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원 • 전준호

Interview
CV
문경원
<개인전>
2010
GREENHOUSE, 두 아트_갤러리 현대, 서울
2008
BUBBLE TALK, 윈도우 갤러리 (토탈 미술관, 워크룸, One & J Gallery, 두아트), 서울
2007
Objectified Landscape, 아트사이드 갤러리, 베이징, Objectified Landscape, 성곡 미술관, 서울
2004
Wins of Artist in Residence 2004,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후쿠오카
2002
Temple & Tempo, 금호미술관, 서울
<주요 단체전>
2012
카셀 도큐멘타 13
2011
해인아트프로젝트, 해인사, 합천
Life, no Peace, only Adventure,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2010
A Silent Voice, 도쿄 원더 사이트, 도쿄
A Different Similarity, 보훔 미술관, 보훔
2009
신호탄, 국립현대미술관_기무사, 서울
제 3회 모스크바 비엔날레: Focus on Korea-Contemporary Art, 모스크바
2008
NOW JUMP, 백남준 미술관, 용인
Modest Monuments, 킹스 아트 센터, 영국
2007
제 1회 아시아 아트 비엔날레: Have you eaten yet?, 타이완 국립미술관, 타이완
2006
Fiction@Love/Ultra New Vision of Contemporary Art, 싱가폴 미술관, 싱가폴
2005
Animate, Anime in Japanese and Korean contemporary Art,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후쿠오카
2004
제3회 서울 국제 미디어 비엔날레: ‘게임/놀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03
아트 스펙트럼 2003,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
<소장처>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후쿠오카
타이완 국립 미술관, 타이완
몬테 비데오, 네덜란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경기도 미술관, 안산
금호 미술관, 서울
제주 4∙3 평화 기념관, 제주
전준호
<개인전>
2009
BLESS YOU, Scai the Bathhouse, 도쿄
2008
Solo Exhibition, Galerie Thaddaeus Ropac, 파리
Hyper-Realism,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
2007
Solo Exhibition, Perry Rubenstein, 뉴욕
2004
Instant Replay, 포스코 미술관, 서울
2001
내일의 작가, 성곡 미술관, 서울
<주요 단체전>
2012
카셀 도큐멘타 13
Life Like, 워커아트센터, 미네아폴리스
2011
제 4회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Our Magic Hour, 요코하마
2010
Plastic Garden, 민생 미술관, 상하이
A Different Similarity, 보훔 미술관, 보훔
Setouchi International Art Festival, 일본
2009
Your Bright Future: 12 Contemporary Artists from Korea, LACMA, 로스앤젤레스_휴스턴 미술관, 휴스턴
신호탄, 국립현대미술관_기무사, 서울
2008
Modest Monuments, 킹스 아트 센터, 영국
Meta Morphosis, L’espace LOUIS VUITTON, 파리
제 5회 부산 비엔날레: 낭비, 부산
박하사탕,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07
Contemporary Korean Art : Wonderlar, 중국 미술관, 베이징
박하사탕, MAC, 산티아고
제 1회 아시아 아트 비엔날레: Have you eaten yet?, 타이완 국립 미술관, 타이완
All About Laughter, 모리미술관, 도쿄
2006
싱가폴 비엔날레, 싱가폴
On difference, Wttembergischer Kunstverein Stuttgart, 슈투트가르트
2005
Beautiful Cynicism, 아라리오 갤러리, 베이징
Critics Choice, The Fact Foundation for Art & Creative Technology, 리버풀
Live Free or Buy, Images Festival, Innis Town Hall, 토론토
2004
제 5회 광주비엔날레: 먼지 한 톨 물 한 방울, 광주
Out the Window, Japan Foundation Asia Center, 도쿄
<소장처>
휴스턴 미술관, 휴스턴
Contemporary Art Society, 영국
타이완 국립 미술관, 타이완
Uli Sigg, 스위스
Heinz Ackman, 스위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경기도 미술관, 안산, 한국
Critic 1
비판적 디스토피아: <News from Nowhere>에 대하여
이숙경 (테이트 리버풀 큐레이터)
“세상은 고통스러운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가끔은 현재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 들지만 나무 사이로 스며들던 눈부신 물빛이 얼마나 아름다왔는지 생각하곤 한다.” – 옥타비아 버틀러(Octavia Butler, 1947-2006), 『씨 뿌리는 사람의 우화 Parable of the Sower』1
<News from Nowhere, 2012> 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문경원과 전준호의 공동 작업은 오늘날의 인간 조건과 그 불분명한 미래,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의 예술의 역할 등에 대해 심각한 질문들을 던진다. 프로젝트의 제목은 미술가이자 디자이너였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가 1890년 발표한 예술, 삶, 노동에 대한 사회주의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이상에 대한 저서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윌리엄 게스트(William Guest)는 어느날 잠에서 깨어나 개인 재산이나 권위적 존재, 화폐 제도, 계급 제도 등이 없는 미래의 사회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이 유토피아적 사회는 모리스가 살고 있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과는 달리 산업화나 자본주의화를 겪지 않았지만 시민들은 노동과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모리스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착취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도덕적 분노를 대변하며, 이 책의 스토리는 작가가 자본주의와 당시 사회주의의 교조적 권위주의에 대해 지녔던 이중적 비판 의식을 반영한다.2
문경원과 전준호의 작품은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미래를 현재의 상징적 반영으로서 탐색하지만, 그들이 재현하는 미래는 후기-종말적 (post-apocalyptic) 성향을 강하게 띈다. 유토피아에 대한 학문적, 담론적 연구에서는 유토피아, 반(anti)-유토피아, 디스토피아(dystopia)의 세 개념을 분리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다르코 수빈(Darko Suvin, 1930-)은 ‘디스토피아’를 “사회정치적 제도, 규범, 개인들간의 관계 등이 작가의 실제 커뮤니티보다‘현저하게 불완전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커뮤니티(…)‘완벽함’을 정의하는 가치체계를 대표하는, 불만족한 사회 계급이나 분파를 대표하는 이들의 시선을 통해 보았을 때 현저하게 불완전한 공동체”로 규정한다.3 한편 수빈은 디스토피아의 다른 유형으로서, “가상적인, 상상적인 유토피아를 거부하고자 고안된” ‘반-유토피아’를 상정한다.4 이런 맥락에서 문경원과 전준호의 프로젝트는 지구상에서의 인류의 멸종, 적막한 생존 등의 이슈를 다루면서도 일종의 가능성을 남겨 둔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나 반-유토피아적이기 보다는 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시선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묵시록적 미래의 서사에 완전히 몰입하는 대신, 작가들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의 삶에 내재한 디스토피아적 요소를 실감하고 나아가 이에 대응하게 만든다.
문경원과 전준호의 프로젝트는 영화, 출판물, 아카이브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주제 면에서나 형식 면에서 복합적이다. 독일 카셀에서의《dOCUMENTA 13, 2012》에서 이 작품은 두 개의 스크린에 투사된 영화 작업, 아카이브이자 폭넓은 공동 작업의 개념적 맥락으로 기능하는 건축, 디자인 모델이 진열된 분리된 공간으로 구성된 설치 작품으로 전시되었다.
영화 <세상의 저편 El Fin Del Mundo, 2012>은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을 두 개의 분리되었지만 동시에 진행되는 스크린 위에 보여준다. 남자는 작가의 작업실처럼 보이는 침침한 방 안, 그러나 미술 재료는커녕 음식이나 물 같은 생존의 필수품들이 전혀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 바깥에서 쓸 모 없어 보이는 물건들과 죽은 흰 개 한 마리를 트롤리에 담아 온 그는, 아상블라주(assemblage) 조각 같은 작품을 만들어 가기 시작한다. 창 밖을 내다 보기도 하고 소파에 앉기도 하다가, 결국 남자는 갑자기 방 안에서 사라진다. 한편 여자는 하얀 불빛과 전자 장비가 가득한 정결한 흰 방 안에 흰 보호 의류를 입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죽은 나뭇가지들과 말라 붙은 풀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면서, 여자는 차츰 큰 벽 하나를 격자 모양의 견본들로 채워 나간다.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감에 잠시 동요한 여자는 방 안 구석구석을 둘러 보다가 벽 뒤의 한 방을 발견하는데, 이 곳은 남자의 마지막 거처를 닮았다. 이 순간 남자와 여자 간의 공간적 거리는 무너지고, 처음 보였던 것과는 달리 이들간의 시간적 거리 또한 보다 불확정적으로 변한다. 남자의 부재하는 존재에 대한 설명되지 않지만 심리적으로 강렬한 여자의 반응은 이런 상황을 심화시킨다.
영화가 보여주는 연기, 촬영, 미장센(mise-en-scène), 편집 등 측면에서의 전문가적 인상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공상 과학 영화 장르의 독특한 어휘를 곧 인식하게 만든다.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1982>,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A Space Odyssey, 1968>, <미래 소년 코난 Future Boy Canon, 1878> 같은 영화들을 연상시키며, <세상의 저편 El Fin Del Mondo>은 묵시록적 재앙의 한 가운데 놓인 외로운 생존자, 독재적인 후기-종말적 기업의 힘, 전반적으로 부재하지만 때때로 디스토피아적 미래 속에서 재부상하는 인간적 속성 등 공상 과학 장르의 특징적 줄거리와 캐릭터들을 다룬다.
《dOCUMENTA 13》의 예술 감독 캐롤린 크리스토프-바카기브 (Carolyn Christov-Bakargiev, 1957-)는 참여 작가들에게 상당 수의 신작을 커미션했고, 문경원과 전준호의 프로젝트도 이런 신작 중의 하나다. 포위, 후퇴, 희망, 무대 같은 여러 주제가 이번 도큐멘타에서 다루어지는 가운데, 이런 주제에 대한 참여 작가들의 대응도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전시 전체를 관통하며 한 가지 지속되는 아이디어는 예술이 어떻게 세계를 반영하고 세계와 소통할 것인가 하는 점이며, 이 질문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베트남 전, 아랍의 봄, 지속되는 아프가니스탄의 충돌 등 역사의 폭력에 의해 더욱 현장감을 지니게 된다. 문경원과 전준호의 프로젝트는 최근의 재난과 위기를 강조함으로써 종말적 세계가 그리 먼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다루면서, 이번 도큐멘타의 주제에 성공적으로 상응할 뿐 아니라 이를 더욱 풍요로운 질문으로 만든다.
문학이나 영화 장르에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바라보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욕구와 연관된다. 우울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환경적 상황에 대한 비판 의식은 문경원과 전준호의 작품에서 가장 선명히 드러나는 특징이다. 의도적으로 실용적이고 해결책 중심적인 접근은 이들의 작품을 단순한 분석이 아닌 가능성과 연결시키며, 변화를 향한 작가들의 욕구는 이 프로젝트의 다양한 협력자들과 조언자들이 이미 각자의 분야에서 전개해 왔던 노력들과 교차된다. 작가들은 선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대안과 가능성들이 등장할 수 있는 논쟁과 의논의 기회를 만들어 낸다. 달리 말해, 이 프로젝트는 자각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디스토피아적 현실에 맞닥뜨려 이를 극복하고 새롭게 시작하도록 독려한다. 문경원과 전준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상 과학은 언제나 현재의 우화입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을 도입하여 오늘날의 이슈들을 다루고 싶었고, 특히 예술은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 지에 대한 문제와 연관시키고 싶었습니다.”5 이들이 유토피아 / 디스토피아의 패러다임과 관련하여 예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이들의 상상적 미래가 지닌 극단적 성향이 보다 광범위한 사회정치적 이슈들, 즉 자연 재난이나 인공적 재앙, 인간 존재에 대한 그 영향 등과 보다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그러나 작가들의 질문은 예술의 의미와 역할이 가장 극단적인 조건, 예컨대 세상의 종말과 같은 상황에서도 인류에게 있어 중요한 질문으로 남을 것이라는 전제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서, 이미 인간 존재의 조건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세상의 끝’은 사실 ‘인류의 종말’이지만, 작가들은 세계의 현 상황과 미래에 대한 단순한 비판에 문제를 한정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상기시킨다. 예술을 창작하고 향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이런 속성이다.
문경원과 전준호는 덧붙여 “우리는 처음부터 이런 질문들이 쉽게 답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어려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시인, 영화 감독, 과학자, 디자이너, 건축가 같이 다른 분야와 학제들에 속한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우리는 미술의 내적 서클을 벗어나는 것이 보다 광범위한 예술에 대한 이해로 향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지요”라고 설명한다.6 프로젝트의 출판물 『News from Nowhere: 미래를 위한 플랫폼과 현실의 내적 성찰 News from Nowhere: A Platform for the Future & Introspection of the Present, 2012』은 다수의 프로젝트 협력자 및 조언자들로부터의 기고와 인터뷰 등을 포함한다.7 기고가들은 이창동(李滄東, 1954-), 유사쿠 이마무라(Yusaku Imamura, 1959-), 고은(高銀, 1933-), 토시 이치야나기 (Toshi Ichiyanagi, 1933-),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Hans Ulrich Obrist, 1968-) 등 건축가, 영화 감독부터 철학자, 음악가, 과학자까지 다양하며, 이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와 관련하여 스스로 선택한 형식을 통해 현재를 고찰하고 미래를 예견해 본다.
문경원과 전준호가 MVRDV, 토요 이토 (Toyo Ito, 1941-), 타크람 디자인 엔지니어링 (Takram Design Engineering) 같은 건축가 및 제품 디자이너와 협력하는 것은 특히 이 프로젝트를 실제의 현재 세계와 강력히 연결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스크린 옆의 공간에 <공동의 진술 Voice of Metanoia, 2011-12> 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된 작품들은 일종의 아카이브로 기능한다. 미래주의적인 라이프 스타일 제품, 기술적으로 진화된 의류, 일본의 토호쿠 지역을 위한 재건 모델 등이 여기 포함되며, 문경원과 전준호가 제시한 테제에 대한 협력자들의 해석이 반영되는 한편 대안적 미래의 버전들이 추가로 제안된다. 예술에 대한 질문이 추상적인 노력으로 보일 수 있는 데 반해, 본질적으로 기능성에 연관된 아이디어는 그것이 현재의 실제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에 무관하게 확고하고 실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일본에서 일어난 최근의 지진과 해일, 전지구적인 규모로 지속되고 있는 재정 위기 등은 대안적인 삶과 사고에 대한 이들의 아이디어에 타당한 배경과 필요성을 제공한다. 도요 이토의 건축 프로젝트처럼, 이들 아이디어 중 일부가 이미 재난 후의 일본에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으며, 이 아이디어들이 가상이 아닌 실제 해결책이 되지 않을지, 그 때가 언제일지 생각해 보게 된다.
2010년 처음 선보인 이래, 문경원과 전준호의 온라인 ‘뉴스레터’는 이들의 프로젝트 발전과 경과를 밀접히 추적했다.8 지금까지 나온16편의 뉴스레터는 영화와 출판물 프로젝트에 대한 작가들의 초기 아이디어를 실험하는 한편, 그들과 협력 작가, 조언자들 사이의 만남과 대화들을 기록해 왔다. 협력자와 조언자들은 지난 2년간 작가들이 조직한 세미나, 워크샵 등에도 참여하여 프로젝트와 관련된 여러 이슈들을 토론하였다. 프로그램의 진행 과정에서 이들이 보여준 정신적, 시간적 관대함은 이들이 공유하는 악화되는 세상에 대한 염려와 그 위급함을 반영한다. 이들 사이에는 학제간 협력에 대한 필요성이 공통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 하며, 이는 우리가 직면한 이슈와 위기들이 개별적 학제에 한정되지 않고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News from Nowhere> 프로젝트가 지닌 전반적인 어조는 탐색적이고 비결정적이다. 문경원과 전준호의 개별 작업이 지닌 특성, 이를테면 렌즈에 바탕을 둔 미술의 형식적 언어에 대한 문경원의 사색적 접근, 미술 제도 및 권력 관계에 대한 전준호의 비판적 시각 등을 이 프로젝트에서 발견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그러나 두 작가는 예술 창작이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라는 관례적 인식에 대항하여, 예술적 협력이 지닌 자명한 어려움들을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프로젝트의 본질 자체가 학제간 공동 작업이라는 점은 물론 이들의 공동 작업을 더욱 타당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두 개별 작가들의 시선을 융합하는 과정에서 대답이나 확정적 위치를 연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 또한, 이 프로젝트에서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 듯 하다. 이창동 감독은 작가들과의 대화에서, “예술이나 창작 행위는 어떤 답을 전달하는 것보다는 질문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답은 각자가 찾는 것이지요. 정해진 답을 주는 것, 또는 답이 있다고 믿는 것은 예술적 혹은 창조적 태도는 아닌 것 같아요”라고 이 문제를 지적했다.9
문경원과 전준호의 프로젝트는 라이먼 타워 사전트(Lyman Tower Sargent)가 제시한 ‘비판적 디스토피아’ 개념을 연상시킨다.10 이는 현재의 담론들이 세계를 교정할 수 없음을 밝히고 가능성과 선택, 희망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담론들을 제안하는 비판적 서사의 형태로서 디스토피아를 재규정한다. 이런 진보적 가능성은 디스토피아 서사에 내재한 속성이며, 문경원과 전준호는 <News from Nowhere> 프로젝트를 통해 미래를 위한 나은 비전을 제안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한다. 현재의 문화적, 사회정치적 상황에 담긴 유토피아에 대한 염원을 보여주면서, 이 프로젝트는 디스토피아적 현재를 넘어 유토피아적 단층을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1. Butler, Octavia, Parable of the Sower, (New York: Warner, 1993), pp. 235-36
2. Vavinskaya, Anna, “Janus-Faced Fictions: Socialism as Utopia and Dystopia in William Morris and George Orwell,” Utopian Studies, (March 2003), pp. 83-98
3. Suvin, Darko, “Utopianism from Orientation to Agency: What Are We Intellectuals Under Post-Fordism To Do?,” Utopian Studies, (December 1998), p. 170
4. Ibid.
5. 2011년 8월부터 2012년 6월까지 가졌던 작가들과의 대화 중에서.
6. Ibid.
7. Mediabus, Workroom, LEE Sunghee ed., News from Nowhere: A Platform for the Future & Introspection of the Present, (Seoul: Workroom Press, 2012)
8. 홈페이지 www.newsfromnowhere.kr 참조
9. 문경원과 전준호, 「현실과 환영, 태도로서의 리얼리즘 – 이창동 감독과의 두 번째 대화 」, 『뉴스레터 7』, www.newsfromnowhere.kr
10. Sargent, Lyman Tower, “The Three Faces of Utopianism Revisited,” Utopian Studies, (June 1994), pp.1-37
Critic 2
문경원∙전준호 : 조정환과의 대담
2012년 5월 10일 (광화문 파크팰리스)
전준호(이하 전): 우선 보편적 미의식과 예술의 사회적 실천과 기능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정환(이하 조): 제가 두 분의 작품실천을 보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제출된 작품이 일종의 다양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예술 작업이 전통적으로 놓여있던 자리들, 캔버스나 전시장, 공연장과 같은 자리들을 벗어나서 우리 삶의 다양한 부문들과 직접적인 연결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이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넓히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기존 예술이 점유하고 있는 따분하고 전통적인 위치가 있는데 그것을 벗어나서 예술이라는 것을 잃지 않으면서도 지금까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동안 예술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예술로서 생각해볼 수 있는 문을 여는 것이 제게는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건축과 도시 공간의 문제, 디자인과 엔지니어링, 기술 공학적 연결관계도 흥미롭구요.
그리고 이 프로젝트에서 생명을 다루는 방식은 기존의 생태주의의 관점과는 많이 다릅니다. 자연과 생명, 예술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프로젝트인 것 같습니다. 토시 이치야나기(Toshi Ichiyanagi, 1933-)의 작업 같은 경우도 그렇습니다. 음악, 하면 우리는 먼저 서양식 악보를 생각하는데 사실 흥얼거림, 개소리, 새소리, 어린아이의 옹알이 등도 다른 음 체계 위에서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예술의 자리를 벗어나서 무언가 새로운 자리를 찾아 나선다는 느낌을 주는데 어떻게 이러한 프로젝트를 생각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전: 제가 하고 있는 발언들이 동시대인들과 호흡을 함께 하고 있는가? 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작업을 하고 전시를 하면 할수록 미술계 내에서만의 통용이란 생각이 들면서 회의가 일었습니다. 예술계에서 벗어나 다른 분야에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조: 타크람(Takram Design Engineering)처럼 후쿠시마 사건 이후에 실질적인 필요성을 느끼고 참여하게 되었다거나, MVRDV는 협력 작업을 통해서 서로 연결이 되는데 사실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과정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람과 능력을 발견하는 과정이고, 이 능력들에게 과제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작업을 수행해나가는 과정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별적으로 분리된 예술가 개체의 작업이 아니고 이 작업이 씨앗과 같은 기능을 하면서 주변의 역량들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작업이라는 것이죠.
분산되어 있는 역량들의 네트워크를 조직화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공동작업자(co-worker)로 되어 있는 작가들의 작업 외에도 앞으로도 계속 지속할 수 있는 포맷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모델을 확장시키면 앞으로 계속 근사한 일들이 터지고 보여지면서 연결되고 끊어져가는 사건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예술이라고 하면 조직과는 담을 쌓은 비조직적, 탈조직적인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이런 작업이라면 우리의 생활이나 삶, 능력의 도약을 가져올만큼 조직화하는 것으로 예술을 이해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문경원(이하 문):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동기로 두 가지 지점이 있었습니다. 예술작업이라고 하면 보통 개인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도 개인작업을 각자 하고 있는데 마치 대답 없는 메아리 같은 상대적인 박탈감이 있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둘이서 시작하게 된 것은 예술에서 탐구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러한 협동 체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자각했고, 이렇게 함께 했을 때 예술이 어떤 실천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술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 하는 것도 궁금했습니다. 예술 자체에서의 관계, 소통의 변화가 다른 방향으로는 어떻게 사회적 실천에 대한 모습을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이 있었습니다. 사회 속에서 바라보는 예술의 역할이 무엇인지 궁금했고 앞으로 계속 작업을 해나가는데 있어 예술이 어떻게 생산적으로 변화할지도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에서 새로운 시작을 전제하고 있는 종말의 의미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 것입니다. 질문을 하는 과정 자체가 예술의 진화와 앞으로의 전망을 함께 고민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조: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라고 표현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예술과 사회를 따로 떨어뜨려서 생각하곤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모든 사람들의 삶과 실천들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조직한 결과로서 우리에게 부과되는 것입니다. 권력자나 부자들이 전략적으로 사회의 틀을 만들지요. 예술도 이러한 사회형성에 처음부터 참여하는 사회적 활동입니다. 그리고 사회는 예술의 조건이 될 뿐만 아니라 예술의 요소로 침투합니다.
1940년대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졌던 네오 리얼리즘(Neo-realism) 계열의 영화를 보면 비전문가-배우들, 즉 생활인이 자주 출연합니다. 생활인이 나오면서 생활 그 자체가 영화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비-배우인 이 배우들의 등장은, 생활인의 잠재력이 예술가를 매개로 발현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양자가 서로 역할을 주고 받으면서 예술 행위가 사회 행위와 서로 접근합니다. 이럼으로써 새로운 유형의 예술사회가 만들어져 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실천이라는 말은 식상한 노래 가사처럼 들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고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예술은 저항정신의 발현입니다. 기존의 오염된 가치에 대한 저항과 고착화된 형식, 사고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예술에서는 그러한 저항적 정신이 변질되면서 다른 분야 보다 훨씬 더 사회 관계망의 그물 속에 얽혀있고 고립되어 있습니다.
조: 리얼리즘 예술은 현존하는 상황의 재현(representation)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미학에서 예술 작품의 모델이 작품 외부에 있는 것인데, 예술 행위는 그것을 예술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 됩니다. 리얼리즘에 비판적이었던 조류는 주체에 내재되어 있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 내어 작품에 담습니다. 표현(expression)이 그것이지요. 여기서도 작품의 모델은 작품 밖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양자는 유사합니다. 반면에 이 프로젝트처럼 다수의 사람들, 개체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힘이 연결 되면서 마음의 네트워킹이 구축되는 과정은 마음 속∙밖에 있는 것들의 작품 속으로의 이전이 아닙니다. 그 과정 자체가 우리의 삶이나 생각, 느낌, 지식들을 바꿔나가는 발견, 발명, 발생의 과정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서로의 관계 속에 참여하는 과정이고 우리가 스스로를 변화시키면서 원래 있었던 자리, 기존의 관계에서 다른 지평으로 나아가는 무대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걸어가는 과정입니다. 결국 이것은 이동, 변형, 자기 자신의 재창조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전: 예술은 작가 자신이 처하고 있는 상황과 시공간을 사고하고 체득해서 작품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지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저의 주관적 사견에 대해 피력하다 나의 사견이 이 사회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의심이 들었고 이 의심의 실체를 파악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과 이 문제의식을 나를 넘어 우리라는 공동으로 공론화 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협업을 하고 외부의 참여자를 이 프로젝트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조: 공론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사적인 것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진전을 포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근대성이란 것 자체가 한편으로는 공통적인 것들을 사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그 사적인 것의 지배에 제한을 가하고 그것들을 부분적으로는 공적인 것으로 전환시켜 온 과정입니다. 사적인 평면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갈등하는 존재들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 갈등이 사회의 붕괴로 이르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하는 것이랄까요? 예술가들도 사적인 평면에서는 너와 내가 서로 경합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예술을 공론화한다는 것은 개인이 갇혀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요청에 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전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가 작품을 하나 내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 작품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생각해봅시다. “이 작품의 작업과정이나 성과가 공공적이다”라는 말에는, 이 작업의 성과를 다른 사람이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프로젝트는 그와는 다른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 예술작업, 작품들을 횡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수행되는 이 프로젝트는 완성된 작품을 타자들이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기보다 이 과정에 연결되고 그 과정에서 변화하도록 만듭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공론적이라는 말과는 다른 어휘를 찾는 것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문: 우리의 지향점은 현대예술이 괴리되고 그 목소리가 분산되면 될 수록 예술의 본질이나 정신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보편적 미의식을 끌어올 수 있는 지점에서 예술의 새로운 역할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전: 공공이나 공론이라는 단어는 예술계에서 사뭇 어색한 단어입니다만 우리가 이 말을 끌어온 것은 보편성의 획득을 위해서입니다. 태초의 인류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이 우리에게는 창조적인 행위, 보편적인 미의식이 있습니다. 창조적인 행위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은 시공간을 넘는 인류의 보편 의식입니다.
조: 영어 표현으로 프라이빗(Private), 퍼블릭(Public), 커먼(Common)을 생각해봅시다. ‘프라이빗’, 즉 사적인 것은 남의 것을 뺏어온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반면 ‘퍼블릭’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위로부터 제3자가 관리해서 갈등이 분출되지 않고 내부에서 조절될 수 있게 하는 틀을 말합니다. 커먼은 다수의 사람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제3자의 개입 없이 서로 소통하는 과정입니다.
‘퍼블릭’은 피플(people)에서 나오는 것인데 항상 주인, 즉 왕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커먼’이라는 것은 다수적인 것들이 함께 나눈다는 뜻입니다. 근대가 실존하던 ‘커먼’을 사적인 것으로 전화시킨 과정이기 때문에 오늘날 커먼은 망각되고 억압된 개념입니다. 그래서 커먼에 대한 우리의 감각능력과 이해능력은 크게 떨어져 있습니다. 그 결과 남아 있는 커먼이나 새로이 발생하는 커먼도 퍼블릭으로 잘못 이해되곤 합니다. 국가적 상상력이 공동체적 상상력을 압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프로젝트의 추구는 퍼블릭화(공론화)에 있다기보다 커먼화(공통화)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공론화라는 말이 잘 소통되도록 하기를 의미하는 것처럼 사용되곤 하지만 사실 잘 안 통하는 방식으로 통하게 하기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정당, 기업, 국가의 구조가 그렇죠.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대리인이 대신해주는 것이 이제 좌파에서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 점에서 공공성은 사적인 것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프레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할 때 공공성과 구분되는 공통성의 문제에 대해 새롭게 사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보편성 문제와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유니버셜(universal)을 보편(적)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유니(Uni)’는 하나를 만드는 것입니다. 다수성을 하나로 환원시켜나가는 메커니즘이 보편성 속에 있습니다.
이 보편성이 공감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공감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의 『시학 Poetics』에서 정립된 미학입니다. 플라톤(Plato, BC427-BC347)은 현실은 이데아(idea)의 복제물이고 예술은 이 현실을 다시 복제한 것이기 때문에 이데아로부터 상당히 먼 거리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예술은 이데아의 의태물, 즉 시뮬라크르(simulacre)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톤은 예술 작품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질서가 아니라 혼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술이 이데아를 제대로 복제하지 못하고 희미하게만 복제하다 보니 사람들에게 혼란을 준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지녔던 예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버리면서, 예술작품은 감상자의 공감을 통해 카타르시스(catharsis)를 가져오고 보편적 이성의 상태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이 대립된 두 견해 사이의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되지만 예술작품이 혼란이나 질서 어느 쪽이건 간에 이미 정해진 어떤 보편적 효력을 갖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 처음에는 우리의 발언에 대한 스스로의 검증의 기회를 갖고자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하나씩 진행 하다 보니 오늘의 지점과 모습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프로젝트의 과정이 눈덩이 굴러가듯이 자연스럽게 변화와 이동으로서의 예술행위가 된 듯 합니다.
조: 과정 속에서의 새로운 것의 발명과 변화는 이 프로젝트의 중요한 특성이고 이 점에서 매우 특이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이 있다면 이 특이성을 어떻게 자극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이함은 역설적이지만 공통되기를 통해 진전될 수 있습니다. 특이함만을 고집하게 되면, 즉 순수한 다름에만 자족하게 되면 특이함의 고갈이 도래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예술계에서 자신을 경쟁구도 위에 놓으면서 ‘나는 남들이 하는 것은 하지 않아’ 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는 경우들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잖아요? 저작권법 같은 것이 이런 경향을 부추기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특이함의 막은 일시적이고 과도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막은 실제로는 일시적 분화를 통해 타자와의 차이를 생성하고 이 차이 속에서 강도 높은 소통을 창출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막을 통한 차이의 생성이 없다면 다름이 지속적으로 반복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학에서는 특정한 좌표에 놓을 수 없는 어떤 것을 특이하다(singular)고 부릅니다. 반면 좌표값을 가지고 있는 것은 특수한(particular) 것입니다. 개인들은 그 좌표에 주어진 특수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와 달리 좌표값을 정할 수 없는 특이함은 좌표를 교란시키는 일종의 괴물입니다. 좌표에 놓을 수 없는 것은 개체, 집단, 전체와 구분되는 특이한 힘들의 번쩍임들입니다. <세상의 저편 El Fin Del Mundo, 2012>를 보면 왼쪽의 남성 부분은 죽고 사라진 것이고 오른쪽 여성 부분이 현재의 순간입니다. 과거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꿈이나 회상, 기억 같은 것으로 계속 나타나는 것이고 그것들은 우리의 지각에 영향을 미칩니다. 오른쪽 무대의 여성이 어느 순간 어딘가에 끌린다고 했을 때, 그것은 이 동영상에서 사라졌던 것으로 여겼던 과거가 현재 속에 공존하고 또 현재에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이함은 개체성, 개별성과 혼동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 힘이 어디선가 와서 우리 몸을 빌려서 스쳐 지나간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힘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우리 외부에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고 다시 나갑니다. 우리의 몸이 잠시 빌려서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라고나 할까요? 우리의 힘들은, 요즈음의 컴퓨터 정보의 저장기술에 비유하자면, 일종의 클라우드(cloud) 속에 들어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집단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집단적인 것의 특이한 힘들이 잘 연결되는 과정을 우리는 공통되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술과 인간진화
전: 인공장기를 통한 수분 공급 장치의 모델이 된 동물이 사막 쥐나 개인데 이 동물들은 체온과 수액이 체내에 유지되도록 해주는 기관이 있습니다. 영상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이 하고 있는 목걸이가 그것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체내의 체온을 유지시켜주는 기관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타크람은 후쿠시마 사건 이후에 디자이너로서 동시에 엔지니어로서 자신들이 무기력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11 재난 이전에 우리와 만나서 나눴던 미래의 수분 공급 장치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그들은 재난 이후 가상으로 정했던 우리의 시나리오가 현실화 됨으로써 그간에 가졌던 회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프로젝트에 동참해 새로운 수분 공급 장치를 저희와 함께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물을 가져올 수 없다면 인체 내에서 물을 순환시킬 수는 없을까? 를 생각하다가 사막 쥐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진화한 것으로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이 결합한 좋은 사례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기관이나 도구가 미래에는 수혜자와 비 수혜자 간의 사회의 계급 문제와 갈등도 야기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조: 재미있는 발상인 것 같습니다. 기술철학자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1924-1989)에 대해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쓴 책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의 문제의식 중의 하나가 오늘날의 사람들이 기술이라는 문제에 대해 너무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인문학을 하다 보면 기술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인문학은 기술성을 너무 낯설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극복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술이 인간의 진화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경시하는 상황은 전문가 집단들에 의한 기술 독점을 허용하게 되는데 이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탬퍼스의 수분공급장치 같은 것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제작할 수 있을 때에, 그리하여 기술장치들이 특정한 전문가의 독점영역 안에 있지 않게 될 때에 우리는 새로운 계급사회의 출현을 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태주의의 어떤 조류는 기술성의 축소를 주장합니다. 예전에는 세상이 좋았는데 지금은 나빠졌다고 가정하죠. 환경 파괴는 기술이 지나치게 발전된 것의 결과이므로 기술이 미발달했던 시대로 돌아가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공업에서 농업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그 예인데 이 프로젝트는 이런 생각과는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습니다. 이미 세상은 끝났다는 것입니다. 종말은 사막과 연결이 되는데 사막이라는 환경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반면 생태주의는 사막 이전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것이죠. 생태주의나 원시주의는 기계(machine)보다는 기구(instrument), 혹은 심지어 도구(tool)로 돌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시몽동은 그런 발상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기술성이 계속적으로 열린 상태에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죠. 그는 자동화를 닫힌 체계로 보는 것을 반대합니다. 대신 그는 다양한 것들이 서로 열려 있는 상태로 관계 맺고 문제해결의 힘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 자동화라고 주장합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열린 시스템을 통해 인류의 진화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술이 기술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도 제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기술자로 생각하기보다 기술자를 천하게 보는 경향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예술과 기술의 사회적 분극화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는 낡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근대 이후 전개된 예술과 기술의 분화과정을 극복하면서 기술공학자, 엔지니어일 수도 있는 예술가의 상은 과연 불가능할까요? 백남준(白南準, 1932-2006)이 바로 그런 예술가의 상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싶기도 하구요.
전: 우리는 정신적인 가치의 고양을 추구합니다. 육체보다 정신을 사용하는 것을 더 귀하게 생각합니다. 예술가도 노동을 하지만 예술가들의 노동은 기술자들의 노동과는 차별과 거리를 둡니다. 정신적인 가치 추구가 진화된 예술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두는가? 에 대한 물음이 있습니다.
문: 예술에 있어 정신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을 나누기 보다 그 발상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그 지점에서 기술도 예술이 가진 창조성을 획득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최근에는 예술의 패러다임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물성에 기반한 예술이 전통적인 예술상이라면 컴퓨터가 등장한 이후에는 전통적 물성이 사라지고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는 상황에서 예술과 기술이 새롭게 결합되는 예술의 새로운 개념과 형식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기술력이 매우 중요한 전제가 되고 있습니다. 타크람 같은 경우는 새로운 기술 위에서 이 번 작업을 진행했는데, 기술이 보조적인 아이디어를 던지면서 도구로서의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이 진화하면서 예술의 내용과 서로 연결되는 지점이 생겼습니다.
조: 시몽동은 기술성을 구성하는 요소를 기술적 요소, 기술적 개체, 기술적 앙상블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기술의 진화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시몽동은 생명의 진화만이 아니라 기술의 진화가 가능하다고, 아니 실재한다고 보는 독특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기술의 진화는 기술적 앙상블의 차원에서 나타납니다. <세상의 저편>에 나오는 저 수분공급장치를 기술적 앙상블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기술적 진화의 과정이 잘 포착되지 않습니다. 기술성으로서 효과를 발휘하려면 사회 속에 기술적 앙상블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실린더의 발명은 산업적인 필요성에 의해 생겨난 것입니다. 사회적 필요가 기술의 발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죠. 저는 현대 사회를 과거의 산업자본주의와는 다른 인지자본주의로 규정하는데, 이런 인지화된 사회에서는 예술가의 스튜디오가 공장으로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통상 기술로 인지하는 것만 기술로 보지 말고 생명체도 기술체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막쥐나 낙타는 자신만의 수분저장방식과 수분공급방식으로 자율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생명체의 진화 과정이 기술적 진화 과정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생명체는 한편에서는 정신적 현상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기술적 현상이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물리적 현상이지요. 생명체는 이런 의미에서 기술적 과정을 수반하는 다양체입니다. 사회적 진화과정도 생명 진화과정처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을 아버지, 엄마 등의 다양한 요소들을 가진 기술적 개체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국가의 삼권 분립 체제 같은 것도 하나의 기술적 앙상블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 기술적 앙상블의 생성을 추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멸까지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예술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진화는 절실한 요구를 필요로 합니다. 예술에 있어서 이러한 요구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기술은 사회의 요구와 함께 진화하는데 요구가 없는 예술은 과연 퇴화하는 것일까요? 타크람의 인공 수분 공급장치를 만든다는 설정에서는 이러한 분명한 요구가 있습니다.
조: 그 요구를 두 가지 유형으로 분리해서 생각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우선 직접적이고 물질적인 요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직접적인 물질적 필요에 국한되지 않는 ‘정신적 요구’도 있습니다. 예술이나 기술 작업, 생명-작업이 직접적이고 물질적 필요에만 종속된다면 그 효과는 제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직접적 요구에 대한 응답은 예술보다는 예술 아닌 것들에 의해 더 많이 충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기술이 직접적인 삶, 행동, 운동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더 많이 이용되어 왔고 정치가 그것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두 번째 요구도 첫 번째 요구만큼이나 우리에게 항상 주어지고 있는 요구입니다. 가령 행복이나 아름다움 같은 것에 대한 요구, 즉 정신적 요구도 우리에게 항상 있어왔습니다. 이러한 요구에는 예술이 좀 더 많은 응답을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무사심성(Interesselosigkeit)이 미”라고 했는데 이 말은 물질적 필요에서 벗어나야 아름다움이 시작된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직접적이고 물질적인 필요와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그 필요의 맥락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즉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정신적인 능력일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눠져 있던 요구를 연결하고 결합하는 관점에서 요구∙필요라는 개념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두 가지 극단적인 인간형을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직접적인 물질적 필요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인간형(충동가형)과 그러한 필요에서 유리되어 몽상을 즐기는 인간형(몽상가형)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필요한 것은 실제적 행동의 차원에서 이 두 측면을 통합시키는 것입니다. 행동이 정신의 깊은 곳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면서도 실제의 물질적 필요를 충실히 고려하는 행동인 유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사람들을 충동인으로 만들거나 몽상가로 만드는 경향이 있어요. 그것은 자본의 축적 욕구에서 비롯되는 경향입니다.
문: 재현이나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체의 시각이 합치되는 과정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예술의 실천이자 방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 <세상의 저편>은 두 화면이 분할되어 있는데 왼쪽 화면의 남성은 전통적인 예술가의 이미지로 나타남에 반해 오른쪽 화면의 여성은 기술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어진 역할을 반복적인 방식으로 수행하는 사람이 충동형 인간입니다. 여성 캐릭터는 이러한 충동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이다가 어떤 순간 자기의식의 균열을 경험하고 나서 화면을 횡단하여 왼쪽 화면으로 탐험의 발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이 순간 인간형의 균열적 혼성의 과정이 진행됩니다. 여성 캐릭터는 한편에서는 템퍼스에 올라타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예술이라고 불리는 기억과 몽상의 세계 속으로 끌려갑니다. 하나의 개체인 여성 캐릭터에게 두 가닥의 흐름이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여성 캐릭터는 이제 다른 감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전에 갖지 못했던 예술적 조형성에 대한 감각을 가진 존재, 양이나 수로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감각할 수 있는 존재, 그러한 것에 대한 욕망을 가진 존재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영상은 우리가 어떻게 생명으로 지속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