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올해의 작가상 2012》
기혜경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국립현대미술관과 SBS 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기획한 “올해의 작가상 Korea Artist Prize”은 우리나라 작가들이 세계 미술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교두보를 제공하고자 마련된 제도이다. 한국 현대미술의 미래적 잠재성과 비전을 제시할 역량있는 작가를 후원하기 위해 마련된 이 제도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기존에 개최하던 《올해의 작가 Artist of the Year》전의 정신을 계승하여 작가 발굴과 지원에 역점을 두었으며, 동시대 미술계의 필요에 응답하는 현장 중심적이며 실질적인 미술수상 및 후원 제도이다.
《올해의 작가상 2012》를 위해 그간 운영위원회는 10인으로 구성된 미술계 추천단으로부터 작가 추천을 받았다. 이렇게 추천된 작가들은 5인의 국내․외 미술인으로 이루어진 심사위원단의 심사를 거쳐 그중 4팀이 ‘SBS문화재단 후원작가’로 선발되었다. 선발된 작가는 김홍석, 문경원·전준호(공동작업), 이수경, 임민욱이며, 이들 작가들은 2012년 8월 31일에서 11월 1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하는 《올해의 작가상 2012》전시에 참여하게 된다.
《올해의 작가상 2012》전시의 특성상 전시를 관통하는 특별한 주제는 없다. 단지 작가들은 그들이 평소 구상하고 있었으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펼쳐 보이지 못한 작품을 출품해 줄 것을 요청받았으며, 그 결과 전시는 개별적인 주제를 갖는 4개의 프로젝트 형태를 보여준다.
작가들의 평소 관심이 반영된 4개의 개인전이라고 해도 무방할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살아나가는 40대 작가들의 시대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작가들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각기 다른 촉수로 감지하여 작품으로 제시하고 있다. 때로 그것은 개인사의 문제로 보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예술의 가치나 존재방식에 대한 질문으로 다가오기도 하며, 또 어떤 경우 그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인식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공통된 시대의식을 발판으로 우리 시대의 단층을 들추어내는 4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
김홍석 : 사람 객관적 – 나쁜 해석
김홍석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정치적으로 올바른”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특정장르에 한정되지 않고 설치, 퍼포먼스, 조각, 영상 등을 통해 개념적인 작업을 보여주고 있는 김홍석 작품은 사회 속에서 유지되어야 할 공공성과 지켜져야 할 개인의 존엄성 및 우리가 일상 속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들 속에 내재하는 인식하지 못했던 폭력과 억압의 문제를 다룬다.
이러한 김홍석의 작품 주제는 어쩌면 사변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 그의 작품을 마주하는 관객이 김홍석의 작품에서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개념보다는 유머이다. 그의 작품은 말 그대로 피식하는 자기도 모르는 웃음을 자아내게 하거나, 키득거리며 작품을 즐기도록 관객을 붙들어 놓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작품의 매력은 작가가 벌이고 있는 행위에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관객을 동참하게 만든다. 작품을 즐기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모종의 동지의식은 그러나 작품을 감상하고 돌아서 나오는 순간 – 즉, 작품이 놓인 맥락에서 벗어나면서 – 반전된다.
이 상태를 무엇이라 부르건 그것은 관객이 작품 앞에서 지었던 웃음 속에 내재한 민망함이나 후련함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감정은 작가가 제시한 상황이 관객 자신과 동떨어진 것이 아닌 자신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거나 혹은 관객 스스로 주체가 되어 경험했던 것임에도 그 안에 도사린 문제를 의식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버린 스스로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즉, 자신이 작품을 보면서 느꼈던 묘한 동지적 웃음 뒤에 감추어져 깨닫지 못했던 억압과 폭력,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 또한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의 눈뜨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올해의 작가상 2012》를 위해 김홍석은 <사람 객관적-나쁜 해석>이라는 제목으로 세 개의 방을 마련하고 각각의 방을 ‘노동의 방’, ‘은유의 방’, ‘태도의 방’이라 이름 붙였다. 동일한 작품으로 이루어진 이 세 개의 방에 대해 작가는 노동, 은유, 태도라는 세 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작품과 관련된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제공한다. 이 이야기들은 퍼포머에 의한 전시가이드 (도슨트)의 형태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김홍석은 이 이야기들을 통해 미술 일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도전하고 동시대의 미술을 미술로 맥락화시키는 사회적 합의에 대해 재고할 기회를 제공한다. 작품이 창작되고, 전시되고, 소통되며, 유통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노동과 작품의 의의, 그리고 작품이 드러내는 입장과 태도 등 미술계에서 작품을 작품으로 인식하고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다양한 맥락을 일화를 통해 전달함으로써 미술계를 중심으로 얽힌 그물망과도 같은 사회, 경제, 문화 시스템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필 때, 세 개의 방에 놓인 전통적인 형태의 작품들은 작가가 구상하고 제시하는 작품의 컨셉과 관객을 연결하는 매개체일 뿐, 정작 김홍석 작품의 본질은 전시가이드 퍼포머에 의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퍼포머의 전시 가이드 행위는 김홍석의 작품을 완성하는 행위이자, 작품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전시가이드를 통해 제공되는 이야기는 작품을 좀더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있는 듯하지만, 오히려 작가는 그것을 이용하여 작품의 존재 형태를 전도시키며 현대미술계의 상황을 재고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문경원․전준호 : 공동의 진술 Voice of Metanoia – 두 개의 시선
문경원과 전준호는 “예술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문제에서 출발한 ‘News from Nowhere’를 지난 2년 반 동안 공동으로 진행해 왔다. 그것은 모든 것이 자본으로 환원되고 평가되는 시장경제체제에서 어쩔 수 없이 그 일원이 되어버린 자신들의 상황을 인식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요소들 간의 관계 속에서 상품으로 거래되기 이전의 예술작품 자체의 가치와 예술의 존재이유를 묻는 작업이었다.
‘News from Nowhere’는 ‘미술공예운동(Art & Craft Movement)’으로 유명한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가 19세기 말 제작한 동일 제목의 유토피아 소설에서 영감 받은 프로젝트이다. “예술이란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들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는 말로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하고 있는 모리스는 미래의 유토피아 사회를 통해 삶의 필요조건으로서의 예술, 즉 삶과 접맥된 예술품,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 체제를 그려내었다. 소설을 통해 모리스가 자신의 예술관을 드러내었다면, 그 작품에서 영감 받은 두 작가는 예술의 가치를 묻는 자신들의 질문에 대답을 제공하는 대신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만을 제공한다. 작가들은 그것을 사회 각 분야의 석학들이 바라보는 현재가치와 미래의 비전을 담은 인터뷰로 제시하거나, 자신들이 생각하는 예술에 대한 가치를 건축가, 디자이너, 테크니션과의 협업을 통해 구현하는 작업, 혹은 예술의 가치를 묻는 질문을 담은 영상작품의 형태로 제시한다.
‘News from Nowhere’의 후속작업으로 이번 전시에 출품한 <공동의 진술 Voice of Metanoia – 두 개의 시선>은 두 작가가 이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터득한 “예술은 인간 인식의 변화를 위한 기획”이라는 생각을 작품을 통해 제시한다.
전시장에 놓인 설치, 드로잉, 영상을 아우르는 통합 작업은 우리시대 예술의 형태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작가들은 시각언어보다는 개념 언어가 난무하는 우리시대에 예술이 유지해야할 범주를 유명 전시 포스터에서 기인한 색상과 설치작업을 통해 제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을 통해 문경원과 전준호는 예술의 본질과 역할을 규정하기 보다는 예술이 인간 인식의 지평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역사적 사실만을 담담히 제공한다.
영상 작업을 통해서는 예술의 역할과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미래에서 현재로 파견된 윌리엄 게스트(William Guest)의 행적을 담아낸다. 사건의 실마리를 쫓아가는 형사와도 같은 태도로 과업을 수행해 나가는 그는 미술관을 방문하는가 하면, 미라는 것이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환경 속에서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는 인간 욕구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행적을 쫓아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우리 시대가 규정한 미와 예술은 때론 우리를 수긍하게도 혹은 우리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기도 한다.
윌리엄 게스트의 시선과 발끝이 머무는 곳에서 만나는 미술의 현장은 있는 그대로 우리의 현실이자 자화상이다. 이런 점에서 문경원 ․ 전준호의 작품이 제공하는 예술에 대한 인식이 우리로 하여금 인류가 끝없이 추구해 온 예술에 대한 열정과 그 의미를 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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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 : 쌍둥이 성좌
이수경의 작품세계를 살피다 보면 개인사와 결합된 동시대 미술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1980년대 우리 미술계는 작품 속에 내용을 허락하지 않던 모더니즘과 그에 대항하여 당면한 사회 현실에 대한 발언이 주를 이루던 사회 참여적 민중미술로 양분된다. 순수와 참여로 대별되던 화단은 점차 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홍대 앞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한 젊은 세대 작가들에 의해 주류화단과는 다른 내용과 형식을 통해 자신들의 삶과 결합된 이야기를 전달하기 시작한다. 선배세대가 삶의 실질적 현장과 동떨어진 예술의 담론이나, 민족 혹은 국가 같은 거대서사를 다루었다면 이제 그들은 일상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수경의 초기 작업은 바로 ‘홍팡’이라 불리는 이들 작가들의 전위의식과 궤를 같이한다. 초기 이수경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대중문화에서 기원한 아이콘과, 동화같은 내러티브, 혹은 일반적인 고정관념을 드러내는 설문작업과 거기에 기반한 퍼포먼스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고답적으로 비춰지던 모더니즘과 예술을 프로파간다화 하였던 주류 화단에 대한 반항이자 신세대의 미술을 대변하는 것이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동시대 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초창기 일상에 기초한 개념적 실천작업을 주로 하던 이수경은 2000년대 중반에 이르면 <번역된 도자기>로 대변되는 자신의 개인사에 좀 더 천착한 작품을 제작한다. 도공에 의해 그 존재 의미를 부정당한 조각난 도자기 파편에서 출발하여 작가는 그것들을 맞추고 조립한 후 금박으로 마무리하여 새로운 형태를 부여한다. 버려지고 부정된 깨진 도자기 파편들을 새로운 형태를 갖춘 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은 버려진 것들 속에 내재하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작업이자 대상을 새로운 눈으로 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이것은 그 제목이 암시하듯 존재가치에 대한 다른 맥락으로의 ‘번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대상은 물론 자신까지도 치유해 왔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쌍둥이 성좌>는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에 위치한다. 좌우 대칭을 형성하는 전시장의 중앙에는 12각형의 좌대가 놓이고 그 위에는 천점의 <번역된 도자기>가 놓인다. 많음을 상징하는 “千”점의 번역된 도자기들은 마치 성단과도 같이 전시장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전 작업과는 달리 완성된 형태가 아닌 깨어진 조각에서부터 새로운 형태를 갖춘 번역된 도자기까지 다양한 단계의 개체가 모여 한 점의 작품을 형성한다. 이것은 작가가 이전까지 견지해 오던 작품제작 방식이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작가 자신도 이야기하듯 그것은 버려지고 깨어진 형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결과이며, 자신의 생각을 재료나 대상에 강요하지 않는 단계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이수경은 양손을 이용하여 좌우가 완벽하게 대칭되는 회화를 제작하는 자신의 작품제작 특질에 주목하여 “대칭”을 이번 전시의 주제로 선택하였다. 개인적인 작품 제작방식에서 출발한 이 개념은 개인적 특질을 넘어 좌우 대칭의 교방춤, 족자 작업 및 설치로 이어진다. 같으면서도 다른, 나이면서 내가 아닌,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인 대칭 이미지는 전시장을 메우며 깨진 상처나 파편화된 수많은 나와 저들 사이의 간극을 메운다. 이러한 작업은 내 속의 타인과 타인 속의 나를 발견하는 것이자 나와 타자의 같음을 발견하고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임민욱 : 절반의 가능성
임민욱의 작업에는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다. 거기에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배달부의 일상과 택시기사의 이야기 같은 너무도 평범해서 눈여겨 볼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일상이라는 외피를 덮고 있는 우리사회의 문제 – 개인과 삐걱거리는 공동체의 문제, 재개발의 문제, 소수자의 문제 등 – 에 촉수를 대고 있는 임민욱은 자신의 망에 걸려든 이야기들을 설치, 영상, 퍼포먼스의 형태로 관객 앞에 내려놓는다.
임민욱의 작품을 대하는 관객은 저 마다 각자의 처지에 따라 서로 다른 느낌들을 이야기한다. 그녀의 작품에서 혹자는 고단한 삶의 뒷그림자를 보았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힘들지만 따스한 인간의 온정과 체온을 느꼈다고 하는가 하면, 우리 사회에 감추어진 진실과 바로잡아야 할 편견과 불합리를 깨달았다고 하는 이도 있다. 이러한 관객의 반응은 임민욱의 작업방식에서 유래한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의 소설 주인공 바틀비가 되고자 하지만, 정작 자신은 주어진 삶의 무게를 지고 또 다시 내려올 산을 오르는 시지프스일 수 밖에 없음을 인식한 임민욱은 자신의 촉수에 걸려든 이야기를 확신에 차 제시하기 보다는 망설이고 뒤돌아보며 재차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작업 특성은 임민욱의 작업 층위를 다양하게 함은 물론 깊이 있는 삶의 통찰로 이어지게 한다.
임민욱은 이번 전시에 북한의 김정일 주석과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한 오열하는 주민들 모습에서 영감받아 제작한 <절반의 가능성>을 출품하였다. 작가는 오열하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국토 전체가 마치 커다란 연극무대가 된 것 같은 아이러니함을 느끼고 그러한 연극적 풍광을 조장하는 이데올로기와 미디어의 역할에 주목한다. 사실을 보도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미디어에 의해 아이러니 하게도 사실이 취사선택되고, 무엇이 실재하는가 보다는 무엇이 보도되는가가 사실의 판단기준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작가는 체제 유지를 위해 맹목과 정화의 가운데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는 미디어의 현장을 전복시켜 놓은 것이다.
한편, 끝없이 지속 될 것만 같은 연극적 상황 속에서도 오열하는 주민들의 모습에 내재하는 원시성을 발견한 작가는 이들 보통 사람들이 뉴스의 주체로 다시 서는 세상을 꿈꾼다. 편집이 없는 뉴스 그리고 보통사람이 주체가 되는 뉴스는 미디어가 다다르지 못할 이상향이다. 현실에서는 방송사고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이러한 상황을 작가는 전복된 뉴스의 현장과 관객에게 열려진 앵커석, 그리고 그곳에 앉는 사람을 위한 스크립트를 통해 제공한다.
변화의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는 전복된 뉴스의 현장을 임민욱은 작가 특유의 털, 머리카락, 새털과 같은 연약한 재료들과 적외선 열감지 카메라로 촬영한 유동적 이미지로 마무리 하고 있다. 이들 재료와 이미지는 촉각적 특성을 지닌 것들로 미디어의 탄생과 발달을 이끈 시각적 특성과는 대치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촉각적 특성은 다시금 오열하는 주민의 모습 속에 내재한 원시성과 보통사람이 주체가 되어 뉴스를 전달하는 이상적 미디어 현장과 어우러지면서 파괴된 뉴스의 현장에 우리가 망각하고 있던 이상향의 가능성을 일깨우고 있다.