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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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CV
<개인전>
2011
Ordinary Strangers, 아트선재센터, 서울
Xijing, Fondazione Bevilacqua La Masa, 베니스
2010
Antithesis of Boundaries, 티나김갤러리, 뉴욕
2008
In through the outdoor, 국제갤러리, 서울
2005
Neighbor’s wife, 카이스 갤러리, 서울
2004
Cosmo Vitale, REDCAT Gallery, 로스엔젤레스
Antarctica, 아트선재센터, 서울
<주요 단체전>
2011
The Global Contemporary Art Worlds After 1989, ZKM, 칼스루에
Countdown, 문화역서울284, 서울
2010
Tricksters Tricked, 반아베미술관, 아이트호벤
미디어시티서울 2010 신뢰,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미래의 기억들,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
Aichi Triennale 2010, 아이치아트센터, 나고야
2009
Your Bright Future: 12 Contemporary Artists from Korea, LACMA, 로스앤젤레스_휴스턴 미술관, 휴스턴
제 10회 리옹 비엔날레: The spectacle of the Everyday, 리옹 현대미술관, 리옹
제 4회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트리엔날레: Live and Let Live-Creators of Tomorrow,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미술관, 후쿠오카
2008
Laughing in a Foreign Language, 헤이워드갤러리, 런던
Too Early For Vacation, 리머릭시립미술관, 아일랜드
제 3회 난징 트리엔날레: Reflective Asia, RCM The Museum of Modern Art, 난징
The Fifth Floor, 테이트 리버풀, 리버풀
2007
Elastic Taboos, Kunsthalle Wien, 비엔나
All about Laughter, 모리미술관, 도쿄
제 10회 이스탄불 비엔날레: Not Only Possible, But Also Necessary-Optimism in the age of global war, 이스탄불
Brave New Worlds, 워커아트센터, 미네아폴리스
2006
제6회 광주 비엔날레: 열풍변주곡-Remapping Global Cities, 비엔날레관, 광주
2005
티라나 베엔날레: Sweet Taboos, National Gallery of Arts Tirana, 알바니아
발렌시아 비엔날레: Thoughts of a fish in deep sea, Convento di Carmen, 발렌시아
제 51회 베니스 비엔날레: Secret Beyond the Door, 한국관, 베니스
<소장처>
퀸스랜드 아트 갤러리, 브리즈번, 호주
르 콩소시움, 프랑스
포스코 미술관,
서울 아트선재센터, 서울
휴스턴 미술관, 휴스턴
구마모토 현대미술관, 구마모토, 일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
캐나다 국립미술관, 캐나다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Critic 1
김홍석의 작품 설명
서현석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 교수)
‘작품 설명’은 ‘작품’ 외부의 시선입니다. 오브제의 배치로 성립되는 ‘작품’의 공간적 맥락의 외곽으로부터 우리의 감각을 향해 던져지는 ‘외경’이자 ‘외설’입니다. 전시마다 입구의 벽을 점유하는 캡션은 전지적이고도 주입적인 화술로서 미술관의 계몽적 사명 의식을 대행합니다. 그것은, 언술적이면서도 행동적인, ‘의미’의 전도사이자 보호자입니다. 관습적 장치로서의 그것이 ‘수행적(performative)’인 이유는, ‘작품’을 보는 관점을 점지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 기능은 다분히 ‘주석’보다는 ‘명령’에 가깝지 않을까요?
우리의 ‘예술적’ 체험이란, 어쩌면 무수한 ‘작품 설명’들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작품 설명’이 미술의 ‘전부’라고 하면 지나친 궤변일까요? 미술관의 벽뿐 아니라, 도슨트 투어, 교과서, 미술잡지, 인터넷, 또는 (이 책과 같은) 전시 도록을 끊임없이 메우는 평론, 프리뷰, 리뷰, 인터뷰, 작가의 변, 기획의 변 등 미술사에 진짜 주인∙주인공이 있다면‘언어’가 아닐까요.
김홍석의 전시장에서 ‘작품 설명’은 어김없이 정면으로부터 우리를 습격합니다. 아예 대놓고 ‘작품’을 점거하고 감각을 점령합니다. 그러나 그 권력은 통상적인 위상으로부터 이탈해있습니다. 그 공격성의 원천은 작품에 대한 ‘지식’이 아닌 그것의 왜곡과 은폐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 설명’이 지닌 치명적인 공격성의 미끼는 그 앞에 놓인 ‘작품’입니다. 공교롭게도‘설명’되는 오브제에는 장엄한 미술 담론의 투박한 유령이 말없이 빙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술 명품’의 ‘짝퉁’들인 것입니다. 인용의 확장성과 표절의 무자비함을 동시에 발산하는 복제품들.
조셉 코수스(Josept Kouth, 1945-), 로버트 인디애나(Robert Indiana, 1928-), 소피 칼(Sophie Calle, 1953-), 제프 쿤스(Jeff Koons, 1955-),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1960-), 요셉 보이스(Josept Beuys, 1921-1986)…
인용 혹은 전용되는 이름들이 미술사의 ‘혁명가’임을 자처한다면, 김홍석은 기꺼이 이들에 대한 조커 역을 맡습니다. 조커의 무기는 언어입니다. 경의와 조롱을 동시에 발하는 변사이자 광대로서, 김홍석은 오리지널의, 그리고 스스로의 ‘예술성’을 모략합니다. 어눌하게 배치된 글자들은 신체 강탈자처럼 무감각하면서도 탐욕적입니다. 그 무심한 활자들의 기만적 공격성이 드러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이 거대한 상자에는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유래가 없는 어느 두 사람의 대화가 영구 보존되어 있다.”
“토끼 인형 옷을 입고 연기하시는 분은 북한 출신의 노동자인 이만길씨입니다. 이 분은 불법 체류자이지만 이러한 연기를 대행해 주는 조건으로 하루 여덟 시간, 시간당 5달러를 지급 받게 됩니다.”
“동티모르인으로 분장한 분은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었으며 그 분의 이름은 안내상입니다. 많은 격려의 박수를 보냅시다.”
언어가 아우라를 부여하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그것의 파생적이고 부수적인 사변적 맥락입니다. 실질적인 파괴력이 아닌, 일종의 부풀려진 ‘선전포고’의 허황됨에 작품의 공격성이 있다고나 할까요. 그 기만성이 노출되는 순간, ‘작품성’은 홋홋한 쓰레기봉투처럼 공중부양하고, 우리의 물신적 예술관은 공중분해 됩니다. 이것은 암호로 이루어진 서사극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큰 웃음도 깊은 좌절도 없는 ‘짝퉁’ 희비극. 그 화려한 서막은 왜소한 ‘거짓말’입니다.
거짓의 뻔뻔함은 ‘원형’의 숭고미를 각색하여 그 뒤틀린 거울상을 우리의 의식에 들이밉니다. 여기엔 창작의 성스러운 고유성마저도, 그리고 재전유의 정치적 노련미마저도, 증발해 있습니다. 거짓 언어가 ‘작품’을 인식하는 방식을 개방하고 교란하고 부유시키는 동안 소통은 어느덧 ‘작품’을 훌쩍 넘어서 있습니다. ‘복제’의 아우라는 물성의 이면에서 번득입니다.
“나는 결혼을 맹세합니다.”
“이 배를 ‘퀸엘리자베스호’라 명명하노라.”
언어의 ‘수행성(performativity)’에 관한 고전적인 이론에서 존 오스틴(John Austin, 1911-1960)이 예로 든 ‘수행 문장(performative sentence)’들이 그러하듯, 김홍석의 공적 언술 행위는 ‘발화’와 ‘행위’의 구분을 소각합니다. 이로써 마술처럼 개인과 작품의 관계에 급격한 변화를 가합니다. 언어는 더 이상 준비된 상황에 종속되는 ‘기록’이 아니라, 새로운 상황을 발생시키는 제의적 주문이자 사회적 ‘계약’입니다.
여기에 ‘기만’의 수사가 추가되면서, 김홍석의 ‘작품 설명’은 한술 더 뜬 이중적 수행성을 장착합니다. 활자의 일차적인 기능도 ‘수행적’이지만, 드러나는 ‘기만’이야말로 수행적 발효의 범위를 무한히 확장합니다. 통상적인 ‘작품 설명’이 단어들의 기능적 의미들을 권위적으로 배합한다면, 김홍석의 ‘작품 설명’은 그 배합에 대한 재고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설득과 궤변, 혹은 친절한 안내와 위협적인 경고의 사각에서, 우리는 단순한 거짓의 복잡한 행간들을 읽기 시작합니다. (봉제 토끼의 다리를 찔러 보는 등) 우리는 그 앞에서 여러 (반향적인) ‘해석’과 ‘확인’의 장치들을 동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규범이 개입되는 것은 이런 해석 장치들이 동원되는 와중입니다. 자아의 보호 체계가 작동하듯, 어느덧 우리는 ‘작품’과 대치하게 됩니다. <The Wild Korea, 2005>의 두 한국 간의 대립처럼, 이 긴장 상태는 ‘진실’에 관한 경쟁이면서도, 또한 그를 초과하는 ‘인식’의 문제로 환원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거짓’을 무조건 봉쇄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 공격성이 가차없이 우리의 규범을 위반하고 기형적인 행동강령을 강요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선언문의 원대한 이상을 대체하는 막대한 허허함이 언어 유희 속의 부조리와 공포를 드러내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지금 이곳(미술관)에는 의도적으로 창녀가 초대되었습니다. 그녀는 오늘 있는 미술 전시 개막행사에 2시간 참석하는 조건으로 한화 60만원을 작가로부터 지급받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 사이를 유유히 걸어 다니며 전시를 관람하고 있는 이 창녀가 누구인지 찾아낸 분은 작가로부터 그녀를 찾은 대가로 120만원을 지급받게 됩니다.”
<Post 1945, 2008>의 전시 공간에 주어진 광고문은, 그 공공연한 공격성을 전시된 오브제가 아닌 관람객을 향해 대범하게 겨냥합니다. 경고문의 선정성과 대자보의 선동성이 배합된 기형적인 공권력이 고스란히 우리의 눈앞에서, 아니 ‘눈을 향해’ 작동합니다. 제의적 주문의 공격성은 ‘거짓’을 통해 발효됩니다. ‘창녀’라는 (가짜) 검색어의 비속함은 스파이처럼 은밀하면서도 게릴라처럼 저돌적인 공격성을 공간 안의 시선들에 투입합니다. 모두의 시선에 비밀경찰의 첨예한 탐구력이 무선으로 전송됩니다. 아아, 그것은 하나의 암묵적이고도 다분히 폭력적인 ‘사회적 합의’로 응집되어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에 치명적인 변화를 가합니다. 프리츠 랑(Fritz Lang, 1890-1976) 감독의 <M, 1931>에서 연쇄 아동살인범을 ‘물색’하는 자발적 시민 방범대의 ‘정의감’이 그러했듯 ‘탐색’의 규칙이 획일적인 집단 폭력으로 변질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하얗지도 검지도 않은 거짓말은 태연하게 우리의 인식에 균열을 가하고 규범을 공격합니다. 언어의 침투는 뻔뻔합니다. 그래서 더 불편합니다. 경박한 악마의 조소는 아니기에, 거북함이 더 무거워집니다. 감각의 마비 속에서 급급히 복구되는 ‘규범’의 논리는 거짓말만큼이나 허허하고 칙칙합니다. ‘거짓’의 위력은 총체적입니다. 놀이의 파장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아니, 정말로 우리를 놀랍게 하는 것은, 그러한 총체적 변화의 단초가 매우 단순한 언어 놀이 따위라는 사실입니다.
거짓 벽보의 가장 놀라운 효력은 현장을 점유한 타인들의 모임에 포괄적으로 공급하는 집단 정체성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관람객’에 부여되는 강압적 질서가 그 ‘모임’의 성격을 결정하는 절대적 조건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미술관으로 인해 형성된 하나의 일시적 공동체는, 단지 ‘예술 감상’을 위한 막연한 개인적 열망으로서가 아니라, 보다 작위적이고 막강한 동기에 의해 재구성된 목적 집단으로 구체화됩니다. ‘작품 설명’은 타인들을 응집하고 그것을 ‘집단’으로 규정하는 수행 언어인 셈입니다. 이 놀이에 참여할 것을 거부하는 사람을 포함하여 말입니다. 아니, 이 괴팍한 언어 놀이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하는 무리들이야말로 담론의 진정한 확장의 장을 이룹니다. ‘차이’의 역학은 참여자들간의 유희가 아니라, 합의와 반발을 두 축으로 하는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작동하는 사회적 장치가 됩니다. 이러한 확장은 ‘연극적’ 허구가 아니라, 분명 ‘실재적’입니다. (‘연극’과 ‘실재’라는 단어들은 잠시 후 다른 의미로 제대로 활용하겠습니다.) 결국 ‘창녀’라는 지시어, 그 역을 맡은 배우, 이를 중심으로 하는 시선의 재구성, 그리고 거부의 담론까지, 김홍석이 연출한 장치는 소사회의 창립을 위한 원천이었습니다.
그것의 가장 놀라운 기능은 스스로 그 효능을 사멸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지나친 농담이 그러하듯, 이 위험한 놀이는 규범 이면의 작은 진실을 꿰뚫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그 대가로서 스스로의 엄중함을 말소시킵니다. 영화 용어로 말하자면, 줄거리를 이끌지만 스스로 중요성을 상실하는 ‘맥거핀(Macguffin)1’이라고나 할까요. 맥거핀의 역할은 물론 공백을 만들고 그를 대체하는 파생적인 관계들을 등극시키는 것입니다. 수건 돌리기에서 ‘수건’이 관계를 발생시키고 구성원들의 위치를 재구성하는 매개가 되듯, 김홍석의 언어 놀이에서도 하나의 ‘주제어’는 개인들간의 총체적인 관계들을 재배치합니다. 놀이는 수건을 만져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성립됩니다. 그 매개적 논리는 ‘부재’입니다. 컴퓨터의 단순한 명령어에 의하듯 저절로 실행되는 장치는 하나의 ‘소사회’만을 남기고 없어져 있습니다.
김홍석에 의해 연출된 (연극적) ‘장치’, 그리고 미술관에 모여든 사람들간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유동적 ‘장치’는, 물론 서로 일치되지 않습니다. ‘작품 설명’은 바로 이러한 차이를 발생시키는 장치입니다! 수건 돌리기의 술래가 바뀌어도 전체적인 규칙과 대열은 변하지 않듯, 우리에게 주어지는 ‘소사회’의 구성은 개인의 참여 의사에 관계없이 확정적입니다. 놀이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작정을 해도, 수건은 내 뒤를 지나가고 있거나 이미 도착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시장에 발을 들이는 소소한 계약적 행위만으로, 어느덧 우리의 의식은 거울 속의 이상한 기호체계에 유배되어 있습니다. 이 언캐니(uncanny)한 요지경 속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마지막 무기는 ‘예술 행위’에 대한, 사회적 계약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하나의 주제어로 인한 이러한 ‘사회적 장’의 형성은 김홍석이 <공공의 공백 Public Blank, 2006-2008>에서 제안한 ‘불가능한’ 아니 ‘비현실적’인 공공장소의 또 다른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 차이에 근거를 두는 단순한 행위에 의해 장소의 기능이 규정되고, 동시에 장소로 인해 점유자들의 사회적 관계가 재구성되는 꼴입니다. <공공의 공백>에서 제안되는 특정한 공공 설치물에 잠재된 ‘연극적 계약’은 <Post 1945>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됩니다. ‘연극’이라는 ‘장소특정적’인 사회 관계는 김홍석의 2011년 작 <사람 객관적-평범한 예술에 대해 People Objective-of Ordinary Art, 2011>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도 장소와 개인의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는 ‘말’로써 맺어집니다. 도슨트처럼 관객을 맞는 다섯 명의 배우들은, 다섯 가지의 각기 다른 주제나 작품군에 관한 ‘설명’을 전달합니다. “도구에 대한 소고—의자를 미술화하려는 의지”, “순진한 물질에 대한 소고—돌을 미술화하려는 의지”, “형태화될 수 없는 물질에 대한 소고—물을 미술화하려는 의지”, “윤리적 태도에 대한 소고—사람을 미술화하려는 의지”, “표현에 대한 소고—개념을 미술화하려는 의지”와 같은, 미술가가 직면하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진지하고도 심층적인 성찰이 이들의 발화에 담깁니다. 이 일련의 문제들은 미술 수업 시간에 마주칠만한 ‘소고’라지만, 동시에 조형미술로부터 개념미술에 이르는 거시적 논제이기도 합니다. 미술의 궤적에서 못다 마친 숙제를 떠안는다고 한다면 너무 거창한 설명이 되겠지만, 어쨌든 김홍석은 개념미술의 실타래를 미술관이라는 장소 내에서 어떻게든 풀어보려는 의지를 공유하려 합니다. 그것은 단지 미술작가의 문제만은 아니니까요. 그 비장한 성찰의 궤도는 지금 전시되고 있는 ‘작품’이 무엇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으로 환원됩니다.
이 본질적인 질문을 위해 ‘작품’은 역설적으로, 필연적으로 소거되어 있습니다. 이전의 ‘작품 설명’들과 달리, <사람 객관적>에서 ‘설명’과 ‘작품’은 언어의 직접적인 지시작용으로 맺어지지 않습니다. 다섯 개의 의자, 철로 만든 물방울 조각품, ‘관용 Tolérance, 2011’이라는 제목의 8점의 회화 작품, ‘고독한 여정’이라는 제목의 돌탑 등, 배우들이 구체적으로 논하는 ‘작품’들의 하나의 공통된 강렬한 특징은, 현장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봉제 인형 속의 탈북자 배우, 상자 속의 역사적인 대화, 군중 속의 창녀가 그러했듯, ‘작품’의 알맹이는 부재합니다. 아니, 이번에는 ‘알맹이’뿐 아니라 설명되는 작품 자체가 통째로 실종되었습니다. 텅 빈 자리의 주변을 배회하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 ‘창녀’를 단속하라는 명령어처럼, 대상이 모호한 탐구 서사를 작동시킵니다.
이 서사의 원동력은 물론 <Post 1945>와 마찬가지로, 연극적 장치입니다. 전시장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몇 가지 요소들은 즉각적으로 ‘연극’의 무대를 재구성합니다. ‘소고’라는 형식의 발화 내용은 미리 작성된 ‘대본’이며, 이를 전달하는 이들은 전문적인 ‘배우’라는 단편적인 사실들 외에도, ‘연극’의 가장 근원적인 조건들이 ‘미술관’ 안에서 발효됩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실재적 모임(real gathering)’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은, ‘포스트 드라마 연극(Post-Dramatic Theatre)’의 정신적 지주인 한스-티에스 레만(Hans-Tthies Lehmann, 1944-)이 내리는 ‘연극’의 정의로, 그는 이를 “미학적으로 배치된 삶과 일상적인 삶이 교차하는 특수한 장”이라고 부수적으로 설명합니다.2 연기나 텍스트로 이루어진 재현의 체계에 우선되는, 보다 근본적인 ‘연극적 체험’의 핵심은, 관객이 공유하는 즉각적인 ‘사회적 만남’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만남의 장에는 작위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 기묘하게 서로를 지시하고 대체하며 배치되어 있습니다. 즉, 그가 말하는 ‘실재’는 정교하고 복합적인 ‘허구’와의 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레만이 말하는 ‘실재’란 그냥 감각으로 얻어지는 준비된 현실은 아닌 것이지요.
미술관에서의 ‘전시’를 ‘설명’함에 있어서 연극 이론가를 인용하는 것은, 역시 우리에게도 ‘수행적’인 태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김홍석의 ‘퍼포먼스’ 작품에 활용되는 언어와 연기의 이면에는, 보다 근본적인 사회적 관계가 작동합니다. ‘연극’이라는 개념을 통해 김홍석 작품을 보는 것은 이 사회적 관계를 단순히 ‘읽기’ 위함이 아니라, ‘수행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함입니다.
물론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 1939-)의 말대로, ‘연극성(theatricality)’이란 말은 모더니즘의 맥락에서 미술의 ‘노골적인 적(upright enemy)’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3 환영적 재현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난 미술에 있어서 그것은 당연했던 태도였습니다. 최근 미술관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적과의 동침’은 미술의 옛 정서를 회복하는 시도, 즉 ‘연극’의 관습을 미술에 그대로 접목시키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연극’과 ‘미술’을 새롭게 성찰하고 그 기능들을 사회적으로 재배치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홍석의 ‘작품 설명’을 ‘연극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첫째로 소통의 맥락을 작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실재’를 새롭게 구성하며, 둘째로 이 절차는 사회적 합의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 객관적>에서 ‘대사’를 통해 펼쳐지는 미술에 대한 근원적 사유는 관람객이 즉시적으로 마주치는 매우 유기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연극적 틀 안에서 특정한 규칙에 의해 발생하는 작위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연극적 계약으로 발생하는 ‘작위적’인 것들에는 (‘창녀 찾기’에 대한 거부와 분노를 포함한) 풍부한 정서적 동일시도 포함됩니다. 그러한 정서적 현상들은 물론 ‘실제’와 ‘허구’의 구분을 망각하는 것들입니다. (연극을 볼 때 터지는 웃음이나 흐르는 눈물을 어찌 ‘가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창녀’를 찾으라거나, 미술 작품을 상상하라는 작위적 제스처에 의해 만들어지는 정서와 인지가 지극히 ‘실재적’이라는 역설이야말로 ‘연극적’이지 않은가요.
<사람 객관적>을 통해 형성되는 ‘실재적 모임’의 구성 조건들이 바로 이러한 ‘연극적’ 장치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 관계들이 하나의 ‘소사회’로서 보다 큰 조직을 반영하는 거울상이기 때문입니다. <공공의 공백>에서 몇 가지 키워드가 장소와 신체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결정하는 것도 결국 ‘연극’인 것처럼, 어쩌면 미술에 대한 성찰은 연극적 계약, 혹은 근원적으로 ‘연극’적일 수밖에 없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공공의 공백>이 ‘정의’나 ‘평화’, ‘윤리’, ‘영광’, ‘승리’와 같은 관념들로 인해 한 익명적 집단 내 구성원들간의 관계가 재구성되는 창의적이고도 기이한, 그리고 다분히 공포적인 상황을 상상했다면, <사람 객관적>에서 펼쳐지는 ‘미술’에 대한 성찰 역시 일련의 제한된 소통과 비소통의 역학 속에서 발생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분명 ‘공포’입니다.
감히 말하자면, 이 말은 곧 ‘매체에 대한 성찰’이라는 신성한 정체성으로 수행된 모더니즘의 궤적에, 일련의 지극히 연극적인 관계들이 유전자로서 개입되어 있음을 시사합니다. ‘연극적’으로 과장해서 말하자면, 미술의 역사는 곧 한 편의 ‘연극’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언어적 재현만으로 실존하지 않는 구체적인 대상을 상상해야 하는 관객의 상황이야말로 ‘연극’적입니다. 참여자의 인지와 행동을 결정하는 ‘작품 설명’의 수행적 기능, 그리고 그것이 허무는 작가의 창의적 권위마저도, ‘연극’으로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한 배우가 재기하는 창작의 윤리적 기반에 대한 고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가짜 연기’로서가 아닌, 사회적 관계의 조건이자 본질로서의 ‘연극’ 말입니다.
공교롭게도, 다섯 편의 ‘작품 설명’들 중 하나인 “윤리적 태도에 관한 소고” 는 바로 이런 상황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사람 객관적>이라는 ‘작품’을 만들게 된 ‘의도’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입니다.
“대본도 있는 퍼포먼스, 제가 직접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의 연습에 의해 진행되는 퍼포먼스, 무대가 아닌 평범한 곳에서 벌어지는 퍼포먼스, 사람들이 퍼포먼스를 수동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퍼포먼스, 결과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종결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열린 결말’의 퍼포먼스.”
얼핏 들으면, 전시장 안에서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이보다 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일 수 없습니다. 친절하면서도 지적인, ‘자기지시적’ 설명입니다. 그러나, 감히 추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설명’이 지시하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것은 거짓말쟁이 양치기 소년의 전과 때문에 그의 진실을 무조건 거짓으로 치부하려는 ‘작가주의적’ 해석만은 아닙니다. 이 설명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궁극적인 접점 없이 순환적인 언어의 굴레에 갇혀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기표와 기의를 합치할 수 없는 ‘자기지시’의 운명적 딜레마와 관계가 있습니다. 언어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격으로서 소통합니다. “윤리적 태도에 관한 소고“는 이를 말한 것입니다. 결국 김홍석 작품의 중요성은 -니콜라 부리오(Nicolas Baurriaud, 1965-)처럼- ‘진정한’ 사회적 관계의 창출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그 의문스런 ‘진정성’을 질문한 것에 있습니다.4 티노 세갈(Tino Sehgal, 1976-)처럼 ‘실재’적인 것을 연극적으로 구성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에 작동하는 ‘연극적’ 구조를 드러냄에 있습니다. 특히 ‘미술’을 포함하는 실재적인 소통들.
<사람 객관적>의 또 다른 배우는 더 친절하고 절절한 설명을 곁들입니다. “물을 미술화하려는 의지”로써, 이 배우는 “아주 평범하지만 사랑과 아픔을 아는 사람”을 만나 ‘눈물 작품’을 만들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의도를 충분히 설명한 후, 이제 ‘작품’을 보여주겠다고 말하더니 정말로 눈물을 흘립니다. 물론 이는 배우를 위해 ‘대본’에 ‘지문’으로 표시되어 있는 준비한 사건입니다. 배우의 눈물은 김홍석의 언어를 대행하는 대체물에 불과합니다. ‘사랑과 아픔을 아는 사람’ 따위란, (토끼 봉제 의상 속에 들어가 있는 탈북자 배우가 그러하듯) 언어로만 지시되는, 아니 언어로써 ‘생성’되는 유령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조건을 갖춘 관객이 나타나서 ‘진정한’ 정서적 동기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전제된 역할을 대행하는 복제일 뿐입니다. 언어의 봉합은 오직 ‘연극’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아니, 언어와 주체의 봉합을 실행하는 인술 행위를 우리는 ‘연극’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말은 결국 ‘실체’를 호명하는 직설이 아니라 유령을 호출하는 주술입니다. (여기에는 ‘유령’이 전제하는 ‘죽음’까지 함의됩니다. 작가의 죽음. 작품의 죽음. 관객의 죽음…)
미술은 유령들의 연극적 모임입니다. ‘작품’을 통한 감각적 교류는 결국 ‘연극’입니다. 미학적 진보나 정치적 변혁의 가능성이 활화산처럼 충만하게 응집된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연극’입니다.
이 말은 물론 직설이자 역설입니다. 다른 모든 작품 설명들이 그러하듯, 이 말 역시 진실이자 거짓입니다.
혹은, 이 말을 하나의 타협적인 ‘해피 엔딩’으로 각색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람 객관적>의 또 다른 배우가 제안하는 한 단서에 따라서 말입니다. 즉,
“미술가는 이러한 딜레마에 대해 개의치 않아 보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정의의 의자’는 돌 한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설사 우리가 꿈꾸는 모든 ‘실재’적 가능성들이 의미 없는 덩어리로 남게 된다 하더라도, 스스로에게 많은 격려의 박수를 보냅시다.
1. 속임수, 미끼라는 뜻. 영화에서는 서스펜스 장르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이 고안한 극적 장치를 말한다. 극의 초반부에 중요한 것처럼 등장했다가 사라져버리는 일종의 ‘헛다리 짚기’ 장치를 말한다.
2. Lehmann, Hans-thies, Jurs-Munby, Karen, Postdramatic Theatre, (London: Routledge, 2006).
3. Fried, Michael, “Art and Objecthood,” Artforum (June 1967), pp. 12-23.
4. Bourriaud, Nicolas, Relational Aesthetics, (Dijon: Les presses du réel, 2002).
Critic 2
THE FAKE AS MORE
김성원 (전시기획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이질적 담론들과 부딪히며, 서로 다른 문화의 주체들의 다원적 토론들과 전 지구적 차원에서 협상하는 21세기의 모더니티는 다언어적(polyglot)일 수밖에 없다. 서구식민주의라는 추상적 언어를 구가하며 ‘진보주의(progressism)’로 대변되는 20세기 모더니티 내러티브에 대척하는 알터모던(Alter Modern)은 모더니티를 번역하는 ‘모더니티번역가’처럼 나타난다.”1 오늘날 번역가로서 작가에게 번역, 차용, 카피는 창작의 중요한 도구일 수밖에 없다. 김홍석의 작품세계는 다름과 다양성의 사이에서 그것을 번역하는 데 있으며, 그는 차이나 다원성을 부각하기 위한 그 어떤 에그조티즘(exoticism)도 거부한다. 그가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닮아 가면서 다른 모습, 즉 ‘동화된 다름’이며 그것의 불분명한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있다. 이 에세이는 이 세계의 다양성과 차이, 진실과 거짓을 독특한 방식으로 번안하는 작가 김홍석의 작업세계에 관한 것이다. 그의 창작세계를 가동시키는 주요 콘셉트인 번역과 차용, 오리지널과 카피, 진짜와 가짜의 풍요로운 변주곡을 보여주며, 이것이 어떠한 의미를 창출하는가를 파악하고자 하는 데 있다.
Translate differences!
작가 김홍석의 머릿속에 떠도는 수많은 익살스럽고 황당한 생각들이 빚어 낸 <쿵 Thump!, 1999>, <2297년의 마술검 Magic Sword of MMCCXCVII, 1999>, <흔들구 Shake sphere, 2000> 이야기는 초현실과 판타지 소설 중간쯤에 위치한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며 적당히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불분명한 시공간, 하이퍼텍스트적 구성, 비논리적 전개가 스토리 라인을 혼동을 증폭시킨다. 무의미하고 유희적이며 비상식적 이야기에서 어떠한 구체적 줄거리나 메시지를 찾는다면 애당초 승산 없는 게임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야기들이 의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김홍석의 작업에서 텍스트는 그의 작품을 활성화하고 완성시킬 수 있는 ‘장치’와도 같다. 이러한 ‘장치’로서의 텍스트는 대부분 번역과 함께 가동된다. 그의 초기 텍스트인 <쿵! Thump!>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그리고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원래 한국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전시되는 지역에서의 소통을 위해 번역이 불가피했겠으나, 작가는 의도적으로 매 번 원본의 번역이 아닌 번역본의 연속적 번역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러한 ‘연속번역(serial translation)’을 통해서 원전과는 아주 다른 변형을 경험하게 된다.
오늘날 현대미술을 파악한다는 것은 작품의 ‘파장’은 ‘진동’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라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지진을 발생시키는 데 주력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여파를 생산해 내기 위한 다양한 ‘장치들’을 고안한다. 조나단 몽크(Jonathan Monk, 1969-)가 그의 작업 <Translation piece, 2002>에서 로버트 바리(Robert Barry, 1936-)의 <Telepathic piece, 1969>에 대한 다양한 묘사를 번역한 기록들을 보여 주었을 때, 조나단 몽크는 이미지나 언어로 가시화 될 수 없는 ‘예술혼’의 번역을 시도한 것이며 그 파장을 실험한 것이다. 김홍석의 <쿵! Thump!> 역시 주인공 스티브의 일화, 즉 사랑, 정액, 치약, 미끄러짐의 비선형적 사건의 파장은 이야기 내용의 전달에서 보다는 우리가 번역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영역에서 드러나게 된다. 김홍석의 이야기는 연속번역 과장에서 제목이 바뀌고, 이야기가 왜곡되며 저자는 모호해 진다. 원본을 전달하기 위해 번역을 하지만 이것은 수많은 오차와 함께 또 다른 변형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김홍석의 ‘연속번역’은 바로 오차와 변형에 관한 것이며, 이러한 반복가능성(reiterabilite)이 생성하는 차이는 소통의 장애요소로 작동하기 보다는 또 다른 의미를 창조하는 ‘창작’이 되는 것이다. 번역은 언제나 변질을 전제로 이러한 반복가능성에 스스로 노출되어 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jamin, 1892-1940)에 따르면, 성서는 각기 다른 나라의 말로 번역되고 반복되는 과정에서 차이가 발생하고 성서의 풍요로움은 바로 이 차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김홍석의 연속번역 작업(Serial translation)은 원전으로부터 잃어버린 것 혹은 진실을 찾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원전과의 ‘다름’을 즐긴다.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인간 추상 The Human Abstract, 2004』이라는 시 역시 먼저 한국어로 번역되고 그 이후 번역된 한국어에서 순차적으로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을 거친 작업이다. 이 연속번역의 마지막 단계는 원작 언어인 영어로 마감되었고, 최종본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닮기는 했으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라고 할 수는 없는 애매모호한 시 한 편을 탄생시켰다.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하고,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것’을 생산하는 김홍석의 연속번역에서 우리는 이것이 생성하는 의미의 미세한 진동을 경험하게 된다. 원전이 희석되고 미묘한 뉘앙스가 자리 잡으면서 형성되는 모호한 정체성의 탄생은 바로 김홍석이 자신의 작업의 중요한 지점 가운데 하나로 꼽는 ‘동화된 다름’이다. 연속번역은 다름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그 차이를 그저 단순히 기록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방식으로 그것의 다름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든다.
김홍석의 <G5, 2004>는 실제 G8 국가들 가운데서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의 국가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5명의 한국인(가수, 성악가, 일반인)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 영상작업이다. 선택된 5명의 한국인들은 5개국의 국가를 마치 그들의 애창곡을 한 곡조 뽑듯이 멋들어지게 부른다. 국가는 노래이전에 한 나라의 역사와 정체성을 상징하는 복합적인 기호다. 자국어로 번역된 다른 나라 국가를 부른다는 것은 이러한 기호가 그 문맥에서 일탈하는 것이다. 이 일탈은 야스퍼 존스(Jasper Johns, 1930-)의 <성조기 Flag, 1954-1955>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국가의 신성함, 권위, 역사 그리고 애국적 감정을 변조한다. 자국어로 번역된 다른 나라의 국가를 부르는 사람의 국적, 그것을 듣는 사람의 국적에 따라 또 이것을 어느 나라에서 부르는 가에 따라 번역된 ‘국가 부르기’의 진동은 달라진다. 김홍석의 <G5>는 특정 국가에 입력된 상징성을 희석시키는 동시에 글로벌 시대의 ‘국가’, ‘국적’,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이며, 이것의 갈등, 혼동, 다름을 어떻게 재정의할 수 있을까에 관한 질문이다. 번역이란 기호들이 시공간을 가로지르고, 이질적 영역으로 이동하며, 또 특정한, 규정된, 혹은 식별 가능한 영역에 속한 문화에 저항하는 것이다. 번역은 움직임이고 이동이며 일종의 회로와도 같다. 이러한 번역은 마치 위상학에서처럼 하나의 코드 시스템에서 두 번째 코드 시스템으로 형태를 이동하는 것과 같으며, 여기에서 변형은 동등하지만 언제나 다르다.
Appropriation & Customising
존재하는 혹은 이미 생산된 사물들을 사용하여 다른 형태로 전환하거나 다른 콘텍스트로 옮겨 놓는 ‘차용’의 컨셉은 ‘다름’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 또 작품의 ‘파장’을 실험하는 데 있어서 번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김홍석이 말하는 ‘동화된 다름’은 그의 작업에서 대부분 번역과 차용에 의해 가시화된다. 김홍석은 어느 날 길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한 건물의 쇼윈도우에 진열된 로버트 인디애나(Robert Indiana, 1928-)의 <LOVE, 1970> 작품을 보게 되었다. 그는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품이 서울의 한 건물의 쇼윈도라는 엉뚱한 콘텍스트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작가는 쇼윈도에서 본 <LOVE>를 조금 확대시키고 찌그러트려서 미술관 컨텍스트로 옮겨 놓는다. 물론, 로버트 인디애나의 조각을 찌그러트린다는 것은 미술에 대한 반달리즘(vandalism)은 아니다. 여기서 반달리즘을 말한다면 오히려 작품이 쇼윈도의 장식품으로 전락한 그 상황일 것이다. 김홍석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차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은 반드시 로버트 인디애나의 조각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작품의 본래 의미나 미술사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쇼윈도의 장식품으로 소비되고 있는 상황, 즉, 이미 차용된 것을 또 차용하며 김홍석은 한 작품의 운명과 소비방식에 대한 위트 있는 일격을 가한다. 이렇듯 차용은 동일한 작품이 또 다른 의미들을 생성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드러낸다.
오늘날 예술에서 차용은 작품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작가들은 미술사에 등장하는 모든 형태, 이미지, 행위의 레파토리 속을 파고들며, 그들이 원하는 형태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어디 미술사뿐인가 모든 예술 장르,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 오브제, 상황, 즉 ‘현실’ 그 자체가 오늘날 작가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풍요로운 작업 레파토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차용미술은 레파토리의 다양성과 선택의 임의성만을 주창하는 것은 아니다. 차용은 작품의 생산방식이기 때문에, 무엇을 차용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전환되는가가 그 작품의 결정적 역할을 한다. 프랑크 스텔라(Frank Stella, 1936-)의 작품을 형광등으로 다시 만든 베르트랑 라비에(Bertran Lavier, 1949-)의 <IFAFA IV, 2004>, 아르너 야콥센(Arne Jacobsen, 1902–1971)의 의자를 해체해서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 1898–1976)의 모빌로 전환한 마틴 보이스(Martin Boyce, 1969-)의 <Suspended Fall, 2005>, 찌그러진 자동차를 화장품 색조로 도장한 실비 플러리(Sylvie Fleury, 1961-)의 자동차 <Skin Crime 3(Givenchy 318), 1997> 등… 이러한 차용의 흥미로운 방식 가운데 하나로 바로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2을 꼽을 수 있는데, 커스터마이징은 본래 모터사이클 혹은 자동차 매니어들에게 익숙한 용어이며 자동차 본체 혹은 부속품을 변조하거나 독특하게 장식하여 ‘자기만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커스터마이징 프로세스는 오늘날 작가들의 차용방식과 그것의 미묘한 다름을 설명하는데 아주 유용하다. 김홍석의 찌그러진 <LOVE>나 실비 플러리의 찌그러진 자동차 모두 미술사의 거장인 로버트 인디애나와 세자르(César Baldaccini, 1921-1998)의 작품을 차용하고 그 형태를 왜곡했으나, 작품의 운명과 소비방식을 비평하는 김홍석의 찌그러진 <LOVE>는 미술사를 화장품 쇼핑하듯이 소비하며 생산된 실비 플러리의 핑크 빛 찌그러진 자동차의 문맥과는 아주 명백하게 다른 지점을 향하고 있다. 현대미술에서는 바로 비슷해 보이나 다른 것,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레파토리는 누구에게나 선택과 사용이 가능하다. 오늘날 ‘새로운 것은 요소가 아니라 배치’다. 우리가 차용미술에서 주목하는 것은 (동일한) 요소가 어떻게, 어디에 배치되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경험할 것 인가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비닐 쓰레기봉지들, 버려진 종이상자들, 방치된 나무토막들, 노숙인들… 모든 도시에서 발견될 수 있는 그리 낯설지 않은 상황들이다. 폐기되고 정리되어야 할 길거리의 너저분한 풍경이 김홍석에게는 ‘아름다운 일회성 구조물’로 다가온다. 제프 쿤스(Jeff Koons, 1955-)가 수퍼마켓의 진열대에 열광했다면, 김홍석은 길거리의 허접하고 후미진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진다. 김홍석은 이렇듯 방치된 비닐 쓰레기 봉지를 모아 브론즈로 캐스팅한다. 모든 콜렉터가 열광하는 제프 쿤스의 강아지와 토끼 형상으로…… 내노라하는 유명 콜렉터 거실에 모셔 놓은 제프 쿤스의 글래머러스한 토끼 조각과 서울의 한 길거리에 놓여 진 김홍석의 비닐 쓰레기봉지로 캐스팅된 제프 쿤스의 조각을 상상해 본다. 쓰레기 비닐봉지의 유쾌한 일탈이다. 길거리의 쓰레기 봉지와 놀이 공원의 싸구려 플라스틱 토끼 인형은 ‘차용’에 의해 이렇듯 각기 다른 콘텍스트에서 서로 조우하며 동시에 다른 이야기를 생산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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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석은 2006년 한 개인전에서 <READ>시리즈를 발표했다. 무엇의 읽기인가? 그것은 바로 작가 자신과 동시대 작가들,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하는 유명 작가들의 도록을 그대로 카피한 것이다. 사진으로 찍기도 하고 잘 그리는 사람을 시켜 그대로 베끼기도 한다. 카피란 아주 오래된 학습 방식이다. 우리는 늘 외우고 베끼고 반복하면서 지식을 습득하는데 익숙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친숙한 일상적 학습 방식이 창작의 영역에서는 불편한 방식이 되고 심지어는 범죄가 되기도 한다. 마우리치오 카틀란(Maurizio Cattlan, 1960-)의 조각을 베낀 김홍석의 회화는 엄밀히 따지자면 오리지널과 카피의 문제는 아니다. 김홍석은 카틀란의 작품 이미지를 카피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홍석은 제목에서 카피의 출처를 매우 친절하게 밝히는 방식을 통해서, 합법적(?)으로 뤽 튀이망스(Luc Tuymans, 1958-)의 회화와 카틀란의 조각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으로 재탄생시킨다. 이것은 어쩌면 카피의 혐의를 살짝 빗겨가며 작품을 생산하기 위한 얄팍한 수단이 아닐까? 아이디어가 없어 그냥 카탈로그 이미지를 찍은 것은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김홍석의 <READ>시리즈는 바로 이러한 편협한 혐의(?)와 현대미술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유용하다. 왜냐하면 이 작업은 바로 ‘카피의 혐의’에 대한 문제를 호출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 혐의는 베꼈는가 아닌가라는 단순무식한 잣대를 허무는 것은 물론이고, 이것보다 한 층 더 복합적이고 첨예한 문제들을 노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김홍석의 <READ> 시리즈의 쟁점은 카피는 오리지널을 위협하는가, 그리고 이미지의 카피와 그 저작권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카피는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소통 방식인가를 논하는 데 있다.
<READ>는 오리지널을 찍은 사진가의 ‘저작권’과 그것의 출판에 관여한 모든 ‘저작권자’들을 연루시킨다. 그는 <READ>를 통해서 카피의 카피, 즉 원전의 비공식적 전달 경로를 드러내며,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copyleft)의 위험하지만 각별한 관계 그리고 그것의 파동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주로 지적 소유권의 폐기를 위해 투쟁하는 카피레프트 운동은 인터넷 문화가 선호하는 도구이자 모델이지만, 후기 모던의 진통을 겪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움직임은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으며, 그 당위성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광명의 시기 이전에 모방(le plagiat)은 생각들을 전파하는 데 사용되었다. 한 영국 시인이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의 시를 가져다 번역하고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 가능했었다. 이러한 행위는 그 시대에 매우 당연한 것이었고 모방이라는 예술의 고전적 미학형태와 일치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의 진정한 가치는 이러한 고전미학을 강화하기보다는 모방 없이는 작품의 전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3 카피레프트 이슈는 모방이라는 오래된 학습방식의 현대적 버전이며, 이것이 오늘날 콘텍스트에서 어떻게 수용될 수 있으며, 그것의 긍정적/부정적 파장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엘레인 스터트번트(Elaine Sturtevant, 1930-)는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들, 자신에게 영향을 준 작가들의 작품을 세밀히 관찰하고 그것을 그대로 그린다. 그에게 있어서 카피는 학습과 습득의 방식이기도 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20세기 미술사를 소비하며 전파하는데 있다. 50년이 넘게 지속적으로 20세기 미술사의 거장들을 그대로 카피해 온 엘레인 스터트번트의 작품이 2000년대에 와서 세계 주요 미술관의 주목을 받고 재조명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미술사의 작가들 도록을 섭렵하며 관심 있는 작가들의 작품 이미지를 카피하는 김홍석의 <READ>시리즈는 카피 미술의 노익장 엘레인 스터트번트를 연장하는 듯하지만, 김홍석의 카피는 원본의 ‘정보교란’이란 또 다른 지점을 도출시킨다. 김홍석의 <READ-Francis Alÿs: Politics of Rehearsal, Steidl, Hammer Museum, 2006, p38, 39, 2008>는 프란시스 알리스(Francis Alÿs, 1959-)의 원작이 퍼포먼스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작품이 원래 회화일 것이라고 믿게 한다. 김홍석의 <READ> 시리즈에서 ‘카피’는 오늘날 원전과 그 맥락을 떠나 떠도는 수많은 이미지들의 왜곡된 정보들, 그것의 기상천외한 모험의 설득력 있는 반영이다. 뿐만 아니라 김홍석의 ‘카피’는 재현의 전통을 송두리째 소환하며, 이미지와 실재, 보는 것과 아는 것, 그 차이, 그리고 그것의 생산과 소비 그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Copy as more’
호르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는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Pierre Menard, Author of the Quixote, 1939』 에서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의 소설과 구두점까지 동일한 피에르 메나르(Pierre Menard, 1766-1844)의 텍스트, 하지만 두 저자를 나눠놓는 시대적 맥락의 차이(17세기의 스페인과 20세기의 프랑스)가 이렇듯 완벽하게 동일한 텍스트에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한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에 필적하고자 했던 창작열망에서 나온 메나르의 종착지는 결국 그것을 카피하는 데 그치고 말았으나 오늘날 이 메나르의 카피는 시대적 맥락을 반영하고 그 차이에서 오는 묘미와 해석의 풍요로움을 제안하게 되었다. <READ-Richard Prince, Untitled(Cowboy),1989>는 리차드 프린스(Richard Prince, 1949-)의 카우보이 <Untitled(Cowboy), 1989> 시리즈 가운데 한 사진을 그대로 다시 찍은 김홍석의 사진작품이다. 말보로 광고 이미지를 그대로 다시 찍은(re-photography) 리차드 프린스의 <Untitled(Cowboy)>는 80년 대 초 저작권 소송에 휘말리며 문제의 화제작으로 유명했던 작품이다. 그리고 리차드 프린스 덕분에 우리는 이제 예술작품에서 저작권 소송과 카피의 혐의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졌다. 이것을 모를리 없는 김홍석이 바로 그 문제의 다시 찍기 행위를 반복하며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바로 카피가 저자를, 즉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를 위협하는가에 있다. 우리는 카피가 원본을 위협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질서를 반영하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예술적 창작활동은 그것을 묘사하는 것에 있을 뿐이다. 작품은 주어진 텍스트에 끊임없이 주석을 다는 것과 같으며, 거기서 영감을 얻은 모든 카피는 결국에 오리리지널의 질서를 초월하며 다원적 반영처럼 정당화 된다. 달리 말하자면, 독창성의 문제는 제기되지 않으며, 작품은 그것의 카피에 의해 위협당하지 않는다”4 장 보드리아르(Jean Baudrillard, 1929-2007)의 이러한 입장은 카피의 정당화를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우리에게 카피 할 수 없는 것, 즉 시그니처(signature)의 오리지널리티를 역설적으로 부각시킨다. 작품과 시그니처, 이 불가분의 관계는 오늘날 색다른 모험을 하게 된다.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레디메이드(ready-made)’를 카피한다고 해서 뒤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레디메이드’의 카피와 변조 속에서 뒤샹의 독창성이 여전히 아니 오히려 20세기 초보다 더욱 더 독보적으로 존재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카피행위가 ‘카피할 수 없는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다니엘 뷰렝(Daniel Buren, 1938-)의 트레이드마크인 수직 띠를 카피할 수는 있지만, 그의 시그니처, 즉 인시튀(in situ) 목록에 없는 것은 그의 작품이 아니다. 이렇듯 오늘날 시그니처의 의미와 영역은 예전의 작품(물질)의 위상을 대신하며 오리지널리티의 주체를 더욱 더 부각시킨다. 카피의 정당화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가능하다. 카피가 정당화된다고 해서 독창성 그 자체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단 독창성의 개념이 바뀌었을 뿐이다. 김홍석의 <READ>시리즈는 보르헤스가 언급한 피에르 메나르의 ‘카피’의 풍요로움을 환기시키고, 카피레프트를 통한 전파와 유통에 관한 논쟁을 끌어 들이기도 하며, 나아가서는 오늘날 작품의 오리지널리티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호출하기 때문에 흥미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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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음과 친숙함을 절묘하게 교직하며 사실과 허구의 전방위적 교란을 시도하는 김홍석의 허구적 이야기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1974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2008)의 입회하에 마오 쩌둥(Mao Zedong, 1893-1976)과 덩 샤오핑(Deng Xiaoping, 1904-1997)이 당시 미국대통령이었던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 1913-1994)과 비밀회담을 했으며, 그 증거물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인 <마오는 닉슨을 만났다 Mao met Nixon, 2004>, 프랑스 혁명가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 1743-1793)가 암살된 후 그의 혈액이 채집되었고 그것을 죠르주 당통(Georges Danton, 1759-1794)이 보관했으며 현재 이것은 스털링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는 이야기인 <마라의 적(赤) Marat’s Red, 2004>, 물론 이 이야기들은 가짜다. 하지만 소위 킬링 타임용 믿거나 말거나 식의 무상 행위는 아니다. 김홍석은 일부러 역사를 오독하거나 의도적으로 진실을 왜곡 혹은 은폐하면서 역사의 허구성과 진실은 만들어 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그의 모든 이야기는 거짓을 더욱 더 믿음직하게 더욱 더 교묘하게 진실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진실과 거짓의 불편한 대면을 기획한다. 김홍석의 허구적 이야기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대문자 H’로 시작하는 역사에 대한 엉뚱하지만 기발한 ‘주석’들이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이 진실이 아니라면… 만일 우리가 듣고 보는 사실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러한 ‘가정’에서 출발한 김홍석의 이야기는 바로 진실을 거짓 속으로 몰아 놓고 그것을 교묘하게 작동시키며 한 층 더 거짓말 같은 게임을 벌이는 과정을 통해서 진실의 양면성을 가시화하기 때문에 흥미로운 것이다. 김홍석의 진짜 같은 가짜 이야기는 진짜와 가짜의 불편한 동거를 극대화 하며 우리의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진실이 만들어 진다는 것을 어떻게 거짓을 통해서 밝힐 것인가! 김홍석은 이것을 위해 매 번 논리적 궤변과 통쾌한 역설을 가동시킨다.
마닐라에서 출생한 마사히로 다카하시는 유미 다카하시로 성전환 수술을 했으나 수술이 잘 못되고 다리가 잘린 트랜스 섹슈얼이 되었으며,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가 겪은 이 세상의 모든 인권유린의 현장을 거침없이 적나라하게 쏟아낸다. (<Top of the World, 2007>) 김전일은 북한에서 일본으로 탈출하여 일본정부에 망명을 신청한 상태며 이러한 상황을 연기할 사람을 찾는다는 공고를 보고 시간당 오달러를 받고 하루 여덟 시간 동안 불법 노동을 하게 된다. (<This is Coyote, 2006>) 왜 작가는 아무도 믿지 않는 아니 믿기에는 너무도 가짜 같은 이러한 이야기를 지어 내는 걸까? 불법체류자, 이주노동자, 성고문 피해자, 트랜스 섹슈얼, 매춘부 등 김홍석 작업의 주인공들은 매 번 잔인하게 희화되며, 작가는 이들의 불운에 대한 배려 따위는 조금도 없어 보인다. 이들의 아픔, 이들이 겪는 부조리, 이들의 척박한 상황은 하나의 게임으로 또 작품을 성립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듯하다. 김홍석은 작품을 위해서 한국에 체류하는 동티모르 노동자를 저렴한 임금으로 고용하고,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의 불편한 진실을 인터뷰한다. (<The Talk, 2004>). 이 동티모르 외국인 노동자의 인터뷰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보나 그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너무 많은 장애가 따른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서면 짤막한 설명이 우리의 멍청한 행동을 비웃는다. 외국인은 진짜 외국인이 아니고, 인터뷰도 가짜며, 이 모든 상황에 우리가 속았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갤러리 안에 있는 창녀를 찾으면 현상금을 준다는 매우 불편하고 못된 게임을 감행한 <Post 1945, 2008>에서도 우리는 감쪽같이 속는다.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열심히 우리는 진짜 창녀를 찾는 데 혈안 된다. 하지만 결국 나중엔 이 창녀는 고용된 연극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물론 이러한 연출은 그리 기발한 아이디어는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사실을 모르고 모두 감쪽같이 속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김홍석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유도하고 있다.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자처하며 사회적 약자를 우롱했다는 혐의를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작가의 기발함이다.
외국인 노동자, 불법체류자, 성고문 피해자, 인권 유린을 당한 사람들, 매춘부 등의 사회적 소수자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회적 시스템, 즉 권력이 만들어 낸 소외 계층이다. 김홍석 작업에 등장하는 이러한 사회적 소수자는 우리에게 보다 확장되고 복합적인 차원의 권력, 위선, 폭력을 일삼는 피해자/가해자와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주선한다. 이 가해자/피해자는 ‘내 안에’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에서 잔인하게 들어나게 된다. 결국 김홍석이 소통하고자 하는 것은 강자의 권력과 약자의 애환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잔인한 현실세계 또 그렇게 만들고 있는 인간의 양면성인 것이다. 윤리와 비윤리, 옳고 그름, 이성과 비이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간의 양면성이 현실세계를 만들어 낸다. ‘정치적 올바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 같지만, 바로 이 ‘정치적 올바름’이 또 다른 ‘권력’이 되고, 겉으로는 강자도 약자도 없는 평등을 표방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것을 가장한 온갖 범죄가 난무하는 그런 현실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오늘날 “완전범죄는 아마도 (이러한) 현실세계를 제거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원죄적 환상인 것이다”5라는 보드리아르의 글귀가 떠오른다. 그렇다. 김홍석은 ‘완전범죄’를 꿈꾸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상 자체가 범죄적”이라는 보드리아르의 생각을 더욱 더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 마치 부조리에 부조리로 대응하던 고대 그리스의 ‘시니크(cynique)’처럼, 김홍석은 비윤리를 비윤리로 풀고, 스스로를 가해하며 궤변의 풍요로운 역설을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