과 작별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장례식’의 한 장면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작가의 세 번째 개인전 «검은, 분홍 공»이다. 김민애는 2018년의 어떤 인터뷰에서 이 전시를 떠올리며 “그동안 했던 소위 ‘장소특정적’인 작품들에게 그들만의 공간을 주고 장례를 치러주자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1 장소의 맥락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의미를 잃게 되는 자기의 기생 조각들을 거울의 이면에 묻어준 것이다. 어째서 작가는 자신의 작업들과 작별하기로 한 것일까? 그건 아마도 장소특정적 조각이 지니는 불가피한 허무주의, 즉 장소의 맥락에서 벗어나 홀로 설 수 없는 의존성 때문일 것이다. 미술의 자율성이라는 모더니즘적 테제에 반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반응적이고 부정적인 성격에 필연적으로 내재한 허무주의가 이 장례식에서 낭독된 조사(弔詞)일 것이다. 조각가의 근본적인 충동이 무언가를 일으켜 세우려는 것이라면, 김민애 역시 한 명의 조각가로서 단순히 모더니즘으로 회귀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자립적인 조각을 실현해 보려는 의지를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장례식은 작별의 끝이 아니라 작별의 시작이다. 또는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에서 애도 작업의 시작인 것이다. 상실된 애착의 대상으로부터 자아가 온전히 분리될 때까지 애도 작업은 끝나지 않는다. 작별과 작별할 때에야 비로소 작별은 끝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민애의 긴 애도 작업이 시작되어 이번 전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즉 김민애의 “안녕하세요”는 또한 애도의 인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전시는 전망하기 위해 회고하는 역설적인 ‘회고전’이며, 이곳의 수직적 오브제들은 잊기 위해 기념하는 모순적인 ‘기념비’이다.
5.공
회고와 전망, 망각과 기억을 오가는 김민애의 애도 작업은 전시공간에 반응하는 장소특정적 방법론을 반복하는 동시에 그 공간으로부터 자립적인 무언가를 세우려는 충동을 실험하는 이중적인 양상으로 진행된다. 이번 전시에 유독 여럿 보이는 수직적 오브제들은 아마도 후자의 조각적 충동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아이 웨이웨이의 작업에 대한 반응으로 만든 두 폭탄의 수직적 형상 옆에 김민애는 비슷한 크기의 펜의 형상을 세워 놓는다. 생뚱맞은 펜의 형상을 그것과 형태적으로 유사한 폭탄의 형상과 병치함으로써 장소의 맥락에 의존하는 작업과 그로부터 독립적인 작업 사이의 간극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그 옆에는 삐죽삐죽한 모서리를 지닌 또 다른 오브제가 보인다. 그 안에 모래가 담겨 있어서 커다란 화분인가 싶기도 한데, 이 역시도 전시공간의 장소적 맥락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과연 이것들이 이 전시공간을 벗어나서도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이 모든 애도의 시작은 검은, 분홍 공이다. 김민애가 치른 ‘장례식’의 제목이기도 한 검은, 분홍 공은 사실 그가 2013년 런던에서 연 개인전 때 즉흥적으로 전시공간에 가져다 놓은 풍선들이었다. 장소의 맥락에 온전히 부합하지 않는, 그렇다고 자립적이고 독창적인 오브제로 볼 수도 없는, 이 애매한 공들이 김민애의 애도 작업을 촉발시킨 것이다. 장소특정적 작업의 허무주의와 자율적인 작업의 이상주의 사이의 스펙트럼을 펼쳐낸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여러 의자들이 마치 검은 공처럼 보인다. 등받이도 팔걸이도 없이 공처럼 둥근 좌석만 있는 의자들이 전시장 이곳저곳에 펼쳐 있거나 접혀 있다.또는 이 검은 원들은 큼지막한 마침표로 보이기도 한다. 애도 작업이란 작별에 마침표를 찍는 과정이다. 김민애는 기생하는 조각과의 작별을 끝내기 위해 여러 차례 마침표를 찍는다. 그러다가 그 한 무리의 마침표는 일순간 말줄임표로 변하게 된다. 김민애는 이 유예의 말줄임표 속에서 당분간 애도를 끝내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 건축적 구조, 개인의 습관, 사회의 관습, 미술의 제도에 끊임없이 기생하면서, 동시에 무언가 자립적이고 독창적인 것을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할 것이다. 그것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두 경유한 작가와 작품의 가능조건을 끊임없이 되묻는 과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