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영

김아영
김아영(1979~)은 베니스 비엔날레(2015)와 팔래 드 도쿄(2016) 개인전 등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와 석유 정치학, 영토 제국주의, 자본과 정보의 이동 등 동시대적인 이슈들을 담은 영상, 퍼포먼스, 설치 등의 작업을 지속해왔다. <PH 익스프레스>,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 기름을 드립니다, 쉘> 등의 작업에서 작가는 사실과 허구를 재현하고, 시공간이 교차하거나 재구성되는 강력하고 중첩적인 내러티브에 다층적인 시각적 요소들을 집적시키는 독특한 방식의 작업들을 선보였다.

Interview

CV

김아영 (b. 1979. KR)

<주요 개인전/이벤트>

2018
다공성 계곡, 일민미술관, 서울

2017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멜버른 페스티벌 일환), 멜버른

2016
이 배가 우리를 지켜주리라, 팔레드도쿄, 파리

2015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2(공연),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 서울

2014
레일웨이 트래블러스 핸드북(씨어터 프로젝트), 문화역서울 284 RTO, 서울

2012
PH Express, 퀸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 베를린

<주요 단체전/스크리닝/이벤트>

2020
포럼 익스팬디드, 베를린 국제영화제, 베톤할러 사일런트 그린 쿨투르카르티어, 베를린(예정)
페트라 제네트릭스를 찾아서(렉처 퍼포먼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서울

2019
적자 팩션, 롱마치 프로젝트, 롱마치 스페이스, 베이징
올해의 작가상 2019,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서울
우로보로스, 카지노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시티
헝콩트르 인터내셔널 – 비디오 라이브러리 섹션, 세계문화의집, 베를린
우로보로스, 더 큐브 프로젝트 스페이스, 타이페이
울란바토르 국제 미디어아트 페스티벌, MN16 아트갤러리, 울란바토르
샤르자 필름 플랫폼(스크리닝), 미라쥬 시티 시네마, 샤르자

2018
제6회 타이완 국제 비디오아트전(스크리닝 및 렉쳐), 홍가 미술관, 타이페이
포스트 인스티튜셔널 스트레스 장애(PISD), 쿤스트홀 오르후스, 오르후스
디어 시네마4(스크리닝),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서울
상상된 경계들, 광주비엔날레, 광주
데스크 셋, 브레티니 현대미술센터, 파리

2017
격자에 갇힌 바다, 국제갤러리, 서울
삼라만상: 신소장품 2013~2016,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서울
욕망의 메트로폴리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 – 사기 지질학(퍼포먼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과천
난파의 소문(단체 퍼포먼스 이벤트), 팔레 가르니에 국립 오페라극장, 파리

2016
가혹한 풍경: 소리 작도법, 매콜리 스튜디오 포이어, 홍콩아트센터, 홍콩

2015
모든 세계의 미래, 베니스비엔날레, 베니스

2014
오작동 라이브러리,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2
번영의 그늘, 리빙폰 플레이스, 런던

2012
아트스펙트럼 2012, 리움 삼성미술관, 서울

<수상>

2019
올해의 작가상 후원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5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미술 부문), 문화체육관광부, 서울

2010
브리티쉬 인스티튜션 어워드, 로얄 아카데미 오브 아트, 런던

<레지던시>

2017. 8. ~ 2017. 11.
헤콜레 센터, 파리

2016. 7. ~ 2017. 6.
삼성 시떼아뜰리에, 파리 (삼성문화재단 후원)

2015. 11. ~ 2016. 6.
파비옹 리서치 랩, 팔레드도쿄, 파리

2012. 11. ~ 2013. 11.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서울

2011. 3. ~ 2012. 3.
퀸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 베를린

2011. 3.
스페이스 스튜디오 레지던시, 알링톤 하우스, 런던

2010. 11. ~ 2011. 2.
파리국제예술공동체, 파리

Critic 1

바로크적 상상력으로 움직이는 힘들

김은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작가들은 종종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료를 수집, 분석하고 배치하는 과정에서 그 자료가 내포하고 있던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한다. 가능성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은 어떤 사건 혹은 사물 뒤에 숨겨진 수수께끼를 발견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때 가능성이란 수수께끼의 정답에 다가가기 위한 열쇠를 찾을 가능성을 말한다. 나는 김아영 작가에게서 미지의 영역을 향한 호기심을 가지고 모험을 멈추지 않는 탐험가의 모습을 발견한다.

김아영은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프로젝트(2017)가 이란 출신의 철학자 레자 네가레스타니의 사변소설 <사이클로노피디아: 익명의 물질들과의 공모>(2008)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다. 2018 년에 개최된 작가의 개인전 연계 출판물에 “다중세계의 우주론적 정치학에 대한 단상”이란 글을 써준 레자 네가레스타니는 이 글에서 김아영이 다루는 이동식 구멍들을 ‘표면 자체가 아니며 공간의 영역 조차 되지 못’ 하는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1 라고 말한다. 김아영은 이 책의 서문에서 ‘다공성 계곡은 구멍이 많고 개연성이 부족한 계곡이다’ 라고 명시한다.2 그의 묘사는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전시를 2018 년에 처음 보았을 때 내게 떠오른 한 단어와 겹친다. 그것은 ‘바로크’였다. ‘개연성이 부족한 계곡’은 질서가 없이 조각난 채로 혼재하는 바로크적 세계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의 이전 작업들을 상기해보면, 다른 작품들 역시 바로크적이다. 전체가 개별적 부분들을 지배하지 않는, 분산된 느낌이다. 동시에 이 분산된 느낌은 이율배반적이게도 지나치게 지엽적인 부분들이 전체로 확대 연결되는 것 같은 기괴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질 들뢰즈는 그의 저서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The Fold: Leibniz and the Baroque, 1992)에서 ‘바로크 세계는 밑에서 끼어 넣어지고 위를 향해 미는 두 개의 벡터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했다.3 들뢰즈가 묘사한 ‘무한한 주름은 접선이 곡선을 가로지르는 곳에 있는 변곡점 그 자체’4 이며 ‘물질과 영혼, 외관과 닫힌 실내, 외부와 내부 사이에서 분리되거나 지나가는’5 구부러진 선이다. 김아영의 <모든 북극성 파트 I & II – 어느 도시의 이야기 중에서>(2010)에서 시도한 중첩과 분산의 구조 역시 여러 재료들의 혼재된 운동성을 재현한다. 그러나 이 운동성은 안에서 변화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통일된 질서가 없기 때문에 내적 변화를 대상화 하지 않고, 구조가 곧 변화의 표상이 된다. 김아영은 역사의 주름 사이에 숨은 이야기들을 추적하면서 공적 또는 비공식적 온갖 자료들을 수집하고 분석한다. 그 데이터들은 영상, 사운드 설치, 보이스 퍼포먼스, 스크립트와 다이어그램 등 매체를 달리하며 한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도약한다. 근대 산업문명의 중요한 자원인 석유에서 추출된 유기물인 역청의 역사는 <이 배가 우리를 지켜주리라>(2016),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2014~2015)로 이어지고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로 확장된다. 김아영은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석유가 빠져나간 땅 속 공간을 물이 인위적으로 대체하는 그래프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 발견은 김아영의 바로크적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다. 다공성을 내포한 지층의 무한한 움직임은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비물질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의 표상과 같다. 한 대상이 암시하는 어떤 가능성은 때로는 본질과 유리되어 보일 수도 있다. 3D 애니메이션으로 재현된 다공성 계곡의 움직임은 거칠고 혼돈스럽거나 고요하고 섬세한 이중적 서정성을 동시에 동반한다. 딱딱한 표면들이 부딪쳐 부서지는 암석들의 이미지는 그 내부를 볼 수 없는 불투명함으로 인해 외부의 창문 또는 통로가 없는 내부의 비물질적 영역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이 계곡은 작가의 상상을 통해 유기적 생명체처럼 변형되고 비정형화된 어떤 힘들을 획득한다.

길가메시 서사시, 코란, 성경에 기록된 대홍수와 방주의 문헌에 등장하는 역청이 <이 배가 우리를 지켜주리라>에서 파리의 오페라 극장 팔레 가르니에로 연결되었던 것처럼,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을 구현하는 무수한 돌들의 보이지 않는 정령들이 어디로 이동하게 될지궁금하다. 예맨 난민의 이주 경로처럼 불합리하고 비극적인 현실의 절망 속에서 인류의 미래는 마냥 암담한 것이 사실이다. 중국은 달 표면 탐사활동을 명분으로 달의 뒤편으로 창어 4 호를 쏘아 보냈다. 우주공간 또한 국가간 경쟁의 도구가 된다. 인간은 우주질서를 파괴하는 주범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중국 연구진은 달의 분화구 깊은 곳에서 채취한 샘플을 통해 지구 상부 맨틀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성분인 감람석의 흔적 일부를 발견했다고 한다. 김아영의 이동식 구멍들이 달의 뒤편으로 이주하면서 지구가 생성되기 이전 더 먼 과거의 풍경을 그려내는 것을 상상해본다.

 


1. 레자 네가스타니, “다중 세계의 우주론적 정치학에 대한 단상”, 김민주, 허미석, 김아영 옮김, 황문영 감수, 『다중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서울: 일민미술관, 2018), 101~102.
2. 김아영, “서문: 다공성과 당혹감에 관하여”, 『다중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서울: 일민미술관, 2018), 37
3. Gilles Deleuze, The Fold: Leibniz and the Baroque, foreword and trans. Tom Conley (London: The Athlone Press, 1993), 29.
4. Ibid., 14.
5. Ibid., 35.

Critic 2

김아영의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

배명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1.

2007년 이후 현재까지 십여 년 동안 김아영은 한국 근현대사, 석유 정치학, 영토 제국주의, 자본과 정보의 이주 등 ‘지금 현재’ 시점에서 유의미한 역사적 사실과 현실의 문제를 집요한 아카이빙과 리서치를 통해 추적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묵직하고 때로는 희·비극적인 역사적 내러티브는 영상, 사운드, 퍼포먼스, 무용, 음악극, 다이어그램, 소설, 텍스트 등 다학문적 매체를 횡단하고, 몽타주, 알레고리, 알고리즘 등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변증법적이고 비선형적인(때로는 분열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을 통과하며, 다차원적이고 유희적인 내러티브로 재구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김아영의 열린 작업 방식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역사와 현실 인식을 열어놓는 비평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작가로서 김아영의 강점은 탐정에 버금가는 집요하고도 철저한 자료 수집과 이를 재해석, 재생산, 재맥락화하는 독특한 작업 방식에 있다. 그는 하나의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 수년간에 걸친 지난한 리서치 과정을 기꺼이 즐긴다. 그러나 작가의 아카이브적 리서치는 우리가 공유한 기존의 집단 기억을 재확인하거나 강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위반하거나 해체하면서 역사적 관점을 비판적으로 되짚게 만드는 날선 시각의 재료로 기능한다.

예로, 전쟁, 피살, 사고 등 신문과 뉴스 기사의 ‘공적’ 내용을 ‘사적’으로 무대화한 포토몽타주 <이페메랄 이페메라>(Ephemeral Ephemera, 2007~2009) 연작, 유럽 경마가 한국에 수입되는 문화 번역 과정에서 뒤틀리거나 상실된 부분을 자살한 여기수의 삶으로 은유한 <어느 도시 이야기> 연작의 <모든 북극성 1, 2>(2010), 철도의 발명과 19세기 영국 해군의 거문도 점령 사건을 병치하면서 제국주의 역사의 파편을 소환한 <PH 익스프레스>(2011~2012), 1980년대 말 부산의 장소성과 역사적 기억을 당시 밀수 일을 하던 소년의 삶의 이야기와 몽타주한 <돌아와요 부산항에>(2012), 석유자원을 중심으로 한 한국 근대화의 함의를 텍스트와 소리, 퍼포먼스가 혼용된 서사 음악극으로 재맥락화한 <제페트, 그 공중공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2014~2015), 그리고 호주의 지질학과 정보 이동이라는 인터넷 시대의 주요한 함의를 중첩한 최근작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2017) 등을 살펴보자. 이 작품들은 모두 프랑스, 호주, 영국을 오가며 이루어낸 작가의 오랜 수행적 리서치와 아카이빙에 근거한 작업들이지만, 사실을 허구와 몽타주하고, 역사를 신화와 충돌시키며, 몇 겹의 텍스트를 중첩시키는 상호 텍스트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기억에 각인되지 못하고 누락된 부분들을 섬광과도 같이 떠올리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역사와 사건, 정보를 집요하게 수집, 몽타주하고 해석하는 특유의 아카이빙 방법론을 통해 단순한 ‘사실’이 아닌, ‘진실’을 우리에게 다시 보여주려 하였다.

 

2.

2010년 이후 현재까지 10여 년간 김아영 작업의 특이점은 근대성 장치에 대한 작가의 물리적 관심, 세계사적 함의와 한국의 근대화에 대한 통시적·공시적 통찰, 사회·역사적 텍스트를 예술 언어로 번안하는 작가의 다층적인 언어구사 능력 사이에 놓여있다. 작가가 주목한 근대화의 기제는 증기선, 기차, 철도, 석유, 정보 등인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공통점이 존재한다. 즉 자본과 권력을 향해 서로 상이한 시공간을 이동하면서 충돌, 번역, 이식, 재생산하는, ‘유동성’과 ‘액체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는 점이다. 작가의 리서치 과정을 따라 액체 근대를 가능케 한 이러한 근대성의 장치들을 추적하다 보면 어느새 세계의 역사와 한국의 근대화가 서로 맞닿아 있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트랜스 KMS 레일웨이>(2012)와 <레일웨이 트래블러스 핸드북>(2013)에서 작가가 주목한 근대성의 발명품은 기차와 철도인데, 이는 시간성의 측면에서는 일시성, 순간성이라는 근대화 체제를 가능하게 한 매개였으나, 공간적 측면에서는 거리를 단축하여 제국의 확장을 가능하게 한 강력한 물적 이동 수단이었다. 작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러시아의 동아시아 침략), 아프리카 철도(영국의 아프리카 식민화), 한국의 기차역들(일본의 한국 식민지 정책)에 대한 리서치를 수행하며 기차를 둘러싼 식민화 전략, 힘의 논리, 근대화의 정치성을 간파한다. 더불어 피식민화의 과정에 깊숙이 내재해 있는 제국주의 장치로서 철도의 세계사적 함의와 그 속에서 벌어진 한국의 식민적 근대화를 종횡무진 탐색해갔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 시리즈를 통해 작가는 석유 자본을 둘러싼 세계의 전쟁,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제 위기, 작가 아버지의 개인사와 연결된 한국의 중동 건설과 오일 머니를 경유한 근대화 프로젝트 등을 중층적으로 유비한다. 근대성의 기제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결국 제국주의, 탈식민, 권력, 자본이라는 세계사의 거대한 맥락과 한국의 근대화가 만나는 지점에 대한 지적 탐구로 이어졌다.

작가에게 근대화는 진보와 유토피아를 향한 완전체의 순간이라기보다는 제국주의와 식민화, 전쟁과 위기, 상실과 죽음 같은 균열의 순간과 공존한다. 이러한 모순과 균열의 순간은 상징계 언어로 기록될 수 없고 의미화 될 수 없으며 통제 될 수 없는 영역에 놓여 있다. 한국의 특수한 근대화와 그 이면에 대한 서사는 2000년대 이후 한국현대미술의 단골 주제였으나 김아영은 여타 다른 작가들과는 다르게 이를 예술의 층위에서 ‘소리’로 번안해 왔다는 독특한 지점을 확보한다. <트랜스 KMS 레일웨이>에서부터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 연작, 그리고 <이 배가 우리를 지켜 주리라>(2016)와 <사기 지질학>(2016)에 이르기까지 ‘챈팅 리추얼(Chanting Ritual)’이라 불리는 집단 코러스는 역사 정보를 ‘기계 장치의 신’이나 ‘알고리즘’ 장치를 통과시켜 선형적 서사와 논리를 벗어난 언어/소리로 전환한 사운드 퍼포먼스이다. 소리를 중심으로 한 김아영의 집단 코러스는 단독의 소리, 외침, 아우성, 합창, 웅얼거림 등이 뒤섞여 주문과도 같은 정동을 불러일으키고, 1900년대 초에서 1990년대 말까지 여러 시공간에 존재했던 다종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소환한다. 텍스트와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하나의 내러티브로 가공, 작곡가와 안무가, 성악가 등과 협업하여 새로운 문맥의 예술 언어로 풀어내는 김아영의 다성성(多聲性)의 작업 방식은 결국 근대화 과정에서 숨겨진, 억압된, 발화되지 못한 수많은 목소리와 이야기를 끄집어내 주었다. 이러한 작가의 수행적 시도는 근대화 서사를 낯설게 하고 파편화하며, 동시에 근대화라는 거대한 계몽 프로젝트의 두꺼운 껍질에 구멍을 내고 그 아래 봉인된 겹겹의 층을 드러내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3.

2017년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이후 김아영의 관심은 데이터의 ‘물리적/비물질적 이주’라는 보다 구체적인 이슈로 옮겨갔다. 사실 액체성과 유동성을 근대화의 함의들과 연결시켜왔던 김아영에게 ‘이주’와 ‘이동,’ 그리고 그것의 심리적, 정치적 효과는 그의 오랜 관심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H 익스프레스>는 제국주의적 야심에 따라 영국군이 거문도로 이동하는 ‘정치적 이주’와 힘의 불균형에 대한 것이었고, <모든 북극성 1, 2>는 유럽 승마 문화의 도입에 따른 ‘문화적 이주’와 심리적 분열에 주목한 것이었으며, <제페트, 그 공중공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 역시 석유 자본에 따른 물질과 재화의 글로벌한 ‘경제적 이동’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이는 최근작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에 와서 포스트 인터넷 시대 광범위한 ‘정보의 이산(離散)’과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물리적 이주’의 문제로 수렴되었다. 정보, 특히 데이터와 디지털 정보의 전방위적 이동은 글로벌 시장에서 자본과 금융의 유동적 흐름과 맞닿아있을 뿐 아니라 그 흐름의 유무를 검열하고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역학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일견 정치적이다. 김아영의 작업에서 권력, 자본, 지식, 정보 등 우리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이러한 모든 ‘유동적 조건’들은 작가 특유의 혼성적이고 비선형적인 서사 구조, 사변적 픽션 방식을 통해 얼개가 복잡다단한 이야기로 전개되었다.

다시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로 돌아와 이 영상에는 다공성 계곡에 사는 ‘페트라’라 불리는 신화적 생명체가 등장한다. 정체불명의 폭발로 인해 다공성 계곡에서 새로운 곳으로 이주해야만 하는 페트라는 이주 상담센터를 방문하여 이동의 유무를 기다리는데, 이러한 신화적 존재의 행보는 한편으로는 정치적 분쟁으로 인해 이주를 택해야만 하는 오늘날 난민의 행보와도 같다.

 

4.

2019년 《올해의 작가상》에서 선보인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은 전작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2017)의 ‘이주’를 둘러싼 상상적 내러티브와 함의들을 보다 극적으로 연장시킨 확장판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다공성 계곡 출신의 ‘페트라 제네트릭스’ 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이 가상의 ‘트릭스터’와 같은 존재를 중심으로 한, 고대 설화적-미래 SF적 내러티브는 ‘데이터의 이주’를 경유하여 ‘난민의 이주’라는 첨예한 정치적 이슈를 소환한다.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은 전작들에 비해 가상의 내러티브가 주도적일 뿐 아니라 그 서사가 훨씬 복잡한 것이 특징적이다. 픽션이 다큐멘터리를 압도하고, 현실주의보다는 고고학, 미래주의, SF적 상상력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특징은 한편으로는 ‘이페메랄 이페메라’ 연작에서 ‘어느 도시 이야기’ 연작과

<PH 익스프레스> 등을 거쳐 ‘제페트’ 연작에 이르는 동안 작가가 구사해 온 몽타주와 알고리즘, 비선형 내러티브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픽션을 근거로 사회·역사적 진실을 재구성하여 대항 역사를 써 내려간 2000년대 이후 다큐멘터리-픽션 경향의 영상 작업들이나 SF를 통해 대체 현실을 상상하는 사변 소설의 경향과 접합한다.

 

트릭스터 플롯, 가상의 내러티브

영상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주인공 ‘페트라 제네트릭스’(Petra Genetrix, 이하 페트라)는 다공성 계곡의 폭파로 크립토 밸리에 불시착한 일종의 데이터 조각이다. 입방체의 형태를 한 페트라는 분열, (자기)복제, 결합을 거듭하는 복수적 존재로서, 다공성 계곡으로부터 이동식 구멍(portable hole)을 거쳐 크립토 밸리와 스마트 그리드, 포터블 홀, 데이터 센터라는 가상의 공간들을 유영하는 과정에서 영상의 서사를 극적으로 전개시킨다. 크립토밸리에 도착한 그녀/그는 미등록 외계생명체의 신분으로 크립토 이주센터에서 까다로운 이주 심사를 받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주불인정신청자, G-1-6-2564’로 분류된다. 결국 페트라는 심사 과정에서 자율 면역 시스템과 보안을 지속적으로 위협하는 바이러스와 같은 ‘비정상적 생명 패턴’으로 판명되어 크립토 밸리의 특수 구역이자 24시간 모니터링되는 외계생명보호수감소 스마트 그리드로 이송, 수감된다. 스마트 그리드의 쇠창살 속에서 갇혀 있던 페트라는 다양한 크기의 큐브들로 분열하여 그곳을 탈출하고, 집단 지성이자 섬 전체를 이어주는 초월적 존재인 ‘어머니 바위’를 만난다. 결국 그녀/그는 ‘어머니 바위’와의 생물학적 이종교배를 통해 스스로 독립적인 숭고한 존재, 스스로 완전한 제노제네시스(xenogenesis)의 모체가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에서 김아영이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픽션으로 재가공한 문자 그대로의 ‘트릭스터 플롯’은 태고적 과거이면서 동시에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이 영상의 내러티브는 한편으로는 3억 5천년 전(페트라의 생년월일)의 태고 시대를 유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클라우드 패시지 통합프로그램(CPIP, Cloud Passage Integrity Program)이 작동하고 스마트 그리드의 감시와 통제가 일상을 지배하는 미래 도시를 상상케 한다. 오랜 과거와 낯선 미래가 충돌하는 이 기이한 세계는 고대 아프리카와 우주 이미지를 결합한 아프로 퓨처리즘의 세계관과 교차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문학, 음악, 영화 등의 예술장르를 파고든 아프로 퓨처리즘이 아프리카의 오랜 신화를 미래적 비전으로 재맥락화 하면서 ‘흑인’이 당면한 인종과 젠더 문제를 역설적으로 비판하였다면, 김아영의 영상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은 신화와 테크놀로지를 중첩시킨 SF적 상상력으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사변적으로 미러링한다. 크립토 밸리에서 펼쳐지는 김아영의 픽션은 데이터의 흐름으로 대변되는 21세기 정보시대를 예견하거나 재현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주와 난민문제를 둘러싼 현 사회의 균열과 모순을 상상의 차원에서 비틈으로써 현실을 비판하고 대안적 현실을 전망하는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이 보여주는 공상과학적 비전은 단지 공상 과학 소설(science fiction)의 차원이 아닌, 사변적 픽션(speculative fiction)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현실을 미러링 하기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에는 현실을 미러링하는 섬세한 내적 장치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우선 페트라가 경험한 이주의 경로, 즉 이주, 심사, 감시, 수감, 탈출 등으로 이어지는 험난한 여정은 현실의 층위에서 난민의 이주라는 사회적 이슈를 미러링한다. 특히 지난 2018년, 자국의 내전을 피해 제주도로 이주한 561명 예멘 난민을 둘러싼 격렬한 찬반논쟁은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의 출발점이다. 실제 작가가 만난 세 명의 예멘 난민, 야스민, 아흐메드 아스카, 유세프 알 라미는 이번 영상에서 각각 지층, 파도, 돌과 같은 지구의 기억을 간직한 개체의 모습을 하고 코러스의 역할을 퍼포밍하는데, 이들은 페트라와 함께 이주 내러티브를 주도하는 또 다른 주인공들이다. 또한 페트라가 크립토 밸리에 도착하였을 때 심사관에 의해 명명된 기호인 ‘이주신청외부자, G-1-5-3407’는 한국에서 실제로 난민신청자를 분류하는 기호 ‘Refugee applicants, G-1-5’와 직접적으로 조응한다. 뿐만 아니라 페트라의 이주를 심사한 장소, ‘크립토 밸리’는 가상의 다도해상에 놓여 있는 해상 거점지역 ‘제주도’를 은유하며, 크립토 밸리에서 체류 허가를 받지 못한 데이터들이 송환 전까지 보호 수감되는 공간 ‘스마트 그리드’는 미허가 체류 외국인을 보호 관리하는 ‘화성 외국인 보호소’의 그리드식 도면을 모델링 한 것이다. 크립토 밸리의 심사관이 페트라에게 내뱉는 차가운 대사 — “6개월 후에도 심사가 끝나지 않으면, 크립토 이주센터는 당신의 체류 자격을 임시적으로 연장해줄 거예요. 이후에 적합성이 판명되면 당신은 우리 클라우드 패시지 통합 프로그램 CPIP에 따라 외계생명등록칩을 이식 받을 수 있습니다” — 는 모든 난민들이 인도적 체류 허가를 6개월씩 연장해야 하고 극소수의 난민만이 비자를 취득하게 되는 한국의 엄격한 현 난민 제도를 상기시킨다.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에서 ‘이주신청외부자’ 신분의 페트라가 크립토 밸리를 자유롭게 떠다닐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것처럼, 인도적 체류허가를 정식으로 받지 못한 난민 ‘신청자’는 어떤 시스템에도 속할 수 없고 어떠한 직업도 가질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서 살아간다.

 

이름없는 기호에서 신화적 존재로

하나의 생명이 기호로 치환· 통제·관리되는 과정에서 상실되는 인간의 존엄성은 김아영이 예술의 영역에서 복원해야 하는 ‘미완의 과제’와도 같은 것이다. 기호로 통칭된 난민은 한국 사회에서 목소리가 거세된 유령 같은 존재이다. 작가는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을 진입하는 좁고 긴 녹색의 통로 공간을 세 명의 예멘 난민의 목소리를 혼합한 6채널의 사운드 설치 공간으로 재구성하였다. 몫이 없고 셈 되지 않는 자들이 정치적 주체로서의 목소리를 발화 할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인 셈이다. 또한 난민처럼 떠도는 페트라에게 작가는 신적 존엄성을 부여하였는데, 그것은 페트라 제네트릭스 개념이 원래 ‘바위(페트라)’1에서 ‘태어나고 있는(제네트릭스)’ 미트라 신2의 도상에서 유래하며, 태어남을 지칭함과 동시에 ‘매트릭스(matrix)’를 뜻하고, 미트라를 낳은 ‘바위’ 즉 ‘모암(Mother Rock)’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결국 페트라 제네트릭스는 신을 낳은 바위, 생명을 지닌 광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3 이주에 성공한 고대의 신이자 젠더를 초월하여 생명, 지혜,초월성을 지닌 신적 존재, 페트라 제네트릭스는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에서 난민과 이주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를 신화적으로 환유하는 극적 매개체로 기능한다. 이는 또한 이주자로서 존엄성을 잃고 떠도는 난민의 정체성이 복원될 수 있는, 작가가 가정한 강력한 신화적 함의이다.

 

허물어지는 경계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의 서사는 페트라 제네트릭스가 어머니 바위와 이종교배의 결합을 이루면서 종결된다. 어머니 바위는 크립토 밸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정보를 기억하고 예측하는 초지성, 기억의 저장소, 총괄 데이터 센터이다. 어머니 바위는 순혈주의 시스템으로 인해 허약해진 면역 체계를 가진 섬으로, 시스템 안정화를 위해 이종의 정보를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페트라 제네트릭스는 바로 이러한 순혈-혼종의 경계를 붕괴시키고 면역을 튼튼하게 하는 일종의 백신과도 같은 존재이다.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 의 신화적 결말은 이종성을 배척하고 이질성을 타자화하는 우리 사회의 공고한 위계질서와 순혈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며, 또한 균질성과 동질성이 지배하는 추상 공간 속에서 불연속성과 틈을 인정하는 차이 공간(differential space)4의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이는 예술가로서 오랜 시간 경험하고 체화한 불안정한 이방인으로서의 삶에서 도출된 열린 결말이기도 하다. 이주민, 강제 억류자, 난민과 같은 외로운 인물들의 계보학5은 추상 공간을 벗어나 차이 공간으로 발을 내디딜 때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국가-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보다 복합적인 삶의 형식을 용인하고 순혈주의 이데올로기의 배타성을 거부할 때 외로운 인물들은 페트라 제네트릭스의 결말처럼 정치적 정당성과 신적 존엄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1. Petra는 라틴어로 바위를 뜻하는 여성형 명사이다.
2.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였다가 로마 제국으로 전파되어 1~4세기 사이 크게 성행했던 미트라교(Mithraism)와 관련이 있다. 미트라는 일찍이 고대 페르시아에서 빛의 신으로 섬겨졌다가 로마에 전파된 이후 지금까지 전래되는 도상 […]을 얻었”다. 김아영 외,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서울:일민미술관, 2018), 114.
3. 같은 책, 114~115.
4. 앙리 르페브르, 양영란 역, 『공간의 생산』 (서울: 에코리브르, 2011), 106.
5. 호미 바바, 나병철 역, 『문화의 위치』 (서울: 소명출판, 2002),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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